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과 역사 7-11 세계인구의 날
헨리8세
1533 - 교황, 헨리 8세(Henry VIII) 파문
1533 - 교황, 헨리 8세 파문
잉글랜드 왕 헨리8세의 주요 관심사는 대포·신학·여성이었다. 해군부를 창설, 영국을 해양대국으로 발전시켰고, ‘신앙의 소유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학에도 해박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욕정으로 왕비도 6명이나 갈아치웠다. 형이 죽어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8세의 첫 결혼생활은 그런대로 순탄했다.그러나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헨리8세는 이혼을 결심하고 명분을 찾는다. 다행히 형제 아내와의 결혼을 금한 성경구절 레위기 20장21절이 눈에 띄었다.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이혼을 요청했지만 교황은 허락할 수 없었다. 당시 교황은 캐서린의 조카인 스페인 카를로스1세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8세는 의회를 통한 해법을 찾았다. 1532년 의회는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킨 잉글랜드 국교를 설립하고
왕을 수장으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공회는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1533년 7월 11일, 교황이 헨리8세 파문으로 보복했지만 약효는 없었다.
1533 -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파문을 당하다.
헨리 8세-헨리 8세의 중대한 문제-두 번째 결혼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과 회담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 칼레에서의 회의는 프랑스 왕국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지원해주었던 이래 정치적 승리였다. 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와 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곧바로 임신하였고, 왕실 관습에 따라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행사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533년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혼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1533년 6월 1일에는 앤의 이름이 왕의 배우자 목록에 오름에 따라 캐서린의 왕비 칭호는 박탈되었다. 1533년 9월 7일, 앤은 예상보다 일찍 출산하였다. 앤은 헨리 8세의 모후(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낳았다. 교황의 판단을 거절한 의회는 1533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합법적인 왕비는 앤 볼린이라고 확정하였다. 그에 따라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서출로 신분이 격하되었으며, 왕위 계승 순서에서 엘리자베스 다음이 되었다. 특히 이 법안에는 ‘그 어떤 외국의 왕자 또는 유력자’도 거절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왕국의 모든 백성은 이 법안을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만약 이를 거부할 땐 즉시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특히 헨리와 앤의 결혼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반역죄로 다스려 사형으로 처벌받았다.
잉글랜드 종교개혁 (1533-1540)
동시에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마지막으로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자 잉글랜드에서는 몇몇 법률이 더 통과되었다. 1534년 성직임명법을 반포하여 국왕에 의해 지명된 후보만이 주교로 착좌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1534년에 국왕지상법(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단언하였으며, 위 법 조항을 거부하는 이는 1534년 반역법에 따라 왕에 대한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승인하였다. 잉글랜드 신민들은 왕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높으신 폐하”를 의무적으로 말하게 하고 교황의 왕관 수여식을 “부당하고 무자비한 권리 침해이자 강요”라고 주장해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파문에 응대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한 채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1405 - 중국의 정화가 317척의 배를 이끌고 첫 원정에 나서다.
1405 - 정화 남해대원정 출항
[어제의 오늘]1405년 정화 남해대원정 출항ㆍ유럽보다 80년 앞선 ‘대항해 시대’
15세기말 유럽 각국이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와의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적은 자본으로 신대륙의 금과 은을 약탈해 한몫 잡겠다는 구상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연 것보다 80년 이상 앞선 시기에 동양에서는 이미 수백척의 선단과 수만명의 병사를 거느린 대규모 원정 함대가 인도양을 지나 중동·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제국의 명성을 떨치고 교역을 시작했다. 초라한 범선 몇 척에 100여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대박을 꿈꾸며 항해에 나선 유럽 아메리카 원정대의 ‘소규모 벤처사업’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명왕조때 정화는 중국이 낳은 위대한 탐험가이자 장군·외교관·무역상이었다. 윈난성 쿤양의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마화였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원나라 세력하에 있던 윈난성을 공격했을 때 소년 정화는 사로잡혀 거세당한 뒤 왕국에 헌상됐다. 이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 때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씨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됐다. 영락제는 인도양의 무역로를 개척해 교역을 재개하고 남쪽 먼바다까지 명의 명성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그는 당시 35세의 정화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정화의 대원정 준비는 국가적 사역이었다. 원정대의 함선중 가장 큰 것은 길이 150m, 폭 62m에 2500t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초대형이었다.
1405년 7월11일 정화는 317척의 함대와 2만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첫번째 원정을 떠났다. 정화의 남해 대원정은 1430년 선덕제 5년에 이뤄진 마지막 출항까지 모두 7차례나 이어졌다. 원정대는 오늘날의 동남아·인도·중동·동아프리카를 넘나들며 모두 37개국을 방문해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을 했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동남아 곳곳에 화교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인도양 각국에서는 정화의 초상을 모신 도교풍의 사원을 볼 수 있다. 그의 원정 분대는 동아프리카에 정착해 지금까지 후손을 남기고 있다.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인 셈이다.‘해상 강국’ 명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북방의 침략과 고갈된 국가 재정, 환관세력의 몰락으로 해양원정은 위축됐고 조정은 내륙으로 눈을 돌렸다. 중국이 물러난 바다에 유럽이 진출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봉을 돌았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콜카타에 도달했다. 디아스의 발견보다 86년 앞선 시기에 중국은 이미 아프리카를 지도에
그려넣고 있었고 콜카타는 정화 원정대의 오랜 중간 기항지였다. 하지만 과거의 영화는 무의미했다.
바다는 이미 서양의 무대였다.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10 17:57: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101757015&code=100100&s_code=ap005
1405 - 정화 남해대원정 출항
[역사속의 인물] 환관의 영웅 '해양왕' 정화
예로부터 宦官(환관)은 간사함과 음모의 대명사로 꼽혔지만 그들에게도 영웅은 있다.
'史記'(사기)를 쓴 사마천과 종이를 발명한 채윤, 그리고 '해양왕' 鄭和(정화`1371~1434)다. 그 중 정화는 장신에 체격이 우람하고 활달한 성격의 장군이었다. 조카에게서 제위를 찬탈한 명나라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일곱 차례 지구를 4바퀴 반(18만5천㎞)을 도는 대원정을 했다. 국력 과시용이었다. 1405년 오늘, 소주에서 1차 원정을 떠났는데 함선 62척에 승무원만 2만7천800명이었다. 길이 137m, 폭 56m의 축구장 크기만 한 대형 선박도 있었다. 중국인의 허풍인 것 같지만 1957년 난징에서 거대한 방향 키의 손잡이가 발견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베트남, 수마트라, 스리랑카, 인도, 아프리카 동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2002년 영국의 한 해군장교 출신은 "정화의 함대가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1421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주장을 폈다. 1433년 마지막 원정을 마치고 다음해 병으로 사망했다. 중국의 해양 개척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신들이 환관들을 견제하기 위해 원양선을 없애고 무역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난징에 무덤이 있다.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09년 07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1146&yy=2009
고미영
2009 - 여성산악인 고미영 사망
2009 - 산악인 고미영, 히말라야 하산 도중 실종
11일(이하 한국시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던 여성 산악인 고미영(41)씨가 하산 도중에 실종됐다.
고미영씨의 후원사인 코오롱스포츠는 "고미영씨가 하산 도중 실족해 벼랑쪽으로 떨어져 실종됐다는 것을 현지 캠프에 있는 대원들로부터 확인했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에 구조 요청을 해놓은 상태이며 회사에서도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고 12일 밝혔다. 고씨는 11일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해발 8천126m의 낭가파르밧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코오롱스포츠는 현지 대원과 위성전화 통화에서 "고씨가 정상에 오른 뒤 내려와 캠프4에서 휴식을 취하고 베이스캠프를 향해 다시 하산했다. 해발 6천200m지점에 이르렀을 때 고씨가 실족해 벼랑쪽으로 떨어진 것을 대원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코오롱스포츠는 고씨가 갑자기 난기류를 만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1년 코오롱 등산학교로 산악에 입문한 고씨는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천47m) 등정을 계기로 높은 산에 본격적으로 도전했다. 2006년 10월 히말라야 초오유(8천20m) 등정에 성공하고 나서 이듬해 5월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천848m)를 정복했다. 올해에는 히말라야 마칼루(5월1일), 칸첸중가(5월18일), 다울라기리(6월8일)를 이미 오른
고씨는 이날 낭가파르밧까지 오르면서 히말라야 8천m 이상 고봉 14개 봉 중 11개 등정에 성공했다.
한편 코오롱스포츠는 과천본사에 구조대책본부를 마련하고 현지에 구조단을 급파하는 방안 등을 협의하고 있다.
현지에서는 베이스캠프에 체류중인 산악인들이 구조 작업에 나서고 있으며 고씨와 등반 경쟁을 벌였던
오은선 등반대도 구조활동에 동참하기로 했다.
최태용 기자 cty@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9-07-12 오전 09:20:4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5266.html
2009 - 실종 산악인 고미영씨 ‘사망 확인’
1500m 굴러떨어진채 발견
산악인 고미영(41·사진)씨가 11일(이하 한국시각)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산 정상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 도중 실족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은 12일 “등반팀이 고씨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고 전해 왔다”고 밝혔다. 대사관은 “현지 구조팀이 헬기로 13일 시신을 운구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고씨는 10일 낭가파르바트산을 오른 뒤 하산하다 11일 밤 실족했다. 고씨의 후원사인 코오롱스포츠는 12일 “고씨는 10일 저녁 8시30분께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 11일 밤 10시30분에서 11시 사이에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며 “사고 지점은 해발 6200m로 지형이 좁아 로프를 설치할 수 없는 10~20m 구간”이라고 전했다. 발견 당시 고씨는 1500여m를 굴러떨어졌고, 머리 쪽에 출혈이 심해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걸로 추정됐다. 고씨가 실족한 낭가파르바트산(해발 8126m)은 전세계 8000m급 고봉 14좌 가운데 아홉째로 높은 봉우리로, 히말라야산맥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은 하산하기 어려운 가파른 지형이라 그동안 사고가 많았다.
고씨는 오은선(43)씨와 함께 국내 여성 산악인의 대표 주자로 꼽혀 왔다. 1991년 산악인으로 입문한 그는 키 160㎝에 몸무게 48㎏의 작은 체구로, 2007년엔 여성 산악인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3개를 연속 등정하는 기록도 세웠다.
