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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 7-17 제헌절

오늘   7-17     제헌절 

 

제헌절

대한민국에서 7월 17일은 제헌절이다.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빠진다.

 

2011 - [말글살이] 인민, 동무 - 강재형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남에게 해코지 안 하고 사는, 그저 착한 사람을 두고 그렇게 이른다. 하지만 법이 늘 ‘힘없는 백성’ 편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 여기는 이들이 없지 않다. 1988년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 사건 이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여전히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걸 봐도 그렇다.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에서 논의한 ‘중수부 폐지’와 ‘검경 수사권’ 논란 또한 ‘법 없이 살 수 있는 시민’을 앞세운 승강이가 아님 또한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사개특위에서 다루는 사안을 두고 시시콜콜 따질 자리가 아니나 뜬금없이 법 얘기를 꺼내는 건 어느 대학 법학관 들머리에서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7월17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은 제헌절.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공포된 걸 기념하는 날이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표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인민’이다.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 북한,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것이 아니다. 제헌국회를 이끌었던 유진오가 작성한 대한민국 헌법 초안의 첫머리이다. 여기 명시된 ‘인민’이 ‘국민’으로 바뀐 사연을 두고 그가 남긴 증언은 널리 알려져 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국가우월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반면, ‘인민’은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를 의미한다. 공산주의자에게 좋은 단어 하나를 빼앗겼다.” 이데올로기에 앗긴 표현은 법에만 남아 있는 게 아니다. ‘동무’가 그렇다. 길동무, 어깨동무, 소꿉동무, 말동무, 그리고 동문과 한뜻인 글동무, 동업을 뜻하는 동무장사…. 동무가 금기어로 푸대접받았음에도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황국식민’의 정신을 담아 만들었다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옷을 갈아입은 게 광복 50돌에

즈음해서이다. 헌법이 공포된 지 63년이 넘었다. ‘인민’과 ‘동무’를 제 대접 해주는 이가 많아지면 좋겠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한겨레 20110720 19:23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88241.html

 

2011 - 음악앨범 표지 첫 디자인 스타인바이스 별세

음악 앨범의 표지를 세계 최초로 디자인해 앨범 재킷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알렉스 스타인바이스가 17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94세.1917년 뉴욕의 폴란드와 라트비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스타인바이스는 1939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 광고 디자인 직원으로 고용됐다.하지만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LP 레코드의 커버를 만드는데 더 끌렸던 그는 생산비는 좀 더 들겠지만, 판매는 늘 거라며 레코드사를 설득해 최초로 레코드 포장 겉면에 시각적인 디자인을 넣었다.
스타인바이스가 처음으로 디자인한 로저스 앤 하트(Rodgers & Hart)의 앨범에는 극장 차양에 이들 음악가와 앨범 제목(Smash Song Hits by Rodgers&Hart)이 쓰여있는 모양이었는데, 이 디자인 덕분에 앨범 판매량이 894% 급상승했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일했던 25년간 스타인바이스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을 포함해 800여개의 앨범 커버를 제작했다.2008년 자신의 갤러리에 스타인바이스의 작품을 전시했던 로버트 버만은 그를 "음악 예술을 시각적으로 바꾼 중요한 예술가"라며 앨범 한 무더기를 던져놔도 스타인바이스의 작품은 구별해 낼 수 있다고 극찬했다.(워싱턴 AFP=연합뉴스) eshiny@yna.co.kr
 연합뉴스 2011/07/21 10:10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1/07/21/0904000000AKR20110721050100009.HTML

 

2011 - 엑스재팬 원년멤버 타이지 사망

일본의 대표 록밴드 '엑스재팬'의 원년 멤버 타이지(45·본명 사와다 타이지)가 17일 사이판에서 사망했다고 요미우리 등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타이지는 지난 11일 사이판으로 향하는 델타항공 298편에 탑승하다 승객과 시비가 붙어 기내에서 난동을 부렸다. 자신을 말리는 승무원을 폭행한 혐의로 사이판 도착 직후 체포된 타이지는 14일 유치장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 17일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망 사실은 사이판을 방문한 타이지의 가족이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음악 팬에게도 널리 알려진 타이지는 1986년 태동한 엑스재팬(당시 엑스)의 원년 베이시스트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서태지의 음악세계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1992년 엑스에서 탈퇴했으며 일본 출신 록밴드 라우드니스 등에 몸을 담았다. 이혼 뒤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지만 음악에 대한 애착이 커 솔로 및 밴드 활동을 이어왔다.
굴곡진 음악 인생을 살았던 타이지는 지난해 8월 요코하마에서 열린 엑스재팬 공연에 모습을 드러내 팬들을 열광케 했다. 지난 3월에는 자신이 결성한 록밴드 '타이지 위드 헤븐스(TAIJI with HEAVENS)'를 이끌고 내한 공연도 펼칠 예정이었으나 일본 대지진으로 무산됐다. 1998년 히데에 이어 타이지까지 사망하면서 엑스재팬 원년 멤버는 요시키, 토시, 파타 등 세 명만 남게 됐다. 일본 언론들은 나머지 멤버들이 타이지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스포츠서울닷컴-김세혁 기자] 
zaragd@media.sportsseoul.com   mk 뉴스 2011.07.18 06:32:00 http://news.mk.co.kr/newsRead.php?rss=Y&sc=30100012&year=2011&no=464360

 

2010 - 중 다롄, 송유관 폭발로 해안오염

해역 50㎢ 피해…선박 20척 동원해 기름 제거작업

중국 랴오닝성의 항구도시 다롄에서 대규모 송유관 폭발로 원유가 바다로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중국 당국은 기름띠 확산을 막기 위한 방재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송유관 외에 원유 저장 탱크도 손상돼 유출된 원유의 양과 오염 정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보도했다.

사고의 발단은 16일 밤 다롄 항구에서 라이베리아 선적의 3만t급 유조선이 원유를 하역하면서 발생한 화재다. 이 화재로 유조선과 원유 저장 탱크를 연결하는 중국석유천연가스(CNPC) 소유의 송유관 2개에서 6차례의 큰 폭발이 일어났다.

장더장 부총리가 직접 화재 현장에 나가 진화작업을 지휘하고 다롄 인근도시 14곳에서 차출한 소방관 2000여명과 소방차 338대, 화재 진화용 액체를 실은 공군 항공기 2대가 동원돼 15시간 만에 화재는 진화됐다. 하지만, 송유관과 원유 저장 탱크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인근 바다로 흘러들어가 17일까지 다롄항 부근 해역 50㎢가 오염됐다고 <신화통신>이 18일 보도했다. 중국 당국은 20척의 선박을 동원해 기름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다. 기름띠는 확산되고 있으나, 중국석유대학 펑롄융 교수는 <중국중앙텔레비전>에 출연해 “오염원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멕시코만의 대규모 원유 유출사태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번 화재로 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불길이 30m 높이까지 치솟으면서 다롄 도심이 인체에 해로운 화학가스로 뒤덮였고 주민들은 호흡 곤란 등을 호소했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한겨레 2010-07-18 오후 09:32:5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430917.html

 

2010 - 시인 예프투센코, 러시아에 자택미술관 기증

러시아의 유명 시인 예브게니 예프투센코가 자신의 집과 평생 수집해온 미술품을 국가에 미술관으로 기증했다.
17일 문을 연 예프투센코 미술관은 모스크바 교외 페레델키노에 있으며 인근에는 옛소련의 문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가수 겸 시인 불라트 오쿠자바의 자택 기념관도 자리잡고 있다.
2층으로 된 예프투센코 미술관에는 마르크 샤갈과 후안 미로,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의 작품이 전시돼있다.
예프투센코는 이 미술관에 시베리아와 중국, 이탈리아, 중동 등을 그가 평생 여행하며 찍어둔 사진과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지팡이 등 일생의 수집품도 남겨두었다.예프투센코는 옛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했던 이른바 해빙기에 시인으로 문명을 얻기 시작했다.잘 알려진 그의 시 중 하나인 1961년작 '바비 야르'는 반유대주의를 규탄하고 옛 소련당국이 나치 독일의 키예프 유대인 대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비를 건립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있다.
한창 때의 예프투센코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해 러시아 내외의 대형 운동장에서 각기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시낭송회를 가졌다.18일 77세 생일을 맞은 그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으며 모스크바와 털사 양쪽에서 거주하고 있다.(페레델키노<러시아> AP=연합뉴스) 
maroonje@yna.co.kr 

연합뉴스 2010/07/19 10:56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0/07/19/0902000000AKR20100719072500009.HTML

 

2009 -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沈思遜)묘 도굴 사건 발생

'심사손(沈思遜·조선 중기 문신) 묘 도굴 사건' 3개월째 오리무중

부장품 있었을 가능성 "400년 넘게 보존되어와 뭘 훔쳐갔는지 알길 없어…"

지난 7월 17일 오후, 풍산(豊山) 심(沈)씨 종친회원들이 허겁지겁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중턱에 올랐다. 이 집안이 배출한 조선 중기의 문신 심사손(沈思遜·1493~1528)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등산객 제보를 받고 달려온 것이다.
회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말을 잃었다. 봉분이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묘역에 가로 60㎝×세로 120㎝×깊이 60㎝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전날 비가 많이 내려 흙과 잔디가 범벅이 돼 있었다. 명백한 도굴 현장이었다.
심사손이 묻힌 개화산 기슭은 풍산 심씨 집안의 묘 50여기와 석인상 등이 모여있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2584㎡·781평)이다. 심사손은 비변사 낭관 등을 지내며 북방 오랑캐 정벌에 공을 세운 인물로, 오랑캐를 섬멸하다 목숨을 잃었다. 심사손의 아버지 심정(1471~1531)은 중종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아들 심수경(1516~1599)은 대사헌을 지냈다. 훼손된 심사손의 묘 인근에 있는 이들의 묘는 무사했다.
심사손의 묘를 비롯해 이 묘역에 있는 조선시대 묘 4기와 석물·신도비 등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다. 서울에서 흔치 않은 문화재 도굴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즉시 서울 강서경찰서가 수사를 맡았지만, 발생 3개월이 다 되도록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 강서서 관계자는 "범행 현장에서 지문이나 신발 발자국 같은 결정적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다"고 말했다.
종친회는 "400년 넘게 잘 보존돼온 묘가 처음으로 파헤쳐진 까닭에, 대체 무엇이 도굴됐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풍산심씨 대종회 심현종(沈鉉鐘·64) 총무이사는 "묘 앞에 석인상까지 세운 것을 보면 분명히 '보검' 같은 임금의 하사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덤 앞에 석인상을 세우는 풍습은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묻힌 사람의 사회적인 위세를 나타낸다. 이번에 사건이 난 묘역도 묘에 따라 문신과 무신을 형상화한 석인상이 서 있다.
전문가들도 '부장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선 중기 사대부들의 관습에 따라, 심사손도 회곽묘(灰槨墓)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목관 주위 6면을 석회를 발라 밀봉하는 구조다. 이 경우 유해뿐 아니라 부장품이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된다.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오랑캐 정벌에서 공을 세운 심사손의 이력과 중종반정 공신의 자제라는 신분을 감안할 때, 예복·도자기·청동제 그릇·묘지석 등 값진 문화재가 상당량 묻혀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비슷한 시대에 살다 간 사대부의 무덤과 비교하면 그런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지난 1997년 경북 영주에서 발견된 김흠조(金欽祖·1461~1528) 부부 묘에서는 의복 66점과 분청사기 등 유물 30점이 나왔다.

