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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21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2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1888 - 벨기에,프랑스의 영화감독 페데르(Feyder, Jacques) 출생

페데르 [Feyder, Jacques, 1888.7.21~1948.5.25]

벨기에 출생의 프랑스 영화감독.

벨기에 브뤼셀 교외 출생. 1930년대 프랑스영화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영화감독이다. 예술가의 아들로 태어나 무대배우에서 영화배우, 조감독을 거쳐 《여자의 머리, 머리의 여자들》(1916)로 감독이 되었다. 1914년 여배우 F.로제와 결혼하여 평생 콤비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으나 1918년 부상을 입고 퇴역한 후 《무당거미》(1921)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명철한 인간관조()에 의한 사실주의로 일관되어 있다. 전반은 《무당거미》라든가 《테레즈 라칸》(1928)에서의 차가운 응시를 통한 인간 분석, 《크랭크뷰 Crainquebille》(1922) 《눈사태》(1923) 《모습》(1924) 등에서의 서정적인 인간 관찰, 《급조신사()》(1928)에서의 풍자적인 감각 등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928년 프랑스에 귀화하였고, 다음해 미국에 초대되어 《키스》(1929) 《안나 크리스티》(1930) 《여명()》(1931)을 제작했으나, 할리우드식 멜로드라마 작법에 맞지 않아 1932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1933년 《외인부대()》에서는 앞에서 말한 인간분석과 인간관찰의 특징이 하나로 융합되어 유성영화의 심리표현에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은 《미모자관()》(1934)에서는 아내 로제 주연으로 양자()에 대한 사랑의 슬픔을 주제로 한 남프랑스의 시적인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였다. 1935년 《여자만의 도시》에 이르러 세 유형의 작품이 하나로 어울려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이 되었다. 그후 1936년 영국에서의 《갑옷 없는 기사()》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작품 없이 마감하였다.

그는 자신을 아르티장(직공)이라고 칭하였으나, 조용한 응시 속에 집중되었던 인간성찰과 풍토 특성의 적확한 파악은

그를 높은 예술가의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프랑스 영화 특유의 명석함과 인간분석을 심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 1960 -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세계 첫 여성 총리로 선출

1960년 7월 21일 실시된 실론(현 스리랑카) 총선거에서 반다라나이케(Bandaranaike, Sirimavo)가

이끄는 자유당이 여당인 통일국민당을 누르고 제1당이 돼 세계최초의 여자 총리가 탄생했다.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9월에 암살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총리의 미망인으로 실론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신하리족의 호족출신이었다. 그녀는 남편 사후 세간의 동정을 싫어해 정계를 떠날 것으로 보였지만

예상을 뒤엎고 1960년 5월 만장일치로 자유당 당수에 선출됐었다. 선거에서 사회당ㆍ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대담하고 유연한 정치력과 ‘실론 제1주의’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는 선거에는 입후보하지 않고 유세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자유당 73석, 통일국민당 30석, 타밀 연방주의자들 16석,

트로츠키당 12석, 공산당 5석, 무소속이 19석을 차지했다.
1965년까지 총리를 역임한데 이어 1970~1977년에도 총리로 재임했으나 1977년에 총선 패배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94년에 대통령이자 딸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그를 다시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2000년 8월까지

총리직을 역임하다가 그해 10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1944 - 독일의 육군 장교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 처형 

슈타우펜베르크 [Stauffenberg, Claus Schenk Graf von, 1907.11.15∼1944.7.21]

독일군 장교.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육군 대령이며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기갑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슈타우펜베르크는 1943년 4월 매우 심한 부상(왼쪽 눈과 오른손, 그리고 왼손의 손가락 2개를 잃었음)을 입었고 뒤이어 베를린의 예비부대 참모부에 재배치되었다. 점점 확산되던 육군 장교들의 히틀러 암살모의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계획된 암살을 실행에 옮기는 일을 자신이 직접 맡았다. 2번의 예비시도 끝에 1944년 7월 20일 라스텐부르크에 있는

히틀러 사령부에 폭탄을 장치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독재자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동시에 베를린에서 계획된

쿠데타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몇몇 공모자들은 그해 7월 20일 밤에 베를린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이들은 이 사건 뒤에 벌어진 유혈참극에서 죽은 수천 명 가운데 첫번째 희생자들이었다(→ 7월 암살음모사건).

