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2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애니메이션 영화 <심슨 가족 더 무비-The Simpsons Movie> 전세계에서 동시 개봉
《심슨 가족》(The Simpsons)은 만화가 맷 그레이닝이 처음으로 제작한 미국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이다.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의 생활상을 호머 심슨, 마지 심슨, 바트 심슨, 리사 심슨, 매기 심슨으로 구성된 심슨 가족을 통해 다소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풍자물이다. 현재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최대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슨 가족》은 작가인 맷이 성장해온 미국 오레건주 스프링필드를 배경으로 유머, 미국 전통의 문화,
전반적인 사회, 텔레비전 문화와 같은 다양한 부분을 풍자한다. 심슨 일가는 멧 그레이닝이 또다른 협력자인 제임스 L.
브룩스와 손을 잡기 전에 만들었다. 그레이닝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가족인 심슨 가족을 만들어내고 큰아들
바트를 제외하고 심슨 가족 구성원에 자신의 진짜 가족 구성원의 이름 등을 붙여주었다.
1987년 (4월 19일) FOX TV에서 방영한 버라이어티 쇼 《트레이시 울먼 쇼》에 삽입된 30초짜리 시리즈로 시작했다.
3번 방송된 뒤 반응이 좋자, 스케치 기법도 좋아지고 방송 분량도 30분으로 늘어났는데 이후 1992년 ~ 1993년
시즌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30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이 때 선정된 것은 FOX TV에서만든 프로그램
중 최초였다. 1989년12월 17일성탄절 특집 시사회를 가졌으며, 1990년1월 14일 에피소드 "Bart the Genius"를
시작으로 정규시리즈로 편성되어 방송되었다.
미국에서는 매주 한 편씩 방송하고 있는데, 현재 시즌 19가 2007년9월 23일부터 5월까지 420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하였고 9월에 방영할 시즌 20을 준비중이다. 이를 영화화한 《심슨 가족 더 무비》는 2007년7월 26일과 7월 27일에 전세계에서 동시 개봉하여 5억 262만 달러의 수익을 벌었다.
《심슨 가족》은 시리즈물로 데뷔한 이래 23개의 에미상, 24개의 애니상과 한 개의 피버디상을 비롯해 수십 개의 상을
받았다. 1999년12월 31일 발행된 타임지는 《심슨 가족》을 20세기 최고의 텔레비전 시리즈물로 선정했으며,
2000년1월 14일에는 할리우드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심슨 가족》은 미국 시트콤 사상, 미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장기간 방영되고 있으며 호머 심슨이 자주 쓰는 말인 “D'oh!”는 그 동안 《심슨 가족》이
부적절한 내용을 방송하였으면서도 인기에 힘입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되었다.
1) 2) 3)
1) 1945 - 포츠담선언 발표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으로,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표명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회담에 참가하였으나, 얄타회담 때의 약속에 따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8월 이 회담에
참가하고 이 선언문에 함께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여,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2) 2005 -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2005년 7월 26일 31번째 발사 때는 외부 연료탱크, 볼트 캐처, 바이포드 램프 히터, 날개 센서, 카메라와 추적기 등의
안전장치를 최첨단 장치로 바꿨다. 그럼에도 몇 차례 연료 센서 고장 등으로 발사가 연기된 끝에, 26일에야 발사되었다.
승무원 7명이 탑승하였는데, 국제우주정거장에 14일간 머무르면서 우주실험실의 조립을 위한 장비를 전달하고,
2008년 수명이 다하는 허블우주망원경의 성능을 점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원래는 12일 만에 지구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몸체의 단열 타일 사이를 메우는 '갭 필러'가 튀어나와 사상 처음으로
승무원들이 우주유영을 하면서 수리작업을 하느라 8월 9일에야 귀환하였다. 컬럼비아호 참사 후 처음으로 발사된
우주왕복선으로, 2010년 퇴역 예정으로 있다.
3) 1994 - 디즈니 사의 영화 <라이언 킹> 로스엔젤레스에서 개봉
애니메이션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라이온 킹》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차용하던 디즈니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창작하여 만든 첫작품이다. 원작이 우화나 문학작품이 아닌 최초의 창작물인 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의 잇따른 성공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1994년 32번째로 내놓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데스카 오사무의 《밀림의 왕자 레오》의 이야기는 물론 캐릭터까지 도용했다고 비난했다.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라이온 킹》은 동물 캐릭터가 주도하는 작품이다. 제작진은 동부 아프리카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풍경을 스케치했고, 스튜디오에 아예 사자를 데려다놓고 동작과 표정을 연구했다. 들소떼가 화면을 가득 메운 채 달리는 장면의 스펙터클을 위해서는 따로 컴퓨터그래픽팀이 2년여에 걸친 장기간 작업을 하기도 했다. 엘튼 존이 주제가를 부르고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았다.