 

당대 유명 사대부들이 쓴 만사(輓詞·고인의 이력과 선행을 칭송하며 친분관계를 표시하는 글) 19점도 출토됐다. 김흠조는 충주목사와 장례원 판결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심사손과 동시대 인물이다.풍산심씨 종친회에서는 지난달 중순, 추석을 앞두고 심사손의 직계 후손 8명이 나서서 심사손의 무덤을 복원한 뒤 조상들께 예를 갖춰 축문을 읽는 '산신제'를 지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풍산심씨 묘역은 외진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화산은 말이 산이지 '구릉'에 가깝다. 해발 131m에 불과해 도보로 20분이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 부근에 헬기장이 있고, 산 기슭 곳곳에 초소 같은 군사 시설들이 있다. 산 밑에 바로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이 있어 교통도 좋다. 서울시가 '조망 명소'로 꼽아 홍보할 정도로 풍광이 좋고, 고려 말에 창건된 절 '약사사'도 인근에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도 등산로 바로 옆이다. 심사손의 묘는 등산로 길섶에서 5~6m쯤 떨어져 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봉분을 파헤쳐 부장품을 훔쳐가는 도굴꾼은 국내에 몇 명 남아있지 않다"며 "현장에서 검거하지 않을 경우 추적해서 잡기가 쉽지 않아 이번 사건도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정지섭 기자 xanadu@chosun.com

김동현 기자 hellopik@chosun.com 조선닷컴 2009.10.14 06:24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4/2009101400001.html

 

2009 - 일 방위백서, 또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일본 정부는 17일 발표한 2009년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방위백서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북방 영토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영토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2005년 이후 표현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대해 주일 한국대사관은 국방무관을 방위성에 보내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분명히 하면서 방위백서의 독도관련 기술에 항의했다. 방위백서는 또 중국이 해양권익 획득과 해상수송로 확보 등을 위해 해군과 공군 전력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군사력 증강에 우려를 표명했다. 백서는 중국 군사력에 대해 지난 3월 중-일 두나라 국방장관 회담에서 량광례 중국 국방부장이 “항공모함을 영원히 갖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고 발언한 점을 소개하며, 항공모함을 보유하기 위한 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백서는 북한에 대해서는 지난 4월 발사한 장거리탄도미사일이 5월 2차 핵실험 강행과 더불어 중대한 위협이 된다면서 “비교적 단기간내에 핵무기의 소형화와 탄두화를 실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권력구조의 변화로 체제가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도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한겨레 2009-07-17 오후 09:32:1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366471.html

 

2009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호텔 폭탄 테러

자카르타 호텔 2곳 폭탄테러…9명 숨져 ,,한국인 도신우 모델협회장 포함 50여명 다쳐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고급 호텔들에서 17일 폭탄이 터져 9명이 숨지고 50명 이상이 다쳤다. 한국인 1명이 다치는 등 사상자 상당수가 외국인이었다. 이날 오전 아침식사 손님으로 붐비던 메리어트 호텔 식당 아래 지하에서 폭탄이 터졌다고 <시엔엔>(CNN)이 전했다. 몇분 뒤 약 50m 떨어진 리츠칼튼 호텔 식당에서도 폭탄이 터졌다.

사망자 가운데 1명은 뉴질랜드인으로 확인됐고, 부상자 중 17명은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미국 등 외국인이라고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는 밝혔다. 한국인 부상자는 문화행사를 위해 리츠 칼튼 호텔에 투숙했던 도신우(50) 모델협회장으로 확인됐다. 도 회장은 <연합뉴스>에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 음식을 가지러 가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나면서 쓰러졌다”며 “종아리와 발꿈치 등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말했다. 도 회장은 “리츠칼튼 호텔은 한국인이 많이 투숙하는 곳이지만 (저를 제외하고는) 아직 피해를 당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츠칼튼 호텔 18층에선 터지지 않은 폭발물이 발견됐으며, 범인은 투숙객으로 위장해 이 곳에 머물렀다고 경찰 관계자는 밝혔다. 경찰은 자살폭탄 공격인지도 조사중이다.

인구 기준 세계 최대 무슬림국가인 인도네시아 정부는 최근 몇년 동안 강력한 반테러 정책을 펴왔으나, 4년 만에 일어난 이번 테러 공격으로 타격을 입게 됐다. 아직 이번 공격을 저질렀다고 나선 단체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동남아 일대에서 활동하는 이슬람주의 무장단체 제마 이슬라미야(JI)를 지목한다고 <에이피>(AP) 통신이 보도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이날 “제마 이슬라미야가 연루됐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이번 사건은 테러조직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자카르타 메리어트 호텔은 2003년 12월에도 폭탄공격을 받아 12명이 숨졌던 곳이다. 당시 사건은 제마 이슬라미야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한겨레 2009-07-17 오후 09:06:45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366467.html

 

2009 - '뉴스의 전설' 크롱카이트 92세로 별세

전설적인 TV 뉴스 진행자인 월터 크롱카이트가 별세했습니다.
미국 CBS방송은 오늘 월터 크롱카이트가 뉴욕 자택에서 향년 92살로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린다 메이슨 CBS 부사장은 크롱카이트가 현지시간으로 오늘 오후 7시 42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말했습니다.지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CBS 방송의 간판 뉴스 앵커였던 크롱카이트는 신뢰감 있는 뉴스 진행으로 미국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YTN 2009-07-18 10:50

http://www.ytn.co.kr/_ln/0104_200907181050304160

17일 92세로 사망한 미국의 TV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가 1969년 CBS 뉴스를 진행할 당시의 모습. 

 

2009 -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별세

전설적인 미국의 뉴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Cronkite)가 92세로 사망했다. 그가 몸담았던 미국 CBS 방송국의 부사장 린다 메이슨은 “크롱카이트가 뉴욕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7일 오후 7시42분(현지시각)에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그는 오랜 동안 뇌졸중과 투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크롱카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신뢰 받는 사람’이란 별명으로 통할 정도로 시청자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앵커였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CBS 이브닝 뉴스’를 진행하며 케네디 대통령 암살, 달 착륙, 베트남전쟁 등 미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주요 사건들을 보도했다. 1968년에는 종군기자로 직접 베트남에 다녀온 후 “미국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최초로 보도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월터는 TV 앵커 이상이었다”며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확실했던 사람”이라고 했다.미국 ABC뉴스의 사장 데이비드 웨스틴은 크롱카이트를 “방송 저널리즘의 표본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당파성 없이 현장을 있는 그대로 용기 있게 보도했다”고 ABC는 전했다.뉴스 앵커로서의 표본으로서 크롱카이트의

명성은 전세계에 미쳤다. CBS에 따르면 오늘날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는 앵커를 ‘크롱카이터’라고 부를 정도다.
박승혁 기자
patrick@chosun.com 조선닷컴 2009.07.18 12:01

 

2009 - 전설적인 앵커 크롱카이트 별세

미국 TV 뉴스의 ‘전설’ 월터 크롱카이트가 별세했다. 향년 92세.

CBS는 크롱카이트가 17일 뉴욕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린다 메이슨 CBS 부사장은 크롱카이트가 이날 오후 7시42분(현지시각)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크롱카이트는 수년간 뇌혈관 질환을 앓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CBS 간판 앵커였던 크롱카이트는 객관적인 뉴스 진행으로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16년 미주리에서 태어난 크롱카이트는 고등학생 때부터 학보사 편집자로 활약했으며,

텍사스대학을 중퇴한 뒤 여러 언론사를 거쳐 UPI 통신의 전신인 UP 통신 기자로 2차 세계대전 전쟁터를 누볐다.

1950년 기자로 CBS에 입사한 크롱카이트는 1962년 CBS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CBS 이브닝 뉴스’의 마이크를 잡았다.

크롱카이트는 미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스캔들, 베트남 전쟁, 아폴로호 달 착륙, 이란 인질 사태 등 미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국민에게 전달했다. 미국인들은 매일 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가 진행하는 이브닝 뉴스는 1969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최고의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앵커맨’으로 처음 불렸던 것도 크롱카이트였다.

특히 1968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수렁에 빠졌다는 그의 지적은 베트남전 여론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3년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을 전한 것도 그였다. 크롱카이트는 당시 방영 중이던 드라마 중간에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긴급 속보로 전했다. 1977년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관계의 획기적인 돌파구가 됐던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 중재를 도왔다. 미국의 우주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던 크롱카이트는 1998년 케이프커내버럴 케네디우주센터에서 CNN 방송을 통해 36년만에 우주 비행에 다시 나섰던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존 글렌의 우주 비행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올 1월에는 미국 우주.로켓 센터 50주년을 기념해 연설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이뤄지지 못했다. 1969년 아폴로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순간을 전했던 크롱카이트는 이후 한 인터뷰에서 달 착륙 순간이 앵커로서 유일하게 말문이 막혔던 때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1981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피바디상 등 주요 언론상을 수상했다.

숀 맥머너스 CBS 사장은 성명을 통해 “월터 크롱카이트 없는 CBS 뉴스와 저널리즘, 미국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역사상 가장 신뢰받는 앵커, 최고의 앵커에 그치지 않고 그는 위기와 비극, 승리, 위대한 순간에 미국을 이끌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날 성명을 통해 “미국이 ‘아이콘’을 잃었다”면서 “크롱카이트는 수십년간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목소리였다”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풍부한 바리톤 목소리는 매일밤 수백만 미국 가정의 거실에 전달됐으며 그는 (앵커의) 기준을

세웠다”고 말했다. CBS 이브닝 뉴스 진행자인 케이티 쿠릭은 크롱카이트는 “고결함과 품위, 인간다움의 대명사”라면서

 “그는 시청자들과 정말로 통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뉴욕 AP 워싱턴 AFP 연합뉴스 서울신문 2009-07-18

http://www.kdaily.com/news/newsView.php?id=20090718800025&spage=11

 

2009 - 국민 사랑 받았던 ‘뉴스의 전설’ 월터 크롱카이트 전 CBS 앵커 별세

20년간 베트남전·케네디 암살 등 국민편에서 보도
최초의 ‘앵커맨’ 칭호…‘신뢰 받는 뉴스’와 동의어
‘뉴스의 전설’이 떠났다.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로 불리던 TV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가 지난 17일(현지시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AP통신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크롱카이트의 비서인 말린 애들러는 크롱카이트가 이날 뉴욕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면서 사인은 뇌혈관 질환이라고 밝혔다. 크롱카이트의 아들 칩은 사인에 대해 “노인성 치매로 인한 합병증”이라고 설명했다.1962년부터 81년까지 CBS TV 간판 뉴스인 ‘이브닝뉴스’를 진행한 크롱카이트는 미국 TV 뉴스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부터 최초의 달 착륙, 워터게이트 사건, 베트남 전쟁, 이란 인질 사태에 이르기까지 미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신뢰받는 뉴스’와 동의어가 되었다. 미국인들은 저녁이 되면 ‘월터 아저씨’를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앉았다. 이브닝뉴스가 방송되는 시간은 ‘월터 타임’으로 불렸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크롱카이트는 “국민적 (신뢰를 받는) 기관이자 제도”였다. “내 역할은 뉴스 전달자이지, 논평가나 분석가가 아니다”라며 가능한 한 개인적 판단을 자제했지만, 일단 그가 판단을 내리면 영향력은 엄청났다. 68년 베트남에 다녀온 그는 특집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평화협상을 해야 합니다.” 방송을 본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내가 크롱카이트를 잃었다면, 보통 미국인들을 잃어버린 것”이라며 탄식했다. 이후 베트남전에 대한 여론은 조속한 종전을 요구하는 쪽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신중하고 차분한 진행으로 명성이 높은크롱카이트에게도 평정을 잃은 때는 있었다. 케네디 암살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때다.
63년 11월22일 케네디가 암살된 날, 그는 방영 중이던 드라마 중간에 케네디의 죽음을 긴급 속보로 전했다. 검은 테 안경을 벗고 눈물을 삼키는 모습은 수백만 미국인의 슬픔을 대변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닿는 순간엔 감격과 놀라움으로 “오, 보이(Oh, boy)!”만 외쳤다. 후일 크롱카이트는 한 인터뷰에서 “달 착륙 순간이 앵커로서 유일하게 말문이 막혔던 때”라고 술회했다. 그는 역사적인 달 착륙이 40주년을 맞기 사흘 전 세상을 떴다.
크롱카이트는 ‘뉴스의 닻(anchor)’이란 의미의 ‘앵커맨’으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한 최초의 스타 뉴스 진행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스타라는 사실을 내키지 않아 했다.

인터뷰 중인 정치인보다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듭된 정계진출 제안에는 더욱

당혹스러워했다. 스스로를 한 사람의 취재기자로 여겼고, 시청자를 향해서도 그런 자세로 임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시청자들은 크롱카이트가 제네바 정상회의에서 논평하는 모습보다 화재 취재를 위해

자동차에 뛰어오르는 모습을 더 쉽게 상상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주리주에서 태어난 크롱카이트는 텍사스대학을 중퇴한 뒤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UPI통신의 전신인 UP통신 기자로 2차 세계대전을 취재했고, CBS로 옮긴 뒤 52년 민주·공화당의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 보도를 주도하면서 스타 저널리스트로 부상했다.미국은 크롱카이트의 별세 소식에 슬픔에 잠겼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크롱카이트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확신을 주는 목소리였다”면서 “이 나라는 ‘아이콘’과 친애하는 벗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CBS의 원로 뉴스앵커 밥 시퍼(72)는 “월터는 우리 (앵커) 모두의 전범이었다”고 말했다.
크롱카이트의 장례식은 오는 23일 뉴욕 맨해튼의 세인트 바르톨로뮤 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별도의 공개적인 추모행사가 몇 주 안에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릴 것이라고 AP가 보도했다. 크롱카이트의 시신은 먼저 세상을 뜬 부인이 누워 있는 미주리주의 묘지에 나란히 묻힐 것으로 알려졌다.김민아기자 makim@kyunghyang.com 경향닷컴 2009-07-19-18:03:20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7191803205&code=970201

   

2008 - 독일서 100만분의 1 확률 ‘흑백 쌍둥이’ 태어나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흑백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독일 dpa 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베를린 리히텐베르크 구역의 오스카-치텐 병원에서 지난 11일 제왕절개 수술로 피부 색깔이 다른 쌍둥이 남자 아이가 태어났으나 병원 측은 부모가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이를 숨겨오다가 이날 언론에 공개했다고 전했다.

