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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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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6-2

                     1)                                2)                                3)

 

1) 1557 -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사망 

클리브스의 앤 [Anne of Cleves, 1515.9.22~1557.7.16]

[Anne of Cleves]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4번째 아내.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게 된 것은, 그녀의 오빠이자 독일 서부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클레베스 공작 빌헬름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9년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결탁해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제임스는 이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위협은 헨리 8세의 측근 각료인 토머스 크롬웰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원수지간인 루터파와 잉글랜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결혼을 서둘러 주선하게 했다. 1540년 1월 1일 앤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잉글랜드 땅을 밟았고 5일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헨리 8세는 기대했던 것만큼 앤이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했다. 그는 곧 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데 울화가 치밀게 되었다. 가톨릭 국가들간의 동맹이 실현되지 못하자 이들의 결혼은 정치적인 골칫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성공회 주교회의는 이 결혼에 대해 무효

선언을 했다. 앤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하고 막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

그녀는 가끔 궁정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리치먼드와 블레칭글리에서 지냈다.

 

2) 1194 - 이탈리아의 대수녀원장, 클라라수녀회 창설자 클라라(Saint Clare of Assisi) 출생

클라라 [Saint Clare of Assisi, 1194.7.16~1253.8.11]

(이)Santa Chiara di Assisi. Clare는 Clara라고도 씀.

1255년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8월 11일.

대수녀원장, 가난한 클라라회 창설자.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프란체스코)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부모의 뜻을 따라 혼인하기를 거절하고 아시시 아래쪽에 있는 포르치운콜라 성당으로 도망했다(1212. 3. 18). 그곳에서 프란키스쿠스는 클라라의 서원을 받았으며, 그로써 성 프란키스쿠스의 2번째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클라라를 따랐고, 그중에는 클라라의 어머니와 동생 성 아그네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난한 클라라회'는 곧 아시시 근처에 있는 산다미아노 교회와 수녀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1216년 클라라는 그곳에서 대수녀원장이 되었다. 클라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추기경 우골리노(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수녀회에 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회칙 대신에 프란키스쿠스의 정신을 담은 회칙을 갖는 것이었다.

그녀가 죽기 이틀 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그녀가 작성한 명확한 회칙을 승인했다.

클라라회는 '완전한 가난의 특권'을 강조하여 수녀회 자체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한 것 외에도 사도적인 목표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클라라는 수녀회의 참회기도 생활이 교회와 사회에 영적인 생명력을 준다고 생각했다. 클라라 덕분에 2번이나 파멸을 모면한 것에 고마워하던 아시시 주민들과 교황들은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클라라가 아시시의 파멸을 막아준 첫번째 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무어인 동맹군들이 공격해왔을 때 클라라가 수녀원 사제에게 부탁해 식당 창문에 호스티아(영성체에 쓰이는 빵)를 높이 걸어놓게 해 성벽을 공격하던 군대가 후퇴했던 일이다. 2번째 예는, 아베르사의 비탈레 장군이 이끄는 더 큰 군대가 아시시를 포위했을 때 클라라와 수녀들이 아시시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 큰 폭풍이 일어나 침략군들을 쫓아버린 일이다. 클라라는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에 다른 기적들을 일으켰다고 한다. 1958년 교황 피우스 12세는 클라라가 죽기 전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아시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프란체스코 대성당에서 집전되고 있던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를 기적으로 듣고 본 일을 두고서

그녀를 텔레비전의 수호자로 공포했다.



 

3) 622 - 마호메트, 메디나 이주
622년 7월 16일 고향 메카의 금권 과두정치에 의해 박해를 받던 마호메트가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 사건은 아랍어로 '도주', '이주'라는 뜻의 히즈라로 불리며, 이 날짜는 이슬람의 히즈라력 원년(元年)이 되었다.

