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 7-18
우루과이의 제헌절(1830)
2011 - "꿈이 이뤄졌다" 일본 여자축구, FIFA 월드컵 우승
일본 여자축구가 꿈을 이뤘다.일본이 18일(한국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코메르츠방크 아레나에서 열린 세계랭킹 1위 미국과의 2011 FIFA(국제축구연맹) 여자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아시아국가 최초로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연장전까지 가는 120분 혈투 속에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채 돌입한 승부차기에서 3-1로 이기며 들어올린 극적인 우승이었다.1991년 초대 대회부터 매번 여자 월드컵 본선에 올랐지만 1995년 2회 대회 때 8강 진출한 것이 역대 최고 성적이었던 일본은 6회째인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며 이변의 중심에 섰다. 일본이 우승하기 전까지 아시아국가의 여자 월드컵 최고 성적은 1999년 3회 대회에서 중국이 작성한 준우승이다.8강에서 우승후보 독일을, 준결승에서는 유럽의 강호 스웨덴을 제압하며 이변을 예고한 일본은 이로써 남녀 통틀어 FIF가 주관하는 성인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첫 아시아 국가가 되며 아시아 축구의 새 역사를 썼다. 지난해 17세 이하(U-17) 여자 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하는 등 청소년 대회에서는 아시아 국가가 우승한 적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성인 대회 우승은 일본이 처음이다.
경기 초반 주도권을 가져간 것은 미국이었다. 힘과 높이를 앞세워 수 차례 일본의 골문을 위협했던 미국은 0-0이던 후반 24분 알렉스 모건의 왼발슛으로 선제골을 가져갔다.일본이 승부를 원점으로 만든 것은 그로부터 12분 뒤였다. 후반 36분, 상대 수비수가 걷어내려던 공을 미야마 아야가 가로채 동점골로 연결하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결국 연장으로 넘어간 승부에서 일본은 연장 전반 14분 미국의 애비 웜바크에게 헤딩골을 내주며 다시금 끌려갔다.
그러나 국가대표 18년 경력의 베테랑 사와 호마레가 연장 후반 12분 왼쪽에서 올라온 코너킥을 감각적인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하며 극적인 동점 승부를 만들어냈다. 결국 '신들의 룰렛'이라는 승부차기에 돌입한 일본은 미국의 선축으로 시작된 승부차기에서 첫번째 키커 섀넌 복스의 슈팅을 골키퍼 카이호리 아유미가 막아낸데 이어 일본의 1번 키커 아야가
가볍게 골망을 출렁이며 승리를 직감했다.한편 연장 후반 동점골을 뽑아내며 일본 우승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한 사와는
이번 대회에서 5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사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월드컵 결승 무대에 서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면서 "결승전은 솔직히 꿈과 같은 것이었다"며 꿈의 실현에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CBS 체육부 박지은 기자 노컷뉴스 2011-07-18 08:04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61785
2011 - 일본 여자월드컵 우승 주역 사와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 여자축구대표팀 주장 사와 호마레(33)는 쿠마가이 사키의 슛이 네트에 꽂히는 순간 어린애처럼 뛰쳐 나갔다. 푸른 옷을 입은 동료들과 어느새 한덩어리로 엉켰다. 가슴이 터질 듯한 환희속에 그들은 울고 환호를 지르고, 그리고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었다.월드컵 우승이었다. 늘 꿈을 꿨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월드컵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시상식 제일 높은 곳에 선 사와는 오랜 연인을 만난 듯 천천히 월드컵에 입맞춘 뒤 하늘높이 치켜들었다.
일본은 1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코메르츠방크 아레나에서 열린 2011독일여자월드컵 결승전에서 미국과 연장까지 2-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일본은 남녀를 통틀어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성인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첫 아시아 국가가 됐다.
지난해 17세 이하(U-17) 여자 월드컵에서 한국이, 2008년 U-17 여자 월드컵에서 북한이 우승하는 등 청소년 대회에서는 아시아 국가가 우승한 적이 여러 차례 있지만 성인 대회 우승은 일본이 처음이다.
사와는 이번 대회서 모두 5골을 기록, 골든부트(득점왕)와 골든볼(MVP)을 독차지하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풍작을 기원하며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패색이 짙던 연장 후반 12분 천금같은 동점골을 넣어 대역전 우승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사와였다.나이 33살. 어린 시절 동네축구에서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찼던 소녀는 어느새 이마에 주름살이 선명하게 새겨진 아줌마로 변해 있었다. 1m64의 작은 키에 가냘픈 팔,
이웃집 아줌마같은 서글서글한 인상만 보면 도저히 ‘킬러본능’으로 충만한 골잡이로 보이지 않는다.
사와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당시만 해도 축구는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축구 경기에
끼지 못하는 가 하면 ‘여자 주제에 축구를 잘한다’는 이유로 남자 아이한테 스파이크로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사와는 포기하는 대신 억울함에 더 독기를 품고 연습했다. 15살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사와는 필리핀을 상대로 한
데뷔전에서 4골을 몰아넣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사와는 이후 일본이 진출한 6번의 월드컵 본선에 5차례 출전했고, 올림픽도 세 차례 참가하는 등 일본 여자축구의 성장과 함께 했다.
A매치 173경기에서 80골로 가마모토 쿠니시게가 갖고 있는 일본 남자 A매치 최다골(75골)도 넘어섰다.
미국을 이긴 건 기적과도 같았다. 미국은 월드컵을 두 차례 우승했고, 올림픽에서도 세 번 정상에 오른 강팀으로 현재 세계랭킹 1위였다. 역대 일본과의 상대전적도 22승3무로 져본 적이 없었다.
미드필더 칼리 로이드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게 우리의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우승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로이드는 일본의 정신력과 투혼을 간과했다. 노리오 사사키 일본 감독은 매 경기를 앞두고 지난 3월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지진해일 동영상을 선수들에게 틀어줬다. 그들은 미증유의 재난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일본 국민들을 위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8강과 4강에서 지금껏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독일과 스웨덴을 연파한 일본은 결승에서 미국까지 침몰시키며 믿기지않는 우승 신화를 완성했다. 미국과의 결승에서도 두 차례나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때마다 동점골로 따라붙었다.미국의 애비 웜바크는 “일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도전해왔고, 결국 그들이 챔피언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 골키퍼 호프 솔로는 “그들 뒤에는 뭔가 거대한 어떤 것이 있어 그들을 끌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사와의 말도 그랬다. 그는 “믿을 수 없다.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운 결과”라면서 “나 자신도 최후까지 계속 뛰었다. 정말 전력을 다했다. 세계정상을 목표로 싸워온 것이기 때문에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사와는 일본 국민에게 월드컵만 안긴 게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용기와 희망,
자신감 역시 사와가 재난에 시름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선사한 선물이었다.
류형열 기자 rh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18 17:59:2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181759221&code=980202
2011 - 현생인류에 네안데르탈인 흔적
두 종이 섞였다는 가설 확증…중동지역서 이종교배”
현생 인류의 뿌리가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앞선 네안데르탈인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전학적 연구 결과가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대 연구팀이 인간 염색체에서 발견된 특이한 디엔에이(DNA)가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유전정보의 집합체)에서 비롯했다는 연구 결과를 영국 옥스퍼드대 월간학술지 <분자생물학과 진화> 최신호에 발표했다고 과학저널 <디스커버리>가 18일 보도했다. 이번 연구는 10여년 전 인간 염색체에서 ‘하플로타입’으로 명명된 특이한 디엔에이가 발견된 데서 비롯했다. 이 디엔에이는 인류의 기원지였던 사하라사막 이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대륙의 인간이 갖고 있는데도 그 기원을 알 수 없었다. 수수께끼는 2010년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풀렸다. 현생 인류의 하플로타입과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에서 유전적 동질성이 확인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80만~40만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에서 번성하다 3만년 전께 갑자기 사라진, 사람속(HOMO屬)의 일종이다. 반면 현생인류는 8만~5만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팀을 이끈 다미앵 라부다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는 두 종이 피를 섞었다는 가설을 확증하는 것이며, 그같은 이종교배는 주로 중동지역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미국 유전학자 닉 패터슨도 “하플로타입의 존재는 현생인류의 조상과 네안데르탈인인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학계에선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인 호모사피엔스의 아종(亞種)인지, 전혀 다른 종인지를 놓고 이견이 맞서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그 둘이 유전자 교환을 통한 번식이 가능한 동종에 속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라부다 박사는 “다양성은 생물종의 장기적 생존에 매우 중요하며, 다른 유전자의 추가는 생물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20110719 21:02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488146.html
2010 -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 함신익 미 예일대 교수 내정
5년 동안 공석인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함신익(사진·미국 예일대 교수)씨가 18일 내정됐다.
김진홍 KBS시청자사업팀 선임은 “악단 심사위원회에서 함씨가 최고 점수를 얻어 후보자 7명 가운데 최종 후보로
낙점됐다”고 말했다. 미국 라이스대와 이스트먼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한 함씨는 2001년 이후 6년간 대전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을 지냈고, 그동안 KBS교향악단을 여러 차례 지휘했다.
정상영 기자 한겨레 2010-03-18 오후 07:26:10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0919.html
안선주(23)
2010 - 안선주 일본골프 우승…한국여자 ‘100승’
안선주(23·사진)가 한국 선수의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무대 통산 100승의 주인공이 됐다.
안선주는 18일 일본 시즈오카현 도메이골프장(파72)에서 열린 일본여자프로골프 투어 스탠리레이디스골프 토너먼트(총상금 9000만엔·12억여원) 3라운드에서 3언더파 69타를 쳐 이지희(31·진로재팬)와 나란히 최종합계 6언더파 210타로 동률을 이룬 뒤 연장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번 시즌 일본 무대에 진출한 안선주는 3월 다이킨오키드레이디스에서 첫 승을 신고한 데 이어 4개월 만에 시즌 2승째를 거뒀다. 또 우승상금 1620만엔(2억2367만원)을 보태 이번 시즌 상금 5573만엔(7억6944만원)으로 랭킹 1위에 올랐다. 안선주의 우승으로 한국 선수들은 1985년 구옥희(54·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부회장)가 일본여자프로골프 투어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25년 만에 통산 100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구옥희가 통산 23승으로 가장 많이 정상에 올랐고, 전미정(15승), 이지희(12승) 등 모두 21명이 일본 무대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올 시즌에는 이번 대회를 포함해 모두 7차례 정상을 정복했다. 안선주는 이날 연장 두번째 홀에서 6m 버디 퍼트를 홀에 떨궈
우승을 확정지었다. 반면 이지희는 그보다 짧은 4.5m 버디 퍼트를 놓쳐 일본 투어 통산 13번째 우승을 아쉽게 놓쳤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한겨레 2010-07-18 오후 09:12:41
http://www.hani.co.kr/arti/sports/golf/430905.html
2010 - 제1회 만델라의 날 ‘만델라 데이’
인권 평화 운동 헌신 67년 기념,,만델라의 92회 생일, 지구촌 ‘67분간의 봉사축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의 92살 생일인 18일, 지구촌 곳곳에선 나눔과 봉사로 그의 인권과 평화에 대한 평생의 헌신을 기렸다.