고씨는 여성 최초 ‘8000m급 14좌 등정’이라는 기록을 놓고 오씨와 경쟁을 벌여 왔다. 고씨는 낭가파르바트 정복으로 올해 4개의 봉우리에 오르며 11개를 성공했고, 오씨 역시 10일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며 12개를 성공했다. 히말라얀클럽 오인환 회장은 “남자들도 1년에 1~2개 등정하는 것이 보통인데, 고씨와 오씨는 올해에만 5개 등정 목표를 세웠다”며 “두 사람의 경쟁과 무리한 등반 일정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한겨레 2009-07-12 오후 07:57: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5423.html
2009 -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 히말라야 하산길 추락사
8126m ‘낭가파르바트’ 등정 뒤… 13일 시신 운구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은 12일 “현지 등반팀과 위성전화로 통화한 결과 대원들이 고씨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현지 구조팀이 헬기를 동원해 13일 시신을 운구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며 “등반팀은 대사관 측에 장례절차 및 시신 운구 등 문제를 상의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고씨의 장례와 시신 이송 등 문제는 고씨 가족들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이후 협의를 통해 진행할 예정”이라며 “태국을 거쳐 이슬라마바드로 들어오는 비행편이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 있는 만큼 이르면 13일쯤 협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고씨는 지난 11일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해발 8126m의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 사고를 당했다. 고씨의 후원사인 코오롱스포츠는 “해발 6200m 지점의 캠프2를 100m쯤 앞두고 고정로프가 없는 구간을 통과하다 실족해 협곡으로 추락하며 실종됐다”고 밝혔다. 고씨가 추락한 곳은 ‘칼날 능선’으로 불리는 곳으로 평소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대원들끼리 로프조차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한 곳으로 알려졌다.
최초 사고소식을 알린 코오롱스포츠 관계자는 이어 “현지에서 수색 작업을 펼치던 헬기가 12일 오후 캠프1이 설치된 히말라야 매스너 루트 100m 위쪽에서 고씨가 정상 쪽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면서 “생존·구조 가능성에 실낱 같은 희망을 뒀지만 끝내 사망했다”고 밝혔다. 고씨가 발견된 지점은 1500~2000m 깊이의 협곡으로 둘러싸여 헬기 접근이 쉽지 않았다.1991년 고산 등반에 입문한 고씨는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047m) 등정을 시작으로 2006년 10월 히말라야 초오유(8020m), 이듬해 5월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정복했다.
특히 올해에는 히말라야 마칼루(5월1일), 칸첸중가(5월18일), 다울라기리(6월8일)를 오른 데 이어 이날 낭가파르바트까지 오르면서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개 봉 가운데 11개 등정에 성공했다.
고씨는 그동안 또다른 국내여성 산악인 오은선씨와 여성의 세계최초 14좌 등정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최병준기자 경향닷컴 2009-07-13 00:24:0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7130024085&code=940202
2009 - 지리산 새끼 반달곰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
올해 초 태어나 행방이 묘연했던 지리산 새끼 반달곰이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멸종 위기종 복원 센터는 지난 11일 생후 6개월로 추정되는 새끼 곰을 직접 찾아냈습니다.
복원 센터는 지난달 어미 곰의 서식지 근처에서 새끼 곰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발톱 자국과 털을 발견해 살아있을 것으로 추정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5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파악한 새끼 곰의 몸 길이는 50에서 60cm, 체중은 8에서 9kg 정도로 추정됩니다.
현재 지리산에는 모두 15마리의 반달곰이 살고 있습니다. 매일경제 2009.07.16 09:45:01
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22&cm=%EC%82%AC%ED%
9A%8C%20%EC%A3%BC%EC%9A%94%EA%B8%B0%EC%82%AC&year=
2009&no=386861&selFlag=&relatedcode=&wonNo=&sID=504
2009 - 지리산 아기반달곰 '잘 지내고 있어요'
올해 초 지리산국립공원에서 태어난 반달가슴곰(사진)이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최근 국립공원관리공단 멸종위기종복원팀의 현장조사로 확인됐다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15일 밝혔다. 아기 곰은 건강하며 몸길이 50~60㎝, 체중 8~9㎏에 이를 것으로 짐작됐다. 지난 1월 겨울잠을 자던 북한산 어미 곰 ‘엔에프(NF)-08’에게서 태어난 이 아기 곰은 2월 동면굴에서 어미와 함께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뒤 최근까지 보이지 않아 살아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멸종위기종복원센터는 지난달 현지에서 아기 곰의 것으로 보이는 털과 발톱 자국 등을 발견하고 아기 곰이 살아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센터 연구원들은 지난 11일 어미 곰의 서식지 둘레를 조사하던 중 아기 곰이 어미와 함께 나무 위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배근 센터 복원연구팀장은 “새끼는 몸 크기와 상태로 봐서 건강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어미한테서 먹이를 구해 먹는 방법, 나무 타기, 위험 대처 요령 등을 배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멸종을 막고자 2004년부터 러시아와 북한에서 새끼 반달가슴곰 27마리를 들여와 지리산에 풀어놓았다. 이 가운데 13마리가 죽거나 야생 적응에 실패해 다시 데려오고, 새끼 한 마리가 늘어 모두 15마리가 남아 있다.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한겨레 2009-07-15 오후 07:38:5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5996.html
2008 - 금강산을 여행하던 대한민국 관광객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다.
2008 - 금강산 관광객 북한군에 피격 사망
50대 여성 새벽 산책하다 군사지역 진입
현대 “북, 정지요구에 도주해 발포 밝혀”정부 유감 표명…금강산 관광 잠정 중단
금강산을 방문하고 있던 남쪽 관광객 박아무개(53·여·서울 노원구 상계동)씨가 11일 새벽 북한군의 총격으로 숨졌다. 정부는 12일부터 사건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오후 긴급 브리핑을 통해 “북쪽이 금강산 관광 사업자인 현대아산에 박씨 사망 사실을 통보해 왔다”며 “박씨는 11일 새벽 4시30분께부터 북한의 북강원도 온정리 금강산특구 내 해수욕장 주변을 산책하던 중 관광객 통제구역을 지나 북쪽 군 경계지역에 진입했고, 초병의 정지 요구에 불응하고 도주해 5시께 발포했다고 북쪽이 밝혔다”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래 금강산과 개성공단에서 남쪽 주민이 북쪽의 가해로 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사고는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당국간 대화가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남북관계 전반에 파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박씨 주검은 이날 오후 3시께 남쪽 속초병원을 거쳐 6시께 서울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이명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국민이 희생된 데 대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지시했다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한다”며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합당한 상응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통일부는 12일부터 예정된 금강산 관광을 중단할 예정이며, 11일 현재 금강산에 남아 있는 관광객은 예정된 일정을 마친 뒤 귀환토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개성 관광은 계속된다. 김 대변인은 “우리 관광객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번 사고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진상규명과 관련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북쪽도 이런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 협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홍양호 통일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관계부처 합동 대책반이 진상조사 및 향후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아산은 11일 현재 금강산에 체류 중인 남쪽 관광객이 이날 방북한 680명을 포함해 1300여명이며, 이들은 순차적으로 귀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금강산 관광은 19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사건으로 40여일 중단된 데 이어 2003년 4월에는 사스(중중 급성 호흡기 증후군)를 이유로 60여일, 그해 8월에는 정몽헌 회장 자살로 일주일 동안 중단됐다.
손원제 권태호 기자 wonje@hani.co.kr 한겨레 2008-07-11 오후 03:14:3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8268.html
2007 - 프랑스, 120만 명이 주기적으로 대마초 흡연
15~25세 연령층에 심해
프랑스인 120만 명이 주기적으로 대마초를 피우고 이중 55만 명은 매일 피우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일간 르 몽드가 11일 보도했다.
약물마약중독관측당국(OFDT)은 10일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주기적 흡연은 한달에 최소 10번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관계 기관이 대마초에 관한 전문 보고서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17세 때 청소년의 절반이 대마초 흡연 경험이 있다고 답할 정도로 대마초 확산 현상은 전 지역과 모든 사회 계층에서 나타났으며 15~25세 연령층에서는 하나의 현상이 돼 부모들의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지난 1970년 대마초 소지, 구입,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채택됐지만 프랑스는 대마초 소비가 가장 많은은 유럽국들에 속해 있다.
그런데도 지난 대선 운동 기간에 대마초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고 르 몽드는 지적했다. 대마초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9억1천900만 유로로 추산되는데, 이중 예방에 쓰이는 예산은 3천600만 유로에 불과하다.
이성섭 특파원 leess@yna.co.kr (파리=연합뉴스) 한겨레 2007-07-11 오후 05:14:50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221761.html
2007 - BBC “보존상태 완벽 새끼 매머드 발굴” 보도
전문가들 "눈.코.입 등 몸통 그대로 보존" 흥분
러시아 시베리아 북서쪽의 영구 동토(1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아 얼음으로 덮혀있는 땅)에서 보존상태가 완벽한 매머드 사체를 찾아냈다고 11일 영국 BBC온라인판이 보도했다. 지난 5월 러시아 야말 반도에서 한 목동의 발부리에 채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매머드는 6개월 정도 자란 암컷으로 밝혀졌으며 약 1만년 전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새끼 매머드는 코와 눈이 고스란히 붙어있을 뿐 아니라 몸통에 털도 얼마쯤 남아있는 채로 발견됐다.
러시아국립과학원의 알렉세이 티코노프 과장은 "보존상태만 놓고 본다면 세계에서 가장 값진 발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미국의 매머드 전문가 래리 아젠브로드 박사 역시 "이제까지 새끼 매머드를 찾아낸 사례가 단 3건에 그칠 만큼 이번 발견 자체가 무척 희귀한 경우"라고 덧붙였다. 몇몇 과학자들은 사체에서 DNA정보가 담긴 세포 등을 얻어 빙하시대를 마지막으로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춘 매머드를 되살려낼 희망에 부풀어 있다. 아젠브로드 박사는 "10년 전 얼어붙은 매머드 사체를 찾아냈을 때도 유전학자들은 `DNA만 있다면 복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자신했다"고 전했다.
새끼 매머드는 올해 말 일본 도쿄의 지케이 대학으로 옮겨져 내부장기 컴퓨터단층촬영(CT) 등 정밀검사를 거치게 될 전망이다.
이유진 기자 eugeni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7-11 오후 04:39:5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221740.html
김구
1876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백범 김구 출생
1876 -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김구(金九) 출생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김구는 일제침략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며, 해방후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초년에는 한학을 공부했다. 17세 때 동학에 입교하고, 이듬해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에서 선봉장으로 싸우다 패한 후 은신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일본군 장교를 때려 죽인 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으로 대항하기보다 국민을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1900년경부터는 구국을 위한 교육과 계몽사업에 투신했다.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석방자로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때마침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일하면서,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재무장을 거쳐 1940년대에는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본토를 수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8·15해방을 맞아 27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좌파에 반대해 모든 계급의 공동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세우려 했고, 이승만에 반대했으며, 단결해서 친일파를 숙청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외세를 배격해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한다>(1948. 2. 13)에서
1866 - (조선 고종 3)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대동강에서 불태움
1861 - 미국의 정치가 노리스(Norris, George W.) 출생
노리스 [Norris, George William, 1861.7.11~1944.9.2]
1859 -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를 출판하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1859년)는 찰스 디킨스의 역사소설이다. 두 도시란 파리와 런던을 가리킨 것으로 이야기는 이 두 도시를 무대로 전개된다. 시대는 18세기 말의 15년간, 프랑스 혁명의 준비기부터 최성기로 걸쳐 있다.
