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과 역사 7-16
백산 안희제 선생
2010 - ‘항일 자금줄’ 안희제 일대기 나와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노릇을 한 백산 안희제(사진) 선생의 일대기가 나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최근 펴낸 <안희제 열전>은 백산상회를 세워 국내 독립운동 기지를 삼고 항일 자금 조달에 나선 것을 비롯 의신·창남·구명학교 설립, 대동청년단 결성, 기미육영회 조직, 부산예월회를 통한 문화운동, 협동조합운동, <중외일보>를 통한 언론투쟁 등 전방위에 국권회복에 투신한 걸쳐 백산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1994년 첫 연구 논문을 발표한 이래 꾸준한 자료 수집과 학계 연구성과를 집대성해 열전을 써낸 이동언 책임연구위원은 “백산은 국내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발해농장을 경영하고 말년에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해 많은 업적을 남긴 큰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연구소가 독립운동사 대중화를 위해 펴내고 있는 100명의 독립운동가 열전 가운데 16권째다.
김경애 기자 한겨레 2010-07-16 오후 10:19:40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30799.html
2010 - 한나라 강용석 ‘성희롱 발언’ 파문
당 윤리위 “제명”…강의원, 아나운서 지망 여대생에 “다 줄 생각해야” 발언
강용석 한나라당 의원(서울 마포을·사진)이 대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성희롱성 ‘여성 비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파문이 확산되자, 한나라당은 곧바로 강 의원을 당에서 제명했다.
강 의원은 지난 16일 저녁 서울 ㅇ대학 학생 20여명과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한 여학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중앙일보>가 20일 보도했다. 또 그는 동석했던 한 여학생이 지난해 청와대를 함께 방문했던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때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옆에 사모님(대통령 부인 김윤옥씨)만 없었으면 네 (휴대전화) 번호도 따갔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에 대해 전국여성연대(공동대표 이강실)는 성명을 내어 “강 의원이 말하는 ‘다 준다’는 것이 성상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성 아나운서 모두를 매도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지상파 8개사 480여명의 아나운서로 구성된 아나운서연합회도 성명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전체 아나운서를 모욕한 강 의원은 지금 당장 의원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도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성희롱을 넘어 성폭력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곧바로 윤리위원회를 두 차례 소집해 만장일치로 제명 처분을 의결했다. 한나라당은 이른 시일 안에 의원총회를 열어 제명을 확정지을 예정이다. 주성영 의원(윤리위 부위원장)은 회의 뒤 “국회의원으로서 한나라당의 위신을 크게 훼손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고, 제명 결정을 내릴 만큼의 사실관계는 규명됐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해당 여학생과 오늘 통화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확인까지 받았다. 정치 생명을 걸고 허위 왜곡보도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며 관련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안창현 김민경 기자 blue@hani.co.kr 한겨레 2010-07-20 오후 09:19:02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31316.html
2010 - 차베스, ‘남미 해방자’ 볼리바르 관뚜껑 열었다
독살설 진위 여부 가리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관이 독살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지난 16일 사후 180년만에 다시 개봉됐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국립 팡테온에 안장돼있는 볼리바르의 관은
이날 새벽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발굴·개봉됐다. 볼리바르 숭앙자로 알려진 차베스는 관 개봉
직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신이시여,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영광스런
해골은 볼리바르의 것이 틀림없습니다”라며 자신의 감격을 전했다. 앞으로 부검 전문가들이 디엔에이, 엑스레이 등
다양한 검사를 통해 독살설을 규명할 예정이다.
‘엘리베르타토르’(해방자)로 불리는 볼리바르는 1820년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대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차베스는 자신의 반미 사회혁명을 볼리바르 혁명이라고 부르고, 나라 이름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또 볼리바르의 남미통합 아이디어에서 착안해 차베스가 추진중인 새로운 무역협정도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 (ALBA)이다. 차베스는 그동안 볼리바르가 47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병사한 게 아니라 콜롬비아의 정치세력들에 의해 암살됐다고 주장해왔다. 지난해 존스홉킨스대학 감염병 전문의인 폴 오웨이터 교수는 비소중독에 의한 볼리바르 사망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 이번 발굴 강행에 힘을 실어줬다. 볼리바르 사망 당시 검안의들은 폐와 심장 부위의 녹색 액체를 이유로 폐결핵으로 결론냈지만, 이는 비소 중독에 의한 기관지 확장증일 수 있다고 오웨이터 교수는 주장했다. 차베스 비판자들은 오는 9월 의회선거에서 도전에 직면한 차베스가 볼리바르의 독살설을 이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고 보고 있다고 주간 <타임>은 분석했다. 차베스 스스로 자신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과 그 주구인 콜롬비아의 우파정권에 의해 끊임없는 암살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볼리바르가 독살된 것으로 판명될 경우, 콜롬비아와 미국을 향한 차베스의 독설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10-07-18 오후 09:33:5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430918.html
2007 - 보광사서 쏟아진 국내 최고(最古)급 유물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이상 불상의 제작연대는 파악하기 곤란하다. 제작양식을 통해 대략적인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특히 목조불상의 경우 일반인은 목조불상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표면에 금칠을 해 화려하게 장식하고 금칠이 벗겨지면 다시 개금(改金)하기 때문이다.경북 안동 보광사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역시 오랜 세월 일반에 공개됐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그러나 5월 말 문화재청과 조계종 산하 문화유산발굴조사단이 보광사를 조사하던 중 보살상을 움직이자 '정원신역화엄경소', '소전동', '인본다라니' 등의 유물이 쏟아졌다.
평범한 목조보살상으로 생각했던 곳에서 고려시대 인쇄물이 나온 것이다. 문화재청과 조계종 문화유산발굴단 합동조사를 실시했고 한 달여 뒤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천년의 신비를 간직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자체가 국내 최고(最古)급 목조보살상임을 밝혀냈다.
현재 국내 최고 목조 불상으로 추정되는 것은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1199년 제작 추정)이며 두번째가 1280년에 보수한 기록이 있는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안동 봉정사 보살좌상과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양감이 강조된 이국적인 얼굴 모습, 당당한 신체와 간략화된 무릎 주름 등은 서산 개심사 아미타불좌상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손영문 문화재 전문위원은 "봉정사 보살좌상과 개심사 아미타불좌상 사이에 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우연한 기회에 국내에서 두번째 혹은 그보다 더 오래 됐을지도 모를 최고(最古)급 불상이 발견된 셈이다.
보광사 보살좌상에서 발견된 인쇄물 가운데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秘蜜全身舍利寶<人+莢>印陀羅尼經. 이하 보협인다라니경) 역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이은 국내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개성 총지사본으로밝혀졌다.정확히 1천년 전인 1007년 개성 총지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보협인다라니경은 고려시대 조탑경전(造塔經傳. 탑을 세울 때 탑 내부에 넣는 경전)으로 널리 쓰였다.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이 총지사본 1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현재 보존처리 중인 월정사 석탑 출토본과 고(故) 완섭 소장본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완섭소장본은 현재 행방불명이다.
또 불국사 석가탑에서 목판본이 아닌 필사본 보협인다라니경이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바 있다. 이는 고려시대 들어 조탑경전이 무구정광다라니경에서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바뀌는 양상을 한 눈에 보여주는 사례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유물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정원신역화엄경소 권6(貞元新譯花嚴經<流자에서 水변 대신 足> 卷六)'이다.
화엄경은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구역 화엄경 34품 60권짜리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신역 화엄경 39품 80권짜리, 당나라 반야(般若)가 번역한 정원본 1품 40권 짜리 등 3종류가 있다.
정원신역화엄경소는 정원본 화엄경에 대한 연구 논문을 엮어 간행한 일종의 논문집(교장ㆍ敎藏)으로 편찬자는 대각국사 의천이다. 즉 화엄경소에는 의천이 화엄경을 이해한 요체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의천의 화엄경소 가운데 신역 화엄경소는 일본 도다이사(東大寺)에 보관돼 있으며 정원본소는 일본 다이도큐기념문고(大東急記念文庫)가 제10권만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는 동국대 박물관이 정원본 화엄경소의 간기(간행기록)만을 소장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조선시대 간경도감에서 번각한 복사본이다.이번에 발견된 화엄경소는 모두 10권으로 된 정원본소 가운데 제6권의 11장 한 장 뿐이지만 의천의 교장 원본이라는 점에서 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다이도쿄기념문고의 제10권 말미에 기록된 '수창원년을해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元年乙亥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라는 문구에서 고려 헌종1년(1095) 교장도감에서 판각된 판본임을 알 수 있으며 정교한 판각과 깨끗한 인쇄상태는 고도로 발달한 고려 인쇄문화를 입증한다.(서울=연합뉴스) 동아닷컴 2007-07-16 17:19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7160380
2007 - 주한 미 공군 사령관 T-50 성능 체험
T-50 국산 고등훈련기의 해외 수출을 앞두고 주한 미 7공군 사령관이 비행 성능을 체험해 주목됩니다.
공군은 조종사 출신인 스티븐 우드 주한 미 7공군 사령관이 오늘 오후 제1전투 비행단에서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인 T-50의 후방석에 탑승해 항공기의 성능을 직접 점검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천 5년부터 양산이 시작된 T-50은 F-15 등 최신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세계 유일의 초음속 고등훈련기로 현재 미국을 비롯해 중동과 유럽 등에 수출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 공군 야전사령관이 국산 초음속 T-50을 탑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생산하고 있는 T-50은 최대 속력이 마하 1.5 로 첨단 전투기에 적용된 디지털 비행시스템을 장착했으며 2011년까지 공군에 90여 대가 인도될 예정입니다. YTN 2007-07-16 17:51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573&key=200707161751328049
2007 - 英 휴대전화 외판원에서 세계적 스타가 된 폴 포츠의 음반 영국에서 발매
‘인간 승리’ 폴 포츠, 오페라 가수 ‘첫발’
외모 편견 딛고 ‘브리튼즈…’ 우승 뒤 앨범도 인기
폴 포츠(36·사진). 영국 웨일스의 한 도시의 휴대전화 외판원이다. 외모는 미남형과 거리가 멀다. 고르지 못한 치아,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 …. 누가 봐도 ‘비호감’이고, 어릴 때부터 왕따를 당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전세계에서 화제다. 어눌한 말투와 못난 외모, 악성 종양과 교통사고, 카드빚을 가진 평범한 중년 남성이 시련을 딛고, 오페라 가수로 화려하게 데뷔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지난 6월17일 노래 실력이 뛰어난 일반인을 스타로 만드는 영국 ITV1 프로그램인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 출연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1350여만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노래를 부르겠다”던 그에게 방청객과 심사위원들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가 노래를 부르자 이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냉소적인 심사위원인 사이먼 코웰조차 “당신은 우리가 찾아낸 보석”이라고 칭찬했다.
