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9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81 - 프랑스 의회, 산업국유화 계획 등 포함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개혁안 승인
미테랑은 1971년 사회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74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1981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물리쳤다. 미테랑은 재임기간 동안 금융과 주요 산업체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사회보장의 혜택을 확대했다. 외교에 있어서는 소련에 상대적으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는 반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썼다. 미테랑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기타 문제들을 야기했던
까닭에 1983년부터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기 시작했고, 첫 임기가 끝날 무렵 프랑스 사회당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섰다. 1986년 총선 결과 우익이 다수 의석을 점유하자 미테랑은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영입하게 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드문 권력분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미테랑은 대통령으로서 외교를 담당했다.
미테랑은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여유 있는 표차로 시라크를 압도하고 당내 온건파인 미셸 로카르를 총리로 기용해
집권 제2기를 맞게 되었다. (미테랑)
2) 2002 - 아프리카연합(AU) 공식 출범
2002년 오늘.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결사체인 아프리카단결기구(OAU)가 창설 39년만에 해체되고
아프리카연합(AU)이 공식 출범했다.
아프리카연합의 첫번째 의장직을 맡은 음베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53개 회원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상회담 개막을 선언했다.
아프리카연합은 유럽연합(EU)을 본 떠 평화안보위원회와 아프리카 의회,중앙은행의 설치와
단일통화 도입 등을 목표로 했다.
로마노 프로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아프리카연합의 탄생을 축하하고 실질적 지원을 약속했으며
미국도 아프리카연합 출범을 축하했다.
3) 1971 - 키신저 극비 중국 방문, 저우언라이와 회담 - 周恩來
1949년 이후 20여년에 걸친 미·중 간 적대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선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북베트남과 휴전교섭을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베트남으로부터 명예롭게 퇴진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필요했고, 중국 역시 1969년 3월 진보도에서 소련과 무력충돌을 벌인 후 미국이라는 카드를 갖고 싶어했다.1971년 4월, 미국 탁구대표의 중국 방문은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 그리고 3개월 뒤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키신저는 7월 3일에 남베트남을 방문한 뒤 8일에는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갑자기 심한 복통이 있어 영빈관에서 쉬겠다며 모습을 감추고 일주일이 지난 7월 15일 오후 10시30분, 닉슨은
라디오·TV를 통해 중대발표를 했다. “중국이 나를 초대했고 나도 세계 평화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복통을 핑계로 잠행한 키신저가 7월 9일 몰래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와 닉슨 방중을 타진한 성과물이었다
1) 2) 3)
1) 1879 - 이탈리아의 작곡가 레스피기(Respighi, Ottorino) 출생
레스피기 [Respighi,Ottorino, 1879.7.9~1936.4.18]
이탈리아의 작곡가.
이탈리아 음악에 러시아 관현악곡의 색채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과감한 화성 기법을 도입했다. 볼로냐의 리체오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배웠으며, 그곳 오페라 관현악단의 제1비올라 연주자로
일했다. 레스피기는 외국의 대가 선생들로부터 관현악 색채를 터득했고 관현악곡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2년
볼로냐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그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관현악을 위한 야상곡을 연주했다. 그는 희가극 〈엔초 왕 Re Enzo〉과 오페라 〈세미라마 Semirama〉로 인정받아 1913년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 교수가 되었다. 1924년 음악원장이 되었고 1926년 퇴임했다.
시인 단눈치오가 묘사한 감각적·퇴폐적인 로마의 풍토에 매료당한 그는 유명한 모음곡들인 〈로마의 소나무 Pines of Rome〉와 〈로마의 분수 Fountains of Rome〉에서 미묘하고 다채로운 시인의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밖의 모음곡들로 〈교회의 창 Vetrate di chiesa〉(1927)·〈새 Gli ucelli〉(1927)·〈로마의 축제 Feste Romane〉(1929),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보티첼리의 병풍화 Trittico Botticelliano〉(1927)가 있다.
