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2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46 - 유대인 게릴라, 영국총독부 폭탄테러
1946년 오늘! 유대인 게릴라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킹 데이비드(King David)호텔을 폭파한다.
이 호텔에는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던 영국 총독부와 헌병 사령부 등이 있었다. 이 폭탄테러로
영국인 28명과 아랍인 41명, 유대인 17명 등 모두 91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막은 영국 총독부에 대한 보복성 테러였다. 유대계 테러단체인 이르군
쯔바이 레우미(Irgun Tsvai-Leumi)의 소행으로 밝혀진다.
이 테러를 지도한 사람은 훗날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 메나헴 베긴(Menahem Begin)이었다.
2) 1972 - 소련 무인탐색선 베네라 8호 금성 착륙
베네라 8호(Venera 8)
소련의 금성 탐사선, 1,180 kg
발사 ; 1972년 3월 27일
베네라 8호는 1972년 7월 22일에 금성에 도달하였다. 베네라 8호는 금성 대기 속을 내려 가면서 바람의
속도 변화를 측정하여 48 km 성공에서는 초속 100 m, 42 내지 48 km 상공에서는 초속 40 내지 47 m,
그리고 고도 10 km 이하에서는 초속 1m 이하의 미풍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베네라 8호는 금성 표면에 도착한 후에도 50분 동안 자료를 전송하였다.
http://phys.suwon.ac.kr/~kdh/solafact/craft/venus.htm
베네라’ 탐색선이 밝힌 금성의 비밀들
72년 7월에 동 혹성의 표면에 한 덩어리의 장비를 착륙시킨 일이 있었는데, 동 실험 장비는 50분간 신호를 발신하였었다. 그로 인하여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1972년 9월 25일자 「타임」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베네라’ 탐색선이 밝힌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은 적어도
표면의 일부분의 화학 구성이 지구의 표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베네라’ 우주선에 장치된 ‘감마’선 분광계에 의하여
착륙 지점의 표토는 방사성 ‘칼륨’, ‘우라늄’ 및 ‘토리움’이 지구상의 화산암에서 나타나는 정도의 비율로 함유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금성이 마치 지구, 화성 및 달처럼 ‘변이되었다’는 사실, 즉 금성이 한때는 물질이
누그러지고 유동하는 상태로 있었으리만큼 뜨거웠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무거운 원소들은
내부 중심부로 침착해 들어가고 반면, 가벼운 원소들은 방사능 원소를 이끌고 표면으로 분출하여 지각을 형성하였다.”
동 혹성의 대기는 주로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동 대기압은 지구의 기압의 90배 내지
그 이상에 달한다.
금성에 관한 또 다른 발견은 동 혹성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 층, 천문학자들이 강력한 망원경을 통해서도 금성의 표면을 결코 볼 수 없도록 빽빽하게 가리워 있던 구름과 관련이 있다. 태양의 광선이 이 구름의 막을 침투할 수 있는가? 오랫 동안 이 문제에 관한 이론들이 구구하였었다. 그러나 소련의 ‘베네라’ 8호 탐색선은 다양한 광도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광도계를 싣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1972년 11월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광도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태양 광선은 대기로 말미암아 크게 제한을 받고 있었다. ··· 그리고 광선의
일부분이 낮시간 동안 표면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음이 나타났다.” 「타임」지는 “소련의 과학자들은 금성에 쏟아지는
태양의 방사광의 3분의 2가 빽빽한 구름 막을 침투하여 표면의 도달하고 있음을 측정할 수 있었다”라고 보도하였다.
금성의 풍속은 30‘마일’의 고도에서는 시속 110‘마일’에 달함이 발견되었는데, 이 속도는 지구에서의 ‘제트’기의 분사
기류의 속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표 근처에서는 풍속이 시속 약 4‘마일’에 불과하다.