히즈라력의 기원을 622년 7월 16일로 정한 사람은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 1세였다. 메디나로 이주한 마호메트는 메디나 헌장을 체결하고 9개 부족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형성했다. 628년 마호메트는 메카의 대표들과 후다이비야

조약을 체결하며 시간적 여유를 얻은 뒤, 630년 1월 마침내 이슬람의 성지 카바가 있는 메카를 정복하고

거의 모든 주민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거처를 옮겼다. 이 날을 이슬람력에서는 히지라라고 부른다

헤지라(아랍어:هِجْرَة)는 무함마드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622년9월 20일의 일로서 메카를 출발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짜를 말한다. '헤지라'라 함은 본래 혈연·지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뒤에는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해서 메카에 있어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인식되어 뒤에 이슬람교 기원(紀元)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하로지룬). 이미 메디나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측으로서는 메카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코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1858 -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이자이(Ysaÿe, Eugène) 출생

이자이 [Ysaÿe, Eugène, 1858.7.16~1931.5.12]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당시 프랑스·벨기에 작곡가들의 현악 작품들을 훌륭히 해석해냈다. 베를린의 한 관현악단에서 1년간 지휘자 활동을 한 뒤 노르웨이·러시아·프랑스 등지를 순회공연했다. 1886~97년 브뤼셀 음악원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활동했고, 1894년 브뤼셀에서 새로운 음악들을 소개하는 일련의 관현악 연주회를 열었으며 같은 해 이자이 4중주단을 조직해 클로드 드뷔시로부터 현악4중주를 헌정받았다. 1918~22년 신시내티 (오하이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일했다. 기교적인 연주와 표현성, 강렬한 비브라토 등으로 유명했다. 초기 양식에 영향을 준 세자르 프랑크와 카미유 생 상스, 뱅상 댕디, 가브리엘 포레에게 영향을 받았다. 자작곡 중의 하나인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에는 새로운 화음 효과와 피치카토 주법이 사용되었다. 또한 8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광부 피터 Piér li Houïen〉(1931) 등을 작곡했다. 

 

1796 - 프랑스의 화가 코로(Corot, Camille) 출생

코로 [Corot, Camille, 1796.7.16~1875.2.22]

프랑스의 화가.

주로 풍경화로 유명하다. 인상주의 풍경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것을 예고했다고 볼 수도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선명한 색으로 두드러진 그의 유화 습작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에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초기

코로는 유복한 유산계급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스위스 태생의 어머니는 여성용 모자 가게를 경영했으며,

아버지는 포목 상인이면서 동시에 모자 가게의 경영을 도왔다. 그는 학교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으려고도 노력했지만 그것은 더욱 소질이 없었다. 마침내 25세 때 아버지로부터 겨우 허락을 받아내어 그가 늘

꿈꾸어오던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랑스의 모든 미술가들의 입문 시절과 마찬가지로 코로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신고전주의 풍경화가인 피에르 앙리 드 발랑시엔의 제자들인 아실 에트나

미샬롱과 장 빅토르 베르탱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약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코로는 처음부터 야외에서 그가 본 풍경을 스케치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선호했다.

1825년 가을 로마에 갔는데, 그곳에서 보낸 3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로마와 그 주변 캄파냐 지방의 풍경을 그렸으며, 나폴리와 이스키아를 여행한 뒤 베네치아를 거쳐 파리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아주 행복해했으며

1826년 8월에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생애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풍경을 그리는 것이네. 이 확고한 결심 때문에 나는 다른 어떤 일에도 심취하지 못할 것 같다네. 말하자면, 나는 결혼하지 못할 것이네." 그는 과연 독신으로 살았다. 여성과의 교제는 그의 생애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그는 전생애를 그림에 바쳤다.

프랑스로 돌아오자 코로는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 생활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봄·여름에는 항상 야외에서 지내면서 자연을 직접 보고 작은 유화 습작과 소묘를 그렸다. 그는 자기 미술의 기초를 이루는 색조의 연관성에 정통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색채의 선택보다는 밝고 어두운 색조들 사이의 균형과 변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파리에 있는 작업실로 가서 대작을 그리곤 했는데, 그는 매년 5월에 열리는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준비하는 것을 즐겼다.

