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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 7-24

오늘   7-2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07 -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 조인  - 일제의 을사5조약 날조 10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단계적 수순으로 제3차 한일협약이 1907년 7월 24일 체결됐다. 정미7조약

혹은 한일신협약 이라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 설치로 내정을

일삼아 온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삼아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구했다.

우선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순종을 즉위시켰다. 즉위 4일 만인 이날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고 이완용은 즉각 각의를 열어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후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사택에서 7개조항의 협약을 체결-조인했다. 이외에도

한국 군대해산, 사법권 위임, 일본인 차관 채용, 경찰권 위임 등을 골자로 한 협약 관련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다.

이 조약체결로 통감의 권한이 을사조약 때보다 강력해졌으며,

일본인 관리 등을 통해 한국의 내정에 관한 모든 국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2) 1880 - 스위스의 작곡가 블로흐(Bloch, Ernest) 출생

블로흐 [Bloch, Ernest, 1880.7.24~1959.7.15]

스위스의 작곡가.

그의 음악은 유럽의 후기 낭만주의 전통과 유대의 문화와 전례에 바탕을 둔 주제를 반영했다.

음악교사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제자 가운데는 로저 세션스, 랜들 톰슨, 엘리엇 카터가 있다. 저명한 스위스의

작곡가 E. J. 달크로즈에게 작곡을 배웠고, 벨기에에서 바이올린 연주자 외젠 이자이에게 배웠다. 1911~15년 제네바 음악원에서 가르쳤으며, 1916년 무용가 모드 앨런이 이끄는 무용단과 함께 미국을 순회했고, 이 순회공연단이

파산하자 뉴욕에 정착했다. 클리블랜드 음악원(1920~25)과 샌프란시스코 음악원(1925~30) 원장을 지냈다.

1930년에 스위스에 갔으나 1939년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1943년 오레곤 주에 정착했다.

그는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여름학기마다 작곡을 강의했다.

그의 음악은 클로드 드뷔시,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상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교향시 〈겨울-봄 Hiver-Printemps〉(1905)에 잘 드러난다.

유대적인 주제를 다룬 일련의 중요한 작품들을 작곡했는데, 그중에는 〈이스라엘 교향곡 Israel Symphony〉(1916),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유대인의 시 Trois poèmes juifs〉(1913),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 〈솔로몬 Schelomo〉(1916), 바이올린과 피아노(또는 관현악)를 위한 모음곡 〈바알 솀 Baal Shem〉(1923)이 있다. 바리톤·합창·관현악을 위한 전례 성가 〈신성한 의식 Avodath Hakodesh〉은 유대적 주제와 전례 의식에 걸맞는 성숙한

음악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다수의 그의 작품이 옛 음악 형식과 20세기 기법을 결합한 신고전주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첫 합주협주곡(1925)과 피아노와 현을 위한 5중주(1923)에서는 음악의 정서적 강도와 색채

효과를 높이기 위해 4분음을 쓰고 있다. 또 뛰어난 작품으로는 '서사적 광시곡'(epic rhapsody)인 관현악을 위한

〈아메리카 America〉(1926),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1919), 현악 5중주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넘치는 힘과 표현의 엄밀함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3) 1948 -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취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

5월 31일 초대 국회 개원,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초대 국회 제33차 본회의에서 무기명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개표결과 108표로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이 1표를 얻었다.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선출됨에 따라 이날 국회 주최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리게 됐다. 7월 27일 국회에 출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이윤영을 지명했으나 인준이 부결됐고 2차 지명을 받은 이범석이 8월 1일 인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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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9 - 부전조약(不戰條約), 켈로그-브리앙 조약 발효  

부전조약 (不戰條約 Kellogg-Briand Pact)

전쟁의 위법성을 확정한 최초의 실정국제법.
1927년 4월 6일 프랑스 외무장관 A. 브리앙은 미국 국민에게 전쟁위법화조약을 제안하고, 6월 20일 초안을 공식으로

제시하였다. 유럽의 안전보장에 미국을 관련시키려고 하는 브리앙의 의도에 의구심을 품은 미국 국무장관 F.B.

켈로그는 12월 28일 이것을 다국간(多國間) 조약으로 하여 다시 제안하였다.
국제적 평화여론의 강한 관심 속에서 주요국의 교섭이 진전되어 1928년 8월 27일 파리에서 원가맹국 15개국이

조인하고 1929년 7월 24일 발효되었다.
<조약체결국은 국제분쟁 해결을 위해 전쟁에 호소하지 말 것이며, 또한 상호관계에서 국가정책의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할 것을 각자 인민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언한다(제1조)>는 규정은 전쟁관의 역사적 전환을 의미하였다.

