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2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2009 - 강릉서 국내 최고령 무궁화나무 발견
강원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에서 국내 최고령의 무궁화나무가 발견돼 화제다.
국립산림과학원 박형순(58.산림자원육성부) 박사는 사천면 방동리 강릉 박씨 종중의 재실(齋室) 내에 있는 무궁화가
수령 110년가량으로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무궁화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23일 밝혔다.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재실 내에 있는 나라꽃 무궁화는 높이 4m, 나무의 전체 넓이인 수관폭 6m, 직경 50㎝로
꽃의 중심부가 붉은 홍단심계 홑꽃으로 고유의 토종 품종이다.
대부분의 무궁화 나무가 수령 20∼40년 정도에 고사하는 것에 비하면 이 나무의 수명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한줄기가 지상 50㎝부터 3갈래의 줄기로 갈라져 뻗어 있는 이 나무는 아직도
푸름을 자랑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특히 요즘 이 나무는 수령이 한창때의 다른 무궁화 못지않게 많은
꽃을 활짝 피워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무궁화는 보호수로 지정된 강릉시 연곡면 유동리, 전북 남원, 강원 홍천 등의 것보다 규모는 비슷하지만, 수령은 훨씬 오래된 것으로 추정돼 보호가치가 매우 높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강릉 박씨 종부(宗婦)인 조길자(79) 씨는 "16살에 시집왔을 때부터 무궁화나무가 있었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그때도 나이가 꽤 됐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종인(宗人) 박조균(74) 씨도 "앞으로도 오래도록 잘 자랄 수 있도록 보호수로 지정돼 지속적으로 관리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박 박사는 "이렇게 오래됐는 데도 꽃을 활짝 피우고 생기를 띠는 것은 약과 거름을 주는 등 정성껏
돌봐주고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며 "앞으로 유전적인 측면과 연구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강릉시는 이 무궁화나무를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최근 강원도에 보호수 지정 신청을 했다.
(강릉=연합뉴스) 유형재 기자 연합뉴스 2009/07/23 13:36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7/23/0200000000AKR20090723105800062.HTML
2) 2006 -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오픈 2연속 우승
부활한 황제 "아버지 보셨죠"
부친상 슬럼프 딛고 브리티시오픈 2연속 우승… 허석호 11위 한국선수 사상 최고성적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미국)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딛고 브리티시오픈 정상에 올랐다. 세계 최고 권위와 역사를
자랑하는 브리티시오픈은 우즈에게 연속 2회, 통산 3번째의 '클라렛저그'를 선사하며 '황제의 부활'을 알렸다.
타이거 우즈가 브리티시오픈 최종라운드 2번홀에서 버디 퍼트를 실패한 후 아쉬운 듯 미소 짓고 있다.
리버풀(영국)AP=연합뉴스
우즈는 24일(한국시간) 영국 리버풀의 로열리버풀링크스코스(파72ㆍ7,258야드)에서 끝난 대회 최종라운드에서 5언더파를 기록, 합계 18언더파 270타로 16언더파 272타의 크리스 디마르코(미국)를 따돌리고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개인 통산 49승째이자 11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 브리티시오픈에서 2년 연속 우승이 나온 것은 1983년 톰 왓슨 이후 무려 23년 만이다. 올 시즌 PGA투어에서는 뷰익인비테이셔널과 포드챔피언십에 이어 3승째. 묘하게도 모두 대회 2연패였다. 유럽투어까지 포함하면 4승째다.
우즈는 지난 5월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 얼 우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실의에 빠졌다. 9주를 쉬다 US오픈에
출전했지만 결과는 프로 데뷔 후 첫 컷오프의 수모였다. 시알리스 웨스턴오픈 준우승으로 회복 기미를 보인 우즈는
결국 1년 만에 메이저 대회 1승을 추가하며 '황제'의 위용을 완전히 되찾았다.
2라운드부터 단독 선두로 치고 나온 후 줄곧 선두를 지킨 끝에 우승한 우즈는 '역전불허'의 신화도 이었다.
