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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9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9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05 - 미국의 저널리스트 스노(Snow, Edgar) 출생

스노 [Snow, Edgar Parks, 1905.7.19~1972.2.15]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출생. 교외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미주리대학교(1925~1926)와 컬럼비아대학교(1927)에서

수학하였다. 학생시절에 캔자스시티의 지방지 《스타》의 통신원으로서 신문기자의 첫발을 내디뎠다. 1928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차이나 위클리 리뷰[]》의 부편집장()으로 활약하면서 중국문제 연구에 전념하였다. 1934∼1935년에 옌징대학[] 강사로 출강하고, 동시에 《뉴욕 선》(1934∼1937),

《런던 데일리 헤럴드》(1932∼1941) 등의 잡지 특파원으로 극동·중동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다.

저작 활동으로는 1932년에 처녀작 《극동전선()》을 출판하고, 1936년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옌안지구[]에 들어가 마오쩌둥[]과 회견하고 저술한 《중국의 붉은 별》로 중국 공산당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아시아 전쟁》(1941)을 출판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 평론활동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종군기자로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인도·소련 등을 방문, 《우리편의 민중》(1944)

《소비에트세력의 형태》(1945)를 출판하였다. 전후(1960, 1965, 1970)에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과 회견하고 중국의 실정을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중공사정에 정통한 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 1981 -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한국청소년야구대표팀이 1981년 7월 19일 미국 오하이오 주 뉴어크에서 열린 제 1회 세계청소년야구 결승시리즈에서

미국을 3-1, 3-2로 이기고 2승을 먼저 따내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의 선동렬은 미국의 토드 번즈와 함께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았고 포수 김상국이 감투상을 받았다. 또 예선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타격

2위에 오른 김건우는 세계청소년올스타팀 투수로 선정됐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6 17:53:33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3) 1988 - 납북-월북작가 1백여명의 해방전 문학작품 출판 허용(해금)- 홍명희

88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인 이미지 제고차원에서

납북-월북작가들의 작품을 해금했다고 하는데, 

작가와 작품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 

박태원(1909~1987) :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행인, 골목안 등
송   영(1903~1978) : 늘어가는 무리, 선동자, 인도병사, 백색여왕 등
이기영(1895~1984) : 가난한 사람들, 고향, 민촌, 서화  등
이태준(1904~  ?   ) : 달밤, 복덕방, 해방전후 등
정지용(1902~1950) : 향수, 유리창Ⅰ,Ⅱ, 카페-프란스, 불사조 등
조명희(1894~1938) : 땅속으로, 낙동강, 파사 등
홍명희(1888~1968) : 임꺽정

오장환(1918~1948) : 목욕간, 성벽, 헌사, 병든 서울 등 

이용악(1914~  ?   ) : 오랑캐꽃

안회남(1909~  ?   ) : 농민의 비애, 그날 밤에 생긴 일, 어둠 속에서 등

최명익(1903~  ?   ) : 심문(心汶), 역설, 무성격자 등

설정식(1912~1953) : 종, 포도, 제신의 분노, 청춘, 프란시스 두셋 등 ...

                     1)                                    2)                                    3)

 

1) 1877 - 스웨덴의 민속학자, 고고학자 노르덴시욀드(Nordenskiold, Erland)  출생

노르덴시욀드 [Nordenskiold, Erland, 1877.7.19~1932.7.5]

지리학자인 노르덴시욀드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행을 좋아하였으며, 형 G.E.A.노르덴시욀드가 콜로라도에서 고고학 조사에 성공한 것에 자극받아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민족학적 고고학 조사를 하였고, 특히 그란차코족에

관한 조사를 할 때는 주민과 함께 생활하였다. 1914년 예테보리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남아메리카

여러 종족의 토속품 수집과 분포권적() 진열방법에 진력하였다.

저서에는 《Indianer och hvita inord stra Bolivia》(1911) 등이 있다.

 

2) 1979 - 김진호(女),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60m 더블라운드 세계신기록 수립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3) 1952 -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인구 36만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천m, 1만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역도·복싱·사이클·레슬링·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2000 -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북한 방문 (19~2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최근 동북아 정세와 남북한, 북.러 관계를 감안할 때 하나의 국제적인

'사건' 이다. 10여년간 지속돼 온 대북 냉각기를 끝내고 소련 붕괴 후 소원했던 전통적 동맹국과 이해 당사국과의

관계강화를 웅변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푸틴의 북한 방문은 소련.러시아의 최고 지도자로선 처음이다. 더구나 취임 후 한국보다 먼저 북한을 방문했다.
푸틴의 선(先) 북한 방문을 '북한중시.한국경시' 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경제 중시와 친서방 일변도에서 벗어나 한반도.동북아 외교정책에서 러시아가 북한이라는 변수를 외교정책에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첫 행보라는

