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2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65 - 미군기 월맹 미사일 기지 첫 폭격
Rolling Thunder 작전이 시작되고 4 개월 쯤 지난 1965년 7월 24일, 북 베트남 Hanoi 서북방 55 마일 지점에서
MIGCAP 임무를 수행하던 미 공군 15th TFW 소속 F-4C 팬텀 4 대에 EB-66C 전자전기로부터 긴급 교신이 날아옵니다. 이 항공기는 Jamming 도 하지만 주로 전자정보 수집(ELINT) 임무를 수행했는데, 교신 내용은 Fan Song 레이다 신호가 포착되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잠시 후 3 발의 SA-2 미사일이 편대를 향해 발사되었고 2 발은 편대 후방에서 폭발했지만 남은 한 발이 유효반경 범위에서 폭발하여 1대의 팬텀기가 추락하고 3 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요.
미 공군 역사상 U-2 와 같은 정찰기가 아닌 전투용 기체의 최초 손실로 기록됩니다.
Rolling Thunder 작전이 시작될 때만 해도 북베트남의 방공전력은 아주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약간의 Mig-15 와 Mig-17 그리고 레이더 혹은 육안으로 조준하는 구식 대공포가 전부였는데, 롤링 썬더 작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지요.
소련의 북베트남 원조가 대폭 증가합니다. SA-2 지대공 미사일과 MIG-21 을 지원하고 23mm 37mm 등, 많은 수의
각종 대공포를 북베트남으로 보냈지요. 소련의 기술자와 군사고문단은 기본적인 무기의 조작법 교육 외에 구체적인 활용 전술까지 교육시켰는데 대공포의 경우 화망을 구성하는 요령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도 일일이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1965년 4월 5일, 미공군 정찰기들이 Hanoi 와 Haiphong 근처에서 몇몇 공사현장을 촬영하고 돌아왔는데,
정보분석팀의 분석결과, 독특한 Star Formation 의 형태로 SA-2 SAM 사이트를 공사 중인 것으로 판명되었지요.
이들 사이트는 7월 초부터 작전태세에 들어갔고 1965년 말까지 60 개의 사이트가 추가로 건설되었습니다.
미 합참은 SA-2 사이트 건설 중(가동 전)에 폭격하자고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이를 거부합니다.
하노이 주변에만 있어서 그리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고, 또 소련 기술자들이 있을지 모르는데 폭격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전쟁이 세계 도처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고 합니다.
결국 SA-2 사이트 가동전 폭격은 실패하고 팬텀 격추 3일 후인 1965년 7월 27일 46 대의 F-105D Thunderchief 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습이 SAM 사이트에 대해 행해집니다. 이날부터 11월 27일까지 4개월간, 8 개의 SAM 사이트를 파괴하는데 성공하지만 3 대의 F-105 와 2대의 F-8, 2 대의 F-4, 1대의 A-4 를 상실하고 더 많은 기체들이 손상을 입게
되지요.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76&pn=1&num=63
1862 - 신소설 작가 이인직(李人稙) 출생
이인직 [李人稙, 1862.7.27~1916.11.1]
이인직은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 작가이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900년 대한제국 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했다. 1906년에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와 <만세보> 주필을 지냈다. 1907년에는 이완용의 도움으로 <대한신문>을 창간했다. 1910년 이완용의 심복으로서 한일합병이 체결되는 매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의 누>(1906)·<귀의 성>(1906~07)·<은세계>(1908) 등 신소설을 쓰는 한편, 1908년에는 원각사를 세워
한국 최초의 신극이라 할 <은세계>를 상연했다. 그의 작품들은 반봉건 계몽사상을 강력히 고취하기는 했으나,
봉건관료제에 대한 맹목적 부정과 근대문물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에서 결국 친일개화론으로 낙착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는 구소설에서 근대소설로 이어지는 전통적 연결을 확립하고 문장에서도
구어체와 묘사체를 도입하는 등 문학사에 큰 기여를 했다.
"일청전쟁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띠끌뿐이라."