초기의 주요작품인 〈나르니 다리 Le Pont de Narni〉는 그가 아직 이탈리아에 있을 때인 1827년에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1833년에 그는 퐁텐블로의 숲을 주제로 한 대형 풍경화를 전시하여 2등상을 받았고 이로 인해 코로는 심사위원단의 승인 없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1834년 5~10월에 2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볼테라·피렌체·피사·제노바·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호수 지방의 경치를 그렸다. 1843년 여름에 마지막으로 잠깐 동안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이미 2번째 시기에 작은 스케치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그것으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코로는 이렇게 이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빼놓고는 대단히 무사평온한 생활을 했다. 젊은시절 그는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스케치를 남겼다. 나이가 들자 차츰 여행이 뜸해졌다. 주목할 만한 여행으로는 1836년 아비뇽과 프랑스 남부지방, 1842년에 스위스를 여행한 것에 이어 1854년에는 네덜란드, 1862년에는 런던을 방문한 것을 손꼽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그가 좋아했던 지역은 퐁텐블로 숲과 브르타뉴, 노르망디 해안, 파리 근처 빌다브레에 있는

코로 가문의 소유지 등이며, 말년에는 친한 친구들이 살고 있던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와 두에를 자주 찾았다.

전생애에 걸쳐 코로는 때로 지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주는 풍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샤르트르 대성당(1830)이나 두에의 종탑(1871)과 같은 건물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꾸밈 없이 그린 작은 스케치와 살롱전을 위해 그린 마무리가 잘 된 대작으로 나누어진다. 19세기초에는 대체로 스케치가 공공 전시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그림을 사고자 하는 전문 수집가들이 매우 적었다. 완성된 풍경화들이 선호되었으며 특히 여기에 전설이나 문학, 성서에 나오는 영웅적인 인물형을 몇 명 첨가한다면 훨씬 더 품위 있고

무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코로는 〈황야의 하가르 Hagar in the Wilderness〉(1835년 살롱에 전시)·〈악타이온에 의해 놀란 디아나 Diana Surprised by Actaeon〉(1836년 살롱)·〈호메로스와 양치기들 Homer and the Shepherds〉(1845년 살롱)·〈올리브 동산의 예수 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1849년 살롱) 등의 제목을

단 작품들을 전시했다.

사실 그는 그러한 주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19세기 중반에 기호가 바뀜에 따라 그것에 대해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그는 풍경화에 예쁜 아가씨들을 그려 넣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양치기로 묘사하거나 때로는 연못에 작은 발을 담그고 있는 누드나 반나(半裸)의 목욕하는 여자로 묘사하곤 했다. 1860년대에 새로운 양식의 풍경화인 〈회상 Souvenirs〉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차분하고 우수에 찬 분위기를 자아낼 때 쓰는 기본 요소들을 활용했다. 그것은 대개 전체적으로 은빛 색조의 호수에 투명하게 비치는 나무들을 그려넣는 것이었다. 말년에는 수많은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 특히 그의 작업실에서 꽃이나 악기를 들고 있거나 이젤 위에 놓인 풍경화를 바라보면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젊은 여인들을 그렸다. 이러한 사적인 그림들은 거의 전시하지 않았다.

1830년대에 코로는 파리 살롱전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하여 그런대로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거의

팔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서 받는 돈으로 만족했다. 그뒤 1840년에 정부에서 그의 전시 작품들 중 하나인 〈어린 양치기 Le Petit Berger〉를 샀으며, 5년 뒤에는 시인 겸 미술평론가인 샤를 보들레르가 1845년의 살롱전에 관한 그의 평론에서 "코로는 현대적인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했다"고 썼다. 184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47년 그의 아버지가 죽자 화가가 되려는 그의 야망에 대한 식구들의 지원에서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성공의 시기