유엔은 지난해 만델라의 특별한 삶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일을 세계의 기념일로 정했고, 첫해인 올해부터 남아공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불우 이웃을 위한 67분간의 사회봉사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 철폐운동을 벌이다 수감생활을 한 27년을 포함해 인권·평화 운동에 헌신해온 67년의 기간을 상징하는 67분간의 사회봉사활동은 남아공의 제이컵 주마 대통령과 또다른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등의 지지를 받아 남아공과 세계 곳곳에서 참여자들이 줄을 이었다.
주마 대통령은 만델라가 태어난 이스턴 케이프주의 음베조 마을에서 기념식 뒤 인근 학교를 찾아 나무를 심고 페인트칠을 하는 봉사활동을 벌였다. 영화 <인빅터스>에서 만델라 역을 맡았던 미국 영화배우 모건 프리먼을 포함한 30여명은 자전거를 타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이동하면서 에이즈마을의 보안철책을 세우는 봉사활동 등을 펼쳤다. 2008년 인종폭동이 벌어졌던 프리토리아 인근 아테리지빌의 빈민촌에서는 만델라의 통합과 화해정신을 기리기 위해 인종간 친선을 다지는 축구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다르푸르 분쟁을 겪고 있는 수단에서는 ‘평화를 위한 축구대회’가 열려 우승팀에는 만델라컵이 주어졌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6.7㎞ 자선 걷기대회가 열렸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는 영화 <인빅터스> 상영과 함께 만델라의 업적을 기리는 라운드테이블이 개최됐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는 팔레스타인 이주민과 아프리카 난민 등 이스라엘 내부에서 핍박받는 약자들의 인권 개선을 모색하는 행사가 개최됐고, 미국 미시간주 새기노의 시민단체는 노동자와 이민자들을 위한 위로잔치를 여는 등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봉사 활동과 행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만델라 전 대통령은 이날 요하네스버그의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히 92회 생일을 보냈다. 이날 집 근처에는 만델라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지만,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만델라의 만수무강을 빌며 발길을 돌렸다. 이날 오전 소웨토의 고아원에서 채소밭을 가꾸는 봉사를 한 만델라의 부인 그라사 마셸은 “신체적으로 더이상 강하지 못하지만, 그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근황을 소개했다. 그는 “오늘은 전세계의 수백만명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장점을 발견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10-07-19 오전 08:27:5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30962.html
(참고) (2009.11.10) 유엔, 7월18일 ‘만델라 데이’ 지정
유엔(UN)이 넬슨 만델라(사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7월18일을 ‘만델라 데이’로 지정하기로 10일 선언했다. 알리 트레키 유엔총회 의장은 “인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한 위대한 사람에게 국제사회가 감사를 표시하는 의미”라고 밝혔다. 만델라 데이는 유엔 주재 남아공 대사가 제안한 것을 유엔 회원국들이 호응해주면서 제정됐다고 <비비시>(BBC)는 전했다. 7월18일은 만델라 전 대통령의 생일이다.
남아공 자체적으로는 이미 7월18일이 만델라 데이로 지정되어 있다. 넬슨 만델라 재단을 비롯한 자선단체들이 올해 만델라 전 대통령의 91번째 생일을 맞아 만델라 데이를 제정하자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난 7월18일 남아공 전역에서 열린 기념행사는 사회 주요인사들의 67분간 봉사활동이었다. 67은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인권운동에 헌신해온 기간인 67년을 상징하는 숫자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과거 남아공 정부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맞서 27년 동안 감옥 속에서 투쟁했던 인물이다. 출감 이후 남아공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혔으며, 1999년 퇴임 이후에도 인권과 평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한겨레 2009-11-11 오후 10:57:2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87266.html
2008 - '용서와 화합의 삶' 만델라 90살 생일
올 초부터 축제, 공연, 강연회, 책 출간 잇따라 누리집서 전세계 누리꾼들 축하메시지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철폐운동의 영웅 넬슨 만델라(사진) 전 대통령이 18일 아흔살 생일을 맞는다.
만델라는 쿠누의 자택에서 가족·지인 500여명과 함께 졸수 잔치를 연다. 근래 남아공에선 축제·공연·강연회 등이 곳곳에서 열렸고, 책 출간이 잇따랐다. 현지 일간 <타임스>는 17일치 기사에서 “마디바의 생일 축하행사는 올초부터 시작했으며, 내일 생일이 지난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마디바’는 만델라의 출신 부족에서 원로를 일컫는 존칭으로, 지금은 고유명사화돼 만델라를 일컫는 말이 됐다.
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만델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넬슨 만델라 재단 등 여러 인권기구와 빈곤퇴치 운동, 그리고 어린이 대상 사업의 지지·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왔다. 지난해 생일에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 리자오싱 전 중국 외교부장 등 12명의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더불어 ‘국제원로그룹’(The Elders)을 꾸려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만델라는 2003년부터는 공식석상에 나타나거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 85살이던 2004년에는 “더이상 나를 초청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내 쪽에서 연락을 먼저 하는 방식이었으면 좋겠다”며 ‘은퇴’를 발표했다. 엉뚱한 사망설도 나왔다. 2003년엔 <시엔엔>이 미리 준비했던 부고 기사가 유출돼 소동을 빚었다. 2007년엔 극우집단 쪽에서 ‘만델라가 죽었으므로 이제 백인학살이 시작될 것’이라는 악성소문을 퍼트렸다. 27년의 수감생활 끝에 1990년에 풀려난 뒤 그를 감금했던 정부까지도 용서한 만델라를 두고, <로이터> 통신은 “용서와 화합의 화신”이며 “그의 미소와 유머감각은 소중한 국제적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파이낸셜메일>은 그의 뒤를 이은 타보 음베키 현 대통령의 최근 실정에 빗대, “만델라는 나라를 합쳐놨는데, 음베키가 다시 쪼개놨다”며 그의 부재에 따른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영국에서 진행중인 에이즈 퇴치 운동 ‘46664’는 ‘세계 최대 온라인 생일카드’를 위해 누리집(happybirthdaymandela.com)을 만들어 전세계 누리꾼들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도 인사를 남겼다. 46664는 수감 당시 만델라의 죄수번호다. 그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무장투쟁을 이끌며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벌이던 중 붙잡혀 기나긴 옥고를 치렀다. 9·11 이후 미국 정부의 테러리스트 명단에도 올라있던 그의 이름은 이달 들어서야 ‘오명’을 털어냈다.
생일축하 누리집의 소개글은 “34살에 변호사가 돼 정치를 시작하고, 46살에 수감된 뒤 72살에 풀려나 75살에 노벨상을 탔으며, 77살에 첫 흑인대통령이 된 뒤 81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었으며, 84살에 에이즈퇴치 운동을 시작한 그가 90살이 됐다”고 그의 인생을 요약하고 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2008-07-18 오전 12:32:46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299473.html
2007 - 대한민국의 가수 그룹 소녀시대 탄생 /위키백과
소녀시대(少女時代, Girls' Generation)는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대한민국 9인조 여성 가수 그룹이다. 소녀시대라는 이름은 ‘소녀들이 평정할 시대가 왔다’는 의미다. 한국 팬들은 줄여서 소시라고도 한다. 외국에서는 SNSD나 Girl's Generati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2007년8월 2일, 첫 번째 싱글 앨범 《다시 만난 세계》로 데뷔하였고
그 해 11월 1일 첫 번째 정규 앨범 《소녀시대》를 발표하였다. 타이틀 곡인 "소녀시대" 이후 후속곡 "Kissing You"와 첫 번째 리패키지 앨범 "Baby Baby"로 활동을 하였으며, 2009년1월 7일에 발표한 첫 번째 미니 앨범 "Gee"는 2009년 최고의 히트곡으로,‘Gee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같은 해 6월 29일, 두 번째 미니 앨범 《소원을 말해봐》를 발표하며 지난 3년간 여자가수 음반 중 유일하게 음반판매 3연속 10만장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12월 19일부터 20일까지 아시아 투어 콘서트에 돌입하여 가장 먼저 서울에서 "Into the New World" 소녀시대 콘서트를 열었고2월 27일부터 28일까지 앙코르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10년1월 28일, 정규 2집 "Oh!"를 발매하며 활동하였고, 2010년 4월 17일에 중국 상해에서 콘서트를 열었으며, 7월 24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콘서트를 할 예정이었으나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연기되었다.
국내 활동 사항,,데뷔와 다시 만난 세계
2007년7월 6일부터 SM엔터테인먼트는 멤버 전원이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9인조 여성그룹 소녀시대의 멤버를 한 명씩 UCC를 통해 공개하였다. 7월 16일UCC로 단체영상이 공개된 후, 홈페이지에 소녀시대의 공식 프로필이 게재되었다. 그룹 활동 전 윤아는 MBC 《9회말 2아웃》에서 신주영 역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하였고, 수영은 멜론방송《성민, 수영의 천방지축 라디오》에서 DJ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7월 18일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비공식 사전무대에 올랐다. 여기서 소녀시대는 데뷔곡《다시 만난 세계》를 처음 선보였다. 그 후 7월 27일부터 M.net 《소녀 학교에 가다》에 출연하여 데뷔 과정을 공개하며 처음으로 그룹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8월 1일에는 뮤직 비디오가 공개되었고 8월 2일에 소녀시대 첫 번째 싱글 《다시 만난 세계》가 발매되었다. 타이틀곡 《다시 만난 세계》는 작곡가 켄지가 작곡한 팝 댄스곡이다. 8월 5일SBS 《인기가요》에서 처음으로 공중파에 데뷔했다.《다시 만난 세계》는 8월 27일 ~ 9월 2일, 1주일간 집계된 방송 횟수에서 총 247회로 1위를 하였고 네이버 가수 검색순위 1위를 하는 등 많은 관심을 받았고 안녕춤, 꽃봉오리춤, 발차기춤 등의 춤이 화제가 되었다. 이어 10월 11일 방송된 M.net《엠카운트다운》에서 처음으로 1위를 하였다. 또 2007년 신인가수 싱글 앨범판매 1위를 차지하였다.
