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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5 (2)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5 (2)

 

1867 - 프랑스의 남극 탐험가, 해양학자 샤르코(Charcot, Jean-Baptiste) 출생

샤르코 [Charcot, Jean-Baptiste-Etienne-Auguste, 1867.7.15~1936.9.16]

프랑스의 탐험가·해양학자.

남극반도 주변의 상세한 해도(海圖)를 작성했다. 탁월한 신경학자인 장 마르탱 샤르코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의학을 공부한 뒤 파리에서 개업했고 그뒤에는 탐험에 주력했다. 1903~05년 그의 첫번째 남극탐험에서 파머 제도 일부의 해도를 작성했으며, 게르라체 해협을 탐험했고 애들레이드 섬의 북단까지 항해했다. 1908~10년의 2번째 탐험에서

알렉산더 섬 해안의 지도를 작성했으며 팔리에르 해안과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된 샤르코 섬을 발견했다. 이때 디셉션 섬과 애들레이드 섬의 상세한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1912년 그의 발견내용이 수록된 2권의 〈남극 주변 Autour du pole sud〉이 출판되었다. 1921~36년 전문가들에 의해 계속된 탐사에서, 샤르코는 영국 해협과 북대서양의 플랑크톤을 연구했다. 그리고 헤브리디스 제도, 극지역, 그린란드 동부 연안에 대한 해양학적인 연구들을 수행했다. 1936년 9월 16일

그의 배는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좌초되었으며, 샤르코와 30명 이상의 동료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익사했다.

 

1831 - 독일의 조각가 베가스(Begas, Reinhold) 출생

베가스 [Begas, Reinhold, 1831.7.15~1911.8.3]

독일의 조각가.

1870년부터 30여 년 간 프로이센의 조각을 주도했다. 1856~58년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바로크 양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실러 기념상 Schiller Memorial〉(1871, 베를린 겐다르멘마르크트)·

〈비스마르크 기념상 Bismarck Monument〉(1901, 베를린)에 나타난 옷주름의 펄럭임이나 비대칭적 배치를 보면

바로크 양식의 영향력이 뚜렷이 나타난다. 베가스는 〈메르쿠리우스와 프시케 Mercury and Psyche〉(1874)와 같은

신화적 주제들을 좋아했지만, 초상으로 가장 유명했으며 당대 위인들의 흉상을 많이 만들었다.


 

1606 -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출생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렘브란트는 서양미술사의 거장들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네덜란드 화가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며,

20세 초반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루벤스를 위시한 유럽의 일류 화가들과 경쟁하고자 성경과 신화를 주제로 야심만만한 대작들을 그렸다. 1631년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상인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종교화 작업을 계속했다. <엠마오스의 그리스도 Christ at Emmaus>(1628) 등에서 보듯 일찍부터 독특한 명암 해석을 통해 공간에 통일성과 깊이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법의 암시적 효과로 인해 그의 초상화들은 감정의 내면성과 섬세한

뉘앙스를, 종교화들은 절제되고도 강렬한 영성을 띤다. 주문받아 제작한 <야경 Night Watch>(1642)은 초상화이면서도 이와 같은 독특한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 1640년대에는 여전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제작 주문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는 일련의 종교화들과 자화상들을 통해 한층 더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칼로 찍어 바른 듯한 임파스토, 거친 질감,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 등 그는 전통적 예술의 규칙들을 무시한 '산문성'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탁월한 화법으로 당대 및 후세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모델의 얼굴을 넘어 영혼을 보라."

 

- 렘브란트 반 레인

 

1592 - 임진왜란 율포해전 승리

율포해전 [栗浦海戰]

1592년(선조 25) 6월 7일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율포(밤개)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을 무찌른 전투.

1592년 6월 7일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해상전투를 벌인 조선 수군은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웅천 증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23척,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25척, 경상우수사 원균이 3척 등 모두 51척의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때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오 쯤에 영등포 앞에 이르자 조선 수군은 세차게 배를 몰아 율포만으로

추격해 들어갔으며 대선 2척을 나포하였고, 중선 5척을 불사르고, 일본 수군을 36명의 목을 베었다.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해전 목록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거제시 옥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마산시 산호동) - 이순신

1592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카메이 코레노리 -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1592년 7월 15일(음력 6월 7일) - 율포 해전(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구키 요시아키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1274 - 이탈리아의 신학자, 성인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선종 

보나벤투라 [St. Bonaventura, 1217 ?~1274.7.15.]

중세 이탈리아 신학자, 추기경, 성인. 