점은 분명하다.
11개항에 이르는 공동성명과 소식통들의 발언이 보여주듯 북한과 러시아는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위(NMD)
반대 등 세계적 문제▶시베리아 천연가스관의 북한 경유▶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남북한 철도 연계 등을 다뤘다.
동북아 전체 국가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들이다. 의례적 정상회담의 차원을 
 
뛰어넘어 북.러 양국이 동북아문제 해결에서 단순한 이해관계국이 아니라 중요한 이해당사자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러는 이번 회담에서 서로가 승리하는 윈윈 게임을 벌였다. 푸틴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중국과 북한을 NMD 체제

구축 반대와 미국 패권주의 반대진영에 합류케 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소련 붕괴 이후 최초로 미국에 대응해 러.중.북한이 하나의 축에 서는 듯한 부수적 성과를 올리게 됐다.
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에 이미 엄청난 돈을 퍼부은 미국에 맞서 소련이 이전에 북한에

건설했던 공장들의 재가동과 에너지.교통협력.대북채권 재조정 등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나름대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북한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지도력을 보다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그리고 푸틴과 정상회담을 잇따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국제사회가 인정한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 미사일개발 유예선언이라는 결정적인

선물을 내놓게 하는 데 실패했다.
북.러의 경제적 합의사항 역시 대부분 한국 등 주변국가들의 협조 없이는 성사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따라서 한국 등 주변국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푸틴 대통령의 동북아 순방외교 성과는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밖에 없다.
김석환 기자
[2000년 북·러 관계 일지]
2월 : 러 외무장관 방북
우호.선린.협력 신조약 체결
두만강하류 국경획정 합의
4월 : 문화.과학협정, 어업협정 체결
5월 : 푸틴 러연방 대통령 취임
6월 : 크렘린 '푸틴 7월 방북' 공식발표
7월 : 푸틴 '남북관계 정상화 지지'
7월 19일 : 푸틴 북한 방문-
조인스 2002.02.23 12:13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3&Total_ID=677369 

 

1980 -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전해인 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 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철퇴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독 일본 등 스포츠 강국이 올림픽대회를 보이콧함으로써 스포츠제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만 것이다. 당초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대회 스타는 소련의 남자체조 선수 디디아틴이었다. 그는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얻어 가장 많은 메달 획득수를 기록했다. 이로써 소련은 6백30개의 메달 중 1백95개, 1백27개의 금메달 중 80개를 따내며 1위를 차지했다.
 

 

1977 - 중국 정치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복권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이듬해 1977년 7월 22일 '부도옹' 등소평이 세 번째로 부활하여 당 부주석으로

복권됐다. 등소평은 1976년 제1차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 세 번째 실각했었다. 첫 번째 실각은 1933년 왕명 등

좌파의 당 중앙에 의한 모택동 비판 때문이었고, 두 번째 실각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였다.

급진적인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파탄을 가져온 1960년대 초 등소평은 '백묘흑묘론'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주의적인

경제조정책을 중시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 다음가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제2의 실권파'로 지목되어 실각했었다.

연금과 노동으로 연명하다 1973년에 모택동의 배려로 국무원 부총리로 부활, 1975년에 중앙군사위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 당 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강청 등 '4인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제1차 천안문 사태 때 배후자로 지목되어,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1965 - 초대 대통령 이승만() 사망
이승만 [, 1875.3.26~1965.7.19]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귀국해 이상재 등과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 학교를 세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됐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 마우나라니병원에서 요양 중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47 - 독립운동가 여운형() 암살                 

여운형 [呂運亨, 1886.5.25~1947.7.19]

1947년 7월 19일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여운형은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해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에도 참여했다.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고,

제3 인터내셔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등 활발한 국외활동을 펼쳤다. 1944년에는 해방에 대비하고자 건국동맹이라는 항일지하조직을 조직했고, 해방 후에는 이를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1947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피살되었다.

 

1947 -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 아웅산(Aung San) 암살

아웅산 [Aung San, 1915.2.13~1947.7.19]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 대좌()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FPFL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1903 - 투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 첫 대회 종료 (7.1~7.19)

1895 - 중국의 화가, 미술교육자 쉬베이훙(徐悲鴻) 출생



 

쉬베이훙 [徐悲鴻, 1895.7.19~1953.9.26]

저장성[] 출생. 1917년 일본에 유학하고, 1918년 베이징대학교 화법연구회 강사로 있다가

그뒤 쿵더학원[] 교수가 되었다. 1919년 파리에 유학, 1927년 귀국한 후 1929년에는 난징[]

국립중앙대학 예술계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1930년 이후 유럽 각지에서 중국근대화전을 개최하고,

1934년 소련을 방문, 1949년 중국의 중앙미술원 원장이 되었다.
주요작품에 《우공이산()》 《전횡오백사()》 등이 있다.