레스피기는 옛 이탈리아 음악에도 흥미를 갖게 되어 류트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1쌍의 〈옛 무곡과 아리아 Antique Dances and Arias〉를 썼다. 1919년 디아길레프 러시아 발레단의 런던 공연을 위해 작곡한 〈이상한 가게 La Boutique fantasque〉는 로시니의 작품을 편곡한 것으로서 그의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후년에 로시니의 피아노곡을
편곡한 〈로시니아나 Rossiniana〉(1925)도 발레곡이 되었다.
외국에서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장 유명한 오페라는 〈벨파고르 Belfagor〉(1923, 밀라노)와 〈불꽃 La fiamma〉(1934, 로마)을 들 수 있다. 후자는 한스 비어스 옌센의 음울한 노르웨이 비극(영어권에는 존 메이스필드의 〈마녀 The witch〉로 알려짐)을 비잔틴 라벤나 지방의 이야기로 각색하여 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신비극 〈이집트의 마리아 Maria Egiziaca〉(1932)와 유작 〈루크레치아 Lucrezia〉(1937년 아내 엘사에 의해
완성)는 위 작품들과는 다른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며, 〈루크레치아〉에서는 말년에 그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극적 레치타티보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 Orfeo〉를 편곡하여
1935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했다. 아내이자 제자인 엘사 올리비에리
산자코모 레스피기(1894 출생)는 가수이자 오페라·합창곡·교향곡·가곡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2) 1835 - 쿠바의 초대 대통령 에스트라다 팔마(Estrada Palma, Tomás) 출생
에스트라다 팔마 [Estrada Palma, Tomás, 1835.7.9~1908.11.4]
쿠바의 초대 대통령.
견실한 재정정책과 교육수준 향상정책으로 유명하다. 에스트라다 팔마는 혁명군 장군으로 스페인과의 10년전쟁(1868~78)에 참여했고, 1875년에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877년 스페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미국 뉴욕 주 오렌지 군의 센트럴밸리 소년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뉴욕 시에 있는
쿠바 혁명위원회를 이끌었고, 후에 호세 마르티가 죽자 실질적인 혁명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이 끝난 뒤인 1902년 미국은 쿠바 섬을 쿠바인들에게 반환했고, 에스트라다 팔마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어느 정당과도 손을 잡지 않았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선거운동을 벌이지도 않았으며, 선거가 끝난 뒤에
쿠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에스트라다 팔마는 1905년 선거에서 의회의 협조를 얻어야 했으므로 정당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한 정당은 보수당(후에 온건개혁당으로 알려짐)이었다. 야당인 자유당은 보수당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다고 비난했으며, 1906년에 혁명이 일어났다. 에스트라다 팔마는 9월에 사임했고, 미국이
개입하여 일시적으로 쿠바를 통치했다.
3) 1850 - 미국의 제12대 대통령 테일러(Taylor, Zachary) 사망
테일러 [Taylor, Zachary, 1784.11.24~1850.7.9]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11월 24일 - 1850년7월 9일)는 미국의 제12대(1849년-1850년) 대통령이다.
생애
재커리 테일러는 버지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08년에 입대해 평생 군인으로만 살았다.
그는 의무감이 있고 용기있는 군인으로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그 후로는 주로 인디언을 토벌하고 진압하는데만 큰 공을 많이 세웠다. 별명은 'Old Rough and Ready'로, 거칠고 노련한 준비된 지휘관이라는 뜻이다.
미국-멕시코 전쟁이 터지자 기습공격을 해서 1847년3월 베라크루스에 상륙, 그해 9월 14일 스콧과 함께 멕시코 시티를 점령해서 1848년2월 강화조약을 맺고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그저 군인이었으나, 이 전쟁의 공적을 평가받아서
휘그당(오늘날 공화당의 전신)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 이듬해 취임했다.
이후 캘리포니아를 합중국 내에 병합시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년 만에 콜레라로 죽었는데,
그는 테쿰세의 저주가 아닌 인디언의 저주로 임기중 죽은 유일한 대통령이다.
