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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2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2

 

1856 - 세르비아 출신의 미국 발명가, 전기공학자 테슬라(Tesla, Nikola) 출생

테슬라 [Tesla, Nikola, 1856.7.9/10~1943.1.7] 

미국의 전기공학자.

크로아티아 출생. 그라츠의 공업학교와 프라하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전신국에 근무하鳴�,

후에 부다페스트파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였다.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에디슨 회사에서 수년간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 뉴욕에서 테슬라 연구소를 설립하고, 1888년 최초의 교류유도전동기()

1891년 테슬라 변압기 등을 만들었다.
1895년 그가 개발한 2상교류방식은 웨스팅하우스사()에 의하여 나이아가라 수력발전소에 이용되었다.

자기력선속밀도()의 단위인 테슬라는 이 이름에서 딴 것이다.

 

1835 - 폴란드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비에니아프스키(Wieniawski, Henryk) 출생

비에니아프스키 [Wieniawski, Henryk, 1835.7.10~1880.3.31]

Henri Wieniawski라고도 씀.

폴란드의 바이올린 연주자·작곡가.

음악 가문의 신동으로 11세에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바이올린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폭넓은 연주여행을 다녀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러시아 연주(1851~53)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고(1860~72), 북아메리카

지역을 순회했다(1872~74). 연주자로서 풍부하고 따뜻한 음색과 생동감 있고 완벽한 기교로 유명했고, 낭만 양식인

그의 작품에는 연습곡·마주르카·폴로네즈와 2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는데, 이중 D단조 협주곡이 유명하다.


 

1830 - 프랑스의 화가 피사로(Pissarro, Camille) 출생

피사로 [Pissarro, Camille, 1830.7.10~1903.11.13]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J.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한 전원풍경을 연작,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으나, 1850년대 중반경 한때 G.슬러의 점묘법()에 끌려 밝고 섬세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한 작품도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붉은 지붕》(1877, 루브르미술관 소장) 《사과를 줍는 여인들》(1891) 《몽마르트르의 거리》(1897) 《테아트르 프랑세즈광장》(1898) 《브뤼헤이 다리》(1903) 《자화상》(1903) 등이 있다.

 

1509 - 프랑스 종교개혁자 칼뱅(Calvin, Jean) 출생

칼뱅 [Calvin, Jean, 1509.7.10~1564.5.27]

칼뱅은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가이다. 오를레앙·파리 등지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고, 필리프 멜란히톤·테오도르 베즈 등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들과 어울리면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1536년 <기독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출간하면서 개신교의 대변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 해 가을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중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의 종교개혁 운동을 돕게 되었다. 시 평의회의 압력으로 한동안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망명자들의 교회를 담당하기도 했으나, 1541년 제네바 시민들의 호소로 다시 돌아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우선 교회법령집 초안을 만들었는데,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제네바 교회 헌법으로 채택된

이 법령집은 개혁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그는 성서를 강해하고 목사단을 이끌고 장로회의를 주재하는 등 교회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다각적인 활동을 벌였다. 또한 신학적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칼뱅주의 신학을 확고히 했고, 1559년에는 신학교육을 위한 아카데미(제네바대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이후 그는 유럽 전역의

신교 전파에 힘썼으며,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제네바는 개신교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서는 성령의 학교이다.

그곳에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과 알아서 도움이 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르친다."- 장 칼뱅

 

 

138 -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Publius Aelius) 사망  

하드리아누스 [Hadrianus, Publius Aelius, 76.1.24~138.7.10]

제14대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138년 7월 10일 그가 지명한 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21년의 치세를 뒤로 하고 숨을 거뒀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른바 로마의 "다섯 명의 어진 임금(五賢帝)" 가운데

한 사람으로, 로마 제국에 평화를 정착시킨 위대한 황제로 일컬어진다.

76년 1월 에스파냐의 이탈리카에서 태어나 117년 황제에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재임중 ‘로마법 대전’을 간행해

로마사회에 새로운 규범을 정착시켰다. 뿐만 아니라 131년 유대교 반란을 강경 진압한 후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유대교

신자 모두를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해 20세기 중엽까지 계속된 유태인의 유랑생활을 시작케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전임 황제들이 완벽하게 구축해 놓은 사회간접자본을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로마에만 머무르지

않고 제국 각지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확인한 후 정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치세기간 21년 동안 그가 본국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것은 7년간에 걸쳐 세 차례뿐. 나머지 14년 동안은 로마의 속주인 라인강 유역ㆍ브리타니아(영국)ㆍ에스파냐아테네ㆍ

북아프리카ㆍ이집트ㆍ시리아 등을 순행하면서 보냈다. 그는 제국 각지의 방위선을 돌아보며 제국의 안전보장체제를

정비하고 재구축했다. 이때의 속주 재정비는 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평화적인 치세를 가능케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