2006 - 고 남궁련 선생 소장 문화재 256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故 남궁 련(南宮鍊) 선생 소장 문화재 256건 기증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은 올해 2월 작고한 전 대한조선공사 회장남궁 련(1916. 2. 15~2006. 2. 22) 선생의
유족(유족대표 남궁 호)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145호 귀면청동로(鬼面靑銅爐)를 포함, 도자기와 서화류 등 256건을 수증하였다. 기증한 문화재는 고려청자·분청사기·조선백자 등 우리나라 도자기가 210건이며,
중국과 일본 도자기 30건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보 145호 귀면청동로이다. 이 유물은 유례가 없는 독특한 작품으로, 솥 모양의 몸체에
도깨비 얼굴을 형상화하고 3개의 다리가 달려 있다. 모양은 향로와 비슷하나 몸체에 바람이 들어 갈 수 있도록
통풍구를 뚫은 것이 풍로로 사용된 듯 하다. 이 밖에도 서화류 12건, 목제함 및 흉배 2건을 함께 기증하였다.
도자기는 고려청자가 110건으로 가장 많은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청자완을 비롯, 고려 전시기에 걸쳐 제작된 우수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청자상감모란국당초문표형주자, 청자상감당초문발, 청자죽절형완 등 다양한 문양과 기형의 상감 청자가 눈에 띄며, 특히 청자연리문완은 그 문양과 제작 방법이 특이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예가 매우 드문
귀한 작품이다. 또한, 조선 전기에 제작된 분청사기편병과 분청사기조화문대접, 분원에서 제작된 대형 백자제기와 병, 합,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에 만들어진 백자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있어 우리나라 도자기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남궁 련 선생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일본 니혼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우리나라 해운·조선업계의 선구자이다.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회장과 한국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심의위원회·금융통화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문화재 수집이 취미였던 남궁 련 선생은 이미 1997년과 1999년 2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하였고, 한국 문화재를 세계에 알리고자 영국 브리티시박물관과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에 백자·청자 등을 기증한
바 있다. 특히 1999년에 기증한 금동여래좌상은 삼국시대 불상으로 귀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전시하고 있다. 남궁 련 선생의 기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더 많은 우수 문화재를 소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보다 많은 국민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기증자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로서 기증문화 활성화에도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
故 남궁 련 선생 약력
남궁 련(南宮鍊) (1916. 2. 15 ~ 2006. 2. 22)
- 1916. 2. 15 경기도 양주군 (현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출생
- 1940 日本大學校 경제학과 졸업
- 1946 (주)극동기업 설립
- 1949 극동해운 설립
- 1954~1959 대한해운공사(국영) 사장 역임
- 1958 (주) 한국석유 설립
- 1962 한국일보 사장 역임
- 1964 경제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1966 금융통화위원 역임
- 1968~1987 대한조선공사(민영) 사장·회장 역임
- 1997. 3. 18 문화재 기증/국립중앙박물관(청자음각연판문대접)
- 1999. 5. 4 문화재 기증/국립중앙박물관(금동여래좌상/삼국시대)
- 2006. 2. 22 별세
- 2006. 7. 18 문화재 기증/국립중앙박물관(국보 145호 귀면청동로 등 256건)
※ 한국 도자기 210건, 중국·일본 도자기 30건, 서화류 12건, 귀면청동로 1건, 목제함 1건, 흉배 2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museum.go.kr
(서울=뉴스와이어) 2006년 07월 25일
https://www.newswire.co.kr/?job=news&no=171437
2005 - 이미나, BMO 캐나디언오픈 우승
2004 -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
2004년은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이었습니다.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자 들이닥친 열강의 각축으로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하던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베델(裵說)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 우국지사들이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가 그 뿌리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앞장서 전개하고 헤이그 밀사사건, 의병활동을 적극 보도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선 여명기의 민족정론지였습니다.일본은 결국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대한매일신보를 한일합병되던 1910년 8월 29일 종간시켰습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22일 그 지령을 계승하면서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을 자임한 서울신문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에 봉착했던 1998년 대한매일신보의 애국·애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흐름을 반영하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친근한 제호로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해 2004년 1월 1일자로 제호를 다시 서울신문으로 바꿔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은 100년 전통과 함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울신문사는 1968년 ‘선데이 서울’을, 1985년 ‘스포츠서울’을 창간해 장안에 화제를 뿌렸고, 1985년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컴퓨터제작시스템(CTS)을 도입함으로써 이 땅에서 납 활자가 사라지게 했습니다.
서울신문사-100년 전통 = http://www.seoul.co.kr/company/company.php?sub=tradition
서울신문-창간100주년 기념사설
다음은 한국 언론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신문의 창간 100주년 기념 사설이다.
(2004년 7월 16일자 서울신문 사설)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겠습니다.
서울신문이 2004년 7월18일로 창간 100주년을 맞습니다.창간 100주년을 맞는 신문은 한국언론 사상 서울신문이 처음입니다.우리는 이 기쁨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 지난 100년을 거울삼아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열어 가고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정론의 선봉에 선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과 지령을 승계하고 있습니다.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김구 등 선각자들이 신문 창간과 제작,보급에 참여한 대한매일신보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대한제국 말기 우리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한 구국언론이었습니다.최초의 시민운동이라 할 국채보상운동과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실질적인 본부 역할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확산시키고 민족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로 대한매일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했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신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매일신보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출범한 서울신문은 창간호가 아닌 혁신속간호를 냅니다.지령도 1호가 아닌 제13738호였습니다.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의 지령을 이은 것이지만 일제의 유산인 매일신보를 청산하고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서울신문에는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두분(오세창 사장,권동진 고문)과 한국역사 소설의 기념비적 걸작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고문),어문학계의 권위자였던 그 아들 홍기문(편집국장) 등이 참여했습니다.좌우 이념대결이 첨예했던 해방공간에서 서울신문은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잡으며 공정한 보도로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 수립에 기여했습니다.서울신문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국내 최초로 조석간제를 실시했는가 하면 1960년대 순 한글신문을 만드는 등 한글전용과 신문말 다듬기에 앞장섰고 1980년대 최초로 컴퓨터 조판 시스템을 도입해 뉴미디어 시대의 첨단에 섰습니다.그러나 서울신문의 지난 100년은 영광과 함께 오욕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대한매일신보가 일제 치하 매일신보로 전락했듯이 서울신문의 혁신속간 정신은 독재정권 아래서 퇴색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의 나팔수’라는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했고 4·19혁명 때 성난 시위대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참담한 비극도 겪었습니다.이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바탕으로 1998년 서울신문은 대한매일로 이름을 바꾸고 2002년 사원들이 제1대 주주인 민영화를 이루어 냈습니다.그리고 지난 5년 동안 공정보도를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올해 초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하고 창간 100주년을 맞이합니다.우리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영욕의 역사를 겸허히 되돌아 보면서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100년은 한 세기를 접고 새로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관행적 사고로는 따라잡기 힘든 질적 대전환의 시기에 놓여있습니다.서울신문은 시대정신을
이끄는 신문으로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 하겠습니다.국민과 국익을 비추는 세상의
등불이 되겠습니다.서울신문의 사시는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힌다. 공공 이익과 민족 화합에 앞장선다”입니다.따라서 서울신문은 무엇보다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민족 화합과 민족 공동체 회복에 더욱 앞장서면서 통일지향의 중도적 진보 노선을 유지해 가겠습니다.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한 보도로 정치개혁을 이끌고 지역·계층·세대간 갈등 해소는 물론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신장에도 힘을 쏟겠습니다.자유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분배와 성장이 선순환하는 경제구조가 정착되도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민생을 먼저 생각하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
서울신문은 항상 독자의 편에서,진실의 편에서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열어가겠습니다.출처: 서울신문
http://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C%8B%A0%EB%AC%B8
2004 - 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2004 - 연쇄살인범 유영철 검거
2004 - 10개월에 걸쳐 20여명 살해한 ‘묻지마 살인’ 장본인 유영철씨 검거
2004 -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켰던 유영철이 경찰에 체포되다
유영철(柳永哲, 1970년 4월 18일 ~)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명을 연쇄 살인한 대한민국의 범죄자이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 3남 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난 유영철은 중학교 1학년인 14살때 아버지가 지병인
정신분열성 간질환으로 사망하자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업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성년 이후
유씨는 21살 때인 1991년 마사지 안마사인 황모씨와 결혼, 11살된 아들까지 두었으나 이후 14차례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으로 형사입건 되는 등 11년을 전국 각지 교도소에서 보내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2000년 3월 특수절도 등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 2002년 5월께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일방적으로 이혼당했으며 이후 말을 하지 않고
대인기피 현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살인과 검거
2003년 9월 11일 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이은옥(72세)과 부인 이덕(67세)을 살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9일에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은순(82세) 등 일가족 3명을, 16일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준희(60세)를 살해했다.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김종석(87세) 등 2명을 살해했고, 2004년 4월에 노점상 안재선(44세)을 살해하고 시신을 월미도에 버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는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숙자, 고선희, 우주연, 김미영, 임미연(27세) 등 2004년 한 해 동안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한편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되었는데 현장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 되어 이문동 살인사건을 제외한 20명 살인범죄의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유영철은 대법원 상고 공판에서 형사처벌법 위반에 따라 성폭력범죄, 강간살인, 1급살인, 과실치사혐의에 의거에 따라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2005년 6월 9일 대법원은 유영철에 대한 사형의 원심을 확정하였다. 이후에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범이 다른 연쇄살인범인 정남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가장 최근인 1997년 12월 30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중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로도 1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2007년 12월 30일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유영철은 미국의 잡지 '라이프'가 2008년 8월 6일에 보도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연쇄 살인자 30인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2002 - 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1996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1995 - 김대중씨, 정계복귀·창당 선언(1995)
1995년 오늘,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신당 창당과 정계복귀를 공식선언한다.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대선에서 패배해 정계은퇴를 선언한 지 3년 만이다.
김 이사장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뇌에 찬 마음과 죄송한 심정으로
정계복귀에 대한 의사를 국민들께 밝힌다'고 말한다. 또 '현재의 민주당으로는 당내 개혁이 불가능하다'며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김씨는 두 달 뒤 이른바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그는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다.
5대 대선에서 박정희에 패배한 윤보선이 6대 국회의원
총선을 준비하며 안국동 자택 서재에 앉아 있다.
1990 - 윤보선 전 대통령 별세
제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이 1990년 7월 18일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93세였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30일 노환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후 8시쯤 퇴원, 자택에 옮겨진 후 별세했다.