병원 측은 이들 아기는 이란성 쌍둥이며 틀림 없는 형제로 같은 아버지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피부색이 다른 쌍둥이가 나올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덧붙였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베를린 출신의 백인 남성이고 어머니는 가나에서 온 흑인 여성으로 전해졌다.

이 병원 산부인과 과장인 브리기트 베버는 "첫 번째 아기가 나올 때까지는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것이 없었으나 두 번째 아이가 나올 때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지난 20년간 약 1만명의 아기를 받아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베를린=연합뉴스) 한겨레 2008-07-17 오후 09:13:55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299443.html

 

2005 - 이은정(한영외고 3), US여자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챔피언십 우승

2009 - 여고생 이은정 US아마골프 정상 ,,한국국적 선수론 처음

무명 이은정(17·한영외고3)이 미국여자아마추어골프무대를 평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은정은 17일(한국시각)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스웝메모리얼골프장(파71·6047야드)에서 36홀 매치플레이로 펼쳐진 2005 유에스여자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 챔피언십 결승에서 사상 최초의 연장 접전 끝에 대학 2년생 티파니 추디(19·미국)를 극적인 역전승으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1988년 펄 신, 2003년 미셸 위 등 한국계 미국 골퍼들이 우승한 적이 있으나 한국 국적 선수가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은정은 후반 5번홀까지 5홀 차이로 뒤졌으나, 후반 6~9번홀에서 3개의 버디로 순식간에 2홀차로 따라붙었다. 기세가 오른 이은정은 후반 16번홀에서 4m짜리 퍼트를 성공시켜 1홀차로 추격했고, 추디가 마지막 홀에서 1.2m짜리 쉬운 퍼트를 놓치며 연장으로 들어갔다. 이은정은 연장 첫번째 홀에서 파세이브에 성공하며 추디를 누르고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도 포천 동남중학교 1학년 때 처음 골프를 시작한 이은정은 지난 4월 제7회 제주도지사배 주니어대회에서 8위에 올랐던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을 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중고골프연맹에서 정하는

주니어랭킹 여고부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은정은 ‘제이미 리’라는 미국 이름으로 미국 전지훈련에 충실해

국제주니어골프 투어 15~19살 여자부 2004~2005년 순위에 8위에 올랐을 만큼 미국에서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길우 기자 nihao@hani.co.kr 한겨레 2005-07-17 오후 07:17:47

http://www.hani.co.kr/arti/sports/golf/50655.html

 

2005 -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과 두 아들, 제주 모슬포~마라도 횡단

2005 - 조오련 3부자, 제주도∼마라도 역영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씨와 두 아들이 17일 국토 남녘인 제주도 모슬포∼마라도 12㎞의 거친 해역을 헤엄쳐 건넜다.

조오련(53)씨와 아들 성웅(24), 성모(20)씨는 이날 오전 8시20분께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 앞바다에

나란히 뛰어든지 4시간40분만인 오후 1시께 목적지인 마라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난 1980년 한국인 최초로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던 조오련씨가 내달 `울릉도-독도 횡단'에 함께 나서는 두 아들에게 바다수영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실시한 모슬포∼마라도 종단 훈련은 의외의 역풍으로 당초 예상했던 주파시간을 1시간40분 넘긴 끝에 마무리됐다. 아버지 조씨는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빠지는 조류를 타고 마라도에 도달할 계획이었으나 맞바람을 타고 표층수가 조류와는 반대로 앞으로 다가와 어려움을 겪었다"며 "오늘 훈련이 울등도∼독도 횡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최근 해군 UDT를 전역한 맏아들 성웅씨는 "마라도 해역에서의 수영이 힘들었던 만큼 내달 실전에 더욱 자신감이 생긴다"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조씨 가족은 제주에서 1주일간 더 훈련한뒤 오는 23일 울릉도로 떠날 예정이다.

조오련 3부자의 모슬포∼마라도 횡단 훈련은 스포츠 전문채널 MBC ESPN의 광복 60주년 특집 14부작 다큐멘터리 `조오련 3부자의 독도 아리랑' 중 제5부 `마음 속에는 고래가 산다'로 제작, 방송된다.  

(제주=연합뉴스) 한겨레 2005-07-17 오후 04:37:5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603.html

 

2005 -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최용선 선생 숙환으로 별세

2005 - 애국지사 최용신 선생 별세

항일애국지사 최용선 선생이 17일 저녁 8시 3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1.

선생은 전남 영광 출생으로 1943년 10월 일제에 강제 징집당해 중국 산시(산서)성 안읍지구 주둔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돼 있던 중 1944년 11월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 뒤 선생은 45년 4월 중국 중칭(중경)에 도착해 토교대에 입대한 뒤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돼 특수임무를 수행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는 그의 항일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명신씨와 운성, 봉균 등 두 아들이 있다. 빈소는 전북 정읍 장례예식장, 발인 19일 오전 7시, 장지는 정읍시 시기동 산 34-3번지 선영이다. 011-676-8777.한겨레 2005-07-18 오후 08:01:07 =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50973.html

 

2005 -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오픈골프대회 우승

2003 - 이두로 쓴 최고의 백제 시가(詩歌) 발견  “이두로 쓴 最古 백제詩歌 있다” 

백제에는 ‘백제식 이두(吏讀)’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의 인근에서 발견된 ‘숙세(宿世)…’명 목간의 내용이 이두(吏讀)로 표현된 가장 오래된 백제시가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지난 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도 한국식 어순과 한문이 혼재돼 있다는 학설도 나왔다.
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는 17일 “‘숙세결업동생일처시비상문상배백래(宿世結業同生一處是非相問上拜白來)’ 목간은 AD 6세기~7세기 초에 백제인이 이두로 쓴 최고(最古)의 백제시가”라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이같은 내용의 논문을 오는 24일부터 일본 도야마에서 열리는 ‘한·일 한자수용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김교수는 이 목간의 내용을 ‘전생에서 맺은 인연으로 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 시비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 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라고 풀었다. 그는 “▲4언4구(四言四句)의 일정한 형식을 갖추었고 ▲공식문서가 아닌 정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불교의 연기론을 바탕으로 한 신라향가 초기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점을 꼽았다. 또 맨 마지막 글인 ‘백래(白來)’와 같은 백제식 표현이 보인다는 것. 여기서 ‘백래’는 상대방을 공경할 때 쓰이는 ‘사뢰러 온다’는 뜻. 김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백제시가는 15세기 이후 문헌(악학궤범)에 기록된 ‘정읍사’”라고 밝혔다. 그는 또 무령왕의 지석 내용 중 아직까지 해독되지 않은 제7행 제1자(字)는 백제인들의 생사관과 관련된 상징인 ‘인(印)’이며 왕은 생사를 초월하여 극락왕생할 수 있는 보증인(保證印)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또 무령왕의 지석 내용 가운데 ‘年 六十二 歲’ 구절은 ‘연(나이·보통명사)+육십이(수관형사)+세(단위명사)’로 한국어의 수사구와 그 구조가 같다고 보았다.
이밖에 지석의 마지막 부분인 ‘立志如左’도 백제식 한문표현대로 ‘이와 같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된다는 것. 결국 무령왕릉 지석은 “영동대장군 백제 시마왕은 나이 육십이세로 계묘년 오월 병술삭 칠일 붕하였다. 을사년 팔월 계유삭 십이월 갑신에 이르러 관을 올린 큰 무덤에 안치하니 대묘를 세운 뜻이 이러하다”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게시판-함께 하는 역사 교실 2003-07-18 08:40:19 

http://yuksa.new21.org/zboard/view.php?id=hisbo&page=9&s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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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no=143&PHPSESSID=3c332ac2e11c5637c40baed1f486aa69

 

“‘숙세가’는 현존 最古의 백제 시가”충남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목간 내용

백제 목간 원문과 해석문,,宿世結業(宿世의 結業으로) 전생에서 맺은 인연으로

同生一處(同生一處하니) 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

是非相問(是非를 相問하여) 시비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

上拜白來(上拜하고 白來하져) 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

지난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숙세(宿世)...’ 목간(木簡)의 내용이 현전 최고(最古)의 백제 시가(詩歌)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련 학계에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김영욱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교수는 지난 17일 “능산리사지에서

나온 길이 12.7cm 길이의 판목에 붓으로 쓴 ‘숙세결업동생일처시비상문상배백래(宿世結業同生一處是非相問上拜白來)’ 목간은 백제 패망이전인 7세기 중엽 백제인이 이두로 쓴 가장 오래된 백제시가”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가 숙세가(宿世歌)를 백제시가라고 밝히는 이유는 4가지. 필사된 문장이 사언사구(四言四句)라는 운문 형식을 갖추고 있고, 한국어 어순과 한문이 혼재한 백제 고유의 문체이며, 정서적인 표현과 불교적인 내세관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오는 24일 일본 도야마에서 열리는 ‘한일 한자수용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할 ‘백제 이두를 대하여’라는 논문에서도

밝힐 예정이다.

서울시립대 김영욱 교수, “7세기 중엽 추정”

국문학계, “한국문학사 다시 쓸 만한 작품” 부여박물관측, “조사단계… 단정짓기 일러”

이에 대해 서울대 국문학과 이종묵 교수 등 관련 국문학자들은 “한국문학사를 다시 쓸 작품을 발견했다”고 호평하고 “백제노래 정읍사(井邑詞)나 가야의 구지가(龜旨歌), 고구려의 황조가(黃鳥歌) 등도 이후 시대의 문헌에서 밝혔지 숙세가처럼 삼국시대 당시의 모습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며 문학사적 의미를 대변했다. 이번에 발견된 숙세가는 지난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23점의 목간중의 하나로 이미 불교의 연기사상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져 교계의 관심을 모았던 유물이다. 〈관련기사 1826호〉 김 교수는 “숙세가를 통해 백제인의 화해정신과 깊은 신앙심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공무도하가에서 느낄 수 있는 세속적인 인연의 애절함과는 달리, 숙세가에서는 세속에서 벗어난 듯한 초탈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목간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서오선)측은 “현전 유일의 백제시가라는 것은 박물관 조사결과 아직 확실치 않아 답할 수 없고, 현재 보존처리에 이어 발굴보고서를 작성중에 있다”고 말해 학계와

문화계에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배재수 기자 dongin21@ibulgyo.com

“백제인 특유의 너스레 매력적”

“숙세가(宿世歌)는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 시가 중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내용면에서도 어디에 빠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최근 가장 오래된 백제시가를 발견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서울시립대 국문과 김영욱(42)교수의 첫마디는 숙세가 예찬이었다. 지난해 10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열린 ‘백제의 문자’특별전에서 백제 목간인 숙세가(宿世歌)를 접하고 연구를 시작했다는 김 교수는 역사학자가 아닌 ‘국어사’를 전공한 국문학자였다. “백제인의 마음을 담은 소박한 가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서민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찌그러지고 울퉁불퉁한 판목 위에 새겨진 정겨운 글씨가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그래서일까. 숙세가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지만 한편으론 문학적인 부드러움이 담겨있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우리 함께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세속의 시비쯤이야 가려서 무엇 하겠소’ 라고 말하는 듯한 넉넉함을 발견했다.”고 말했다.배재수 기자 = 불교신문 2003-07-19 오전 2:20:48

http://ibulgyo.com/archive/24706/200608071154994717.asp

 

2002 - 정부, `외국 인력제도 개선대책` 발표,

친척방문 입국 40세이상 중국동포 서비스업 2년간 취업허용

 

2002 - 스위스 유엔가입 공식신청

200년 동안 중립국을 표방해온 스위스가 17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유엔 회원국 가입을 공식 요청했다.
교황청과 함께 유엔 옵서버 지위를 갖고 있는 스위스는 이날 뉴욕 소재 유엔본부에서 회원국 가입을 요청하는 내용의 카스파 빌리거 스위스 대통령의 서한을 아난 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 스위스는 3월 유엔 가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과반수가 찬성해 가입절차를 밟아 왔다.스위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상임이사국 5개국을 포함해 최소한 9개국의 승인을 얻고, 9월 유엔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게 되면 회원국이 되는데 무난히 가입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스위스에 앞서 5월 독립국이 된 동티모르도 유엔 가입을 신청, 안보리에서 승인을 받았으며 9월 유엔총회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인구 700만 명의 스위스가 동티모르와 함께 가입할 경우, 총회에서의 표결 상정순위에 따라 190번째

