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과 역사 7-12
2011 - 중국 보하이만 해상유전 잇단 원유유출
2달새 3번째…은폐에 비난 쇄도“원유 생산 속도전이 원인” 지적
한국 서해에 가까운 중국 보하이만의 해상 유전에서 원유 유출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12일 새벽 1시30분께 중국 랴오닝성 해상에 있는 쑤이중 36-1 유전의 중심 플랫폼에서 제어장치 고장으로 원유가 유출돼 인근 해역 1㎢가 오염되고 유전 전체의 생산이 중단됐다고 중국 국가해양국이 발표했다. 이 유전을 운영하는 국영 중국해양석유(CNOOC·중해유)는 0.1~0.15㎥의 원유가 유출됐으며 작업선을 파견해 기름을 제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번 사고는 역시 중해유가 운영하는 산둥성의 펑라이 19-3 유전에서 지난달 4일과 17일 대규모 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난 데 이어 두달 새 세번째 사고다. 쑤이중 유전은 펑라이 유전에서 약 150㎞ 떨어져 있다.
펑라이 유전 사고로 인한 기름 오염 면적은 애초 840㎢로 조사됐으나, 국가해양국이 11일까지 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오염 면적이 424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신경보>가 13일 보도했다. 서울시 면적의 7배에 해당하는 드넓은 바다가 오염된 것이다. 중해유는 사고 뒤 한달 가까이 국가해양국에도 보고하지 않고 쉬쉬하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기름띠 오염 사례들이 폭로된 뒤에야 사고를 공개해 비판에 휩싸였지만 정확한 유출량과 사고 원인을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 국가해양국은 13일 펑라이 19-3 유전의 플랫폼 두곳에서 원유 생산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해상 유전 사고가 잇따르는 것은 무리한 ‘속도전’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해유는 지난해 생산량이 처음으로 5000만t을 돌파하는 등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고 있다. 중국의 매년 원유 생산량 증가분 중 중해유의 해상 유전에서 생산되는 몫이 약 50%를 차지한다. 중해유 내부 인사는 <신경보>에 “매년 5000만t의 석유·가스 생산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큰 압박을 느끼고 있고 안전 문제가 커졌다”고 말했다. 중해유가 운영하는 광둥성 후이저우의 정유공장에서는 12일 화재가 나 생산이 중단됐다. 이번 기름 오염이 서해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중국이 자국 수역에서 발생한 사고가 주변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한국에 사고 상황을 통보할 의무는 없다”면서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서해 기름 오염 여부에 대한 감시, 중국산 수입 수산물에 대한 벤조피렌(화석연료의 불완전 연소 과정에서 나오는 환경호르몬의 하나) 오염 검사 강화 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한겨레 20110713 20:4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487240.html
카이사르는 주화에 처음으로 자신의 흉상을 새겼다.
BC100 - 로마 황제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출생
카이사르 [Caesar, Gaius Julius, BC 100.7.12/13~BC 44.3.15]
2010 - 스페인, 남아공월드컵 우승 [앵커멘트]
남아공월드컵의 주인공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연장 후반 11분에 터진 이니에스타의 결승골로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을 품에 안았습니다.이경재 기자입니다.
[리포트]
연장 후반 11분, 이니에스타가 스페인의 가슴에 첫 번째 별을 쏘아올렸습니다.
파브레가스의 패스를 받아 오른발로 강하게 네덜란드의 골 네트를 흔들었습니다.
남아있던 4분이 지나 120분의 혈투는 또 하나의 명승부로 기록됐고, 스페인은 첫 월드컵 우승의 새 역사를 썼습니다.
브라질과 이탈리아, 독일 등에 이어 8번째 월드컵 우승국 대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스페인의 우세가 예상됐지만, 역시 첫 우승에 도전했던 네덜란드의 저력은 강했습니다.
초반 스페인이 잠시 경기를 지배하는가 싶더니 그라운드엔 금새 불꽃이 튀겼습니다.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에 맞서 네덜란드는 거칠고 강하게 압박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전반 15부터 불과 13분 동안 두 팀은 치고, 박고, 경고 5장을 주고 받았습니다.
후반엔 네덜란드의 공격이 더 거셌습니다.로번이 후반 17분과 38분 잇따라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다가 놓쳤습니다.
스페인은 파브레가스와 토레스를, 네덜란드는 엘리아와 판데르바르트 등을 투입하며 총공세에 나섰지만
0의 행진은 연장까지 이어졌고 결국 종료 4분을 남기고, 두 팀의 운명은 갈렸습니다.