또 다른 발견은 동 혹성은 밤 시간 동안에도 냉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 혹성의 대기는 소위 “온실의 효과”를 내어 밤에 열이 방출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면 이러한 열기의 온도는 얼마나 되며, 이로 보건대,
금성에 생물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베네라’ 8호 우주선으로부터 발신된 신호는 금성의 표면의 온도는 화씨 약 880도로서 납이 녹는 온도보다도
250도 가량이 높다! 그러므로 1972년도 「사이언스 이어」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이 기재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 신호들은 높은 온도와 혹심한 기압 때문에 금성에 인간이 살 수 없으리라는 이전의 예상을 확증하였다.”
내용출처 : [Awake!] 1973년판 참조 http://k.daum.net/qna/view.html?qid=01bBA
3) 1933 - 윌리 포스트(Post, Wiley), 최초로 세계 일주 비행에 성공
윌리 핼드맨 포스트(Wiley Hardeman Post, 1898년 11월 22일~ 1935년 8월 15일)는 비행기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최초의 비행사이다. 미국 텍사스 주 반잔트에서 태어난 그는 고도를 높게 택해 비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가 입었던 비행복은 기압복의 원류 중 하나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가 사용했던 비행기는 합판으로 외압을 견디는 모노코크 구조였는데 현재 미국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의 우드바-헤지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비행복도 진열 준비 중이다. 포스트는 1935년 8월 15일 작가 윌 로저스와 비행하던 중
알래스카 최북단점 중 하나인 배로우 포인트(Barrow Point) 인근에서 늪가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Wiley Post 아래 우표, 자세히 보면 우주복 비슷한거 있어요. 이걸 발명해 입고 50,000 피트까지 올라가서
최초로 제트기류도 발견했구요.. 松岩 2008.7.22)
1) 2) 3)
1) 1977 - 유엔안보리, 베트남의 유엔가입 승인
베트남이 통일된 지 2년 후인 1977년 9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이 유엔에 가입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가하였고 초대 유엔 대사가 된 하 반 라우는 "이 기간 동안 1,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최소한 각 가정마다 1명씩은 전사 아니면 부상당한 사람이 있었지요.
부상자들을 돌보고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평화를 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련은 전후 복구를 위하여 30억 달러를 지원했고, 베트남은 100여 개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미국만 유일하게 중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었기 때문에 하노이와의 관계 개선에 소흘했다.
http://cafe3.ktdom.com/vietvet/vietwar/hist19.htm
2) 1943 - 패튼, 시칠리아섬 점령
[책갈피 속의 오늘]1943년 패튼, 시칠리아섬 점령
“미국이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똥 같은 소리! 미국인들은 원래 싸움을 좋아한다. 그 열기를 사랑한다.
다만 패자를 혐오할 뿐이다. 진다는 생각 자체를 참을 수가 없다.”
독일군에 로멜이 있었다면 연합군엔 패튼이 있었다.
그는 장군이라기보다는 전사(戰士)였다. 거친 야수였다. 장갑차에 탄 그는 로마시대 전차를 탄 전사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언제나 선봉에 섰다. 그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최전선에 그가 있었다.
대담한 발상과 거침없는 전진,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력은 독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패튼의 군대’는
이름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사막의 여우’를 사막에서 몰아낸 ‘북아프리카 작전’(1942년)과 ‘시칠리아 진격’(1943년)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은 그의 무용담으로 넘친다.
주력인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을 지원하는 게 그의 임무였으나 패튼은 자주 독자적인 공격명령을 내려 심기를 거슬렸다.
1943년 7월 시칠리아에서는 몽고메리와 치열한 선두경쟁 끝에 열이틀 만에 수도 팔레르모를 함락시킨다.
신중하다 못해 “몸을 사린다”는 말을 들었던 몽고메리. 그에게 패튼은 ‘불안한’ 아군(我軍)이었다.
패튼은 독불장군이었다. 다혈질이었다. 오죽하면 부하들이 ‘흉악한 늙은이(Old Blood-and Guts)’라고 불렀을까.
1943년 8월 한 야전병원에서 ‘전쟁 노이로제’에 걸린 병사에게 “겁쟁이는 필요없다”며 뺨을 후려쳤다.
구타사건으로 그는 한동안 면직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절대 보안이 강조됐으나 그는 출정식을 벌이고 연설을 했다.