- 이인직, <혈의 누>
2003 - 미국의 희극 배우 보브 호프(Hope, Bob) 사망
호프 [Hope, Bob, 1903.5.29~2003.7.27]
‘20세기 가장 위대한 연예인’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던 밥 호프가 2003년 7월 27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호프는 배우이자 코미디언, 가수, 쇼프로그램 진행자 등 만능 연예인이었다. 70여년간 75편의 영화와 475개의 TV 프로그램, 1000여개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특유의 재치와 웃음을 선사했다. ‘미스터 엔터테인먼트’, ‘코미디의 왕’, ‘백만불짜리 웃음’ 등으로 묘사되는 호프는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연예인이었으며,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엔터테이너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특히 한국 등 전 세계에 주둔하는 미군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애정을 보였는데, 1941년부터 50여년간 1000만km를 여행하며 미군 1000만명을 직접 만났다. 이런 공로를 기려 미 정부는 ‘밥 호프 미국 애국자상’을 제정했고,
팬들은 세대를 바꾸어 갈채를 보냈다.
1903년 영국 엘샘에서 7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난 그는 4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로 이민와
12세 때인 1915년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일찌감치 연예인 자질을 보였다. 영화배우로서 호프의 면모는 가수 빙 크로스비와 함께 출연한 ‘로드(road)’ 무비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싱가포르로 가는 길’, ‘모로코로 가는 길’, ‘리오로 가는 길’ 등 7편은 당시 인기 폭발의 시리즈 영화였다. 첫 영화 ‘1938년의 대방송’에서 셜리 로스와 함께
부른 노래는 오스카상을 탔다.그는 NBC 라디오 쇼를 직접 만들어 18년간 진행했다. 할리우드에서
구두쇠로 정평이 난 호프는 부동산 투자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으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사업에 기부하는 등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2003 - 미국 사이클선수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 5연패 달성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이 2003 프랑스 도로 일주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에서 5연패를 기록했습니다.
이 경기는 파리에서 27일 일찍 막을 내렸습니다. 올해 31살의 암스트롱을 비롯한 다른 147명의 참가자들은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펼쳐진 마지막 20구간을 완파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암스트롱보다 61초 늦은 독일의 얀 울리히가 2위를 차지했으며 그보다 4분 14초 뒤처진 카자흐스탄의 알렉산더 비노쿠로프가 3위에 입상했습니다. 2003 루르 드 프랑스는 암스트롱에게는 지금까지 참가했던 대회중 가장 힘든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텍사스 주 출신의 암스트롱은 앞서 26일 벌어진 제 19구간 경기에서 울리히보다
11초 앞선 기록을 세웠습니다. 2003-07-27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3-07/a-2003-07-27-8-1.cfm
1955 - 오스트리아 독립 (미.영.불.소 4개국과의 주권회복조약 발효)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합은 분할 점령되었으나 임시정부를 축으로 단일 행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데서
민족 내부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분단 고착화의 악순환을 피할 수 있었고 동시에 소련은 오스트리아의 공산화가 이 나라 국민의 투철한 자유 민주정신으로 불가능해진 이상 사방진영의 동구 팽창을 저지하는 완충지대로 묶어 두기로 했습니다 결국 1955년 5월 15일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오스트리아의 재건을 위한 조약은 4강에 의해 서명되었고 3백회를 상회하는 끈질긴 협상과 우여곡절 속에 한나라의 통일위업은 달성된 것 입니다. 본문 38조와 2개 부칙으로 구성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연합국은 오스트리아가 주권독립 민주국가로써 재건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습니다.
1955년 6월 1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모스크바 각서대로 영세 중립국임을 만장일치로 선포하였고 이어 10월 25일
4강의 분할 점령군들이 모두 철수하여 오스트리아는 완전통합과 완전 주권을 회복하였습니다.
http://www.jspt.go.kr/information_01.html
오스트리아 연혁
1955.12.14 - 유엔에 가입
1955.10.26 - 중립국 선언(영구중립을 규정한 제2공화국헌법 선포)
1955.07.27 - 동 조약 발효
1955.05.15 - 오스트리아 주권회복조약 조인
1882 - 영국의 항공기 설계, 제작자 디 해빌런드(De Havilland, Geoffrey) 출생
디 해빌런드 [De Havilland, Geoffrey, 1882.7.27~1965.5.21]
영국의 항공기 설계·제작자, 장거리 제트 비행의 선구자.
