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 07.30
1) 1818 -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Brontë, Emily) 출생
브론테 [Brontë, Emily (Jane), 1818.7.30~1848.12.19]
영국 여류 소설가 겸 시인. 필명은 엘리스 벨(Ellis Bell)이다.
요크셔주의 손턴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며, C.브론테의 동생이고, A.브론테의 언니이다. 1820년 아버지가 요크셔의 한촌(寒村) 하워스로 전근하게 되어 에밀리 자매들은 그 황량한 벽지의 목사관(현재는 브론테박물관)에서 자랐다. 1821년 어머니가 죽자 이 자매들은 백모의 손에 양육되다가 1824년 에밀리와 샬럿은 위의 두 언니들과 함께 근처에서 목사의 딸들을 싼 비용으로 맡는 기숙학교에 맡겨졌으나 형편없는 식사로 영양실조와 결핵에 걸려 두 언니들이 이듬해에 사망하자, 놀란 부친은 에밀리와 샬럿을 집에 데려왔다. 이 악덕 기숙학교는 후에 샬럿이 소설 《제인 에어 Jane Eyre》(1847)에서 분노에 찬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1842년에 에밀리는 샬럿과 함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여학교에 유학하여 어학을 공부하고 같은 해에 귀가하였다.
1846년 언니 샬럿, 동생 앤과 셋이서 합저(合著) 시집 《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1846)을 자비출판했으나 반향이 없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죄수 The Prisoner》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노라 No Coward Soul is Mine》(1846) 등의 시편(詩篇)에 의하여 시인으로서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847년에 그녀의 유일한 소설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이 출판되었으나 이 역시 평이 좋지 못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폐결핵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서정적인 긴박한 심상(心像)과 독자적인 깊은 인생 해석으로 가득 차서 순수한 감동을 주는 걸작 《폭풍의 언덕》은 오늘날에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King Lear》, H.멜빌의 《백경(白鯨) Moby Dick, or the white whale》에 필적하는 명작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2) 1718 -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 펜(Penn, William) 사망
펜 [Penn, William, 1644.10.14~1718.7.30]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 런던 출생.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였다. 1681년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어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자 그 땅을 펜실베이니아(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라 명명하고,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신앙의 신천지로 만들었다. 이듬해 현지로 가서 총독과 양원제의회(兩院制議會)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그 스스로 총독이 되어 필라델피아를 건설, 인디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1684년 귀국하였다가, 169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의회와의 대립으로 고투, 1701년 실망 끝에 귀국한 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3) 1771 - 영국의 시인 그레이(Gray, Thomas) 사망
그레이[Gray, Thomas, 1716.12.26~1771.7.30]
영국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시인. 런던 출생. 이튼교(校)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배웠다. 1739년부터 2년 남짓 H.월폴(1717~1797)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 다녔으며, 귀국 후에는 케임브리지의 기숙사 안에서 은자(隱者)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정신활동의 폭은 넓었으며, 시 이외에 역사·식물·곤충·건축·음악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선천적인 우울한 기질로 인하여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였으며, 1757년에 계관시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758년에 케임브리지의 근대사 교수로 임명되었는데도 강의는 하지 않았다. 작품은 적지만, 친구인 R.웨스트가 죽은 무렵에 쓴 《봄의 노래》 《멀리 이튼교를 바라보는 노래 Ode on a Distant Prospect of Eton College》(1742) 등에서는 자연과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고독감과 무상감이 흐르고 있다.
몇 년의 개고로 다듬은 끝에 완성한 《시골 묘지에서 읊은 만가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1751)는, 명성도 재산도 얻지 못한 채 땅에 묻히는 서민들에 대한 동정을 애절한 음조로 노래한 걸작이며, 이 작품으로 l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핀다로스풍의 송가(頌歌) 《시가(詩歌)의 진보 The Progress of Poesy》와 《시선(詩仙) The Bard》(1757)에서는 풍부한 역사적 감각을 나타내었고, 또 북유럽의 고시(古詩)를 번역하여, 시대를 앞선 낭만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선례(先例)를 가진 표현을 존중하는 그의 고전주의적 시풍은 난해한 편에 속한다. 사후(死後)에 출판된 일기와 편지는 우수한 산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의 전형적인 학자시인의 문체와 생활을 전하고 있다.
1898 -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Bismarck, Otto von) 사망
비스마르크 [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1815.4.1~1898.7.30]
근대 독일의 초석을 다진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1898년 7월30일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그는 1860년대
중엽까지 약 40여개의크고 작은 국가들로 나눠져 있던 독일을 통일하고 1871년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독일제국 (1871∼1914)을 창건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쇠와 피를 통해 결정된다.". 그가 47살 때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면서 행한 취임연설의 한 대목이다. 그의 정치원리가 함축되어있는 이 연설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철혈재상이라 불렀다.
