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2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1941 - 이탈리아의 지휘자 무티(Muti, Riccardo) 출생
무티 [Muti, Riccardo, 1941.7.28~ ]
이탈리아의 오페라 및 교향곡 지휘자.
무티는 어릴 때 나폴리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운 뒤 밀라노에 있는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부르노 베티넬리(작곡)와 안토니노 보토(지휘)의 제자로 5년간 공부했다. 1968년 이탈리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성공적으로 데뷔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유수한 악단들을 지휘했다. 1969년 피렌체의 마조 무지칼레 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73년 오토 클렘페러의 뒤를 이어 런던 뉴 필하모니아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1975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 1980년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1970년부터 오페라 지휘자로 정력적으로 활동했으며, 1972년 조아키노 로시니의 〈기욤 텔 Guillaume Tell〉을 피렌체에서 현대 최초로 전곡(全曲)을 공연한 이래 자코모 마이어베어와
가스파레 스폰티니의 오페라를 비롯해 베르디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연주했다.
또한 관현악 지휘자로서 20세기의 작품들을 많이 연주했다.
2) 2002 -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 4연패
암을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의 주인공,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이 프랑스 도로 일주 사이클대회, 투르 드 프랑스 4연패의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암스트롱은 28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에서 막을 내린 총연장 3천277.5㎞의 레이스를
82시간5분12초에 마감하며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암스트롱은 프랑스의 자크 앙케티, 벨기에의 에디 메르크스, 프랑스의 베르나 이널, 스페인의 미겔 인두라인에 이어 99년 투르 드 프랑스 역사상 5번째로 4연패를 달성한 주인공이 됐습니다. 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사이클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암스트롱은 96년 고환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투병 과정에 암이 머리까지 전이돼 뇌의 일부를
도려내는 등 대수술을 받고도 기적처럼 일어난 암스트롱은 수많은 암환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암스트롱은 다시 페달을 밟아야겠다는 의지로 재기해 불굴의 투지로 일어선 암스트롱은 99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컵을 높이 치켜드는 쾌거를 올렸고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암스트롱은 또 지난 99년 투르 드 프랑스 대회 직후 자신의 이름을 딴 암스트롱 암 연구재단을 설립해, 암환자들을 위한 봉사활동까지 펴고 있습니다.
이번 대회 우승을 앞두고 지난 주 27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암스트롱은 투르 드 프랑스 대회 4연패, 5연패, 혹은 사상 최초의 6연패보다는, 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우승한 사상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서른 한 살의 암스트롱은 2년간 더 선수로 활동한 후 은퇴해서 투르 드 프랑스 대회가 열리면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관람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7/a-2002-07-28-10-1.cfm
2002년 투르 드 프랑스= 울리히가 부상으로 불참한 대회. 중반 산악구간부터 종합선두로 나선 암스트롱은
호세바 벨로키(스페인)를 7분17초라는 큰 시간차로 따 돌리고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했다.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2005-07-25
http://inews.mk.co.kr/CMS/sports/all/real/pt/6799852_3101.php
3) 2004 -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크릭(Crick, Francis H. C.) 사망
크릭 [Crick, Francis (Harry Compton), 1916.6.8~2004.7.28]
DNA구조 밝힌 크릭박사 타계
왓슨과 함께 ‘이중나선구조’ 규명
물리·화학으로 생물학 설명 업적
인간 게놈프로젝트 출발점 되기도
제임스 왓슨과 함께 생명체의 유전정보가 담긴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프랜시스
크릭(88)이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숨졌다고 솔크생물학연구소가 발표했다.
연구소 쪽은 그가 결장암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고 밝혔다.
크릭은 1953년 왓슨과 함께 디엔에이 이중나선구조를 발표해 인간의 유전정보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 과정과 본질을 밝혔다. 이 과학적 발견은 생물의 유전구조를 해명했다는 사실 말고도 생명현상의 본질과 진화과정,
즉 생물학이 기본적으로 물리학과 화학으로 어떻게 설명될수 있는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과학사의 한 획을 긋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크릭과 그의 동료 왓슨은 디엔에이 구조의 발견으로 현대 생물학의 두 축, 진화론과 유전법칙의
설계자 다윈과 멘델만큼 오래 기억될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평가했다.