혹은 19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된다.유엔본부AP연합 - 동아닷컴 2002-07-18 18:44:00

http://news.donga.com/Inter/EU/3/0218/20020718/7843854/1

 

[스위스의 유엔가입]

2002.09.10 - 스위스 영세중립국 지위 포기하고 유엔가입

2002.07.17 - 스위스 유엔가입 공식신청



2002.03.03 - 유엔가입 국민투표 실시, 승인

1986.00.00 - 유엔가입 국민투표 실시, 부결

1982.03.22 - 스위스 유엔가입 발의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

 

2001 -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지 회장 별세

미국의 권위지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이 2001년 7월 17일 타계했다. `미국을 바꾼 부드러운 힘`. 그를 압축한 표현이다. 그는 미국의 언론을 바꿨고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와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그레이엄 여사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강인한 언론인의 사명의식과 추진력으로 미국의 부패한 정치를 바꿨고, 언론사 대주주는 어떠해야 하는지의 진정한 역할모델을 창출했다.1971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다룬 국방부 기밀문서(펜타곤 페이퍼) 폭로나 1974년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는 그레이엄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이엄 여사는 언론기업의 신경영전략을 선보인 뛰어난 언론경영인이기도 했다. `신문이 생존하고 나서야 공익도 있다`는 고인의 경영철학은 디지털 다매체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언론사가 추구해야 할 경영가치를 잘 제시해주고 있다. 경영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언론의 독립도 보장되는 것이고, 기자의 신명난 취재활동으로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레이엄 여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1963년 매출액이 8400만달러에 불과한 일개 지방지였다. 그러나 30년 후인 1993년 그레이엄 여사가 아들 도널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는 매출액이 14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워싱턴포스트 외에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다수의 지상파 TV방송사와 케이블TV 그리고 인터넷방송사까지 끊임없는 사업다각화를 했다.

포스트 역사처럼 그레이엄 개인사도 드라마였다. 1933년 뉴욕의 금융재벌이던 아버지 유진 마이어는 지방신문 워싱턴 포스트를 경매를 통해 82만5천달러에 사들였다. 시카고대 졸업 후 포스트 기자로 일하던 그레이엄은 신문사에서 변호사였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을 만났다. 1945년 아버지는 사위에게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주면서 신문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남편은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했다. 그레이엄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나는 남편과 신문사를 모두 잃을 뻔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1963년 8월 우울증을 앓던 남편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신문경영을 맡은 46세의 그레이엄은 포스트와 독립언론의 성장에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걸었다. 1997년 그녀는 자신과 워싱턴 포스트, 그리고 자신이 교류했던 유명인사의 얘기를 담은

자서전 `개인사`를 펴냈고 이 책으로 그녀는 다음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1999 - 영화 `용가리` 개봉,,화제작 "용가리" 성공여부 의심

숱한 화제와 루머속에 개봉되는 「용가리」(17일 개봉)는 심형래 감독의 이전 영화들보다는 한단계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 영화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심형래 감독의 야심에는 회의를 품게한다. 14일 시사회를 통해 완성판이 공개된 「용가리」는 칸영화제에서 외국인들이 데모필름을 보고 「킥킥」거렸다는 얘기가 결코 루머가 아님을 드러냈다.
배우들의 연기, 드라마, 특수효과등 대부분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일단 주연으로 기용된 외국배우들의 어설픈 모습이 쓴웃음을 짓게한다.헤리슨 영, 리차드 B.리빙스톤등 조연급 할리우드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토막」같다. 1백억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면서 좀 더 괜잖은 배우들을 기용하든지___. 눈에 거슬리게 아쉬운 부분이다.
드라마나 특수효과 또한 헛점이 많다. 휴즈박사, 캠벨박사등은 우랄산맥에서 용가리 화석을 발견한다.
2년후 캠벨박사를 중심으로 화석발굴이 진행되고 사라졌던 휴즈박사가 나타나 용가리가 부활,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순간 외계 우주선이 거대한 빛을 내뿜고 용가리가 부활한다.
이런 도입부는 개연성도 있고 특수효과도 그럴듯하다. 문제는 불을 내뿜는 용가리와 미국 군대간의 싸움이 시작되는 부분부터다.하늘을 날아다니는 특수부대는 「인간 로켓티어」를, 절단된 다리위를 건너뛰는 버스는 「스피드」를 연상시키는등 곳곳에서 할리우드 흥행영화의 주요장면을 패러디한 흔적을 감추지 못했다.
특수효과 역시 용가리가 불을 내뿜는 장면등 몇몇 부분에서는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지만 대체적으로 합성한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특히 용가리와 인간이 같이 등장하는 장면의 경우 융화되지 못하고 따로 논다. 전투장면도 성냥갑같은 빌딩들이 무너져내리고 군대와 용가리가 대치하는 장면의 반복이다.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들이 하나같이 빗나간다든지, 머리부분의 다이아몬스에 공격을 받은 용가리가 갑가지 온순해지더니 또 다른 외계괴물에 대항, 지구를 지킨다는 설정은 결정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트렸다.
심형래 감독은 테크놀러지적으로 완성도를 높이는게 제작비나 기술면에서 한계가 있다면 드라마쪽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SF영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무게중심은 테크놀러지쪽보다는 무한한 상상력쪽에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SF영화에 대한 심형래 감독의 집념은 평가받을만 하지만 「세계정복」따위의 「공약」은 아꼈어야 했다.
관객들의 수준을 감안, 최소한 할리우드 B급 영화를 능가하는 실력과 기술을 갖춘 뒤에 「공약」을 내놔둬 충분하다.
金淳基기자·islandkim@kyeongin.com /경인일보 1999.07.16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3946#

 

1998 - 파푸아뉴기니 해일(1998)
1998년 오늘,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파푸아뉴기니에 높이 10m의 거대한 해일이 닥쳤다.
이 해일로 수도 포트모르즈비에서 북쪽으로 8백km 떨어진 웨스트 세피크주(州) 아이타페항이 쑥대밭이 됐다.
마을 7개가 폐허로 주저앉고 주민 6천여 명이 집을 잃었다.
3천 명 이상이 이 해일로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다.
이번 해일은 이 나라 인근 태평양 해저에서 일어난 규모 7.0의 강진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원로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

 

1997 -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 별세

온몸에 퍼진 암세포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화가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90여점을 다른 환자들이 힘을 얻어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써달라며 병원에 내놓았다. 기증자는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이다. 자신이 입원한 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노년의

작품을 아무 조건없이 기증한 원로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이 1997년 7월 17일 끝내 별세했다.

평북 영변 태생으로 만주 신경미술학교 출신인 한 화백은 1950년대 말 우리나라 현대미술문화운동의 중요한 이벤트가 된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을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70년대 초 스웨덴 의사의 권유로 스웨덴으로 이주해서는 붓글씨

쓰는 모필로 서양화를 그리는 독특한 작업방식으로 그곳 화단에서도 잘 알려졌다. 지난 1988년 귀국, 제주도와 용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국내 서양화단의 가장 원로그룹을 형성하며 작품판매보단 제작에만 몰두해왔다.

 

1997 -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위버 사망   

뉴욕주 칼버튼에 모아놓은 TWA800 여객기 잔해들.

 

1996 - 미국 TWA 여객기 공중폭발(1996)
승객과 승무원 등 228명을 태우고 뉴욕 케네디공항을 출발한 미국 TWA항공사 소속 보잉 747여객기가 1996년 오늘 롱아일랜드

남동쪽 대서양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이 여객기는 산산조각이 나면서 대서양으로 떨어졌다.
이륙한 지 10여 분 만에 일어난 이 사고로 탑승자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튿날 회교무장단체의 단원이라고 밝힌 한 남자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TWA기 폭발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 연방수사국 FBI는 수사에 착수한 지 16개월 만에 TWA기 폭발이 테러와는 무관하다고 공식발표한다.
사고 여객기의 파편과 승객 소지품을 정밀조사했지만 폭탄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TWA기의 폭발은 기체결함에 의한 것으로 추정됐다.

 

1996 - TWA 보잉747 여객기 공중폭발, 2백28명 몰사

승객 2백10명과 승무원 18명 등 2백28명을 태운 미국 TWA 항공사 소속 보잉 747 여객기가 1996년 7월 17일 오후 8시40분쯤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직후 대서양 상공에서 공중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인 TWA 800편은 오후 8시15분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지 25분만에 뉴욕주 롱아일랜드 남동쪽 24km 상공에서 폭발, 불길에 휩싸인 채 산산조각이 나면서 해상으로 추락했다.생존자 구조작업에 나선 해안경비대는 헬리콥터와 보트 40여척, 잠수부 등을 동원해 밤새 구조작업에 나서 불에 심하게

그을린 1백여구의 사체를 인양했다. 사체들은 모두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돼 폭발과 침몰이 아무런 경고없이 순식간에 일어났음을 보여줬다. 사고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길이 28.2m, 높이 8.1m인 사고 여객기를 복원했지만 사고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미궁에 빠졌다.TWA는 1946년 뉴욕∼파리 노선에 처음 취항하는 역사적 기록을 가진 미국의 중견 항공사로 `

사고율은 낮은 항공사`로 인식돼왔으나 이번 사고로 물거품이 됐다.  

 

1994 - 미국에서 열렸던 제 15회 FIFA 월드컵 대회가 브라질의 통산 4번째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들과 목성의 충돌 장면. 

 

1994 - 세기의 우주쇼,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들과 목성 충돌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이 1994년 7월 17일 목성과 충돌하면서 1천년 만에 한번 보는 우주쇼를 연출했다. 한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혀줄 장대한 우주쇼가 17일부터 시작돼 7월 22일 오후 5시 마지막 21번째 파편(W핵)의 충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대충돌은 전세계 천문학자들에게 목성의 신비를 풀어줄 수년간의 연구거리를 제공했다.

슈메이커-레비 혜성은 원래 거대한 하나의 얼음덩어리였으나 2년 전 목성 주변을 지나는 도중 목성의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지름 1~3㎞ 크기의 21개 파편으로 조각이 났다. 이 가운데 10번째(J)와 13번째(M) 파편은 충돌 직전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진 핵이 증발하는 바람에 소멸됐으며, 17번째 Q파편은 다시 두개로 분리되기도 했다. 충돌이 6일 동안이나 계속된 것은 21개의 파편이 총길이 10만㎞ 정도로 일렬로 늘어서서 차례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핵 파편들은 초속 60㎞의 무서운 속도로 목성과 충돌하면서 거대한

불기둥을 뿜고 최후를 마쳤다. 

B2스텔스 폭격기. 

 

1989 - B2스텔스 폭격기 시험비행 성공

적의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설계된 미국의 B2스텔스 폭격기가 1989년 7월17일 오랫동안 지체해 왔던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개발에 8년의 시일과 2백30억달러의 경비가 소요된 B2스텔스 폭격기는 이날 두 조종사를 태우고 캘리포니아 사막의 팜데일에 있는 한 공군 활주로를 이륙한 뒤 하늘높이 상승하여 2시간의 비행 끝에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무사히 착륙했다. B2스텔스

폭격기는 제작비용이 대당 5억 3천만달러나 소요되어 의회에서도 제작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았았다.

 

1987 - 일본의 영화 배우, 가수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郞) 사망

이시하라 유지로 [石原裕次郞, 1934.12.28~1987.7.17]

이시하라 유지로는 1950년대 일본영화의 스타였다. 그는 <태양의 계절>(1956)이라는 영화로 데뷔했는데 이 영화는 당대의 문제작으로 꼽혔다.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미국적 삶을 지향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다. <태양의 계절>은 영화를 보고 열광한 ‘태양족’이라는 세대, 다시 말해서 퇴폐적인 분위기의 세대를 일본에서 만들어냈다. 이시하라 유지로가 당시의 인기여세를 몰아 출연했던 영화가 <미친 과실>이다. 나쓰히사는 마음대로 여성을 농락하며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의 동생 신지는 신체도 왜소하고 아직 여성에 대해 잘 모른다. 에리라는 여성을 만난 신지는 마음이 두근거린다. 파티에서 에리를 처음 만난 신지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느낀다. 한편, 나쓰히사는 동생의 마음을 알면서도 에리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친구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신지는 모터보트를 타고 나쓰히사와 에리의 뒤를 밟는다. <미친 과실> 역시 <태양의 계절>처럼 반항적인 흔적이 역력하다.