윤 전 대통령은 189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경응의숙 보통부와 속성학교인 정칙학교를 다니다 귀국, 20세가 되던 해에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영국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했으며 1954년 5월 3대 총선때 민국당 소속으로 종로갑구에 출마해 원내에 진출했고, 1960년 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5ㆍ16 으로 재임 1년8개월 만에 대통령직을 하야한 뒤 박정희정부와 오랜 세월 투쟁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서 고난을 겪었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정은 순탄한 편이었다.그의 정치적 컬러는 1962년의 대통령하야를 분기점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1962년까지의
전반기는 영국신사같은 풍모처럼 온건, 합리주의적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는 강성민주투사로 다양한 투쟁을 전개했었다. 특히 1963년 하반기의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후보에게 15만표차로 패배한 이후
`정신적 대통령` 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며 계속한 대(對) 박대통령 투쟁과정은 실로 험난한 것이었다.
강수연(왼쪽) 주연의 `아제아제바라아제`의 한 장면.
1989 - 영화배우 강수연,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배우 강수연이 1989년 7월 18일 폐막된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작품상, 심사위원특별상, 주연여우상, 주연남우상 등 본상 4개 부문 중 하나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낸 강수연은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이어 두번째로 권위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강수연은 시상식에서 분홍빛이 도는 한복을 입고 나와 "영화속에서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현지 기자들의
표현대로 독특한 동양미를 과시했다.모스크바 영화제는 영화예술의 발전과 국제적인 우호증진을 위해 1959년 창설된 공산권 최대의 영화제이다. 행사기간은 매년 7월경이며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와 격년제로 번갈아 연다.
시상부문은 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남여주연상 등 4개부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수연에 이어 이덕화가 1993년 영화 `살어리랏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9 - [오늘의 역사]강수연,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1989년 오늘, '아제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에 출연한 영화배우 강수연 씨가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최우수작품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 등 4개 부문 특별상을 휩쓸어 화제를 낳았다.
강수연 씨는 앞서 1987년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의 하나인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씨받이(임권택 감독)'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이날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의 성과는 영화배우 강수연이 월드스타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1993년 제18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선 '살어리랏다(윤삼육 감독)'에 출연한 이덕화 씨가
최우수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충청투데이 2008.07.17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2204
1986 - 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1983 - 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1983 - 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1983 - 일본 중의원 해산
1982 - 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1982 -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1981 - 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1980 - 인도 세계 7번째로 인공위성(로히니) 발사
1980 - 인도, 자력으로 인공위성 로히니를 쏘아올려 세계 7번째 우주국가가 됨
인도의 로켓 개발 역사 인도의 우주프로그램의 주목적은 자국에 우주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위성 통신과
날씨 등의 리모트 센싱(remote sensing)에 포커스를 두었다. 인도는 이 서비스들이 자체기술로 개발된
우주선과 독립적인 발사용 로켓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발사 능력의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인도우주연구기구(ISRO;the Indian Space Research Organization)는 1970년대
초 우주프로그램을 착수했다. 1980년대 후반, ISRO는 3억 달러의 우주 예산 중 40%를 발사용 로켓 개발에 썼다.
발사용 로켓 개발 프로그램은 이전의 형태를 활용하여 네 종류의 발사기를 개발하는 것에 기반을 두었다.
제1세대인 SLV-3(Satellite Launch Vehicle)은 서브오비탈 사운딩 로켓(sub- orbital sounding rocket) 프로그램이 성공한 후인 1973년에 시작되었다. SLV-3는 40 kg(90 lb)의 무게가 나가는 로히니 급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SLV-3는 1979년 처음 발사되었고 1983년에 마지막으로 발사되었다. 1979년 10월 10일에 있었던 첫 시험 발사는 실패했는데, 사고 원인은 2단 시스템의 밸브 고장으로 판명났다.
두 번째 시험발사는 1980년 7월 18일에 있었다. 로켓은 35 kg(77 lb)의 로히니1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로히니1호의 주임무는 발사하는 동안 SLV-3의 성능을 모니터하는 것이었다.
1981년 5월 31일에 SLV-3의 세 번째 발사 시험은 38 kg(84 lb)의 로히니 2호 위성을 발사시켰다. 로히니2호는 원래 90일 정도 궤도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잘못된 궤도로 인해 9일만은 1981년 6월 8일에 재돌입했다. 우주선에는 0.9 km(0.6 mi)의 평면해상도를 가지는 3차원 영상시스템인 스핀스캔이 탑재되어있었다. ...서울대학교 로켓추진연구실
http://rpl.snu.ac.kr/rocket/index.php?mode=india
1980 - 일본의 영화배우 히로스에 료코 출생
히로스에 료코(일본어: 広 末 涼 子,
1976 - 나디아 코마네치가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 이단평행봉에서
올림픽 체조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얻다
1976 - 코마네치, 올림픽 체조 첫 만점(1976)
1976년 오늘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가 올림픽 체조 사상 첫 만점을 기록한다.
14살 소녀 코마네치는 이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올림픽 체조경기 이단평행봉 부문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쳐 만점인 10점으로 금메달을 땄다.
코마네치는 이단평행봉 부문 등 모두 7개 부문에서 10점 만점을 얻는다.
그녀는 결국 이 올림픽에서 3관왕의 자리에 올라 일약 세계적 체조 스타로 떠오른다.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1976 - 코마네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1976년 7월 18일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1m53에 39kg, 가냘픈 14세 소녀가 2단 평행봉에서 현란한 연기를 펼치고 사뿐히 착지했다. 전광판 숫자는 `1.0`. 관중석은 술렁였다. 항상 9.0 이상의 점수를 받던 소녀도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1.0이 아니었다. 만점인 10.0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체조 만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전광판은 최대 9.99점 까지 나오게 되어 있었다.그 소녀는 루마니아에서 온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코마네치는 그후에도 여섯번이나 만점을 더 받아 2단 평행봉과 평균대, 개인종합에서 금메달 3개를 거머쥐었다. 미국의 타임지는
코마네치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코마네치는 4년 뒤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더 땄다. 여성미를 강조하던 여자 체조는 코마네치 이후
기술 위주로 바뀌었다. 1989년 미국으로 망명한 코마네치는 체조선수 출신의 미국인과 결혼했다.
1976 - [오늘의 역사]코마네치, 체조 사상 최초 만점
체조계의 살아있는 전설, 나디아 코마네치가 1976년 오늘 14세의 나이로 체조사상 최초의 10점 만점 기록을 세웠다.
러시아 국적으로 몬트리올올림픽에 출전한 코마네치는 체조 이단평행봉 종목에서 '만점 신화'를 창조한 이후 이 대회에서만 7차례의 만점 행진을 이어갔다. 당시 점수전광판에 표시된 점수는 1.0이었다. 체조에선 10점 만점이 나올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최고 점수는 9.99점까지 표시되도록 돼 있었다. 10점을 표시할 수 없어 1.0으로 표시했다는 얘기다.
이날 코마네치의 10점 연기를 두고 '체조장을 찾은 관객 모두 완벽을 경험했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이 대회 3관왕을 차지한 코마네치는 이후 세계선수권을 휩쓸었다.충청투데이 2008.07.17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2205
[어제의 오늘]1976년 루마니아 체조선수 코마네치 세계 첫 만점“인간의 몸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
1976년 7월18일, 캐나다 몬트리올 체조경기장에서 관중들은 두 번이나 자기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 루마니아 대표로 참가한 14세 소녀 나디아 코마네치가 키 153㎝에 몸무게 39㎏의 가냘픈 몸매로 2단 평행봉 위에서 나비처럼 자유자재로 연기를 펼쳐보이자 관중들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연기에 넋을 잃었다.
그녀의 경기 점수가 전광판에 표시되는 순간, 관중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토록 완벽한 연기를 펼쳐 보인 코마네치의 점수가 고작 1.00에 불과했던 것이다. 코치 벨라 카롤리가 항의하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소리쳤다. “1점이 아니라 10점! 10점 만점에 10점이오!”체조에서 인간이 10점 만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체조경기장 점수 전광판이 9.99까지만 표기할 수 있도록 설정돼 있어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이로써 나디아 코마네치는 세계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코마네치의 ‘만점 행진’은 계속됐다. 그 후에도 6번이나 더 10점 만점을 받아내 통산 7번의 10점 만점을 받았다. 미국의 ‘타임’지는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기계공 아버지와 노동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은 소녀는 14살의 나이에 이렇게 전 세계를 사로잡은 요정이 됐다.
그러나 요정의 뒷이야기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 그녀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고향을 떠나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로 간 그녀는 혹독한 훈련과 절제에 염증을 느낀 듯 과식을 거듭해 몸무게가 10㎏이나 불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도 사이가 벌어져 끝내 이혼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2년 뒤 벨라 카롤리 코치와 재결합한 그녀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감시와 통제에 시달리던 코마네치는 1989년 목숨을 건 망명을 시도한다. 여권도 없이 국경을 넘은 코마네치를 서방 국가들은 크게 환영했다. 그녀가 미국의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왕년의 체조여왕을 보려는 인파로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사람들은 촌스러운 복장에 영어마저 서툰 코마네치를 보고는 차갑게 돌아섰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요정’이었지 남루한 동구권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를 체조산업에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코마네치의 미국 생활 또한 순탄치 못했다. 그러던 중 미국 체조선수 버트 코너와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의 상처를 극복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코마네치는 현재 남편과 함께 체조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자선사업 등에도 열심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17 21:35: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172135235&code=100100&s_code=ap005
1976 - 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1976년 7월 18일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1m53에 39kg, 가냘픈 14세 소녀가 2단 평행봉에서 현란한 연기를 펼치고 사뿐히 착지했다. 전광판 숫자는 `1.0`. 관중석은 술렁였다. 항상 9.0 이상의 점수를 받던 소녀도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1.0이 아니었다. 만점인 10.0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체조 만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전광판은 최대 9.99점 까지 나오게 되어 있었다.그 소녀는 루마니아에서 온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코마네치는 그후에도 여섯번이나 만점을 더 받아 2단 평행봉과 평균대, 개인종합에서 금메달 3개를 거머쥐었다. 미국의 타임지는 코마네치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코마네치는 4년 뒤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더 땄다. 여성미를 강조하던 여자 체조는 코마네치 이후 기술 위주로 바뀌었다. 1989년 미국으로 망명한 코마네치는 체조선수 출신의 미국인과 결혼했다. /조선
1976 - 최초의 10점 만점 묘기,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1.53m, 40㎏. 세계 최초의 여왕으로 부르기엔
너무나도 가냘픈 체격의 14세 소녀. 그러나 매트위를 "벼룩" 처럼 콩콩 뛰
다니면서 신들린 듯 묘기를 펼쳐보이는 그 모습은 깜찍하고 앙증맞다 못해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드는
요정의 황홀한 몸몰림이었다.그녀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남겼다. 1976년 7월 18일 여자체조 종목 중에서 첫 종목인 2단평행봉에서 그녀의 묘기가 끝나는 순간 1만 6천여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삐 일손을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마네치의 기록이 믿기 어려운 10점 만점이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심판석의 컴퓨터엔 10점 만점을 계산하도록 프로그램이 미처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80년사상 10점 만점을 받은 사례가 없었기에 컴퓨터 기술자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시키는 때아닌 곤욕을 치른 것이다.