우즈는 메이저 대회에서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 선두로 나선 경우 한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즈는 5번홀에서 회심의 이글을 잡아냈고, 10번홀에서 버디를 보탰다. 12번홀에서 첫 보기를 범한 우즈는 한 때
크리스 디마르코(미국)에 1타차까지 쫓기기도 했지만 14번과 15번, 16번홀에서 줄버디를 낚아 3타차로 달아나며
사실상 승부를 갈랐다. 3라운드에서만 7언더파를 몰아치며 한 타차로 우즈를 쫓았던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는
우즈와 동반하면 부진한다는 '붉은 셔츠 공포'의 희생양이 됐다. 가르시아는 전반에만 보기 4개를 범하며
무너진 끝에 공동 5위에 그쳤다. 어니 엘스(남아공)가 13언더파 275타로 3위.
한편 허석호(33)는 아쉽게 톱10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역대 브리티시오픈에 참가한 한국 선수 가운데 최고 성적을 내는 쾌거를 이뤘다. 허석호는 이날 버디 5개 보기 3개로 2언더파를 쳐 최종 합계 8언더파 280타로 공동 11위에 올라
종전 한국 선수 최고 성적인 2004년 최경주의 공동 16위를 넘어섰다.
6언더파 210타 공동 16위로 최종라운드에 나선 허석호는 5번홀에서 첫 버디를 잡았고 9번과 10번홀 연속 버디로
기세를 올렸지만 11번과 13번홀 보기로 잠시 주춤했다. 16번홀 버디 후 다음 홀에서 바로 한 타를 잃은
허석호는 마지막 18번홀에서 한 타를 줄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한국일보 2006-07-23 (일)
http://www.koreatimes.com/article/327349
3) 2008 - 한국우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표’ 선정
우리나라 우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표에 선정됐다.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본부장 정경원)는 지난해 발행한 ‘어린이 인권보호 특별우표’가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ASIAGO 국제우취예술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표’로 선정됐다고 23일 밝혔다.
올해 38회를 맞은 이탈리아 ASIAGO 국제우취예술상(ASIAGO International Award for Philatelic Art)은 매년 세계에서 발행된 우표들을 심사해 최고상이라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우표상’ 이외에 최고의 환경 우표와 최고의
관광 우표 등을 선정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우표상에 선정된 ‘어린이 인권보호 특별우표’는 2006년 열린 ‘2007세계우표디자인공모대회’에서
일반부 최우수상을 받은 노혜림씨(23)의 작품이다.
전 세계 어린이들은 특별한 보호속에서 행복과 사랑, 이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당연한 권리를 가졌으며,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사명이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심사위원단은 심사평을 통해 “어른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아이의 이미지가 인류의 평등과 평화를 공유하기 위한
이상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줬다”며 우정사업본부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우정사업본부를 대신해 주밀라노한국총영사관 명예영사가 참석해 상장을 받았다.
한편 이번 대회의 최우수 관광우표에는 벨기에우정의 ‘연과 카약’ 우표, 최우수 환경우표에는
폴란드우정의 ‘지구의 날’ 우표가 선정됐다. 출처: 우정사업본부
홈페이지: http://www.koreapost.go.kr 뉴스와이어 2008년 07월 23일 12:00
http://www.newswire.co.kr/?job=news&no=349641
1) 2) 3)
1) 2001 - 와히드(Wahid, Abdurrahman)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
압두라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2001년 오늘 무능한 행정과 각종 부패추문 때문에 집권 21개월 만에 탄핵당한다.
인도네시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 MPR은 이날 투표에 참여한 591명 전원의 찬성으로 와히드의
탄핵을 결정했다.와히드는 1999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조달청 공금 350억 루피아와 기부금 200만 달러를
횡령하거나 유용했다.와히드는 국민협의회의 활동중지와 1년 내 조기총선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한 포고령을 발표했지만 군부와 경찰까지 이 포고령을 거부했다.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이 같은 날 오후 의사당에서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2) 1995 - 유조선 시 프린스호 좌초
씨프린스 호 사고는 1995년7월 23일 전라남도 여천군(현 여수시) 앞바다에서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사의 키프로스 국적 14만톤 유조선씨프린스 호가 침몰하며 원유 98000톤과 벙커C유 1000톤이 유출된 사고이다.