그는 뱀파이어와 베넘 제트 전투기를 생산하여 처음으로 제트 추진 항공기를 만든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10년 50마력의 기관을 장착한 비행기를 만들어 띄웠다. 그뒤 육군 기구(氣球)제작소에 들어갔고,
견인식 복엽기의 영국 시험제작(B.E.) 시리즈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항공기제작회사에서
수석 설계자 및 시험조종사로 일했으며, 여러 종류의 우수한 전투기와 경폭격기들을 생산했다.
1920년 9월 디해빌런드항공기회사를 설립했는데, 여기서 제작한 2인승 경비행기 모스(Moth)로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영국에 비행 클럽 운동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쌍발 기관을 갖춘 베니어판 구조의 다목적 항공기인 모스키토가 회사의 이름을 빛냈다.
전쟁 뒤에 그는 코멧(Comet) 여객기와 D. H. '고스트' 제트 기관을 개발했다. 1944년 그는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62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1974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조사방해 관련 탄핵결의안 1항 채택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5년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에서 시작하였다. 그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닉슨은 각종 정치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2년간 대통령 직에 머물러 있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smoking gun; '확증'을 의미함)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그의 마지막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서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일지
1974.09.08 -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닉선 전 대통령 사면
1974.08.09 - 닉슨 대통령 사임
1974.07.30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하원 소환명령 거부 관련 탄핵결의안 3항 채택
1974.07.29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권력 오용 및 취임선서 위반 관련 탄핵결의안 2항 채택
1974.07.27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조사방해 관련 탄핵결의안 1항 채택
1854 - 일본의 정치가, 재정가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출생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淸, 1854.7.27~1936.2.26]
1867~69년 센다이 한[仙台藩] 유학생으로서 미국에 가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그뒤 초대 특허국장을 거쳐 1892년 일본은행에 들어가 1911년 총재가 되었다. 1913년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의 대장상(大藏相)이 되면서 정우회(政友會)에 입당했다.
1921년 암살된 하라 다카시[原敬]의 뒤를 이어 총리 겸 대장상이 되었다. 1927년 금융공황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의 대장상이 되어 3주간의 지불유예긴급칙령(모라토리엄)을 공포하는 등
제반조치를 취하여 위기를 극복한 뒤 42일 만에 사임했다.
그뒤 이누카이[犬養]·사이토[齊藤]·오카다[岡田] 내각의 대장상으로서 재정문제 처리에 실력을 발휘해 재계의
수호신적 존재가 되었으나, 군부와 충돌하여 2·26사건 때 암살당했다.
저서로 〈다카하시 고레키요 자전 高橋是淸自傳〉(1936)이 있다.
1867 - 스페인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그라나도스(Granados, Enrique) 출생
그라나도스 [Granados, Enrique, 1867.7.27~1916.3.24]
레리다 출생. 바르셀로나에서 페드렐에게 작곡을 배우고, 그 후 파리에서 베리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22세 때
에스파냐에 돌아와 피아노의 명연주자로 주목받았으며, 프랑스에서도 많은 연주를 하였다.
작품에는 오페라곡과 오케스트라곡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피아노곡이며, 에스파냐의 민속무용을 많이 도입하는 등 근대 에스파냐음악에 민족정신을 담았다.
화가 고야의 작품에서 발상을 얻은 피아노모음곡 《고예스카스 Goyescas》 (191l), 피아노를 위한 무곡집(舞曲集)
《스페인무곡》 등이 대표작이며, 《고예스카스》는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2009 - 미국 '한국 전쟁 참전용사 휴전 기념일' 지정
매년 7월 27일 성조기 조기 게양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4일 발표한 대통령 선언에서 7월 27일을 '한국 전쟁 참전용사 휴전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미 상원은 현지시각 지난 24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한국전쟁 휴전일인 7월 27일에 조기를 게양하는
법안을 하원에 이어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가결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찰스 랭글 민주당 의원 등 하원의원 61명이 발의한 이 법안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함에 따라
한국전 휴전일은 미국 현충일에 이어 미국에서 조기를 다는 두번째 기념일이 됐습니다.
