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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6 (1)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52 - 미국무성, 한국전 참전 미군 사상자수가 11만 2천 843명이라고 발표

6 ·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2) 1999 - 존 F 케네디 2세(Kennedy, Jr., John F.) 비행기 추락사 

존 F 케네디 2세 [Kennedy, Jr., John Fitzgerald, 1960.11.25~1999.7.16]

고 케네디 미 대통령의 외아들 존 F 케네디 2세(38)가 조종하던 경비행기가 1999년 7월 16일 미 매사추세츠주

동부 마사스 비녀드(martha's vineyard) 해안에서 실종됐다. 사고로 케네디 2세와 부인 캐롤린 베셋(33),

처형 로렌 베셋(34) 등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케네디 2세는 사촌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다. 케네디 2세의 시신과 사고기 동체는 실종 사흘만에 매사추세츠주 마사스 비녀드섬 남서쪽 12km 해역의 30m 해저에서 발견됐다.

케네디 2세는 케네디 대통령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대통령 된지 17일 만에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관심의 초점이 됐다. 그의 개인사는 케네디가의 저주와 비극으로 점철됐다. 세살때 동생 패트릭이 태어난

지 이틀만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암살됐다. 아버지는 1963년 11월 15일, 그의 세번째 생일날 댈러스에서 흉탄에

쓰러졌다. 관에 실린 아버지를 향해 케네디 2세는 거수경례했다. 미국인의 가슴에 눈물을 새긴 행동이었다.

 

존 F. 케네디 주니어
본명 : John Fitzgerald Kennedy Jr.
직업 : 변호사
출생일 : 1960년 11월 25일
사망일 : 1999년 7월 16일
학력 : 브라운대학교, 뉴욕대학교법과대학원

경력
뉴욕 지방 보조 검사관 (1989년-1993년)
정치전문 잡지 조지 창간
http://people.nate.com/people/info/jo/hn/johnfitzgeraldkennedyjr

 

3) 1904 - 바하마의 정치인 베인(Bain, Clarence A.) 출생

베인 [Bain, Clarence A., 1904.7.16~1971.7.14]

 

                     1)                                    2)                                               3)

 

1) 1945 - 원자폭탄 실험 최초 성공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 남쪽으로 193km 떨어진 지점에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다. 원자폭탄은 중성자가 우라늄-235(235U)·플루토늄-239(239Pu)와 같은 동위원소의 원자핵을 때릴 때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제조되었다. 전쟁에 실제로 사용된 원자폭탄은 우라늄으로 만들어졌으며,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다. TNT 2만t의 위력과 맞먹는다고 발표한 이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 주민들 가운데 6만 6,000명이 즉사했고

6만 9,000명이 상처를 입었으며, 도시 구조물의 67% 이상이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이후

소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개발에 나서자 '핵확산금지조약', '핵실험금지조약' 등의 핵무기 규제조치가 나오기도 했다.

 

2) 1989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카라얀(Karajan, Herbert von) 사망  

카라얀 [Karajan, Herbert von, 1908.4.5~1989.7.16]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81세를 일기로 1989년 7월 16일 영면했다.

지휘의 '마술사' '황제' '제왕' '천재'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유럽 악단의 '신화적인 존재'였던 카라얀은 생전에 솔로몬의 영화못지 않은 '음악적 영광'을 누렸다. 그는 '현미경과 같은 예리한 귀, 뛰어난 음악적 감식안, 지칠줄 모르는

음악에의 정열'로 20세기 음악사에 찬연한 금자탑을 세워놓았다. 생전의 카라얀은 1백50곡이 넘는 레퍼토리를

연주 해석했고, 7백장에 가까운 디스크를 냈다. 그의 디스크는 전세계적으로 2억장 이상이나 팔렸다.
1908년 그리스계 아버지와 체코 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카라얀은 3세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신동'으로 비교적 순탄한 '음악인생'을 걸었다. 그는 폭넓은 레퍼터리와 정력적인 활동은 물론 사회적인 주목을 끄는 언동으로

유명했다.
세계정상급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베를린, 잘츠부르크, 빈에서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지휘자에 임명됐다. 그 뒤 세계 각지의 오페라극장과 오케스트라에 객원 또는 예술감독을 겸임했으며,

1969년 카라얀 지휘자 콩쿠르를 창시해서 후진양성에도 주력했다. 그는 완성을 위한 노력에 독특한 영감을 연결하여

감동적인 음감을 창조했다. 