 형제는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갈등을 겪는다. 젊은이들은 수상스키를 타며 하루를 즐긴다. <미친 과실>은 나카히라 고 감독의 데뷔작. 현장성을 중시하는 즉흥적인 연출이 당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이후 영화는 프랑스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영화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게서 “영화의 단순성과 명료함”에 대해 호평을 얻기도 했다. 인물의 대화장면을 연속적인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는 등 나카히라 고 감독의 연출방식은 같은 시기 일본의 대중영화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다. (발췌)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17898

 

1986 - 권인숙씨성고문사건 조사 결과 발표

1986년 7월 17일 검찰은 권인숙씨성고문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 다니던 권인숙은 1986년 대학생 불법 취업으로 검거되었다가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에 대한 집요한 수사를 받았다. 당시 조사관 문귀동 경장은 별다른 정보를 얻어내지 못하자 여성으로서 지니는 성적 수치심을 이용해 신체와 정신에 고통을 주는 성고문을 했다. 이 사건이 물의를 일으키자 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권양의 가슴을 몇 번 건드린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며, 문귀동을 파면 징계하고 부천서장을 직위해제하는 것으로서 마무리지었다. 변호인단은 검찰발표에 불복해 재정신청을 냈고, 2년 뒤 문귀동에게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다.

성폭행당한 여성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회 통념과 싸워 이긴 권인숙은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해 손해배상금 4,000만 원을 받아 노동인권회관을 세웠다.

 

1986 - 대한민국의 가수 다나 출생

다나(1986년 7월 17일~, 본명: 홍성미, 일본 활동 이름: ダナ)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01년에 정규 1집 DANA로

솔로가수 데뷔해서 솔로활동을 하다가 2005년에 천상지희 The Grace로 다시 데뷔하여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4인조

여성 음악 그룹 천상지희 The Grace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재학하고 있다.

 

1985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오현택 출생

오현택(吳賢澤, 1985년 7월 17일 ~ )은 한국 프로 야구 두산 베어스의 투수이다. 우완 언더핸드이다.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2008년 신고선수로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주로 2군에서 활동하다가,

2009년 6월 2일에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다.

 

1985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정동 출생

이정동(李政東, 1985년 7월 17일 ~ )은 한국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투수이다. 우완 오버핸드이다.

충암고등학교에 다니던 이정동은 당시 타력에 비해 투수력이 열세였던 덕수정보고로 전학을 갔다.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으나, 3학년 때 팔꿈치 부상을 당하여 공을 거의 던지지를 못하였다. 부상때문에 프로 진출이 힘들 것으로 보였지만 롯데에 2차 5순위로 지명을 받게 된다.프로 입단 뒤 1군 무대에는 오르지 못하다가, 2006년 11월 27일 상무에 입대하여

이후 제대했다.

 

1983 - 남북이산가족재회 촉진대회

1980 - 볼리비아에 군사 쿠데타, 가르시아 집권

볼리비아에서 1980년 7월 17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좌파의 헤르난 실레스 수아조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취임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사령관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가 쿠데타를 감행했다.

수아조가 5억달러에 달하는 코카인무역에 군이 관여했는지를 조사하려고 하자 신분상의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의회를 폐쇄한 군사정권은 수천명의 사람을 투옥했고 반대파의 주요인물을 살해했다.카터대통령은 볼리비아에 대한 지원금 2억달러의 지불을 정지시켰고 신임 레이건 대통령도 볼리비아 지원을 중단했다. 재정파탄에 빠진 가르시아정권은 결국 붕괴돼 1982년 수아조가

다시 대통령에 복귀했다.

  

1980 - 일본 수상에 스즈키 젠코(영목선행) 피선   

1980 - 미국내 이상폭서로 1000여명 사망   

독재자 소모사 대통령의 동상 위에 올라가 해방을 기뻐하고 있는 니카라과 시민들.

 

1979 - 니카라과에 좌익정권 탄생, 소모사대통령 미국 망명

1979년 7월 17일 사임한 니카라과 소모사 대통령이 전용기 5대에 40명 이상의 가족을 태우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니카라과에서는 1934년 소모사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이래 장남과 차남인 소모사 등으로 이어온 소모사家 독재체제가 계속돼 왔다.

반대파는 모두 경찰에 의해 사라졌다. 1977년 10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신은 무력투쟁을 선언했다. 국내외로부터도 소모사

퇴진을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졌고 소모사는 이에 저항했다.

1979년에 들어서자 쿠바의 지원을 받는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은 6월 16일에 인근 코스타리카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소모사 망명한 후인 7월19일 혁명 축하행사가 거행돼 쿠바에 이은 2번째 사회주의정권이 중미에 탄생하게 됐다.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식

 

1976 -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1976)
1976년 오늘,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21회 하계 올림픽이 개막됐다.
세계 94개 나라의 선수 6천여 명이 참가했다.
72명의 한국 선수단은 참가국 가운데 22번째로 7만여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장한다.
그리스에서 온 성화를 남,녀 두 주 주자가 성화대에 점화함으로써 16일 동안의 올림픽 열전이 시작된다.
우리 나라는 권투, 유도, 사격, 남녀배구, 레슬링 등 5개 종목에 출전했다.
특히 양정모 선수는 레슬링 페더급에서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고 여자 배구팀도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인 동메달을 딴다.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19위를 기록한다. 우승은 소련이, 2위는 미국이 차지한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치밀한 운영이 돋보였지만 아프리카 지역의 26개 나라가 보이콧해 5륜이 아닌 4륜대회가 되고 말았다.

 

1976 -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

1976년 7월 17일 오후3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21회 올림픽 개막식이 거행됐다. 개막식은 오일쇼크로 인한 건축자재값의 폭등, 노동자의 파업, 공사지연 등으로 메인 스타디움이 미완성인 채 열렸다. 럭비팀을 남아공에 원정시킨 뉴질랜드의 경기참가에 항의하는 22개의 아프리카 국가가 경기를 보이콧해 참가는 94개국 선수 6941명이 출전했다.

대회 최대의 스타는 루마니아 여자체조 선수 코마네치였다. 그녀는 7번이나 10점 만점을 얻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수영 13개 종목중 12종목에서 우승해 수영강국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경기는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 동독이 40개로 2위, 미국은 34개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양정모 선수(레슬링)가 우리나라 올림픽 출전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해 전국민을 기쁘게 했다. 

 

1975 -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미국아폴로 우주선과 소련의

소유스 우주선이 우주 공간에서 도킹에 성공하다.

1975 - 아폴로 18호와 소유즈 19호의 도킹 = 1975 - 미-소 우주선 도킹(1975)
1975년 오늘!
포르투갈 서쪽 대서양 9백97km 상공 지구궤도에서 미국 우주선 아폴로 18호와 소련 우주선 소유즈 19호가

도킹에 성공한다. 사상 최초의 국제적인 우주선 도킹이다. 포드 미국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우주에서 만난 두 나라 비행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역사적인 도킹을 축하했다. 두 우주선의 비행사들은 네 번에 걸쳐 환승작업과 공동 우주실험을 했다. 소유즈는 7월 21일 소련에 착륙하고, 아폴로는 7월 24일 하와이 근처에 안전하게 귀환한다.  

미국 아폴로의 스태포드 비행사(오른쪽)와 소련 소유즈의 레오노프 선장.  

 

1975 - 아폴로-소유즈 도킹 성공

미국의 아폴로 18호와 소련의 소유즈 19호가 1975년 7월 17일 대서양 상공에서 도킹에 성공했다. 아폴로에는 토마스 스태포드선장과 2명의 비행사, 소유즈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 선장과 2명의 비행사가 타고 있었다.

도킹 3시간후 아폴로의 패치가 열리자 스태포드 선장을 포함한 2명의 비행사가 기내를 유영하면서 소유즈에 옮겨탔다. 사상최초로 양국의 비행사가 우주에서 악수를 교환한 것은 암스테르담 상공에서였다.

이틀간 6인의 승무원들은 우주선 사이를 왕래하며 식사를 함께하고 과학적인 실험에 협력했다. 이 도킹은 양국이 우주사고가 일어날 경우 서로 구조활동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72년 5월 미소정상회담에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우주개발경쟁의 데탕트라고도 한다.  

 

1975 - 아폴로-소유스호 도킹

[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아폴로-소유스호 도킹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1975년 7월 17일 포르투갈 서쪽 대서양의 997km 상공. 미국 유인우주선 아폴로 18호의 해치가 열리면서 토머스 스탠퍼드 선장과 2명의 우주비행사가 유영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서히 빨려 들어가듯 옛 소련 우주선 소유스 19호 내부로 옮겨 탔다. 소유스 19호에선 알렉세이 레이노프 선장과 2명의 비행사가 이들을 반겼다.
사상 최초로 이뤄진 미국과 소련 유인 우주선의 도킹. 우주탐험사에 길이 남는 역사적인 도킹 성공이었다.
도킹은 우주 공간에서 2대 이상의 우주선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도킹은 2대의 우주선이 같은 궤도에 들어가 근접한 상태에서 함께 비행하는 랑데부에 이어 진행된다. 이전에도 도킹이 있었으나 미국과 소련의 유인 우주선의 도킹은 처음이었다.미국과 소련의 우주비행사들은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초면이 아니라 다시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주선 도킹을 위해 함께 훈련받던 기억을 되살리며 악수를 했다.
도킹이 성공하자 당시 미국과 소련의 정상들은 전화를 걸어 이들을 축하했다. 미국 포드 대통령은 소련의 우주비행사 레이노프에게 “우주에서 미국 우주비행사들과 재회한 느낌은 어떤가”라고 묻기도 했다.
양국의 우주비행사들은 이틀간 함께 생활했다. 서로의 우주선을 왕래하면서 식사도 함께 하고 각종 과학 실험 및 우주 조사도 함께 했다. 두 우주선은 7월 19일 도킹을 풀고 헤어졌다. 소유스 19호는 7월 21일, 아폴로 18호는 7월 24일 각각 미국과 소련으로 돌아갔다.우주 라이벌 국가인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 도킹은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이 도킹 프로젝트가 처음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무렵. 당시 우주 탐험 경쟁을 벌이던 미국과 소련은 우주에서 자칫 우주선 사고가 발생할 경우, 상호 구조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필요성에 공감한 양국은 1972년 5월 도킹의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여기엔 상대국의 우주선 기술을 엿보고 싶은 의도도 숨어 있었다.
양국의 전략적 의도가 어찌됐든 도킹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유인 우주 비행 때 도킹과 랑데부에 대한 소중한 경험을 했고 이후 우주선 도킹 시스템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8-07-17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717/8603778/1

 

1974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디지 딘(Dean, Dizzy) 사망  



[Dean, Jay Hanna "Dizzy", 1910(1911).1.16~1974.7.17]

1973 - 아프가니스탄에 쿠데타 왕정 폐지

 

1973 - 대한민국의 가수 정재용 출생

1973년 7월 17일 강원도 속초 에서 태어냈다. 1995년 DJ Doc 2집 [머피의 법칙]으로 데뷔하였다. 2008년 MBC

방송 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1997년에 4집 Doc와 함께 춤을 내었으나 삐걱삐걱으로 방송중단을 당했다 또 1998년 5집 The life.... Doc bluse 를 내었으나 L.I.E. , 포조리 , 알쏭달쏭 에 욕설과 경찰 비판으로 방송 중단을 당하고 음반 판매 중지 되었다. 또 2010년 1월에 술집 여종업원에 시비를 걸고 폭행을 한 사건으로 지금은 방송

활동 중단중이다.

 

1972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야프 스탐 출생

야콥 "야프" 스탐 (네덜란드어:Jakob Stam, 1972년7월 17일, 네덜란드캄펜 ~) 은 은퇴한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이다.

그의 별칭은 De rots van Kampen (캄펜의 바위) 로, 그는 1999년 UEFA 챔피언스리그2000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으로, 최고의 수비수에 뽑혔다.

 

1970 - 대한민국의 탤런트, 연극배우 장현성 출생

장현성(張鉉誠, 1970년 7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69 - 3선개헌 반대 투위(鬪委) 발기   

1969 - 여의도 국회의사당 기공  

달 착륙선 이글

 

1969 -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 발사

아폴로 11호가 1969년 7월 17일 미국 케이프 케네디 우주기지에서 발사됐다. 높이 110미터의 사탄 5형 로켓은 3000톤의 추력을 받아 점점 속도를 붙여 하늘로 날아갔다. 3분 정도 경과 후 1단이 떨어졌고 2단이 점화되었다. 다시 2단이 떨어지고 3단이 점화, 이렇게 달까지의 거리 38만 4천km를 나아갔다. 최고속도는 시속 약 3만9천km였다.