7월 23일 태풍 3호 페이가 남해안에 상륙했는데, 씨프린스 호는 태풍이 여수 해상을 비껴갈 것으로 기대하고 무리하게
항해하다가 군남면 소리도 덕포해안 동쪽 8km 해상 암초에 좌초되었다.
당시 전남 여천군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유출사고 피해는 231건, 3295ha, 204km의 해상과 73km의 해안을 오염시켰다. 여수 소리도 주민과 환경단체는 12년이 지난 2007년에도 잔존 유분이 발견되고, 어족자원이 감소되었다고 주장한다.
3) 1982 -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1982년 7월 23일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 이후 상업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며 10년간 포경 금지를 요청하자 10년간의 갑론을박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IWC(국제포경위원회)는 당초에는 고래를 관리해 계속 잡아나가려는 취지에서 1946년 설립됐다.
당시 무분별한 포경으로 고래 자원의 감소 징후가 뚜렷해지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관리 대상은 전체 80여종 중 밍크고래 등 대형 9종. IWC는 산하 과학위원회가
고래 자원 유지가 가능하도록 합리적인 할당량을 제시하면 이에 대한 포경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본 회의에서
포획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본회의에서는 보통 할당량을 상향 조정하게 돼
'고래 고갈'에 직면했다. 이같은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 이날의 포경전면금지 결정이다.
2007 - 아프가니스탄의 왕 자히르 샤(Zahir Shah, Mohammad) 사망
자히르 샤 [Zahir Shah, Mohammed, 1914.7.15~2007.7.23]
아프가니스탄의 왕(1933~73 재위).
그의 통치 기간에 나라가 안정되었다. 모하메드 나디르 샤의 아들인 자히르 샤와 그의 형제들은 1920년대말의
무정부상태와 도적떼가 들끓던 시기에 중앙집권적 통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자히르 샤는 내각의 각료직을 맡고 있다가 1933년 11월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자히르 샤는 친척들이 정부를 이끌어가는 여러 해
동안 뒷전에 앉아 있었으나, 1964년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왕의 척족이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친정체제를 확립했다.자히르 샤는 주로 미국과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여, 관개시설과 고속도로를 비롯한 많은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했다. 또한 국제관계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중립적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카불 바깥으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초 아프가니스탄은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당했다.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파쉬토족은 계속해서 자치를
요구했고, 카불의 정치구조로는 아프가니스탄의 경제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1973년 7월 17일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자히르 샤는 폐위되었다. 쿠데타의 지도자이며 자히르 샤의 처남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 장군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했다. 자히르 샤는 공식적으로는 1973년 8월 24일 퇴위했다.
- 제79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 기념 (1994.7.23. 발행)
1994 -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개최 (서울 워커힐호텔)
서울서 [에스페란토 대회] "배우기 쉬운 108국 공통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열린다. 세계 에스페란토 본부 한국 지부(대표 마영태, 단국대 교수)는 오는 94년 7월 23일 서울에서 <세계 속의 아시아>란 주제로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를 열기로 확정,
구체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우리 나라의 에스페란토어 수용 70여 년 만에 처음 열리는 이 대회는 세계 에스페란토 본부 회장인 존 웰스 교수(영국 런던대 음성학)를 비롯, 세계 각국의 에스페란토 전문가, 관련학자들이
대거 참석할 것으로 알려져 국내에 또 한 차례 에스페란토 붐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만국 공통어> 에스페란토는 1887년 폴란드의 안과 의사인 [자멘호프]가 고안해 낸 인공 언어. 처음엔 <희망자에 의해 고안된 국제어>란 뜻으로 이름 붙여진 에스페란토는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언어명으로 굳어졌다.
에스페란토의 특징은 우선 배우기가 쉽다는 점. 인도-유럽어를 기본 골격으로 고안했으나, 관사는 정관사(定冠詞) [la] 하나밖에 없고, 명사는 [어근 + 어미(-o)]로 구성되고, 발음 기호가 따로 없이 철자대로 발음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우리 나라에 처음 우리 나라에 에스페란토가 처음 도입된 것도 일제 강점기 인 1920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시인 김억(金億) 등이 서울 YMCA에서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연 것이 그 시초다.
그 후 조선일보의 [에스페란토 지상(紙上) 강좌] 등을 통해 주로 지식인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됐다.