코마네치는 개인종합부문에서 7개의 10점 만점을 기록하면서 우승한데 이어 평균대와 평행봉에서 2개의 금메달을 추가, 총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따냈다. 웃음을 짓는 일이 거의 없어 "바위덩이" 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녀는 첫 금메달을 따낸 뒤 몰려든 기자들에게 뱉은 첫 마디때문에 또한번 화제의 도마 위에 올랐었다.
“집에 가서 실컷 놀면서 햄버거와 사탕을 먹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어린티를 벗지못한 소녀다운 첫소감이었지만 그녀의 영광이 있기까지의 혹독한 훈련과 처절한 인내가 천진만만한 대화속에서 드러난 대목이었다.
코마네치는 1961년 11월 12일 루마니아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 데지에서 기계공인 아버지와 노동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6세 때에 루마니아의 유명한 체조 코치 벨라 카로리로 밑에서 하루 4 ∼ 5시간의 연습과 음식 조절을 통한 뼈를 깎는 훈련을 했다.그러나 세계의 하얀 요정으로 추앙받던 그녀도 키가 커지고 몸무게가 늘어나면서 기계처럼 체조에만 전념하던 시절에서 한 여인으로서의 다양한 욕구를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루마니아의 통제와 압제에 염증을 느끼고 1989년 11월 29일 아름다운 집과 부를 버리고 자유를 찾아 헝가리로 망명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이후 그녀는 스캔들을 뿌리며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고 하였으며, 패션모델로 화려한 외출을 하기도 했다. 1990년 7월 16일에는 한국을 방문해 체조솜씨를 선보이기도 했으며, 팬들을 위해 사인회도 가졌다. 1996년 4월 28일에는 조국 루마니아에서 미국 체조선수 바트 코너와 결혼식을 올리고 그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새로 둥지를 틀었다.경향닷컴-올림픽 역사
http://www.khan.co.kr/olympic/2008/khan_art_view.html?mode=history&artid=139&code=4
1973 - 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1970 - 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9 - 美채퍼퀴딕 스캔들
[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美채퍼퀴딕 스캔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에드거타운 지방법원.
“증인석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네.”
“이름이 무엇입니까.”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입니다.”
“1969년 7월 18일로 기억을 되돌려 보세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 동생, 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무대는 마서스비니어드 섬 인근 채퍼퀴딕 섬. 그는 그날 이곳에서 열린 한 파티에 참석했다. 오후 11시 15분. 케네디 의원이 선거 운동원 메리 코페친(당시 29세)을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면서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날 밤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채퍼퀴딕 스캔들’이 일어났다. 케네디 의원이 몰던 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물속으로 추락했는데, 운전자는 문을 열고 헤엄쳐 나왔지만 코페친은 차 속에서 숨지고 만 사건이다.
문제는 케네디 의원의 처신. 그는 하루가 지나도록 경찰에 사고를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고 다음 날 아침, 깔끔하게 차려입은 케네디 의원이 호텔 로비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이 사건이 영원히 수면 아래에 있길 바랐을까. 하지만 어부 2명이 전복된 차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고 곧 코페친의 시신이 발견됐다.
케네디 의원은 정신없이 뭍으로 올라온 뒤 코페친을 구하려고 수차례 물에 뛰어들었지만 기진맥진해버려 구조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는 사고현장 근처 민가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으며,
다시 파티 장소로 돌아간 사실이 밝혀졌다. 검시에서 코페친의 입과 코, 치마에 혈흔이 있었다고 검찰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재조사 없이 슬쩍 넘어갔다. 코페친의 부모는 부검을 원치 않았고 케네디 의원에게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딸 팔아 돈벌려고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싫다”고 했다. 그들은 케네디 의원에게
약 9만 달러를, 그의 보험회사로부터 5만 달러를 받았다.
케네디 의원은 TV 회견에서 음주운전도, 피해자와 ‘부적절한 관계’도 아니었다고 세간의 의혹을 부인했고 이 사고로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며 연민을 구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떠난 죄로 징역 2개월에 집행유예 1년, 1년간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을 뿐이다. 1980년 케네디 의원은 총탄에 목숨을 잃은 두 형의 뒤를 이어 케네디가에서 세 번째로 민주당 대통령 지명대회에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다. 의혹투성이 채퍼퀴딕 사건이 결국 백악관으로 향하는 그의 발목을 잡아챈 것이다.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동아닷컴 2008-07-18 02:52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718/8604254/1
1969 - 토르 헤이에르달의 파피루스 배 '라(Ra) 1호' 침몰
라[ Ra ] - 토르 헤이에르달이 남대서양 횡단에 차례로 이용했던 2척의 파피루스 배.
노르웨이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헤이에르달은 1969~70년 아프리카와 중남미 고대인들 사이의 문화적 접촉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라'를 타고 남대서양 횡단을 시도했다. 그는 당시 갈대 보트가 매우 흔하던 차드 호에 가서 배 만드는 사람들을 고용해 와 이집트에서 '라'를 건조했다. 이 배는 1969년 5월 25일 7개국에서 뽑힌 7명을 태우고 모로코 사피를 출항했다. 그러나 설계상의 결점, 배에 실은 짐, 경험부족 등으로 인해 4,800㎞를 항해한 뒤인 7월에 '라'는 서서히 침몰하고 말았다. 1970년 헤이어달은 티티카카 호(湖)의 아이마리족 인디언이 만든 '라 2호'에 전과 거의 같은 수의 선원을 태우고 재도전을 시도했다. 마침내 그는 3월 17일에서 7월 12일까지 단 57일 만에 사피에서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까지의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1968 - 인텔 창업
1968 - 인텔(미국 반도체 회사) 창업
1967 - 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1966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성종 출생
강성종(康聖鐘, 1966년 7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교육자, 국회의원이다.
1965 - 송추에 무장간첩침투
1964 - 프랑스 마른전투 50주년 기념식(1964)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격전이 벌어졌던 프랑스 마른(Marne)!
1964년 오늘 마른전투 승리 5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기념식에는 1차 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대부분 고희를 넘긴 프랑스와
영국의 참전 용사들이 참석했다.
마른전투는 1914년 9월 6일부터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의 북동쪽 마른강(江)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벌인 전투다.
독일군은 여기서 패배해 후퇴하고 유럽 서부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된다.
1963 - 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3 - 한·미 경제위(ECC)설치 협조 조인
1963 - 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1962 - 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1956 - 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1955 -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국 정상회담이 1955년 7월 1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이번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 열린 동서수뇌회담으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영국 수상 이든,
프랑스 수상 피에르, 소련 수상 불가닌이 참석했다.
참가국들은 독일의 통일문제, 유럽의 안전보장, 군비축소, 동서간의 교류촉진 등에 대해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23일 막을 내렸다.독일문제와 관련해서 프랑스 수상 피에르는 독일의 재통일이 나토잔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소련 수상 불가닌은 독일 재통일에 있어서 최대의 장애는 서독의 재무장과 미군의 서독주둔이라고 응수했다. 군비축소문제에 있어 최종 공동성명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안한 자유영공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과 소련이 방위계획을 교환하고 방어시설에 대한 공중감시를 서로 허용하자고 제의했다.
1952 - 중석불사건(重石弗事件)이 국회에 비화되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다.
중석불 사건(重石弗 事件)은 1952년 6월 이승만 정부가 텅스텐(중석)을 외국에 수출하여 획득한 달러(중석불)를
민간 기업에 싼 값에 매각하여 비료와 밀가루를 들여오게 한 뒤, 이를 농민에게 최대 10배에 달하는 이윤을 남기며
비싼 값으로 팔아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사건
당시 정부는 중석불로 급하게 비료·양곡 등을 들여오려고 하였는데, 당시 환율의 300배가 넘는 혜택으로 민간업자에게 환율 이득을 주었으며, 수입된 밀가루와 비료를 처분하면서 정부가 판매가격과 판매처 지정에 개입하고 여러 판매 단계를 거치며 민간업자들이 값을 올리며 부당이득을 취하였다. 여기서 취득된 부당이득은 당시 약 550억원에 달하였으며, 이 금액은 대부분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국회는 특별 조사단을 구성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며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 하였고, 정부불심안까지 제출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담당했던 농림부 장관을 경질하며 폭리행위를 취한 민간상사에 대해 기소하였다. 그러나 폭리취득죄로 기소된 상인 전원은 무죄 판결을 받아 풀려났으며, 아무런 시정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최후의 일각까지 진두지휘의 모범을 보여준 딘 소장(가운데)
1950 - 한국전쟁: 미 제24사단의 대전 전투
대전 전투(1950. 7. 18~20)
이 전투는 오산 전투 이후 경부축선을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오던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북한군 2개 사단(제3ㆍ4사단)과 치른 방어 전투이다. 미 제24사단은 일본으로부터 급거 파견되어 한반도에 대한 지리적 조건과 지형에 대한 이해 부족, 북한군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치열한 접전이 지속되면서 미 제24사단은 대전 후방의 도로를 차단당한 가운데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사단장인 딘 소장이 3.5인치 로켓포를 직접 메고 적 전차를 향해 사격을 하는 등 사력을 다했으며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부하들과 대전을 끝까지 사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대전이 함락되고 미 제24사단이 붕괴됨에 따라 사단장 딘 소장은 철수하지 못하고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3.5인치 로켓포를 최초로 사용하여 그때까지 파괴하지 못하였던 북한군의 전차(T-34)를 파괴하는데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보병의 손실은 경미하였던 반면 포병과 기갑 부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다.주요 전투 대한민국 국방부
http://new.mnd.go.kr/mndPolicy/6war/participationCountry/usa/usa_3/index.jsp
1950 - 영국의 기업가, 버진그룹 회장 리처드 브랜슨 출생
리처드 브랜슨 경(Sir Richard Charles Nicholas Branson, 1950년 7월 18일~)은
버진 그룹(Virgin Group)의 회장이자 영국의 기업인이다.
경력
* 버진그룹 회장
* 민간 우주선 버진 갤럭틱 프로그램 착수 (2004)
* 버진 애틀랜틱 항공 설립 (1984)
* 메일오더 레코드회사 설립 (1970)
* 잡지 스튜던트 발행
1949 - 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6 - 문교부, 국립 서울대학교 신설을 발표
1944 - 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1940 - 루스벨트 미 대통령, 3선 도전(1940)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40년 오늘 미국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그는 현직 부통령인 존 낸스 가너(John Nance Garner)를 비롯한 여러 인사와 경합을 벌인 결과
민주당 후보로 결정됐다. 루스벨트는 이로써 두 번째 임기를 마쳐가는 시점에서 3선을 향한 본격시동을 걸게 됐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 절대 미국 청년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공약하고 같은 해 11월 5일
3선에 성공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듬해 11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을 계기로 미국의 참전을 공식선언한다.
