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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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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3 - 미국의 전설적 테니스 챔피언 아서 애쉬(Ashe, Arthur) 출생

애쉬 [Ashe, Jr., Arthur (Robert), 1943.7.10~1993.2.6]

아서 로버트 애시 쥬니어 (Arthur Robert Ashe, Jr., 1943년 7월 10일 ~ 1993년 2월 6일)는 미국의 프로 테니스 선수이다. 그는 총 3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따내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둬 미국 테니스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US 오픈이 열리는 빌리 진 킹 네셔널 테니스 센터의 센터 코트는 그의 이름을 따 아서 애시 스타디움으로 불린다.

그는 선수 생활 외에 왕성한 사회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1925 - 미국, 진화론 가르친 교사 재판
1925년 오늘, 미국 테네시주 데이튼(Dayton)시의 한 공립고등학교 교사가 신성모독 혐의로 법정에 섰다.

피고는 24살의 과학교사 존 스콥스(John Scopes) 씨!
그는 학생들에게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가르쳤다가 기소됐다.

테네시 주 의회는 앞서 같은 해 3월 13일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스콥스 씨는 결국 같은 달 21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백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3) 1938-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13세기 고딕 양식의 대표작인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1938년 오늘, 20여 년에 걸친 보수작업이 끝나 웅대하고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크게 훼손된 것을 종전 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모여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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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3 - 바하마, 영국으로부터 독립

바하마 연방(Commonwealth of The Bahamas)은 대서양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700여개의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1973년 7월 10일 325년간의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1776년 미 해군에 의해 며칠간 점령당했으며, 1782년에 1여년간 에스파냐가 장악하고, 1783년에는 영국에 의해 점령당했다. 왕실 신하들과 그들의 노예로 인한 인구증가가 발생하였다. 미국 독립전쟁 후 많은 노예들이 미국으로 도망쳤으며, 1834년 노예해방으로 한때 번창했던 목화농장이 침체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미국 남북전쟁의 여파로 1861~1865년에 바하마에 밀항자가 몰려들고, 이후 1920~1933년에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한 여파로 바하마에서 밀조주사업이 이뤄지면서 경제적으로 번성하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바하마는 관광업과 더불어 국제 금융 및 투자관리로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73년 7월 10일

바하마 연방이라는 새로운

국가로 탄생하며 325년간의 영국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715165&contentno=715165

 

2) 2009 - 노무현 전 대통령 안장식

故 노 전 대통령, 봉하마을서 ‘영원한 안식’

<앵커 멘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와 안장식이 봉하마을에서 열렸습니다.

먼저, 손원혁 기자가 담았습니다.

<리포트>

고인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마지막 재.

아버지를 보내면서,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가 김해 봉화산 정토원에서 치러졌습니다.

<현장음> 노건호(상주) : "여러분들이 지금 마지막 재까지 함께 해 주셔서 유족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큰 힘이됐습니다."

재가 끝나고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사저 옆 묘역으로 봉송됐습니다.

유해를 고이 가슴에 받든 상주 건호씨의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집니다.

유족들과 각계 인사들은 한 송이 꽃으로 고인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고인의 유해를 안장하는 봉안식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은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녹취> 한명숙(공동 장의위원장) : "오늘 우리는 대통령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깊은 슬픔을 대통령님과 함께

봉화산 자락에 묻었습니다."고인의 뜻에 따라 마련된 아주 작은 비석.

가로·세로 2미터, 높이 40센터미터 정도의 자연석 너럭바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고인의 넋과 뜻을 기리는 추모객들의 묘역 참배도 이어졌습니다.

고인을 영원한 안식처로 모시는 안장식을 끝으로 국민장은 마무리됐습니다.

장의위원회 측은 묘역과 생가를 관리하고 고인의 유지와 뜻을 이어나갈 재단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KBS 뉴스 손원혁입니다.KBS 뉴스 2009.07.10 (22:12) 

http://news.kbs.co.kr/article/local/200907/20090710/1808483.html

 

3) 1926 - 볼리비아 대통령 반세르 수아레스(Bánzer Suárez, Hugo) 출생

반세르 수아레스(Bánzer Suárez, Hugo, 1926.7.10~ ]

별칭은 El Petiso (스페인어로 '작은 사람'이라는 뜻).

볼리비아의 군인·정치가.