 

3) 1979 - 이라크 대통령 아메드 핫산 알바크르가 사임하고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다

후세인은 1957년 바트 사회주의당에 입당하여 바트당이 주도한 이라크의 아브둘 카림 카셈 총리 암살사건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부상을 입고 시리아·이집트 등지로 피신했다. 그곳에서는 1962~63년 카이로법과대학을 다녔으며,

1963년 바트당이 이라크에서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바그다드법과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해에 바트당 정권이 몰락하자 그는 체포되어 이라크 감옥에서 여러 해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후 다시 망명하여 바트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쿠데타를 지휘하여 1968년 다시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후 국가원수인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 1972년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1979년 정부의 개방을 주장하던 그는 그해에 바크르가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후 그는 혁명사령평의회 의장, 총리 및 기타 직위를 겸임했다. 대규모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그의 지배체제에 대한 국내의 반발을 완전히

무마시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그를 개인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목표는 아랍 세계의

지도국으로서 이라크가 이집트를 대신하는 것이었으며, 페르시아 만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석유 수익을 이용하는 것 등이었다.

                          1)                                                        2)                                              

 

1) 1919 - 제10대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출생

최규하 [崔圭夏, 1919.7.16~2006.10.22]

강원 원주()에서 태어났다. 1941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1943년 만주 국립대동학원()을 졸업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농림행정에 종사,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해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으며, 1975년 국무총리에 발탁되었다.
국무총리 재임 중인 1979년 10.26사건을 맞아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고, 같은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이 이른바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결국 같은 해 8월 16일에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이끈 정부는 '과도정부' 또는 '위기관리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임 뒤에는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민족사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2006년 10월 2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2) 1969 - 우주선 아폴로 11호, 케네디 우주센터서 발사

아폴로 10호가 달에 가서 31회나 돌며 실험하고 온 지 불과 1개월이 지난 1969년 7월 16일에 지구를 떠나 21일에 드디어 N.A.암스트롱, E.E.올드린 2세 및 M.콜린스는 달에 도착하였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콜린스는 사령선을 타고 달을 주회하면서 대기궤도()상에서 달표면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다.

이로써 인간이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아닌 다른 천체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 때가 바로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였으며, 우주원년()이 시작된 것이다. 

 

1965 - 세계최대 몽블랑터널 개통(11.6km)

1965년 7월 16일 프랑스와 이탈리아간의 당시로서는 세계최대의 자동차전용 터널인 몽블랑터널이 개통됐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사라가트 이탈리아 대통령이 이날 알프스의 몽블랑 산밑을 뚫은 길이 11.6km의 세계최장의

터널 개통식에 참석했다.
터널은 1870년 프랑스인 G.드레피네가 제안했다. 유럽최고의 산인 해발 4,807m의 몽블랑 산밑을 꿰뚫은

이 터널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4년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것인데 이 위험한 공사로 2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기술상의 곤란과 수주일간 계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예정보다 1년반이나 늦게 공사가 끝났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200km의 거리를 단축했으며 샤모니와 쿠르메이어 사이를 종전에는 반나절에 걸쳐 달렸으나

불과 15분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터널의 개통으로 이지역은 유럽에서 주목받게 되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55 - 독일 카셀에서 최초의 도큐멘타전이 개최되다

도큐멘타전 [The Exhibition of Documenta]

1955년 독일의 카셀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미술전람회.

1960년 제2회전이 열린 이후 4년마다 개최되다가, 1972년부터 5년주기로 바뀌었다.
운영의 중심인물은 카셀미술학교장 보데, 카셀시장 브라넬, 미술사가 하우프트만 등으로, 현대미술작가에 의한

콩쿠르라는 성격을 벗어나 미술사적인 시야에서 현대미술을 검토하고 많은 사람에게 현대미술의 새로운 동향을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열리는 전시회이다.

 

도큐멘타(documenta)는 독일 카셀 지역에서 5년마다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회이다. 1955년 당시 카셀대학교의

교수이자 아티스트, 큐레이터 이였던 아놀드 보데(Arnold Bode)에 의해 창설되였다. 창립 당시에는 카셀지역에서

열린 연방원예전시(Bundesgartenschau)의 일환이였다. 첫번째 도큐멘타전에서는 근대미술에 큰 영향을

준 많은 (피카소칸딘스키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최근이 될수록 모든 대륙의 예술들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이 장소특정적인(site-specific) 성격을 가진다. 

 

1918 -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Nikolai II, Aleksandrovich) 처형
니콜라이 2세 [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5.18~1918.7.16/17]

1894년 26세의 나이로 로마노프 왕조 제18대 황제가 된 니콜라이2세가 1917년 3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흐느낄

겨를도 없이 왕관을 빼앗겼다. 니콜라이2세는 그 후 우랄산맥 중턱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구 스베르들로프스크)의 한 외딴집에서 유폐(幽閉)생활을 했다.