그는 전시 상황의 국가 운영에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1945년 대통령 4선 고지에까지
오르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공화국 정부군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모습. 많은 여성들이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6 -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다. 1936 - 스페인 내전 발발
`2차대전의 리허설` `신병기의 실험장` 그리고 `지식인들의 전쟁`등으로 표현되는 스페인 내전이
1936년 7월 18일 발발했다. 이날 오전 5시.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와 국민을 향해 쿠데타를 선언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5개월 전인 1936년 2월 19일 정교 분리, 농지 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펼쳐 중산층과 노동자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스페인에 수립된 정부였다. 반면 가톨릭교회와 대지주, 대자본가들은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의 불만에 군부, 왕당파, 우익 정당들이 호응한 것이 스페인 내전이었다.
반란군은 모로코 주둔부대들을 필두로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나 안다루시아 등 전국적으로 궐기했다. 이들은 압도적인 우세로 쉽게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대도시에선 반란군이 민병들에 대패했다. 스페인 민중들의 힘은 전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공황과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던 그들이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네루다, 시몬느 베이유, 조지 오웰, W H 오든 등 세계적인
지성들을 포함, 4만여명의 외국인 용병이 삽시간에 모여 `국제여단`을 조직했다.
내전은 국제전의 성격도 띠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도왔고,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를 도왔으나 1939년 3월 28일 프랑코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전세계를 휘감고 있던 보수와 갈등,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파시즘과 자유, 공산주의와 문명의 긴장ㆍ대립이 스페인 내전 한판에 응축된 양상이었다.
스페인 내란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프랑코(1970)
1936 - 스페인 내전 발발
1936년 7월 18일 새벽, 군사 반란을 지지하는 프랑코의 성명이 카나리아 제도에서 방송되면서 스페인 본토에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국민군을 이끌고 마드리드로 진격하던 1936년 10월 1일 프랑코는
국민당 정부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이어 정상적인 문관체계의 수립이 절실해지자 1937년 4월 19일 스페인의 국수주의 정당인 팔랑헤당을 재편해 반군 정부의 정치운동단체로 삼았다.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은 프랑코는 1939년 4월 1일 완전무결한 승리를 거두었고, 잔학행위가 극심했던 스페인 내전은 막을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코는 '마지막으로 남은 파시스트 독재자'로 낙인찍혀 국제사회에서 외면을 받았으나
죽기 직전인 1973년까지 스페인의 총통을 지냈다.
1926 - 캐나다의 소설가 마거릿 로런스(Laurence, Margaret) 출생
로런스 [Laurence, (Jean) Margaret, 1926.7.18~1987.1.5]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 초판본.
1925 - 히틀러 `나의 투쟁` 출간
1923년 11월 8일 오후 8시,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원 300명을 이끌고 뮌헨 교외의 한 맥주홀에 난입, 천장을 향해 총을 쏘고는 큰소리로 "혁명은 시작됐다"며 맥주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맥주홀에서는 바이에른주(州) 통감 카를이 3000여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 중이었다.히틀러에게 바이에른 분리주의자 카를은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암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카를은 제거돼야 했고 주 정부는 전복돼야 했다. 그러나 감시 소홀을 틈타 도주한 카를은 이틀 뒤 히틀러를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히틀러에게 이 기간은 오히려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입지를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반역죄로 5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도 자신의 궤변을 정리하는 호기로 삼았다. 그는 감옥에서 반(反)유대인과 반(反)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가다듬었다. 히틀러에게 아리안족은 천재 민족이었고 유대인은 기생동물이었다.
1924년 12월 출소했을 때 이미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을 비서 루돌프 헤스에게 받아적게 했다. 그리고 1925년 7월 18일,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 제1권을 출간했다. 원래 제목은 `허위, 우열, 비겁에 대한 4년간의 투쟁`이었으나 강렬한 인상을 주자는 출판사 사장의 권유로 제목을 바꿨다. 연말까지 팔린 책은 1만여권에 불과했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나의 투쟁`을 나치의 바이블로 삼은 뒤부터는 거의 2000만부나 팔려나갔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 보다는 큰 거짓말에 더 쉽게 속는 법이다." 그가 `나의 투쟁`에서 강조했던 말이다.
1925 - 히틀러 <나의 투쟁> 1권 출간
[어제의 오늘]1925년 히틀러 <나의 투쟁> 1권 출간ㆍ‘반유대주의’ 내걸고 나치 독재 시작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도자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대중의 이해력은 매우 부족하며 잊어버리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선전하기에 따라 사람들이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려면 크게 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독재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유혹적인 ‘조언’으로 가득하다. 이 책은 오스트리아 말단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가 고난의 유년시기를 거쳐 정치적 이념에 크게 영향받으며 자란 청년기, 자신의 세계관을 펼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던 전성기까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히틀러는 1923년 11월 나치 돌격대원 300여명과 함께 뮌헨의 맥주홀 뷔르거브로이하우스에 난입했다. 그 맥주홀에서는 바이에른주의 통감 카를이 연설 중이었다. 히틀러는 바이에른 분리를 주장하는 카를을 제거하고 주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히틀러는 권총을 쏘며 “혁명은 시작됐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의 ‘맥주홀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체포돼 바이에른 감옥에 수감됐다. 히틀러에게 5년 금고형 기간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뒤죽박죽이던 세계관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는 감옥에서 반유대인·반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완성했다.1924년 12월 국민적 영웅이 되어 감옥을 나온 히틀러는 자신이 정리한 내용을 비서 루돌프 헤스에게 구술했고 이듬해 7월18일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2년 뒤에는 2권이 나왔다. 그는 이 책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아리아인을 천재 민족으로, 유대인을 기생동물로 규정했다. 또한 슬라브인과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동유럽에 아리아인의 생존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공포정치를 포함한 나치당의 정강정책과 집권 당위성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출간 1년 동안 <나의 투쟁>은 1만부가 팔리는 데 그쳤다. 그러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이 책은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바이블로 자리잡아 수천만부가 팔렸다. 히틀러의 선동은 반유대주의자·반마르크스주의자·군부 등 독일 내 불만세력들을 사로잡았고 전 세계는 한 인간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광기로 인해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의 참화에 휘말렸다.
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17 18:06: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71806315&code=100100&s_code=ap005
1922 - 『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이며 과학사회학자인 토머스 쿤 출생
1921 - 미국의 우주비행사 존 글렌(Glenn, John) 출생
글렌 [Glenn Jr., John H(erschel), 1921.7.18~ ]
1919 - 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신궁 세움
만델라(1990)
1918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만델라(Mandela, Nelson) 출생
만델라 [Mandela, Nelson (Rohihlahla), 1918.7.18~ ]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이며 정치가이다. 1944년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참여하고 파업과 불법운동 등을 통해 인권운동을 전개하며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48년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인종차별정책)에 대항했다. 1960년 경찰의 발포로 스하르페빌레에서 비무장 군중들이 살상된 데 이어 ANC에도 금지령이 내려지자 만델라는 그때까지의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무력학쟁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1990년 2월까지 약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흑인들의 만델라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수감기간에도 3,000여 개의 인권단체들을 지도했다. 1993년 데 클레르크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약 65%의 지지율을 얻어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어 46년간에 걸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마감시켰다.
"좌절과 패배, 열등감이
나에게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 넬슨 만델라
1915 - 한국의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출생
김경승 [金景承, 1915.7.18~1992.2.16]
1909 - 구 소련의 외교관 안드레이 그로미코 출생
1909 - 소련의 정치가, 외교관 안드레이 그로미코(Gromyko, Andrei) 출생
그로미코 [Gromyko, Andrei Andreevich, 1909.7.18~1989.7.2]
1909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 무함마드 다우드 출생 /위키백과
무함마드 다우드(1909년 7월 18일 ~ 1978년 4월 28일)는 아프가니스탄의 총리(1953년 ~ 1963년)이자,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1973년 ~ 1978년)이자, 아프가니스탄 왕족의 한 사람으로, 무함마드 자히르 샤의 사촌형제이다.
1953년에 총리가 되었다. 다우드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파키스탄과는 거리를 두려 하였다.
1973년 자히르 샤가 국외 순방 중일 때 쿠테타를 일으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라디오를 反파키스탄 방송으로 채웠으며, 소련과 미국에게서 개발 원조를 기대하였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PDPA)의 유력 당원인 미르 아크바르 카이바르가 정부에 의해 살해되자, 인민 민주당 지도자들은 다우드가 자신들을 모조리 몰아낼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두려워하였으며, 과연 그 직후에 지도부 상당수가 정부에 체포되었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들은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등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의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당하고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1907 - 이준(李儁) 열사의 순국 소식이 처음으로 국내에 알려짐
1907 - 이준 열사의 순국 소식이 '대한매일신보' 호외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짐
7월 15일 오후 2시에 이준열사의 부인 이일정여사는 헤이그에서 보내온 전보를 통하여 이준의 자결 소식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 호외에서는 이준이 헤이그에서 자결했다는 전보가 동경을 거쳐 17일 도착하여 가지고 있다는 기사가 실립니다. 더군다나, 이상설은 국내에 헤이그 사건에 대하여 보고서를 보낸 사실이 전혀없었습니다. 그들은 7월 16일날에 이준의 장례를 임시로 치루었고, 19일날 그들은 윤병구와 송헌수 등을 대동하고 헤이그를 떠나 영국을 방문합니다. 일행은 다시 런던을 출발하여 8월 1일날 뉴욕에 도착하여 미국을 전전하다가, 9월 초에 이상설과 이위종이 다시 파리를 들러 헤이그로 옵니다. 이들은 9월 6일날에 헤이그의 뉴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서 이준의 장례식을 치룬후에 헤이그를 떠나 한 달여 동안 파리 베를린 로마를 순방하다가 페테르부르크로 갑니다.