크릭은 1916년 6월8일 영국 노샘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애초 물리학도였다. 런던 유니버스티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자기기뢰, 음향기뢰 등 군사분야 연구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종전 뒤 생명활동의 물리적 기초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캐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몸담았다. 그는 이곳에서 35살의 늦깎이로 생물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애초 그는 단백질 구조에 관심을 보였으나, 나중에 디엔에이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앞서 1944년 학계에서는 디엔에이가 유전물질이라는 점이 입증됐으나 그 이후 유전정보가 어떻게 저장되고 전승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답보상태였다.
크릭이 당시 23살의 미국인 생물학자 왓슨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이때였다. 크릭은 1951년 캐번디시 연구소에
합류한 왓슨과 함께 디엔에이가 모든 생물현상의 열쇠라는 데 공감하고 공동연구에 들어갔다.
이들은 킹스 칼리지의 로절런드 프랭클린이 공개한 디엔에이 X선 회절사진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디엔에이가
이중 나선구조로 이뤄져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또 디엔에이 염기 중 아데닌과 티민의 분자수가 같고
구아닌과 시토신 분자수가 같다는 에르빈 샤르가프의 이론에서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이 짝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이끌어냈다.디엔에이 구조가 밝혀진 날 크릭은 평소 매일 점심을 먹던 구내식당 ‘이글’로 달려가
‘우리가 생명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외쳤다고 왓슨은 당시를 회고한 적이 있다.
이들은 이 공로로 196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들의 발견이 미친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디엔에이 구조 발견은 생명공학산업의 기초가 됐고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됐다. 생명공학은 연간 3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해 160여 가지의 약과 백신을 생산하고 있으며,
농업 부문에서는 지난해 18개국 농민 700만명이 유전자조작 작물을 재배했다.
그는 1977년 캐임브리지대에서 미국 솔크생물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후 특히 뇌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많은 논문을 내놓았다. 그는 지구 생명체가 다른 행성에서 옮겨져 왔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크릭은 동료 왓슨과 한때 불화를 겪기도 했다. 크릭은 왓슨이 1967년 ‘이중나선구조’이라는 책을 출판하려 하자,
당시 디엔에이 구조 발견 과정이 마치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이를 막으려고 했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한겨레 2004.07.30(금) 18:00
http://www.hani.co.kr/section-007000000/2004/07/007000000200407301800219.html
1) 1904 - 소련의 물리학자 체렌코프(Cherenkov, Pavel A.) 출생
체렌코프 [Cherenkov, Pavel Alekseyevich, 1904.7.28~1990.1.6]
1904년 7월 28일 노바야치글라에서 출생하였다. 보로네슈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과학아카데미의 레베데프물리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1959년 빛중간자[光中間子] 반응연구실장으로서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S.I.바빌로프 밑에서 연구 중 1934년 방사선을 조사(照射)한 실험병의 물에서 청색 빛이 방출되는 것을 발견하여, 이것이 광속(光速)을 넘는 고속(高速)의 하전입자로부터 복사되는 것이라 단정하여, ‘체렌코프효과’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이후의 핵물리학 연구에 중요한 연구장치인 체렌코프계수기를 만드는 바탕이 되어, 고(高)에너지물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체렌코프효과 발견과 해석의 업적으로 1958년 I.M.프랑크, I.Y.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2) 1903 - 미국, 프랑스 파나마운하회사로부터 파나마에 대한 권리를 4천만불에 매수
프랑스의 레셉스는 7년 만에 운하를 완공하겠다고 장담하고 동시에 1881년 양대양(兩大洋) 주식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지형 때문에 수평식 굴착계획을 변경하여 갑문식 운하를 파기로 하였으나 황열(黃熱) ·말라리아 등이 만연한 데다 자금이 달려 9년 만에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94년에 프랑스계 새 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이 회사는 그 당시 파나마 횡단철도를 완성하고 운하건설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던 미국에게 가능한한
비싸게 운하굴착권을 팔아넘기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1903년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사들이려던 계획은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그 후 파나마는 미국의 지원으로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건설공사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3) 1975 - OAU(아프리카 통일기구) 정상회담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즉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정상회담이 1975년 오늘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Kampala)에서 열렸다.OAU는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의 협력과 단결을 촉진하고 엄격한 비동맹주의 노선 하에서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정책과 계획을 통합하고 조율하기 위해 결성된 기구이다. 주최국 우간다의 이디 아민(Amin)
대통령은 개막연설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차별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아민 대통령은 흑인이
통치할 수 없는 국가를 무력으로 타도하자는 제의까지 하지만 참가국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다.