그는 지휘관에 대해 “유능하고 말이 없으면 이긴다. 무능해도 말이 없으면 지지는 않는다”라고 강조했으나
그 자신의 ‘입’은 어쩌지 못했다. 전쟁 영웅의 죽음은 허무하다.
1945년 12월 타고 있던 승용차가 군용트럭과 충돌해 목뼈가 부러지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숨을 놓으며 탄식했다. “군인다운 죽음은 이게 아닌데….”
모든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그러나 이 ‘전신(戰神)’에게 모든 평화는 단지 전쟁을 기다리는 시간에 불과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7-21 19:2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721/8086129/1
3) 1898 - 미국의 시인, 소설가 베네(Benét, Stephen Vincent) 출생
베네 [Benét, Stephen Vincent, 1898.7.22~1943.3.13]
미국의 시인·소설가·단편작가.
남북전쟁을 다룬 긴 이야기체 시 〈존 브라운의 유해 John Brown's Body〉로 유명하다.
문학 취미를 가진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군대주둔지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스티븐과 형 윌리엄 로즈,
누이 로라에게 큰 소리로 시를 읽어주곤 했는데, 이들은 모두 작가가 되었다. 스티븐은 17세 때 첫 시집을 펴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행정병으로 근무하느라 예일대학교를 휴학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논문 대신에 3번째 시집을 제출하고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극찬을 받은 〈윌리엄 시커모어의 발라드 Ballad of William Sycamore 1790~1880〉(1923)와 장편소설 3편, 단편집 1권을 발표한 뒤 프랑스로 가 그곳에서 가장 널리 읽히게 된 작품 〈존 브라운의 유해〉(1928)를 썼다. 1953년 찰스 로턴이 연극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프랑스 전역에서 공연되었다. 아내 로즈머리 카와 함께 쓴 시집 〈미국인의 책 A Book of Americans〉
(1933)은 미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생생하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작품이다.
역사적 주제에 몰두해서 쓴 또다른 작품은 〈서부의 별 Western Star〉이다.
미국 이야기를 다룬 이 야심작은 1934년 5권을 목표로 구상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전한 작품인 제1권은 1942년에 완성되었으며 죽은 뒤에야 출판되었다. 모두 합해서 17권이 넘는 산문과 시를 발표했다.
민담에서 나오는 주제를 해학적으로 다룬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 The Devil and Daniel Webster〉(1937)는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더글러스 무어가 작곡한 오페라, 희곡, 영화로도 각색되었다.
찰스 펜턴의 〈스티븐 빈센트 베네 Stephen Vincent Benét〉(1958)는 가장 권위있는 전기이다.
2000 - G8 (서방선진 7개국 + 러시아) IT헌장 채택
2000년 7월 22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G8 (서방선진 7개국 + 러시아) 정상회의에서 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정보사회에 관한 오키나와 선언`(IT헌장)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인터넷시대를 맞아 지구촌 정보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선언은 통신 등 상품-서비스 시장의 경쟁증진, 국제 비즈니스 모델 특허기준 설정, 각국의 규제완화 및
소비자안전 확보, 국가간 디지털 격차 해소 등 IT 증진을 위한 4대 방안을 제시했다. 이 회의는 또 전자상거래 활성화,
IT교육훈련 확대, 국가간 정보통신정책 조율 등을 총괄하는 `닷포스(Dot Force)` 설치에 합의했다.
1991 - 제프리 다머의 광적인 살인극 '밀워키 호러' 발각
오늘 이야기는 아주 끔찍하다. 비위가 약한 독자들은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1991년 7월22일 미국 위스컨신주
밀워키의 우범 지대를 순찰하고 있던 패트롤카로 겁에 질린 젊은이 하나가 급히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수갑이 채워진 이 청년은 자신이 부근의 아파트에 불려갔다가 살해되기 직전에 탈출했다고 경찰관들에게 말했다.