그의 우승은 편견과 좌절을 이겨낸 것이어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2003년에는 종양과 교통사고로 쇄골이 부러져 “다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은 그였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자, 그가 출연한 ‘브리튼즈 갓 탤런트’는 미국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9일 만에 1천만명 이상이 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지난달 16일에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부른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비롯해 〈마이 웨이〉의 스페인어 버전, 아르이엠(REM)의 〈에브리바디 허츠〉의 이탈리아어 버전이 담긴 첫 앨범 〈원 챈스〉를 내고 오페라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이 앨범은 발매 3일 만에 8만장이 팔리며, 유케이(UK)차트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일 발매가 시작됐는데, 벌써부터 반응이 뜨겁다. 포츠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받은 상금 10만파운드(약 1억8400스원)로 카드빚을 갚고, 교통사고로 비뚤어진 이를 교정할 수 있게 됐다. 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위한 ‘2007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 출연기회도 얻었다. 폴 포츠는 말한다. “자신이 정한 길을 따라 뒤돌아보지 말고 밀고 나가십시오. 사람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십시오.” 그의 말이,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값진 ‘성공스토리’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서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한겨레 2007-08-12 오후 06:46:23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28466.html
英 휴대전화 외판원, TV서 아리아 불러 세계적 스타로
“힘든 일이 많았지만 언젠가 절호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 희망이 나를 지탱한 힘이자 ‘진짜 기회(One Chance)’가 됐네요.” 동영상으로 본 외모는 ‘별 볼일 없었다.’ 고르지 못한 치아, 볼록 튀어나온 배,
허름한 양복 차림까지…. 영국 웨일스의 한 도시에서 휴대전화 외판원으로 일하던 이 남자는 TV의 ‘노래 자랑’ 프로그램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우승을 거머쥔 그의 동영상은 9일 만에 유튜브 사상 최고의 조회 수인 1000만 클릭을 기록했다. 최근 그는 첫 음반 ‘원 찬스’를 냈다. 7월 16일 영국에서 나온 첫 음반은 3일 만에
8만 장이 팔렸으며 한국에서는 2일 발매되자마자 팝차트 4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폴 포츠(36·사진) 씨. 최근 음반 홍보를 위해 미국에서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보내는 그를 e메일 인터뷰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유명세가 믿기지 않는 듯 “모든 상황이 예상을 뛰어넘은 것 같다”며 “아직도 꿈이 아닌지 매일 볼을 꼬집어 본다”고 말했다. 1998년부터 작은 오페라 무대에서 노래했던 그는 대형 오페라 기획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허사였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우상이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 앞에서 공연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3년 수술과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그에겐 5500여만 원의 카드 빚까지 있었다.
포츠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꿈에 매달리는 것이었다”며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6월 보통 사람들이 노래 실력을 다투는 영국 iTV의 ‘브리튼스 갓 탤런트’의 무대에 섰다. 그가 무대에서 “오페라를 부르러 왔다”고 하자 관객과 심사위원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뒤 분위기는 반전됐다. 관객들은 그가 노래할 동안 숨을 죽였고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그는 “열한 살 때 영화 ET에서 나오는 차이콥스키 곡을 우연히 들었는데 그날 이후 클래식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첫 앨범에는 TV에서 불렀던 노래와 함께 아내에게 바치는 ‘카바티나’를 비롯해 록밴드 ‘REM’의 ‘에브리보디 허츠’, 스패니시 버전의 ‘마이 웨이’ 등 10곡을 수록했다. 첫 음반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희망으로, 지금은 힘들지 모르지만 희망을 갖고 역경을 딛고 나가라는 뜻이라고 그는 말했다.
포츠 씨는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지금은 음반 홍보 때문에 휴대전화 판매는 잠시 접었으나 언제든 생업 전선에 다시 뛰어들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동아경제 2007-08-07 03:00:00
http://economy.donga.com/view.php?id=View_Economy_Print%7C3%7C20070807%7C21229718%7C1
2005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씨 사망
조선황실의 유일한 직계 황세손 이구 씨가 2005년 7월 16일 향년 74세로 일본의 한 호텔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 이은의 아들인 이구 씨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관계자는 “이구 황세손이 나가사키로 알려진 한 지방 호텔에서 사체로 발견됐다”면서
“호텔종업원이 인기척이 없는 것을 수상히 여겨 방문을 열어보니, 화장실에서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 된다”고 말했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zooey@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5 19:26:48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2005 -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 별세
[어제의 오늘]2005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 별세ㆍ생업도 결혼도 순탄치 않은 인생
2005년 7월16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의 뉴프린스호텔 202호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는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아들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1931년 12월29일~2005년 7월16일·사진)였다. 사망 장소인 뉴프린스호텔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태어난 영친왕의 저택 터에 세워진 건물이었다.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졌지만 일본 측이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하면서도 부검을 실시한 점, 시신 발견자의 “얼굴에 검은색이 돌았다”는 증언, 일본과 한국의 비행거리가 길지 않음에도 시신에 방부 처리를 한 점 등을 들어 독살 등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영친왕 이은(1897년 10월20일~1970년 5월1일)과 이방자 여사(1901년 11월4일~1989년 4월30일)의 둘째 아들인 이구는 첫째 아들인 이진이 1922년 돌이 되기도 전에 사망한 뒤 9년 만에 얻은 아들로 사실상 장남인 까닭에 황세손이 된다. 그는 소년 시절 일본의 왕족과 귀족들만 다니는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1953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년 1월26일~1964년 4월5일)의 초청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MIT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다. 졸업 후 미국 뉴욕 아이엠페이(IMPEI) 건축사무소에 입사해 건축가로 활동하던 중 1959년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8살 연상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 여사(1928~)와 결혼한다.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 옹주(1912년 5월25일~1989년 4월21일)와 함께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그 이후 국내 대학에서 선진 건축설계를 강의하고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한국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종친들은 서양인인데다 황손을 낳지 못하는 멀록과의 결별을 종용했고 사업체마저 부도를 맞게 된다. 결국 1977년 멀록과 별거에 들어간 이구는 일본으로 떠난다.
종친회는 1982년 두 사람을 강제이혼을 시켰다. 멀록은 플라자호텔에서 공예점을 운영하며 장애인 복지 등
불우이웃돕기 사업을 벌이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1995년 친정인 하와이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떠난 이구는 재기를 꿈꾸며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지만 손대는 것마다 실패하고 1996년 영구 귀국했다. 그는 사망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의 유·무형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명예총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이구의 시신은 한국으로 운구되어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9일장이 끝난 7월24일 경기도 남양주 홍릉 뒤편 영친왕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진호 기자 hotmail@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15 23:00:5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152300555&code=100100&s_code=ap005
2003 - 이두로 쓴 최고(最古)의 백제 시가 발견
2000년 부여 출토 목간에 기록
지난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古墳群) 옆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의 내용이 현전 최고(最古)의
백제 시가(詩歌)인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시립대 김영욱(金永旭·국어학) 교수는 16일 “현재 부여박물관에 소장 중인 목간(길이 12.7㎝)의 ‘숙세결업동생일처시비상문상배백래(宿世結業同生一處是非相問上拜白來)’라는 글은 사언사구(四言四句) 형식에 백제인이 이두(吏讀)로 기록한 최고의 시가”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오는 24~25일 일본 도야마(富山)대학에서 열리는 ‘한·일 한자 한문 수용에 관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백제의 이두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이 시가를 ‘전생(前生)에서 맺은 인연으로/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시비(是非)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라고 해석했다. 서울대 이종묵(李鍾默·국문학) 교수는 “부부가 함께 부처님 앞에서 죽은 뒤 같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나무 조각에 문자를 기록한 것. 현재 전하는 백제 시가는 백제 멸망 후 800여년 뒤 조선시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한글로 기록된 ‘정읍사’(井邑詞)가 유일하다. 서울대 조동일(趙東一·국문학) 교수는 “우리나라 고대 시가들이 모두 후대 문헌을 통해 전하는데 이 시가는 목간에 기록된 당대의 노래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며 “현재 개정작업을 진행 중인 ‘한국문학통사’에 이 작품을 포함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영욱 교수는 또 ‘숙세가(宿世歌)’라고 이름붙인 이 시가가 한국어와 한문의 어순(語順)이 섞여 있는 ‘백제 이두’로 기록됐으며, 이로써 백제는 이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학계 정설의 잘못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조선일보 2003.7.17
http://plaza.snu.ac.kr/~minhs/wb/board.php?bid=minhsfree04&page=10&sk=read&no=21
2003 - 쿠바 태생의 미국 가수 셀리아 크루스(Cruz, Celia) 사망
크루스(크루즈) [Cruz, Celia, 1925.10.21~2003.7.16]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스 잠들다
살사의 여왕’으로 칭송받아온 쿠바 태생의 가수 셀리아 크루스(78)가 16일 미국 뉴저지주 포트 리의 자택에서 숨졌다.
