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8-2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8-2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1)                                            2)                                                3)

 

1) 1894 - 소련의 물리학자 카피차(Kapitsa, Pyotr) 출생

카피차 [Kapitsa, Pyotr Leonidovich, 1894.7.8~1984.4.8]

구소련의 물리학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공과대학 졸업 후 모교에서 강사로 있다가(1919∼1921), 1921년 영국으로

망명,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번디시연구소의 E.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하여(1924∼1932), C.맥스웰의 장학금을 받았다.

처음에 C.T.R.윌슨의 안개상자 속에서 입자의 비적()을 입체적으로 관찰하였는데, 얼마 뒤에 강자기장()

으로 비적을 휘어지게 할 수 있음을 제안하여, 1923년 8만 G(가우스)의 자기장을 만들어 α입자의 비적을 촬영하였다.

그 후 강자장기의 창출에 노력, 코크로프트의 협력을 받아 특수한 발전기를 설계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27만 G의

자기장을 만들었다. 이 강자기장을 이용하여 극저온의 연구를 진행, 수소 ·헬륨 액화장치를 설계하였다.

1930년 왕립학회는 러더퍼드의 조언에 따라 카피차를 위한 자기 및 저온 연구를 위한 몬드연구소를 설립, 카피차는

그 소장이 되었으나, 1934년 정기적인 고국 방문에 즈음하여 소련정부가 국제정세를 이유로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그 후부터 소련에 머물렀다.

모스크바연구소 교수 겸 물리학문제연구소장으로 근무하며 자기 및 저온물리학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액화헬륨의 초유동성()과 제2음파()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또한 산소 ·수소 등의 액화장치

(카피차식 공기액화장치)를 완성하였다. 저온물리학의 기초적 연구의 업적으로 197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2) 1815년 -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종식, 루이 18세 파리 귀국

100일 천하[ 百日天下, Cent Jours ]

(영)Hundred Days.

프랑스 역사에서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에 도착한 1815년 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파리로 돌아온

1815년 7월 8일까지의 기간.

이 말은 센 주지사인 길베르 드 샤브랄 드 볼비크가 루이 18세를 환영하는 연설에서 처음 썼다.

나폴레옹은 3월 1일 1,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칸에 상륙해 즉시 파리로 진군했다. 루이 18세는 3월 13일 강(Ghent)으로 도망쳤으며 나폴레옹은 1주일 뒤 파리에 입성했다. 3월 25일 오스트리아·영국·프로이센·러시아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어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으며 결국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대패시켰다. 6월 22일 2번째로

폐위된 나폴레옹은 7월 15일 포로와 다름없는 몸으로 로슈포르에서 영국 전함에 승선한 뒤 정확히 3개월 만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상륙했다. 한편 루이 18세는 7월 8일 파리로 돌아왔다.  

 

3) 1839 - 미국의 실업가, 자선사업가 록펠러 (Rockefeller, John D.) 출생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7.8~1937.5.23]

록펠러는 미국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이다. 클리블랜드에서 중개 및 운송상회의 회계 조수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1859년 자신의 상회를 설립했다. 남북전쟁 때 곡물 중개로 큰 돈을 벌었으나, 클리블랜드의 입지상 곡물 중개에는 한계가 올 것을 내다보았다. 1860년대 초에 그는 펜실베이니아 서부 지역에서 증가하고 있던 원유 생산의 상업적 잠재력을 예견하고, 석유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유정(油井)과 정유소들 가운데서, 그의 정유소는 얼마 안 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했다. 철도회사와 유리한 수송비 계약을 맺어 경쟁력을 강화하고 군소 업체들을 매입함으로써, 1882년 무렵에는 미국 내 원유사업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미국 최초의 대규모 트러스트를 형성한 스탠더드석유회사의 기업 독점은 경쟁 기업들과 여론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마침내 1911년 셔먼 독점금지법을 위반한 것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던 록펠러는 1890년대 이후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나는 부자가 되려는 야심은 없었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은 내 목표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싶었다." - 존 D. 록펠러

                 1)                                       2)                                                3)

 

1) 1766 - 나폴레옹 군대의 수석 군의관 라리(Larrey, Dominique) 출생

라리 [Larrey, Dominique-Jean, 1766.7.8~1842.7.25/8.1]  

프랑스의 군의관.

나폴레옹 군대의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전장에 야전병원, 앰뷸런스 시설, 응급진료 등을 도입했다. 

툴루즈에서 삼촌과 같이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며 1787년에 북아메리카로 여행을 했다. 파리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했고 프랑스 혁명 때인 1792년에 북군에 배속되었다.