모두 경고 9개를 받으면서 스페인의 패스 길목을 차단했던 네덜란드는 연장 후반 5분 수비수 헤이팅아가
퇴장한 것이 아쉬웠습니다.한 달 동안 전세계 축구팬들의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흔들었던 남아공월드컵.
무적함대를 새로운 챔피언으로 탄생시키고 4년 뒤 브라질 대회를 기약했습니다.
YTN 이경재[lkjae@ytn.co.kr]입니다.YTN 2010-07-12 08:34
http://www.ytn.co.kr/_ln/0107_201007120834111192
2010 - 스페인, 네덜란드 꺾고 월드컵 우승
스페인이 남아공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스페인은 12일 오전 요하네스버그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연장 혈투 끝에 이니에스타의 결승골에 힘입어 1대0으로 이겼다. 이로써 스페인은 월드컵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결승전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독일이 없는 사상 첫 월드컵 결승전이었으며 스페인은 월드컵 우승을 맛본 사상 8번째 국가가 됐다. 스페인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한 첫 유럽팀이 됐다.
반면 네덜란드는 1974년과 1978년에 이어 3번째로 결승전에서 패하는 비운을 맛봤다.
두 팀은 경기 초반부터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전반전에만 네덜란드 선수 3명이 경고를 받았고, 스페인도 2명이 경고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화려한 개인기를 막기 위해 강한 몸싸움을 걸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전반을 마친 양팀은 후반들어 보다 적극적인 공격에 나섰다. 전반 16분에는 네덜란드 로번이 스네이더르의 패스를 받아 골키퍼와 1대1로 맞서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선방에 걸려 득점에 실패했다. 스페인의 비야도 23분 골지역 오른쪽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맞았으나 슈팅이 수비의 몸에 맞아 골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스페인이 우세한 상태에서 맹공을 퍼부었지만 네덜란드의 끈질긴 수비에 막혔다. 네덜란드도 후반 37분에 로번이 다시 골키퍼와 1대1로 맞섰지만 또 선방에 걸렸다.결국 승부는 연장으로 넘어갔다. 네덜란드의 헤이팅아가 연장 후반에 경고 2회로 퇴장당하면서 승부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결승전의 승부를 가른 선수는 스페인의 이니에스타였다. 그는 연장 후반 11분 네덜란드 골지역 오른쪽에서 받은 공을 정확하게 차 넣어 승부를 결정했다.
김동석 기자 ds-kim@chosun.com 조선닷컴 2010.07.12 06:0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7/12/2010071200186.html
2010 - 연장 혈투끝 이니에스타 결승골…스페인 첫 우승
‘무관의 제왕’ 오명 벗어
‘무적함대’ 스페인이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와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1-0으로 승리하며 사상 처음 월드컵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2일 새벽 (한국시각) 요하네스버그의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결승전. 스페인은 조별리그 포함해 이번 대회 7경기 무패의 ‘난적’ 네덜란드를 맞아 전·후반 0-0으로 비긴 뒤, 연장 후반 11분 터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FC바르셀로나)의 천금같은 결승골로 1-0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 8번째 월드컵 우승국 이로써 1950년 브라질월드컵 4위가 최고성적이었던 스페인은 13번째 월드컵 본선무대 도전 끝에 사상 첫 우승 감격을 누렸다. 1930년 월드컵이 시작된 이후 무려 80년 만이다. 스페인은 브라질(5회), 이탈리아(4회), 독일(3회), 아르헨티나(2회), 우루과이(〃), 잉글랜드(1회), 프랑스(〃)에 이어 8번째로 월드컵 우승국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비유럽지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유럽팀이 됐다. 유로 2008 제패로 유럽무대를 평정한 뒤
2년 만에 다시 세계 정상까지 정복한 쾌거다. 반면, 1974년 서독,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 2회 연속 준우승했을 뿐
월드컵에서는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또 한번 ‘2위 징크스’에 울어야 했다.