YTN 2009-07-27 06:27
http://www.ytn.co.kr/_ln/0104_200907270627474277
1990 - 벨라루스,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벨라루스 공화국-역사
6세기부터 슬라브족이 벨라루스 땅에 들어오면서 키예프 공국에 속하였다. 1240년 몽골의 침략으로
벨라루스 땅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폴란드 분할 때인 18세기 때 벨라루스 땅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이 벨라루스 땅을 차지하게 된 후인 1918년 3월 25일 '벨라루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는 실질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1919년 1월 5일 붉은 군대가 민스크에 들어오면서 해체되었다. 벨라루스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략하면서 벨라루스 땅은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벨라루스 공화국'의
이름을 가진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가 세워졌다. 벨라루스인들의 게릴라식 저항은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벨라루스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독일의 패전 후 벨라루스는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벨라루스는 1990년 7월 27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91년 12월 벨라루스는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초대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센카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97년부터 러시아와 국가 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2001년에 루카셴카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4년에 루카셴카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다. 2007년에 러시아와 에너지 분쟁이 있었다. 2008년 9월 28일에 벨라루스는 총선을 시작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공식행사에서 4살된 자신의
막내아들을 자주 데려가는 것을 보고 일부에선 그가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줄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1985 - 63빌딩 개관
동양최고를 자랑하는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1985년 7월 27일 개관돼 일반인에게 첫 선을 보였다. 아침부터 몰려든
관람객들로 연건평 5만2백평에 지하3층 지상60층 건물은 하루종일 인파로 북적거렸다. 관람객은 모두 3만여명이었다.
관람객의 인기품목 1위는 최고층에 자리한 전망대로 동시 수용인원이 1천2백여명이나 됐지만 관람 희망자가 넘쳐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하 1,2층의 대형수족관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총규모 1천32평인 수족관은 모두 54개의 전시수조로 구성됐으며 이 수조사이로 나있는 관람통로길이도 2백50m에 이르렀으나 발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별관 지하1층에 있는 입체영화관은 특히 어린이에게 인기가 높았다. 관람객들은 가로 25m, 세로18m로 일반영화관보다 3배나 되는 초대형 화면을 보고 신기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개관기념으로
처음 상영한 영화는 미국영화 `창공을 날아라`였다.
1980 - 전 이란 국왕 팔레비(Pahlavi, Mohammad Riza Shah) 사망
팔레비 [Pahlavi, Mohammad Riza Shah, 1919.10.26~1980.7.27]
팔레비 전 이란국왕이 1980년 7월 27일 사망했다. 1941년 아버지의 퇴위로 이란 팔레비왕조 제2대 황제에 즉위했으나
영국, 소련의 점령 및 황제제도 반대세력의 대두등으로 황제권의 기반은 약체였다. 이에 1957년 사바크(비밀경찰)를
설치하고, 미국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 황제권을 확립했으며, 그 해 팔레비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석유수출을 배경으로 농지개혁, 여성참정권을 골자로 한 근대화정책 '백색혁명'을 단행했고, 1973년에는
제5개년계획을 실시했으나 1975년부터 석유, 중공업 편중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해 1978년에는 반정부 데모를 초래했다. 결국 1979년 1월 이집트로 망명한 뒤 복권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미국,
파나마를 전전하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1965 - 이승만 초대 대통령 유해 국립묘지에 안장 (19일 사망, 23일 환국)
朴正熙는 평소 李承晩박사를 존경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박사는 귀국할 수 없었다. 이정권 末期의 失政과
4•19의 여파가 혁명 정부에게 큰 짐이 되었고 무엇보다 국내 언론이 이를 허용하지 안 했다.1965년 7월 23일 박대통령은 李박사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공항에 나가 영접했으며 가족들의 반대로 가족장이 되었으나
國民葬수준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지원했다. 아래 弔辭는 1965년7월27일 국립묘지에서 安葬式을 거행할 당시 丁一權
국무총리가 代讀한 것으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주검을 앞에 놓고 그의 뒤를 이어 조국 근대화를 이뤄내려는 젊은
대통령의 너무도 솔직하고 정직한 한 인간의 重厚(중후)한 告別辭이기도 하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증오와 저주에
조급한, 전 대통령을 부관참시하려는 협량(狹量)과 전혀 다른 偉人들을 만나 본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두 주역은 어쨌던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우리의 비극만큼이다. 그들을 결별(訣別)하지 못하고,
부정하고 저주하며 부관참시하려는 자들과 함께 그들의 역사적 불운은 현재진행형이다.
http://blog.empas.com/times21ceo/read.html?a=7284049
1963 - 박정희 의장, 민정(民政) 이양 일정 발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7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10월 중순, 국회의원선거를 11월 하순에 실시할 것이며
군정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에 소집해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라는 총선거실시계획을 발표했다.