그후에 프랑스군 수석 군의관이 되어 나폴레옹의 원정의 대부분 즉, 이집트·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에서의

전투 및 워털루 전투에 종군했다. 나폴레옹은 그에게 제국의 남작 작위를 주었고,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의학적

명성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820년 설립된 의학 아카데미의 회원에 임명되었다.

최초로 트라코마의 전염성을 발견했으며(1802), 참호족에 대한 기술(記述)을 최초로 출간했다(1812).

 

2) 1900 - 경인선 전선(全線) 개통 (남대문역-제물포)

1899.9.18 - 경인선 철도 한국 최초로 개통 (노량진-제물포)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노량진-제물포 간을 잇는 33.2km였다. 영국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올린지 74년 만이었다.
경인선은 1889년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 모형을 가져 온 것이 철도부설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미국인 모오스는 1896년 고종 황제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아,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년 3월 27일 인천 우각리에서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자금난에 봉착한 모오스는

1898년 12월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그들은 1899년 4월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이날 인천-노량진 구간 개통식을 가졌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철도의 효시가 됐다.

초창기 기차는 탱크처럼 생긴 미제 ‘모갈’형으로 하루 2차례 왕복했다. 기차가 내뿜는 불똥으로 철로변 민가에는 화재가 빈발했다고 한다. 9월19일자 독립신문은 철도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기관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월미도행 ‘꽃열차’ ‘경인통학생 열차’ 등으로 유명했던 경인선은 일제하, 광복 공간, 한국전쟁 등 급변하는 역사 속

철길을 숨가쁘게 달리면서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 전철로 모습을 바꿔왔다.

경인선은 1965년 9월18일 복선에 이어 1974년 8월15일 전철화됐다.

 

경인선 철도 연혁

1974.08.15 - 경인선 전철화

1965.09.18 - 경인선 복선화

1900.11.12 - 경인선 철도 개통식(남대문역)

1900.07.08 - 경인선 철도 전선 개통(남대문역-제물포)

1899.09.18 - 한국 최초로 철도 개통(노량진-제물포)

1899.04.23 - 경인선 철도 제2차 기공식(인천역) 

1897.03.27 - 경인선 철도 기공식(인천 우각리)

 

3) 1895 - 소련의 물리학자 탐(Tamm, Igor) 출생

이고리 탐 [Tamm, Igor Evgenevich, 1895.7.8~1971.4.12]

구소련의 물리학자.

1895년 7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하였다.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하고, 크림대학교·모스크바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4년부터 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베데프연구소원을 지냈고, 1953년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L.만델슈탐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결정광학()이나 고체에 의한 분산광()의 양자론() 등을 연구하였으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기초론에 더 관심을 두었고, 핵내 입자의 성질에 관한 내용도 논하였다.

중성자의 자기모멘트에 관한 연구와 핵력 연구 등이 있으며, 열핵반응의 제어, 우주선()샤워에 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특히 I.M.프랑크와 공동으로 체렌코프효과의 이론적 해명을 하였다.

이 업적으로 1958년 P.체렌코프, 프랑크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                                            2)                                       3)

 

1) 1695 -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하위헌스(Huygens, Christiaan) 사망  

하위헌스(호이겐스) [Huygens, Christiaan, 1629.4.14~1695.7.8]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천문학자.

헤이그 출생. 레이덴대학을 나온 뒤 영국·프랑스·독일 등지에 유학하였다. 1655년 형인 콘스탄틴과 굴절()

망원경을 공동 제작, 토성()이 고리를 가진 것을 발견하고, 토성의 위성을 관측했다.

또 1656년 진자시계()를 발명했다.

1666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창립되자, 파리로 초청되어 최초의 외국인 회원이 된 후 1681년까지 중심적 인물로

활약했다.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박해가 시작되어 낭트칙령이 폐지되기 전에 귀국하였다.

역학() 부문에서는 탄성체의 충돌문제, 진자운동을 연구하여 운동량보존법칙, 에너지보존법칙에 해당하는

이론을 전개, 역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비유되기도 하는 저서 《진자시계》(1673)에서는 진자시계의 제작에서부터 진자운동의

이론적 연구로 단계를 높인 뒤, 사이클로이드에 따른 운동으로 등시성()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밖에도 원뿔진자, 주기의 공식, 원심력의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광학() 부문에서는, 데카르트·훅 등의 생각을 출발점으로 하여 복굴절() 및 빛의 전파속도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기초로 빛의 파동설()을 수립했다. 매질 에테르를 통해 전도되는 파동으로서의 빛을 포착하고 파면()의 전파를 구면파()의 중첩으로 보는 ‘호이겐스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저서 《빛에 관한 논술》은 1678년 완성되어 1690년 출판되었다.