■ 로번 3차례 막은 ‘거미손’ 카시야스 4강전에서 환상의 패싱게임으로 독일에 1-0 승리를 거뒀던 스페인은 이날 네덜란드를 맞아 좀처럼 경기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고전했다. 비센테 델 보스케 스페인 감독은 다비드 비야(발렌시아, FC바르셀로나 이적 예정)를 원톱, 중원에 사비 에르난데스(FC바르셀로나)와 이니에스타, 페드로(FC바르셀로나)를 투입하는 등 4-2-3-1 전술로 나섰다. 하지만 사비가 중원을 두텁게 쌓은 네덜란드에 막히면서 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애를 태웠다. 전반 5분 결정적 골기회를 놓친 게 아쉬웠다. 사비의 오른쪽 프리킥을 오른쪽 풀백 세르히오 라모스(레알 마드리드)가 헤딩슛으로 연결시켰으나 네덜란드 골키퍼 마르턴 스테켈렌뷔르흐(아약스)의 선방에 걸리고 말았다. 비야는 문전 침투패스 때 빠르게 골문으로 파고들었으나 번번이 오프사이드 반칙에 걸렸다.
네덜란드는 사비와 이니에스타를 적절히 차단하면서 발빠른 오른쪽 공격수 아르연 로번(바이에른 뮌헨)을 통해 득점을 노렸으나 역시 골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로번이 3차례나 결정적인 득점기회를 놓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로번은 전반 추가시간 골키퍼와 맞서는 절호의 단독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슛은 스페인 ‘거미손’ 이케르 카시야스(레알 마드리드)의 선방에 막혔다. 후반 16분에는 베슬레이 스네이더르(인터밀란)의 절묘한 패스로 다시 카시야스와 1대1로 맞섰지만, 다시 슛이 카시야스 발에 맞고 골문에서 빗나갔다. 38분에도 스페인 중앙수비 카를레스 푸욜(FC바르셀로나)의 수비를 뚫고 카시야스와 맞섰으나 또 막혔다.
■ 교체투입 파브레가스 ‘수훈’ 스페인도 기회는 많았지만 골 마무리 능력이 2% 모자랐다. 연장 전반 5분, 세스크 파브레가스(아스널)가 왼쪽 문전을 파고들며 단독기회를 맞았으나 슛이 아쉽게 골키퍼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연장 후반 4분여를 남기고 파브레가스가 아크부근에서 문전 오른쪽에 있는 이니에스타에게 공을 연결해줬고, 이니에스타가 오른발 강슛으로 골문을 가르며 승부가 결정됐다. 파브레가스는 후반 막판 사비 알론소와 교체 투입돼 이니에스타의 결승골에 기여하며 우승의 견인차가 됐다. 스페인의 골잡이 페르난도 토레스(리버풀)는 연장 후반 시작과 함께 비야와 교체 투입으나 막판 부상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이니에스타의 골을 그의 발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가 문전으로 올린 공을, 네덜란드 미드필더 라파엘 판더바르트(레알 마드리드)가 잘못 걷어내 파브레가스에 갔고 결국 그의 패스 뒤 결승골이 터진 것이다. 김경무 선임기자 kkm100@hani.co.kr 한겨레 2010-07-12 오전 06:15:15
http://worldcup2010.hani.co.kr/arti/ISSUE/67/429918.html
2010 - ‘성폭행 혐의’ 폴란스키, 체포 10개월만에 자유
스위스, 미 송환 거부…“유죄 여전”
33년 전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 스위스에서 체포돼 미국으로 강제추방 위기에 몰렸던 폴란드계 프랑스인 로만 폴란스키(76) 감독이 체포 10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에벨리네 비드머슐룸프 스위스 법무장관은 12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폴란스키 감독이 미국에 송환되지 않을 것이며, 이 시간 이후로 그의 자유를 제한했던 조치들도 해제돼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그러나 이번 결정은 그의 유무죄를 따지는 결정이 아니다”라며 “이번 결정으로 폴란스키의 범죄가 사면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스위스 법무부는 송환을 요청한 미국 정부가 관련 사건 재판 과정에 대한 관련 자료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며 송환 거부 이유로 제시하고, 미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폴란스키는 1977년 할리우드에 있는 친구 잭 니컬슨의 집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중 당시 13살이었던 모델 사만다 가이머에게 술과 약을 먹이고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폴란스키는 42일간 구치소에 수감돼 조사를 받다가 가석방돼 재판출두를 기다리고 있던 중 프랑스로 달아나 33년 동안 단 한번도 미국땅에 발을 들여놓진 않는 등 미국 사법당국의 손길을 피해왔다. 폴란스키는 지난해 9월26일 취리히 영화제 조직위원회의 초청으로 평생공로상을 받으려고 스위스에 입국하다가 취리히 공항에서 미국 사법당국의 요청을 받은 스위스 경찰에 전격 체포됐다. 폴란스키는 450만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돼 전자팔찌를 착용한 채 스위스에 그스타드 칸톤 스키 휴양지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그동안 유럽 문화계는 구명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사면 쪽에 무게를 둔 반면, 미국 여론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법적 심판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그의 추방 여부를 두고 논란이 계속돼 왔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10-07-13 오전 08:32:36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30093.html
2010 - ‘미성년 성폭행’ 폴란스키 감독 ‘자유의 몸’
스위스정부, 미국 송환 거부ㆍ미 수용… “자택연금 해제”
스위스 정부가 33년 전 미국에서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76)에 대한 미국 정부의 송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에벨리너 비드머 슐룸프 스위스 법무장관은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폴란드계 프랑스 국적인 폴란스키 감독은 미국에 송환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자유를 제한했던 조치들도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폴란스키 감독은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며 “미국 정부도 스위스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폴란스키 감독은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있던 당시 13세 소녀 모델 사만다 가이머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됐지만, 이듬해 혐의를 인정한 후 프랑스로 달아나 도피생활을 해왔다.