1) 2) 3)
1) 1907 - 헤이그 밀사, 일제 침략 규탄
1907년 7월 9일 국제협회의 회합에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해 큰 호응을 얻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고종은 헐버트를 미국에 보내고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전(前)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전 의정부참판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 등 3명을 밀사로 파견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열강의 후원을 얻으려 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밀사들은 7월 9일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에게 한국의 공식 대표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이위종의 연설 후 각국의 신문을 통해 한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각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해 결국 본회 참석은 좌절되었다. 이준은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아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2) 1956 - 미국의 영화배우, 제작자, 감독 톰 행크스(Hanks, Tom) 출생
행크스 [Hanks, Tom, 1956.7.9~ ]- 톰 행크스 (공중전화 카드)
본명은 Thomas J. Hanks.
미국의 영화배우.
밝고 풍부한 개성과 천부적인 연기력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유년 시절 요리사인 아버지를 따라 방랑 생활을 하다
고등학생 시절 연극과 인연을 맺어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이후 론 하워드 감독의 〈스플래시 Splash〉(1984)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영화배우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뒤 희극배우로서 승승장구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최초의 메이저 영화 〈필라델피아 Philadelphia〉(1993)에서 연기파 배우로 변신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감염된 동성애 변호사로 열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듬해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1994)로 아카데미 사상 스펜서 트레이시 이래 50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또한 여배우 멕 라이언과 함께 출연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Sleepless in Seattle〉(1993), 〈유브 갓 메일 You've Got Mail〉(1998)에서 로맨틱한 연기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1998), 〈그린 마일 Green Mile〉(1999)에서 극적인 연기로 감동을 안겨 주는 한편 카리스마(〈아폴로 13호 Appolo 13〉[1995]의 선장 짐 로멜)와 감칠맛 나는 목소리 연기(〈토이 스토리 Toy Story〉 1·2편[1995, 1999])로도 관객을 사로잡았다.
3) 1951 - 영국 최초의 상용컴퓨터 '마크 1' 출시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는 유니백(UNIVAC)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페란티 마크Ⅰ이 먼저다. 최근에는
레오Ⅰ이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유니백과 페란티 마크Ⅰ, 레오Ⅰ은 모두 1951년 선보였으나 일부 자료에는 유니백이 1950년 발표된 것으로 기록돼 있어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페란티 마크Ⅰ은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모두 9대를 팔았는데, 그 중 1∼2대는 정부기관에, 3대는 외국(네덜란드,
이탈리아, 캐나다)에 공급됐다고 한다.한편 업무용 컴퓨터인 레오는 개발은 T. 레이먼드 톰슨(T. Raymond Thompson)과 존 시몬스(John Simmons)가, 판매는 J.리온스앤컴퍼니가 맡았다.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L&qnum=4000944&start=
1) 2) 3)
1) 1987 - 연세대생 이한열군 장례식 노제에 100만 인파 운집- 광주 5.18 묘역
연세대 교문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1987년 7월 9일
거행됐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연세대에서 서울시청앞까지 장례행렬이 이어지자 광장앞 인도와 차도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어 이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교문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군 사건은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을 학생시위에 가세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촉매제가 됐다.
그때까지 학생시위대를 `비난하지 않는 정도`의 소극적 호응으로 대하던 중산층이 적극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정권은 결국 6.29선언이란 항복문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 1819 - 재봉틀을 발명한 미국의 발명가 하우(Howe, Elias) 출생
하우 [Howe, Elias, 1819.7.9~1867.10.3]
의류의 대량생산에 있어 에디슨과 노벨에 비할만한 업적을 이룬 엘리아스 하우가 1819년 7월 9일 미국 매사추세주 스펜서에서 태어났다.
기계공이었던 엘리아스 하우는 바느질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인간의 손 대신 바느질을 해줄 기계 ‘재봉틀(sewing machine)’을 고안해 냈다. 하우는 재봉틀을 실용화하려는 연구를 거듭하던 중 아프리카 원주민이 끝에 구멍난 창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드는 꿈을 꾸게 된다. 이 때 놀라 깬 하우가 꿈속에서 봤던 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봉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로써 5년 동안에 걸친 개발 끝에 하우는 결국 실용적인 재봉틀을 개발해냈고 1846년에 특허를 얻었다.