 

1) 1998 -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셰퍼드(Shepard, Alan B.) 사망

셰퍼드 [Shepard, Jr., Alan B(artlett), 1923.11.18~1998.7.21]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가 1998년 7월 21일 캘리포니아의 병원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종사 출신인 셰퍼드는 지난 1961년 5월 5일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주선 '프리덤7'을 타고 15분간의 우주유영을 하는 등 역사적인 우주비행을 수행했다. 셰퍼드의 우주비행은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보다 23일 뒤진 것이었으나 불충분한 상황 속에서 미국 우주개척의 첫 장을 용감히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971년 1월 31일에도 아폴로14호 사령관으로 달 탐사에 나서 달을 밟은 5번째 인류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9시간의 달 탐사 도중 달 위에서 인류 최초로 골프를 치기도 했다. 1974년 항공우주국과 해군에서

은퇴한 그는 기업체의 대표로 활동하며 각종 사회활동을 펼치다 말년에 백혈병을 앓아왔다.

 

2) 1970 - 세계 최초 5만시간 무사고 비행기록
전투비행단 F5A기 편대장 김경중 공군 중령이 세계 첫 5만시간 무사고 비행기록 세우다.

http://www.kbs.co.kr/techcenter/general_tech/month07.html 

 

3) 1946 - 볼리비아에 쿠데타, 대통령 비야로엘(Villarroel, Gualberto) 교수형

비야로엘 [Villarroel, Gualberto, 1908.12.15~1946.7.21]

민족혁명운동은 1943년 쿠데타에 의해서 대령 비야로엘에게 정권을 담당하게 하여, 예농제()를 폐지하고

석유사업의 국가독점확립 등을 실시하였으나, 1946년 비야로엘 정권은 쿠데타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2003 - 한국, 세계양궁선수권대회 8연속 종합우승

우리 나라 양궁 대표팀이 '양궁 초강국'의 위력을 또 한번 확인시켰다.
한국은 2003년 오늘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종합 1위에 올랐다.
이로써 2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에서 1989년 이후 8연속 종합우승의 위업을 달성하게 됐다.
한국 대표팀은 이날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막을 내린 제42회 세계선수권 남·녀 단체전에서 남녀가

동반 우승한 것을 비롯해 금메달 셋, 은메달 둘, 동메달 하나를 따내며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4개 부문 전 종목 우승을 휩쓸었던 1997년 대회의 '신화 재현'에는 실패했지만 역대 이 경기에서

세 번째로 좋은 성적을 냈다. 한국이 남녀 단체전서 나란히 1위를 하기는 1997년 대회 이후 6년 만이다.
또 세계 신기록 2개와 대회신기록 12개를 세워 질적으로도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2000 - 오키나와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 개막(21~23일)

2000년대 들어 처음 열리는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으로 일본열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4번째 의장국이 되는 것이지만, 이전과 달리 개최지가 동경이 아니라 미군기지가 집중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키나와라는 점이 새삼 흥미를 더해주었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미 해병대 병사의 여중생 성추행 사건과 공군 병사가 저지른 뺑소니

사고에 대한 클린턴의 공식 사과는 G-8 정상회담의 공식의제는 아니지만 또 하나의 관심거리를 제공하였다.

이번 8개국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절대적인 무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금번 정상회담에서 다루어질 핵심 현안 역시 미국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정보기술(IT) 산업과 국가미사일체제(NMD)를 둘러싼

의견조율로 나타났다.

4년전만 해도 일본이나 유럽은 IT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후 미국의 경제성장을 지탱한 버팀목은 IT의 활용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었다. 유래없는 10년째 경기확대 국면에 접어든 미국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금년 4월 클린턴 정권의 지지율은 60%전후에 달했다. 이에 고무되어 평소 "IT는 민주주의를 확대시키고 국민의 꿈을 실현시킬수 있는 기회를 증대시킬는 것”이라고 주창해온 클린턴은 오키나와에서 ‘정보화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보화 시장경제란 경제나 기술에 대한 정보가 순식간에 세계에 퍼져 시장의 일체화,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측과 그렇지 못한 세력 사이에 더욱 심화될 개인간,

국가간의 빈부 격차에 대한 우려와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둘러싼 각국 정상들의 입장이 표명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블레어 영국 수상은 최빈국의 채무감면 문제나 IT혁명으로 초래될 디지털 디바이드(정보격차)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였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인권 존중 없이는 개발도 번영도 없다”는 기치하에 글로벌리제이션의 부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 정치가 인간소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제언했다. 또한 클레티언 캐나다 수상도 IT혁명에

따른 발전 도상국의 교육지원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에이즈 등의 대책비로 5년간 30억달러를 지원하는 개발도상국 지원책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최빈국 채무면제 주장을 수용하여 정부개발원조 채무는 물론 비정부기구들의 채무면제까지도 합의하였다.