1) 1945 - 미군 B-25 폭격기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에 충돌(14명 사망, 26명 부상)
1945년 7월 28일 오전 9시 50분,
짙은 안개로 항로를 이탈한 미 공군 B-25 폭격기가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충돌,
13명의 사망자와 3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당시만해도 세계 최고층 빌딩였던 엠파이어 빌딩은 무게 12톤의 폭격기와 충돌했지만,
건물의 파손은 충돌지점인 78층과 79층 2개층에 구멍을 내는 정도의 피해만 입었으며,
파손된 사고부분도 3개월 이내에 모두 복구됐다.
충돌 비행기의 차체가 적었고 비행기 연료인 가솔린의 양이 적어
건물전체의 대형화재로 번지지 않아 대형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2) 1986 - 고르바초프, 블라디보스토크 선언
1986년 오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이른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한다.
그는 이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태평양 국가들과의 경제관계 증진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본격 진출하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태평양 연안국 회의를 제창하고 태평양 경제협력체에 참가할 의사를 표시했다.
또 몽고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소련군을 철수할 것을 시사하고 동아시아 핵무기감축안을 제시했다.
캄보디아내 베트콩에 대한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소련의 이런 전환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경제적 주도권을 깨뜨리고 소련 경제를 활성화할 실마리를
아시아에서 찾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3) 1914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8.11.11 종전)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프린치프가 사라예보를 순방 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가 주도한 동맹국과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이 주도한 연합국이 서로 맞서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191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었고
제정 러시아에서는 레닌에 의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으며,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떠올랐다
2004 -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 1000만대 돌파
2004년 7월 28일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가 1000만대를 돌파했다. 이로써 현대차는 1976년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 6대를 남미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한 지 28년 만에 자동차 수출 1000만대 기록을 달성했다.
금액으론 816억달러에 이르는 수치였다. 자동차 1000만대는 여의도 면적의 27배에 달하며, 자동차 1000만대를
일렬로 세우면 지구 둘레를 한번 돌고도 한반도를 두번 더 왕복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지난 67년 창업한 현대자동차가 이날 자동차 수출 1000만대의 금자탑을 쌓기까지는 눈물겨운 곡절이 많았다.
68년부터 포드자동차와 제휴해 조립 생산한 ‘코티나’가 잦은 고장을 일으키자 고(故) 정주영 회장은 주변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미쓰비시로부터 엔진 기술을 넘겨받고,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에게 자동차 디자인을 맡겨 76년 1월엔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를 자체 제작했다. 포니는 당시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대차는 그해 6월 ‘포니’ 6대를 남미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했다. 현대는 또 80년대 초반엔 캐나다에 포니 생산공장을 지었고,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프터 서비스망이 부족했던 현대차는 곧바로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유독 품질 경영을 강조하던 정몽구 회장의 취임(99년)과 함께 자동차 품질이 크게 개선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대차 소나타는 2004년 미국 자동차품질 조사기관인 JD파워로부터 중형차 시장에서 1위를 인정받았고, 시장 점유율도 0.9%에서 2.5%까지 끌어올렸다. 2004년 현재 현대차의 수출국은 지난 80년 38개국에서
193개국으로 늘었다.
1984 - 제23회 올림픽 경기대회 개막 (로스엔젤레스)
140개국 7800명의 선수가 출전한 제23회 LA올림픽이 1984년 7월 28일 개막됐다. `반소활동 때문에 선수단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소련 등의 동구권 14개국이 출전을 거부했지만 개막식은 9만3천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려하게
거행됐다.동구권 국가중 유일하게 출전한 루마니아 선수단은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고의 스타는 육상 100m, 200m, 400m, 멀리뛰기에서 4관왕인 칼 루이스였다. 대회조직위원회는 ABC방송국에 방영권을 2억3천9백만달러에 팔고 기업으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운영해 1억5천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은 금6, 은6, 동7개로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 공중전화카드
1973 - 한국의 프로 야구 선수 박찬호(朴贊浩) 출생
박찬호 [朴贊浩, 1973.7.28(음력 6.29)~ ]
박찬호(朴贊浩, 1973년 음력 6월 29일 ~ )는 대한민국 출신의 프로 야구 선수 이며, 현재 미국 메이저 리그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소속 선수(투수)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명도가 있는 운동 선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3. 6. 29 충남 공주~.