그러나 발명 초기에 이 기계가 미국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결국 하우는 영국에 특허권을 250파운드(1,250달러)에 팔아넘겼다. 그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재봉틀 개량 작업을 계속했지만,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무일푼으로 미국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정작 고국인 미국 내에서 자신의 특허권이 침해된 채 이미 재봉틀이 널리 제작, 판매되고 있는 게
아닌가. 여러 차례의 소송 끝에 1854년 하우의 권리가 확증되었고, 그때부터 특허권의 만기인 1867년까지 하우는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봉틀에 대해 로열티를 지급받았다.그가 이뤄낸 재봉틀의 발명은 섬유공업의 마지막 관문인
바느질을 기계화한 것으로써 지난 18세기 실을 뽑는 방적기와 천을 짜는 직조기가 개발된 이래 세계적으로 과
도하게 늘어난 면포 생산량을 소화해낼 수 있게 한 의복제조의 혁명이었다.
3) 1981 - 한국의 축구 선수 이천수(李天秀) 출생
이천수 [李天秀, 1981.7.9~ ]
이천수(李天秀, 1981년 7월 9일 ~ )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서 포지션은 윙 포워드이다.
축구인 생활
2001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한 뒤, 2002년 K-리그 준우승에 크게 공헌하여 신인상을 받게 되었고,
2002년 FIFA 월드컵에서의 활약과 K-리그의 활약을 종합하여 'AFC 올해의 신인상'에 선정되었다. 2002년 FIFA 월드컵 직후 레알 소시에다드에 이적하면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한 첫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이듬해에 CD 누만시아로 임대되었다. 하지만 CD 누만시아에서도 부진을 떨치지 못해 결국 2005년 3월에 국내로 복귀했다. 국내로 복귀해서는 다시 기량을 회복했고, 인천 유나이티드와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였고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 역대 최소 경기로 K-리그 통산 50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는 등 친정팀인 울산 현대 호랑이가 우승하는 데 한 몫 하였으며, K-리그 MVP를 받았다. 2006년 팀이 대한민국 슈퍼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한 몫 하였고, A3 챔피언스 컵에서는 J리그 우승 팀 감바 오사카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6-0 승리를 견인했고 중국 슈퍼리그 우승 팀 다롄 스더를 상대로 2골을 기록하여 4-0 승리를 견인하는 등 총 6골을 넣어 대회 MVP와 득점왕에 뽑히기도 하였다. 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 1차전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 우승 팀 알 샤바브를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쳐 6-0 승리를 견인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팀의 4강행을 이끌었다.
2007년 8월 31일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페예노르트로 이적이 확정되면서, 다시 한 번 유럽 리그로 진출하였다.
초반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눈에 띄었으나, 선발과 교체 출장을 반복하다 2008년 1월 발목 부상으로 리그 마지막 경기에 출천하며 시즌을 마쳤다. 즉 외국 리그에서는 단 한 골도 못 넣은 참담한 기록으로 2008년 7월 말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1년간 임대되면서, K-리그 무대에 다시 복귀하였다. 수원에서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물의를 일으켜 임의 탈퇴를 당했으며,무적 선수로 있던 2009년 3월, 전남 드래곤즈의 박항서 감독에 의하여 전남 드래곤즈에 들어왔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연봉을 백지 위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2009 시즌 개막전인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골을 오프사이드로 선언한 부심에게 '주먹감자'를 치켜드는 불손한 행동으로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6경기 출장정지와 600만원의 제제금, 출전정지 기간동안 홈 경기 기수 플레이 참여 등의 징계를 받았다. 결국 그는 전남 드래곤즈의 19경기 중 9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6월 27일 박항서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의 알 나스르로의 이적을
추진하던 이천수에게 28일 포항 스틸러스 원정에 동행할 것을 지시하자 그는 사타구니 부상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겠다고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코칭스태프와 언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김봉수 골키퍼 코치와는 주먹다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이천수는 6월 28일, 2군으로 가라는 박항서 감독의 지시를 불이행하고 팀을 무단이탈했다.
전남 드래곤즈 구단은 6월 30일, 이천수의 임의탈퇴를 요청했고 그는 결국 7월 2일, K-리그에서 임의탈퇴가 확정되어
사실상 더 이상 K-리그로의 복귀가 불가능할 전망이다. 이 사태 이후 이천수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출국하였고,
7월 13일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 알 나스르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이적 후 이천수는 시즌 초반 10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했다.