아바나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다 살사의 여왕이 된 크루스는 지난해 11월 뇌종양 수술을 받았고 그 뒤 여러차례 입원했다. “아수카르”(설탕)를 외치며 청중들의 흥을 돋우곤 했던 크루스는 힘찬 목소리와 현란한 몸짓으로 살사 음악을 널리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불과 2~3개월 전까지도 노래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교사 공부를 하다 연예계에 매력을 느껴 가수가 된 그는 아바나음악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로피카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했다. 1950년대 들어서는 전설적인 아프로-쿠바 그룹인 라 소노라 마탄세라에서 리드싱어로 활약하면서 유명해졌으며 쿠바혁명 1년 뒤인 60년 쿠바를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연합 한겨레 2003.07.17(목) 22:46
http://www.hani.co.kr/section-007000000/2003/07/007000000200307172246128.html
2002 -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공화군(IRA), 과거 폭력행위 첫 사죄
2001 - 미국 하원의원 8명, 김대중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의 언론자유 억압 우려` 표명
자크 로게 당선자(오른쪽)가 당선이 확정된 뒤 21년간 IOC를 이끌었던
사마란치 전 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01 -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 선출
자크 로게 EOC(유럽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2001년 7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2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의 위원장 선거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의 뒤를 이을 제8대 위원장에 선출됐다.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은 끝까지 경합했으나, 사마란치의 지원과 백인 IOC위원들을 등에 업은 로게에게 밀렸다.
로게는 2차 투표에서 과반수인 59표를 얻어 23표의 김 회장과 22표의 딕 파운드를 크게 앞질렀다.
로게가 1991년 IOC에 입성한 지 10년 만에 세계의 `스포츠 대통령`이란 대권을 잡은 배경은 유럽 국가들과 사마란치 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유럽은 122명의 IOC 위원 중 57명을 차지, 단일 대륙으로는 최대 지분을 지니고 있었다.
로게는 벨기에 NOC 위원장이던 지난 1989년 이들이 모두 포함된 EOC(유럽올림픽위원회) 회장을 맡으면서 유럽 스포츠행정의 간판스타로 활동해 왔다. 이 과정에서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원칙을 고수해 `미스터 클린`, `IOC의 분쟁해결사`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로게에게 사실상의 `양위`를 결심한 사마란치의 입김은 그의 급부상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마란치는 지난 1995년부터 집중적으로 `로게 키우기`에 들어갔다. 그해 2000 시드니 올림픽 조정위원장을 맡았고, 1998년 IOC 집행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2004 아테네 올림픽 조정위원장을 맡는 등 요직을 섭렵했다.
정형외과 의사인 로게는 요트선수로 1968년 멕시코시티, 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1999 - 임창렬 경기도지사, 경기은행으로부터 1억원 받은 혐의로 구속
1999 - 대한민국의 탈옥수 신창원이 전남 순천시에서 검거되었다.
1999 - 탈옥수 신창원 검거(1999)
무기수로 복역하다 탈옥한 뒤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인 신창원!
탈옥한 지 2년 6개월 만인 1999년 오늘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붙잡혔다.
경찰은 가스레인지를 수리하러 들어갔던 수리공의 제보를 받고 출동해 탈옥범을 검거했다.
그가 머물던 아파트에서 만원권 지폐 1억8천여 만원과 탈옥생활을 기록한 일기장 등이 발견됐다.
경찰 조사에서 신창원은 도주 기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백여 차례의 강,절도를 벌인 것으로 드러난다.
또 여러 명의 여자가 그의 도피와 은닉을 도왔던 사실도 밝혀진다.
신창원의 도피 기간에 경찰의 허술한 공조수사와 주민신고 무시 등 허점이 드러나 여러 경찰관이 공직에서 물러났다.
1999년 7월 16일 탈옥 2년6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신창원.
1999 - 탈옥수 신창원, 순천서 검거
탈옥수 신창원이 1999년 7월 16일 2년6개월 만에 전남 순천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신창원은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부산교도소를 1997년 1월 20일 탈옥한 후 2년6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신창원은 이날 오후 가스레인지 후드를 고치러 온 전자제품 수리공의 신고로 검거됐다. 검거당시 신창원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그는 재수감되기 직전 소감을 묻자 "편하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신창원은 1967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신창원의 성격적 특성은 침착성과 순발력이다. 그는 경찰관이 눈 앞에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노렸고, 주위에 한패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체력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도주중이었던 1998년 1월 천안에서 경찰관 2명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왼손에 깁스를 하고 오른발은 뼈에 금이 간 상태였음에도 불구, 총든 경찰관을 쓰러뜨리고 달아났다. 그의 이런 괴력은 타고난 체력에, 교도소에서 단련한 근력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그는 야간도주 때 단전호흡으로 체온을 유지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1999 - 탈옥수 신창원, 순천서 검거
탈옥수 신창원이 1999년 7월 16일 2년 6개월 만에 전남 순천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신창원은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부산교도소를 1997년 1월 20일 탈옥한 후 2년 6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신창원은 이날 오후 가스레인지를 고치러 온 전자제품 수리공의 신고로 검거됐다. 검거당시 신창원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그는 재수감되기 직전 소감을 묻자 “편하다”고 대답했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zooey@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5 19:26:48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99 - [오늘의 역사] 탈옥수 신창원, 순천서 검거
신창원은 1967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경찰관이 눈 앞에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노렸고, 주위에 한패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충청투데이 2010.07.15 23:34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3510
1999 - [오늘의 역사]탈옥수 신창원 검거
무기수로 복역하다 탈옥한 뒤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였던 신창원.
1997년 1월 20일 교도소 감방 화장실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한 지 2년 6개월 만인 1999년 오늘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검거됐다. 경찰은 가스레인지를 수리하러 들어갔던 수리공의 제보를 받고 출동해 탈옥범을 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머물던 아파트에서 1만 원권 지폐 1억 8000여만 원과 탈옥생활을 기록한 일기장 등이 발견됐다.
경찰 조사에서 신창원은 도주 기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100여 차례의 강·절도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했다.
또 여러 명의 여성이 그의 도피와 은닉을 도왔던 사실도 밝혀졌다.
신창원은 경찰관이 눈 앞에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침착성과 순발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충청투데이 2009.07.15 21: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2825
1999 - [오늘의 역사]탈옥수 신창원 검거
무기수로 복역하다 탈옥한 뒤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였던 신창원.
1997년 1월 20일 교도소 감방 화장실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한 지 2년 6개월 만인 1999년 오늘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검거됐다. 경찰은 가스레인지를 수리하러 들어갔던 수리공의 제보를 받고 출동해 탈옥범을 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머물던 아파트에서 만 원권 지폐 1억 8000여만 원과 탈옥생활을 기록한 일기장 등이 발견됐다.
경찰 조사에서 신창원은 도주 기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100여 차례의 강·절도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했다. 또 여러 명의 여성이 그의 도피와 은닉을 도왔던 사실도 밝혀졌다.충청투데이 2008.07.15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1823
고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외아들이었던 존 F 케네디 2세.
1999 - 존 F 케네디 2세(Kennedy, Jr., John F.) 비행기 추락사
존 F 케네디 2세 [Kennedy, Jr., John Fitzgerald, 1960.11.25~1999.7.16]
1999 - 존 F 케네디 2세 비행기 추락사
고 케네디 미 대통령의 외아들 존 F 케네디 2세(38)가 조종하던 경비행기가 1999년 7월 16일 미 매사추세츠주
동부 마사스 비녀드(martha`s vineyard) 해안에서 실종됐다. 사고로 케네디 2세와 부인 캐롤린 베셋(33),
처형 로렌 베셋(34) 등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케네디 2세는 사촌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다. 케네디 2세의 시신과 사고기 동체는 실종 사흘만에 매사추세츠주
마사스 비녀드섬 남서쪽 12km 해역의 30m 해저에서 발견됐다.
케네디 2세는 케네디 대통령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대통령 된지 17일 만에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관심의 초점이 됐다. 그의 개인사는 케네디가의 저주와 비극으로 점철됐다. 세살때 동생 패트릭이 태어난 지 이틀만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암살됐다. 아버지는 1963년 11월 15일, 그의 세번째 생일날 댈러스에서 흉탄에 쓰러졌다.
관에 실린 아버지를 향해 케네디 2세는 거수경례했다. 미국인의 가슴에 눈물을 새긴 행동이었다.
1999 - 케네디 2세 부부 탄 비행기 실종
실종된 비행기에는 부인 캐롤린 베셋, 부인의 언니가 타고 있었으며 케네디 2세가 직접 조종했다.
해안 경비대와 주방위군은 사고직후 헬기와 선박 등을 동원, 육.해.공 합동 대규모 수색작전에 나섰으나 작전개시 24시간이 넘었음에도 불구, 비행기 잔해만을 발견하는데 그쳐 케네디 2세일행의 생존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행기 잔해및 일부 유품이 발견되면서 케네디 2세일행이 기적적으로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점차 희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앞서 마서스 비녀드 공항과 해안 경비대 등은 케네디 2세가 조종한 파이퍼 경비행기가 16일 오후 8시45분 뉴저지 부근 캘드웰의 에섹스 공항을 출발, 오후 10시께 마서스 비녀드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마서스 비녀드 수 ㎞ 상공에서 접촉이 끊겼다고 전했다.정부 소식통들은 17일 오전 2시15분께 경비행기의 비상 신호가 포착됐다고 전했으며 케네디 가족들도 케네디 2세의 비행기가 도착하지않자 연방항공국(FAA)에 신고했다.