1971~78년 대통령을 지냈다.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교육과정을 이수했다. 1964~66년 레네 바리엔토스 정부의 교육장관을 지낸 뒤, 1967년부터 1969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미국주재 무관으로 근무했다. 1970년 9월 군부 내 좌·우익의 알력으로 정국의 불안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보수주의적인 반세르는 로헬리오 미란다 장군을 도와 알프레도 오반도 정부를 전복시켰고, 이듬해 8월 22일에는 스스로 후안 호세 토레스 장군의 좌익정권을 붕괴시켰다. 대통령 취임 이후 외국투자 유치에 적극적이었던 반세르는 노동조합과 시민의 자유·권리를 무단탄압함으로써 노조지도자·성직자·농민·학생들의 원성을 샀다. 1974년 2차례의 쿠데타 기도가 실패로 끝나고 대규모 농민봉기 또한 분쇄되었다.

1978년 반세르는 불출마의사를 표명했으며 선거부정 시비가 난무하는 가운데 후안 페레다 아스분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페레다 아스분 스스로가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지만 선거일이 다가오기도 전에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7월 21일 반세르는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반세르는 1979년 귀국해

그해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85년 다시 출마했지만 일반투표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결선투표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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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5 - 미국의 교육자 베순(Bethune, Mary McLeod) 출생

베순 [Bethune, Mary McLeod, 1875.7.10~1955.5.18]

국가 차원에서 흑인문제에 적극적이었던 미국의 교육자이며 소수인종문제에 관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고문.

베순의 부모는 남북전쟁 이전까지 노예였다. 그녀는 1893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콩코드 시에 있는 스코샤

신학교(후에 바버스코샤대학)를 졸업하고 1895년에는 시카고에 있는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했다. 남부의 여러 학교에서 교육자로 재직한 후 1904년 플로리다 주 데이토나비치에 여학교를 개설했다. 이 학교는 1923년 잭슨빌에 있는 쿡맨

남학교와 병합해 베순쿡맨대학이 되었다. 그녀는 은퇴한 해인 1942년까지 그 대학의 총장으로 재직했으며,

1946~47년에 다시 총장직에 있었다.베순은 미국 흑인문제에도 적극적이어서 1836~44년에 전국청소년기구 흑인업무부의 지도자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여군지원부대의 사관후보자를 선발하는 데 전쟁담당 서기관을 도왔다.

 흑인과 기타 미국내 소수인종 문제와 관련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UN) 국제기구 회의의 미국 국무부 대표 옵서버로 일했다.

 

2) 1895 -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칼 오르프(Orff, Carl) 출생

오르프 [Orff, Carl, 1895.7.10~1982.3.29]

독일의 작곡가 겸 지휘자.

뮌헨 출생. 1914년 뮌헨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각지에서 지휘활동을 하다가 1921년 H.카민스키에게 사사,

그 영향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음악에 흥미를 가졌다. 1924년부터는 킨터와 함께 음악과 체육을 결합시키는 데

힘썼으며, 또 E.J.달크로즈의 교육노선에 따라 1935년까지 음악교육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음악교육용의 독특한 작품 《슐베르크 Schulwerk》를 출판하고 1937년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카르미나부라나 Carmina Burana》를 작곡하여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1943년 《카툴리 카르미나》를

발표하고 이후 《안티고네》 《아프로디테의 승리》 등 그리스 비극을 제재로 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풍은 리듬을 중시하여 타악기를 많이 이용하고, 거기에다 단순 명쾌한 유니즌(unison)과 5회 반복의

선율을 사용하여 힘차고도 원시적인 효과를 냈다. 1950∼1960년에는 뮌헨대학교에 있었다.  

 

3) 1900 - 파리 지하철 개통

파리지하철 1호가 1900년 7월 10일 오후 1시 개통됐다. 인간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땅 속으로 이동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파리 서쪽 포트 마이요와 동쪽의 포트 드 반센누를 연결하는 이 1호선에는 중간에

16개의 정차역이 있으며 3량으로 구성된 전차는 기점으부터 종점까지 주행하는데 33분이 소요되었다.

오후 2시부터 전차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고 지하를 달리는 전차를 보려는 파리 시민들로 역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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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1 -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Proust, Marcel) 출생

프루스트 [Proust, Marcel, 1871.7.10~1922.11.18] 

프랑스의 소설가.