1850년대에 이르러 수집가들과 화상들이 그의 그림들을 열심히 수집하기 시작했고 코로는 그뒤로 물질적인 어려움은 겪지 않게 되었다. 그는 여러 살롱전에 계속 대작들을 출품했으며 거기에서 그것들은 고가에 팔렸다. 1855년의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그는 회화부문 1등상을 받았으며, 나폴레옹 3세도 그의 그림을 샀다. 1867년 레지옹 도뇌르의 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어 특히 미국의 개인 수집가들은 스케치에 가까운 코로의 작은 작품을 사기 시작했다. 그는 다작의 미술가이고 3,0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코로의 작품은 많이 모사되고 위조되었다. 20세기에는 코로에 대한 평가가 다시 바뀌어 부자연스럽게 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후기 작품들보다는 좀더 자연스러운 초기의 스케치들이 두드러지게 선호되었다. 살롱 전시용의 대형 그림들은 그 수준이 하찮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더이상 인기를 끌지는 못하게 되었다.

코로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했기 때문에 언제나 일에 열심이었으며 그때문에 다른 것에는 거의 시간을 내지 못했다. 노년에 그는 통풍을 앓았으나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다. 그는 결코 신문을 읽지 않았으며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당대에 일어난 혁명이나 제도적 변화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대체로 그는 거의 글을 읽지 않았으며 어떠한 지적인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음악, 특히 하이든·모차르트·글루크·베토벤을 매우 좋아했으며, 파리에 있을 때에는 정기적으로 음악회에 갔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화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후기 작품은 특히 음악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는 그림에서 결코 현대적 세계를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풍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농부이거나 신화와 문학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그의 생전에 프랑스 전역에 개통된 광활한 철도·공업·무역 발전 등의 획기적인 사회변천에

관한 표현은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코로는 동료 화가들과의 교제를 즐겼으며 바르비종파 미술가들, 특히 장 프랑수아 밀레,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와 친하게 사귀었고, 풍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와 같이 비교적 성공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한편 코로는 젊은 화가들을 공공연하게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인상주의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와 베르트 모리조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이렇게 해서 '파파 코로'(Papa Corot)는 말년에

그 친절함과 관대함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다.

19세기 회화에서 코로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대의 주요대가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의 업적은 매우 중요하다. 대체로 그의 대형 그림들은 다소 공허하고 과장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습작들은 참신한 관찰과 자연스런 쉬운 기법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풍경 스케치가 회화 작품을 위한 소재로 여겨졌을 뿐 그 자체로는 결코 뛰어난 미술 작품이 되지 못했다.

코로는 완성된 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와 자연스러움 등 자연의 본질적인 특성을 스케치를 통해 처음으로

보여준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말년에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풍경화보다는 스케치가 인기를 끌었다.

코로는 인상주의 풍경화가들의 출현에 이바지했으며, 인상파 화가들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를 존경했다.



 

1723 - 영국의 초상화가 레이놀즈(Reynolds, Joshua) 출생

레이놀즈 [Reynolds, Joshua, 1723.7.16~1792.2.23]

영국의 초상화가·미학자.

18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영국 예술계를 주도했다. 그는 예술작품과 가르침을 통해 18세기초에 싹튼 영국 고유의

일화적 그림을 유럽 대륙의 장엄양식으로 이끌어가려고 애썼다. 1768년에 왕립 아카데미가 창설되었을 때

초대 원장에 선출되었고, 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젊은시절

레이놀즈는 성직자인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플림프턴 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 이미 고전문학을 잘 이해했으며, 평생 동안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18세기 영국의 뛰어난 작가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레이놀즈는 유명한 영국 초상화가인 조너선 리처드슨의 수필에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고, 1740년에 런던으로 가서 4년 동안 리처드슨의 제자이자 사위인 전통적 초상화가 토머스 허드슨의 도제를 지냈다. 1743년에 그는 데번 주로 돌아와 플리머스에서 해군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 초기 그림들은 다소 미숙했다. 1744년에 그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2년간 머물면서 옛날 거장들에 대해 공부했고, 〈존 해밀턴 선장 각하 Captain the Honourable John Hamilton〉같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담한 붓놀림과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특징으로 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746년에 데번 주로 돌아온 그는 〈엘리엇 가족 Eliot Family〉(1746/47경, 콘월 주 포트엘리엇의 세인트 저먼스