따라서, 이준열사의 죽엄이 국내로 전달되어 <대한매일신보> 호외에 처음 기사화된 7월 18일 이전에 이상설과 이위종이 만주로 돌아왔으나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사태를 주시했다. 그리고 만국평화회의 참석에 실패한 경위를 밝힌
보고서를 상동교회에 대기 중인 신민회에 보내었다.
http://kr.blog.yahoo.com/onecoree/folder/13.html
홀로 남은 이상설 "슬프다, 너무 슬프다"
네덜란드 헤이그 중앙역에서 2번 전차를 타고 15분쯤 가면 시 외곽에 자리잡은 뉴 에이큰다위넌(NieuwEykenduynen) 공동묘지에 닿게 된다. 이곳을 찾은 날, 수많은 비석들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헤맨 끝에 관리사무소 뒤편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청동상을 간신히 찾았다. 그의 묘적지, 젖은 흉상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순국한 지 사흘이 지난 1907년 7월 16일, 여기서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참석자는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상설(李相卨)과 '드 용' 호텔의 주인이 전부였다. 넋이 나간 이상설은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는 영어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다른 밀사인 이위종(李瑋鍾)은 잠시 러시아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있었다. 만리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48세의 이준은 1963년 서울 수유리로 이장되기까지 55년 동안 이 쓸쓸한 공동묘지 구석에 묻혀 있어야 했다.
다시 이틀 뒤 서울.대한매일신보는 7월 18일자 호외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이준씨가... 충분(忠憤)한 지기(志氣)를 불승(不勝)하여... 자결하여 만국사신지전(萬國使臣之前)에 열혈(熱血)을 일쇄(一灑)하여 만국을 경동(驚動)하였다더라." 다음 날짜 황성신문도 "이준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 찔러 자결함)하였다는 전보가...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다더라"고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게 됐던
첫 근거는 바로 이 신문들이었다.하지만 현재의 정설은 이준 열사가 '분사(憤死)' 또는 '순국'했다는 대단히 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결과 '할복자살이 아닌 쪽'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부 출판물에선 '자결'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
헤이그=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닷컴 2007.06.25 00:4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5/2007062500056.html
1907 -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청년회원 등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1907 - 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1907 - 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대한매일신보>(1905. 8. 11)
1904 - 대한매일신보 창간 (현 서울신문)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E. T. 베셀을 발행인으로 하는 일간신문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었다. <런던 데일리 뉴스>
특파원인 베셀은 취재차 한국에 왔다가 양기탁을 만나 신문 창간을 계획하고 1904년 6월 29일 견본판을 만들었다.
양기탁은 이후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박은식·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의 논설을 실었다.
초기에는 발행인이 외국인이라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지만, 1908년 신문지법이 개정되면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28일 종간될 때까지 한글판·국한문판·영문판의 3가지 신문을 발행했으며 종간호의 지령은 국한문판이 제1464호, 한글판이 제938호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발자취일 뿐만 아니라
언론사·문학사·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중요한 신문이 하나 창간되었는데 그건 바로 ‘대한매일신보’였다.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임시 특파원으로 내한중이던 어네스트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우고 양기탁이 총무를 맡아 일본의 탄압에 반대하는 왕실과 민간 유지들의 비밀 투자로 운영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 논설에는 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였다.
일본은 당시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 매일신보는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반일 논조도 펼 수 있었다. 신문사 정문에는 ‘일인불가입’이라는 방까지 내걸었다. 이 신문은 처음엔 국, 한문 혼용으로 간행되었으나 나중엔 일반 대중을 위한 한글판도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종래의 신문 체제보다 큰 27cm*40cm의 크기로 발행되었으며 1905년 8월 11일부터 외국인을 위한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따로 발간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무렵엔 신문 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늘어나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경우 광고가 45-50%의 지면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반면 1896-99년 기간에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게재된 광고는 총 지면의 10-14%에 지나지 않았다. 1909년 3월부터는 ‘대한매일신보’에 전면광고가 등장할 정도로 광고가 제법 활기를 띠었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에 대응하여 일인계 국문판 신문들을 발간하였다. 기존의 ‘한성신보’외에 ‘대한일보’, ‘대동신보’, ‘동양일보’, ‘중앙신보’등이 새로 발간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데일리뉴스’에 대항해 전 ‘저팬 타임즈’의 편집장을 데려다가 ‘서울 타임즈’를 발간하였다.을사보호조약 이후에도 새로운 신문들이 창간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신문으로 ‘만세보’와 ‘경항신문’과 ‘대한민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세보’는 1906년 6월 손병희, 오세창 등이 발간한 천도교 계통의 일간지로 1907년 6월에 폐간되기까지 일진회의 반민족적인 행동을 규탄하는 데에 앞장섰다. 주필 이인직은 ‘혈의 누’라는 연재 소설을 50회에 걸쳐 실었다. ‘경향신문’은 1906년 10월 천주교에서 발행한 순한글 주간지로서 종교 신문이었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주 정신을 강조했다.그 후 오세창은 일제의 국권 침탈 행위가 극심해지자 1909년 ‘대한민보’를 창간하였다. ‘대한민보’는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운동 단체인 대한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민족의 단결과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였다.
당시의 신문들은 일본이 '폭도'라고 부르는 무장 투쟁을 '의병'이라고 부르는 등 국민의 정치의식을 계몽하고 앙양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도 "수백 마디 말보다도 한 줄의 신문기사가 한국인들에게 더 큰 위력을 갖는다"고 토로한 바 있다.일종의 맞불 작전으로 친일파 신문들도 창간되었는데 ‘국민신보’와 ‘대한신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민신보’는 일진회의 기관지로서 1906년 1월 송병기, 이용구 등이 창간하였으며, ‘대한신문’은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로서 1907년 7월에 창간되었다. 일본은 1906년 이른바 통감 정치를 실시하면서부터 기존의 ‘한성신보’의 이름을 ‘경성일보’로 바꿔 통감부의 기관지로 만들었다.통감정치가 강화되면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일본의 압력도 점증되었다. 일제는 1907년 10월 12일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해 외교적 탄압을 본격화했다. 베델은 10월 14일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관에 설치된 영사 재판정에 출두해 6개월간의 근신에 처해졌다.
그러나 베델의 근신기간이 만료된 직후 ‘대한매일신보’의 배일 논조는 더욱 강해졌다.
베델의 활약
‘대한매일신보’가 그러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영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외교 공세를 퍼 베델을 다시 영국 총영사관 재판정에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베델에 대한 2차 재판은 1908년 6월15일 부터 3일 동안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는데 상하이 고등법원에서 파견된 판사는 이 재판에서 베델에게 3주일간의 금고 형과 6개월간의 근신을 선고했다.
그러나 베델은 상하이에서 형을 복역한 뒤 다시 한성으로 돌아와 ‘대한매일신보’의 배일 논조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채 보상 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그야말로 끈질긴 사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1908년 7월 12일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국채 보상 운동 수집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조작된 혐의 내용으로 구속했다. 영국과 일본 사이의 치열한 외교전 끝에 양기탁은 9월 29일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베델은 1909년 5월 1일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재판과 금고 형에 따른 긴장과 과로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영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 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 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사울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베델은 2차 재판을 받기 전인 1908년 5월 27일 ‘대한매일신보’의 발행 및 편집인의 명의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편집 일을 보던 영국인 알프레드 만함으로 바꿨기 때문에 베델이 죽은 다음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비서였던 만함이 맡아서 운영했다. 그러나 만함은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어 신문 제작 일체는 양기탁에게 의존했다. 이 같은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 주한 영국 총영사 헨리 보나르는 "한국을 위해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신문을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만함을 회유하여 ‘대한매일신보’를 일본에 팔아넘기게 했다. 통감부는 합방조약이 성사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의 매수를 비밀에 붙여 둔채 1910년 6월 14일 발행인 및 편집인의 명의만 한국인 이장훈으로 바꿔 놓았는데 이때에
양기탁은 자신이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대한매일신보’를 떠나고 말았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100
1895 - 불가리아 독재 정치가 스탐볼로프 사망
1892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출생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Art(h)ur Friedenreich)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사상 첫 흑인, 혼혈 선수였다. 별명은 호랑이(El Tiger)로 1919년 남미축구선수권대회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연장후반 종료 직전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에 첫 우승을 안긴 뒤 우루과이에서 부르기 시작한 별명이다. 통산 1329골을 넣어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아마추어 시절의 기록을 포함한 것이며
당시의 통계 시스템상 신뢰할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1887 - 노르웨이의 정치가 비드쿤 크비슬링 출생
1887 - 노르웨이의 군인, 정치가 크비슬링(Quisling, Vidkun) 출생
크비슬링(퀴슬링) [Quisling, Vidkun, 1887.7.18~1945.10.24]
1886 - 너무 용감했던 美장군 사이먼 버크너 출생
[역사 속의 오늘] 너무 용감했던 美장군 사이먼 버크너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서 지휘관이 별이 그려진 번적이는 철모를 쓴 채 장군기를 휘날리며 돌아다니면 어떻게 될까. 저격수나 포격의 표적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태평양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의 미군 지휘관
사이먼 B. 버크너 육군 중장이 바로 그랬다. 그는 2차 대전에서 전사한 미군 최고위 장성이다.
군인 가문 출신으로 1886년 오늘 미국 켄터키주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 초기 알래스카 방위군 사령관을 거쳐 오키나와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작전 내내 최전방을 돌아다니며 직접 적진을 관측했다. 용맹했지만 문제는 일본군에게 '미군 최고지휘관이 여기 있소'라고 알리며 지휘를 했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일본군의 포탄이 날아왔지만 다행히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그러나 1945년 6월 18일에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철모의 별 세 개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아군의 경고 무전을 받고 아무 표식이 없는 철모로 갈아썼으나 곧바로 일본군의 포탄이 작렬했다. 그로 인해 가슴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 수술대 위에서 숨졌다. 그로부터 5일 뒤(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는 끝났다. 그러기에 어쩌면 무모했던 그의 용맹은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7월 1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8585&yy=2011
1885 - 영국-청나라 아편협정 체결
1882 -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전기작가 마누엘 갈베스(Galvez, Manuel) 출생
갈베스 [Galvez, Manuel, 1882.7.18~1962.11.14]
1872 - 멕시코의 대통령(1861-72 재임) 후아레스 사망
1871 - 이탈리아의 화가 자코모 발라(Balla, Giacomo) 출생
발라 [Balla, Giacomo, 1871.7.18~1958.3.1]
생일이 자료마다 제각각인데.. 7월 18일이 유력하네요.. ^.@)
8월 24일 - http://www.britannica.com/eb/article-9011988/Giacomo-Balla
8월 18일 - http://www.answers.com/topic/giacomo-balla
http://100.naver.com/100.nhn?docid=745045
7월 18일 - http://en.wikipedia.org/wiki/Giacomo_Balla
http://www.futurism.org.uk/balla/balla_frames.htm
http://www.guggenheimcollection.org/site/artist_bio_11.html
http://www.mishabittleston.com/artists/giacomo_balla/
1840 - 아편전쟁 발발 (양력 7월 18일, 음력 6월 16일))
1811 -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Thackeray, William) 출생
새커리 [Thackeray, William Makepeace, 1811.7.18~1863.12.24]
1778 - 모차르트 교향곡 31번 ‘파리’ 초연
[책갈피 속의 오늘]1778년 모차르트 교향곡 31번 ‘파리’ 초연
모차르트는 전 생애에 걸쳐 여행을 계속했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중 무려 17번의 여행을 했다. 악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 최초의 독립적인 ‘시민 음악가’였던 그에게 여행은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여행은 만 여섯 살이 되기 전인 1762년 1월 시작됐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딸 난네를과 아들 볼프강의 신동 같은 연주 실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뮌헨 여행을 기획했다. 모차르트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하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모차르트의 17번의 여행 중 11번째는 1781년 5월 빈으로 이주하기 전 잘츠부르크에 살던 시절 이뤄졌다. 영국 런던에서 하이든과 알게 되고,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작곡을 배우는 등 모차르트에게 여행은 정신적 음악적 성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명곡 중에는 ‘파리’ ‘린츠’ ‘프라하’처럼 여행지의 이름을 딴 작품이 많다. 모차르트 교향곡 31번 ‘파리’(K297)는 1778년 7월 18일 파리 공개 연주회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초연됐다. 당시 모차르트는 취직을 하기 위해 어머니와 둘이 독일 만하임을 거쳐 파리로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22세 청년 모차르트는 가수인 알로이지아 베버를 사랑했다가 실연했고, 파리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등 뜻밖의 불행을 맞게 됐다. 당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내 친구.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슬픈 날이네. 지금은 오전 2시이고, 이제 내 어머니, 내 사랑하는 어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신께서 어머니를 당신 곁으로 불러가셨네.”