 

1893 -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Mayakovskii, Vladimir) 출생  

[Mayakovskii, Vladimir Vladimirovich, 1893.7.19~1930.4.14]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초기의 지도적 시인. 15세 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반국가활동으로 여러 번 감옥을 드나들었다. 1909년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석방된 뒤 모스크바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다비트 부를류크 및 몇몇 사람들과 함께 러시아 미래주의 모임에 참여해 곧 그들의 대표자가 되었다.

1912년 미래주의자들은 선언문 〈대중 취향에 가하는 따귀 Poshchochina obshchestvennomuvkusu〉를 발표했다.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눈에 띄게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도전적인 형식과 내용을 지녔다. 운문으로 된 모노드라마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Vladimir Mayakovsky〉는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상연되었다. 1914~16년에 2편의 주요한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 Oblako v shtanakh〉(1915) 〈척추의 플루트 Fleytapozvonochnik〉(1915, 발표 1916)를

완성했다. 두 작품 모두 짝사랑의 비극과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시인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일반의 조잡한 언어와 아주 과감한 기교적 혁신을 사용함으로써 시를 '비시화'(非詩化)하려 했다. 그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군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조라는 것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열광적으로 볼셰비키를 환영했다. 〈혁명송시 Oda revolutsi〉(1918)·〈좌익 행진 Levy marsh〉(1919) 같은 시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1921년 초연된 희곡 〈우스운 신비극 Misteriyabuff〉도 매우 인기를 얻었다. 이 희곡의 내용은 전세계를 휩쓴 대홍수 뒤에 '불결한 자들'(프롤레타리아)이 '청결한 자들'(부르주아)로부터

당당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당의 열렬한 대변인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냈다. 1919~21년에는 러시아 전신국에서

포스터 화가이자 만화가로 일하면서 그림에다 적절한 압운(押韻)과 선전문구를 집어넣었고,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시낭송회를 갖는 한편 시사성이 짙은 정치선전시와 아동교육용 소책자들을 펴냈다. 1924년에는 레닌의 죽음을 추모하는 비가를 총 3,000행에 걸쳐 써냈다. 1925년 이후에는 유럽·미국·멕시코·쿠바를 여행했으며, 신랄한 소묘를 실은 소책자 〈나의 미국 발견 Moye otkrytiye Ameriki〉(1926)과 여러 편의 시에 자신의 인상을 기록했다. 또한 틈틈이 영화 대본을 썼는데 그 가운데 몇 편은 직접 출연하기도 했으며, 죽기 전 3년에 걸쳐 2편의 풍자극을 완성했다. 1929년에 상영된 〈빈대 Klop〉는 소련의 신경제정책과 함께 나타난 속물을 조롱하는 드라마이며, 〈목욕탕 Banya〉

(1930. 1. 30 레닌그라드에서 상영)은 스탈린 치하의 어리석은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야유하는 극이다.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사회적 의미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런 사회 선전도 사랑에 대한 개인적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계속적인 실연으로 사랑을 바라는 욕구가 되풀이되어 폭발했던 것이다. 이 감정적 욕구는 초기 서정시 이후 발표한 2편의 시 〈사랑한다 Lyublyu〉(1922)·〈이것에 관하여 Pro eto〉(1923)에서 특히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1928년 파리에 머무는 동안 망명객 타티야나 야코블레바와 사랑에 빠져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더욱이 교조적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 및 소비에트 당국과 불화를 일으켰으며, 〈목욕탕〉의 상연도 실패로 끝났다. 사랑에 실패하고,

소련의 현실과 점차 멀어지고, 해외여행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자 그는 모스크바에서 자살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비에트 문단에서 가장 정력적인 인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공리주의적·시사적인 그의 시가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극히 서정적인 시들과 혁신적 기교로 많은 소비에트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930년대에 스탈린이 그를 일컬어 "우리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훌륭하고

재능있는 시인"이라고 선포한 뒤에는 러시아 밖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876 - 오스트리아의 총리를 지낸 가톨릭 사제 자이펠(Seipel, Ignaz) 출생  

1870 -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1863 - 오스트리아의 작가, 극작가 바르(Bahr, Hermann) 출생

 

1859 -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펴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출생  

1834 - 프랑스의 화가 드가(Degas, Edgar) 출생  

1819 - 독일 태생의 스위스 소설가 켈러(Keller, Gottfried)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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