백작 소장)이라는 대형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은 그가 플랑드르의 바로크 화가인 안토니 반 데이크 경(1599~1641)이 그린 〈펨브로크 가족〉(1634~35, 월트셔 주 윌턴 하우스 소장)이라는 대형 초상화를 연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반 데이크의 화풍은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영국 초상화에 영향을 주었다. 1749년에 그는 친구와 함께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발레아레스 제도의 미노르카 섬으로 갔다. 그는 이 섬에서 말을 타다 떨어져 5개월 동안 섬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입술에 생긴 흉터(이 흉터는 그후 그가 그린 자화상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었음)는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미노르카 섬을 떠나 로마로 가서 2년 동안 머물면서, 고대부터 그당시까지의

이탈리아 미술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피렌체와 볼로냐 및 베네치아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들(티치아노, 야코포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의 구도와 색채에 몰두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학파). 색채와 음영의 효과를 강조하여 정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베네치아 그림의 전통은 레이놀즈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동안 주장하기를, 화가 지망생들은 피렌체와 로마 화가들의 특징인 뚜렷한 형태묘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자신의 작품은 베네치아 양식을 상기시킨다.

후기

1753년에 레이놀즈는 런던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성공은 처음부터 보장되어 있었고, 1755년에는 그가 주문받은 수많은 초상화 제작을 도와줄 조수들을 고용했다. 런던 시절 초기의 초상화들은 박력과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는데, 이런 특징은 〈오거스터스 케펠 각하 Honourable Augustus Keppel〉 같은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인물의 자세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BC 4세기 중엽의 그리스 조각을 모방한 고대 로마의 〈아폴로 벨베데레 Apollo Belvedere〉의 자세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이다. 그는 〈아폴로 벨베데레〉를 바티칸 궁전에서 보았다.

그러나 인물이 해변을 따라 성큼성큼 걷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사실은 영국 초상화의 전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런던 시절 초기에 그린 〈캐스카트 경 Lord Cathcart〉(1753/54, 캐스카트 백작의 재산관리인 소유,

랭커셔 주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전시)이나 〈러들로 경 Lord Ludlow〉(1755, 베드퍼드셔 주 오번 수도원 소장) 같은 작품에는 베네치아 미술에 대한 그의 지식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가족 초상화들 가운데 〈넬리 오브라이언 Nelly O'Brien〉과 〈스펜서 백작 부인 조지아나와 그의 딸 Georgiana, Countess Spencer, and Her Daughter〉(1761,

 노샘프터셔 주 올소프 스펜서 백작 소장)은 매력적인 부드러움과 주의 깊은 관찰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1760년부터 레이놀즈의 화풍은 차츰 딱딱한 고전주의 쪽으로 변해갔다. 그는 17세기 볼로냐파에 속하는 고전적인 바로크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그리스·로마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에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모델들이 취한 자세와 옷차림은 좀더 엄격한 고전양식을 띠게 되었다. 그결과 초기 작품이 보여준 조화와

 균형을 많이 잃어버렸다.

1760년까지 런던에서는 당대 화가들의 공개 전시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1760년에 레이놀즈는 예술가 협회 창설에 이바지했고, 첫번째 전시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전시회는 그후 자주 열리게 되었다. 1768년에는 국왕 조지 3세의 후원을 얻어 왕립 아카데미가 창립되었다. 레이놀즈의 그림은 궁정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유력한 원장 후보였기 때문에 왕은 그의 선출을 승인하고 그에게 기사작위를 주었다. 레이놀즈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책을 능숙하게 이끌었기 때문에 후임자들은 그가 확립한 유형을 그대로 따랐다. 그의 연례 '담화'는 선과 색채의 관계나 공식 초상화와 비공식 초상화의 관계 같은 그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상과 소망도 분명히 반영하고 있었으며, 미술계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에 대한 충고를 담고 있었다.