각국이 제안한 유보(留保), 전쟁의 애매한 정의, 자위권 발동의 자의성 등 한계는 있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가 잇따라 참가하게 되어 전쟁위법화원칙은 그 보편성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켈로그-브리앙 조약 (Kellogg-Briand Pact)은 1928년 8월 27일미국의 국방장관 프랭크 켈로그 (Frank Billings Kellogg)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Aristide Briand)의 발기에 의하여 파리에서 15 개국이 체결한 전쟁 규탄 조약으로서, 서문과 전문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 1 조에 따르면, 조약에 가담 비준한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조약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훌륭한 도덕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조약 위반의 경우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가입국인 독일일본1940년대에 세계 대전의 주범으로 등장하였을 때,

이들 국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다만 서류상 규탄만을 할 뿐이었다.

1939년에 이르기까지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현재 이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을 상실하였다.

조약의 발기자인 켈로그는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브리앙은 1926년에 슈트레제만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 

 

2) 1862 - 미국의 제8대 대통령 밴 뷰런(Van Buren, Martin) 사망  

밴뷰런 [Van Buren, Martin, 1782.12.5~1862.7.24]

미국의 제8대 대통령(재임 1837∼1841).

뉴욕주() 킨더후크에서 출생했다. 변호사를 개업한 후, 1812∼1820년 뉴욕주 상원의원, 뉴욕주 검찰총장,

1821∼1828년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1829년 뉴욕 주지사로 선출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829∼1831년 A.잭슨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다음 1833∼1837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36년 민주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

잭슨의 정책을 계승하였다.

1837년의 공황대책(), 대영국외교(), 전국정당()으로서의 민주당 조직의 확립과 유지,

텍사스 즉시병합() 반대 등에 진력하였으나, 인기를 잃은 채 184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W.해리슨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민주당의 장로로서 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A.링컨을 지지하였다.
저서로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Martin Van Buren》(1920)이 있다.

 

3) 1923 - 연합국-터키간에 로잔강화조약 조인 (그리스-터키전쟁 종결)

로잔 조약 [Treaty of Lausanne]

1922년부터 이듬해까지 스위스의 로잔에서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과 터키 사이에 열린 로잔회의의 결과로

1923년 7월 24일 체결된 조약.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터키는 1920년 8월 몇 가지 굴욕적인 규정이 포함되어 있는 세브르 조약에 조인했다.

 터키국민정부는 이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였고, 케말 파샤가 이끌던 공화정부는 새로운 강화조약을 연합국측에

교섭하였다. 로잔 회담 결과 세브르조약보다 유리한 로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결과로 터키는 자국지역의 분할을 모면하고, 군사적·재정적인 연합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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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 -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 고별 무대에서 7연패 위업

미국의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이 올해 투르 드 프랑스 즉 프랑스 도로 일주 사이클 대회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대회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대회 주최측은 파리 시내 일부 구간의 경기가 남아있었지만 비 때문에 미끄러운 도로 사정으로 암스트롱을

포함한 선수단이 파리에 들어온 뒤 대회 종료 선언과 함께 암스트롱 선수의 우승을 공식 확인했습니다.

최종 단계의 대회에서 별다른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암스트롱은 삶에 대한 굳은 의지로 암을 극복하고 선수생활을 재개해

사상 초유의 대회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암스트롱 선수는 이번 대회 우승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VOA News 2005-07-24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5-07/2005-07-24-voa15.cfm 

 

2005년 투르 드 프랑스 = 이번 대회를 은퇴 무대로 선언한 암스트롱은 1구간 레이스를 2위로 통과하며

상쾌한 스타트를 끊었다.
알프스 산맥으로 접어든 10구간 부터 종합선두를 탈환한 암스트롱은 20구간 개인독주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사실상 7연패를 확정지었다.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매일경제 2005-07-25

 

2) 1969 - 아폴로11호, 달착륙 마치고 지구 귀환 (중부 태평양, 한국시간 25일 상오1시)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가 드디어 달 표면 착륙에 성공했다. 이때 선장 암스트롱은 “인류의 위대한

제 1보(步)다”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폴로 11호는 21시간36분20초 동안 달에 머물며 월석을 채취하고

여러 가지 탐사장비를 설치한 후 7월24일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3) 1936 - 비미(Vimy)능선 전몰장병 추모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지역에 있는 비미(Vimy)능선!
1936년 오늘 영국 왕 에드워드 7세가 참석한 가운데 1차대전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제가 거행된다.
비미능선 전투는 캐나다 군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으로서는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다.
캐나다군은 1917년 부활절 다음날 새벽 독일군의 핵심 방어선인 비미 능선을 뚫는 데 성공하지만

투입된 병력 만5천 명 가운데 3,598명이 전사했다.