그러던 1918년 7월 16일 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4명의 딸과 14세인 알렉세이 황태자가 억류됐던 집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가족 모두는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고 이에 따랐다. 그런데 지하실에는 볼셰비키 총살대가

로마노프 왕가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얼마간의 총격 세례 후 방안이 화약 연기로 자욱해졌다.

이로써 3세기 동안에 걸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종말을 고했다. 그의 유골은 1989년 4월 한 희곡작가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70여년 동안 인근 개천가 진흙탕속에 그대로 내버려져왔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이 2세는 신생 볼셰비키 정권의 정통성에 가장 위험스런 존재였다. 1894년에서 1917년까지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했던 그였지만, 개혁과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조국의 뜻을 탄압할 만큼 그리 강력한 제왕은 못됐다.

 

1916 - 러시아 태생 프랑스의 생리, 세균학자 메치니코프(Mechnikov, Ilya) 사망

메치니코프 [Mechnikov, Ilya Ilich, 1845.5.15~1916.7.16]

(프) Élie Metchnikoff.

러시아의 동물학자·미생물학자.

동물의 체내에서 세균을 비롯한 이물체들을 삼키는 아메바 같은 세포를 발견한 공로로 1908년 파울 에를리히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식세포작용으로 알려진 이 현상은 면역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1864년 하리코프 A. M. 고리키대학교를 졸업한 뒤 1870~82년 오데사대학교에서 동물학 및 비교해부학 교수를 지냈다. 1882~86년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불가사리 유생(幼生)의 소화기관 기원에 대해 연구하다가, 소화와 관계없는 어떤 세포들이 그가 유생의 몸속에 투여한 진홍색 물감 입자와 조각들을 에워싼 뒤 삼키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세포들을 식세포(phagocyte : 그리스어로 '게걸스럽게 먹는 세포'라는 뜻)라고 이름붙였다. 1886~87년 오데사에 있는 세균학연구소, 1888~1916년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1895년부터 소장을 역임)에서 연구를 계속해,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에서 식세포가 급성감염에 대한 제1방어선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현재 이 식세포들은 백혈구로 알려져 있다. 1903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에밀 루와 함께 원숭이에게 매독을 옮기는 데 성공했으며, 말년에는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은 젖산균 연구에 전념했다. 〈염증의 비교병리학 The Comparative Pathology of Inflammation〉(1892)·〈전염병에서의 면역 L'Immunité dans les maladies infectieuses〉(190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 Études sur la nature humaine〉(1903)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07 - 순국한 이준 열사 네덜란드 헤이그 땅에 묻힘 

홀로 남은 이상설 "슬프다, 너무 슬프다"

네덜란드 헤이그 중앙역에서 2번 전차를 타고 15분쯤 가면 시 외곽에 자리잡은 뉴 에이큰다위넌(NieuwEykenduynen) 공동묘지에 닿게 된다. 이곳을 찾은 날, 수많은 비석들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헤맨 끝에 관리사무소 뒤편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청동상을 간신히 찾았다. 그의 묘적지, 젖은 흉상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순국한 지 사흘이 지난 1907년 7월 16일, 여기서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참석자는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상설(李相卨)과 '드 용' 호텔의 주인이 전부였다. 넋이 나간 이상설은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는 영어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다른 밀사인 이위종(李瑋鍾)은 잠시 러시아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있었다. 만리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48세의 이준은 1963년 서울 수유리로 이장되기까지 55년 동안 이 쓸쓸한 공동묘지 구석에 묻혀 있어야 했다.  

다시 이틀 뒤 서울.대한매일신보는 7월 18일자 호외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이준씨가... 충분(忠憤)한 지기(志氣)를 불승(不勝)하여... 자결하여 만국사신지전(萬國使臣之前)에 열혈(熱血)을 일쇄(一灑)하여 만국을 경동(驚動)하였다더라." 다음 날짜 황성신문도 "이준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 찔러 자결함)하였다는 전보가...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다더라"고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게 됐던 첫 근거는

바로 이 신문들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정설은 이준 열사가 '분사(憤死)' 또는 '순국'했다는 대단히 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결과 '할복자살이 아닌 쪽'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부 출판물에선 '자결'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

헤이그=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닷컴 2007.06.25 00:4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5/2007062500056.html 

 

1900 - 러시아 혁명가 레닌(Lenin, Vladimir), 스위스로 망명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로 귀국하였다.

 

1896 - 노르웨이의 정치가, 외교관 리(Lie, Trygve) 출생

리 [Lie, Trygve Halvdan, 1896.7.16~1968.12.30]

노르웨이의 정치가·외교관.