야구선수.
박찬호는 공주 중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전국규모 대회 우승 경험을 안고 공주중학교에 진학했고 공주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에 입학했다. 이 과정에서 박찬호는 청소년대표, 대학선발 국가대표로 뽑혀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1년 한·미·일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간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미래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 야구관계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에는 미국 버펄로에서 벌어진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다시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쿠바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메이저리그 스타우트 담당자들은 박찬호의 강속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4년 박찬호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LA 다저스 구단에 입단했다. 그는 메이저리그로 직행했지만 입단 직후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었고, 1996 시즌 메이저리그로 복귀해서 5승 5패의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박찬호는 1997시즌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14승 8패라는 팀내 최다승 기록으로 10승대 투수로 발돋움했다.
이후 1998년 15승 9패, 1999년 13승 11패를 기록했으며, 2000년에는 18승 10패 평균 자책 3.27, 삼진 217로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2001년에는 15승 11패의 성적을 올리고 자유계약선수가되었다.
2002년 박찬호는 6년 동안 5년 연속 13승 이상을 거둔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아, 5년 계약에 6,500만 달러의 엄청난
액수의 계약조건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이적 후 부상으로 성적이 저조했다.
그는 2005년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의 기록을 세웠으며, 같은 해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후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팀을 옮긴 후, 2007년 LA 다저스로 다시 돌아왔다.
1968 - 독일의 핵화학자 한(Otto Hahn) 사망
한 [Otto Hahn, 1879.3.8~1968.7.28]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에 화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과 마르부르크대학교·뮌헨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2년간 T.친케로부터 유기화학을 배웠다. 1904년 런던으로 건너가서 W.램지의 지도 아래 시작한 것이 방사화학 연구의 첫걸음이었으며, 그곳에서 토륨붕괴계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있던 E.러더퍼드의 실험실, 이어서 베를린대학 E.피셔의 연구실에서 라디오악티늄(radioactinium)(1906) 및 메소토륨(mesothorium) 등을 계속 발견하여 토륨붕괴계열을 완성하였다.
1913년에는 신설된 카이저빌헬름 화학연구소로 옮겼는데, 그 후 32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1918년에 새로운 원소 프로트악티늄 Pa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L.마이트너와 공동으로 연구한 성과였다. 또 그의 조수 E.슈트라스만과 함께 1939년에 발표한 우라늄핵분열의 연구는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는 1934년 이래 E.페르미 등에 의하여 시작된 연구를 계승한 것으로서, 우라늄원자에 중성자를 조사(照射)하였을 때의 핵반응을 조사한 것이었다. 나치스에 쫓겨 코펜하겐에 있던 마이트너는 1938년 말에 이 소식을 듣고, 자기 O.푸리치와 함께 우라늄핵분열을 이론적·실험적으로 확인하였는데, 그 결과로 거기서 약 2억 eV(전자볼트)의 에너지가 방출된다고 발표하였다(1939).
이는 당시 미국에 있던 N.H.D.보어에게 알려져 미국물리학회에 보고됨으로써(1939), 마침내 원자폭탄 제조계획으로
진전되었다.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1946~1960년에는 재건된 카이저빌헬름
연구소(1948년에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개칭)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9 - 미국 제35대 대통령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Kennedy, Jacqueline) 출생
재클린 케네디 [Kennedy, Jacqueline, 1929.7.28~1994.5.19]
재클린 리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Lee Bouvier Kennedy onassis, 1929년 7월 28일~
1994년 5월 19일)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부인이다.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
또는 재키 케네디(Jackie Kennedy)로 알려져 있다.
뉴욕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바사 대학교와 조지워싱턴 대학교, 프랑스의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워싱턴의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다 하원의원인 존 F. 케네디를 만나게 되었다.