미국 경찰에 체포될 당시 성폭행 혐의가 적용됐지만, 플리바게닝(유죄 인정 조건부 감형)을 거쳐 ‘불법 성관계’로 혐의가 조정됐다. <로즈마리의 아기> <차이나타운> <피아니스트> 등 다수의 작품을 연출하며 세계적 영화감독으로 유명세를 떨친 폴란스키는 지난해 9월 취리히 영화제 참석차 스위스에 입국하던 도중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4주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450만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그후로는 전자팔찌를 찬 채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 연금된 상태로 지내왔다스위스 법무부는 미국 정부가 77~78년 당시 폴란스키의 수감생활과 플리바게닝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폴란스키에 대한 송환 요청을 거부했다. 슐룸프 장관은 “폴란스키는 이미 자신의 형기를 다 채웠으며, 미국 정부의 송환 요청은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폴란스키는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미국에 입국할 수 없는 상태여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이청솔 기자 taiyang@kyunghyang.com 경향닷컴 2010-07-12 23:29: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22329195&code=100100
2010 - 로만 폴란스키, 10개월만에 프랑스로 귀국
[할리우드 통신] 스위스 당국, 폴란스키 연금 해제... 유럽 · 미국 반응 엇갈려
폴란스키는 12일 스위스 법무장관의 석방 발표가 나오자마자 가족과 함께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AFP통신은 현지발 기사에서 폴란스키가 머물던 별장의 뒷마당 테이블 위에 반쯤 마시다 남긴 물잔이 그대로 남아있는 등 급하게 떠난 흔적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폴란드 태생인 폴란스키는 폴란드와 프랑스 국적을 동시에 갖고 있다.
에벨리네 비드머-슐룸프 스위스 연방 법무장관은 앞서 12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폴란드계 프랑스 국적인 폴란스키 감독은 미국에 송환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자유를 제한했던 조치들도 해제됐다"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 정부의 결정에 대해 미국 정부는 항소할 수 없다" 고 덧붙였다. 특히 이번 결정은 폴란스키의 유죄 여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사건의 팩트들에 대한 제시와 관련된 문제"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폴란스키 감독은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있는 친구 잭 니컬슨의 집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중 술과 약에 취해있던 당시 13세 소녀 모델 사만다 가이머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됐고, 이듬해 혐의를 인정한 후 프랑스로 달아나 33년 동안 미국 사법당국의 손길을 피해 사실상의 도피생활을 해왔다.
지난해 9월26일 취리히영화제 조직위원회의 초청으로 공로상을 받으려고 스위스에 입국하던 길에 취리히 공항에서 경찰에 전격 체포된 폴란스키는 4주간의 수감생활 후 45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돼 전자팔찌를 착용한 채 스위스에 그스타드 칸톤(州) 스키 휴양지에 있는 자신의 별장 사유지에서 이동범위가 제한되는 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스위스 정부의 결정에 대해 폴란스키 송환을 요구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검찰당국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스티브 쿨리 검사는 "폴란스키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면서 미국과 송환협약을 맺은 국가들과 공조해 폴란스키에 대한 체포 및 송환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법무부의 PJ 크롤리 대변인은 "오바마 정부는 이번 결정에 실망했다"면서 "미국은 13세 소녀에 대한 성폭행을 범죄로 믿고 있으며 계속 정의실현을 시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한편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 유럽의 지지자들은 일제히 폴란스키의 석방을 환영해 미국 법조계와 대조되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도 우디 앨런, 마틴 스코세스 감독 등 영화계에서는 그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해왔다.33년 전 사건으로 폴란스키를 처벌해야 하는가를 두고 유럽과 미국은 그동안 엇갈린 시각을 나타내왔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유럽 쪽에서는 폴란스키가 13세 소녀와 성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성폭행 증거는 없으며, 이를 가지고 이제와 법적 굴레를 씌우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반면 보수적인 미국은 페도필(아동성도착증)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며 아무리 저명한 예술가라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강세를 띠고 있다.신영 기자 프레시안 2010-07-13 오후 2:01:2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713133853&Section=07
2009 - 일본 자민당, 도쿄도의회 선거 대참패
2009 - 일(日) 자민당,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 총선서 정권교체 가능성 더 커져
12일 치러진 일본 도쿄도(東京都) 의회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유례없는 대참패를 당했다.