청년이 가리킨 아파트를 수색한 경찰은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참기 힘든 악취가 아파트 전체에
진동했고, 사람의 두개골 일곱 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상자에는 사람의 머리 넷과 잘린
사지들이 담겨있었고, 바닥에는 다량의 LSD와 조각난 사체들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
경찰은 즉시 이 아파트의 세입자 제프리 다머(Dahmer, Jeffrey, 1960.5.21~1994.11.28)를 체포했다. 평범한 외모를
지닌 31세의 이 백인 남자는 초콜릿 공장 노동자였다. 11명의 젊은 남자를 죽인 뒤 사체를 토막내
그 일부를 먹었다는 것이 다머의 처음 자백이었다. 주로 흑인들을 점 찍은 뒤, 사진을 찍게 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꾀어 자기 아파트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다머는 이렇게 유인한 사람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희생자들의 머리를 물에 펄펄 끓인 뒤
두개골을 말끔히 닦아 간직하기도 했다. 또 희생자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의 모습, 막 죽은 뒤의 모습, 토막난 모습을 따로 사진에 담기도 했다.
체포되고 사흘 뒤 다머는 지난 10여년 동안 여섯 명을 더 죽였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그 가운데 첫 번째 희생자의 유골만을 다머의 고향 집 근처 숲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이 희생자는 1978년 다머의 차에 편승한 히치하이커였다. 다머는
징역 93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은 두 해 남짓으로 그쳤다. 1994년 동료 복역수의 곤봉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오늘속으로<858>(7월22일) 밀워키 호러 - 고종석] www.politizen.org
1961 - 경제기획원 신설, 경제재건 5개년 계획 발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오늘 경제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국민경제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해 양적 성장과 아울러 질적 발전, 그리고 국민생활의 향상에 중점을 둔
5년 단위의 경제계획이다. 이 계획은 경제기획원에 의해 수정보완된 뒤 이듬해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꿔 시행된다.1962년부터 1981년까지 4차에 걸쳐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고 1982년부터는
명칭이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바뀌어 시행된다.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 발표
박정희는 농업부문을 경제계획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 ’농산물 가격안정‘등 일련의 중농정책을
펼쳐나간다. 이때 박정희는 자원의 빈곤에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인력개발을 통한 수출만이 경제개발의 관건이라고
결심하고 수출진흥에 역점을 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한다.
공업화에 중점을 둔 그들은 1961년 7월 22일, ‘종합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이는 민간인의 창의를 존중하되, 정부의 지도아래 산업의
근대화와 국민소득의 증대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66년까지를 기간으로, 前정권이 해결하지 못한 무능과 가난을 타파하려고
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등 주요역점 사업을 발표했다. 그 결과 국민총생산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했고,
2차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차츰 공업국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성우 (lsw1203) 2006-08-11 조인스 토론방
http://assembly.joins.com/content.asp?tb_name=d_politic&board_idx=36502&page=1
1906 -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연재 시작
1906년 7월 22일 한국 최초의 신소설 작품인 이인직의 <혈의 누> 상편이 <만세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하편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1913년 2월 5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모란봉>으로 알려져 있다. <혈의 누>는
1894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자주의식의 각성, 신학문의 유입에 따른 자유결혼, 재가허용 등의 신결혼관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저자인 이인직은 이밖에도 <귀의 성> 등의 작품을 더 남겼으며,
연극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1908년 원각사를 세워 한국 최초의 신극이라 할 수 있는 <은세계>를 공연하기도 했다.
1906 - 드레퓌스 공식 복권
1906년 7월 22일 반역 혐의로 체포된 프랑스의 장교 드레퓌스(Dreyfus, Alfred)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라페르'(l'Affaire:사건)라고도 불리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역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894년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원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죄로 고발당해 12월 22일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의 섬'이라는 악명 높은 범죄자 수용소에서 종신형을 살도록 선고받으면서부터이다. 반유대주의파가 이끌던 여론과 프랑스의 언론들이 이 선고를 환영했으나 몇 가지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제목으로 공개 서한을 발표하면서 이 사건은 국민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하라는 탄원서에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를 비롯한 3,000여 명의 프랑스인이
서명하면서 문제는 더욱 불거졌다. 그러던 중 관련 문서를 조작한 앙리 소령이 문서를 위조했음을 고백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재심에 들어갔고 1906년 6월 상고법원이 그의 결백을 밝혀냈다.