디킨스는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사>와 기타의 역사서적으로 당시의 정세를 연구하여 그것을 이 작품에 구체화하였다.
런던의 변호사 시드니 커튼이 사랑하는 여성 루시 마네트를 위하여 자진하여 단두대에 서는 순애(純愛)의 이야기가
프랑스 혁명의 광란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디킨스는 이 작품의 집필 당시 사랑했던 여성 엘렌 터넌에 대한 정열을 커튼의 사랑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두 도시 이야기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린 역사 소설이다. 1859년 4월부터 11월까지 신문에 연재될 당시, 영국의 시골에 사는 독자들은 내용이 궁금해서 길거리에 나와 신문을 기다릴 만큼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샐틈 없는 계획을 가지고 구성되었으며, 희극과 비극, 선과 악,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의 승화 등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특히 카턴이 마지막으로 마음 깊이 간직해 온 사랑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며 교수대에 오르는 비장한 장면은 디킨스의 문장력이 아니고는 맛볼 수 없다.
런던과 파리의 두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디킨스는 부자들을 다 악한으로 묘사하고, 귀족들에 반항하는 민중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등 그의 개혁적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http://www2.purunet.com/hw/hw_help/mun/mun_data/wor/13_1625.htm
1859 -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를 출판하다
[어제의 오늘]1859년 ‘두 도시 이야기’ 출판
ㆍ프랑스 혁명 소용돌이 속 처절한 사랑
1859년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출판됐다.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을 향해 치닫던
18세기 후반, 두 도시는 파리와 런던이었다.
프랑스 구귀족 출신인 찰스 대니는 1800년 런던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다. 그를 쌍둥이처럼 닮은 영국인 변호사 시드니 칼튼의 도움으로 대니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칼튼은 대니의 약혼녀 루시 마네뜨를 사랑하게 돼 “당신과 당신이 아끼는 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당하겠다”고 고백한 뒤 사라진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은 대니와 루시, 칼튼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루시의 아버지 마네트 박사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18년을 복역했고, 그 후유증으로 신발 만들기에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대니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친척 귀족들의 악행에 연루돼 감옥에 갇혀 사형을 언도받는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루시가 파리로 찾아와 백방으로 애써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이 사실을 알게 된 칼튼은 대니의 감방으로 찾아가 자신의 옷을 대니에게 입히고, 자신의 신분증을 들려 그를 런던으로 보낸다. 같은 마차 안에는 칼튼의 배려로 루시와 그의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대신 죽기로 한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칼튼이 단두대에 서는 장면으로 끝난다.
세기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사랑과 희생을 그린 이 소설은 ‘러브 스토리’의 전형으로 인기를 끌었다. 전 세계적으로 2억부 이상이 팔렸고, 우리나라에도 <이도비화(二都悲話)>라는 제목으로 일찌감치 번역돼 들어왔다. 적어도 5번은 영화화됐으며, 3차례 이상 드라마로 제작됐고, 뮤지컬로도 4번이나 만들어졌다. 그중 한 번은 일본의 여성 가극단 다카라즈카 극단의 작품이었다.<두 도시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을 앞두고 마지막 진통을 겪는 시대에 대한 우화로도 읽혔다. 소설에는 농부의 아들을 죽이고 동전 한 닢을 던져주는 오만한 귀족, 동정하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귀족, 복수하는 농부, 죄 없는 귀족 청년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슬퍼해서는 안되는 농부의 아내 등이 등장한다. 암울하면서도 역동적인 혁명 전야를 그린 첫 장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인용됐다. 그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좋은 시대인 동시에 가장 나쁜 시대. 현명한 시대인 동시에 우매한 시대. 신념의 시기였으나 또한 회의의 시기였고, 광명의 시절이었으나 암흑의 시절이기도 했던 시대…요컨대 참으로 현재와 같은 시대.”
최명애 기자 glauku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10 21:18: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102118365&code=100100
1857 - 지능을 최초로 수량화한 알프레드 비네 출생
1838 -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 출생
"미소도 웃음도 시간이나 돈이 들지 않지만 사업을 번창시킨다."
워너메이커는 책방 심부름꾼으로 출발하여 친절과 신용을 생명으로 삼는 백화점을 처음 만들어 크게 성공하였다.
사람들이 생각조차 못한 대담한 광고방법을 써서 광고 효과를 증명하였다. 애드벌룬 광고나 건물 위에 세운
큰 간판은 100여년 전에 워너메이커가 생각해냈던 광고 방법이다.
http://simfe.egloos.com/1313821
1836 - 브라질의 작곡가 안토니우 카를루스 고메스(Carlos Gomes, Antonio) 출생
카를루스 고메스 [Carlos Gomes, Antonio, 1836.7.11~1896.9.16]
아프리카의 차드공화국에서 발견된 700만년전의 원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의 두개골.
2002 - 영국 네이처誌, 인류·침팬지 공통 선조로 추정되는 700만년전 두개골 화석 발견 보도
인류의 선조(先祖) 중 가장 오래된 약 700만년 전의 두개골 화석이 아프리카 중부의 차드 공화국에서 발견됐다고
영국 과학주간지 네이처가 2002년 7월 11일 보도했다. 연구를 이끈 프랑스 포와티에 대학의 미셸 브뤼네(Brunet)
교수는 네이처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원인(原人)보다
100만년 이상 앞선 것"이라고 밝혔다.
현지어로 `삶의 희망`이란 뜻의 `투마이(Toumai)`라는 이름이 붙은 이 원인의 두개골은 침팬지와 그 크기가 비슷하지만 성인 남자와 유사한 얼굴을 지녔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연구팀은 목의 근육과 연결되는 두개골의 뒷부분을 볼 때, 원인은 직립 보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발견된 원인은 당시 사람과 침팬지의 특성을 동시에 갖춘 셈이다. 연구팀은 `투마이`가 인간과 침팬지의 진화 과정에서 이제까지 발굴되지 않아 공백으로 남아 있던 `잃어버린 고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뤼네 교수는 이 두개골의 발견으로 500만∼700만년 전에 인류가 원숭이에서 분화했다는 기존 학설과는 달리, 인류와 원숭이의 분화 시기가 최소한 7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다니엘 리버먼 교수는 "투마이 화석 발견은 소형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닌 중대한 발견"이라며, 두개골 화석이 인류의 진화를 추적해 나가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6 - 조선일보, 국내최초로 `콩기름잉크`로 인쇄
1996년 7월 11일 무공해 콩기름 잉크 인쇄에 들어간 조선일보는 이날부터 한국신문잉크사로부터의 기존 석유잉크 도입을 전면 중단했다. 신문제작 단계에서부터 친환경성을 실천하기 위해 종래의 석유잉크는 사라졌다. 콩기름 잉크는 생분해성이어서 석유 잉크와는 달리 자연 속에서 손쉽게 분해됐다. 스모그의 원인인 휘발성유기화합물의 발생량도 최대한 억제되었다.
1987년 미국신문협회(NAA)와 미국 농무부 농업응용연구소에 의해 개발된 콩기름 잉크는 199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보급이 확대되어 왔다. 국내에서 최초로 콩기름 잉크 개발작업에 참여했던 대한페인트잉크사 기술연구소 임종학 책임연구원은 "콩기름 잉크가 환경보전적 측면에서 지금까지 개발된 최상의 잉크 제품"이라고 말했다. 신문제작에 사용될 경우 잉크 사용량도 10% 이상 줄일 수 있으며 파지도 훨씬 적게 나오고 폐잉크 찌꺼기의 독성도 상당부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페인트 잉크사가 콩기름 잉크 제작에 뛰어든 것은 지난 1991년 미국내 콩기름 잉크 사용이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을 보고 미국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페인트 잉크사가 콩기름 잉크 제작에 뛰어들었다. 시제품이 만들어진 것은 1992년이었다.
1994 - 미국의 컴퓨터 공학자 게리 킬달 사망
게리 알렌 킬달(Gary Arlen Kildall, 1942년 5월 19일 ~ 1994년 7월 11일) 은
운영체제CP/M과 GEM의 개발자이며,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의 설립자이다.
생애
킬달은 1972년에 워싱턴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의 몬테레이에 있는
미 해군 대학원에서 교수로 있던 중, 킬달은 인텔 4004과 8008 CPU 상에서
동작하는 PL/I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현했다. 그는 이 언어를 PL/M이라고 불렀다.
킬달은 1973년에 PL/M의 호스트 개발 환경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운영 체제 구현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고, 결과물로 CP/M을 만들어 냈다. 그는 1976년 해군 대학원(NPS) 교수직에서 물러난 후 디지털 리서치사를 설립했으며, computer magazines 뒷페이지 광고 게재를 통해 처음 판매를 한 CP/M에 관련된 일들을 계속했다. 1975년 1월에 발표된 Altair 8800은 CP/M을 구동할 수 있는 최초의 상업 시스템이었으며, 그 해가 가기 전에 CP/M을 필요로 하는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한 몇몇 클론들이 출시됐다. 1977년까지, CP/M은 존재하던 운영체제 중 가장 인기있는 것이었으며, 거의 모든 인텔 8080 또는 Zilog Z80 기반의 모든 컴퓨터에서 동작할 수 있었다.
IBM은 1980년에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IBM PC 버전의 CP/M을 얻기 위해 디지털 리서치사와 접촉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킬달은 자신의 Pitts Special(곡예용 쌍엽기)을 타고 비행하느라 IBM측 대표단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IBM과의 협상은 킬달이 아닌 그의 아내 도로시가 주도했다. IBM측 대표단은 도로시가 그들의 비공개 협상을 받아들이기 원했지만 도로시는 매우 부담스러워 했다고 전한다. 혹자는 이 협상이 매우 불공평했다고 증언했다. IBM은 다시 빌 게이츠와 접촉했는데, 빌 게이츠는 그것이 일생 일대의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빌 게이츠는 CP/M의 클론인 QDOS를 시애틀 컴퓨터사(Seattle Computer Products)의 팀 패터슨으로부터 사들여서 IBM에 라이선스해주었는데, 이것이 MS-DOS/ PC-DOS의 탄생이었다. 나중에 IBM은 게이츠의 운영체제가 CP/M의 특허권을 침해한 사실을 알고 킬달과 접촉했다. IBM은 킬달이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IBM PC가 시판될 때 PC-DOS와 함께 판매하기로 계약했다. IBM은 CP/M의 가격을 250달러로 정했는데, PC-DOS의 가격은 40달러로 정한 바 있다. 주 운영체제를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제품으로 하기로 한 IBM의 결정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이크로컴퓨터용 소프트웨어 회사가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바뀌게 된 원인이 되었다.