비행사 3명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암스트롱이 알드린보다 먼저 달에 첫 발을 내딛고, 그 사이 콜린스는 달의 주위를 선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착륙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예정대로 달 착륙선 이글은 암스트롱과 알드린을 태워 모선 콜롬비아를 떠났고, 콜린스는 달 주위를 110km 높이에서 계속 돌았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글은 마침내 7월 21일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다. 이어 착륙선의 해치가 열렸다.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후 109시간 10분 35초가 소요됐다.

평소 과묵했던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의 표면을 밟으며 말했다. " 이 순간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도약이다."라고...  

 

1969 - 프랑스계 대한민국 방송인 이다도시 출생

이다 도시(프랑스어:Ida Daussy, 한국명: 서혜나, 1969년7월 17일(1969-07-17) (40) ~ )는

대한민국프랑스계 한국인으로서 방송인, 작가이자 연사이다.

약력

프랑스 노르망디 태생으로, 1992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학생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아 〈EBS 프랑스어 회화〉에 보조강사로 출연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93년 한국인 남성과 화촉을 밝혔다. 현재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이후 방송활동 등을 통하여 인지도를 높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인이 되었으며, 빠르고 수다스러운 말솜씨로 인해 울랄라 등의 유행어를 낳기도 하였다. 방송 외에 주부강연 및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 차이에 대한 책을 쓰는 등 저술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96년에는 한국에 귀화하여 프랑스계 한국인이 됐다.

 

1967 - 미국의 재즈색소폰 연주자, 작곡가 존 콜트레인(Coltrane, John) 사망  

콜트레인 [Coltrane, John, 1926.9.23~1967.7.17]

 

1961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투수코치 윤석환 출생

윤석환 (尹錫煥, 1961년 7월 17일 ~ )은 전 한국 프로 야구 OB 베어스의 투수이자,

2009년 현재 두산 베어스의 1군 투수 코치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사고 발생 다음날, 부산공설운동장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유류품(遺留品)을 청소하고 있다. 

 

1959 - 부산 공설운동장서 참사, 시민위안의 밤 진행중 폭우로 출구에서 67명 사망 150명 부상

부산에서 시민위안잔치에 참석한 관중 3만여명이 소나기를 피하려고 좁은 출입구로 쏟아져 나오다

67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59년 7월 17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부산시민위안회에는

가난과 실직에 찌든 3만여명의 부산시민들이 여름 오후 구경거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오후 8시경 영화배우팀과 만화가팀 간의 야구시합에 뒤이은 시민위안공연이 한창일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당황한 군중들이 하나 뿐인 출입문으로 몰려들면서 앞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뒤에서

그대로 짓밟아 순식간에 남녀 67명이 목숨을 잃고 24명이 크게 다쳤다. 정부에서는 시체1구당 매장비 등으로

3천환씩 지급했을 뿐 아무런 보상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1959 - 미국의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Holiday, Billie) 사망

할리데이 [Holiday, Billie, 1915.4.7~1959.7.17] 

미국 흑인 여가수 빌리 할리데

 

1959 - 美 재즈 가수 빌리 할리데이 사망

재즈 역사상 최고의 가수로 일컬어지는 미국 흑인 여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마약 중독으로 뉴욕 재활원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던 중 1959년 7월 17일 숨을 거뒀다. 향년 44세였다. 마약중독으로 건강을 해쳐온 빌리는 5월 31일 수면상태에 빠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빌리는 1915년 메릴랜드주(州)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초기에는 술집 가수로 활동했지만, 선천적인 작은 목소리를 특유의 감성적인 집중력을 사용하여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녀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특한 발성, 드라마틱한 창법,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인해 그 시대의 보컬리스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이윽고 가창력을 인정받아 `베니 굿맨`과 함께 작업,

1930년대 후반에는 `카운트 베이시`등과 함께 공연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1939년에서 1945년에 걸쳐 `Fine And Mellow`, `God Bless The Child`, `Lover Man` 그리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Strange Fruit`등 여러 곡의 히트를 기록했다.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삶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0년대에 들어 3번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등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941년 결혼 후 마약에 중독됐고 1947년에는 마약 소지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해야했다. 1948년 3월 막 출소하고 나서 가진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콘서트가 대성공을 거두지만 1956년 마약 혐의로 다시 체포된 후 재활 치료를 받다 이날 생을 마감했다.  

 

1958 - 홍콩 영화 감독 왕가위 출생

왕가위(王家衛, 간체: 王家卫, Wong Kar-Wai,1958年7月17日-)는 홍콩의 영화감독이다. 홍콩전영금상장

최우수감독상과 깐느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검은 선글라스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1955 - 제1회 학ㆍ예술상 시상   

세계 최초의 테마 파크 미국 `디즈니랜드`. 

 

1955 - 월트 디즈니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를 개장하다.

1955 - 디즈니랜드 개원

창조력이 넘치는 세계 최초의 테마 파크 `디즈니랜드`가 1955년 7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개원했다.

이 `마법의 왕국`은 중앙에 19세기 미국의 거리를 재현해 이 곳을 통해 여러 상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로 구분되어 이는 상상의 나라는 방문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물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모험과 미래를 안겨주고, 어른들에게는 지난 날의 향수와 동심의 세계를 선사해 온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고 있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1983년에는 동경에 1992년에는 파리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져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1955 - [오늘의 역사]미국 디즈니랜드 개장

1955년 오늘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 디즈니랜드가 처음 문을 열었다.

개장 이후 총 입장자 수는 2억 명을 넘어섰으며 연간 입장자가 1000만 명을 넘고 그 중 70%가 어른이다.

중앙에 19세기 미국의 거리를 재현해 이 곳을 통해 여러 상상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디즈니랜드는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로 구분돼 방문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린이에겐 꿈과 모험, 미래를 선물하고 어른들에겐 지난날의 향수와 동심을 안겨주는 역할을 수행해 온 디즈니랜드는 오늘날까지도 대표적 명소로 꼽히고 있다.1983년엔 동경에, 1992년엔 파리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져 맥도널드 햄버거와 코카콜라 등 미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충청투데이 2009.07.16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651 

 

1955 - 디즈니랜드 개장

[어제의 오늘]1955년 디즈니랜드 개장ㆍ꿈과 행복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

“이 세계(미국)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다”고 2007년 세상을 뜬 장 보르리야르는 말했다. 1955년 오늘 언론에 처음 공개된 디즈니랜드는 프랑스의 예민한 철학자가 보기에 미국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이날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를 방문한 내빈과 기자들에게 월트 디즈니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의 땅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디즈니랜드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곳에서 어른은 사랑스러운 옛 추억을 되새기고, 아이는 미래의 도전과 약속을 즐길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는 이상, 꿈, 미국을 세운 진실을 위해 바쳐질 것입니다. 이곳이 온세상에 기쁨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근사한 연설이었지만 개장날은 엉망진창이었다. 위조 티켓을 가지고 입장한 사람들 때문에 적정 수용인원을 넘어섰다. 섭씨 38도가 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배관공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식수대에선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이힐을 신은 여성은 아스팔트에 굽이 박히는 수난을 당했다. 당일 아침 급하게 마무리 공사를 한 나머지 아스팔트가 덜 굳었기 때문이다. 탑승인원을 초과한 보트가 전복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후 디즈니랜드 경영진은 이날을 ‘검은 일요일’이라 불렀다.개장 초반, 디즈니랜드는 다섯 구역으로 나뉘었다. 20세기 초반 미국을 재현한 미합중국 메인 스트리트, 정글의 모험을 형상화한 어드벤처 랜드, 서부 개척 시대를 묘사한 프론티어 랜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한 판타지 랜드, 미래 세계를 상상한 투모로 랜드 등이었다.
개장날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디즈니랜드는 많은 미국인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 디즈니랜드의 성공에 고무된 디즈니는 65년 플로리다에 디즈니 월드를 짓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 눈을 감았다. 83년엔 도쿄, 92년엔 파리에서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고, 현재까지는 2005년 개장한 홍콩 디즈니랜드가 가장 최신이다. 한때 디즈니랜드는 한국 진출을 모색했고, 서울시가 유치에 나섰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각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잊을 만하면 디즈니랜드와 유사한 테마 파크 유치전 소식이 들리니, 디즈니랜드의 영향력은 여전한 모양이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닷컴 2009-07-16 17:46: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61746075&code=100100&s_code=ap005

 

1954 - 학술원-예술원 개원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50주년



"2004년은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이 개원한 지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은 지난 1954년 7월 17일에 학술 발전과 예술 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학자 및 예술가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연구 및 창작 활동과 국내·외 교류를 지원함으로써 우리나라 학술과 예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우리나라 학문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고 탁월한 연구 업적을 이룩한 150인의 학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학술원은 그 동안 학술 진흥에 관한 정책자문 및 건의, 학술세미나·정책토론회 및 국제학술대회 개최, 대한민국학술원상의 수여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학술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우리나라의 학계를 대표하여 국제학술기구 가입 및 각국 학술기관과의 활발한 교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우리나라 학문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공헌해 왔다.

또한 대한민국예술원은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대표 기관으로, 일생 동안 탁월한 예술 창작 활동을 펼쳐 온 예술인 100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원 이후 예술 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 및 건의, 예술 창작 활동의 지원, 국·내외 예술가의 교류 및 예술 행사 개최,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여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이 지난 50년 간 학문과 예술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이루어 낸 업적을 기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우표 2종을 발행한다."

 

1952 -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1948 - 대한민국의 헌법이 공포되다.  
1948년 오늘 오전 10시, 이승만 제헌의회 의장이 대한민국 헌법을 공포했다.
닷새 전인 7월 12일 제정한 것을 조선왕조 건국일인 7월 17에 맞춰 공포한 것이다.
대통령책임제와 국회 단원제를 주요 내용으로 한 제헌 헌법은 일본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모방해 3권 분립을 규정하고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정부는 헌법정신을 해마다 되살리고 헌법이 공포된 날을 기리기 위해 7월 17일을

국경일인 제헌절로 정했다. 해마다 제헌절에는 헌법수호를 다짐하는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관공서와 가정에서

국기를 게양해 이 날의 뜻을 되새겨 왔다.  

7월17일 헌법을 공포하기 전 이승만 국회의장이 헌법에 서명ㆍ날인하고 있다.

 

1948 - 대한민국 헌법 공포

1948년은 `대한민국호(號)`를 진수(進水)시키기 위해 전 국민이 숨가쁘게 질주했던 한 해였다. 5월10일 총선으로 198명의 제헌의원을 탄생시켰고, 5월31일에는 최고령자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한 역사적인 제헌의회가 개원을 맞았다. 첫 본회의는 188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이승만을 정식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3권분립의 한 축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이제 대한민국의 밑그림이 될 헌법을 제정할 차례다. 누군들 경험이 있었을까, 당연히 시행착오가 따랐다. 국회 내에 발족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유진오 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들이 내놓은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와 양원제였다.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던 이승만은 분노를 드러내며 압력을 가했다. 내각책임제를 강행할 경우 자신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것. 당시 이승만의 위치는 김구가 현실정치에서 한 발 빠져있는 상태에서 유일한 절대 강자였다.6월22일 한민당이 이승만에게 먼저 굴복했다.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수정안을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 것이다. 이래서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이 돌았다. 수정안을 놓고 12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는 이미 이승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7월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헌법이 가결됐고, 17일에는 이승만 의장이 국회의사당에서 헌법에 서명

날인하고 이를 내외에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그리고 사흘 뒤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승만에게 실질적인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1948 - [오늘의 역사]대한민국 헌법 공포

1948년 오늘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다.

헌법이 공포되기 전 국회 내에 발족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책임제와 양원제를 헌법 초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던 이승만은 내각책임제를 강행할 경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며 압박을 가했다.

이에 6월 22일 한민당이 이승만에게 굴복하고 내각책임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꾼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수정안을 놓고 12차례에 걸친 토론이 펼쳐졌지만 이미 대세는 이승만 쪽으로 기울어진 후였다.