1899 - 스와질란드 국왕 소부자 2세(Sobhuza II) 출생
소부자 2세 [Sobhuza II, 1899.7.22~1982.8.21]
별칭은 Ngwenyama
(스와지어로 '사자'라는 뜻).
스와지의 왕(1921~)이며, 스와질란드 왕국의 왕(1967~82 재위).
아버지 응그와네 5세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죽었으며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 그는 스와질란드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주의 러브데일대학에서 교육받았으며 1921년 12월 22일 스와지 왕국의 합법적인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당시 스와질란드는 영국이 고등판무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아프리카 남부의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1967년에 비로소 외교와 국가안보에 대해서는 영국이 통제력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자치왕국이 되었다. 이듬해 헌법으로 군주권을 제한하고 선거를 통해 입법부를 구성해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5년도 채 되지 않은 1973년 4월 소부자는 은밀히 양성한 사병(私兵)을 동원해 헌법을 중단시키고, 입법부를 해산했으며,
정당을 금지시켜 절대적인 통치권을 장악했다. 1979년 새 의회(Libandla)가 만들어졌으나 그것은 정당의 기반 없이
선출되어 자문 역할을 하는 기구에 불과했다. 또한 그는 정략결혼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여러 차례(적어도 70회) 결혼함으로써 모든 유력 가문들을 자신의 성과 같은,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들라미니와 관계를 맺게해 나라의 결속력을 다졌다. 스와지의 어떤 역사가는 67명이나 되는 소부자의 아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역사가는 무려 500여 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 마크호세티베가 섭정을 하다가 1986년에 음스와티 3세로 즉위했다.
1898 - 미국의 조각가 콜더(Calder, Alexander) 출생
콜더 [Calder, Alexander (Stirling), 1898.7.22~1976.11.11]
모빌 조각을 창시한 미국의 조각가.
모빌은 정교하게 균형을 맞추어 매달아놓은 부품들이 동력이나 기류에 따라 운동하도록 만든 키네틱 조각의 일종이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의 조각은 스테이빌이라고 부른다. 철사를 이용한 소규모 작품들도 많이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조각가였으며, 어머니는 뛰어난 화가였다. 전통을 존중하는 미국 미술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미술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잦은 여행과 이사를 한 것을 빼놓으면 그의 어린시절은 20세기초 대다수 중산계급의 미국 아이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 어린시절에 관한 그의 추억은 대부분
가족 일과 운동, 친구관계 등이 전부이다. 물건 만드는 일과 기계장치들을 좋아했다는 점이 아마도 이후의
생애를 암시해준 유일한 징표였던 것 같다.
뉴저지 주의 호보컨에 있는 스티븐스 기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9년 기계공학학위를 따고 졸업했다. 한동안 널리 여행을 다녔으며 여러 기술직에서 일했다. 1922년 뉴욕에 있는 한 야간학교에서 데생을 배웠으며, 1923년 아트스튜던츠리그에 들어가 존 슬론과 조지 룩스 등이 이끄는 이른바 애시캔파(派)라는 뉴욕 풍경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그의 바람은 당대의 많은 미국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삽화나 상업미술 분야에서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얻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24년 〈내셔널 폴리스 가제트 National Police Gazette〉에서 프로 복싱 시합과 서커스의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틀에 박힌 상업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26년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다. 파리에서 조각을 하면서 취미 삼아 나무와 철사를 이용해 장난감 같은 동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들로 소형 서커스(뉴욕 휘트니 미술관)를 개발했으며, 파리에서는 많은 주요 미술가들과 문필가들이 이 서커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 서커스의 작은 조상(彫像)들과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는 드로잉에도 관심을 가져 철사를 이용한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봄 Spring〉이라는 2m 높이의 여인상(像)과 〈로물루스와 레무스 Romulus and Remus〉라는
길이가 3.3m에 이르는 암이리 등이 있는 군상(群像) 등이 그것들이다.