토스카나 지방의 바그노레지오 출생. 프란체스코수도회에 들어가 파리대학에서 공부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교수 자격을 얻어, 모교에서 신학교수를 하였다(1248~1255). 1257년 프란체스코수도회 회장이 되어 수도회 조직 정비 ·강화 등에 힘쓰다가, 1273년 추기경과 알바노의 주교가 되었다. 새로 도입된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을 이해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라 신비적인 사색을 존중하였다.

주요저서 《하느님께 이르는 정신의 여행:Itinerarium mentis in Deum》(1472)에는 철학에서 시작하여

신학 ·신비사상으로 나아가는 그의 사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482년 시성()되었다

 

1099 - 제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차 십자군은 먼저 군중 십자군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있는 니케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십자군[十字軍, crusade]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1095~1270).

8차례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는데 목적은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이슬람교도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는 것이었다. 11세기에 봉건 유럽에서는 상업과 종교가 광범위하게 부흥했고 예루살렘과 동방의 성지 순례가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제국은 점점 강대해지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유럽, 특히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알렉시우스를 돕고 그리스도의 성묘를 탈환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의 군대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베르망두아의 위그, 보에몽, 생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 같은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보잘것없는 전사·모험가·광신자 들의 소규모 비조직적인 부대도 형성되었다. 그후 2년이 넘도록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모여 오늘날의 터키 지역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1098년 그들은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1099년 7월 15일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후 몇 십 년 간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가느다랗게 뻗어 있는 지역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작령,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 등 소위 십자군 국가를 세웠으며, 그곳에 유럽인 통치자를 두었다.

그들은 해안과 내륙의 변경을 따라 성을 세웠다.

 

1144년 십자군은 모술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세운 셀주크 투르크의 통치자 장기에게 에데사를 빼앗겼다. 에데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황 유게니우스 3세는 제2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이 제2차 십자군 원정 동안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이끄는 군대가 1148년 봄 예루살렘에서 연합해 5만 명의 병력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을 공격했다. 그들은 장기의 후계자 누레딘이 이끄는 군대에게 밀려 결국 후퇴했으며,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치욕스런 패배로 끝났다. 누레딘은 1154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살라딘이 1169년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고 1183년 알레포를 점령함으로써 십자군 국가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1187년 살라딘은 갈릴리 바다 근처의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주둔 십자군을 거의 무찔렀으며 10월 2일에는 예루살렘과 다른 십자군 요새를 대부분 점령했다.

예루살렘 함락에 충격을 받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제3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때까지 모인 중 규모가 가장 큰

십자군 부대가 1189년 5월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황제의 지휘로 출발했다. 그러나 1년 후 프리드리히가 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살라딘과 프리드리히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91년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비잔틴 속주 키프로스를 점령한 뒤,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와 연합해 본토의 아크레를 공격했다.

 

7월에 그들은 아크레를 함락하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데 실패한 후, 1192년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5년 동안 유럽인의 성지순례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119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소집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예기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서 들여온 배와 장비의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베네치아인들을 도와 헝가리의 자라 시를 점령한 다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 4월 13일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60년 이상 존속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했지만, 제4차 십자군은 비잔틴 교회와 라틴 교회의 동맹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버렸으며, 비잔틴 제국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그후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의 열기가 되살아나 1212년 비극적인 소년 십자군이 생겨났는데, 이때 참여한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3년 후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한번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할 것을 호소했다. 그결과 주로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로 구성된 제5차 십자군은 1219년 나일 강 근처의 담미에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던 십자군은 8년간의 휴전에 합의하고 어물쩡하게 원정을 끝마쳤다. 이것은 교황이 직접 조직한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제6차 십자군 때 출정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한 적이 있는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에 10년간 예루살렘을 유럽인들에게 반환한다는 협정을 얻어냈다. 1244년 몽골족의 진출로 서쪽으로 밀려온 크바레즈미 투르크족이 이집트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1248년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제7차 십자군도 제5차 십자군처럼 이집트에서 패배했다. 루이는 22년 뒤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튀니지에 상륙한 직후 대부분의 군대와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 그후로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원정활동이 계속되었지만 십자군 시대는 끝나버렸다. 이집트의 맘루크(노예군인)가 몽골족을 시리아에서 몰아낸 후

맘루크족 술탄 바이바르스는 십자군을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몽골족과 동맹을 맺었다.

1268년 맘루크는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모든 주민을 학살했다. 1289년 그들은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1291년에는 본토에 있는 라틴인들의 최후 전초기지인 아크레마저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