파리 근처 오퇴유 출생. 20세기 전반의 소설 중 질·양에 있어서 모두 최고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의 작자이다. 아버지 아드리언 프루스트 박사는 보스

지방 출신인 위생학의 대가로 파리대학교 교수였으며, 어머니 잔은 알자스 출신의 유대계 부르주아지 집안 규수였다.

섬세한 신경과 풍부한 교양을 갖추어 모자간의 마음의 교류는 프루스트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된다.

아버지의 고향 이리에, 할머니와 피서 갔던 노르망디의 해변, 파리의 샹젤리제가 유소년기의 작가가 경험을 쌓은 장소들로 모두가 후에 소설로 옮겨져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9세 때부터 천식()에 걸렸는데,

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숙환이 되었다. 또 어떤 시기부터 자각하게 된 동성애의 습벽이 그의 인생에

어두운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파리의 콩도르세중학으로 진학하여 상류사회의 자제들이 모이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동인지 《향연()》을 발행하였다. 또 사교계와 문학 살롱에 출입하면서 카이야베 부인, 스트로스 부인 등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이 작가로서의 인간관찰의 안목을 길러 주었다. 《향연》 시대의 문장은 A.프랑스의 서문을 얻어

《즐거움과 그 나날》(1896)에 종합되었는데, 동료들간에서도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병약무위()하게만 보였던 프루스트가 일관하여 문학적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이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발굴된

방대한 미발표 원고에 의해 밝혀졌다.《장 상퇴유》는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었는데, 1896∼1900년에 걸친 작품으로 추정되며, 또 《생트 뵈브에 거역해서》는 1908∼1910년경의 습작인데,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대성될 일관된 노력이 남긴 행적으로 보아야 할 작품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 《스왕가() 쪽으로 Du Cô té de chez Swann》는 1911년경에 대체로 완성을

보았으나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여 1913년이 되어 가까스로 자비출판되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있고 해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 l'Ombre des jeunes filles enfleurs》

가 발간된 것은 1918년이었다. 이것은 이듬해에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프루스트는 비로소 연래의 꿈이었던

문학적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죽음의 예감과 대결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성을 위한 수도사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일생과 바꿀 대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작가로서의 영광과 비참을 모두 맛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작품 외에 2권의 문집, 10여 권의 서간집과 미발표 원고가 있다.




 

2) 1995 -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 가택연금 해제

미얀마의 반체제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50)가 6년 간의 가택연금 만료를 수일 앞둔 1995년 7월 10일 연금에서

풀려났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군사정부에 의해 지난 1989년 7월 20일 소요선동혐의로 가택연금됐었다.

1945년 양곤에서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장녀로 태어나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그녀는 1972년 영국 대학교수 마이클 아리스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고 평범하게 살다가 198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영국에서 급히 귀국했다. 이때부터 국민들의 반 독재 시위에 참가했고, 이어 1988년 9월에 민족민주연합(NLD)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내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계속하여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 실시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에서 NLD가

친군부세력인 민족통일당(NUP)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1991년에 미얀마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 7월 가택연금 해제 이후 NLD의 사무총장으로 복귀해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 2002삼척세계동굴엑스포 기념, 2002.7.10 발행

2002 - 2002 삼척세계동굴엑스포 개막 (7.10~8.10)

뜨거운 여름 2002 삼척세계동굴엑스포와 함께
삼척 축제의 장으로 휴가오세요

개최기간 : 2002. 7. 10 ~ 8. 10 (32일간)
개최장소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 오십천 일원 및 부대행사장
(환선굴, 해신당공원, 황영조기념공원, 새천년도로유원지)

세계최초로 열리는 동굴엑스포
물과 시간이 빚어낸 신비의 세계로...
동굴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

다양한 농업상품들이 동굴엑스포와 어떤 만남의 조화를 연출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며 이제 당신을 동굴엑스포에 초대합니다.

삼척농업기술센터에서는 동굴 엑스포 예매입장권을 일반보통요금을
10,000원에(20% 이내 할인) 제공하오니 많이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033-573-2737)
동굴박람회 홍보영상

http://www.caveexpo.or.kr  인제군 농업기술센터

http://www.injeatec.go.kr/newweb/sub6/view.asp?seq=4&TBNAME=free&page=57 

 

1990 -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재선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오늘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서기장직에 재선됐다.