《라이언 킹》은 사악한 숙부 스카에게 왕이었던 아버지도 죽고 아버지의 왕국도 빼앗긴 어린 사자 삼바의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프라이드 랜드의 왕으로 운명지어진 권리를 되찾아야 하는 어린 사자 삼바는 제왕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며 삶을 배운다.
아프리카 벌판을 배경으로 한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 묘사는 아름다운 영상의 극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마치 아프리카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웅대한 자연을 체험하게 한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자는 밝은 색으로 나쁜 사자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한다든지 한 것으로 인해 《알라딘》에 이어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라이언 킹》은 1994년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흥행실적에서 3억 4100만 달러를 벌어들여
2억 900만 달러의 《쉰들러 리스트》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1) 2)
1) 1956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된 혁명 4주년 기념연설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희생하에 구축된 것인데 외국의 부당한 지배하에 있어 이제까지 착취를 받아왔다. 운하를 국유화하면 이집트가 얻을 수익은 연간 1억달러에 달할 것이다. 따라서 외국에 원조를 얻지 않고도
애스원댐을 건설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이다`라는 강력한 어조로 연설했다.
군중은 나세르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지만 구미 각국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수에즈 운하 회사는 사실상 프랑스 소유였고 조차권도 아직 12년이나 남아 있었다.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이 신애스원댐 원조를 취소시킨 보복으로 국유화를
선언했고 영국과 미국은 28일과 31일에 각각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자국에 있는 이집트의 재산을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8월 9일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합동군 창설을 결정했다.
2) 1953 - 쿠바 혁명 발발 - 카스트로가 몬카다 병영을 습격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하는 반 바티스타 세력이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요새병영을 공격하면서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할 때까지의 6년간 싸움이 시작됐다. 모두 160명인 카스트로의 소규모 군대는 1000명의 수비대가 있는 산티아고 부근의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했고 혁명군은 도주했다. 혁명군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도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카스트로도 체포됐으나 5월, 76일 만에 석방됐다.
아바나로 돌아간 카스트로는 비폭력적인 선동만으로 행동을 자제했으나 결과에 실망, 추종자들을 이끌고 멕시코에서
다음 기회를 준비했다. 멕시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 함께 혁명을 준비했던 카스트로가 82명의 대원을 이끌고
다시 쿠바로 향한 때는 1956년 11월이었다. 이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 대부분의 대원들은 살해됐거나 체포됐다.
12명만이 안전지대에 도착했고 그 가운데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도 포함돼 있었다.
1) 2) 3)
1) 1894 - 영국의 작가 헉슬리(Huxley, Aldous) 출생
헉슬리 [Huxley, Aldous (Leonard), 1894.7.26~1963.11.22]
서리주 고달밍 출생. 이튼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1916년 상징파의 영향을 받은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발표하였고 그 뒤 1921년 재치있고 박식하며 염세적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관념소설 《크롬 옐로》를 발표하였으며 이 소설을 통하여 소설가가 될 결심을 하였다. 1923년 생존의 의의를 상실한 1920년대 지식인과 유한부인을 묘사한 작품 《광대춤》과 1928년 갖가지 유형의 1920년대 지식인들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연애대위법》을 발표하였다. 또한 반(反)유토피아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는 과학발달로 인하여 인간이 모두 인공수정으로 제조되는 미래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렸고 반자전적 소설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에서는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자 자신을 그렸다.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를 역설한 평론집 《목적과 수단(1937)》, 제3차세계대전을 가상한 가공소설 《원숭이와 본질(1948)》을 발표하였다. 근대과학의 맹목적 신뢰를 기초로 한 20세기의 허무한 윤리를 풍자하면서
새로운 모랄에 대한 확신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 그 밖에 소설 《하찮은 이야기(1925)》 《루당의 악마(1952)》
《천재와 여신(1955)》 등이 있다.
2) 1936 - 1차 대전 비미 능선 전투 캐나다 전쟁기념관 개막식
비미(Vimy)능선 전몰장병 추모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지역에 있는 비미(Vimy)능선!
1936년 오늘 영국 왕 에드워드 7세가 참석한 가운데 1차대전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제가 거행된다.
비미능선 전투는 캐나다 군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으로서는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다.