7월 12일 만장일치로 헌법이 가결됐고 17일에는 이승만 의장이 헌법에 서명·날인,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법적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사흘 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충청투데이 2009.07.16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650

 

1948 - 대한민국 헌법 공포

1948년 건국헌법 공포
통상 우리 헌정사는 1948년 건국헌법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로부터 3년 동안의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에야 비로소 우리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여 5월 31일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개회되었다.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곧바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6월 3일부터 유진오의 헌법 초안을 원안으로,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토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당국이 대통령제를 주장함에 따라 대통령제 (임기 4년, 1회 중임 가능)와 단원제국회 및 국무총리제를 채택한 건국헌법이 완성되어 7월 17일 공포되었다.세계 헌법재판소장 회의

http://www.ccourt.go.kr/home/20symposium_kor/0402.html  

 

1947 - 영국의 찰스 왕세자의 배우자 카밀라 왕세자비 출생 /위키백과 

1947 - 영국의 찰스 왕세자의 비()카밀라(Camilla, duchess of cornwall) 출생




카밀라 [Camilla, duchess of cornwall, 1947.7.17~ ]

 

1947 - 스웨덴의 외교관, 실업가 발렌베리(Wallenberg, Raoul) 행방불명  

발렌베리 [Wallenberg, Raoul, 1912.8.4~ 1947.7.17(?)] 

[오늘의 경제소사/1월17일] <1297> 라울 발렌베리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 스웨덴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다. 나치의 학살에서 그가 직간접적으로 구해낸 유대인은 약 10만여명. 오스카 쉰들러의 구출명단에 오른 1,200여명보다 훨씬 많다.
그는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레베리가의 일원. 1912년 태어나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은행업에 종사하던 중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감시할 중립국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직업을 바꾸고 부다페스트를 찾았다. 스웨덴 정부 명의의 건물 23개동 매입, 여권발행 등으로 직접 구출한 유대인이 3만3,000여명. 독일군 사령관에게 ‘전범으로 고발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아 7만여명의 가스실행도 막았다. 독일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나 스웨덴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해 대놓고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위기는 소련군 진주 뒤 일어났다. 1945년 1월17일 행방불명. 납치 의혹을 받던 소련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1957년에야 ‘라울은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 1947년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발표했으나 진상은 확실치 않다. 1980년대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라울을 봤다는 사람부터 처형설까지 여전히 분분하다.
라울의 죽음은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그 고귀한 삶은 ‘발렌베리 그룹’의 명성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발레베리 가문은 세금회피를 위해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는 다른 재벌과 달리 끝까지 스웨덴에 남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국민기업. 해군장교 복무와 자력에 의한 해외유학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경영 승계권을 인정 받지 못하는 가풍도 유명하다.
핏줄로 이어지는 경영권이 국민의 존경과 사랑 속에 6대째 승계되는 비결에는 희생과 솔선수범, 라울로 대표되는 숭고한 인간애가 깔려 있다. 부럽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01/16 17:49:27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01/e2009011617492297490.htm

   

포츠담회담 중의 3국 수뇌들. 왼쪽부터 영국 애틀리 수상, 트루먼 미국

대통령, 소련 연합국 대표 스탈린.

 

1945 - 처칠, 스탈린, 트루먼이 모여 포츠담 회담을 하다.

1945 - 미국-영국-소련 수뇌 포츠담회담 개최


1945년 7월 1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연합국의 세 대표가 독일 포츠담에서 회의를 열었다.

세 사람은 8월 2일까지 유럽의 전후처리문제, 대일방침 등을 협의했다.

회담은 당초 동구에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염려하는 처칠의 주도로 진행됐지만 회의 중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노동당에 대패하는 바람에 24일, 영국 대표가 노동당 당수인 애틀리로 바뀌었다.

회담은 폴란드-독일 간의 국경확정을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했다. 또 프랑스를 포함 4국이 독일을 분할점령하기로 확정했다. 대일전후처리는 1.일본군국주의의 영구추방 2.군대의 완전무장해제 3.전쟁범죄인의 처벌 등을 협의했다.


 

1945 - 포츠담 회담 개최

1945년 7월 17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들 간에 열린 이 회담에서는 패전국 독일의 분할 통치, 폴란드 서부 국경 결정, 오스트리아 점령, 동유럽에서의 러시아 역할, 배상금, 일본과의 전쟁 등이 논의되었다. 이 결과 동프로이센 지역이 폴란드로 귀속되었고 발칸 반도에서 소련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대신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개입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곧 항복했다.

 

1920 - 스페인 출신 전 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출생

1920 - 스페인 외교관, IOC위원장 사마란치(Samaranch, Juan Antonio) 출생   

사마란치 [Samaranch, Juan Antonio, 1920.7.17~2010.4.21]

 


1918 -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Nikolai II) 가족 처형
니콜라이 2세 [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5.18~1918.7.16/17]

알렉산드라 [Aleksandra Fyodorovna, 1872.6.6~1918.7.16/17]

올가 [Olga Nikolayevna Romanova, 1895.11.15~1918.7.16/17]

타티아나 [Tatiyana Nikolayevna Romanova, 1897.6.10~1918.7.16/17]

마리아 [Maria Nikolayevna Romanova, 1899.6.26~1918.7.16/17]

아나스타샤 [Anastasia Nikolayevna Romanova, 1901.6.18~1918.7.16/17]

알렉세이 [Aleksei Nikolayevich Romanov, 1904.8.12~1918.7.16/17]

 

1918 -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 처형

[어제의 오늘]1918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 처형

ㆍ‘2월 혁명’으로 비참한 최후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무너졌다. 300여년간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황후와 네 딸, 그리고 모계유전으로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어린 황태자와 함께 우랄 지방 예카테린부르크의 2층 저택에 감금됐다.1918년 7월17일 새벽 황제 가족과 주치의, 하인 등 11명은 지하실로 끌려갔다. 총소리가 시작됐고 황제가 그리고 황후가 쓰러졌다. 황태자 알렉세이도 총상을 입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보석이 박힌 드레스 탓에 첫 총격에서 치명상을 입지 않았던 공주들은 대검에 찔리거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았다. 처형실로 변해버린 지하실에는 탄환 연기가 가득했다.2년이 흐른 뒤, 한 여자가 베를린 운하에 뛰어내렸다 구조됐다. 그녀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뒤,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넷째 황녀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다. 언니들의 시체 밑에서 목숨을 건졌고 한 병사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연은 믿기 어려웠지만, 아나스타샤와 유사한 외모와 상처 자국 그리고 황실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비밀 이야기들이 그녀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안나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사교계에 나선 그녀는 세간에 널리 퍼져 있던 황실 가족 생존설 덕분에 금방 유명해졌다. 황실의 친척들도 판단이 엇갈렸다. 법정에서는 앤더슨이 러시아 황실과 무관하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녀는 68년 미국으로 이주해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비석에 새기고 84년 세상을 떠났다.
90년대 들어 논란은 재점화됐다. DNA 지문검사를 통해 79년 처형장소 부근 묘지에서 발견된 9구의 시신이 니콜라이 2세 일행으로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한 구의 시신은 마리야인지 아나스타샤인지 분명치 않았고 황태자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다시 안나 앤더슨에 대한 미련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녀 또한 DNA 검사에 꼬리를 밟혔다. 병원에 보관 중이던 앤더슨의 장 조직을 분석한 결과 그녀는 1920년 무렵 실종됐던 폴란드 여공으로 확인됐다. 2007년 2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굴되면서 아나스타샤는 처음 발견된 9구의 시신 중에 있었다는 사실도 추가로 밝혀졌다. 결국 살아남은 황녀는 없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16 17:36: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61736365&code=100100&s_code=ap005

 

1918 -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사망 /위키백과  

니콜라이 2세 [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5.18~1918.7.16/17]

 

1918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사망 /위키백과

알렉산드라 [Aleksandra Fyodorovna, 1872.6.6~1918.7.16/17]

 

1918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장녀, 여대공 올가 사망 /위키백과  

올가 [Olga Nikolayevna Romanova, 1895.11.15~1918.7.17]

 

1918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차녀, 여대공 타티아나 사망 /위키백과  

타티아나 [Tatiyana Nikolayevna Romanova, 1897.6.10~1918.7.16/17]

 

1918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셋째 딸, 여대공 마리아 사망 /위키백과

마리아 [Maria Nikolayevna Romanova, 1899.6.26~1918.7.16/17]

 

1918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막내 딸, 여대공 아나스타샤 사망 /위키백과  

아나스타샤 [Anastasia Nikolayevna Romanova, 1901.6.18~1918.7.16/17]

 

1918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장남, 황태자 알렉세이 사망 /위키백과

알렉세이 [Aleksei Nikolayevich Romanov, 1904.8.12~1918.7.16/17]

 

1917 -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기ㆍ예능보유자 명고수 김득수 출생

1917 - 한국의 판소리 명고수 김득수(金得洙) 출생

김득수 [金得洙, 1917.7.17~1990.5.21]

김득수는 소릿가락을 잘 아는 북잡이로 손꼽히는 판소리 명고수(名鼓手)이다. 7세에 진도명창 최두인에게서 (唱)을 배웠고, 10세에 명창 박동준에게 5년간 소리를 배웠다. 1936년에 서울로 올라와 국창(國唱) 송만갑에게 <흥보가>·<심청가>·<춘향가>를 배우고, 김세준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조선창극단에 입단했으나, 자신의 소리가 부족함을 느끼고 극단을 그만두었다. 중년에 이르러 목청이 상해 1960년부터는 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시립국악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북 솜씨는 널리 알려졌고,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鼓法)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이 소리를 알고 장단을 짚어 주므로 그의 북가락에는 절로 흥이 나고 소리하기가 편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소리판에서는 일청중이요, 이고수요, 삼명창이라."

 

- 김득수

 

1917 - 수리조합령 공포

1912 -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푸앵카레(Poincaré, Henri) 사망  

푸앵카레 [Poincaré, (Jules-)Henri, 1854.4.29~1912.7.17]

 

1903 - 미국의 외교관 빙엄 4세 (Bingham IV, Hiram) 출생

빙엄 4세 [Bingham IV, Hiram "Harry", 1903.7.17~1988.1.12]   

 

1903 - 미국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 사망

1903 - 미국 출신의 화가 휘슬러(Whistler, James McNeill) 사망  

휘슬러 [Whistler, James (Abbott) McNeill, 1834.7.14~1903.7.17]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 
 

1902 - 에어컨 발명

1902년 7월 17일 에어컨이 처음 발명됐다. 발명자는 `에어컨의 아버지`란 별칭으로 불리는 미국인 윌리스 캐리어(Carrier). 캐리어는 1902년 코넬대학 졸업 후 바로 뉴욕주(州)의 한 기계설비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직후인 7월, 주급 10달러의 그에게 뉴욕 브루클린의 한 출판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 여름의 무더위와 습기로 종이가 멋대로 수축·팽창하기 때문에 도무지 깨끗한 인쇄를 할 수 없다." 20대 초반의 캐리어는 너무도 쉽게 해법을 생각해냈다. 뜨거운 증기를 파이프로 순환시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이 가능하다면, 차가운 물을 이용한 냉방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사실 이 발상은 로마제국의 것이다. 로마에서는 높은 산의 눈을 궁정으로 가져와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9세기 들어서는 말라리아 환자들의 병실 천장에 얼음을 담은 그릇을 매달아놓고 부채 등을 이용해 바람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인공장치를 이용해 깨끗하고 습기없는 찬 공기를 내뿜토록 한 에어컨은 캐리어에 이르러서야 그 원형이 만들어졌다. 냉수가 순환하는 냉각코일에서 물을 압축·기화시켜 공기로부터 증발열을 빼앗아 온도를 낮춘 후 바람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출판사 인쇄공장에 처음 설치된 에어컨은 오랜 기간 수요가 없다가, 1920년대 초 뉴욕의 극장과 백화점들이 도입하면서 비로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 의회에는 1928년 에어컨이 설치됐다. 그러나 의원들 수준 때문에 "1년 내내 시원한 곳에 앉아 해악을 만들어낸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객기(유나이티드 에어라인·UA)에는 1936년, 자동차(팩커드·Packard)에는 1939년 처음 에어컨이 장착됐다. 백악관에는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환영 속에 1929년 입성했으나, 후임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한 번도 틀지 않았다. 에어컨이 대중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1955년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에 에어컨을 기본 사양으로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1902 - 美 캐리어, 에어컨 발명