고르바초프는 이날 선거에서 찬성 3천4백11표, 반대 천백16표를 획득했다.
그는 당최고지도자로 재선임됨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반을 굳혔다.
고르바초프는 이후 옐친 등 급진개혁파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이듬해 1991년 12월 말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1962 - 최초 통신위성 텔스타1호 발사

1962년 7월10일, 미국의 AT&T사가 세계최초의 통신위성 텔스타(Telstar) 1호를 발사했다. 지름 88cmㆍ무게 77kg의

텔스타는 지구로부터 800∼5600km의 타원을 돌며 태양전력을 사용, 지구에서 쏘아올린 희미한 TV신호를 100억배로

증폭시켜 다시 지구로 전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만 낮은 고도의 타원궤도를 돌아 통신시간이 하루 30분에

불과한 것이 단점이었다.발사 후 텔스타가 적정한 위치에 도달하자 미국 메인주(州) 앤도버 근교에 있는 대형 나팔형

안테나가 이 위성으로 방향을 고정했다. 그리고 몇분 뒤 최초의 TV영상이 대서양 너머로 전송돼 유럽의 TV화면에

나타났다. AT&T사 옥상에 펄럭이는 성조기가 미국이 보낸 첫 영상이었다. 프랑스는 배우 이브 몽탕의 간단한

인사말로 미국인들에게 화답했다. 30초에 불과했지만 세계를 흥분시키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화ㆍ전신ㆍ팩시밀리 등까지 성공적으로 중계하다가 1963년 2월에 통신두절로 연락이 끊겼지만 1957년 스푸트니크

이후 발사된 여러 위성가운데 인류를 위해 실질적으로 기여한 첫 위성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2호는 1963년 5월7일에 좀더 높은 궤도로 발사됐다.

 

1924 - 누르미, 제8회 파리올림픽대회서 1,500m와 5,000m 경주에서 세계신기록

제7회 대회의 1만m·1만m 단교경주() 우승자이며 '달리는 인간기계'라고 불리는 핀란드의 장거리

육상선수 P.누르미(Paavo Nurmi)는 1,500m·5,000m와 개인·단체크로스컨트리, 3,000m단체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5관왕이 되었다. 이후 제9회 대회에도 참가하여 금메달을 모두 9개나 획득했고,

후일 1952년 올림픽 경기대회(헬싱키)에서 최종 성화주자로 선발되기도 했다.

 

1888 -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Chirico, Giorgio de) 출생

키리코 [Chirico, Giorgio de, 1888.7.10~1978.11.20]

그리스에서 출생하였다. 아테네의 미술학교에 다닌 후 뮌헨에 나가, 거기서 A.뵈클린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인 예술을

지향하였다. 1910년 이미 독자적인 회화정신이 형성되었으며, 사물이 순간적인 형상에서 깊은 가치를 나타내는,

일종의 형이상적 회화표현으로 나아갔다.
1911~1915년 파리에 머무르며 피카소 등과 사귀었고 입체파의 영향도 받았으나, 그의 본질적인 구상은 화면의 몽환적 구성을 향한 것이었다. 《어느 가을날 오후의 수수께끼》 《아침의 명상》 《거리의 우울과 신비》 등 1910년대 전반의 일련의 작품에서, 그리스·로마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대리석상, 음영이 짙은 투시적 건물, 기계적인 형식들이 얼키고

설킨 근대도시의 단편적 정경 등 이러한 연관성 없는 대상물을 주관적으로 끼워맞춰 몽환적인 고독의 세계를

재구성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이들 일련의 작품의 영향으로 스콜라 메타피지카(Schola Metaphysica:)라는 새로운 파가 그를 선구자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미래파 이후의 이탈리아화단을 풍미하였다. 1933년부터는 고전적 작풍으로 돌아가 차차 신선미를 잃었으나, 화단의 장로로서 존경받았다.

이 밖에 산문체로 몽상적 세계를 그린 소설 《에브도메로스 Hebdomeros》(1929)와, 자서전풍의 《내 생애의 추억 Memorie della mia vita》(1945) 및 《Commedia dell’ arte moderna》(1945) 등이 있다.

 

1856 - 세르비아 출신의 미국 발명가, 전기공학자 테슬라(Tesla, Nikola) 출생

1835 - 폴란드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비에니아프스키(Wieniawski, Henryk)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