CP/M 작업 이후에 킬달은, 마이크로컴퓨터에서 베이직의 확산을 우려하여, CP/M을 운영체제로 하는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전체 PL/I 프로그래밍 언어의 ANSI 표준 부분 집합인 PL/I-80을 만들었다. 이 밖에도 킬달은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로고나 CD-ROM 드라이브와 비디오디스크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는 등의 여러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다. 그는 CD-ROM 버전의 Grolier's를 만들기도 했다. 킬달은 1991년에 디지털 리서치 사가 노벨에 인수되었을 때,
퇴직하고 텍사스 주 오스틴 교외로 이사했으며, 캘리포니아에도 또 다른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1991 - 캐나다 내셔널 에어 전세기 DC8기 사우디아라비아제다 근처 추락. 262명 사망
1991 - 사우디 아라비아 지다 공항서 캐나다 소속 DC-8기 추락 261명 사망
1990 - 한국-홍콩-일본 간 해저 광케이블 개통
1990 - [오늘의 역사]홍콩-韓-日 해저 광케이블 개통
우리 나라가 최초로 건설한 해저 광케이블시스템이 1990년 오늘 본격 개통됐다.
홍콩~한국~일본을 잇는 이른바 'H-J-K' 해저 광케이블 개통으로 한국은 빠르게 증가하는 동아시아의 통신수요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일본이나 홍콩 등으로 연결되는 각종 태평양 횡단 해저광케이블과의 접속을 통해 전세계 모든 지역과의 통신이 원활하게 됐다. 또 국제 전송로가 기존의 위성통신과 해저 광케이블로 이원화돼
국제 통신서비스의 신뢰성 및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위성통신방식에서 생기는 통화상의 거리감이 해소돼
국내 통화와 같이 깨끗하고 선명한 통화가 가능하게 됐다.충청투데이 2008.07.10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1314
1985년 10월 17일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는 박철언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1985 - 박철언-김용환, 북한의 한시해-최봉준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막후 실무회담(판문점 평화의집)
1985년 7월 11일 오전10시 판문점 우리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남북한 밀사들이 비밀리에 두시간동안 만났다. 네차례의 서신왕래와 두차례의 실무접촉 협의를 거쳐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실무대표회담의 문이 열린 것이다.
한국측 실무대표로는 박철언(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과 김용환( 통일원 남북대화국 과장)이 지명됐고 북한측 실무대표로는 한시해(노동당중앙위 비서국 부부장)과 최봉준(판문점 책임연락관)이 지명됐다.
실무대표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측은 장세동 안기부장, 북측은 허담 노동당 중앙위 비서 명의의 신임장을 휴대키로 이미 합의한 바 있었다. 3번째 실무회담에서 양쪽 특사가 각각 상대방 남북한 정상을 만나기로 합의했다.
1985 - 언론기본법 시행령 개정
1985 - 경북 영풍에서 삼국시대 채색 고분벽화 발견
1984 - 수도권정비계획 공표
1984년 7월 11일 국토종합개발계획과 개별적 도시계획 사이에 위치한 광역적 차원의 법정계획인 수도권정비계획이 공표되었다. 서울의 과밀화에 대처하기 위한 인구집중방지책은 이미 1964년부터 국방상의 이유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최초로 서울 주변부터 수도권에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설치하고 1973년에는 주민세를 신설했다. 또한 무허가건물을 단속해 성남 등 외곽지역으로 철거민을 이주시키고 서울로의 유입인구를 최대한 억제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 왔다. 수도권정비계획의 특징은, 첫째, 각 권역별로 정비전략을 다르게 책정한 점, 둘째, 인구집중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물에 대한 신설과 증설을 억제한 점, 셋째, 주요 공공사업 시행시 인구영향평가를 실시하도록 한 점 등이다. 하지만 이 계획의 지속적인 추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제점 때문에 당초 의도한 성과는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4 - 충북 영동군 상공에서 군용헬기 추락, 김공한 육군대장 등 5명 사망
1983 - 서울시, 보신탕· 뱀집 등 도심영업 금지
1982 -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레바논사태 해결위한 11개안 평화안 제시
1981 - 카스트로 암살작전 실패
1981 - 쿠바난민, 카스트로 암살작전 실패
1981 - 인도-파키스탄, 양국 국경서 무력충돌
1980 - 미국 MIT공대 인공피부이식 성공
1980 - 미국 MIT대, 세계최초로 인공피부생산 피부이식에 성공
1980 - 대한민국의 탤런트, 영화 배우 임수정 출생
임수정(林秀晶,1980년 7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이자 텔레비전 배우이다. 1998년 쎄씨(CeCi)
잡지 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영화 《장화, 홍련》과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이후 주목받고 있다.
영화 《장화, 홍련》으로 제24회 청룡 영화제 신인 여우상, 제2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신인 여우상,
제24회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대표적인 동안 스타로 꼽히고 있다.
1979 - 美 첫 우주정거장 `스카이랩` 80년 임무 마치고 인도양 추락
1979 - 우주정거장 '스카이랩' 귀환(1979)
미국의 첫 우주정거장 '스카이랩(SKYlab)'이 1979년 오늘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왔다.
6년 동안 돌던 지구 궤도를 벗어나 지구 귀환길로 들어선 것이다.
스카이랩은 발사 당시 태양전지판 등 부품의 파손에 따른 고장으로 고도가 점점 낮아지다 결국,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대기권으로 진입하게 됐다.
스카이랩은 귀환 도중 오스트레일리아 서부와 인도양 상공에서 대기 마찰로 부서졌다.
이 과정에서 큼직한 파편들이 주거지역으로도 떨어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생기지 않았다.
소 한 마리가 파편에 맞아 다쳤다.
스카이랩은 1973년 5월 14일 발사됐다.
1973년과 1974년 사이에 우주인들이 세 번 이 우주정거장을 다녀왔다.
우주인들이 스카이랩에 머무른 171일 동안, 의학과 과학 등 여러 분야의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또 18만 장에 이르는 태양 사진을 찍은 결과 태양에서 어둡게 보이는 저밀도 영역인 '코로나의 구멍'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구관측을 통해서 석유와 광석이 매장된 곳도 찾아냈다.
1978 - 중국, 알바니아에 경제원조 중단
1978 - 대한민국의 탤런트, 영화 배우 김강우 출생
김강우 (金康宇, 1978년 7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1974 - 비상보통군법회의, 인혁당 피고인 7명 사형, 8명 무기 선고
1974 - 문교부, 중-고 교과서에 한자 함께 쓰기 결정
1974 - 문교부, 중고 교과서에 한자병용키로 결정 발표
1974 - 문화 교육부, 민관식 장관은 '교과서 한자 병용 방침' 발표
http://www.hangeul.or.kr/cap_np/hgn/024.htm
1974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안드레 오이여르 출생 /위키백과
안드레 안토니우스 마리아 오이여르(André Antonius Maria Ooijer, 1974년 7월 11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출신의 프로 축구 선수이다. 현재 소속팀은 PSV 에인트호번이며 포지션은 수비수로써 오른쪽 풀백과 센터백의 위치에서 활약할 수 있다.2006년에 블랙번 로버스으로 이적해오기 전에 PSV 에인트호번에서 9시즌에 걸친 장기간 동안 활약했으며 블랙번으로 이적하고나서도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을 이어갔고, 2009년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하였다.
1974 -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Lagerkvist, Pär) 사망
라게르크비스트 [Lagerkvist, Pär Fabian, 1891.5.23~1974.7.11]
1958 - 산업은행 연계자금 부정대출(약40억원) 국회서 폭로
1958년 7월 11일 민주당 박해정 의원은 국회발언을 통해 산업은행의 대규모 부정대출을 폭로했다. 즉 1958년 5·2총선을 약 2주일 앞둔 4월 20일부터 산업은행에서 기간산업 육성자금 명목으로 특혜자금 40억환을 12개 기업체에 부정대출 했다는 것이다.
대출목표를 80억환으로 책정한 이 특혜자금의 재원은 산업은행에서 차후 금융채권을 발행해 마련키로 하고 우선 산업은행
지불보증으로 시중은행이 먼저 대출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연계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업은행 자금은 이른바 정치자금의 루트로 알려져 많은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고 있었는데 특히 이 연계자금의 대출대상기업체 중에는 부실 섬유기업체들이 들어있어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더욱 거셌다. 이들 기업체는 실제로 1∼2년내에 파산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7월 15일 새로 구성한 제4대 국회에서 산업은행 연계자금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려 했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1958 - 멕시코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우고 산체스 출생
우고 산체스 마르케스(1958년 7월 11일 ~ )는 멕시코의 옛 축구 선수이다. 2007년 2월 7일부터 2008년 5월 31일까지 멕시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우고 산체스는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에서 열두시즌을 뛰었으며 이 기간에 프리메라리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수의 골을 기록하였다. 프리메라리가의 득점왕인 피치치를 다섯차례 수상했는데 이는 프리메라리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수상한 기록이다. 또한 1978년, 1986년, 1994년에 참가하였다.
1999년에 IFFHS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선수" 목록에서 26번째로 선정되었으며, 북중미카리브 지역에서
첫 번째로 선정되었다.
1957 - 한국통신협회 발족
1953 - 삼남일보 '이 견통령(犬統領)' 오식 사건
이승만 정권의 '소박한' 언론 탄압
그때나 지금이나 부정부패는 여전하지만, 그 시절은 그래도 그렇듯 어수룩한 시절이었다. 이승만정권의 언론 탄압도 이수룩한 면이 있어 정교한 공작의 수준에게까지 이른 건 아니었다. 물론 탄압의 이유와 방법은 유치하고 거칠었지만 그런 방법은 언론계 내부의 분열보다는 단결을 유도하고 독자들의 언론에 대한 성원을 끌어내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언론 탄압에 비해 매우 ‘소박한’ 수준이었다.
이승만 자신도 정교한 공작으로 언론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솔직하게 밝히는 편이었는데 그의 생각 역시 매우 ‘소박한’것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10월 14일 ‘중대담화’를 통해 신문의 발행부수가 적어도 10만부는 넘어야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서울에 있는 신문사를 2~3종으로 정비할 것을 제의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14개의 일간 신문이 나오고 있었지만 발행부수가 10만을 넘는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이승만은 정리 방안으로 신문 발행진의 자진 또는 협의 폐간, 민간 지도자의 협의를 통한 선별, 일반시민의 투표에 의한 선별 등 3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신문 정비론은 1950년 9월에도 공보처장 김활란이 제기한 바 있는 것이었는데, 신문들이 그런 방안을 수용할 리 만무했다. 물론 이승만의 제안도 언론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백지화되었지만, 이는 당시 대통령은 물론 이승만 정권의 언론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나 하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55년 3월 15일에 발생한 ‘동아일보’ 오식사건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기사 제목에서 ‘고위층’앞에 ‘괴뢰’라는 단어가 첨가된 실수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11만 2천부이던 발행부수는 종간 해제 후 4개월 경과시켜 20만부를 돌파하였다.