존 F. 케네디는 195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들은 이듬해인 1953년 결혼하였다. 결혼 후 남편의 정치 활동을
내조하였으나, 남편의 병력과 여성 편력으로 관계가 원만하지는 못했다. 1960년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1년 취임하면서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다.
우아한 기품을 가진 젊은 퍼스트레이디로 미국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으나,
1963년 남편이 살해당하여 34세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그 후 1968년 그리스의 부호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이혼 소송 절차를 밟던 중 1975년 오나시스가 사망하여,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이후 사회에 진출해 출판 사업을 운영하고 모리스 템펄스먼과 결혼했다. 이후 뉴욕에서 저술 활동과 자선
사업을 하며 지내다가 1994년 낙마 사고 후 비호지킨 림프종에 걸려 암으로 사망하였다.
1922 - 스위스의 해양공학자, 물리학자 피카르(Piccard, Jacques) 출생
피카르 [Piccard, Jacques, 1922.7.28~2008.11.1]
스위스의 해양공학자·경제학자·물리학자.
그의 아버지 오귀스트 피카르를 도와 심해탐험에 사용할 심해탐구선을 제작했고 중저해를 탐험할 해저선인
그는 아버지가 브뤼셀대학교 교수였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1943년 스위스 로잔의 에콜 누벨 드 시스 로망을
졸업한 후 프랑스 제1군에서 복무하기 위해 1944~45년에 1년을 쉰 다음 제네바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46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개인교습을 하기 전 2년 동안 이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를 도와 심해탐구선을 설계했으며 1953년 아버지와 함께 트리에스테호를 타고 이탈리아의
폰차 섬 근처에서 3,099m까지 잠수했다. 1956년 그는 기금을 얻기 위해 미국으로 갔는데, 2년 후 미국해군이
트리에스테호를 구입하고 그를 고문으로 고용했다. 1960년 1월 23일 그와 미국해군 대위 D. 월시는 트리에스테호를
이용해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를 1만 912m까지 내려감으로써 새로운 잠수 깊이 기록을 남겼다.
1960년대초 아버지와 함께 일하면서 현창(舷窓)을 통한 해저 관측용으로 40명의 관광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메조스케이프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1966년 심해탐구선을 타고 미국해군을 위해 멕시코 만류에 대한 연구를 했다. 후기에는 뉴욕의 그루먼항공기공학회사(1966~71)를 비롯해 미국의 몇몇 심해연구 민간기구에서 자문과학자로 일했다.
1902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화가 나마트지라(Namatjira, Albert) 출생
나마트지라 [Namatjira, Albert, 1902.7.28~1959.8.8]
사막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중부지방을 그린 수채 풍경화로 유명하다. 아란다족인 나마트지라는 루터교 선교학교에
다녔고 1934~36년 백인 화가 렉스 배터비에게서 유럽의 수채화 기법을 배운 뒤, 핑크리버 원주민 선교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6년에 그의 첫 그림이 팔렸고 1938년에는 수채화 41점이 멜버른에서 전시되어 다 팔려 나갔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작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자주 전시회를 열어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고, 그의 그림 1점은 1954년 엘리자베스 2세에게 증정되기도 했다.
1957년 오스트레일리아 시민권을 얻었지만 원주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한 예로 그는 신분 때문에 앨리스스프링스 주거지역(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인의 집')으로 이사할 수가 없었다. 말년에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 아닌 원주민에게 술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2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석방된 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큰 선교기지인 허먼스버그에서 마지막 몇 달을 보내면서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01 - 미국의 가수, 배우 발리(Vallée, Rudy) 출생
1887 - 프랑스의 혁명적 미술가 뒤샹(Duchamp, Marcel) 출생
1879 - 스페인의 작가 미로(Miró, Gabriel) 출생
1821 - 페루,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18 - 프랑스의 수학자 몽주(Monge, Gaspard) 사망
1812 - 폴란드의 소설가, 비평가 크라셰프스키(Kraszewski, Jozef Ignacy) 출생
1794 -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 기공
1794 - 프랑스 대혁명기의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Maximilien) 처형
1769 - 영국의 장군 로(Lowe, Hudson) 출생
1750 - 독일의 작곡가 바흐(Bach, Johann Sebastian) 사망
1741 - 이탈리아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비발디(Vivaldi, Antonio)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