현재 세계적으로는 헝가리에 6천여 명을 비롯, 1백 8개국에 약 3천만명의 이 언어를 구사하는 <에스페란티스토>가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회원이 약 1천 6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 그 가운데 60세 이상 원로회원들은 창안자의 이름을 딴 [자멘호프클럽]을 구성, 매월 정기 모임을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한편 국내 최대 규모의 <에스페란토-한국어 대사전>이 최근 출간돼 에스페란토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마영태 교수가 6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한 이 사전은 표제어만 1만 5천개, 총수록 어휘 7만개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
마교수는 "국제 에스페란토 협회에서 펴낸 사전의 예문 등을 참조해 이 사전을 만들었다."며
"세계 대회와 함께 이 사전의 출간이 국내 에스페란토 동호인 확대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조선일보](1994. 2. 14) http://ipcp.edunet4u.net/~koreannote/6/6-%EC%97%90%EC%8A%A4
%ED%8E%98%EB%9E%80%ED%86%A0%EC%96%B4.htm
1994년 제 79차 세계 대회가 1,700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다.
1995년에는 이종영 (李種永)이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회장에 취임하여 유엔과 유럽연합 등 국제 기구에 의한
공식 (公式) 언어로서의 채택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曺聖昊)
http://user.chollian.net/~baggang/esperanto/enciklo.htm
1992 -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합의
1992년 오늘,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총리와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슬로바키아 총리가 회담을 갖고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을 해체하기로 합의한다. 1918년 하나의 연방으로 합병된 지 74년 만에 갈라서게 됐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각각 천만명과 5백만명의 인구비율에 입각해 2대1로 모든 연방재산을 분할하기로 하고
해체 시기를 같은 해 9월 말로 잡았다.
연방의 실제 해체는 계획보다 석 달이 지연돼 이듬해 1월 1일 이뤄진다.
1986 - 앤드루(Andrew) 영국 왕자 결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1986년 오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한다.
신부는 장교의 딸 사라 포거슨(Sarah Ferguson)!
신랑과 신부는 스물여섯 살 동갑이다.
앤드루 왕자 부부는 결혼한 지 10년 만인 1996년 5월 이혼한다.
1974 - 그리스 군부통치 종식
1974년 오늘, 파에돈 기지키스 그리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회의를 소집해 군정을 접기로 결정한다.
기지키스는 8일 전 일어난 쿠데타로 키프로스가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했다.
1967년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지 7년 만이다.기지키스의 퇴진에 따라 프랑스에 망명하고 있던
전 총리 카라만리스가 귀국해 총리에 취임하면서 그리스는 민정으로 되돌아간다.
1965 - 하와이에서 타계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 유해 귀국(19일 사망, 27일 장례식)
1953년 휴전으로 포성이 멈추자 그의 대통령 임기도 끝날 처지가 되었다.
2회 이상의 중임이 금지된 헌법을 고치기 위하여 종신연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안,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변칙적인 계산으로 개정한 후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5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된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의 고비와 국민의 폭발적인 분노로 4·19의거가 일어나 끝내는 하야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나는 항상 국민을 존경한다'라는 하야 성명을 남기고 하와이로 떠났다.
꼭 돌아올 것을 기약한 그날의 새벽 하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 되고 말았다.1965년 7월 19일, 그는 하와이의 미육군병원에서 고국을 그리며 유명을 달리했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터득하였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은 그의 결정적인 과오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가 차지했던 국민의 신망,
그리고 탁월한 정치적 식견으로 보아 분명히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 되어주어야 했다.
그가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여 정권 교체의 정도를 지켜 주었더라면 그는 역사가 말하는 국부적인 인물이었을턴데.
하와이의 트리폴리 미육군병원에서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나를 고국에 데려가 주오.'였다.
http://www.songpr.com/flag3-%EC%9D%B4%EC%8A%B9%EB%A7%8C.htm
1961 -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한국과 코트디부아르 양국은 1961년 7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6년 2월 16일 주(駐)코트디부아르 대한민국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한국 주재 공관은 1997년에 개설하였다. 겸임국은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라이베리아이다. 코트디부아르는 북한과 1985년 1월 9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월에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다가 1992년 12월 철수하였다.