초대 국제연합 사무총장(1946~52)을 지냈으며 국제연합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지지한 것에 대한 소련의 적의가 주원인이 되어 사임하였다.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대학교에서 수학했고 변호사를 지냈으며 노르웨이 노동당 지도자가 되었다. 1940년 4월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한 이후 그는 런던에 있는 노르웨이 망명정부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2월 1일 리는 5년 임기의 국제연합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처음에 보다 지위가 낮은 총회 사회자로

지명되었으나(소련의 안드레이 A. 그로미코에 의함) 벨기에의 폴 헨리 스파크에게 패배하였다. 리의 첫번째 임무 중 하나는 이란 북부에서 소련 군대가 철수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1947년 5월부터 그는 이스라엘의 국가 선언으로 인해 일어난 팔레스타인 전쟁을 해결해야 했으며 1948년에는 1년 내내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카슈미르 전투를 처리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잠정적인 해결책밖에 없었다. 1950년 강대국들의 수도에 '평화사절단'을 파견하는 일을 맡아 '20년 평화계획'을 홍보하고 국제연합에서 타이완을 축출하기 위한 소련의 시도에 반대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50년 국제연합이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국제연합군의 대한민국 지원이 승인(1950. 6. 27)된 후 그는 소련으로부터 공공연한 방해와 개인적 모욕을 받게 되었다.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의 재선을 거부할 것이 확실시되자 총회는 공식적인 재선절차 없이

그의 임기를 3년간 연장시켰다. 그러나 소련은 그를 사무총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R. 매카시가 벌인 국제연합 내 용공분자 색출조사 결과 때문에 미국의 반대도 받게 되었다. 그의 직원들은 불온한

미국 시민들에게 직업을 제공해준 사실로 비난받았으나 국제연합 내에서 미국을 전복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은 근거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자신의 중재역할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1952년 11월 10일 사임했다.

그의 저서 〈평화를 위하여 In the Cause of Peace〉는 1954년에 출판되었다.

 

1896 - 프랑스의 형제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Goncourt, Edmond de) 사망

에드몽 드 공쿠르 [Goncourt, Edmond de, 1822.5.26~1896.7.16] 

에드몽 루이 앙투안 휘오 드 공쿠르(Edmond Louis Antoine Huot de Goncourt,

1822년 5월 26일 ~ 1896년 7월 16일), 프랑스의 비평가로서 동생 쥘 드 공쿠르와 힘을 합하여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형제를 추모하기 위하여 에드몽이 사망한 후 오늘날 프랑스의 가장 값진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공쿠르상이 빛을 보게 되었다.

 

1872 - 노르웨이의 극지탐험가 아문센(Amundsen, Roald) 출생

아문센 [Amundsen, Roald, 1872.7.16~1928.6.18?]

아문센은 남극에 최초로 도달한 노르웨이의 탐험가이다. 무역선의 선장 및 선주들을 배출한 가문에 태어나 일찍부터

모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심신을 단련했다. 초년에는 부모의 희망대로 의학을 공부했으나, 21세 때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모험가의 길로 들어섰다. 해표잡이 배를 타고 경험을 쌓았고 1897년에는 벨기에의 남극탐험대에

일등항해사로 참가했다. 1903~04년에는 북극에서 보내면서 북극점의 위치 변동을 확인해 학자들의 논란을 종식시켰고, 마침내 1906년에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통하는 북서항로를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북극횡단을 준비하던 중 1909년 4월 로버트 E. 피어리가 이미 북극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1910년 남극을 향해 출발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의 로버트 폴컨 스콧도 남극 정복에 나서 둘의 경주가 시작되었으나,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의 승리로 돌아갔다. 1918년 노르웨이를 출발해 해류를 타고 북극을 지나 동쪽으로 가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비행기로 북극을 횡단하려는 계획을 세워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1926년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함께 했던 이탈리아 항공가 움베르토 노빌레가 북극 비행 중에 사고를 당하자, 그를 구조하기 위해 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바이킹의 마지막 후예'를 자처했던 아문센은 영웅적인 탐험가의 전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찍이 그 누구도 자기가 진정 소원하던 것에서

이처럼 정반대되는 위치에 서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 로알 아문센, 북극 대신 남극을 정복하고서 

 


1858 -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이자이(Ysaÿe, Eugène) 출생

1796 -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코로(Corot, Camille) 출생

1723 - 영국의 초상화가 레이놀즈(Reynolds, Joshua) 출생

 

1486 -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출생

1194 - 이탈리아의 대수녀원장, 클라라수녀회 창설자 클라라(Saint Clare of Assisi) 출생

622 - 마호메트의 헤지라 (聖遷) - 이슬람교의 기원 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