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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20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2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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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8 - 국회, 초대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 선출

국회 제 33차 본회의에서 이승만의원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 날 역사적인 첫 대통령 선거의 후보에는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이승만, 무소속의 김구와 안재홍 등 3명이 출마했다.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재적의원 198명 중 197명이 투표한 결과, 이승만이 180표를 획득해 13표를 얻은 김구, 2표를 얻은 안재홍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시영이 133표를 획득해 62표를 얻는데 그친 김구를 제치고

초대 부통령에 선출됐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9 19:21:36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2) 1978 -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준공식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가 7년 7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978년 7월 20일 준공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력발전소 보유국이 됐다.
당시 원자력 1호기의 시설용량은 58만7천kw로 우리나라 전체 발전용량 6백59만kw의 9%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외자 8백40억원 등 총 1천5백60억원의 공사비가 든 고리원전 1호기는 발전 시설용량 58만7천kw의 가압경수로형으로서 당시 국내 기술이 전무해 미국의 웰코사가 전반적인 건설책임을 지고 원자로 설비와 연료공급을 맡았고 영국에 제너럴일렉트릭사가 터빈 발전기 공급과 토건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현대와 동아건설이 원자로와 터빈 공사에

하도급업체로 참가했다.세계각국이 급증하는 전력의 공급선을 공해가 비교적 적은 핵에너지에서 찾기 시작한 것은 고리원전 1호기 준공일로부터 불과 20여년전의 일이었다. 1956년 9월, 영국의 칼더홀 원자력발전소가 세계최초의 상업발전을 시작한 이래 각국은 다투어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에너지자원이 부족하기만 했던 우리나라도 새로운 에너지원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962년 원자력발전소 건설구상을 하기 시작, 1971년 고리원전 1호기를 착공, 7년 7개월 만인 1978년 오늘 그동안의 온갖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준공됐다.

 

[고리원전 1호기 연혁] 

1971.03.19  한국전력-웨스팅하우스(WH) 고리원전 1호기 건설계약 체결

1971.11.00  고리원전 1호기 착공

1977.06.19  고리원전 1호기 초임계(원자로 점화, 핵분열 시작)

1978.04.29  고리원전 1호기 상업가동 시작

1978.07.20  고리원전 1호기 준공(식)

 

3) 1985 - 남아공 보타 대통령, 비상사태 선언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거의 전쟁 상태나 다름없었다. 백인 소수정부는 비합법인 아프리카인민족회의(ANC)에 의한 산발적인 게릴라 습격과 학생단체, 노동조합, 지역조직 연합체인 통일민주전선(UDF)의 봉기에 직면해 있었다.

UDF는 돌과 화염병만으로 무장한 남아공 군인들과 싸워 나갔다. 보타 대통령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21일 0시부터

비상사태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흑인 데모대를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월말까지 약 천여명 이상을 체포했다. 이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지자 각국에서 시민운동이 일어나 남아공을 제재하라고 자국 정부에 강력 요구했다. 첫 조치로 뉴욕에 있는 체이스 맨해튼은행이 남아공의 채무연기를 중지한다고 발표하자 다른 은행들도 동참했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남아공 기업가들이 ANC 간부와 협상을 벌여 한정적인 개혁을 이끌어 냈지만 남아공에서의 인종차별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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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7 - 멕시코의 음악가 카를로스 산타나(Santana, Carlos) 출생

산타나 [Santana, Carlos (Augusto Alves), 1947.7.20~ ]

카를로스 산타나 (Carlos Augusto Alves Santana 1947년 7월 20일 ~ ) 는

멕시코의 음악가이자 라틴 록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그의 산타나 블루스 밴드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살라, 록, 블루스,

재즈가 융합된 그의 음악은, 고음에 클린 기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팀발레나 콩가같은 라틴 악기들을 이용한다.

카를로스 산타나는 이와 같은 형태의 음악을 계속해서 해 나갔으며, 1990년대 말부터,

다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의 음반은 전 세계에 걸쳐 총 8000만 장 넘게 팔려 나갔다.