캐나다군은 1917년 부활절 다음날 새벽 독일군의 핵심 방어선인 비미 능선을 뚫는 데 성공하지만
투입된 병력 만5천 명 가운데 3,598명이 전사했다. YTN (7월 24일자)
"Merci au Canada"
1922년 프랑스는 비미 고지 일대를 캐나다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고지에 비미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 기념관은 올해 90주년을 맞이해 캐나다 측에서 174만 달러를 들여 개축한 뒤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9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캐나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드 빌팽 프랑스 총리는 이런 말로 연설을 맺었습니다. “Merci au Canada."
http://ublog.sbs.co.kr/nsBlog/goBlogList.action?cmt_view=Y&targetBlog=55994 /Google
3) 1976 - 미 항공우주국(NASA), 바이킹 1호가 보낸 화성표면 사진 공개
바이킹 1호는 1975년 8월 20일 미국 케이프케네디우주기지를 출발하였다. 무게 2.3t의 궤도선(軌道船)과 1.12t의
착륙선으로 되어 있었다. 바이킹 2호도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바이킹 탐사선을 싣고 발사한 로켓은 3단식
타이탄이었으며 전체의 길이가 48.8m, 무게는 640t이었다.
11개월 후인 1976년 7월 19일 약 8억 km의 긴 여행 끝에 화성궤도에 돌입하였고, 7월 20일 오전 5시 12분
7초(한국시간 오후 9시 12분 7초)에 바이킹 1호는 크리세 평원 착륙에 성공하였다. 곧 카메라가 작동하여 처음에는
흑백으로, 이어서 천연색으로 화성표면의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에 나타난 화성 풍경은 NASA과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돌이 뒹구는 돌 들판과 핑크색[紅色]의 화성하늘이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69048
- 제20차 국제음악교육협회 세계대회 기념, 1992.7.27 발행
1992 - 제20차 국제음악교육협회 세계대회 개최(~8.1)
영문명 : The 20th World Conference of the Int’l Society for Music Education
국문명 : 제 20차 국제음악교육협회 세계대회
회의기간 : 7.26~8.1
회의장소 : 롯데월드호텔
참가자수 : 2000 명
주관처 : 한국 음악교육협회
1962 - 한국-요르단, 국교수립
활발하였다.통상면에서는 2002년 대한수입 1억 9538만 달러, 대한수출 1146만 달러였다. 2003년 체류자는 183명이다.
북한은 수교 이후 문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관계가 긴밀한 편은 아니다.
1952 - 에바 페론(Perón, Eva) 사망
페론 [Perón, María Eva Duarte de, 1919.5.7~1952.7.26]
1952년 7월26일, 에바 페론이 죽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한 끝에 27세라는 세계 최연소 나이로 영부인
자리에까지 올랐던 드라마 같은 33년의 삶이었다.
에바 지지자들은 슬픔에 젖었다. 조문 행렬은 3km나 늘어섰고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전례없는 대규모였다.
유랑극단의 3류배우, 나이트클럽의 무명 댄서였던 그의 인생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4살이나 나이 차가 난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만나면서였다.
에바는 아름답고 총명하면서도 야심까지 가득한 여성이었다. 페론이 군부에 잡혔다가 풀려날 때도, 또 대통령에 당선될 때도 에바는 조연이 아니라 사실상의 주연이었다.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1946년)하자 에바는 아예 노동부 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정치 일선에 뛰어든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하층민에게는 병원·고아원·학교를 지어주었다.
그의 선심정책은 하층민으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반페론주의자들 눈에는 전형적인 선전·선동으로 비쳤다. 한쪽에서는 성녀였고 반대편에서는 악녀였다.