박의장의 민정 이양 일정 발표에 대해 재야 각 당은 "이번만은 다시 번의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전제를 붙여 환영했다.
박의장이 밝힌 민정 이양 일정은 다음과 같다.
1.공고중인 개정헌법의 개정안의 철회를 위한 조치를 즉시 취한다 2.대통령선거는 1963년 10월 중순경에 실시하고 국회의원선거는 11월 하순경에 실시한다 3.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해 정부는 선거관계법의 정비 및 그 운용에 만전을 기한다
4.총선거 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경에 소집되며 동시에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다.
1961 - 한국-니제르 국교 수립
니제르는 1961년 한국과 수교하고 1985년 1월 상주공관이 개설되었으며, 1974년 북한과 수교하였으나
1991년 공관을 철수하였다. 1968년 의료기술 협력협정, 1969년 무역협정, 1988년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 펑더화이[彭德懷] - 현재의 판문점(자유의 집)
1953 - 6·25전쟁 휴전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6·25전쟁은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국군의 이른바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국제연합(UN)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1951년 1월말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이후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1951년 6월 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Y. A.
말리크가 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38˚선을 경계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제의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포로 교환 문제, 양측의 경계선 문제 등에 이견을 보이다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군 총사령관과 북한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의 실시를 감독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정전협정 [停戰協定, Armistice Agreement]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난 뒤, 계속되는 전쟁에 부담을 느낀 국제연합군과 공산군은 비밀 접촉을 거쳐 1951년 7월 10일 개성(開城)에서 첫 정전회담을 열었다.
이어 1952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이 시작되어 같은 해 10월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으나 전쟁 포로 문제 등으로
인해 9개월 간 회담은 중지되었다. 그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金日成),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협정이
체결되고, 이로써 6·25전쟁도 정지되었다.
협정은 영문·한글·한문으로 작성되었고, 내용은 서언과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언은 협정의 체결 목적·성격·적용, 1조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2조는 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3조는 전쟁 포로에 관한 조치, 4조는 쌍방관계 정부들에 대한 건의, 5조는 부칙, 부록은 중립국 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남북은 적대행위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지만 전쟁상태는 계속되는 국지적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또 국제연합군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되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되고,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이후 2003년 현재 체결된 지 50년이 되도록 이 협정 체제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국제 관례상 정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경우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그러나 1991년 3월 한국군 장성이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임명되고, 이듬해 4월과 12월에 북한과 중국이 각각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철수하면서 협정 조항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남북한은 물론, 미국 등 이해 당사국 사이에 정전협정 대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199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교전 당사국인 남북한과 미국·중국 대표들이 모여 4자회담을 열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북한은 이보다 앞서 1974년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줄곧 정전협정 서명에 참가하지 않은 한국을 제외하고, 국제연합군 사령관인 미국인이 협정에 서명했으므로 평화협정 역시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 왔다. 반면 한국은 6·25전쟁의 주된 교전 당사국으로서 실질적인 평화협정 당사자라는
주장으로 맞섬으로써 이 문제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1949 -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멧(Comet) 첫 비행에 성공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멧`이 1949년 7월 27일 첫 비행에 성공했다. 코멧 1호기는 7월 25일에 완성돼 26일
지상주행 테스트를 거친 후 마침내 이날 최초비행에 성공했다.
코멧은 길이 28.35m, 폭 35.05m의 날씬한 유선형 기체였다. 주날개에 장착된 터보제트엔진은 총중량 48톤이나 되는
비행기를 시속 760km의 순항속도로 최장 4000km나 비행할 수 있게 했다.
4명의 승무원과 36명의 승객이 별도의 장비없이 고도 1만2천m 상공에서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다.
영국은 최초 비행에 성공한 후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로부터 주문을 받아 1952년 5월 2일에는 영국 런던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간의 정기항로에 취항했다.
코메트 [Comet]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 영국의 드 해빌랜드사(De Havilland 社)가 설계 ·제작한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이다.
코메트란 ‘혜성’이란 뜻이며 1949년 (7월 27일) 처녀비행을 했다.