코트디부아르는 모든 나라와의 우호관계 추구라는 보편성에 입각한 대외정책 기조에 따라 남북한 균형외교를 추구하지만,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북한의 집요한 외교공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평화통일정책, 남북대화 추진, 남북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동시가입 등의 주요 사안에서 일관되게 한국을 지지해왔다.
또한 한국의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진출 등 각종 국제무대에서도 한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우호협력 차원에서 코트디부아르에 차량·의약품·농기구 등을 무상으로 원조하고 의료단을 파견하였으며,
전문 기술자를 통한 기술교육도 실시하였고, 정치·경제·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양국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1998년 12월 현재 교민수는 약 200명이며, 이들은 주로 사진현상업에 종사한다.
1952 - 나세르 주도 무혈 쿠데타 발발
1952년 7월 23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영국 지배하의 이집트 왕조를 타도하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밀 혁명조직
'자유장교단'의 89명은 파루크 1세를 망명시키고, 모하마드 나기브 소장이 명목상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나세르가 이끄는 11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평의회는 정부를 장악했다. 1954년 봄 복잡한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 나기브는 해임·연금당하고 나세르가 막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총리가 되었다. 1956년 나세르는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이집트 헌법을 공포해 통제권을 장악하고,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기도 했다. 나세르는 18년간 이집트의 정치 지도자로 있으면서 아랍 연합공화국을 세우고, 요르단 내전을 중재하는 등 아랍 세계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사후 안와르 아스 사다트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951 - 프랑스의 장군 페탱(Petain, Henri Philippe) 사망
페탱 [Petain, Henri Philippe, 1856.4.24~1951.7.23]
프랑스 현대사에서 영욕의 교차가 가장 뚜렷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앙리 필립 페탱이다. 그는 군인으로는
영웅이었으나 정치가로는 반역자였다.
1차대전 4년간을 거치면서 대령에서 원수로까지 승승장구할 만큼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에게는
늘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병사들에게도 페탱의 인기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가 지휘하면 죽을 확률이 적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성품도 온화했다.
국민적 영웅이 어느날 갑자기 반역자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히틀러가 1940년 6월에 속전속결로 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면서였다. 정부가 남으로 후퇴하자 800만명에 가까운 민간인들도 뒤를 따랐다. 대탈주극이었다. 지도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휴전을 원하는 그룹에는 페탱이 있었고, 항전을 원하는 쪽에는 드골이 있었다.
실권을 잡은 페탱이 라디오로 히틀러에게 휴전을 제의하자 드골은 이튿날 런던으로 망명, 철저 항전을 호소했다.
6월22일, 독일과 휴전했지만 사실상 항복이었다. 이로써 북쪽에는 독일군이 주둔했고, 남쪽에는 히틀러의 묵인 아래 전원도시 비시에 세운 '비시 정부'가 들어섰다. 괴뢰정부였다. 젊은이들은 독일로 끌려갔고, 기업들은 군수품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나고 재판에 회부됐지만 페탱도 할 말은 있었다. 프랑스 남쪽이 그나마 독일군의 군화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에게 협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돼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51년 7월23일 95세로 되섬에서 옥중 사망했다.
1942 -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명령
1933 - 영국의 건축가 로저스(Rogers, Richard) 출생
1931 - 아동문학가 방정환(方定煥) 사망
1903 - 포드 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1899 - 독일의 정치가 하이네만(Heinemann, Gustav) 출생
1898 - 멕시코의 역사학자 코시오 비예가스(Cosio Villegas, Daniel) 출생
1892 -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I) 출생
1886 - 영국의 비행기 조종사 브라운(Brown, Arthur Whitten) 출생
1871 - 벨기에의 교육학자, 의학자 드크롤리(Decroly, Ovide) 출생
1864 - 필리핀 혁명의 이론가, 주창자 마비니(Mabini, Apolinario) 출생
1856 - 인도의 정치가, 사상가, 언론인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1832 - 그리스의 정치가 트리쿠피스(Trikoúpis, Kharílaos) 출생
1792 - 러시아의 시인, 비평가 비야젬스키(Vyazemsky, Pyotr)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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