 

2) 1851 -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Evans, Arthur) 출생

에번스 [Evans, Arthur (John), 1851.7.8~1941.7.11] 

영국의 고고학자, 크레타문명의 발견자.

유복한 제지업자()의 집안에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아버지는 고대 브리튼 문화, 특히 화폐의 연구 및 수집가였으므로 소년시절부터 고고학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청년시절에는 자주 동유럽북유럽의 미개 지역을 여행하고, 특히 당시 터키의 압제하에 있던 동유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77년 《맨체스터 가디언》지()의 통신원으로서 유고슬라비아에 파견되어, 당시의 영국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많은 리포트를 작성하였다. 1881년 아테네에 있는

H.슐리만을 방문하여 그 수집품에 자극받고 크레타섬에 관심을 가졌다.

1900∼1908년까지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고대 에게문명의 지배자 미노스의 거성인 대규모 궁전의 유적 전모를 밝혀내고, 또 이것을 근거로 종래 전혀 미지 상태로 있던 크레타문명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 발굴은 매우 학문적 ·조직적이고 면밀한 것이었는데, 동시에 거액을 투입하여 대담한 복원()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저서에 《미노스 궁전》

(4권, 1921∼1936)은 상세한 발굴 보고서인 동시에 크레타문명 연구의 기본이 되는 대저작이다.

1884년부터 옥스퍼드대학 애슈몰 박물관장으로 있었고, 1899년 크레타발굴재단을 설립하였다.



 

3) 1853 - 미국의 페리 제독, 일본에 첫 출현

1853년 7월8일 오후5시쯤, 3500t급의 증기선 사스크에한나호(號)를 기함으로 한 4척의 증기선과

범선이 일본 에도(현재의 도쿄)만 우라가(浦賀)항 근해에 출현했다.

일본인이 흑선(黑船)이라 부른 이 배들은 1852년 11월 미국의 노포크항을 떠나 대서양ㆍ케이프타운ㆍ인도양을 거쳐

중국 해안을 지나 220여일 만에 일본에 도착한 미국의 통상사절배였다. 배에는 페리 제독이 타고 있었고, 그는 수호조

약체결을 원하는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난생 처음보는 증기선에 혼비백산했다.

노쇠해진 바쿠후(幕府)도 수수방관 만 할 뿐 혼란에 휩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논란 끝에 일본이 친서를 접수하자

 페리는 도착 9일 만에 일본을 떠났다가 이듬해 초 8척의 함선을 이끌고 다시 에도만에 나타났다.

그 사이 일본은 개항을 결정하고 3월31일 미국과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체결, 하코다테와 시모다를 개항하고 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일방적인 내용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일본에게는 변혁의 도화선이었다.

215년 만에 쇄국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대양(大洋)으로 나가기 전 거쳐야 할 소용돌이에 몸을 맡겼다.

 

1867 -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 콜비츠(Kollwitz, Käthe) 출생

콜비츠 [Kollwitz, Käthe, 1867.7.8~1945.4.22]

독일의 화가·판화가·조각가.

1867년 7월 8일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출생하였다. 당시는 동프로이센 지역이었지만 현재는 러시아령이며 지명도 칼리닌그라드 (Kaliningrad)로 변경되었다. 고향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가 베를린과 뮌헨으로 이주하여

그림공부를 했다. 1891년 의사인 K.콜비츠와 결혼하여 베를린에서만 줄 곧 살았다. 처음에는 유화를 그리다가 뒤에 에칭·석판화·목판화 등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M.클링거와 E.뭉크 등의 영향을 받았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 The Weavers 1892>이라는 연극을 보고 당시 독일의 비참한 노동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참상을 표현한 《직공들의 반란》(1895∼1898)이라는 시리즈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베를린에서 대규모 전시회로 기획되었다. 이후 두번째 시리즈 작품인《농민전쟁》(1902∼1908)을 제작하였다. 자신의 막내아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2개월만에 전사하자 비통한 심정으로 세번째 시리즈 작품인《전쟁》(1922∼1923)을 제작하였다. 이후《프롤레타리아트》(1925), 《죽음》(1934∼1935) 등을 발표하였으며 억압속에서

착취당하는 민중을 표현하였다.  그녀의 테마의 연작 시리즈는 독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케테 콜비츠는 부당한 권력에 투쟁하는 예술가로 표상된다. 1919년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자

그녀의 모든 것이 박탈당하였고 1936년이 되자 작품 전시도 금지되었다. 2차대전 중 그녀의 집은 폭격을 받아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1945년 4월 22일 연합군에 의해 독일이 해방되기 전 사망하였다.