[책갈피 속의 오늘]1902년 美캐리어, 에어컨 발명

만약 우리 생활에서 에어컨이 없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한여름 무더위로 숨이 턱턱 막히고 등줄기에 땀은 줄줄 흐르고…. 가뜩이나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 날씨에 에어컨마저 없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여름철 필수품이 된 에어컨은 1902년 7월 17일 미국 제철소 직원인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에 의해 탄생했다.
뉴욕 코넬대 전기공학 석사 출신으로 주급 10달러의 엔지니어로 취직한 그는 어느 날 한 출판사 직원의 하소연을 들었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습기 때문에 종이가 멋대로 수축 팽창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뜨거운 증기를 파이프로 순환시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이런 방식을 이용한 냉방도 할 수 있지 않을까.’난방시스템의 원리를 뒤집은 캐리어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에어컨의 탄생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 됐다. 액체에서 기체로 기화하면서 주위의 열을 빼앗는 액체 냉매를 코일에 채운 뒤 공기로 흘려보내 온도를 낮추는 시스템을 고안해 낸 것이다.로마시대의 권력자들이 높은 산 위에 있던 눈을 왕궁 안으로 가져오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여름을 시원하게 났다면 현대의 에어컨은 인공장치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 근대적인 방법인 셈이다.
캐리어는 1915년 캐리어엔지니어링사라는 에어컨 회사를 설립한 뒤 본격적으로 에어컨 판매에 나섰다. 에어컨은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5년 뉴욕 리볼리 극장 등 백화점과 극장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미 의회에는 1928년 설치됐지만 비판론자들은 “1년 내내 시원한 곳에 앉아 쓸데없는 법이나 만들어 낸다”고 꼬집기도 했다.에어컨은 냉매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대기 중에서 순환하며 지구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몰렸다. 하지만 높은 효용가치 때문에 인류 문명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국내에선 1960년대에 범양상선이 일본에서 수입해 첫선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LG전자가 지난해 6297만 대 규모의 세계 가정용 에어컨 시장에서 19%인 1200만 대를 팔아 7년 연속 판매 1위에 오르며 ‘에어컨 강국’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동아닷컴 2007-07-17 02:5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7/8467304/1

 

1899 -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캐그니(Cagney, James) 출생

캐그니(카그니) [Cagney, James Francis, 1899.7.17~1986.3.30]

 

1894 - 벨기에의 천문학자, 우주론자 르메트르(Lemaitre, Georges) 출생

르메트르 [Lemaitre, Abbe Georges, 1894.7.17~1966.6.20]

 

1889 - 미국의 추리 소설가 얼 스탠리 가드너(Gardner, Erle Stanley) 출생

가드너 [Gardner, Erle Stanley, 1889.7.17~1970.3.11]

 

1888 -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그논(Agnon, Samuel Yosef) 출생

아그논 [Agnon, Samuel Yosef, 1888.7.17~1970.2.17]

1876 - 소련의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 출생

 

1871 - 독일계 미국 화가 라이오넬 파이닝거(Feininger, Lyonel) 출생 



파이닝거 [Feininger, Lyonel, 1871.7.17~1956.1.13]

1868 - 일본 강호를 동경으로 개칭

 

1865 - 독립운동가 임예환 출생

1861 - 미국 남북전쟁: 쉐난도우 계곡의 남군 존스턴군, 보우리가드의 증원요청을 받고 북군의 페터슨을

견제할 1개 기병사단만 남겨놓은 채 전군이 매너서스로 기동 개시. 이 기동은 7월 21일에 완료됨

 

1846 - 일본 에도 막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출생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 덕천가무, 1846년7월 17일 ~ 1866년8월 29일)는 일본 에도 막부의 제14대 쇼군이다.

 

1815 - 나폴레옹영국에 항복하고 영국 군함 HMS 벨레로폰호를 타고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를 떠났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났다. 

백일천하(百日天下, 프랑스어:Cent-Jours)는 1815년, 나폴레 보나파르트엘바 섬에서 빠져나와 파리에서 도착한 1815년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복위된 7월 8일까지의 기간과 그 동안의 사건을 말한다. 이 기간은 또한 제7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알려져 있고, 이 기간에 워털루 전투나폴리 전쟁이 있었다. 백일천하(프랑스어:les Cent Jours)라는 문구는 파리의 경찰청장인 사브롤 백작이 왕을 맞이하는 연설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나폴레옹이 빈 회의 동안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돌아오기 7일전인 3월 13일 빈 회의의 참석국들은 나폴레옹을 반역자로 선언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후 4일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로이센으로 이루어진 제7차 대프랑스 동맹국은 150,000의 병력으로 나폴레옹을 압박했다. 이것은 나폴레옹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워털루 전투와 프랑스의 두 번째 왕정복고, 그리고,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섬의 유배로 이어졌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1821년 5월에 임종을 맞이하였다.

배경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의 여러나라가 1792년부터 프랑스에 대항하여 수번의 군사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왕정 전복과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유럽 여러나라의 지도자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타도하려는 서약을 맺는다. 하지만, 오히려 프랑스에 패배하여 혁명정부의 세력확장과 종속국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는 꼴이 되었다. 이런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은 그들의 뛰어난 사령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1799년 나폴레옹은 성공적인 쿠데타로 프랑스의 제1집정에 올라으며 5년뒤 황제에 즉위하였다.

초기의 혁명 정권과의 주변국의 마찰 만큼이나 나폴레옹 정권과도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새로운 군사동맹에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군대는 계속적으로 유럽을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정벌 실패 이후, 전쟁양상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 제6차 대프랑스 동맹동안, 동맹국의 군대는 프랑스 군대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격파하였다.그 승리후,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을 황제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파리로의 진격을 서약하였다. 1814년 2월의 마지막 주에 프로이센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이끄는 군대가 선봉으로 파리로 진격하였다. 나폴레옹의 두 육군 원수인 에두아르 모르티에와 오퀴스트 마르몽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단지 10,000명의 병력으로 블뤼허의 대부대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른 강에서 블뤼허가 책략에 걸려들길 바라면서 나폴레옹은 약 30,000의 부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서둘러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2월말에서 3월초까지 블뤼허 군대가 모르테이와 마르몽의 군대를 공격한 우르크 강에서의 전투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북으로의 후퇴 명령을 내렸다. 프로이센 군대는 물이 불은 엔 강을 건넜고, 3월 4일에 수아송에 도착하였다. 증원군이 도착하여 블뤼허의 부대는 100,000에 달했다.

3월 7일 슈멩데담을 따라 서쪽에서 나폴레옹이 블뤼허 부대를 공격해 크라온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블뤼허의 책략은 먹히지 않았고, 프로이센의 군대는 랑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랑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을 도와주기 위해 조아생 뮈라는 톨렌티노 전투를 야기시켰으나 뮈라 역시 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붙잡혀서 총살당했다.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한달 후,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고, 승리한 군사동맹국들은 빈 회의에서 유럽의 재편을 모색하고 있었다.

 

1797 - 프랑스의 화가 폴 들라로슈(Delaroche, Paul) 출생

들라로슈 [Delaroche, Paul, 1797.7.17~1856.11.4]

 

1790 -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사망 /위키백과   

1790 -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Smith, Adam) 사망

애덤 스미스 [Smith, Adam, 1723.6.5~1790.7.17] 

 

1763 - 미국의 모피 왕 애스터 출생

1762 -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표트르 3세 사망

표트르 3세(러시아어:Пётр III Фёдорович, 1728년2월 21일 - 1762년7월 17일)는 1762년부터 1762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로, 홀슈타인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이다. 독일식 이름은 카를 페터 울리히(독일어:Karl Peter Ulrich).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매우 친프로이센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한 지도자가 되었다.

 

1744 - 미국의 독립선언문 서명자, 부통령 엘브리지 게리(Gerry, Elbridge) 출생

게리 [Gerry, Elbridge Thomas, 1744.7.17~1814.11.23]




 

1729 - 프랑스의 해군 제독 쉬프랑 드 생 트로페 출생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랑 드 생 트로페(Pierre André de Suffren de Saint Tropez, 1729년 7월 17일 - 1788년 12월 8일) 프랑스의 제독이자 백작. 그는 14세기 루카(Lucca)에서 이주했다고 주장한 프로방스(Provence)의 귀족가문의

우두머리 생 트로페 후작의 3남으로 현재 프랑스의 주부슈뒤론 주(Bouches-du-Rhône)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근교 생카나(Saint-Cannat)의 집에서 태어났다. 쉬프랑의 가장 유명한 그의 전역(campaign)은 18세기 후반 인도양(Indian Ocean)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던 영국의 에드워드 휴스(Edward Hughes) 경 해군 중장과 해상 패권을

둘러싼 격렬한 전투를 우세한 방향으로 이끌어 영국 해군을 두려움에 떨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74 - 제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 승리

1566 - 스페인의 선교사, 역사가 라스 카사스(Las Casas, Bartolomé de) 선종 

라스 카사스 [Las Casas, Bartolomé de, 1474.8~1566.7.17]

스페인의 성직자, 역사가.세비야 출생. 도미니크파의 수도사. 콜럼버스의 친구 아들로서 1510년 주교가 되어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선교사로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산토도밍고 ·쿠바 ·멕시코 등지에서 인디오에게 전교하고, 그들을 위해 쿠마나(베네수엘라)에 이상적인 식민지를 건설해보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인디언 보호법을 제정하였고, 또한 식민자의 불법행위와 인도회사의 횡포 등을 평생에 걸쳐 고발하였으며, 이를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1567)라는 저서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디언을 혹사하는 식민 방법을 카를로스 5세에게 진언했다고 하여, ‘검은 전설’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1547년 귀국하여 《서인도의 역사》 등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저서를 썼다.

 

[유레카] 성경과 코란 - 함석진

1550년 에스파냐(스페인) 한 성당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주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였다. 결과에 따라 원주민 노예화의 정당성 여부가 갈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신학자 세풀베다는 날개 달린 뱀 모양을 한 아스테카 신 석상을 보여주며 “그들은 기괴한 우상을 숭배하는 야만스럽고 열등한 동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라스 카사스 수사가 맞섰다. “그들이 우리와 뭐가 다른가?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신이 수탈과 학살까지 허락한 것은 아니다.” 논쟁 며칠 만에 원주민들도 인간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엉뚱한 의견이 달렸다. 현지에서 필요한 노예는 동물에 더 가깝고 야만적인 존재들을 쓰라는 것이었다.(장클로드 카리에르, <바야돌리드 논쟁>) 수백년을 이어간 인류의 또다른 죄악, 아프리카 노예 공출의 시작이었다. 식민지 비극이 그친 것도 아니었다. 라스 카사스 수사는 중남미에 다녀온 뒤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2007년 번역서 출간)를 통해 양심선언을 한다. 가까이서 지켜본 식민지 기독교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인디오를 돼지처럼 순식간에 물어 찢어버리도록 개를 훈련시켰다. … 원주민이 우리를 한명 죽이면 원주민 백명을 죽여야 한다는 내부 규칙도 만들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믿음을 강요했고, 저항은 처절하게 응징했다. 그렇게 마야·아스테카·잉카 문명이 무너졌다. 이후 수백년 동안 복음과 총칼로 무장한 서구 문명의 탐욕 앞에 공존은 없었다. 미국에서 다시 성경이 시험을 받고 있다. 무엇이 테러를 불렀나 반성하는 기미는 없다. 코란은 박해받고 정치인들은 이스라엘, 석유, 눈앞에 닥친 선거를 놓고 계산기만 두드린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묻는다. “차라리 이 땅에 선교사가 오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보기에 좋지 않았겠나.”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한겨레  2010-09-13 오후 06:25:5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9563.html

 

1487 - 이란 사파비 왕조 창건 이스마일 1세 출생

[역사속의 인물] 이란 사파비 왕조 창건 이스마일 1세

1487년 오늘 아제르바이잔 아르다빌에서 태어난 이스마일 1세는 이란의 왕(샤)이며, 종교지도자이다. 800년 동안 이란을 통치한 최초의 통치 왕조 ‘사파비(위)’를 창건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스마일이 한 살 때 수니파와의 전투에서 죽었는데, 이후 다수파인 수니파들이 전가족을 몰살시킬 것을 두려워한 시아파 지지자들이 그의 가족을 수년 동안 숨어살게 했다.

그는 왕조를 창건한 뒤 이란 사람들을 이슬람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개종시켰다. 지방 정권을 붕괴시킨 뒤 국토를 통일했다. 시리아, 소아시아에서 함께 참여한 전사들을 모아 1500년 아르다빌까지 진출해 터키계 7부족을 복속시켰다. 1501년 바쿠를 함락하고, 이듬해 투르크멘족을 손아귀에 넣은 뒤 왕 자리에 올랐다. 전쟁을 통해 우즈베크족을 부쉈다. 시아파 성지인 케르벨라, 나자프 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511년 소아시아의 시아파교도 반란, 터키인의 시아파교도 학살 등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관계가 나빠졌다. 1514년 결국 아제르바이잔의 탈디란 싸움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셀림 1세에게 패해 타브리즈를 빼앗겼다. 그는 36세에 죽었지만, 사파비 왕조는 이어졌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7월 1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2071&yy=2009

 

1453 - 백년전쟁 종결

1453 -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종결

 

1392 - 공양왕 태조 이성계에게 선위 조선왕조 개창

1392 - 태조 이성계(李成桂) 즉위, 조선왕조 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