이천수는 알 에티파크와의 경기에선 동점골을 어시스트했고,2009년 12월 4일 알 파테흐와의 경기에선 2골을 넣으며
'맨 오브 더 매치(MOM)에 오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천수는 12월 20일에 있었던 알 에티파크와의 홈 경기에서 갈비뼈
부상을 당하며 26분만에 교체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이후 이천수는 부상에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체 투입에 그쳐야 했다. 5경기 연속 교체 출전했지만, 이후 이천수는 교체 출전마저 할 수 없었다. 2월 7일 이천수는 알 나스르 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8억원이나 되는 임금을 체불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천수는 임금문제로 팀을 이탈 하여
국내로 입국하였고 알 나스르는 이천수의 무단이탈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구단과의 마찰로 월드컵행도 좌절되는 등 최악의 결과가 되어버렸다. 현재까지도 알 나스르와의 계약은 유효하며 새로운 팀 계약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 대표 생활
2000년 4월 5일,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라오스와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4강진출에 기여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다시 국가대표로 활약하였다.
특히, 예선 1차전 토고전에서 프리킥으로 골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예선 3차전 스위스전에서의 패배로
16강행이 좌절되었고, 그라운드에 엎드려 펑펑 우는 이천수의 모습은 경기를 시청하던 국민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2007년 2월 7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친선경기에서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어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골은 축구팬들이 뽑은 '2007년 최고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5 - 아동문학가 박화목(朴和穆) 사망
박화목 [朴和穆, 1924.2.15~2005.7.9]
가곡 '보리밭'과 동요 '과수원길'의 작사가로 유명한 아동문학가이자 원로시인 박화목 씨가 9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황해도 황주 출신인 고인은 평양 신학교를 수료하고 만주 봉천동북신학교를 졸업했으며
한신대 선교신학대학원을 나왔다. 1941년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동심 주제의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쳤다.
기독교방송 교양부장과 편성국장, 한국방송회관 상무이사 등 언론계에서도 활동했다.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아동문학회 회장, 크리스천 문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열린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한국전쟁 문학상, 옥관문화훈장, 황희문화예술상,
한국아동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시인과 산양', '그대 내마음 창가에', '천사와의 씨름', '이 사람을 보라',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환상의 성지순례', '이처럼 꽃잎 흩날리는날에', '시인과 세월',
동시집 '초롱불, '꽃이파리가 된 나비'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숙희 씨와 아들 성혁(목사) 씨 등 1남 1녀가 있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5.07.09(토) 17:11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5/07/009000000200507091711244.html
1998 - 판문점 자유의 집 완공
자유의 집
현 자유의 집은 1998년 7월 9일 건립되었다. 각종 남북회담, 접촉, 교류를 지원하고 남북간의 연락업무를 수행한다.
구 자유의 집은 1965년 9월 건립되어 33년간 남북 적십자 연락관실로 사용되었다.
http://koreadmztour.com/jsa/jsa_10.htm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2층건물은 연건평86평으로 그동안 판문점 내 우리측 대표적 건물로 판문점 방문자가 견학을 해왔다. 1965년 9월 30일 준공 당시 한국의 국산품 전시장 및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소개하는 사진 전시장으로 쓰였던 자유의 집은 국군 공병대가 조립식 콘크리트 자재로 지은 판문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러나 30년의 세월로 노후되어 1996년 11월 13일 증개축하여 1998년 7월 9일 남북대결의 역사를 상징해 왔던 자유의 집이 새로 태어났다. 신축된 자유의 집은 통일의 뜻을 실어 북으로 날리는 마음을 표현한 방패연 모양의 지붕을 비롯하여 건물 양면의 곡선도 통일의 소망을 담아 두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http://www.dmzgallery.com/dmzgallery/sub_layout1.php?mid=1&r=view&uid=18
1955 - 러셀, 아인슈타인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11명 퍼그워시 성명 발표
1955년 7월 9일 철학자 러셀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11명이 캐나다의 작은 어촌 퍼그워시에
모여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핵무기 폐기 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차대전 이후 반핵 평화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이른바 '퍼그워시 성명'은 이렇게 발표됐다. 문건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캐나다 6개 나라의 국가 정부 수반에게 보내졌다.