미 당국은 실종 비행기의 항로를 따라 롱 아일랜드 동쪽과 케이프 코드까지 241㎞에 이르는 해상에 대해 공중과 해상에서 저인망식 수색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그러나 수색작업중인 미 공군 수색대는 케네디 2세가 조종하던 경비행기가 추락한 해역을 발견했다고 밝히고 "그 비행기는 이제 더이상 실종 비행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해안 경비대도 비행기 좌석 머리받침, 비행기 바퀴, 양탄자 등 잔해와 부인의 약병, 처형 로렌 베셋의 이름이 적인 여행용 가방등을 마서스 비녀드 해변 등지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가족들은 케네디 2세가 마셔스 비녀드에 처형을 내려준 뒤 매사추세츠주에서 열릴 삼촌 고 로버트 케네디 전법무장관의 딸 로리 케네디의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전했다. 케네디 가족들은 실종소식직후 결혼식을 연기했다.
케네디 2세는 지난 60년 케네디 전 미 대통령과 재클린 여사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지 3년뒤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됐다.미국인들에게 `존 존'이란 아명으로 잘 알려진 케네디 2세는 브라운 대학을 나온뒤 법과 대학원을 졸업, 뉴욕 맨해튼에서 검찰시보로 근무하기도 했다.그는 95년 정치 문화 잡지인 `조지'를 창간, 회장겸 편집장으로 일해 왔으며 피플지 선정 `현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뽑히기도 했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머물고 있는 빌 클린턴 대통령은 케네디 2세 실종사건을 보고받고 우려를 표시한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케네디 2세의 누나인 캐롤라인등 케네디 가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했다.
<연합> 문화일보 1999-07-19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7191334
1999 - 존 F. 케네디 2세 사고사
7월 17일 자가용 경비행기 추락과 함께 실종된 존 F 케네디 2세는 당초 조종 미숙 때문에 비행기를 몰 생각이 없었으나 아내 캐롤린 베셋의 고집 때문에 마사스 비녀드 섬으로 가다가 참변을 당했다.
케네디 2세는 비행 전, 케네디가 전기작가인 데이빗 헤이먼에게 "(사촌 로리의 결혼식 장소인)하이아니스포트에 곧바로 갔으면 좋겠는데, 아내가 처형 로렌을 마사스 비녀드 섬에 내려달라고 간청한다"며 "착륙을 두번 해야 하는데 나는 그 정도로 숙달된 조종 사가 아니다"고 말했다는 것.
세계 주요 언론들은 존 F.케네디 2세의 항공기 추락사고를 일제히 1면 머릿기사로 다루며 미국 최대 정치 명문가인 케네디가에 잇따라 닥친 비극의 역사를 집중 조명했다. 신문들은 기사와 함께 지난 63년 암살된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존 존'이라는 애칭의 3살난 케네디 2세의 사진을 게재했다.
클린턴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추모 미사가 7월 23일 오전 11시 케네디 2세의 모친 재클린 여사가 남편 존 F.케네디 전 대통령의 암살후 뉴욕으로 이주해 다녔던 맨해튼의 성 토머스 모어 가톨릭 교회에서 거행되는 등 미국이 '존 존' 추모 열기에 휩싸였다. 전날 오전 마서스 비녀드 섬 인근 해상의 미군 해군 구축함 브리스코호 선상에서는 케네디와 베셋가 가족 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케네디 2세와 부인 캐롤린 베셋, 처형 로렌 베셋의 장례식이 약 30분간 진행됐으며 식후 가족들은 화장된 유골을 수장했다. 한편, 미전국교통안전국(NTSB) 관리들은 케네디 2세와 그의 부인, 그리고 처형의 죽음을 가져온 이번 추락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는 9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
네티즌선정 10대 뉴스 [디지틀조선일보]
http://www.chosun.com/poll/news1999/for16.html
본명 : John Fitzgerald Kennedy Jr.
직업 : 변호사
출생일 : 1960년 11월 25일
사망일 : 1999년 7월 16일
학력 : 브라운대학교, 뉴욕대학교법과대학원
뉴욕 지방 보조 검사관 (1989년-1993년)
정치전문 잡지 조지 창간
http://people.nate.com/people/info/jo/hn/johnfitzgeraldkennedyjr
1998 - 미국 하원, 아태소위원회에서 한미관계 50주년 기념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
1997 - 북한 도발에 의한 DMZ 교전
1994 - 슈메이커-레비 9 혜성이 목성과 충돌 시작
슈메이커-레비혜성 [ -彗星 / Shoemaker-Levy 9/Comet P ]
1991 - G-7, 옛소련 경제개혁지원 및 IMF 가입에 합의
1990 - 미국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화재
1990 - 필리핀의 마닐라 및 루손 지역에 진도 7.7의 지진 발생
2,640명 사망 또는 실종, 이재민 100만명 발생
1971년 2월12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월간 `다리`지(誌) 필화사건에 연루된
윤형두(사진 왼쪽)ㆍ윤재식ㆍ임중빈(오른쪽)씨 3명을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1971 - `다리`誌 필화사건 무죄판결
1971년 7월16일, 월간 `다리`지(誌) 필화사건에 연루된 윤형두(주간)ㆍ윤재식(발행인)ㆍ임중빈(평론가)에 대해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렸다. 임중빈의 논문이 반공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판시였다.
검찰은 임중빈이 다리지 1970년 11월호에 쓴 논문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 반공법에 위반된다며 2월12일에 세 사람을 구속했었다.다리는 당시의 대표적 정론지 `사상계` 폐간 직후인 1970년 9월에 창간돼 우리 사회의 여론을 주도했던 종합시사지였다.
박정권의 서슬에 눌려 인쇄소를 무려 20여차례나 바꾸는 등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창간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발행부수가 6만부를
넘길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김지하의 풍자시와 희곡이 실렸고 한승헌ㆍ김동길씨 등 쟁쟁한 논객들이 참여해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필화사건은 이후 몇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74년 5월, 대법원의 무죄원심 판결을 받아냈다.
1971 - ‘다리’ 誌 필화사건 무죄판결
1971년 7월 16일 월간 ‘다리’ 지(誌) 필화사건에 연루된 윤형두·윤재식·임중빈에 대해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렸다.
임중빈의 논문이 반공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임중빈이 다리지 1970년 11월 호에 쓴 논문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 반공법에 위반된다며 2월 12일에 세 사람을 구속했었다.
다리는 당시의 대표적 정론지 ‘사상계’ 폐간 직후인 1970년 9월에 창간돼 우리 사회의 여론을 주도했던 시사지였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zooey@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5 19:26:48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독일의 유명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생전 지휘하는 모습.
1989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망 /위키백과
1989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Karajan, Herbert von) 사망
카라얀 [Karajan, Herbert von, 1908.4.5~1989.7.16]
1989 -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망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81세를 일기로 1989년 7월 16일 영면했다. 지휘의 `마술사` `황제` `제왕` `천재`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유럽 악단의 `신화적인 존재`였던 카라얀은 생전에 솔로몬의 영화못지 않은 `음악적 영광`을 누렸다. 그는 `현미경과 같은 예리한 귀, 뛰어난 음악적 감식안, 지칠줄 모르는 음악에의 정열`로 20세기 음악사에 찬연한 금자탑을 세워놓았다. 생전의 카라얀은 1백50곡이 넘는 레퍼토리를 연주 해석했고, 7백장에 가까운 디스크를 냈다. 그의 디스크는 전세계적으로 2억장 이상이나 팔렸다.1908년 그리스계 아버지와 체코 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카라얀은 3세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신동`으로 비교적 순탄한 `음악인생`을 걸었다.
그는 폭넓은 레퍼터리와 정력적인 활동은 물론 사회적인 주목을 끄는 언동으로 유명했다.세계정상급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베를린, 잘츠부르크, 빈에서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지휘자에 임명됐다. 그 뒤 세계 각지의 오페라극장과 오케스트라에 객원 또는 예술감독을 겸임했으며, 1969년 카라얀 지휘자 콩쿠르를 창시해서 후진양성에도 주력했다. 그는 완성을 위한 노력에 독특한 영감을 연결하여 감동적인 음감을 창조했다.
1986 - 검찰,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수사결과 발표
1985 - 화가 최욱경 세상 떠남
"내가 찾아서 도달하려는 것은 설명적인 것이나 읽을 수 있는,
그렇다고 또 상징적인 그림은 아니다.
그것은 감성 본연의 그 자체를 시각적 용어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마치 음악이 갖고 있는 완전 추상성같은 것이며,
이것이 그림을 통해 나로 하여금 새처럼 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이다."
1985 -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Böll, Heinrich) 사망
뵐 [Böll, Heinrich Theodor, 1917.12.21~1985.7.16]
1983 - 문공부, 민족문화위인 57명 선정
1981 - 미국, 핵확산금지지침 발표
1981 - 조치훈 명인, 일본 본인방 획득
1980 - 중국 혁명위 폐지하고 민선 인민정부로 대체
1979 - 후세인 빈 온 말레이지아 수상 내한
사담 후세인 대통령
1979 - 이라크 대통령 아메드 핫산 알바크르가 사임하고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다.
1979 - 이라크 사담 후세인 집권
[어제의 오늘]1979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집권ㆍ사형때까지 20여년 권력 휘둘러
1979년 7월16일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지도자인 사담 후세인은 집권에 성공한다. 2003년 미국에 의해 전범으로 몰려 처형될 때까지 20여년간 권력의 최정상에 있었다. 그는 68년 범아랍민족주의를 신봉하는 바트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정권을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듬해 혁명지도평의회(RCC) 부의장으로 임명됐고 부통령을 거쳐 79년 이라크공화국 제5대 대통령에 올랐다.