길이 28.35 m, 너비 35 m. 터보제트엔진 4기를 탑재하고 후퇴날개와 여압객실(與壓客室)을 갖추고 있으며, 승객 정원은 36명이다(1형). 정기항공에 취항한 것은 1952년 5월 2일 비이에이(BA;영국항공회사)의 전신인 영국해외항공회사(BOAC)의 런던∼요하네스버그 노선이 시초이다.
처음에는 운항이 순조로웠으나 1953년 5월 공중분해로, 1954년에는 잇달아 2건의 공중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조사 결과 여압에 의한 동체 외판의 피로파단(疲勞破斷)이 추락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요소가 많았다는 이유로 드 해빌랜드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 사고는 제트수송기를 개발하는 데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즉, 이후부터는 여압동체를 가진 제트수송기는 미리 수조(水糟) 안에서 동체에 내압(內壓)을 반복 부하(負荷)하여 충분한 피로강도(疲勞强度)를 지닌 것을 확인한 후 취항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코메트 4형까지 설계가 변경된 후로는 순조롭게 운항되었으나 현재는 세계의 항공로에서 사라졌다.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151711&contentno=151711
코메트(Comet) 연혁
1949-07-27 - 첫 비행에 성공
1952-05-02 - 최초의 정기항공 런던-요하네스버그 노선에 첫 취항
1952-07-08 - 런던 토쿄 노선에 첫 취항
1954-01-10 - 코메트(G-ALYP), 동체피로로 공중폭발 사고
1954-04-08 - 코메트(G-ALYY), 공중폭발 사고로 운항정지
1958-04-29 - 코메트 4(Comet-4) 처녀비행
1958-10-04 - 코메트 4(Comet-4) 런던~뉴욕간 대서양 정기항공에 첫 취항
1921 - 캐나다 의사 밴팅, 개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리하는데 성공
밴팅(Banting, Frederick G.)은 1891년 11월 14일 앨리스턴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1917~1919년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정형외과학을 수학하여 온타리오주(州) 런던에서
개업했으나, 1년도 안 되어 그만두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서부(西部) 온타리오대학교의 비상근(非常勤) 강사가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특히 당뇨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 토론토대학의 생리학 교수 J.J.매클라우드의 연구소에서 베스트, 매클라우드와 함께 당뇨병 치료약 인슐린을 발견하였다. 1923년 의학연구교수가 되었으며, 또 매클라우드와 공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30년 밴팅 연구소를 창립하였으며, 193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1941년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
1921년 5월 16일, 프레데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는 토론토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밴팅은 개업이 잘 되지 않아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틈틈이 의학도서관에 들려 논문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던 29세의 젊은 정형외과 의사였다. 한편 베스트는 생리학교실의 주임교수 맥클로드가 밴팅의 실험조수로 추천한 21세의 의과대학생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췌장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당뇨병 관련 물질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의학계에서 췌장과 당뇨병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1889년에 폰메링과 민코프스키가 개에서 췌장을 제거하여 인위적으로 당뇨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 이 후 여러 사람들이 당뇨병 관련 물질은 췌장의 랑겔한스 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록 이 물질을 실제로 분리해 낸 사람은 없었다.
밴팅은 아직 아무도 이 물질을 분리하지 못한 이유가 췌장에서 분비되는 효소액이 실험과정에서 당뇨병 관련 물질을 소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의 췌관을 묶어 소화액을 분비하는 조직을 위축시킨 뒤에 나머지 췌장조직에서 원하는 물질을 추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밴팅의 가정은 틀려 있었다. 췌관을 묶은 지 10주가 지나도 조직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개의 췌장전체를 원료로 실험을 계속했다.
7월 27일, 결국 그들은 당뇨병 관련 물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비결은 췌장조직을 분리 즉시 찬 링거액에 담가 저온 상태를 유지하면서 산성 알코올을 추출액으로 사용하였던 데에 있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이는 췌장의 단백질 분해효소작용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중대한 조건들이었다.
9월 8일에는 추출한 물질을 췌장을 제거한 당뇨병 개에게 다시 주사하여 혈당이 저하하는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이 추출액 속에 들어있을 물질을, 랑겔한스 섬에서 추출한 물질이라는 뜻에서 ‘작은 섬’을 의미하는 ‘아일레친’이라고 명명했다가 나중에 같은 뜻의 라틴어인 ‘인슐린’으로 고쳤다.