 

1838 - 최초의 경식비행선 제작자 체펠린(Zeppelin, Ferdinand von) 출생

체펠린 [Zeppelin, Ferdinand (Adolf August Heinrich) von, 1838.7.8~1917.3.8]  



독일의 경식(硬式) 비행선 발명자.바덴주()의 콘스탄츠 출생. 슈투트가르트의 공업학교를 거쳐 루트비히스부르크의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858년 중위로 임관되어 보병연대로 배속되었다. 군사연구를 위해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863년 미국의 남북전쟁에 참가하였고, 미국 최초의 군용 기구()를 띄우려고 시도한 후, 오스트리아전쟁 및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도 활약하였다.

1891년 육군중장으로 퇴역, 그 후 경식 비행선 연구에 몰두, 1900년 7월 2일 최초의 체펠린 경식 비행선이 할레에서

부양되었다. 16마력의 발동기 2대를 장치하여 매시간 20마일의 속도로 날았다. 뷔르템베르크왕()과 알루미늄 제조업자의 후원을 얻어 제2호가 건조되었으나 폭풍으로 난파되었다. 제3호는 다소 성공적이었다.

제4호는 프레데릭스하븐에서 루체른까지 비행하였으나, 기지로 돌아와 착륙할 때 폭발하였다.

1914∼1918년 그의 회사는 88척의 군용 비행선을 건조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한동안 건조되었으나,

1940년 이후로 그가 설계한 형식의 비행선은 쓰이지 않게 되었다.


 

1621 - 프랑스의 우화시인 라퐁텐(La Fontaine, Jean de) 출생

라퐁텐 [La Fontaine, Jean de, 1621.7.8~1695.4.13]

샹파뉴 지방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1641년 오라토리오회()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법률을 공부하면서 F.모크루아, 퓌르티에르 등의 문인과 교유하였다. 1658년 재무장관 푸케에게 장시() 《아도니스 Adonis》를

바치기 시작하여 1661년 그가 실각할 때까지 어용시인으로서 수많은 소시편()을 바쳤다. 푸케 실각 후에는 오를레앙 대공() 부인,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 델바르 부인 등의 집에 기식하면서 몽상가적인 성격과 천진난만성으로

재미있는 여러 일화를 남기고 생애를 마쳤다.

우화시인()으로서 불후의 명성을 남긴 그의 작품 종류는 다양하다. 그외에도 서정소시(), 서간시(), 보카치오와 아리오스토 등으로부터 취재한 풍류담() 《콩트와 누벨 Les Contes et Nouvelles en vers》(1665∼1685), 아풀레이우스에게서 주제를 얻은 소설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이야기 Les Amours de Psych et de Cupidon》(1669), 성인전()에서 취재한 《성()말크의 수인()의 시 Po de Saint Malc》(1673), 키니네의 효용을 노래한 《키니네송() Po me de Quinquina》(1682)을 비롯하여 테렌티우스의 번안 《환관() L’Eunuque》(1654)과 시정사건()에서 취재한 소극() 《보리샤르의 익살꾼》(1659 상연?) 등

극작에도 손을 대어 《다프네》(1682) 등 오페라 대본도 썼다.

그의 대표작은 12권으로 이루어진 《우화시집 Fables》(1668∼1694)으로, 약 240편의 우화시가 엮어져 있다.

예지와 교묘한 화술로 폭력을 제압한 고대의 노예 이솝에 대한 공감과 우화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흥미에서 출발하여 이솝 ·동양 우화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를 독창적 수법으로 다루어 서정 ·풍자 ·경묘()한 대화 ·콩트풍() 등

모든 패턴을 구사(使), 일종의 자유시형으로 노래하였다. 시구()의 거의 완벽한 음악성 및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희극을 부각시키는 절묘성 등은 후세의 모방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에게까지

친숙한 프랑스 유일의 우화작가로 알려져 있다.

 

1497 - 바스코 다 가마, 인도를 향한 항해를 위해 리스본항을 출항

1487년 말부터 다음해 초까지 B.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을 넘어 그레이트피시강까지

동진하여 인도양에 이르는 항로를 열었다.

디아스의 업적을 계승한 것이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로서, 그는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베르데곶 제도()를 경유하여 11월 초 희망봉 근처의 센트헬레나만에 도착한 뒤 동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를 경유하여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의 캘리컷에 입항하였다. 인도항로 발견을 기뻐한

포르투갈은 대규모 선대()를 파견하여 힘으로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의 세력을 제압하고,

1508년 2월 디우 앞바다에서 이슬람의 연합함대를 격멸하였으며, 2년 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요충인 말라카 공략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