취임 후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하에 다수파인 시아파를 억압했다. 동시에 소비엔트 연방과 연합한 시아파 국가 이란과 맞섰다. 그는 80년 반대파인 시아파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이란을 선제 공격했다. 82년 한 시아파 마을을 찾았다가 시아파 반군이 자신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터지자 후세인은 그 보복으로 마을 주민 180명 이상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훗날 사형을 선고받은 빌미가 된 사건이다. 이란이 이길 경우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아랍권 전역에 번질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국과 석유 이권을 노린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국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88년 이란 측이 정전제의를 수락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은 끝났다.이 전쟁을 계기로 이라크는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부상했다. 후세인의 관심은 석유 자원이 풍부하고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이라크의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이라크령이라고 주장되어 온 이웃나라 쿠웨이트로 향했다. 90년 8월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를 침공, 병합을 선언한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렀다. 91년 걸프 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에 패배했다. 걸프 전쟁 종결 이후, 미국을 주도로 하는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제재가 부과돼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지경에 처했다. 이 틈을 타 국내의 반체제 시아파가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를 진압한 후세인 정권은 강권 통치를 계속했다. 반대파에 대한 탄압, 고문, 부당 체포 등이 반복됐다.미국과 후세인 정권 간 갈등은 2001년에 터진 9·11테러를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명예에 상처를 입은 미국은 알 카에다를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에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후세인 정권도 9·11 테러에 대해 “미국이 자초한 것”이라며 과거 미국의 중동정책 탓으로 돌리는 등 물러서지 않았다. 2003년 3월20일,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후세인은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2006년 12월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생을 마쳤다.
권재현 기자 jaynew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15 17:51:3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51751375&code=100100&s_code=ap005
1978 - 제4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서독 본)
1976 - 캐나다, 사형폐지법 발효를 정식 결정
1975 - 방위세법 공포
1974 - 비상군법회의 윤보선 전 대통령을 민청학련 관련혐의로 기소
1973 - 제주도 곽지리, 신석기 시대인의 거주 유적 패총 발견
1973 - 스리랑카 '에살라' 축제(1973)
스리랑카 남동쪽 성지 '카타라가마(Kataragama)'!
1973년 오늘, 이 곳에서 '에살라(Asala Utsavaya)' 축제가 열린다.
불교와 힌두교, 회교도 등 모든 종교 신자들이 모여 갖가지 행사를 벌인다.
신자들은 불타는 석탄을 들고 가거나 불 위로 지나가기, 바늘로 살을 찌르는 등 고행을 체험한다.
또 '메닉 강가(Menik Ganga)' 강에서 몸을 씻으며 참회하는 시간도 갖는다.
해마다 7월이면 이 행사에 참여해 죄를 씻고 질병을 치료하려는 여러 종교의 신자들이 이 성지를 찾아 온다.
달 착륙선 이글
1969 - 美, 달착륙 우주선 아폴로 11호 발사(20일 암스트롱 달표면에 첫발)
아폴로 11호가 1969년 7월 17일(현지시간 16일로 정정) 미국 케이프 케네디 우주기지에서 발사됐다. 높이 110미터의 사탄 5형 로켓은 3000톤의 추력을 받아 점점 속도를 붙여 하늘로 날아갔다. 3분 정도 경과 후 1단이 떨어졌고 2단이 점화되었다. 다시 2단이 떨어지고 3단이 점화, 이렇게 달까지의 거리 38만 4천km를 나아갔다. 최고속도는 시속 약 3만9천km였다.비행사 3명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암스트롱이 알드린보다 먼저 달에 첫 발을 내딛고, 그 사이 콜린스는 달의 주위를 선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착륙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예정대로 달 착륙선 이글은 암스트롱과 알드린을 태워 모선 콜롬비아를 떠났고, 콜린스는 달 주위를 110km 높이에서 계속 돌았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글은 마침내 7월 21일(20일로 정정)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다. 이어 착륙선의 해치가 열렸다.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후 109시간 10분 35초가 소요됐다.평소 과묵했던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의 표면을 밟으며 말했다. " 이 순간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도약이다."라고... /조선 (7월 17일자)
아폴로 11호(Apollo 11)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유인 우주선이다. 아폴로 계획의 다섯 번째 유인우주비행인 동시에 세 번째 유인 달 탐사이기도 했다.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었으며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탔다.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발을 딛은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당시 콜린스는 달 궤도를 돌고 있었다.아폴로 11호의 탐사 성공으로, 존 F. 케네디가 주장했던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것'은 달성되었다."나는 이 나라가 196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킨 뒤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함을 믿었다." - 케네디, 1961년 연설
1967 - 뉴욕에서 흑인 폭동, 사망 20명 부상 1천명
1966 - 마오쩌둥 양쯔강 수영(1966)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뚱이 1966년 오늘 양쯔강에서 수영을 하면서 휴가를 즐긴다.
문화혁명이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난 때다.
일흔세 살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능숙한 수영솜씨로 건재함을 과시한다.
마오쩌둥은 한 달 뒤 중국공산당 전체회의를 열고 문화혁명을 강력히 추진할 것으로 다짐한다.
1965 - 한강 범람위기 위험수위 돌파. 중부지방에 폭우 사망 20명, 이재민 6만여
1965년 7월 16일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길이 11.6km의 세계최장인 몽블랑 터널이 개통됐다.
1965 - 세계최대 몽블랑터널 개통(11.6km)
1965년 7월 16일 프랑스와 이탈리아간의 당시로서는 세계최대의 자동차전용 터널인 몽블랑터널이 개통됐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사라가트 이탈리아 대통령이 이날 알프스의 몽블랑 산밑을 뚫은 길이 11.6km의 세계최장의 터널 개통식에 참석했다.
터널은 1870년 프랑스인 G.드레피네가 제안했다. 유럽최고의 산인 해발 4,807m의 몽블랑 산밑을 꿰뚫은 이 터널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4년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것인데 이 위험한 공사로 2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기술상의 곤란과 수주일간 계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예정보다 1년반이나 늦게 공사가 끝났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200km의 거리를 단축했으며 샤모니와 쿠르메이어 사이를 종전에는 반나절에 걸쳐 달렸으나 불과 15분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터널의 개통으로 이지역은 유럽에서 주목받게 되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5 - 소련, 중량 12.2톤의 세계최대 우주관측용 로케트 `프론트1호` 발사
1961 -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 신용욱 사망
신용욱(愼鏞頊, 일본식 이름: 眞原勝平, 1901년~1961년7월 16일)은 한국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수 산업에 몸담았고, 대한민국 제2,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일본 동아항공전문학교와 미국 힐라헬리콥터학교조종과를 졸업하고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냈다. 1948년10월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어 국내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때 대한국민항공사의 비행기가 징발되고 파산하였다가, 전시 중에 다시 비행기를 들여와 국제노선에도 취항하였다. 그러다가 경영난이 악화된 시점인 1961년7월 16일 한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제2대,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교통체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대한국민항공사는 현재 대한항공의 전신이다.2002년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1960 -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약한 독일의 군인 알베르트 케셀링 사망
알베르트 케셀링 (Albert Kesselring:1885년 8월 8일- 1960년 7월 16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육군으로 참전했지만, 나치당 집권 이후 공군(루프트바페)이 창설되자 이로 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시되자 처음에는 공군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나 1943년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육군 부대를 포함한 지휘를 맡아 잘 막아냈다. 전후에 포로가 된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사살한 혐의로 기소되어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병으로 후에 풀려났다.
1961 - 미-소, 군축예비회담 통과
1956 - 국회, 유엔가입 국민운동 전개에 관한 결의안 채택
1955 - 독일 카셀에서 최초의 도큐멘타전이 개최되다.
도큐멘타(documenta)는 독일 카셀 지역에서 5년마다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회이다. 1955년 당시 카셀대학교의
교수이자 아티스트, 큐레이터였던 아놀드 보데(Arnold Bode)에 의해 창설되였다. 창립 당시에는 카셀지역에서
열린 연방원예전시(Bundesgartenschau)의 일환이였다. 첫 번째 도큐멘타전에서는 근대미술에 큰 영향을 준 많은
(피카소와 칸딘스키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최근이 될수록 모든 대륙의 예술들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이 장소특정적인(site-specific) 성격을 가진다.
1952 - 한국전서 미군 손해 11만2천843명이라고 미국무성 발표
1952 - 미국무성, 한국전 참전 미군 사상자수가 11만 2천 843명이라고 발표
1950 - 임시수도를 대전에서 대구로 옮김
1950 - 정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
6.25 사변으로 북괴의 남침을 받아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으나, 계속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다시 대구로 또 옮기다.
1948 - 국회, 정부조직법안 통과
맨해튼 계획은 인류에게 핵무기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사진은 1945년 7월 16일 실시된 트리니티의 첫 핵 실험 장면이다.
1945 - 맨해튼 계획: 미국이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 폭파실험에 성공하다.
1945 - 미국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 트리니티에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1945 - 최초 원폭실험(1945)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머고도(Alamogordo) 인근 사막의 화이트샌즈 미사일 실험장!
1945년 오늘 미국은 이곳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한다.
실험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의 파괴력에 놀란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 폭탄을 일본에 투여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실험에 성공한 지 20일이 지난 8월 6일 미국 폭격기 B-29가 우라늄으로 만든 원자폭탄을 일본의
산업도시 히로시마에 투하한다. 사흘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플루토늄으로 만든 원폭이 떨어지고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국이 된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41년 12월!
이른바 '맨해튼계획'에 따라 아인슈타인 등 과학자와 기술자 4천5백여 명이 매달렸고
20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입됐다.
1945 -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미국은 1945년 오늘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폭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다음달
초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5 - 미국 최초의 원폭실험 성공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30분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미국정부가 2차대전중 비밀리에 추진한 암호명 `맨해튼계획`의 결실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이 1939년 8월 미국 과학자 질라드와
위그너의 권유로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개발촉구 편지가 발단이 됐다.
1942년 9월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오펜하이머와 시카고대의 엔리코 페르미를 중심으로 원폭개발을 위한
연구실-실험실-제조실이 건설됐으며 1943년에는 영국 리버풀대의 핵물리학연구소장 조셉 롯블랫 박사팀도 합류했다.
