입력2022.12.06 17:32 수정2022.12.07 00:13 지면A35
전기요금보다 등유가격 더 비싸
부실 방치하면 미래세대 부담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
즉석밥 가격이 쌀보다 싸져서 삼시 세끼 모두 즉석밥을 먹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현실에서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쌀보다 저렴한 즉석밥을 누구나 먹으려고 하겠지만, 쌀값에도 못 미치는 즉석밥은 팔면 팔수록 손해가 커져 누구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어 어리둥절하다. 전기가격과 등유가격의 역전 현상이 그것이다. 즉석밥이 쌀보다 저렴할 수 없듯이 전기도 발전 연료보다 싸게 팔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격 역전 현상이 지금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믿기 어려울 뿐이다.
현재 가정용 전기가격은 월평균 전기 사용량(307㎾h)을 기준으로 1㎾h에 121원 정도지만 등유가격은 12월 초 현재 L당 1430원 수준이다. 이를 에너지효율을 감안해 1000㎉당 가격으로 환산하면 각각 141원, 193원 정도로 추산된다. 동일한 열량을 얻는 데 전기가 등유값 대비 27%가량 저렴하다는 의미다. 농사용 전기를 기준으로 하면 그 차이가 76%로 확대돼 가격 역전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소죽을 전기로 끓이는 믿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다.
도대체 이런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기가격 결정권을 쥐고 있는 정부가 국민 부담 경감을 명분으로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으로 무작정 눌러놓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전기가격은 독일의 30%, 이웃 일본의 4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싸다.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약 93%에 이르는 우리나라가 이토록 전기를 값싸게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묘책이 궁금해질 뿐이다.
비밀은 소죽 한 통 끓여내는 대로 쌓여만 가는 한전 적자에 있다. 한전의 원가 회수율은 현재 7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기 100원어치를 팔 때마다 30원 이상씩 손해라는 말이다. 올 연말 예상되는 40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한전 적자가 그 결과다. 적자의 누적은 도산이다. 하지만 한전의 도산을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공기업은 죽지 않는다는 ‘공기업 불사(不死)’ 신화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적자는 그만큼 누군가로부터 빌려 왔다는 뜻이다. 빌린 돈은 반드시 벌어서 갚아야 한다. 벌어서 갚지 못하면 도산이다. 공기업 불사 신화는 아마도 공기업이 벌어서 갚지 못하면 국가가 대신 갚아줄 거라는 믿음의 결과일 것이다.
공기업 불사 신화를 한전에 대입하면, 한전의 빚은 한전이 벌어서 갚거나 국가가 대신 갚아야 한다. 이쯤 되면 전기로 소죽 끓이기는 제 발등 찍기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한전이 벌어서 갚으려면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할 것이고, 국가가 대신 갚으려면 세금을 인상해야 할 텐데, 전기요금도 세금도 모두 국민 주머니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 부담 경감을 위한 전기가격 인상 억제는 허울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전기요금 인상과 세금 인상 중 무엇이 정의로운가. 당연히 전기요금 인상이다. 전기를 아껴 쓰는 납세자가 전기를 마구 쓰는 전기 소비자를 대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납세자가 미래세대라면, 생색은 현세대가 내고 부담은 미래세대가 지는 꼴이 돼 더욱더 정의롭지 못하다.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는 저절로 해소되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경제 전체의 부담만 가중될 뿐이다. 벌써 한전의 적자는 채권시장의 ‘돈맥경화’를 일으키고 있다. 하루속히 전기요금을 원가주의에 입각해 현실화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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