1769년부터 레이놀즈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 왕립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다. 어떤 전시회에는 〈우골리노 Ugolino〉(1773, 영국 켄트 주 놀 하우스 소장) 같은 역사화를 출품하기도 했지만 별로 뛰어나지 못했다. 어린이를 그린 습작은 대부분 부드럽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매혹적인 그림은 〈헨리 8세로 분장한 매스터 크루 Master Crewe as Henry Ⅷ〉(1775~76, 런던 오닐 경 소장)와 〈'윈터'로 분장한 캐롤라인 스콧 부인 Lady Carolin Scott as 'Winter'〉(1778, 런던 버클루치 공작 소장)이다. 그가 가장 의욕적으로 그린 초상화는 〈말버러 공작 가족 Family of the Duke of Marlborough〉(1777, 옥스퍼드셔 주 블랜하임 궁전 소장)이다.

1781년에 레이놀즈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바로크 양식의 위대한 플랑드르 화가인 루벤스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것은 그의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특히 〈데번셔 공작 부인과 그의 딸 Duchess of Devonshire and Her Daughter〉(1786, 더비셔 주 챗스워스 하우스 소장)에서 그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레이놀즈는 결코 단순한 상류사회 화가나 아첨꾼이 아니었다. 귀가 먹었기 때문에 오히려 날카롭게 관찰함으로써 모델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모델의 자세와 그림의 표현양식을 끊임없이 다양하게 바꿀 수 있었다. 1782년에 그는 마비성 발작을 일으켰고, 거의 같은 무렵 왕립 아카데미 내부에서 다툼이 일어나 그를 슬프게 했다. 7년 뒤에는 시력마저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는 1790년에 자신의 마지막 '담화'를 왕립 아카데미에서 발표했다. 그는 1792년에 죽어 성바울로 대성당에 묻혔다.


1486 -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출생

안드레아 델 사르토 [Andrea del Sarto, 1486.7.16~1530.9.28]

본명은 Andrea d'Agnolo.

이탈리아의 화가·도안가.

16세기 전반기에 피렌체-로마파(派)의 발전에 이바지한 정교한 구도와 기교가 뛰어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1511년경에 시작하여 1526년에 완성한 세례 요한의 생애를 다룬 일련의 프레스코이다.

그의 가문 이름은 란프란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는 재봉사였다('델 사르토'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재봉사'라는 뜻의 sarto에서 유래). 그의 생애는 대체로 무사평온했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아서 친구들이 안드레이노라고 불렀다.

그는 2차례에 걸쳐 잠시 동안 피렌체를 떠난 것을 빼놓고는 그곳에서 줄곧 활동했다. 1500년 직후 화가 라파엘리노 델

가르보의 제자로 들어가기 전에 금세공인과 목각사의 도제로 있었던 것 같다. 이무렵 라파엘리노는 15세기 후반의 회화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여전히 남들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안드레아 델 사르토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영향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는 1506년경 그리 원숙하지 않지만 독자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새로운 산안눈치아타 교회와 수도원(그는 1509~14,