이 프로젝트로 제조된 무게 4,082Kg, 길이 3m, 지름 0.72m, 위력 TNT 1만5천톤의 일명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2개 원자폭탄은 다음달인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돼 한 순간에 모두 20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두 도시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미국 뉴멕시코 주 앨러머고도에서 실시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1945. 7. 16)
1945 - 원자폭탄 실험 최초 성공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 남쪽으로 193km 떨어진 지점에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다. 원자폭탄은 중성자가 우라늄-235(235U)·플루토늄-239(239Pu)와 같은 동위원소의 원자핵을 때릴 때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제조되었다. 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원자폭탄은 우라늄으로 만들어졌으며,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다. TNT 2만t의 위력과 맞먹는다고 발표한 이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 주민들 가운데 6만 6,000명이 즉사했고 6만 9,000명이 상처를 입었으며, 도시 구조물의 67% 이상이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이후 소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개발에 나서자 '핵확산금지조약',
'핵실험금지조약' 등의 핵무기 규제조치가 나오기도 했다.
1945 - 첫 원자폭탄 실험
[어제의 오늘]1945년 첫 원자폭탄 실험ㆍ인류가 만든 최악의 대량살상무기
1945년 7월16일 오후 5시29분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따라 완성된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최초로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은 39년 이탈리아의 화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미 해군 장교들과 핵분열 물질을 군사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토론했을 때 이미 시작됐다. 같은 해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에게 핵분열을 이용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미 연방정부는 이듬해 6000달러를 원자폭탄 연구용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독일이 원자폭탄을 자체 개발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42년 본격적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프로젝트에는 12만5000여명이 동원되었는데, 개중에는 자신이 하는 일의 최종결과물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7월16일 마침내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진행됐을 때 과학자들과 일부 고위인사들은 현장에서 9㎞ 떨어진 곳에서 버섯구름이 12㎞ 상공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폭발 당시 생성된 에너지는 TNT 2만t에 맞먹는 위력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원자폭탄의 표적을 누구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원래 목표였던 독일은 이미 항복한 상태였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전국은 일본이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러시아의 간섭 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어했고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바랐다. 대량 인명 살상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결국 원자폭탄은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됐다. 일명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2개의 원자폭탄은 20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두 도시를 거의 초토화시켰다.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51811115&code=100100&s_code=ap005
1945 -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역사속의 인물]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
집에는 반 고흐의 그림 3장, 피카소 1장, 르노와르 1장이 걸려 있었다. 뉴욕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1904~1967)는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공부는 늘 1등이었고 마술가(馬術家)에 와인과 시의 애호가였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독일에 유학한 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이론물리학 교수가 됐다.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교수였지만 연구성과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41년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탄 계획'의 책임자로 뽑힌 이후다. 반대하는 과학자들을 설득,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 연구소로 불러들였다. 빈손에서 시작한 탓에 그의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원자폭탄 제조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945년 오늘,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사상 처음으로 핵실험을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구나!"
1950년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나 묵묵하게 이겨냈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참상을 보고 '세계의 파괴자'가 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09년 07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1835&yy=2009
1945 - [오늘의 역사] 미국 최초의 원폭실험 성공
미국정부가 2차대전 중 비밀리에 추진한 암호명 ‘맨해튼계획’의 결실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이 1939년 8월 미국 과학자 질라드와
위그너의 권유로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개발촉구 편지가 발단이 됐다.
이 프로젝트로 제조된 무게 4082Kg, 길이 3m, 지름 0.72m, 위력 TNT 1만5천톤의 일명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2개 원자폭탄은 다음달인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해 한 순간에
모두 20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두 도시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충청투데이 2010.07.15 23:34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3509
1945 - [오늘의 역사]美, 원자폭탄 실험성공
1945년 오늘, 미국이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남쪽 193㎞ 지점에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 실험을 강행, 성공을 거뒀다.
원자폭탄은 중성자가 우라늄-235(235U)·플루토늄-239(239Pu)와 같은 동위원소의 원자핵을 때릴 때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제조됐다.
아인슈타인 등 과학자와 기술자 4500여 명이 매달렸고 20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입됐다.
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원자폭탄은 우라늄으로 만들어졌으며,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TNT 2만t의 위력과 맞먹는다고 발표된 이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 주민들 가운데 6만 6000여 명이 즉사했다.
충청투데이 2009.07.15 21: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2824
1945 - [오늘의 역사]美, 원자폭탄 실험 성공
1945년 오늘, 미국이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남쪽 193㎞ 지점에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 실험을 강행,
성공을 거뒀다. 원자폭탄은 중성자가 우라늄-235(235U)·플루토늄-239(239Pu)와 같은 동위원소의 원자핵을 때릴 때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제조됐다. 아인슈타인 등 과학자와 기술자 4500여 명이 매달렸고 20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입됐다.
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원자폭탄은 우라늄으로 만들어졌으며,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TNT 2만t의 위력과 맞먹는다고 발표된 이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 주민들 가운데 6만 6000여 명이 즉사했다.
충청투데이 2008.07.15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1822
1945 - 원폭실험 성공
[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원폭실험 성공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 미국 뉴멕시코 주 모래사막 한복판에서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황금빛, 진홍빛, 보랏빛이 뒤섞인 섬광은 일순간 주변 산봉우리와 산마루, 계곡 깊숙이까지
대낮처럼 환하게 비췄다.암호명 ‘트리니티’로 불린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16km 떨어진 관측소에 있던 과학자들은 핵폭발이 연출한 황홀한 장관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리고 40여 초 뒤,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폭음이 귀청을 때린 뒤 12km 상공까지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보면서 이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이 극비 프로젝트를 지휘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소름끼치는 만족감과 함께 다가올 참극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문득 고대 힌두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시구를 떠올렸다.
“태양 1000개의 광휘가 하늘로 솟구친다면 그것은 전능한 존재의 광채와 같으리니…. 나는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다.”
인근 수백 km까지 느껴진 충격파 때문에 군 당국에는 문의가 쏟아졌다. 실험장 관할 공군기지는 50단어짜리 짤막한 보도자료를 냈다. ‘상당량의 고폭탄과 조명탄을 저장해둔 화약창고가 폭발했다. 사상자는 없었다.’
실험이 성공한 직후 샌프란시스코에 대기하고 있던 해군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서태평양의 비행기지 티니언 섬으로 출발했다. 인디애나폴리스호에는 20여 일 뒤 일본의 두 도시에 떨어져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원자폭탄이 실려 있었다.실험 성공 소식은 곧바로 독일 포츠담 근교 바벨스베르크에 머물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전달됐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을 앞둔 트루먼은 뛸 듯이 기뻐했다. 트루먼은 다음 날 회담에서 매우 강경한 자세로 스탈린을 몰아붙였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트루먼은 원자폭탄이 소련을 상대하는 ‘으뜸패’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련도 조만간 원자폭탄을 갖게 될 것’이라는 오펜하이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그러나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 첩보기관은 미국의 원폭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독일 출신 과학자를 포섭해 핵심기술을 빼냈고,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마침내 첫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냉전시대 핵무기 군비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동아닷컴 2008-07-16 03: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716/8603226/1
1944 - 일본의 사이판섬 수비대 전멸
1941년 6월29일, 42경기 연속안타를 칠 때의 조 디마지오.
1941 -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안타
그 해 초, 조 디마지오의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다. 5월 들어서도 타율은 3할에 머물러 있었다. 1년 전 3할5푼2리, 2년 전 3할8푼1리와 비교하면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그가 속한 뉴욕 양키스도 덩달아 침체에 빠져 4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때문에 5월15일의 안타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그것은 대기록의 신호탄이었다. 6월 중순쯤, 그가 29경기 연속안타를 세우면서 신문과 라디오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디마지오가 안타를 칠 때마다 이 사실을 알리며 디마지오 찬가(讚歌)를 내보냈다.마침내 다가온 1941년 7월1일, 보름 뒤 갈아치워질 운명이지만 미국 프로야구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디마지오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對) 레드삭스전(戰)에서 홈런으로 45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1897년에 윌리 킬러가 세운 44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45년 만에 갈아치운 순간이었다.
꿈은 계속됐다. 7월17일 미국인들은 여전히 새로운 기록에 목말라했다. 그러나 무안타였다. 하루 전인 16일에 수립한 56경기 연속안타에 만족해야했지만 6만7000명의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해 디마지오는 타율을 4할8리로 끌어올리며 타점왕과 MVP까지 거머쥐었다. 양키스가 월드시리즈를 제패했음은 물론이다.
1937 - 임정군사위원회 설치
1928 - 미국의 공상과학소설(SF) 작가 로버트 셰클리(Sheckley, Robert) 출생
셰클리 [Sheckley, Robert, 1928.7.16~2005.12.9]
1919 - 제10대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출생
최규하 [崔圭夏, 1919.7.16~2006.10.22]
1918 -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Nikolai II, Aleksandrovich) 처형 - 17일로~
니콜라이 2세 [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5.18~1918.7.16/17]
1918 - 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 피살
1918 - 러시아 왕 니콜라이 2세 처형(1918)
1917년 2월 혁명으로 붕괴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왕 니콜라이 2세!
1918년 오늘 우랄지방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의 소비에트 당원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처형된다.
유형지 시베리아로 가던 길에 쉰 살 나이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반혁명세력인 백군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총살형이 집행된 후였다.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은 폐광 갱도 구석에 버려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한 니콜라이 2세!
왕세자의 혈우병을 고쳐 준 성직자 라스푸틴의 전횡을 방치하고 전제정치를 고집해 소비에트 혁명을 자초했다.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된 니콜라이 2세 일가. 중앙의 두사람이 황제부부.
1918 - 러시아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 처형
1894년 26세의 나이로 로마노프 왕조 제18대 황제가 된 니콜라이2세가 1917년 3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흐느낄
겨를도 없이 왕관을 빼앗겼다. 니콜라이2세는 그 후 우랄산맥 중턱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구 스베르들로프스크)의 한
외딴집에서 유폐(幽閉)생활을 했다.그러던 1918년 7월 16일 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4명의 딸과 14세인 알렉세이 황태자가 억류됐던 집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가족 모두는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고 이에 따랐다. 그런데 지하실에는 볼셰비키 총살대가 로마노프 왕가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얼마간의 총격 세례 후 방안이 화약 연기로 자욱해졌다.