이번에 첫 선을 보인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NMD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가장 강력히 피력하였다. 그는 이번 정상회담에

참석하기에 앞서 이미 중국의 장쩌민,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향후 군사 및 안보분야에서 미국의 독주를 가져올 수 있는 NMD체제 구축 반대에 대한 삼각 공조를 확인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NMD가 러시아나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이나 미국의 헤게모니 형성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점에서 나머지 유럽 참가국들도 러시아의 입장에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어

미국의 고전이 예상된다. (박용구· 일본연구소 책임연구원)

http://segero.hufs.ac.kr/scripts/article_view.asp?JNAME=IANR&ISSUEID=82&SECID=002

 

1998 - 북한이 유네스코 5관할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 협약에 가입

북한은 1994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7차 회의에서 문화유물 보호법(전문6항 52조)을 제정하고 민족문화유산의

발굴 수집, 복원 및 보존관리, 교육 연구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이는 문화적 정통성을 확보하여 정치적 정통성까지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이에 따라 북한은 1998년부터 전국의 유물유적 보수사업을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1998년 7월 21일에는 늦기는 하였으나 유네스코 5관할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 협약에 가입하였다.

http://www.uniedu.go.kr/dataroom/book_b_2002_north/north21.html

 

1992 - 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1992년 오늘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회담을 열었다.6년 만의 정상회담이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라빈 총리의 이스라엘 방문요청을 수락하고, 3개월째 교착상태에 빠진

아랍-이스라엘 쌍무협상을 이집트가 주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중동평화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점령지대 유대인 정착촌 문제와 관련해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동결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찬양했다.

라빈 총리는 회담이 끝난 뒤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묘에 헌화한 뒤 이집트를 떠난다.

 

1975 - 신화사 통신, 진시황릉병마용갱(秦始皇陵兵馬俑坑) 발굴 소식을 처음 보도

병마용갱의 발견

3월29일.4m쯤 파들어가자 땅속에서 진흙을 구워 만든 사람 인형 조각이 나왔다.
“벽돌 가마터인 줄 알았더니 웬 도용(陶俑;도기 인형)이지? 자 어서들 팝시다.어쨌든 물만 나오면 되니까.”
양취안이의 말에 농부들은 다시 곡괭이를 휘둘렀다.그러나 땅속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물이 아니라 곡괭이 세례를 받아 깨어지고 부러진 도용 조각과 청동 화살·창·쇠뇌(석궁)의 촉 따위였다.땅속에는 인형 몇 개가 아니라 인형 군대가 묻혀 있는 것 같았다.이 심상치 않은 사건은 때마침 고향을 찾은 신화사 통신 기자 린안인의 눈에 띄어,‘인민일보’를 통해

마오쩌둥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위안중이가 이끄는 산시성 고고학발굴팀이 용갱(俑坑;인형이 묻힌 땅굴)을 발굴하기 시작한 날은 1974년 7월15일

지하군단 군사들은 4.6∼6m 깊이의 땅속에서 벽돌 바닥 위에 줄지어 서있었다.병사들만 서있는 보병 대열,전차와 병사가 함께한 기병 대열이 규칙적으로 섞여 있었다.말 4마리가 끄는 전차에는 병사가 3∼4명씩 타고 있고,

그 뒤에는 보병이 12명씩 서있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록 발굴팀은 용갱이 어느 시대,어느 유적인지 알 수 없었다.‘심증’은 진시황릉의 유적이었지만 ‘물증’이 없었으므로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나 떨어져 있는 용갱을 진시황릉에 딸린 것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웠다.
발굴이 2주째로 접어들던 날 마침내 확실한 증거물이 나왔다.‘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구리 극(戟;창의 한 가지)을 찾아낸 것이다.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라고 전해진다.