2) 1973 - 미국의 영화배우 브루스 리(李小龍, Bruce Lee) 사망

리(이소룡) [李小龍, Bruce Lee, 1940.11.27~1973.7.20]



브루스 리(이소룡) 사망

불세출의 쿵푸 스타 브루스 리(32)가 애인인 여배우 베티 팅 베이의 맨션에서 쓰러져 홍콩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73년 7월 20일 사망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영화계 흑막에 의한 암살`, `뇌수종ㆍ가슴통증 때문에 마셨던 진통제에 의한 알레르기 반응` `애인 베티 팅 베이와 성관계 중 돌연사`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는 그때까지 당시 미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뛰어난 액션으로 미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인 그는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누리며 영화회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와 계약한 후 1971년 홍콩 골든하베스타사(社) 제작의 `당산대형(唐山大兄)`에 출연하면서부터 크게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진부하고 유치했지만 빛나는 그의 육체미가 영화의 성공에 한 몫을 담당했다. `비폭력 맹세를 하고

꾹 참아오지만, 악인의 비도덕적 행위에 결국 철봉을 휘두른다` 라는 캐릭터가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미국사회에서 받아야하는 갖가지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실력으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계속해서 그는 `정무문(精武門)` `용쟁호투(龍爭虎鬪)` 등의 영화를 통해 중국인의 강한 이미지를 서양인들에게

 심어 주었다.그러나 이날 돌연 요절한 것이다. 액션 배우가 된 그의 아들 브랜든 리마저 1993년 `The Crow`

촬영중 실탄이 장착된 줄 모르고

연기하다 발생한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자 이후 `저주받은 부자(父子)`라고 불리워지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3) 1945 -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Valéry, Paul) 사망

발레리 [Valéry, Paul, 1871.10.30~1945.7.20]

프랑스의 시인이며 비평가,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가 1945년 7월 20일 74세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국장을 거쳐

고향 해변의 묘지에 안장됐다.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태어난 발레리는 그의 대표적 평론집 '바리에테'에서

전생애에 걸친 그의 다양한 관심을 쏟아냈다.

1919년 이래 20여년간에 발표된 주요 논문, 연설, 강연, 수상 등을 다섯 권, 1천여 페이지에 수록한 이 책은 '다양성'이라는 뜻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철학 미학 정치평론 시론 교육론 회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담고 있다. 탁월하고 명쾌한 지혜와 비평정신이 돋보이며 프랑스 산문 문학의 한 정점을 이룬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2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 뒤 수많은 문학ㆍ학술 단체의 대표를 지냈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발레리는 평론가나 사상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어려서 법학자의 꿈을 간직했던 발레리가

첫 시를 쓴 것은 1888년이다. 주로 상징주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는 북유럽인과는 다른 지중해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하여 명쾌하고 지적이며 정서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시 '젊은 파르크'는 19세기 프랑스에 개화한 상징시의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레리는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도구로 시를 상정했다. 그에게 시란 자기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도구였고 그 과정을 엄격하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이 시였다. 발레리는 1888년∼1891년에 걸쳐 많은 시를 썼고, 그 중 몇편은 상징파를 표방하는 잡지에 발표해 호평을 받았지만, 예술적 좌절감과 짝사랑에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1892년에는 감정에 몰두하기를 거부하고 갖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처분해버렸다. 1894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몇시간 동안 과학적 방법론과 의식 및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묵상에 잠겼으며, 자신의 단상과 잠언들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유명한 '노트'로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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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6 - 美 무인우주선 바이킹1호 화성 연착 성공

미국 NASA의 무인우주선 바이킹1호가 1976년 7월 20일 11개월간의 비행 끝에 화성 크리세 플래니티아(황금의 땅)에

연착륙하는데 성공, 지구의 사막 지형과 놀랍도록 유사한 바위투성이의 화성표면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화성의 신비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착륙 25초 후부터 화성표면 사진촬영에 들어갔고

19분 만에 지구로 첫신호를 보냈다.