이로써 3세기 동안에 걸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종말을 고했다. 그의 유골은 1989년 4월 한 희곡작가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70여년 동안 인근 개천가 진흙탕속에 그대로 내버려져왔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이 2세는 신생 볼셰비키 정권의 정통성에 가장 위험스런 존재였다. 1894년에서 1917년까지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했던 그였지만, 개혁과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조국의 뜻을 탄압할 만큼 그리 강력한 제왕은 못됐다.
1918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총살
[책갈피 속의 오늘]1918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총살
‘한밤중에 무슨 사진을 찍는다는 거야?’
갑작스러운 명령에 일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지하실로 내려가 두 줄로 나란히 섰다. 이들이 달아났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지하실에 들어선 사람은 사진사가 아니라 무장한 병사 10여 명이었다. 누구인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간단한 처형명령서가 낭독된 뒤 총알이 난사됐다.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은 총검에 찔려 마지막 숨이 끊겼다.
1918년 7월 16일 밤 우랄 지방 예카테린부르크 근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이렇게 처형됐다. 3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로마노프 왕가도 14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894년 부황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군주로서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천성이 소심했고 지적인 자질은 거의 없었다. 좋아한 것은 그저 군대의 제복과 계급장, 행진 같은 것뿐이었다.
그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펼쳤다. 유대인을 상대로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방조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끌려들어가면서 나라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내각의 대신들을 불신하고 황후 알렉산드라의 말에 따라 심령술사와 신앙요법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악마의 사제’로 불린 괴승(怪僧) 라스푸틴이 황실을 움직였다.
마지막 차르 일가의 유골은 소련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1991년에야 발굴됐다. 유골더미에서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세 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가 유전자(DNA) 분석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황태자 알렉세이와 막내딸 아나스타샤의 유골은 DNA 분석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떠돌던 아나스타샤의 생존설을 부추겼다.일찍이 아나스타샤를 자처하는 이는 여럿 있었다. 애나 앤더슨이라는 여자가 가장 그럴듯했다. 앤더슨은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러시아 황실의 유산 상속권을 요구하는 소송까지 벌였고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다.그러나 1994년 과학자들이 치아와 머리카락의 DNA를 분석한 결과 앤더슨은 니콜라이 2세의 딸이 아니라 프란치스카 샨츠콥스카라는 이름의 떠돌이 폴란드 여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동아닷컴 2007-07-16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6/8466943/1
1916 - 러시아 생물학자 메치니코프 사망
1916 - 러시아 태생의 생물학자, 세균학자 메치니코프(Mechnikov, Ilya) 사망
메치니코프 [Mechnikov, Ilya Ilich, 1845.5.15~1916.7.16]
1913 - 중국 안휘성 독립선언 이후 각성(各省) 독립선언
1908 - 홍삼전매법, 인삼세법 반포
1907 - 순국한 이준 열사 네덜란드 헤이그 땅에 묻힘
홀로 남은 이상설 "슬프다, 너무 슬프다"
네덜란드 헤이그 중앙역에서 2번 전차를 타고 15분쯤 가면 시 외곽에 자리잡은 뉴 에이큰다위넌(NieuwEykenduynen) 공동묘지에 닿게 된다. 이곳을 찾은 날, 수많은 비석들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헤맨 끝에 관리사무소 뒤편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청동상을 간신히 찾았다. 그의 묘적지, 젖은 흉상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순국한 지 사흘이 지난 1907년 7월 16일, 여기서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참석자는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상설(李相卨)과 '드 용' 호텔의 주인이 전부였다. 넋이 나간 이상설은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는 영어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다른 밀사인 이위종(李瑋鍾)은 잠시 러시아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있었다. 만리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48세의 이준은 1963년 서울 수유리로 이장되기까지 55년 동안 이 쓸쓸한 공동묘지 구석에 묻혀 있어야 했다.
다시 이틀 뒤 서울.대한매일신보는 7월 18일자 호외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이준씨가... 충분(忠憤)한 지기(志氣)를 불승(不勝)하여... 자결하여 만국사신지전(萬國使臣之前)에 열혈(熱血)을 일쇄(一灑)하여 만국을 경동(驚動)하였다더라." 다음 날짜 황성신문도 "이준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 찔러 자결함)하였다는 전보가...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다더라"고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게 됐던 첫 근거는 바로 이 신문들이었다.하지만 현재의 정설은 이준 열사가 '분사(憤死)' 또는 '순국'했다는 대단히 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결과 '할복자살이 아닌 쪽'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부 출판물에선 '자결'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
헤이그=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닷컴 2007.06.25 00:4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5/2007062500056.html
1904 - 영국인 배설과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4 - 바하마의 정치인 베인(Bain, Clarence A.) 출생
베인 [Bain, Clarence A., 1904.7.16~1971.7.14]
1903 - 베를린; 국제통화회담. 금본위 통화와 은본위 통화간 교환을 결정
1900 - 레닌, 러시아 탈출해 스위스 망명
1896 - 제1대 국제 연합 사무총장, 노르웨이의 정치인 트뤼그베 리 출생
1896 - 노르웨이의 정치가, 외교관. 초대 UN사무총장 트뤼그베 리(Lie, Trygve) 출생
리 [Lie, Trygve Halvdan, 1896.7.16~1968.12.30]
1896 - 가시밭길의 초대 UN 사무총장 리 출생
[역사 속의 인물] 가시밭길의 초대 UN 사무총장, 리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이다."
초대 UN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1896~1968)가 1952년 6년간 몸담았던 자리를 떠나며 한 말이다. 호랑이 같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회원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의 사무총장 시절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렇더라도 보기 드물게 소신과 강단이 있는 외교관이었다.
1896년 오늘,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어릴 때 가출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슬하에서 컸다. 변호사를 거쳐 법무장관과 노르웨이 망명정부의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6년 UN 창설 때 사무총장보다 격이 낮은 총회 사회자에 출마해 실패했으나, 소련의 추천에 힘입어 총장에 뽑혔다. 잘 지내던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가 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때문이다. 그는 소련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UN군의 한국 참전과 지원을 주도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소련의 거부권을 피하기 위해 총회에서 그의 임기를 3년 연장하는 편법을 강행했다. 그러나 미국이 매카시 광풍에 휩싸이면서 FBI가 유엔 사무국을 수사하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서 재선을 한 반기문 총장의 건투를 빈다.박병선(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7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8587&yy=2011
1896 - 프랑스 비평가 에드몽 드 공쿠르 사망
1896 - 프랑스의 형제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Goncourt, Edmond de) 사망
공쿠르 [Goncourt, Edmond de, 1822.5.26~1896.7.16]
1877 - 미국 철도 스트라이크를 군대동원 진압
1872 - 노르웨이의 극지탐험가 로알 아문센(Amundsen, Roald) 출생
1872 -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Amundsen, Roald) 출생
아문센 [Amundsen, Roald, 1872.7.16~1928.6.18]
아문센은 남극에 최초로 도달한 노르웨이의 탐험가이다. 무역선의 선장 및 선주들을 배출한 가문에 태어나 일찍부터 모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심신을 단련했다. 초년에는 부모의 희망대로 의학을 공부했으나, 21세 때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모험가의 길로 들어섰다. 해표잡이 배를 타고 경험을 쌓았고 1897년에는 벨기에의 남극탐험대에 일등항해사로 참가했다. 1903~04년에는 북극에서 보내면서 북극점의 위치 변동을 확인해 학자들의 논란을 종식시켰고, 마침내 1906년에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통하는 북서항로를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북극횡단을 준비하던 중 1909년 4월 로버트 E. 피어리가 이미 북극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1910년 남극을 향해 출발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의 로버트 폴컨 스콧도 남극 정복에 나서 둘의 경주가 시작되었으나,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의 승리로 돌아갔다. 1918년 노르웨이를 출발해 해류를 타고 북극을 지나 동쪽으로 가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비행기로 북극을 횡단하려는 계획을 세워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1926년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함께 했던 이탈리아 항공가 움베르토 노빌레가 북극 비행 중에 사고를 당하자, 그를 구조하기 위해 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바이킹의 마지막 후예'를 자처했던 아문센은 영웅적인 탐험가의 전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찍이 그 누구도 자기가 진정 소원하던 것에서
이처럼 정반대되는 위치에 서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 로알 아문센, 북극 대신 남극을 정복하고서
1863 - 뉴욕 징병거부 폭동이 진압되다.
뉴욕 징병거부 폭동(1863년 7월 13일 ~ 7월 16일)은 남북 전쟁 중 뉴욕 시에서 새로운 징병법에 반발하여 징병을 거부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뉴욕의 빈민들이 일으킨 폭동사건이다. 7월 13일에 시작되어 4일간 계속된 이 폭동에 대략 50,000여명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당시 화폐로 150만 달러(현재 기준으로 대략 2천 7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폭동 가담자의 대부분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었고, 존 휴즈 대주교가 이끌었다. 뉴욕 경찰로는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결국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전했던 군대가 무력으로 진압했다.
배경
1863년 여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새로운 징병법에 서명했다. 지난 3년여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도 많았고, 기존에 병사들 중에도 2년 간의 복무 기간이 끝나자 제대하려는 자들이 많아 신규 병력이 필요했다. 새 징병법은 20세에서 45세까지 전 북부 백인 남성을 대상으로 복무 기간은 3년으로 규정되었다. 이 법안으로 링컨은 약 30여만 명을 충원하고자 했다.이 법의 문제는 부자들에게 병역을 기피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는 점이다. 군대에 가기 싫은 자들은 300달러의 면제비를 내거나 자기 대신 복무할 대리 복무자를 입대시키는 것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원의원 테데스 스티븐스도 이 법을 맹렬하게 비난했다.그러나 이 법은 시행에 들어갔고, 많은 부자들이 이 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병역을 회피했다. 면제비를 낸 자들 중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버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버지,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 등이 있었고,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체스터 A. 아서와 그로버 클리블랜드 등은 대리자를 입대시켰다.