그 이전에 ‘大統領’을 "犬統領"으로 오식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대구매일신문’은 1950년 8월29일 1면 머리기사의 본문에 ‘이 대통령’을 ‘이 견통령’으로 오식해 무기정간 조치를 당하고 사장 이상조가 2개월간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상조는 신문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10월 1일자로 천주교 대교구장 최덕홍 주교에게 인계되었다. 또 1953년엔 ‘삼남일보’ 7월 11일 기사 제목에, ‘국민일보" 7월 23일 기사에 ’대통령‘을 ’견통령‘으로 오식하여 두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으며 담당자들이 구속돼 구류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다.
1955년 9월14일에 발생한 대구매일신문사 테러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대구매일신문’과 경북도경의 불편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1955년 초에는 4천2백부이던 매일신문의 발행부수가 1955년 말에는 1만 부를 돌파하였다. 즉,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언론에 대한 탄압은 있었을지언정 언론이 권력에 포섭당해 국민을 속이는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신문 유통과정에 대한 통제도 가끔 일어났다. 충남서천의 판교경찰지서는 1954년 9월 동아일보 지국장에게 독자 명부의 제출을 강요했으며, 1955년 9월 서울 신당동에선 일부 통장들이 ‘동아일보’의 구독자 명단을 조사해 문제를 일으켰다. 또 지방도시나 농촌에선 경찰이 이른바 ‘야당지’의 독자를 조사하고 신문 구독을 방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지국의 명의를 도용하여 자유당에게 불리한 기사의 게재를 보류하도록 본사에 전보를 치는 ‘귀여운 술수’를부리기도 하였다.(카멜레온과 하이에나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100
1952 - 유엔 공군기 평양-황주-사리원지구에 사변후 최대 규모의 폭격
1951 - 서울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1949 - 관상대, 첫 기상단파 방송개시
1947 - 서울대 제1회 졸업식
1947 - 서울대 제1회 졸업식, 졸업생 215명
1938 - 장고봉에서 일본-소련군 충돌
1937 - 일본, 화북에 출병 성명
1937 -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사망
거슈윈 [Gershwin, George, 1898.9.26~1937.7.11]
1936 - 독일-오스트리아 군사협정 성립
1934 -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Armani, Giorgio) 출생
아르마니 [Armani, Giorgio, 1934. 7. 11~ ]
소리바다 개발자 양정환씨.
2002 - 법원, 음악파일 공유사이트 `소리바다` 음반복제 금지 결정
2002년 7월 11일 법원이 한국음반산업협회 회원들이 인터넷 음악파일 공유사이트 `소리바다` 운영자를 상대로 낸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소리바다를 통해 음악파일을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해서는 안된다"며 "사용 중인 서버를 소리바다 서비스 또는 같은 방식 서비스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장기 불황에 시달려온 음반업계와 가수·작곡가 등은 이 결정에 환영 일색인 반면, 소리바다와 유사한 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들과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상황에서 법원이 시대를 역행하는 결정을 내렸다"며 반발했다. 이에따라 음악 파일인 MP3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주고받으면서 급속히 성장해온 디지털 음악문화도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음반협회가 강경했던 것은 음반시장의 불황이 소리바다같은 인터넷 복제 사이트로 인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음반협회는 2000년 4,100억원이던 음반 매출액이 2001년 3,700억원으로 떨어졌고, 2002년에도 2001년의 같은 기간에 비해 40% 이상 매출액이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2000년 5월 문을 열어 2002년 7월 현재 1,000만명 전후의 회원을 갖고 있는 소리바다 서비스는 법원의 판결로 2002년 7월 31일부터 서비스가 중단됐다. 그러나 8월 24일 `소리바다`가 `소리바다 2`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서비스를 재개하면서 소리바다 논란은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소리바다 2` 프로그램은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버를 거치지 않고 사용자끼리 음악파일을 교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패션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1934 - 패션 제왕 조르지오 아르마니 출생
1934년 7월 11일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이탈리아 북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밀라노에 있는
의과대학에 들어갔지만 입학한 지 2년 만에 군에 입대한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우연한 기회로 백화점에서 일하게 되면서
패션과 인연을 맺었다.사람과 옷의 완벽한 조화를 패션 철학으로 여기는 아르마니가 디자이너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1980년대 도시적 감각의 패션을 선보인 데서 비롯됐다. 할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주인공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맡으면서 돈과 명성을 단번에 거머쥐었다. 아르마니는 전 세계에 5000명의 직원을 두고, 연간 13억유로(약 1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패션 왕국을 건설했다.그는 프랑스의 크리스찬 디올에 이어 1982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인물에도 선정되었고,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04년 세계 갑부’ 순위에서 247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제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아르마니 재킷은
군살 없이 날렵한 몸매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이 됐다.
1934 - 아르마니 출생
[책갈피 속의 오늘]1934년 아르마니 출생
“모든 것이 무대에 준비돼 있습니다. 사진작가들과 관객이 앉아 있습니다. 패션쇼가 시작돼야 하는데 의상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자주 꾸는 악몽입니다.”(레나타 몰로, 라이프스타일 창조자 아르마니 패션제국, 2006년)
패션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의 고백이다. 빈틈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 항상 자신만만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의 고뇌는 인간적이다. 백발의 이 74세 노(老)신사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소유자다. 마른 체구에 강렬한 눈매를 갖고 있는 조르조는 ‘아르마니 패션제국’의 왕이다.조르조 아르마니는 1934년 7월 11일 이탈리아 피아첸차의 암늑대상이 있는 곳으로 이름난 콜롬보 거리에서 태어났다. 무솔리니의 독재가 절정에 치닫던 때였다.
처음엔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밀라노대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2년만 다니고 1953년 중퇴했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다시 사진을 공부했다. 백화점에서 사진사로 아르바이트도 했다.
첫 직업은 1957년 밀라노에 있는 리나셴테 백화점의 쇼윈도 장식가였다. 하지만 그의 장식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구매부서로 발령받는다. 남성복 구매담당 보조업무를 맡아 좋은 직물을 고르는 법을 배운다.
1964년 디자이너 겸 패션사업가인 니노 체루티 밑에서 일을 배운다. 남성의류 회사인 히트맨의 옷을 디자인한다. 1975년 그의 이름을 딴 ‘조르조 아르마니 S.p.A’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건축도안가인 친구 세르조 갈레오티와 손잡았다. ‘아르마니’라는 그의 첫 브랜드인 남성 기성복이 발표되고 이듬해엔 여성복을 내놓았다. 아르마니주니어도 선보였다.
그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의 옷을 디자인하면서부터다. 1979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 주연으로 출연한 리처드 기어의 옷을 만들어 패션계의 오스카상인 니먼 마커스상을 받았다. 리처드 기어가 입은 그레이와 베이지가 섞인 은은하고 우아한 옷을 밀라노의 떠오르는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가 의상을 맡은 영화만도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다.“사람을 옥죄는 딱딱한 옷은 버려라. 인체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그의 옷은 결코 디자인이 화려하지 않다. 특별하지도 않다. 과장이나 기교는 찾아볼 수 없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배제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아주 심플하다.‘재킷의 제왕’으로 불리는 아르마니. 그의 의상철학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옷’이다. 인체 곡선을 따라 흐르는 옷, 그래서 인체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디자인이 바로 아르마니 패션이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동아닷컴 2008-07-11 03:05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711/8601058/1
1928 -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일본의 비행경기대회서 3등으로 입상
朴敬元(1901?~1933.8) - 대구 출생. 1917년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를 중퇴하고 1920년 일본 요코하마[橫濱] 기예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대구 자혜의원(慈惠醫院) 간호사가 되었고, 1925년 일본 도쿄[東京] 가마타 자동차학교[蒲田自動車學校]를 거쳐 1926년 가마타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가 되었다. 1928년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린 고도(高度)경기대회에서 3등을 하여, 2등 비행사자격증을 받았고, 1933년 만주국(滿洲國) 방문비행 도중 모국(母國) 방문비행을 하고자 출발했으나, 시즈오카현[靜岡縣] 겐가쿠산[玄嶽山]에서 짙은 안개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 1927년 초까지 박경원은 194회 째 비행 기록을 세웠고 25시간 44분, 이상을 탔다. 1회 비행은 보통 3분에서 5분이므로 25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1927년 1월 25일 그녀는 3등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일본에 온지 3년 만이었다. 28일 면허증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월 29일 가마다 본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동경 朝日新聞, 1927년 1월 30일자)
그녀는 이어 2등 비행사에 도전했다. 일본 최초의 2등 여류 비행사도 탄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12일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도쿄 시부야 구(澁谷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제 4회 비행경기대회가 열렸다. 이때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박경원을 포함 네 사람이 참가했다. 그중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과 같은 한국 여인 이정희(李貞喜, 1910-?), 그리고 일본 여자 1명이었다.
박경원은 고도상승 경기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30분간 요요기 연병장 상공을 나는 것이었다. 2회, 3회 때는 입상하지 못했으나 이 때는 입상한 것이었다. 삼궁교(參宮橋)에서 시상식이 행해졌다.
박경원은 같은 해 7월 30일 2등 비행사가 됐다. 면허증 번호는 81번이었다. 여성으로는 일본인 두 명에 이어 세 번째였고 우리 나라 여자로는 모두 처음이었다. 물론 한국 최초는 안창남이었다.
그녀가 2등 비행사가 됐을 때 일본인 교장과 교관들은 “박 양은 일본 비행학교의 꽃으로서, 머리가 좋은 미인이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정희도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이정희는 박경원보다 1년 늦게 비행학교에 들어 왔다. 1927년 2월 13살 어린 나이였다. 서울의 숙명 여학교를 나온 그녀는 박경원보다 출신이 좋았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와 동기동창이었다. 박경원이 동승해서 직접 조종 지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박경원의 뒤를 이어 1927년 11월에 3등, 1929년 7월에 2등 비행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영향으로 무용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고 박경원을 떠나갔다. 그녀는 1930년대 초 서울 누상동에 살다가 1933년 8월 14일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또 한사람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한다. 그녀는 김복남(金福男)이다.
1939년 3월 2등 비행사가 되었다. ... <근대사현장> <현해탄> 월간아리랑 1999-12-25
/http://www.ariran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443
1921 - 몽골 독립
1921 -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다
몽골 역사
1755~ 反淸.反봉건.反식민지 운동을 계속 전개
1911 辛亥革命으로 淸이 붕괴되면서 獨立運動 확산
1912~1919 러시아 보호하에 자치주로 존립
1921.7.11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흐바타르(D. Sukhebaatar)는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中國軍을 몰아내고 독립선포
몽골은 이날(7.11)을 혁명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7.11~13을 몽골민족 최대의
축제인 "나담축제" 기간으로 선정
1924.11.26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人民共和國 선포
세계 2번째의 사회주의 국가
1946, 1947 중국은 外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나, 內몽골은 중국의 自治區로 편입
1961 UN 가입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52679&logId=4028234
몽골의 역사이야기
몽골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해 몽골(蒙古)에대한 유래를 먼저 설명하는 것으로 한다.