에바 사후, 아르헨티나는 우려한대로 서서히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곪아있던 환부도 터지기 시작했다. 3년 뒤 페론은
군부쿠데타로 망명길에 오른다.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 민중선동과 탄압 등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스페인어: 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년 5월 7일 ~ 1952년 7월 26일)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번째 부인이다. 애칭인 에비타(Evita)로 불린다. 1919년 아르헨티나의 시골에서 태어난 페론은 15살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연극, 라디오 그리고 영화배우로 데뷔한다. 1944년에 콜로넬 후안 페론을 만난 에바는 이듬해인 1945년에 결혼에 성공하고, 후안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으로 뽑힌 1946년부터는 그녀도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2번재 부인. 결혼 전 성은 Maria Eva Duarte. 별칭은 Evita. 후안 두아르테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사생아 중 1명이었던 에바(또는 에비타)는 연극 배우와 라디오 성우로서 평범한 연기생활을 한 뒤 1945년 상처하고 독신으로 있던 후안 페론 대령과 결혼했다. 그녀는 1945~46년에 걸친 남편의 대통령 선거유세에 가담하여 대중의 추종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대중을 ' 데스카미사도스'(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들)라고 불렀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어떠한 공직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에 대해 후한 임금인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노동조합측은 그 대가로 페론 대통령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사실상의 보건장관 및 노동장관으로 행동했다. 에바는 자선협회에 대한 전통적인 정부보조금을 폐지함으로써 전통적인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 단체 대신 국민복권과 그밖의 기금에 대한 실질적인 세금 삭감과 자발적인 노동조합 및 기업 헌금에 의해 후원을 받는 자신 소유의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다. 에바 페론 재단기금은 수천 개의 병원·학교·고아원·양로원, 기타 자선단체를 세우는 데 쓰여졌다. 에바는 여성의 참정권법 통과에 큰 기여를 했고, 1949년에는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전 학교에 의무적인 종교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1951년 에바는 자신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부통령지명을 얻어냈다. 그러나 군부는 그녀로 하여금 출마를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에바는 여전히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외경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녀를 추종하는 노동자계급에서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성녀로 추대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에바의 정적들은 페론주의의 국민적 상징인 그녀를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몰아내기 위해 페론 정권이 전복된 뒤 1955년에 에바의 시체를 훔쳐내어 16년간이나 이탈리아에 은닉하기도 했다. 1971년 군사정부는 페론주의자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에바의 유해를 마드리드에서 망명생활중이던 남편에게 인도했다. 후안 페론 대통령이 1974년 재임중 죽자, 페론 대통령의 뒤를 이은 이사벨 페론은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을 목적으로 에바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여 대통령궁 납골당에 안치된 페론 전 대통령 옆에 안치시켰다. 그러나 2년 후 페론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신(新)군사혁명위원회가 유해들을 대통령궁 납골당에서 제거해버렸다. 결국 그녀의 유해는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1944 - 이란의 국왕 레자 샤 팔라비(Reza Shah Pahlavi) 사망
레자 샤 팔라비 [Reza Shah Pahlavi, 1878.3.16~1944.7.26]
이란 국왕으로 팔레비왕조 창설자(재위 1925~1941).
본명 레자 칸(Reza Khan). 이란 ·카자흐군 장교 출신으로, 입헌혁명 이후 무력하여진 카자르왕조를 폐하고 군부독재를 기반으로 이란을 통일한 다음 강력한 지도에 의해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지방 혁명정권을 궤멸시킨 뒤 반식민지군(半植民地軍)을 통일적으로 재편성하고 재정 ·법제 ·교육의 정비에 착수하면서 공업을 일으켰다.
이란을 남북으로 지나는 철도를 부설한 것도 큰 사업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출현이라는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였다. 1941년 영국 ·소련의 압력으로 퇴위하고 황태자였던 팔레비에게 양위하였다.
1913 - 소설가 박계주(朴啓周) 출생
박계주 [朴啓周, 1913.7.26~1966.4.7]
호 서운(曙雲). 만주 간도(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6년에 상경, 1938년에 장편 《순애보(殉愛譜)》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당선되어 문명을 떨쳤다. 숭고하고 깨끗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당시 많은 청춘남녀를 울렸고 지금까지도 애독되고 있다.
주로 잡지사에 《인간제물(人間祭物)》 《화성녀(火星女)》 《향토(鄕土)》 《진리의 밤》 등을 발표했고 8·15광복 후에는 신문연재소설 《구원의 정화(情火)》 《대지의 성좌(星座)》 등을 발표했다. 많은 작품을 썼으나 주로 통속소설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해 문학사적으로는 별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1908 -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Allende, Salvador) 출생
아옌데 [Allende (Gossens), Salvador, 1908.7.26]~1973.9.11]
발파라이소에서 출생했다. 칠레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정치운동에 참가하여, 1933년 칠레사회당 창당에 간여, 1942∼1943년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7∼1945년 하원의원, 1939∼1942년 후생장관, 1945∼1970년 상원의원을
역임하였다.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좌익통일연합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국내 대기업의 국유화, 농지개혁의
촉진, 쿠바·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 등 혁신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남아메리카에서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에 성공하였으나, 1973년 9월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관저에서 살해되었다.
1887 - 자멘호프,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으로 《국제어》를 출간
1885 - 프랑스의 작가 모루아(Maurois, Andre) 출생
1875 -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Jung, Carl Gustav) 출생
1875 - 스페인의 시인, 극작가 마차도(Machado, Antonio) 출생
1856 - 아일랜드의 극작가 쇼(Shaw, George Bernard) 출생
1847 - 라이베리아 독립
1829 - 벨기에의 정치가 베르나르트(Beernaert, Auguste) 출생
1796 - 미국의 화가, 저술가 캐틀린(Catlin, George) 출생
1782 -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필드(Field, John)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