이렇듯 불평등한 징병법 개정에 빈민들의 반발이 없을 리가 없었다.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통치와 차별을 피해서 이주한 뉴욕 시의 아일랜드계 빈민들도 이런 불만 집단 중 하나였다.
경과
7월 11일 뉴욕 시에서 최초의 징병 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7월 12일에 게티즈버그 전투의 전사자 명단이 발표되었고, 월요일인 7월 13일 아침 추가 징병 대상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것이 아일랜드계 빈민들을 자극했다. 이민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징병사무소와 우체국 등을 공격했으며, 징병대상자 명단을 불태우고 건물을 무너뜨린 뒤 시가지로 몰려나갔다. 이후 맨해튼 동쪽 지역은 폭도들이 지배했다. 뉴욕 경찰과 메릴랜드 프레데릭크에 주둔하고 있던 뉴욕시 민병대(New York Guard)가 투입되었으나 완전히 진압할 수가 없었다.
폭도들의 불만은 흑인들에게로 번졌다. 폭동의 원인이 된 징병법으로 가난한 자들만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불만을 터뜨리던 차에, 자신들의 가난이 흑인들이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폭도들은 흑인들을 공격하여 죽이고 화형에 처하기도 했으며, "제퍼슨 데이비스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제퍼슨 데이비스는 남부 동맹의 대통령이었다).
결국 연방정부는 74 뉴욕연대(포토맥군 3군단 2사단 2여단 소속)와 65 뉴욕 연대(포토맥군 6군단 3사단 1여단 소속)를 투입했고, 이들에 의해 폭동 4일만인 7월 16일에 진압되었다.
인명 및 재산 피해
죽은 사람의 정확한 통계는 없다. 대략 100여명이 죽었고, 3000여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재산 피해는 당시 화폐로 150만 달러 규모였다.
매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갱스 오브 뉴욕》의 마지막 장면이 이 폭동 사건을 다루고 있다.
폭동의 전개 과정이나, 당시 상류층의 둔감함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위키백과
1858 -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외젠 이자이(Ysaÿe, Eugène) 출생
이자이 [Ysaÿe, Eugène, 1858.7.16~1931.5.12]
1796 - 프랑스의 화가 카미유 코로(Corot, Camille) 출생
코로 [Corot, (Jean-Baptiste-)Camille, 1796.7.16~1875.2.22]
1773 - 체코 작가 요세프 융만 출생
요세프 융만 (1773년 7월 16일 후들리쩨 - 1847년 11월 14일 프라하)은 체코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 작가, 번역가이다. 융만은 평생을 체코어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닦는 데 바쳤으며, 그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민족부흥기 2세대를 이끈 인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1788년까지 프라하 남서쪽 30 km 거리에 있는 베로운 (Beroun)에서 학교를 다니다 프라하의 김나지움으로 옮긴다. 졸업 후에 1792년부터 철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1799년부터는 법학을 공부하지만 학업을 마치지는 않는다. 학교를 다니면서 개인교사를 하기도 하였다.1799년부터 Litoměřice (발음:리토므녜르지쩨)에 있는 김나지움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1800년부터 무료로 체코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최초의 체코어 교사가 되었다.1815년에 프라하로 돌아와 Staročeské gymnasium (발음:스타로체스케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고 나중에는 대학 총장이 된다.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5권으로 된 120,000 표제어를 담고 있는 체코어-독일어 사전을 발간한 것이다.
이것은 요세프 도브로프스키 (Josef Dobrovský)의 작업을 뒤이어 표준 체코어를 확립하는 두 번째 기초가 되었다.
위인들의 묘지인 슬라빈에 묻혔다.
1723 - 영국의 초상화가 조슈아 레이놀즈(Reynolds, Joshua) 출생
레이놀즈 [Reynolds, Joshua, 1723.7.16~1792.2.23]
1715 - 프랑스의 귀족이자 군인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 출생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은 로앙-로앙 공작이자 로베르발(Roberval)의 영주로서, 1758년부터 프랑스 원수의 지위에 앉아,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2대에 걸쳐 장관을 맡았다. 유명한 방탕자로서 악명이 높으며, 그는 로앙 가(House of Rohan)의 분가(分家;Branch) 마지막 남자로서, 1804년 나폴레옹에게 처형된 앙기앵 공작은 그의 증손이다.
1715년 7월 16일 샤를은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비즈 공 줄 프랑수아 루이 드 로앙(Jules François Louis de Rohan, prince de Soubise)로서 왕립경호대의 헌병대 대령이었다. 어머니는 안느 줄리에 아데라이드 드 멜룬(Anne-Julie-Adélaïde de Melun)이다. 1724년 양친이 모두 천연두로 인해 죽자, 누이인 마르상 부인(어릴적 루이 16세등 형제의 교육계였다)와 더불어 고아가 되었다. 그는 조부 에르큐르에게 맡겨졌고, 같은해 루이 15세의 놀이동무로서 궁정에서 생활했다.그는 루이 15세을 수행하여 1744년부터 1748년까지 원정에 참가했다. 그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처세술에 능했기에 군인으로서 빠른 출세를 할 수 있었다. 이윽고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왕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영향력을 통해 그는 24,0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나, 1757년 11월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
군인으로서 후기 경력은 그에게는 다행히 행운이었다. 그는 1763년 파리 조약때까지 군사업무를 계속했고, 그후 보통의 궁정인, 또는 파리의 유행을 이끄는 인물로서 살아갔다.그는 2명의 딸이 있었다:
* 샤를로트 엘리자베트 고드프리드 드 로앙(Charlotte Élisabeth Godefride de Rohan) 1737-1760, 콩데 공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결혼.
* 빅트와르 아르망드 조제페(Victoire Armande Josèphe) 1743-1807, 같은가문의 게메네 공(Prince de Guéménée)
앙리 루이 마리에 드 로앙과 결혼.
"수비즈"는 또한 요리의 음식과 함께 등장하는 쌀과 양파 퓨레로 만든 소스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이 이 소스를 칭찬하며 명명한 것에서 유래한다:수비즈 소스.
1557 -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사망
클리브스의 앤 [Anne of Cleves, 1515.9.22~1557.7.16]
앤 [Anne of Cleves]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4번째 아내.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게 된 것은, 그녀의 오빠이자 독일 서부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클레베스 공작 빌헬름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9년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결탁해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제임스는 이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위협은 헨리 8세의 측근 각료인 토머스 크롬웰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원수지간인 루터파와 잉글랜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결혼을 서둘러 주선하게 했다. 1540년 1월 1일 앤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잉글랜드 땅을 밟았고 5일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헨리 8세는 기대했던 것만큼 앤이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했다. 그는 곧 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데 울화가 치밀게 되었다. 가톨릭 국가들간의 동맹이 실현되지 못하자 이들의 결혼은 정치적인 골칫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성공회 주교회의는 이 결혼에 대해 무효 선언을 했다. 앤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하고 막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 그녀는 가끔 궁정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리치먼드와 블레칭글리에서 지냈다.
1509 - 종교개혁 이끈 프랑스 신학자 칼뱅 출생
1486 -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출생
안드레아 델 사르토 [Andrea del Sarto, 1486.7.16~1530.9.28]
1194 - 이탈리아의 대수녀원장, 클라라수녀회 창설자 클라라(Saint Clare of Assisi) 출생
클라라 [Saint Clare of Assisi, 1194.7.16~1253.8.11]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투르크이슬람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림.
마호메트가 구렁이를 달래는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622 - 무함마드의 헤지라(이슬람력 원년)
622 - 마호메트의 헤지라(聖遷) - 이슬람교의 기원 원년
622년 7월 16일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고향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것이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는 `헤지라`이다. 헤지라는 아랍어로 `이주` `이탈`을 뜻으로 쓰인다. 중국사람들은 헤지라를 성천(聖遷)으로 번역했다.
마호메트는 고향 메카에서 쿠라이시족의 박해를 받아 오던 중 이날 메디나의 한 유력자에게 초빙돼 소수의 신도를 이끌고 메디나로 이주했다.마호메트는 헤지라 이후, 메디나 사회를 이슬람교도의 사회로 통합하고, 메카를 비롯하여 주변의 아랍과 유대교도들을 정복하여 이슬람 교단국가를 건설했다. 이같이 헤지라는 이슬람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에 후에 이 헤지라의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있다.
622 - 마호메트, 메디나 이주
622년 7월 16일 고향 메카의 금권 과두정치에 의해 박해를 받던 마호메트가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 사건은 아랍어로 '도주', '이주'라는 뜻의 히즈라로 불리며, 이 날짜는 이슬람의 히즈라력 원년(元年)이 되었다. 히즈라력의 기원을 622년 7월 16일로 정한 사람은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 1세였다. 메디나로 이주한 마호메트는 메디나 헌장을 체결하고 9개 부족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형성했다. 628년 마호메트는 메카의 대표들과 후다이비야 조약을 체결하며 시간적 여유를 얻은 뒤, 630년 1월 마침내 이슬람의 성지 카바가 있는 메카를 정복하고 거의 모든 주민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
622 -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거처를 옮겼다. 이 날을 이슬람력에서는 히지라라고 부른다
헤지라(아랍어: هِجْرَة)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622년 9월 20일의 일로서 메카를 출발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짜를 말한다. '헤지라'라 함은 본래 혈연·지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뒤에는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해서 메카에 있어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인식되어 뒤에 이슬람교 기원(紀元)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하로지룬). 이미 메디나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측으로서는 메카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코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사건 7-18 (0) | 2019.07.18 |
---|---|
오늘 7-17 제헌절 (0) | 2019.07.17 |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6-2 (0) | 2019.07.16 |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6 (1) (0) | 2019.07.16 |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5 (2) (0) | 2019.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