사실 몽골(Mongol)은 원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였으나, 징기스칸이 지닌 특별한 카리스마(Charisma)로 인해 오늘날엔 전체 몽골인 과 몽골어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卑下)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데서 비롯 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민족간의 갈등과 경쟁은 결국 상대 민족을 비하 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아직도 한자로는 몽고(蒙古)라고 표기 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 엄연히 몽골리아의 공식 국가명칭이 MONGOLIA 이고 민족이나 민족어를 지칭할 때 MONGOL 이라고 표기 함으로 우리는 몽골국 또는 몽골인, 몽골어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으로 보인다.몽골의 역사는 역시, 정복자 칭기스칸 과 함께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초기 몽골족 가운데는 몽골계 외에도 투르크나 탕구드계(西夏)등 여러 언어 집단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3 C 초 테무진이 칭기스 칸에 추대되고 몽골제국을 창건하면서 세계무대에 인식된 [칭기스칸]과[몽골]이 갖는 두단어의 카리스마(Charisma)로 인해 그들 소수부족 각자의 언어와 의식 모두는 철저히 몽골에 동화되고 만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몽골족 대부분이 칭기스칸을 자신들의 시조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일 것이다.이렇게 주류를 이룬 몽골과 소수부족들이 어우러져 형성된 몽골은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元)왕조를 세우면서 드디어 국가형태를 갖게되는데, 원(元)왕조 [1271 ~ 1368 ]는 원(元)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재위 1330-1370:元 순제)-를 끝으로1368년 주원장(홍무제)의 명(明)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후 몽골은 지금의 고비사막지역으로 쫓겨나 13세기의 화려한 모습을 숨긴채 북원(北元)이라는 고립 국가로 남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1377년까지 고려는 북원과 부분적으로 무역거래를 했던 것으로 보임)
이후 1616년 누르하치에 의해 건국된 후금은 1636년 국명을 청(淸)으로 바꾸고, 내몽고지역에 대한 복속을 완료하며,1644년 중원을 제패함으로 결국 몽골은 만주계 청(淸)왕조의 속국이 되고 만다.
이처럼 몽골에게 17C는 몽골족이 러시아와 중국 두 강대국에 병합되는 시기라 볼수있는데, 바이칼호 주변의 부리야트 몽골족은 러시아제국에 병합되고, 내.외몽골은 청조의 영토에 편입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남.북 몽골의 청조 편입 시기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내몽골(남몽골)과 외몽골(북몽골)이 구분되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된다. 청(淸)의 속국이 된 몽골인들은 결국 황폐한 초원지대로 밀려나 오늘날과 같은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갖게 되는데, 1911년 청(淸)조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탄생 속에 몽골은 가장 영향력 있는 활불인 제8대 젭춘 담바 호탁트를 국가수반(보그드 항)에 추대하면서 독립을 선언한다. (이때 내몽골 지역의 활동가들이 합류했고, 몽골족의 통합을 위해 내몽고지역에도 군대가 파견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민족통합운동은 러시아와 중화민국의 간섭으로 실패한다.)하지만 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외몽골 지역이 원래 중국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중화민국이 침공해 들어오자, 결국 몽골(외몽골)은 독립을 취하하고, 1915년 몽골·중국·러시아의 캬흐타 조약으로 중화민국의 자치구로 전락하게 된다. 더욱이 1917년 러시아의 혁명으로 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 강대국의 균형이 깨지자 1919년 중화민국은 몽골 왕공들을 협박하여 몽골의 자치 지위마저 반납하게 한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의 반혁명(白軍)세력이 러시아 본토에서 혁명세력에 패주난입해 몽골지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중에 1920년 몽골지역으로 들어온 반혁명(白軍)세력 운게 른 남작은 몽골인의 반한(反漢)감정을 이용하여 1921년 수도 후레(울란바타르)지역의 중국군을 러시아 국경 캬흐타로 몰아내고, 라마교의 활불(달라이 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워 외몽고에 일시적인 독재자가 된다.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몽골인들은 러시아 혁명군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을 맞서 열심히 투쟁하고 결국 1921년 수도 후레를 점령하게 되는데, 몽골은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7월 11일을 지금도 독립기념일로 기념한다.
이렇게 몽골 해방군에 의해 성립된 몽골정부는 다시 제8대 젭춘담바 호탁트를 국가수반으로 하게 되고, 정부 내각수반 갖추게 된는데 이때까진 특별히 사회주의 색채를 띄지는 않았지만, 1924년 접춘담바의 사망이후 조금씩 사회주의 색채가 나타나서 결국 1924년 11월 몽골 인민공화국(인민당-인민혁명당)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한편 내몽골 지역은 일본군이 1930년대를 거쳐, 2차대전 패전 전까지 내몽골을 장악 하고있었지만 계속되는 게릴라전쟁으로 인해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런중에 당시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성 연안에 머무르고있던 모택동은 일본의 점령지 내몽골에 대해서 자치구로 인정할 것을 약속하게되고, 결국 1947년 5월 1일 내몽골은 중국에서 첫 번째 자치구가 된다.
몽골국(외몽골)지역은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중국정부도 외몽골 지역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고,이렇게 됨으로 오늘날과 같은 외몽골(몽골공화국) 과 내몽골(중국 자치구)의 형태를 갖게 된다. 외몽골(몽골국)이 1961년에 유엔(UN)에 공식가입하고, 1964년 중~몽 국경이 확정되어지자 내 외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실제로 숫자상 몽골족(Mongolian)들은 몽골 독립국-외몽골(몽골국)-보다 내몽골 지역에 더 많이 살고 있지만, 오늘날 이들(내몽골인)의 독립의지 또는 외몽골인(몽골국)의 통일의지는 몽골지기 개인생각엔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한민족 南.北韓간의 통일과 몽골족 中.蒙간의 통일은 닮은 듯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Mongol School (몽골의 역사이야기)
http://www.mongolschool.com/mongol/02ms-gol-his.htm
1920 - 미국의 배우 율 브리너(Brynner, Yul) 출생
브리너 [Brynner, Yul, 1920.7.11~1985.10.10]
1912 - 국문학자 이재수 출생
1903 - 소련의 정보장교 루돌프 아벨(Abel, Rudolf) 출생
아벨 [Abel, Rudolf (Ivanovich), 1903.7.11~1971.11.15]
1903 - 맞교환 소련 스파이 1호 루돌프 아벨 출생
[역사 속의 인물] 맞교환 소련 스파이 1호 루돌프 아벨
루돌프 아벨. 본명은 빌리암 겐리코비치 피셔. 소련이 서방과 맞교환한 스파이 1호다. 1902년 오늘 영국에서 망명 중인 독일계 러시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후 부모를 따라 소련으로 가서 코민테른의 통역사를 거쳐 무선통신 훈련을 받고 KGB의 전신인 OGPU(연방국가정치보안부) 요원으로 발탁됐다.
1947년 에밀 로버트 골드퍼스라는 가명으로 캐나다를 거쳐 미국 뉴욕에 잠입,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미국 내 소련 스파이망을 지휘, 관리했다. 본국의 소환 명령을 받은 부하 레이노 헤이헤넨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정체가 탄로날 때까지 9년간 암약했다. 1957년 FBI에 체포돼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62년 2월 10일 독일 베를린 근교의 글리니케 다리에서 소련 정찰비행 중 격추된 CIA의 U-2기 조종사 개리 파워스와 교환됐다.(이후에도 이 다리에서 두 차례 더 스파이 교환이 이뤄졌다) 루돌프 아벨은 체포되기 전 그가 소련으로 보낸 전문에 쓴 이름이다. 체포됐음을 뜻하는 암호였다. 미국에서 냉대를 받은 개리 파워스와는 달리 레닌훈장을 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본업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신원이 드러난 이상 스파이로서의 가치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1971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7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6828&yy=2011
1901 - 멕시코의 법학자 마리오 드 라 쿠에바(de la Cueva, Mario) 출생
드 라 쿠에바 [de la Cueva, Mario, 1901.7.11~1981.3.6]
아보가드로
1811 - 이탈리아 과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가 현재,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알려진
《단위입자의 상대적 질량 및 이들의 결합비를 결정하는 하나의 방법》을 출판하다
폭풍의 언덕`(1939)에서의 로렌스 올리비에.
1989 - 영국의 배우, 연출가 로렌스 올리비에(Olivier, Laurence) 사망
올리비에 [Olivier, Laurence (Kerr), 1907.5.22~1989.7.11]
영국의 영화배우 겸 연출가 로렌스 올리비에가 1989년 7월 11일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올리비에는 60년간의 배우생활중 연극 1백21편 영화 58편에 출연했고 아카데미영화상을 두번 수상하는 등 20세기 최고의 배우로 칭송을 받았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 해석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맥베스` `오셀로` 등 주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연출하거나 주연을 맡았다. 비평가들이 그를 `오셀로의 초상`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1907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5세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올리비에가 처음으로 무대에 선 것은 15세 때였다. 23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서 본격적인 배우활동을 시작, `헨리 5세`나 `리처드 3세`같은 셰익스피어 작품 만이 아니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폭풍의 언덕` `재즈 싱어` 등에도 출연했다. 스스로 감독-제작-주연을 맡은 영화 `햄릿`은 1948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여배우 질 에스먼드, 비비언 리와 결혼한 적이 있으며 사망 당시 부인인 조안 플러라이트와 런던에서 살아왔다. 1947년 기사, 1970년 귀족 작위를 각각 받은 그는 신장수술과 암 등 지병으로 몇년간 투병생활을 해오다 1987년 80회 생일을 끝으로 은막에서 은퇴했다
1988 - 캄보디아 시아누크, 대통령직 사임하고 프랑스로 망명
1987 - 세계 인구 50억 돌파
1987 - 유엔, 세계 인구의 날 선포
1987 - [오늘의 역사]1987년 세계 인구 50억 돌파
1987년 오늘 세계 인구가 50억 명을 돌파하면서 국제연합(UN)은 이날을 '세계 인구의 날'로 지정·선포했다.
세계 인구는 1804년 10억 명을 넘어섰고 123년만에 20억 명을 돌파했으며 이후 1960년 30억 명,
1974년 40억 명, 1987년 50억 명, 1999년 60억 명을 순차적으로 돌파했다.
세계 인구가 10억 명 늘어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각각 33년, 14년, 13년, 12년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생활환경이 그리 녹록하진 않다.
UN 산하 세계식량계획에 따르면 7초당 1명의 어린이가 굶어죽는다.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생활비로 사는 최빈곤층이 60억 인구 가운데 12억 명에 달한다.
충청투데이 2008.07.10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1313
1987 - 일본의 가수, 탤런트 카토 시게아키 (NEWS) 출생
카토 시게아키(加藤成亮, 1987년 7월 11일 ~ )는 일본의 자니즈 사무소
소속의 남자 아이돌이며, NEWS의 일원이다. 현재 아오야마학원대학교 법학부 4학년 재학중이다.