발굴팀이 그 다음으로 알아내야 할 것은 병마(兵馬) 용갱의 규모였다.발굴팀장 위안중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보름이면 다 발굴하리라고 예상했다.기껏해야 무덤에 부장된 유물이니 용갱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고 만만하게 생각했다.그런데 아무리 파들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백발 노인이 가르쳐 준 대로 우물 파던 곳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을 파자

해결되었다.노인은 용갱의 가장자리를 정확히 지목하고는 사라졌다1975년 7월21일 신화사 통신이 마침내 ‘진시황릉

병마용갱’ 발굴 소식을 보도했다.길이 230m,너비 62m에 군사 8,000여 명과 말 500여 필,전차 130대가 열한 줄로

늘어서서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달려나갈 듯이 대기하고 있는 전투대형이었다.

물론 이 군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친위대는 황제가 죽을 때 산 채 함께 묻히는 대신,그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으로 만들어져 무덤 곁에 묻혀 지금까지 시황제를 호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형들은 2200년 전 위풍당당했던 모습을 어제 일인 양 생생히 보여준다.그들은 한결같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키가 175∼195㎝나 되는 늠름한 체격이다.말 또한 키 150㎝, 몸길이 2m로 귀를 바짝 세우고 우뚝 선 당당한 모습이다.8,0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고 저마다 다른 것으로 보아, 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 

http://www.dol.pe.kr/civilization/asia/byungma/mausolem_1.htm 

 

1970 - 이집트 아스완 하이댐 완공(1971년 정식개통)

아스완 댐이집트나일 강아스완 시에 위치한 댐이다. 아스완 하이 댐(아랍어:Arabic: السد العالي;as-Sad al-'Ally)과 아스완 로우 댐이 크게 댐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 정부의 아스완 댐 건설 목적은 나일강의 범람을 막고 관개 및 농경을 위한 전력발전이다. 나일 강은 매 여름마다 매시 범람했다. 고대 때와 마찬가지로 수천년간 반복된

이러한 홍수는 유역의 토양을 옥토로 만드는 한편 많은 이로운 광물을 배출하면서 농경의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강 주변 거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목화재배지와 농경지를 보호하고 한편으로 조절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댐의 건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건설 역사

가장 처음 구조물은 대영 제국1889년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공사는 1902년까지 계속됐다. 공사 기공식은 1902년 12월 10일에 열렸으며 공사에는 영국 내 저명한 건축가 다수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1910년대에 이르러 처음의 공사 양식이 적합치 않다는 판단이 대두하면서 한 차례 증축 공사를 하여 댐의 높이를 높인다.

하지만 1946년 댐이 범람하면서 세번째로 한 번 더 공사를 하게 되며 둘째 번에서 6km정도 높이를 더 끌어올리게 된다. 기초 공사는 1952년 시작됐으며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 이후로 미국과 영국이 혼란기를 틈타 자금 제공에 합의한다. 총 2억 7천만달러를 차관 제공하기로 한 것은 나세르가 아랍 세계-이스라엘 전쟁 기미를 막는 데 협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미 양국은 나세르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하고자 비밀 회담을 열면서 1956년 7월 차관 제공을 철회한다.

1960년 현대적 의미의 댐 건설이 비로소 시작됐으며 11년 뒤인 1970년 7월 21일에 공사가 완공된다. 사실 공사 완공 전인 1964년 미리 수원 저장을 시작하였으며 총 수원 한계량을 1976년에 처음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나 수원 저장의 계속적인 증가는 인류학자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주위에 산재했던 고고학유물 때문으로 60년대 유네스코는 문화재 구조 작업에 나선다. 문화재 유적지 탐사 밑 24곳의 주요 장소가 옮겨졌다. 대표적인 곳이 아부 심벨 신전이다.

마드리드뉴욕등 세계 여러 기관과 국가들은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집트 자체로는 아랍계의 오스만 아메드가 발굴 작업을 주도했으며 그의 경쟁자를 물리치며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소련이 당시 제공한 물자에 대해 불평을 많이 했으며 소련 기술자들을 결국에 내쫓아버렸다고 전한다.