1815년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프로이센의 관리가 된 20대 이후 늘 프로이센의 통일에만 관심을 쏟았다.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 등을 거치며 국제정치의 안목을 넓힌 그는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을 거쳐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약 20여년간 독일제국의 재상자리를 지켰다. 재임기간동안 총리로서 군비확장을 주도하며 이웃 열강과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기도 한 그에게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정치적 행적은 항상 갈등과 대립의 소지를 안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열렬한 찬사와 지지, 다른 한편으로는 강한 혐오감과 거부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를 지지한 제국내 보수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은 그를 정치와 사회의 구질서를 보전하면서도 반 세기가 넘도록 지속된 민족통일의 열망을 실현시킨 철의 재상으로 숭상했다.
이들은 비스마르크를 탁월한 경륜을 지닌 현실 정치가로 묘사했고 추앙했다. 이념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입각하여
통일에 대한 국내외의 견제와 저항을 극복하고 신생 민족국가를 유럽열강의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그를 적대시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은 그를 보수 반동의 대변자이자 강압적인 철권 통치를 주저하지 않는 권력 정치가로 낙인찍었다. 이들은 비스마르크를 아돌프 히틀러와 더불어 19세기 이후 독일사의 파행과 굴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했다. 이들에 의하면 독일이 20세기에 접어들어 대외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대내적으로 나치즘이라는 파행적인 체제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면에는 비민주적인 권력구조와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전근대적인 가치관이라는 독일제국으로부터 유래하는 역사적 전통이 존재하고 있고, 배경에는 비스마르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1863 - 미국의 자동차왕 포드(Ford, Henry) 출생
포드 [Ford, Henry, 1863.7.30~1947.4.7]
포드는 자동차산업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미국의 실업가이다. 농촌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16세 때부터 기계제작소의 도제, 기계수리공 등을 거쳐 1888년부터 약 10년간 에디슨조명회사의 기술자로 일했다. 1903년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고, 1908년에는 이후 20년 가까이 전세계 차량 생산의 절반을 차지한 T형 포드를 선보였다.
1910년대초부터 부품의 표준화 및 일관작업공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타사의 2배로 하는 동시에 작업 시간을 줄여 생산비용을 낮추고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높였다. 자동차문화를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1920년대말부터는 완고한 경영방침으로 시장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어려움을 겪었다. 1936년 포드 재단을 설립해 자선활동에도 힘썼다.
"돈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업이란 한심한 사업이다."
- 헨리 포드
1511 -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작가 바사리(Vasari, Giorgio) 출생
바사리 [Vasari, Giorgio, 1511.7.30~1574.6.27]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며 건축가. 미술사가. 1511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피렌체로 가서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529년 로마를 방문해 라파엘로(Raffaello)와 그 밖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고대 로마의 유적을 소묘해 가면서 예술적 영감을 쌓아갔다.
그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당시 메디치가의 수장이었던 코시모 1세(Cosimo I)의 힘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수한 프레스코화들을 제작했고 베키오 궁 장식과 우피치 궁 설계 등의 대작들을 연달아 수행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군주의 비전을 구체화했으며 피렌체 전체의 취향을 변화시키고 조율하고 통합했다.
화가로서의 바사리는 화려하고 지적이지만 독창성은 부족한 보수적인 미술가였다. 그러나 건축가로서의 그는 달랐다. 그의 건축물은 간결하고 강건했다. 그는 회화, 조각, 목공, 석공 등 다양한 분야를 건축을 통하여 종합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우피치 궁은 피렌체의 각종 행정기구를 통합하는 건물로 코시모 1세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우피치 궁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중하고 위엄있는 건축물로 코시모 1세 체제를 웅장하게 대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사리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미술가 열전》이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 명의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르네상스’와 ‘고딕’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책에서다. 그는 시대 구분과 개념 정의, 고딕 양식, 비잔틴 양식, 매너리즘, 소묘 예술, 단축법 등의 용어들을 통하여 미술사라는 영역을 새로 개척하였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미술사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은 이 책을 통해 시대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코시모 1세가 권좌에서 물러나 사망한 몇 달 후 그러니까 1574년 6월 27일 주군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은 피렌체의 두오모에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볼 수 있으며 베키오 궁에도 수십 점의 작품이 있다. 바티칸에서도 그의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그 밖에 피렌체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인 바사리 회랑도
그의 작품이며 평생 동안 넘치는 에너지로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1816 - 노르웨이 정치가 스베르드루프(Sverdrup, Johan) 출생
스베르드루프 [Sverdrup, Johan, 1816.7.30~1892.2.17]
노르웨이 벤스트레당(좌파 또는 자유당) 최초의 내각에서 총리를 역임했다(1884~89). 그는 노르웨이 의회에서
내각책임제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뒤 총리로 임명되었다.
법률을 공부한 뒤 1851년 의회로 진출, 도시지역 자유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야당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1862~69년
하원의장, 1871~84년 의회 의장으로 일하다가 1884년에 총리가 되었다. 재임기간에 그는 1851년부터 준비해온 수많은 개혁안을 시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선거권 확대(1884)와 배심원제도 및 징병제도의 도입(1887)이었다. 1887년 이후에는 종교의 자유와 교회개혁 및 스웨덴-노르웨이 연방의 문제를 둘러싸고 벤스트레당의 급진 다수파와 사이가 나빠졌다. 교회개혁안은 부결되었고, 1888년 선거에서 절대다수의 지지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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