1957년 7월 7일 이 성명에 동조하는 10개국 22명의 핵물리학자들이 퍼그워시에 다시 모여 '핵무기없는 세계, 전쟁없는 세계'를 주창하는 첫 회의를 열었다. '퍼그워시 회의'의 출발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이다. 창립 회의에서는 방사능의 분석을 토대로 핵실험의 중지를 요청했다. 그뒤 매년 한두 차례 여러나라를 순회하며 열리고 있는 이 회의는 어디서 열리든 모두 '퍼그워시 회의'라 부른다. 창립되던 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촉발된
미소경쟁의 와중에 양측 과학자들의 비공식 대화를 주선한 것을 시발로 핵확산 금지조약(NPT) 제안(1958년), 쿠바위기
중재(1961년),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1963년), 화학무기 협상(1969년) 등 이들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75년의 제25차 회의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유카와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북한 핵위기 때 북한과 미국간의 대화를 중재하고 제네바 합의와 경수로 제공의 길을 터놓은 것도 퍼그워시 회의였다.
퍼그워시 회의는 1995년 창립 멤버인 롯 블라트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며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회의는 창립 당시부터 고수하고 있는 몇가지 원칙 즉 회원제를 배격하고 오직 초청에 의해서만 회의 참석자들을 선정한다든지, 모든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고집 등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이란 미국, 소련간 수소폭탄 경쟁이 심화되던 1955년,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경과,
미국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박사가 중심이 되어 핵무기 폐기와 과학기술의 평화로운 이용을
호소한 선언문이다.또한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퍼그워시 회의가 개최되게 되었다.
선언에 서명한 사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버트런드 러셀.막스 보른
퍼시 브리지먼.레오폴트 인펠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허만 J 멀러.라이너스 폴링
세실 파월.요세프 로트블라트.유카와 히데키
1929 - 모로코 국왕 하산 2세(Hassan II) 출생
하산 2세 [Hassan II, 1929.7.9~1999.7.23]
본명은 Mawlāy Hassan Muḥammad ibn Yūsuf.
모로코의 국왕(1961~1999 재위).
하산은 프랑스 보르도대학교 부설 라바트 법학연구소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뒤 모로코 군사령관(1955)과
부총리(1960)에 임명되었다. 1961년 아버지 무하마드 5세가 죽자 왕위를 계승한 하산은 모로코 정치체제를 민주화하기 위해 1962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투표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행정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으며, 1965~70년에는 반대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실시했다.
1970년 그는 새 헌법을 만들어 제한적인 의회정치를 회복했고, 1971, 1972, 1973년에 쿠데타 기도가 잇달아 일어나자
약간의 사회경제적 개혁을 실시했다.하산은 능숙한 통치술로 모로코의 깨지기 쉬운 통합을 비교적 잘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외교면에서는 선왕보다 미국 및 서방측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스페인령 사하라(후에 서[西]사하라가 됨)를 둘러싸고 알제리와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 지역이 모로코의 영토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1975년 11월 그는 서사하라 병합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과시하기 위해 10만 명의 비무장 모로코인에게 녹색행진(Green March)을 하도록
요구했다. 서사하라는 양분되어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의해 각각 통치되었지만(1976), 이 승리는 모로코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하라의 독립을 선동하는 폴리사리오 전선의 게릴라들이 모로코 군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고, 모로코가 사하라를 탐낸 첫번째 이유인 인산염 매장지 개발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산의 가장 큰 업적은 중동평화에 기여한 점이다. 197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을 중재했고 그 후로 이스라엘과 요르단, 팔레스타인 간 화해에도 큰 역할을 했다.
1816 - 아르헨티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797 - 영국의 정치가, 정치사상가 버크(Burke, Edmund) 사망
1648 - 바로크 시대 최고의 오르간 제작자 슈니트거(Schnitger, Arp) 출생
660 - 계백(階伯) 장군 황산벌의 격전
518 -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Flavius Anastasius)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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