이제는 더 많은 양의 인슐린을 얻기 위해 지혜를 짜낼 때였다. 그들은 먼저 도살장에서 소 태아의 췌장을 얻어 다량의 추출액을 얻었다. 이 추출액으로는 당뇨병 개를 70일 동안이나 생존시키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얼마 후에는 어른 소의 췌장에서 추출하는 데에도 성공해 인슐린을 더욱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21년 12월 2일, 최초로 인슐린 치료를 받기 위한 당뇨병 환자가 토론토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13세 된 환자의 이름은 레오너드 톰슨이었다. 톰슨 소년이 당뇨병 진단을 받은 것은 2년 전인 1919년 12월의 일이었다. 엄격한 식이요법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체중은 자꾸 줄었고 다량의 당뇨를 배출했다. 이제는 인슐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해가 바뀐 (1922년) 1월 11일, 드디어 새로운 치료법이 시행되었다. 소의 췌장 추출액을 약하게 희석한 첫 번째 주사를
맞은 톰슨의 혈당은 당장 25퍼센트 저하했다. 매일 주사를 놓자 소년의 소변에서 검출되는 포도당의 양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월 초 열흘간의 주사가 끝나 치료를 중단하자 소년의 상태는 곧 입원 당시로 되돌아갔다.
다시 인슐린 주사가 개시되었고 한 달 후 환자는 매일 주사를 맞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톰슨은 그 후로 13년을 더 살았다. 사망원인은 당뇨병과 전혀 무관한 오토바이 사고였다.)
밴팅과 베스트는 이 경험을 <캐나다의학협회잡지>에 발표했다. 세계 최초로 당뇨병 치료법을 알아내려던
두 젊은이의 모험이 멋진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밴팅과 베스트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2006-12-1 서울아산병원)(이재담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1917 - 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Kocher, Theodor Emil) 사망
코허 [Kocher, Theodor Emil, 1841.8.25~1917.7.27]
1841년 8월 25일 베른에서 출생하였다. 1865년 베른대학교를 졸업한 뒤, 베를린대학교·런던대학교·파리대학교 등에
유학하였고, 1872년에 베른대학교의 외과학 교수가 되어 1911년까지 재직하였으며, 부속진료소장도 지냈다.
지혈법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한 이래 수많은 외과적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견관절탈구(肩關節脫臼)의
정복(整復), 창상(創傷)에 대한 방부적(防腐的) 치료법, 총상처치법 외에 골수염·헤르니아·담도질환·위절제 등의 중요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갑상선의 생리·병리 및 외과의 연구에 대한 공적으로 1909년에는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외과수술용 기구에 대하여서도 새로운 것을 많이 고안하였는데, 그 중 톱니 모양의 코허겸자가 잘 알려져 있다.
저서 《외과 수술학 Chirurgische Operationslehre》(1892)은 여러 판을 거듭하였고,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1914 -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사망
주시경 [周時經, 1876.12.22~1914.7.27]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한말의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1914년 7월 27일 타계했다. 38세였다.
황해도 평산 태생으로 호가 한힌샘인 선생은 우리 말과 글을 과학적이고 체계화한 국어 중흥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국어사랑은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쓰자는 주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독립신문 교열을 보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쏟은 선생은 이 신문에 기고한 `국문론`을 통해 한글이 한자에 비해
과학적으로도 훨씬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853 - 러시아의 단편작가, 저널리스트 코롤렌코(Korolenko, Vladimir G.) 출생
1848 - 헝가리의 물리학자 외트뵈슈(Eötvös, Loránd) 출생
1835 - 이탈리아의 시인 카르두치(Carducci, Giosue) 출생
1830 - 프랑스 7월혁명 ( ~7.29)
1824 -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뒤마(Dumas, Alexandre) 출생
1794 - 파리에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남
선생은 1897년부터 배재학당에서 4년간 신학문을 공부했고,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협성회보를 발간했고, 한글 기사체에 대한 통일과 연구에 몰두했다. 여러 학교와 강습소를 찾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등 선생이 길러낸 문하생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창설했고
1933년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요절한 탓에 비록 우리말 연구의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선생이 길러낸 제자들은 20세기 전반기 국어학의 대가로
우뚝솟아 선생의 뜻을 이어갔다. 1980년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월남망국사` `한문초습` `국어문전음학` `국문초학` `말의 소리` 등이 있다.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다.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다.
그러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
- 주시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