 

1944 - 미군, 괌도 상륙

1944년 7월 21일 5만 5000여 명의 미군이 일시에 아가트(Agat)와 아산(Asan) 등지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미군에 대항했지만, 결국 궤멸당하고 말았다. 괌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잘 계획되고 빈틈없이

수행된 작전이라는 평을 얻었을 만큼 미군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괌을 재탈환한 미국은 1946년 5월 30일 다시 해군 정부를 수립했다. 괌은 다시금 평화를 찾았고,

1950년 트루먼 대통령은 괌을 자치령으로 선포했다. 그와 함께 괌 주민들은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괌 최초의 민간인 지사로는 칼턴 스키너(Calton Skinner)가 지명되었고, 1971년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에 의해

카를로스 카마초(Carlos B. Camacho)가 지사로 선출되었다.

http://www.nextour.co.kr/Destination_Guide/Region_f/Info_City.asp?firstcode=NT&ContinentCode=&NationCode=&citycode=&themecode=

 

1899 -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출생

헤밍웨이 [Hemingway, Ernest (Miller), 1899.7.21~1961.7.2]

헤밍웨이는 강하고 힘찬 글을 쓴 미국의 작가이다.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에서 사냥과 낚시를 좋아한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서로 다른 기질은 헤밍웨이의 상반된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스타 Star>지의 기자로 채용되어 일했다. 이후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눈에 결함이

있어 계속 입대를 거절당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했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발표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29)에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이 작품이 전쟁의 무의미함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스페인 내란의 경험을 토대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는 전쟁이 만들어내는 동지애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평생 전쟁에 관심을 가진 헤밍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도 관여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쿠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1960년경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이 일어나자 헤밍웨이는 핑가에서 쫓겨났다. 아이호 근처에서 예전처럼 작품을 쓰려고 했으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엽총으로 자살했다.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작가로 간주되며,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장 좋은 상태의 글쓰기는 외로운 생활이다. 작가들의 조직은 작가 자신의 외로움을 완화시키지만, 글쓰기를

개선할지는 의심스럽다. 작가가 외로움을 떨어버릴 때 그는 대중적으로 성장하지만, 대개의 경우 작품의 질은 떨어진다.

작가는 혼자 작업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더욱이 매우 훌륭한 작가라면 매일 영원을 직시하거나

그 부족함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

 

- 어니스트 헤밍웨이

 

1861 - 남북전쟁 중 불런 전투 발발
1861년 7월 21일 남북전쟁 기간 중 북부 버지니아의 머내서스 근처 불런 강 일대에서 불런 전투(Battle of Bull Run)가

벌어졌다. 같은 해 여름 북부 연방정부는 어빈 맥도웰 장군에게 워싱턴의 불런으로 진격해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P. G. T. 보러가드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방어태세를 갖추고,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의 지휘로 셰넌도어에 있던 추가병력이 이동했다. 7월 21일 북군이 남군을 공격함으로써 일진일퇴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남군의 지원부대가 도착하자 북군은 워싱턴으로 퇴각했다. 1년 뒤 로버트 E. 장군이 이끄는 남군과 존 포프 소장이 이끄는 북군은

또다시 불런 강을 두고 부딪쳤다. 리 장군과 T. J. 잭슨 장군은 대규모 기동작전을 펼쳐 북군을 격퇴해 남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북군이 계속되는 공격을 일정 지역에서 막아냈다는 점에서 이 승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1858 - 독일의 화가 코린트(Corinth, Lovis) 출생

코린트 [Corinth, Lovis, 1858.7.21~1925.7.12(17)]

독일의 화가.

독일 미술에 일종의 인상주의를 도입했으며 자유로운 붓놀림과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그 이후에 전개된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받았으며 1884년 이후로는 파리에서 프랑스의 화가인 아돌프 기욤 부그로

밑에서 공부했다. 파리에 있는 동안 프랑스 인상주의와 루벤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1900년 베를린에 정착한 뒤에는 초기의 어둡던 그의 그림이 밝고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막스 슬레포크트 및 막스 리버만과 함께 베를린의 아카데미파에 대항하여 분리파 운동을 이끌었다. 20세기초에 표현주의의 출현에 대항하는 데 몰두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이 양식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훗날 그는 인상주의적 표현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으나

표현주의의 진가를 깨닫고 그 특성의 상당부분을 받아들였다. 발헨제 지역을 그린 풍경화와 초상화가 가장 유명하지만, 제단화인 〈골고다 Golgotha〉(1909~11, 타피아우) 같은 격정적인 분위기의 종교적인 장면들도 그렸다.

또한 〈묵시록 Apocalypse〉(1921) 같은 에칭과 석판화도 만들었는데,

이것들은 그의 그림 이상으로 뛰어난 표현주의 양식을 보여준다.

 
1858 - 스페인 왕 알폰소 12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 출생

1831 - 벨기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588 -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함대의 대해전 시작

 

 

1515 - 이탈리아의 사제 네리(Neri, San Filippo) 출생

1414 - 로마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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