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최근의 일이다. 내 제자인 고려대 정치학과 한배호 교수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20세기 초반에 미국은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국가와 정신의 놀라운 발전을 성취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많은 인재가 망명 또는 이주해 온 것이 원인이라는 설명이었다. 독일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망명해 온 정신계의 지도자들, 소련의 공산정권을 수용할 수 없어 아메리카로 국적을 옳긴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미국을 일으킨 유럽의 석학들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 미국에 갔을 때도 그랬다.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대학들은 유럽의 교수들을 받아들였고, 과학계·종교계의 지도자들도 다수 이주해 왔다. 시카고대 M 엘리아데 교수를 따라 유럽에서 유학 온 대학원생도 있었다. 하버드대 P 틸리히 교수도 내가 직접 수강한 석학이다. 또 프린스턴에는 아인슈타인이 있었다. 그들이 아메리카의 지성인과 협력해 키워 준 것이 현재의 미국이다.
자질과 품격 못 갖춘 사람들 많아
지도층 든든해야 선진국도 가능
창조적 지성인이 역사를 이끌어
교육도 평준화 논리서 벗어나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나는 규모는 작고 성격은 차이 있을지 모르나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해방과 더불어 북한이 공산 치하가 되면서 북한의 지성인과 지도층 인사가 대부분 탈출 남하했다. 종교계 지도자들, 기업인과 부유층 사람들, 자유를 지키려는 교육자, 반공세력 인사로 낙인 찍힌 사람들 모두 남하했다. 6·25를 치르면서 더 많은 탈북자가 대한민국의 품 안으로 피신해 왔다. 대한민국은 그들을 환대했다. 그들과 힘을 합쳐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와 반대로 사회주의 정권을 지지해 북으로 갔던 좌파 지식인 대부분은 북에서 버림을 받았거나 정치적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나 같은 세대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수없이 체험했고, 또 보아왔다. 현재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남북 간의 격차가 여실히 보여준다. 창조적 지성인의 역할이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증거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나라마다 인재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후진국일수록 더욱 그렇다. 한때 인도의 중산층 이상 자제들은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내가 20대 초반에 일본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 당시 우리는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사람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일본의 많은 젊은이는 유럽과 미국에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중국도 인재 육성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많은 학생을 보냈다.
유럽이 미국을 추월 못 하는 까닭
최근에는 국내 대학을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글로벌 대학 경쟁에서 앞서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세계 100대 대학, 국내 대학의 순위를 선정·발표하는 것도 같은 목적에서다. 일본은 이미 성공한 편이다. 중국도 국가적인 노력을 쏟고 있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노무현 정부 때 교육자문을 맡았던 한 원로교수의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중고교 평준화는 성공한 셈이다. 남은 과제는 국립대 평준화이고 사립대 평준화까지 성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교육계의 후진성이 경제나 정치보다 심각해 보였다.
그런 교육정책을 가진 일부 좌파계열이 교육계에 아직 남아 있다. 여건이 된다면 그 방향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 문제를 국내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소주성’ 정책과 병행하는 가치관이다. 후배 교수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가 있다. “150년 전에만 해도 미국문화가 유럽 정신계를 따라갈 수 없다고 인정했는데, 지금은 100년이 걸려도 영국·독일·프랑스가 미국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유럽 국가들이 대학 경쟁에서 미국에 뒤졌다는 사실을 보고 느낀 것이다. 지금 우리 대학정책은 어떻게 되고 있으며 대학들은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학경쟁에서 뒤지는 나라는 국가적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소중한 과제가 있다. 한 사회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인적 체제를 갖춰야 한다. 인구 비례에 걸맞은 지도층이 있어야 하고, 국민의 60% 정도는 중산층 내지 정신적 중견층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내가 지도층에 진입하거나 그 자격을 갖는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지도층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미국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수, 의사, 판검사와 변호사, 군의 대령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 등이 지도급에 속하며 또 될 수 있다고 자타가 인정한다.
사회윤리 함양과 선진국 질서
세계적으로 군 출신이 국민의 편견 없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는 미국이다. 대령에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방대학원 과정에는 군사 문제보다 사회윤리와 민주주의, 지도자의 자질 등이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또 내가 지도자 계층에 속한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법적 규정보다 선진국의 윤리관과 질서의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도자적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지도층의 정신과 가치관, 사회적 자질과 의무는 생각지 않는다. 정부 차관이 낮에 음주운전을 하고 기사를 폭행했다면 법보다도 질서 범죄로 사회가 용납할 수 없다. 공직자들이 거짓과 허위에 죄책감 없이 동참한다. 원전사태와 4대강 보 철거 문제에서 드러난 현상을 보면서 장관이나 국영기업체 책임자들까지도 지도자의 품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정치지도자들의 수준 이하의 발언이나 정책과 무관한 저급 발언에 접할 때는 상식도 갖추지 못하고 질서의식도 부족한 처사의 주인공 같아 보인다.
지도자 의식과 품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일류대를 나온 것과 상관이 없다. 국가고시가 그것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지도자의 자질과 인격을 갖추었다고 믿을 수 있는 지도층이 시급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지도자다운 인격과 자질·유능성을 겸비하는 지도층 형성이 아쉬운 현실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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