우주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화성탐사를 진행해왔던 미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 사진촬영, 토양분석, 기상관측, 그리고 최대의 관심사인 `화성에는 지금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과거에 존재했었는가`의 조사를 목적으로

약 1년 전 2대의 무인탐사기를 쏘아올렸다.

착륙후 주변풍경 관찰과 기상관측, 그리고 대기와 토양 분석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생명활동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화성표면이 바위투성이의 검붉은 사막으로 구성되어있고, 토양 분석 결과 희박하게나마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생명체의 4대 요소인 질소 산소 수소 탄소가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약 1개월 후 다시 발사된 `바이킹2호`가 지진계 고장으로 지진관측의 임무를 다 하지 못한 `바이킹1호`를 대신함으로써 화성이 지구보다 내부의 활동이 적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 바이킹계획의 성공으로 지구에 보내진

방대한 사진과 데이터가 화성의 지도작성과 지질학, 기상학 등의 연구에 크게 공헌하게 됐다. 

 

2) 1944 - 독일의 장군 루트비히 베크(Beck, Ludwig) 자살

베크 [Beck, Ludwig, 1880.6.29~1944.7.20] 

독일의 장군.

1935~38년에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그는 라인 지역에 대한 히틀러의 점령(1936)을 반대했으며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1944년 장군들의 쿠데타 계획의 핵심인물이었다(→ 7월암살음모사건). 베크는 제1차 세계대전중 참모본부에서 일했으며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속히 승진해 1935년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결정에 항의하면서 히틀러의 팽창정책에 대한 군의 반대를 조직화하는 데에 실패한 후 1938년 참모총장을 사임했다. 그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공모자들의 지도자로 알려졌고 히틀러가 실각한 후 독일 대통령감으로 예상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실패하자 시중들던 하사관에게 자신의 숨을 거두게 하도록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을 부탁하고 자살했다.

 

3) 1944 -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발생

1944년 7월 20일 독일 육군 중령 클라우스 필리프 셴크 그라폰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국 진영으로부터 보다 유리한 평화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히틀러가 군 수뇌부와 회동하고 있던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스샨체 야전사령부 회의실에 폭탄을 넣은 서류가방을 놓고 나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오후 12시 42분 폭발을 목격하고 히틀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최고사령부를 장악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지만,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게슈타포가 공모자를 찾아나섰다. 즉시 총살된 주모자를 제외한

약 180~200여 명의 공모자가 교수형

 


2007 - 맥도날드 한국진출 1호점 문 닫는다

세계 1위의 햄버거 체인인 맥도날드의 국내 진출 1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맥도날드 압구정점이 문을 닫는다.
한국맥도날드 관계자는 19일 “건물 주인이 임대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밝혀 폐점을 결정했다”며 “20일까지만

영업을 하고 폐점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압구정점 인근에 청담점과 압구정역점이 있기 때문에 압구정점 폐점으로 소비자들의

불편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코카콜라와 함께 미국문화를 상징하는 맥도날드는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3월 국내에 진출하면서 1호점으로 압구정점을 열었다.이후 맥도날드 압구정점은 주말이면 20, 30대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대표적인 명소가 됐다.
외식업계는 맥도날드가 ‘1호점’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압구정점 폐점을 결정한 것을 두고 임대차 계약상의 이유보다는

갈수록 초라해지는 패스트푸드의 위상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맥도날드는 2002년 매장 수가 350개로 늘어나는 등 국내 외식문화의 개척자로 승승장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 2, 3년 새 조류인플루엔자와 광우병 파동으로 고전하다 참살이(웰빙) 열풍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매장 수도 300개 수준으로 줄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롯데리아, 맥도날드, 버거킹, KFC, 파파이스 등 국내에서 영업 중인 5개 패스트푸드업체의

연간 매출액 합계는 2002년 1조2330억 원을 정점으로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며 지난해 8180억 원으로 감소했다.