버드 존슨
2007 -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인 린든 존슨의 부인 레이디 버드 존슨 사망
레이디 버드 존슨(Claudia "Lady Bird" Johnson, 1912년 12월 22일~ 2007년 7월 11일)은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인 린든 존슨의 부인이다. 텍사스 주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클로디아 앨타 테일러(Claudia Alta Taylor)이다. 어릴 적부터 버드(Bird)라는 애칭을 얻었으며, 이 애칭을 널리 사용하였다. 1934년 젊은 정치인인 린든 존슨과 결혼하였고, 정치인의 아내로서 내조하면서 여러 사업에 관여하여 재산을 모으기도 하였다. 1960년 남편 린든 존슨이 제37대부통령에 당선되어 1961년부터 미국의 세컨드 레이디가 되었고,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어 남편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면서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남편의 대통령 재직 기간 중 그는 자연보호 운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고속도로 미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그 법은 ‘레이디버드 법’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9년 남편의 퇴임과 함께 고향 텍사스 주로 돌아갔으며, 1973년 남편의 사망 후에도 환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았다. 2007년 건강이 악화되어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6 -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 98과 윈도 ME의 지원을 중단하다.
2005 - 전주시 평화동 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최병국 탈옥
탈옥수 최병국 탈주에서 검거까지
지난 11일 전주교도소를 탈옥했던 최병국(29)이 탈주 51시간만에 대전에서 검거됐다.
강도상해 등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최씨는 아내와 딸이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고, 신학 공부를 위해 조용한 독방에서 생활하고 싶은데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옥을 결심했다.
최씨는 탈옥 삼일 전 교도소 내 빨랫줄에서 운동복 바지와 줄무늬 셔츠를 훔쳤고 11일 오전 훔친 옷을 입고 죄수복을 겉에 걸친 뒤 오전 11시 40분께 운동시간을 이용, 운동장 뒤편 철조망을 넘었다.
이어 죄수복을 벗고 사복 차림이 된 최씨는 때마침 지나가는 교도소 직원을 따라 아무런 제지도 없이 철문을 통과했고, 교도소 콘크리트 정문도 민간인과 섞여 손쉽게 빠져나왔다.
교도소 앞에서 택시를 탄 최씨는 청주로 향하던 중 신탄진휴게소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내린 뒤 휴게소 철망을 넘어 다른 택시로 옮겨탔고, 오후 2-3시께 대전시내에서 친구와 동생을 잇따라 만나 용돈을 받았다.
최씨는 다시 택시를 타고 보문산 인근을 배회하다 보문산 팔각정에서 하룻밤을 잤고, 다음날 오후 5시께 충남대학교에서 열쇠가 꽂혀있는 코란도 승합차를 훔친 뒤 산성동에서 차량 번호판 두 개를 훔쳐 바꿔달았다.
딸과 아내가 있는 춘천으로 차를 몰던 최씨는 북대전나들목에서 경찰이 검문검색을 하자 차를 돌린 뒤 대전시내를 배회했고 어젯밤 오후 10시 30분께 대덕구 중리동 모 여관 앞에서 차 배달을 주문, 다방 여종업원 A씨(19)씨를 차량으로 납치해 3시간여 동안 감금했다 풀어줬다. 최씨는 이어 동구 용운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을 잤고 다음날 오후 1시 30분께 도주비용 마련을 위해 대덕구 신대동 중고차 매매상사에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가 한 시간 뒤 용의차량을 발견한 경찰에 검거됐다. 최씨는 51시간 동안 자유를 누린 대가로 남아있는 형기 3년 외에 4년 6개월 정도의 형을 더 살게될 전망이다. (대전=연합뉴스) 한겨레 2005-07-13 오후 06:19:48
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1000/2005/07/002001000200507131819295.html
2002 - 개각(국무총리 서리에 장상씨 임명. 장관급 7명 교체)
1893 - 미키모토 진주양식 성공
[책갈피 속의 오늘]1893년 미키모토 진주양식 성공
미키모토 고키치(御木本幸吉·1858∼1954)가 진주에 매혹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향인 일본 미에(三重) 현 도바(鳥羽) 시는 진주와 해녀의 고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지만, 미키모토는 늘 진주를 따내는 해녀들을 보면서 이 ‘신의 선물’에 푹 빠졌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이상분비물이 바로 진주다. 1800년대까지 진주는 자연만이 줄 수 있는 보석으로 여겨졌다. 1888년 미키모토는 진주 양식장을 만들어서 이 관념에 도전한다. 인간의 손으로 진주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조개껍데기를 잘라 동그랗게 만들어 조개에 넣고는 바구니에 담아 바다 속에 집어넣었다. 가업인 우동 집을 접고 진주 양식에 뛰어든 남편을, 성실한 아내는 말리는 대신 “하늘의 뜻이라면 어쩌겠느냐”며 도왔다. 미키모토가 진주 양식에 성공한 것은 거의 파산에 이를 즈음인 5년 뒤, 1893년 7월 11일이었다.
구슬을 반으로 잘라낸 형태인 반원(半圓) 진주의 양식에 성공해 수출하면서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특허권을 따냈고 생물이 처음으로 특허를 받게 돼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고 미키모토가 여기에만 만족한 것은 아니다. 그의 꿈은 완벽한 구슬 모양의 진원(眞圓) 진주를 만드는 것이었다.
1905년 진원 진주 양식에 성공했을 때 엄청난 ‘발명’에 세계는 흥분했다. 미키모토의 진주는 천연진주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모조 진주’라는 비방도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지,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진주를 만들어내는 자극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는가 인위적으로 삽입했는가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미키모토 진주와 천연진주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동을 겪으면서 미키모토 진주의 판로가 세계로 확대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만났을 때 미키모토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진주는 달의 눈물로 만들어지지요?” 미키모토는 답했다. “제 진주는 인간의 눈물로 만들어집니다.” 묵묵히 그를 돕다 30대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리면서 한 얘기였다. 특허기간이 만료돼 많은 사람이 진주 양식업에 뛰어들었지만 미키모토의 진주는 지금껏 최고로 손꼽힌다. 파종한 것 중 28%만 완전한 진주가 되는데 미키모토는 그중에서도 10% 분량의 최고 품질 진주를 제품에 사용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아닷컴 2007-07-11 03:02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1/8465098/1
1890 - 영국의 공군 원수 아서 테더(Tedder, Arthur) 출생
테더 [Tedder, Arthur William, 1890.7.11~1967.6.3]
1885 - 프랑스의 화가 라 프레네(La Fresnaye, Roger de) 출생
라 프레네 [La Fresnaye, Roger de, 1885.7.11~1925.11.27]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한 천마총 발굴현장(1973년 7월11일).
1973 - 천마총 유물 출토 시작
원래는 황남동 98호 고분을 발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을 발굴하기에는 발굴단의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예비지식도 얻을 겸 그 옆 155호 고분을 시험용으로 삼았다. 막상 봉토제거작업을 시작하니 아직 도굴범의 손때가 타지 않은 처녀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발굴단을 흥분시켰다.
1973년 7월11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유물이 출토됐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가물고 더워 발굴팀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주민들 사이에는 "왕릉을 파헤쳐 큰 가뭄이 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대박이 터질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7월13일, 1500년간의 긴 잠에서 깬 신라금관이 출토됐다. 신라금관으로는 7번째, 광복후로는 최초였다. 8월23일, 발굴단의 눈을 의심케 하는 유물 한 점이 또 출토됐다. 천마도(天馬圖)였다.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고분 이름을 천마총으로 짓자 이번에는 경주 김씨 측에서 들고 일어났다. 김씨 성을 가진 임금의 무덤이 분명할진데 하필이면 왜 말 무덤이냐는게 그들의 항변이었다.
1973 - 남북한 7차 본회담(평양)
1973 - 브라질의 보잉 707기, 파리 오를리 공항 접근도중 추락 122명 사망
1973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시행령 공포
서울 등 14개 도시 93개 지역 시위 금지
1972 -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축(1972)
완공을 1년 앞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1972년 오늘 건물 안팎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조개 껍데기 모양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공사기간과 비용이 계획보다 훨씬 증가했다.
원래 예정보다 9년이 늦은 1973년에야 문을 열게 됐고 당초 예상 건설비의 1400%가 투입됐다.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자는 정부와 시드니 시민들의 열망이 밑받침됐다.
하버브리지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페라하우스는 극장과 녹음실, 음악당, 전시장을 갖췄다.
오페라하우스는 시드니 항구에 정박해 있는 요트들의 닻 모양을 되살린 조가비모양의 지붕이
바다와 묘한 조화를 이뤄 시드니를 상징하는 건물로 자리잡았다.
1969 - 타이완 해군 무력시위(1969)
1969년 오늘, 타이완 해군이 대규모 무력시위를 벌인다.
타이완과 중국 사이에 극도의 전운이 감돌던 시점이어서 전 세계가 이를 주시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중국 해군 함정 두 척이 타이완 해군의 포에 맞아 격침됐다.
타이완은 중국 해군의 보복을 막기 위해 무력시위를 벌인 것으로 분석됐다.
장제스 타이완 총통은 미국의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자국의 해군 함정 등을 시찰하며 완벽한 대비를 당부했다.
타이완의 무력 시위 후 두 나라 사이에 더 고조된 전운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사그라졌다.
1968 - 일본 도쿄에서 '권진규 조각전(테라코타)' 개최(11~20일)
・7월 11일~20일,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권진규조각전(테라코타)」 을 개최한다.
테라코타 30점으로 구성되었으며 출품작은 아래와 같다.
《 강원의 여인》,《 비구상》,《 재회》 (No.50),《 춘엽니》 (No.51),《 목욕 하는 여인》,《 志媛의 얼굴》(No.53)
《 애자》 (No.55),《 휴식》(No.64), 《곤스케》 (No.58),《 선자》 (No.60),《 두상》 (No.20),《 봉숙》,《 목욕 후》《 포즈》 (No.62),《 단지의 여인》,《 아침》,《 낮》,《 싫어》 (No.65), 《그 후》,《 이튿날 아침》,《 땋은 머리》 (No.67),《 혜정》 (No.70),《 영희》 (No.23),《 말》,《 명자》(No.38),《 청호동의 여인》,《 서강의 여인》
《 연실의 머리》,《 시녀》(No.71),《 댄스》
전람회는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고,『 도쿄신문(』7월19일 석간),『요미우리신문』(7월18일) 등에 소개된다.