(우표를 보면 전몰장병 추모제가 26일이 아닌가 싶은데, YTN은 24일이라 카네요...  ^.@)

 

비미 능선 전투(Battle of Vimy Ridge)

참호와 기관총

1차 대전은 흔히 ‘참호‘와 ’기관총‘으로 대표됩니다. 전투 양상은 참호전이 주를 이뤘고,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전쟁에서

사용되면서 상당수의 전사자들이 기관총에 희생됐습니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솜므 전투나 마른 강 전투 처럼 한 지역에서 수십만명 씩 전사자가 나온 전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비미 고지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1915년부터 17년 까지 이 지역에서는 지리한 참호전이 이어졌습니다. 고도 145미터에 불과한 고지를 놓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2년 간 독일군과 공방전을 벌였지만 번번히 패했습니다. 비미 고지 전투는 크게 보아 아라스 전투의 일환이었는 데 아라스 전투에서는 연합군 15만명, 독일군은 10만명이 전사했습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을 뚫어야 독일 까지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미 고지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9일부터 12일까지 

여기에 1917년 4월 캐나다군이 투입됩니다. 당시 캐나다는 아직 영국의 자치령에 불과했습니다. 정식으로 국가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캐나다군은 10만명을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4월 9일 새벽 5시 반 공격을 시작해서 단 나흘 만인 12일-90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힌덴부르크 라인’이라는 막강한 방어선을 구축한 독일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전사자 3,598명, 부상자 7천여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지만 나흘 만에 캐나다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2년 간이나 고전하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당연히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캐나다는 당시 전투에 임하면서 철저히 준비 했습니다. 사전에 비슷한 지형에서 훈련을 마쳤고, 전투 직전에는 보급망 부터 화력 까지 완비했습니다. 여기에 처음부터 각개전투 식이 아닌 4개 사단 전부가 하나가 되어 함께 공격에 참여했고, 단 한 명도 열외가 없었다고 캐나다의 전쟁 박물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까지는 캐나다라는 ‘국가 의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4개 사단이 합동 작전을 편 것도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개 사단 10만명의 병력이 혼연일체가 되어 3중으로 파인

참호와 철조망, 고지 위에서 아래로 쏘아 대는 독일군의 기관총과 대포를 돌파한 것입니다.

 


국가의 탄생
이 전투는 ‘캐나다라는 국가‘의 탄생에도 결정적인 전기가 됐습니다. 당시 영국의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던 캐나다는 1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재편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당당히 전승국의 자격으로 서명했습니다. 훗날 비미 고지 전투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로스 준장은 회고록에서 “그 몇 분 간 나는 국가의 탄생을 목격했다”고 썼습니다. 캐나다는

이후 1926년에 완전한 자치를 보장받았고, 1931년에 영국에 의해 주권 국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국가라는 것이 국민들이 모여 우리가 국가를 만들었다고 선언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온전한 주권 국가로서 자격을 가지기 때문에 캐나다가 국가로서 탄생한 데에는 비미 고지 전투를 통한 국제 사회에 참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비미 고지 전투는 캐나다의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학생 5천여명을 프랑스 까지 데려와 기념식에 직접 참석하게 한 것도 ’국가‘를 인식시키는 한 방안입니다. 

"Merci au Canada"

1922년 프랑스는 비미 고지 일대를 캐나다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고지에 비미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 기념관은 올해 90주년을 맞이해 캐나다 측에서 174만 달러를 들여 개축한 뒤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9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캐나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드 빌팽 프랑스 총리는 이런 말로 연설을 맺었습니다. “Merci au Canada."

http://ublog.sbs.co.kr/nsBlog/goBlogList.action?cmt_view=Y&targetBlog=55994 

 

2000 -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 오픈 우승(최연소 그랜드슬램 달성)

타이거 우즈가 제129회 브리티시 오픈 우승으로 근대 프로골프 역사상 통산 다섯번째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하며

 `골프 황제`에 등극했다. 우즈는 2000년 7월 24일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끝난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3언더파를 추가하며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생애 4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우즈는 마스터스(1997년)와 PGA 챔피언십(1999년) 그리고 US오픈(2000년)에 이어 브리티시 오픈까지 4대 메이저타이틀을 만 24세7개월의 나이로 한번씩 석권함으로써 잭 니클로스(당시 26세 6개월)가 34년동안 갖고 있던 최연소

그랜드슬램 기록을 2년 앞당겼다. US오픈과 브리티시오픈을 한 시즌에 모두 우승한 여섯번째 선수가 됐으며

1990년 닉 팔도가 갖고 있던 올드코스 최저타 우승기록(18언더파 270타)도 1타 줄였다. 

 

1966 - 미국 흑인 반전 시위
1966년 오늘 미국 뉴욕의 유엔빌딩 앞! 많은 흑인들이 모여 반전 시위를 벌인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흑인들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비난하고 흑인들만이라도

군대에 가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날 데모는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1959 - 닉슨과 흐루시초프의 부엌논쟁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은 만날 때 마다 체제선전으로 설전을 벌였다. 미국 부통령 닉슨은 무역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닉슨은 박람회가 열리고 있던 소콜니키 공원에서 흐루시초프와 마주쳤다.