2002년 1779개에 달하던 매장 수도 지난해 1420개로 줄었다.
정진은 안산1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트랜스지방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큰

20, 30대 소비자들이 패스트푸드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나날이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세운 ‘안테나숍(antenna shop)’을

더는 운영할 수 없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롯데리아도 2년 전 로데오거리에 있는 매장을 닫았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동아닷컴 2007-07-20 02:59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7200049

- 이종범 선수     (공중전화카드)

 

2001 - 이종범 3억5천만원에 기아 타이거즈와 계약

돌아온 '바람의 아들'' 이종범(31)이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3억5천만원에 기아 타이거즈와 계약했다.
이종범은 20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 빌딩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이같은 내용으로 입단 계약을 했다.
이로써 이종범은 종전 프로야구 최고액 연봉 선수였던 이승엽(삼성 라이온즈·3억원)은 물론 프로 최고액 선수였던

프로축구 김도훈(전북 현대·3억3천500만원)까지 제쳐 '최고 스타''의 자존심을 지켰다.
기아는 또 이종범을 위해 연봉 이외에 자사에서 생산하는 엔터프라이즈 승용차 1대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하지만 기아는 3억5천만원이 한 시즌 전체 연봉(10개월)인 만큼 이종범에게 지급될 금액은 남은 시즌중 그라운드에서

뛰게 될 4개월(8∼11월)을 기준으로 계산하겠다고 덧붙여 이종범이 올해 실제로 받는 금액은

1억4천만원 정도로 알려졌다<연합> /김학석 cjh@kyeongin.com 경인일보 2001.07.21 00:00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128#

 

1996 -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

20세기 마지막 지구축제 96하계 올림픽대회가 1996년 7월 20일 오전 9시30분 미국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16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인종 종교 국경을 초월한 온 인류가

한자리에 모인 제26회 하계올림픽대회 개막식은 '지상최대의 쇼'로서 올림픽 최대 하이라이트 '영웅들을 부른다'는

주제로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한국 선수단은 알파벳순에 따라 케냐에 이어 오전 11시10분쯤 남자배구의 기수인 최천식을 앞세우고 96번째로 입장했다.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유도 양궁 배드민턴 레슬링 등에 금 7개 은 15개

동 5개를 획득해 우크라이나(금 9개)에 이어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1996년 8월 5일 주경기장서

폐막식을 끝으로 올림픽 창설 1백년 째에 거행된 애틀랜타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1994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폴 델보(Delvaux, Paul) 사망

델보 [Delvaux, Paul, 1897.9.23~1994.7.20]

벨기에의 화가. 리에주 안타이트 출생. 특이한 초현실주의의 화가로 지목된다. 처음에는 건축을 지망하였으나

화가로 전환하였다. 1920∼1924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초기의 M.블라맹크를 닮은 포브적(fauve :)인 풍경·인물은 벨기에의 표현파 화가 안소르와 페르메크의 영향을 받았다. 얼마 뒤 형이상회화()의

화가 G.키리코에게 자극을 받아 독자적인 꿈과 향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1935년 이후 초현실주의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꿈은 반복을 노리는 것으로 명쾌한 원근법() 속에 반복해서 나형()과 건물이 부상한다. 배경에는 그리스 신전이 자주 쓰이지만,

이것도 순결 그대로의 나부()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증표이다. 그리하여 고전적인 스타일을 활용하여 달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풍경 속을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는 나부를 주제로 그린다.

대표작에 《불안한 거리》(1941) 《메아리》(1943) 등이 있다.

 

1969 - 아폴로 11호 달 착륙

[어제의 오늘]1969년. 인류, 달에 첫발을 내딛다

ㆍ美 자존심 회복한 아폴로 11호




40년 전인 1969년 7월20일, 인간이 처음으로 달을 밟았다.