선거 결과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자민당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 자민당이 이번 선거에서 얻은 의석은 13일 새벽 최종 집계 결과 전체 127석 가운데 38석에 불과했다.
기존 의석은 48석. 반면 제1 야당인 민주당은 기존 34석에서 54석으로 대약진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이 원내 제1당을 확보했다. 자민당이 도쿄도의회에서 1당 자리를 내놓게 된 것은 1965년 이후 44년 만의 일이다. 자민당은 연립 공명당이 얻은 23석을 더해도 과반(64석)에 못미친다. 도의회 주도권을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에 넘겨주게 됐다.
당초 이번 선거는 총선거를 앞두고 표심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는 마지막 전초전으로 받아들여져, 각 당이 총력전을 기울였다. 자민당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를 비롯한 중앙당 지도부가 총출동했고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이 자체 설정한 승패 기준은 과반이었다. 기존 연립 의석 70석을 지킬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낮춰 잡은 목표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반면 민주당은 제1당을 목표로 했다. 민주당은 목표를 초과달성한 반면, 자민당은 완전히 돌아선 민심을 확인한 셈이 됐다.이에 따라 자민당은 총선거를 앞두고 일대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아소 다로 총리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당내 여론이 확산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다음달 말까지는 총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그 전에 총리를 바꾸고 그 간판 아래서 선거를 치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정권을 거의 손에 넣었다는 분위기다. 민주당은 2개월도 남지 않은 총리를 바꾸는 '편법'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도쿄=신정록 특파원 조선닷컴 2009/07/13 02:52
http://m.chosun.com/article.html?contid=2009071300076
2007 - 세계 최고 에너지효율 ‘유기물 플라스틱 태양전지’ 개발 - 한미 공동 연구팀
기존의 유기물 태양전지보다 효율이 최소 30% 이상 뛰어난 최고 성능의 유기물 플라스틱 태양전지를 한국과 미국 공동연구팀이 개발했다. 이광희 광주과학기술원(G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12일 “태양에서 나오는 빛의 적외선 부분까지 충분히 활용해 에너지 효율이 6.5%에 이르는 새로운 차세대 적층형 유기물 플라스틱 태양전지를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화석연료를 대체하기 위한 신재생에너지 기술 가운데 태양광을 이용하는 태양전지는 그동안 실리콘 등 무기물로
만들어왔으나 가격이 비싸고 친환경적이지 않아, 과학자들은 최근 들어 유기물 플라스틱을 이용한 태양전지
개발에 관심을 쏟아왔다. 그러나 유기물 태양전지는 효율이 낮아 지금까지 5%가 한계로 여겨져 왔다.