박람회장에는 토스터, 식기세척기 등 최신 가전제품이 전시돼 있었다.

거기서 나온 설전이 바로 '부엌논쟁'이었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흐루시초프는 닉슨에게 "미국 노동자들이 모두

이런 사치품들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닉슨은 즉각 "우리 철강 노동자들이 지금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중인걸 아시지요. 그런 노동자들도 누구나 이 정도는 살 수 있지요"라고 치받았다. 이어 "그 사람들 시간당 3달러를 받는데,한달에 100달러 정도씩 25~30년만 불입하면 이런 가전제품이 완비된 집을 얼마든 삽니다"라고 공격했다.

흐루시초프의 반격차례였다. "별로 놀랍지 않네요. 곧 완공될 소련의 주택에는 그런 것들이 완비될 것입니다.

앞으로 소련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그런 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간의 언쟁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는 냉전이었고, 미국에서 닉슨의 인기는 높았다. 

 

1944 - 마이다네크 나치 수용소 해방
1944년 7월 24일 소련군이 폴란드 루블린 시 외곽 남동부에 있던 독일 나치 집단학살수용소인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40년 11월로 처음에는 소련 전쟁포로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1942년 가을부터 히믈러에 의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수송된 유대인을 처리하기 위한 사형장으로

개조되었다. 처형도 처음에는 숲속에서 일제사격에 의한 총살이었으나 나중에는 홀로코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대량학살을 위해 독성이 강한 시안화수소 가스를 발산하는 치클론-B를 사용해 가스실에서 모아놓고 죽였다.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죽은 총인원은 20만~150만 명으로 추정되며 소련군이 해방시켰을 때는 생존자가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했다.  

 

1897 - 미국의 여류 비행사 에어하트(Earhart, Amelia) 출생

에어하트 [Earhart, Amelia, 1897.7.24~1937.7.2?]

미국의 여류 비행사. 1897년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났다. 1920년 부모를 따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 아버지와

에어쇼를 본 후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2년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1928년 여성 비행기

조종사로서는 최초로 대서양을 건넜다.
1932년에는 여성 최초로 비행기를 혼자서 조종하여 15시간 동안 쉬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여성 최초로 국립지리학회의 금장 메달을 받았다. 1935년에는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태평양

상공을 쉬지 않고 날아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39세이던 1937년 6월 1일 적도 주변을 도는 긴 항로를 이용한 세계일주 비행에 최초로 도전하였다.

항법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록히드사의 쌍발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고

아프리카와 인도·미얀마·싱가포르·자바·오스트레일리아를 지난 후 뉴기니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러나 뉴기니를 출발하여 태평양의 작은 섬인 하울랜드로 비행하던 중 해상에서 실종되었다.

대대적으로 수색작업을 펼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해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에어하트, 여성 최초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 (1932.5.20)
1927년 5월 20일 미국의 우편항공기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을 출발해 33시간32분 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1년 뒤인 1928년 7월 3일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두 명의 조종사와 함께 대서양 횡단에 성공해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에어하트는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지 못했고 승객으로 비행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5년이 지난 1932년 5월 20일 에어하트는 비행기 조종사로서 대서양 횡단에 도전했다. 미국 뉴펀들랜드를 출발한 비행기 '록히드 베가'는 거친 폭풍우 속에서 난기류에 휘말려 3천피트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도 했고, 고도계와 엔진 고장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15시간 만에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 무사히 착륙했다. 비록 최종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대서양 횡단에는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에어하트는 여성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성공했고, 최단시간 대서양 횡단 비행기록도 세웠다.
이 외에 에어하트는 미국대륙 왕복횡단 비행(1928년), 태평양 횡단 비행(1931년) 등 각종 비행기록을 수립해 당대 최고의 여성 비행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마지막 비행'과 함께 전설처럼 남겨졌다. 1937년 세계일주 비행에 도전한 에어하트의 비행기는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인도를 거쳐 뉴기니에서 하울랜드섬으로 향하다

남태평양 상공에서 사라졌다(7월 2일).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잔해조차 찾을 수 없었고,

각종 추측만 난무한 채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 있다. 정광용기자 부산일보 www.busanilbo.com 

 

1860 - 체코의 아르누보 삽화가, 화가 무하(Mucha, Alphonse) 출생
1857 - 덴마크의 소설가 폰토피단(Pontoppidan, Henrik) 출생

1828 -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자 체르니셰프스키(Chernyshevsky, Nikolai) 출생


1802 -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뒤마(Dumas, Alexandre) 출생

1783 -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볼리바르(Bolivar, Simon) 출생

612 -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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