7월16일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 이글호가 ‘고요의 바다’에

착륙한 것이다. 3명의 우주인 중 아폴로 11호 선장인 닐 암스트롱이 먼저 달에 내려섰다. 암스트롱이 첫발을 내딛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달 착륙선 조종사인 에드윈 버즈 올드린이 암스트롱에 이어 두 번째로 달을 밟았다. 달 표면에서 육중해 보이는

우주복을 입고 찍은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올드린이다. 함께 간 마이클 콜린스는 안타깝게도

비행선을 조종하느라 달에 내리지 못했다.암스트롱과 올드린은 2시간30여분 동안 달 표면에서 암석, 흙 등의 물질을

채취하는 작업을 벌인 뒤 7월24일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암스트롱 등 우주인들은 유명인사가 됐고,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를 소련에 빼앗겼던 미국도 자존심을 회복했다.
각 국은 지금도 치열하게 달 탐사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아예 달에 우주인들이 상주할 유인기지를 설립한다는 계획 아래 달에서 물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인도는 근래 잇따라 달 탐사위성을 쏘아올렸다.
우리나라는 2020년에 달 궤도를 돌 달 탐사선을, 2025년까지는 달 탐사 착륙선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
달을 비롯한 우주 탐사의 열기는 지구의 기원이나 인류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인류의 원초적 욕망,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우주 탐사는 국가간 기술력을 둘러싼 자존심 경쟁이고, 미래 기술과 에너지의

선점이라는 경제적 이유도 크다. 우주 개발에는 각종 기술의 융합과 새 기술이 요구되고, 새 기술의 파급효과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연료전지, 형상기억합금 등 기술도 우주개발의 부산물이다. 달에는 또 에너지 효율이

석유의 1000배가 넘는다는 ‘꿈의 에너지’ 헬륨3이 대량 매장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류가 달을 넘어 화성 등 여러 행성까지도 장악하게 할 것이란 전망이 높다.

한편에선 인류는 우주의 신비를 한 겹씩 벗겨내는 대신 ‘달에는 계수나무 아래 방아를 찧는 토끼가 있다’는 등의

아름다운 상상력을 잃어버린다고 안타까워한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19 18:0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91802055&code=100100&s_code=ap005

 


1963 - 한국의 권투 선수 문성길(文成吉) 출생

문성길 [文成吉, 1963.7.20~ ]




문성길(文成吉, 1963년 7월 20일 - )은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전 프로 복싱 선수이다. 1986년 11월 미국 리노에서 열린 제4회 세계복싱선수권대회 밴텀급에서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이후 대한민국 복서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19년 만인 2005년 중국 미안양 제13회 세계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딴 이옥성이었다. 별명은 `돌주먹'이었다. 아마추어 권투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 허영모와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은퇴 후 공군사관학교 지도자를 역임했다.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에 그의 이름을 딴 `문성길 복싱클럽'(관장 조영섭)을 운영중이며, 1998년부터 철판볶음밥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2007년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WBHF) 후보에

한국 출신 복서로는 처음으로 장정구와 함께 올랐지만, 장정구는 18표, 문성길은 2표를 획득하는 데 그쳐 탈락했다.

생애

전남 영암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육상 특기생으로 뒤늦게 들어간 목포 덕인고에서 복싱을 만났다. 입문 만 3년 만인 1982년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병역 특례보충역 자격 획득(1982년 11월 아시안게임)후 5년간 해당분야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의무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8개월 전 프로로 전향했다는 이유로 현역으로 입대했다.

군제대 후 WBC플라이급과 WBA밴텀급 2체급 세계챔피언을 지냈으며, 1남 1녀를 두었다.



- '天池', 水墨天然彩, 1991, 121x91cm  (공중전화 카드) 

- 한국 5000원 (지폐)   이종상 작 '율곡 이이 초상'  

  

1938 - 한국의 동양화가 이종상(李鍾祥) 출생

이종상 [李鍾祥, 1938.7.20~]

동양화가. 호는 일랑(一浪).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196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하였고 1963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전임강사·교수로 재직하였고 1974∼1983년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75년 제1회 개인전을 가졌다. 근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FIAC에 참가,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4원법(遠法)>과 <칠보(七寶) 벽화기법>을 창안해서, 과거 진경산수에서 보이던 꼼꼼한 사실적 묘사의 모든 곁가지를 과감히 절단해버린 <원형상(源形象)> 연작을 발표했다. 그의 4원법이란 단순히 사물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의 눈·상상력의 눈을 통해 간결한 색채·구조에 풍부한 역동성(力動性)을 담는 기법이다. 작품으로 동판 위에 칠보로 그린

동유화(銅釉畵)인 《원형상, 89-Ⅳ》 등 원형상 연작이 있다.