『 도쿄신문』은「 근대적 구상조각의 재미 권진규 조각전」이란 제목으로
「 권진규는 1922년에 태어나, 전쟁 후, 무사시노미대에서 조각을 배우고 20년간 일본에 체재하였고 최근 10년간은 귀국하여 서울에 체제하고 있는 한국 작가이다. 소품의 전신나부상군과 흉상 20점의 합계 30점을 전시하였다. 전신상은 이 작가의 공부의 폭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르델이나 마이요르, 이집트 조각, 타나그라 조각 등을 흡수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이들 전신상은 개성적 집중력이 약하고 포즈의 표정에 의지하고 있는 약점이 보이긴 하지만, 흉상 작품군에서는 독자적인 것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있어 흥미롭다.
가슴에서 목까지의 형태를 삼각추의 양괴(量塊)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의 현대조각가 자코모 만주(Giacomo Manzu)를 연상시키지만, 물체의 안정감이나 크기는 잘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연속되는 얼굴은 불필요한 살을 깍아 내어 갸름하게 표현하였다. 표면적인 세밀함을 추구하지 않고 크고 무게 있는 안정감을 표현한 조각성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일본인의 감성과는 다른 풍토성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요소 요소에서는 날카로운 감각이 배어 있으며 근대적인 구상조각의 재미를 지니고 있다.머리카락이 없는 작품《( 춘엽니》 등)이나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작품 《( 지원》,《 애자》 등)은 작품으로서는 완성된 느낌을 주지만, 욕심을 낸다면《 시녀》와 같이 머리카락을 제대로 파악하여 목과 가슴이 이루는 삼각추 형태와 어떻게 결합 하는가를 발전시켰다면 한 층 복잡하고 재미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라고 가능성을 포함한 평가를 한다.
『 요미우리신문』은「 강인한 리얼리즘」이라 평하고,
「 최근에는 현대조각이라고 하면 추상조각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적인 동향에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 일본인의 특징이다. 조각계도 전반적으로는 디자인에 근접하여 종래의 양감을 적용시킨 구상조각 등, 이미 구시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상조각 중에 뛰어난 작품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 잡는 작품이 존재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실력있는 구상조각를 기대하고 있는 작금에 있어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 10일까지 니혼바시화랑에서 열리는 권진규 조각전이다.테라코타 작품 30점. 전신상이나 말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약 10점의 흉상이 주목할만 하다.《 지원》,《 춘엽니》,《 애자》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 모델을 두고 제작한 것인데,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깍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
이들 작품을 보면, 목에서 허리에 걸쳐 확인되는 요약된 형태에서는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 자코모 만주와 닮은 면을 볼 수 있다. 또한, 둥그스름한 머리나 높은 코, 크게 뜬 눈에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을 구축한 수메르인들의 원초적 초상조각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럽의 영향이 있다하더라도, 구운 흙 속에 대지의 생명이 지닌 솔직함이나 순박함과 함께 강인함을 불어 넣으려고 하는 작자의 조형 자세와 풍토는 분명히 동양 바로 그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자는 1922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전쟁 중에 일본에 건너와 종전후 무사시노미대 조각과를 졸업했다. 1959년에 귀국하여 지금은 서울의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 교수라고 한다. 어쨌든, 이들 초상조각에 보이는 강인한 리얼리즘은 구상조각이 빈곤한 현대 일본 조각계에 하나의 자극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라고 높게 평가한다.출품한 작품 가운데《애자》(No.55)와《춘엽니》(No.51)는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에 기증한다. 이 전람회의 팜플렛에는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조각가 기노우치 요시(木内克), 미술평론가 혼마 마사요시(本間正義)의 글이 실려 있다.(평전) /권진규사이버미술관
http://www.jinkyu.org/sub2.html
1966 -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한 제네바협약 국회 동의
1966 - 제8회 월드컵축구대회 개막 (영국)
1966년 오늘, 제8회 월드컵축구대회가 영국에서 개막됐다.
런던에 전시돼 있던 줄리메(Jules Rimet) 우승컵을 대회 개막 8일 전에 잃어버렸다가 개막 하루 전에
되찾는 해프닝 속에 대회가 시작됐다.
개최국인 영국 잉글랜드와 전 대회 우승국인 브라질을 비롯한 16개 나라가 본선에 올랐다.
런던과 리버풀, 셰필드, 버밍엄 등 7개 도시, 8개 경기장에서 대회가 열렸다.
같은 달 30일까지 20일 동안 경기가 진행됐다.잉글랜드가 처음으로 우승하고 서독이 준우승, 포르투갈이 3위를 차지했다.
펠레가 속한 브라질은 1회전에서 탈락했다.
본선에 처음으로 진출한 북한은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를 꺾으며 아시아국가로서는 유일하게 8위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64 -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Thorez, Maurice) 사망
토레즈 [Thorez, Maurice, 1900.4.28~1964.7.11]
1962 - 멕시코에 한국대사관 개설
한국은 1962년 1월 26일 멕시코와 국교를 수립하고 7월 11일 주(駐)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8년 3월 11일에는 주한 멕시코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양국은 1966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나 별다른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교역량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대한민국대사관)
[한국-멕시코 외교관계 연혁]
1962.01.26 - 한.멕시코 국교 수립
1962.07.11 - 주멕시코 대사관 상주공관설치
1978.03.11 - 주한 멕시코 대사관 상주공관설치
http://mex.mofat.go.kr/kor/am/mex/affair/relation/index.jsp
1962 - 영국과 프랑스가 쏘아올린 텔스타 통신위성이 처음으로 위성 생중계를 시작
1961 - 북한,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조인
1961 - 북경에서 북한-중국 간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군사동맹) 체결
1961 - 중조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 체결
중조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중국어:中朝友好合作互助条约)은 1961년7월 11일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이 베이징에서 맺은 조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수상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수상이 이 조약에 서명했다.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1961.7.11)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 1961년 07월 1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맑스-레닌주의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또한 국가주권과 영토완정에 대한 호상존중, 호상불가침, 내정에 대한 호상불간섭, 평등과 호혜, 호상원조 및 지지의 기초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형제적 우호협조 및 호상협조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며 량국 인민의 안전을 공동으로 보장하며 아세아와 세계평화를 유지 공고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것을 결의한다.
또한 량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협조 관계의 강화발전은 량국 인민의 근본리익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각국 인민의 리익에 부합된다고 확신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본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주은래를 각각 자기의 전권대표로 임명하였다. 쌍방 전권대표는 전권 위임장이 정확하다는것을 호상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조항들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제1조 체약쌍방은 아세아 및 세계의 평화와 각국 인민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하여 계속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다.
제2조 체약 쌍방은 체약 쌍방중 어느 일방에 대한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할 의무를 지닌다.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개의 국가 또는 몇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
제3조 체약 쌍방은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동맹도 체결하지 않으며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집단과
어떠한 행동 또는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제4조 체약 쌍방은 량국의 공동리익과 관련되는 일절 중요한 국제문제들에 대하여 계속 협의한다.
제5조 체약 쌍방은 주권에 대한 호상존중, 내정에 대한 호상불간섭, 평등과 호혜의 원칙 및 친선협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량국의 사회주의건설 사업에서 호상 가능한 모든 경제적 및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여 량국의 경제, 문화 및 과학기술적 협조를 계속 공고히 하며 발전시킨다.
제6조 체약쌍방은 조선의 통일이 반드시 평화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기초 우에서 실현되여야 하며
그리고 이와 같은 해결이 곧 조선 인민의 민족적리익과 극동에서의 평화유지에 부합된다고 인정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비준을 받아야 하며 비준서를 교환한 날로부터 효력을 가진다. 본 조약은 1961년 7월 11일 북경에서
조인되었으며 조선문과 중국문으로 각각 2통씩 작성된 이 두 원문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권대표 김일성
중화인민공화국 전권대표 주은래
평화를만드는여성회 2010.09.01 15:51:52
http://up.peacewomen.or.kr/main/?document_srl=16610
1960 - 촘베 수상, 콩고로부터의 부리 독립 선언
해밀턴, John Trumbull이 그린 유화(부분)
1804 - 해밀턴(Hamilton, Alexander)과 버(Burr, Aaron)의 결투
1804 - 해밀턴과 버의 결투
1804년 7월 11일 미국 정치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에어런 버가 결투를 벌였다. 이 결투에서 해밀턴은 버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결투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해 4월 한 디너 파티에서 해밀턴이 버에 대해 야비한 말을 했다는 이유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랜 정치적 적수였던 해밀턴과 버 사이의 악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미국독립전쟁 시기 자신의 부대를 조직해 트렌턴 전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 되었다.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제헌의회에 뉴욕 대표로 파견되면서 <연방주의자>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해 미국연방헌법 비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밀턴은 이후 워싱턴의 초대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맡았으나 연방파의 지도자가 되면서 공화파를 이끈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과 번번이 맞섰다. 그런데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해밀턴은 선거인단 투표 결과 같은 표를 얻은 공화파인 제퍼슨과 버 중에서 제퍼슨을 지지했고, 1804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도 버와 경선을 벌인 공화파 후보를 지지해서 버의 분노를 샀다. 해밀턴과의 유명한 결투 때문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버는 필라델피아로 도망간 뒤, 멕시코를 공격해 독립정부를 세우려고 계획했다가 반역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1767 - 미국의 제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출생
1767 -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애덤스(Adams, John Quincy) 출생
애덤스 [Adams, John Quincy, 1767.7.11~1848.2.23]
1694 -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쿠아펠(Coypel, Charles-Antoine) 출생
쿠아펠 [Coypel, Charles-Antoine, 1694.7.11~1752.3.14]
1662 -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출생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 1662년 7월 11일 뮌헨 – 1726년 2월 26일 뮌헨)는 대개 막스 에마누엘(Max Emanuel) 혹은 막시밀리안 에마누엘(Maximilian Emanuel)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이에른(Bavaria)의 비텔스바흐 가(Wittelsbach)의 지배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Kurfürst)이다. 또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마지막 총독이자 룩셈부르크 공작이었다.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그를 전쟁에 끌어들였고, 한계에 이르렀으나 결국 최종적으로 열망하던 왕가의 꿈을 이루었다.그는 뮌헨의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Ferdinand Maria, Elector of Bavaria)와 사보이의 엔리에타 아델라이드(Henriette Adelaide of Savoy, 1676년 죽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의 조부모는 사보이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Victor Amadeus I of Savoy)와 프랑스의 크리스틴 마리(Christine Marie of France)였다. 크리스틴 마리는 프랑스의 앙리 4세(Henry IV of France)와 2번째 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의 둘째딸이었다.
1657 - 프로이센의 초대 왕(1701~13 ) 프리드리히1세 출생
1628 - 일본의 봉건영주 도쿠가와 미쓰쿠니 출생
1561 - 스페인의 시인 공고라 이 아르고테(Góngora y Argote, Luis de) 출생
공고라 이 아르고테 [Góngora y Argote, Luis de, 1561.7.11~1627.5.23]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역사 (7월 13일) (0) | 2019.07.13 |
---|---|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2 (0) | 2019.07.12 |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2 (0) | 2019.07.10 |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 (0) | 2019.07.10 |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9 (0) | 2019.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