1525년에 여기에 프레스코들을 그렸음)과 오랜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1511년경 그 근처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곳에서 5~6년 동안 당대의 주요조각가 자코포 산소비노와 가깝게 지내며 때때로 그가 맡은 일들을 함께 했는데, 결국 산소비노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견고한 구조를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로소와 폰토르모가 그의 제자로 들어왔으며, 1513~14년경 피렌체 회화의 주도권이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업실에서 그의 작업실로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1517(또는 1518)년에 과부인 루크레치아 델 페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여러 해 동안 그의 작품 모델로 일했다고 전한다. 그는 그녀와의 결혼으로 재산과 모델을 한꺼번에 얻게 되었다. 1518년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부름으로 퐁텐블로에 갔는데, 그곳에서 수출용으로 제작한 그림들 때문에 그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그는 궁정 미술가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며, 그래서 1년 남짓 머무르면서 중요한 일은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 피렌체로 돌아오자 곧 메디치가(1512년 망명지에서 피렌체로 돌아온 뒤 강력한 가문이 되었음)와 계약을 맺고 피렌체 근처의 포조아카이아노에 있는 메디치 저택의 일부를 장식하는 일을 의뢰받았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맺은 가장 중요한 계약이었다. 후원자는 사실상 교황 레오 10세였으며, 사르토가 1519~20년 로마에 가서 그를 만난 것도 거의 틀림없다. 그때까지 피렌체의 미술가로서 라파엘로처럼 바티칸 궁정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이 사업계획은 1521년 12월에 교황이 죽자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프레스코 〈카이사르에 대한 찬사 Tribute to Caesar〉는 그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진 장식사업의 일부이다.

1520년에 사르토는 피렌체에 직접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뒤에 여러 화가들이 이 집에 살면서 약간 뜯어고치기도 했다.

 

그것은 궁궐처럼 호화롭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재산이었다. 1523년경 그는 도제들뿐만 아니라 하인도 1명 두었다. 그는 언제나 일이 마음에 들 때는 보수를 아주 적게 받거나 전혀 받지 않거나 또는 보수의 일부만을 받고도 기꺼이 일했는데, 아마 풍족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목수를 위해서나 왕을 위해서도 그림을 그리곤 했다. 1523~24년에 전염병이 돌자 사르토 부부는 안전한 곳을 찾아 피렌체의 북쪽에 있는 무젤로 계곡으로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1527년 메디치가가 다시 물러난 뒤 피렌체의 공화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 프랑수아 1세를 위한 정치적 선물로 마련된 〈이사악의 희생 Sacrifice of Issac〉은 이때에 그린 것이다. 그는 황제와 교황의 군대가 피렌체를 포위공격한 뒤에 새로 밀려온 전염병으로 쓰러져 자신의 집에서 죽었고 산안눈치아타 교회에 묻혔다.

사르토의 가장 뛰어난 걸작은 피렌체의 키오스트로델로스 칼초에 회색만으로 세례 요한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프레스코이다. 이 작품은 1511년경에 시작되었으나 1526년에 비로소 완성되었으며, 거의 모든 그림을 그가 직접 그렸기 때문에 마치 그의 활동기의 상당 기간을 보여주는 예술적 자서전을 읽는 듯하다. 1511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자화상(1528경, 우피치 미술관,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을 비롯하여 여러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하르피에스의 성모 Madonna of the Harpies〉(1528경)와, 아내 루크레치아의 초상화(1513~14경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522경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가 있다. 시카고 미술연구소에 있는 안드레아와 루크레치아의 원형 초상화(1530경 완성) 1쌍은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거기에 적힌 서명은 그의 것으로 보인다.

 

사르토의 양식은 전기간에 걸쳐 피렌체파 화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색채와 분위기의 효과에 대한 관심과 세련된 일상성,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성 카타리나의 혼인 Marriage of St. Catherine〉과 같은 초기 작품들에서 활기와 감정을 자세히 표현하려 함으로써 이상화되지 않고도 황홀한 양식을 개발했고, 이것은 젊은 세대의 화가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주었다. 원숙한 경지에 들어서면서 자제력도 늘어났지만 이것이 〈피에타 Pietà〉(1520경)와 같이 정열적인 후기 작품들을 낳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으며, 그 분위기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솔직했다. 1520년대에 그의 양식은 미켈란젤로의 영향이나 로마에서 발생한 미술 사건으로 말미암아 눈에 띄게 이상적이고 우아해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칼초 프레스코의 마지막 그림 〈세례 요한의 탄생 Birth of the Baptist〉(1526)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장엄 양식에 가까워지고 있다. 사르토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가로서 성실함과 순수한 직업의식을 인상적일 정도로 변함없이 유지했으며, 특히 자신의 작품을 판화로 새기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특성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소묘들에서 가장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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