 

1937 - 이탈리아의 무선전신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사망

마르코니 [Marconi, Guglielmo, 1874.4.25~1937.7.20]

이탈리아의 무선통신발명가·기업가. 볼로냐 출생.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교육은 받지 않고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 헤르츠파(波)의 응용에 착안,

아버지의 집에서 무선전신의 실험을 시작하여 1895년 말에 완성하였다. 1896년 영국으로 건너가 무선전신에 관한

특허를 취득, 런던의 중앙우체국에서 최초의 공개실험을 실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97년 런던에 마르코니무선전신회사를 설립, 도버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통신을 실현시켰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송수신은 1901년 12월 12일 콘월주(州) 폴듀와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세인트존스 사이에서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에 무선통신은 해저전신사업으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으나 대(對)선박 또는 선박 대 선박 통신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올려 무선전신의 독무대가 되었다. 마르코니는 단일 안테나에 의한 동조식(同調式) 및 다중전신동조방식(多重電信同調方式;1901), 자기검파기(磁氣檢波器;l902), 수평지향성안테나(1905) 등을 발명하였고, 그 뒤로는 자신의 회사에

J.A. 플레밍과 같은 여러 과학자들을 고문으로 맞아들여 통신거리의 연장, 동조의 개선, 공전(空電), 혼신(混信)의

제거 등 무선통신의 기술적 향상에 힘썼다.
1909년 K.F. 브라운과 노벨물리학상을 수상,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서는 이탈리아 전권대표를 지냈다.

1924년 영국의 전국토를 단파빔으로 연결하는 무선시스템 건설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의 회사가 건설하였다.

 

1932 -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白南準) 출생

백남준 [白南準, 1932.7.20~2006.1.29]

백남준은 현대예술에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이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예술학교에서 작곡과 음악미학, 미술사 등을 공부했고, 독일의 뮌헨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전공을 살려 작곡과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1970년대부터는 비디오 작업에 주력했다.

이미 1963년에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미술 사상 최초의 비디오 전시가 되는 역사적인 개인전을 열었고,

1978년 퐁피두 센터 전시회를 비롯해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다. 이후 파리, 취리히,

바젤 등 세계 각국의 전시회를 통해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1993년에는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꼽히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해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를 기념하는 대형 비디오 설치 작품 <다다익선 多多益善>도 그의 작품이다. 

 

"원래 예술이란 본능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 백남준

   

1927 - 루마니아의 왕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 사망  




1919 - 뉴질랜드의 등산가, 탐험가 힐러리(Hillary, Edmund Percival) 출생 

1908 - 그리스의 작가, 초대 IOC 위원장 비켈라스(Bikelas, Demitrious) 사망

 

1907 - 고종 황제 강제 양위식
1895 - 헝가리의 화가, 사진작가 모호이 너지(Moholy-Nagy, Laszlo) 출생

1893 - 그리스의 왕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출생


1890 - 이탈리아의 화가, 동판화가 모란디(Morandi, Giorgio) 출생

1890 - 그리스의 왕 게오르기오스 2세(Georgios II) 출생

1873 - 브라질 항공기 산업의 선구자 산토스 뒤몽(Santos-Dumont, Alberto) 출생 
 

1864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시인 칼펠트(Karlfeldt, Erik Axel) 출생    

1847 - 독일의 인상파 화가, 판화가 리버만(Liebermann, Max) 출생

1656 - 오스트리아 건축가, 조각가 피셔 폰 에를라흐(Fischer von Erlach, Johann Bernhard) 출생

 

1592 - 스웨덴의 장교, 뉴스웨덴 식민지의 총독 프린츠(Printz, Johann Bjornsson) 출생

1402 -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를 격파하다  

1304 -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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