서커스를 전시할 때 파리에서 만난 미술가들 중 그의 이후 생애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마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호안 미로였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 초현실주의가 첫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콜더는 이 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미술계'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미로와는 계속 가까이 지냈다. 1930년 네덜란드 화가인 피에트 몬드리안을 알게 되어 그의 화실에 들렀는데,
이 일로 해서 그는 하루 아침에 그림의 현대적 동향을 알게 되었으며 여기에 영향을 받아 추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1~32년 겨울,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모양들로 이루어져 동력으로 움직이는 조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르셀 뒤샹이 이 조각들에 모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조각은 각 부분들이 움직이면서 서로의 관계가 변하기 때문에 그 구조도 끊임없이 변모한다. 그 다음해에 이와 비슷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작품들을 발표하자 장 아르프는 이것들을
스테이빌이라고 불렀으며, 그뒤로 콜더도 이 말을 사용했다. 1932년부터는 대부분의
모빌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1931년 자신의 결혼반지를 만들면서 그는 장신구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같은 해에 〈이솝 우화 Fables of Aesop〉에 들어갈 삽화들을 그리기도 했고 1940년대에도 다른 많은 책의 삽화들을 그렸다.
1930년대에 콜더는 모빌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작품이 처음 주목받게 된 것은 1937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였는데, 그는 그곳 스페인 분관(分館)을 장식할 수은 분수를 만들었다. 이 조각은 회전막대에 붙어 있는 판에 와닿는
수은의 흐름으로 움직였다. 이때부터 콜더의 명성은 유럽과 미국에서 해마다 열리는 전시회들을 통해 계속 높아졌으며, 1943년 뉴욕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로 절정에 이르렀다.
초기 작품은 비교적 크기가 작았지만 후기 작품들은 점점 크게 만들어나갔다. 거대한 스테이빌로는 1952년 카라카스에 있는 센트랄데베네수엘라대학교의 강당에 설치하기 위해 설계한 음향조절 천장이 있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처음 개최한 '미술에서의 움직임'에 관한 전시회(1961)에서는 콜더와 그의 제자들의 작품이 부각되었고 1960년대를 거쳐 독일의 카셀과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파리 현대미술관 등에서 큰 전시회를 몇 차례 열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1년 루이저 쿠싱 제임스와 결혼한 뒤 프랑스와 미국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함께
여행을 다녔다. 1955, 1956년에는 인도를 방문했으며 거기서 11개의 모빌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 콜더는 프랑스에서 투르 근처의 사셰에 작업실을 차렸으며, 그곳에서 그의 주요 스테이빌들을 설계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선화(線畵)와
채색화들을 실험했다. 큰 작품들을 만들 때는 흔히 작은 모형을 만든 뒤 투르에 있는 주물공장에서 확대했다.
콜더는 주로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코네티컷의 록스버리에도 집과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모터의 동력을 이용해 움직이도록 만든 키네틱 아트(Kinetic Art)와 달리 콜더의 모빌은 바람을 이용해 움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움직이는 조각 모빌에 비해 고정된 조각 스테이빌은 건축재료인 철제 빔을 휘고 자르고 붙여 만들어
도시 공간에 환경조각으로 설치하기에 딱입니다. 참, 콜더의 아버지(Alexander Stirling Calder, 1870~1945)도
유명한 조각가로 바이킹 Leif Erikson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
Mobile - 얇은 철판을 철사에 매달아 바람에 움직이게 만든 '움직이는 조각'
Stabile - 건축재료인 철제 빔을 휘고 붙이고 하여 만든 웅장한 규모의 고정된 조각
1895 - 소련의 항공기 제작자, 설계자 파벨 수호이(Sukhoi, Pavel) 출생
수호이 [Sukhoi, Pavel Osipovich, 1895.7.22~1975.9.15]
1887 -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Hertz, Gustav) 출생
1882 -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호퍼(Hopper, Edward) 출생
1822 -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성직자 멘델(Mendel, Gregor) 출생
1784 -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Bessel, Friedrich) 출생
1676 - 로마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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