그러나 만하임∼파리 여행은 그에게 남은 13년의 짧은 생에 있어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에 지어진 교향곡 ‘파리’는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완전한 2관 편성의 교향곡이었으며, 웅대한 구상이나 치밀한 구성법이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임을 알렸다.모차르트는 음표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 등 외국어에도 능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세계화 천재교육’이 없었으면 사장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잦은 여행은 모차르트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의 죽음은 독살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잦은 여행을 해 병약해진 결과라는 설도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7-07-18 03: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8/8467669/1
1730 - 프랑스 원수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 사망
빌레루아 공작 2세 프랑수아 드 뇌빌(François de Neufville, 2nd duc de Villeroi; 1644년4월 7일리용 -
1730년7월 18일파리)는 프랑스 군인이자 샤를 9세 치세에 두각을 나타내 성장한 귀족 가문 출신이다.
생애
그의 아버지 니콜라 드 뇌빌 빌레루아 후작(Nicolas de Neufville, marquis de Villeroi)이자 프랑스 원수(Marshal of France; 1598-1685)는 젊은 왕 루이 14세 통치자에 의해 뒤늦게 공작 작위가 수여되었다. 프랑수아는 친족 관계인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그의 개인적인 서클의 회원으로 들어왔다. 왕에 대한 충성심과 훌륭한 조신(朝臣)이며, 사교 모임의 리더였고, 뛰어난 개인적인 무용을 지닌 사나이로써, 빌레루아는 군대에서 승진을 거듭했고, 모두가 그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군인의 경력으로는 언제나 그는 루이보다 무능하다는게 올바른 평가였다.
1693년 빌레루아는 프랑스 원수로 승진하여 연습이 아닌 정말로 중요하고 책임감이 무거운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1695년 뤽상부르 공작이 사망하자 빌레루아는 플랑드르에 있던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이 되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보기:대동맹 전쟁)윌리엄 3세는 빌레루아의 부임소식을 듣고 상대편의 손쉬운 적수를 가리켜 "작은 꼽추"(little hunchback; 뤽상부르 공작의 모습을 비웃는 말)라고 불렀다. 1695년 빌레루아는 브뤼셀에 대해 무차별 포격에 대한 책임이 있었고, 이것으로 파괴된 건물들의 복구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재 모습을 찾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비록 다시 세계 대전때 피해를 입기도 했다).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빌레루아는 이탈리아로 보내져 해임된 니콜라 카티나(Nicolas Catinat)를 대신해 사보이 공 외젠(Prince Eugene of Savoy)의 하위 군대와 키아리(Chieri)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1702년 2월 크레모나 전투(Battle of Cremona)에서 놀랍게도 포로가 되었고, 군대에서 그의 손실을 가리킨 유머스런 유명한 시가 지어졌다.
1년 후 그는 저지대(Low Countries)에서 뜻밖에도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과 맞붙었다. 말버러 자신은 네덜란드와 기타 동맹의 위원들에 의해 곤경에 빠졌지만, 오히려 빌레루아 자신은 능력에 벗어나는 과용을 부려 다음해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불러 일으킨 1706년 라미예 전투에서 말버러와 싸웠으나 철저하게 패배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오랜 친구를 위로하며 말했다. "우리들의 시대엔 행운이 오래가지 못한 것 뿐이오."(At our age, one is no longer lucky)
그러나 빌레루아는 사령관직에서 경질되고, 이때부터 빌레루아의 삶은 궁정신하로써 살게 되었다. 또한 비록 책략이 포함된 일이 의심되더라도, 그는 루이 14세에 대한 우정을 생각해 그를 지지했다.
1717년과 1722년 사이 섭정기구 아래에서 빌레루아는 어린 왕 루이 15세의 통치를 기타 다른 높은 지위의 인물들과 함께 보필했다. 하지만 루이 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의 필리프 2세(Philippe II of Orléans)는 그에게 치욕을 입힐 음모를 꾸며, 빌레루아를 리용의 총독으로 보내버렸는데, 사실상의 추방이었다.성인이 되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된 루이 15세는 빌레루아를 상기하고 그를 다시 불러 높은 관직에 앉혀 그의 시대가 찾아오게 만들었다.
1721 - 프랑스의 화가 앙투안 와토(Watteau, Antoine) 사망
와토 [Watteau, (Jean-)Antoine, 1684.10.10~1721.7.18]
1659 - 프랑스의 초상화가 이야생트 리고(Rigaud, Hyacinthe) 출생
리고 [Rigaud, Hyacinthe, 1659.7.18~1743.12.29]
1635 -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 출생
1610 -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 사망
1610 -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사망
카라바조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1.(9.29)~1610.7.18]
1552 -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 출생
루돌프 2세 [Rudolf II, 1552.7.18~1612.1.20]
1401 - 신문고 설치
1323 - 토마스 아퀴나스 시성식: 토마스 아퀴나스가 카톨릭 성인으로 시성되다.
토마스 아퀴나스-사후
1274년 5월 2일 수요일 파리대학 총장과 운영진은 당시 철학부에 속해 있는 모든 교수들의 이름으로 도미니코회 총회에 비통함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젊을 시절부터 자라고 배우며 가르쳤던 파리에 묻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 파리대학 총장과 교수들의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이 '위대한 성인'의 시신을 내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추모와 존경의 표현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보내진 반응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죽은 지 정확히 3년째 되던 1277년3월 7일 파리와 3월 18일옥스퍼드에서 각각 에티엔 텅피에, 그리고 같은 도미니코회 출신의 로버트 킬워드비에 의해, 그리고 1286년4월 30일 또다시 옥스퍼드에서 킬워드비의 후임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 이론을 포함한 몇몇 주요 이론들이 정죄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의 나이로 죽은 지 49년째 되던 1323년7월 18일 카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론들에 대한 정죄는 모두 철회되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옥스포드에서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지 39년이 지난 해인 1325년 2월 14일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성을 교황청이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1567년4월 15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박사로 선언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가 성인의 격에 어울릴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660 - 백제 멸망
기원전 18년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한 백제는 제31대 의자왕 때까지
31왕 678년의 역사를 지니고 멸망하다. 그후 의자왕은 태자 왕자를 비롯 신하 93명,
1만2천8백7십명의 백성들과 포로가 되어 당에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
660 -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 멸망하다. 백제-멸망과 부흥운동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목적이 신라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자, 대당 외교가 아니라 신라와 직접 군사적 대결을 시도하여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군사개입을 불러왔다. 당나라는 660년 6월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백촌강 전투).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에서부터 936년 동안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에 의해 다시 세워지나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로마 대화재
60 - 로마 대화재가 일어나다.
로마 대화재( - 大火災, Great Fire of Rome)는 기원후 60년 7월 18일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이다.
기름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시내에 번지면서 대화재로 악화되었다.
네로 황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 속의 네로황제는
화재 소식을 듣고는 휴가를 중단하고, 로마에 와서 이재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 참사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시민의 민심이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으며, 네로 방화설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일부 과격 세력이 소수 세력이었던 기독교인에게 화재 책임을 돌려 탄압하였으며, 네로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박해 당시에 네로는
모자라는 식량과 여러 물품을 빌리기 위한 일정때문에 로마시에 있지도 않았다.
로마 대화재와 민심 수습을 위한 기독교 탄압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는 셴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가 있다.
서강대 박홍 총장
1994 - 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서강대 박홍 총장이 1994년 7월 18일 김영삼 대통령과 대학총장간의 청와대 오찬석상에서 "제한된 숫자이기는 하지만 주사파가 대학가에 깊이 침투해 있으며 주사파 뒤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그동안 땅속에 잠복해 있던 주사파 문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놓았다.특히 전남대 김일성 분향소 사건, 경상대 교재 이적성 논란 등 시국사건과 맞물려 뜨거운 공개논쟁으로 확산됐다. 박총장은 일련의 주사파 발언으로 학생과 재야세력의 거센 비판을 받았는가 하면 `뿌리깊은 좌경폭력학생운동에 대항하는 용기있는 지식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논쟁은 김일성 사후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3 - 대한민국의 가수 태민 (SHINee) 출생
태민(1993년7월 18일 ~ ,본명:이태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남성 5인조 그룹샤이니의 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홍콩 모두 泰民으로 쓰고 있다.태양력으로 7월 18일, 음력으로 5월 2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이 있다. 청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프란체스코이다.2005년 SM 주말 공개 오디션에서 선발되어 3년 동안의 연습기간을
지나 샤이니 데뷔에 이르렀다. 2007년에 중국북경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2009년, 샤이니가 미니앨범 2집 타이틀곡 "줄리엣"으로 방송활동을 하고 있을 때 태민은 MBC 일일시트콤
태희혜교지현이에서 엄친아 준수 역을 맡아 연기자활동을 한 경력도 있다.
1990 - 한국의 정치가, 제4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사망
윤보선 [尹潽善, 1897.8.26~1990.7.18]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이 1990년 오늘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아흔세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한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40여 년 동안 우리 나라 헌정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뒤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1963년과 67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로 나섰지만
두 번 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야권의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유해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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