연구팀은 이전의 유기물 태양전지가 가시광선 영역에서만 에너지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근적외선 영역까지 에너지화를 할 수 있는 제2의 태양전지를 만들어 두 태양전지를 층층이 쌓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태양전지의 효율은 상용화 목표치인 7%에 근접하고, 내구성 측면에서도 연구팀이 개발한 신기능 타이타늄 산화물을 사용해 수명이 반영구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이 교수는 “유기물 태양전지는 전기 1와트를 생산하는 데 0.1달러밖에 들지 않아 2.3달러가 드는 무기물 태양전지나 1달러인 화석연료에 비해 경제성이 뛰어나고, 휘어지는 태양전지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지난해 과학기술부가 도입한 글로벌연구실 사업의 하나로 미국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앨런 히거 교수(2000년 노벨상 수상)와 공동연구를 통해 진행됐으며, 논문은 연구팀의 김진영 박사를 제1저자로 과학저널 <사이언스> 13일치에 게재된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 한겨레 2007-07-13 오전 07:32:37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222238.html
2007 - "리비아, '에이즈 수혈' 간호사 사형 확정"
리비아 대법원은 에이즈 바이러스 오염 혈액을 어린이 환자들에게 수혈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불가리아 출신 여성간호사 5명과 팔레스타인 의사 1명의 상고를 기각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의 사형은 확정됐지만 피해 어린이 부모들이 유럽연합이 내놓은 보상안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져 간호사 등은 모두 구명될 것으로 보입니다.리비아의 벵가지아동병원에 근무하던 피고인들은 이 병원에서 치료받던 어린이 438명에게 HIV 오염 혈액을 수혈한 혐의로 1,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 받고 상고했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에이즈 치료법 실험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HIV 혈액을 수혈한 혐의로 기소했고, 피고인들은 병원의 위생상태가 나빠 빚어진 사고였다며 무죄를 주장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오염 혈액을 수혈받은 어린이 가운데 56명이 사망했습니다. YTN 2007-07-12 09:05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713&key=200707120905555517
2005 -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해군대형수송함 독도함 진수식
2005 - 해군 대형 수송함 ‘독도함’ 진수식
2005년 7월 12일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형 수송함(LPX·1만4000t)인 ‘독도함’ 진수식이 열렸다. 독도함은 길이 199m, 폭 31m, 최대속력 23노트(시속 43㎞)로, 300여명의 승조원이 승선하며 근접방어 무기체제(CIWS) 및 대함 유도탄 방어 유도탄(RAM)을 갖추고 있다. 특히 항공모함처럼 대형 갑판을 갖추고 있고 헬기 7대와 전차 6대, 상륙돌격 장갑차 7대, 트럭 10대, 야포 3문, 고속상륙정 2척, 최대 720명의 상륙병력 등의 동시 수송이 가능해 경항공모함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2 09:14:24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2005 -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이 장물이라고...
“훈민정음 해례본은 장물”“긍구당 소장본 이용준이 훔쳐 팔아” 박영진씨 주장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은 장물이다.”
안동 출신으로 현재 부산 동래여중 교사로 재직하는 박영진(41)씨는 8일 발간된 한글학회 기관지인 <한글새소식> 제395호에 기고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라는 글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글에서 박 교사는 해례본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1940년 8월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 진성 이씨 이한걸(1880~1951) 집에서 발견된 세전가보가 아니라 실제는 같은 안동지역 광산 김씨 종택인 긍구당(肯構堂) 소장본을 이한걸씨의 셋째아들 이용준(1916~?·월북)이 훔쳐 간송 전형필에게 팔아먹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자모 창제의 원리를 전하는 귀중한 문건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박교사는 1991년 10월 광산 김씨 종손 김대중(75)씨가 박 교사한테 보낸 편지를 들었다. 박교사는 김대중씨의 셋째아들과 고교동창으로 몇차례 긍구당을 방문했다.
편지 내용을 보면, 해례본을 빼돌린 이용준은 김씨한테 고모부가 된다. 김씨의 할아버지 김응수(1880~1957)는 사위인 이용준을 매우 아껴, 사위가 긍구당에 올 때마다 마음껏 책방을 이용하게 했다. 이용준은 이를 기회로 <매월당집>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돌렸다. 당시 이용준은 성균관대 전신인 경학원에서 수학하며, 국문학 연구자인 김태준에게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에 이용준은 긍구당에서 빼낸 <매월당집>과 <훈민정음 해례본>을 김태준과 짜고서 전형필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김씨는 편지에서 열살 무렵 할아버지가 사위 이용준한테 “너 이놈! 공부한 선비가 책을 훔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을 하지 말아라!”며 꾸중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박 교사는 간송미술관 소장 해례본에 서문과 발문 부분이 없는 것은 이용준이 긍구당 소유임을 숨기기 위해 장서인이 찍힌 부분을 뜯어낸 탓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씨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서문을 이용준씨가 다시 써서 붙였다는 데 긍구당에 남아있는 그의 필적과 대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이용준씨가 장인한테 <매월당집>을 모르게 가져가서 큰 죄를 지었다면서 사죄하는 내용의 41년 12월31일(음력) 편지도 남아있다면서 <매월당집>과 함께 해례본을 가져갔으니 그 편지도 방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뒤늦게 사실을 밝히는 데 대해 김씨는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억울해서”라면서 자신이 살아있을 때 사실이 바로잡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완수 간송미술관장은 “세세한 사정을 아는 김씨 집안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면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면서 굳이 필적을 대조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임종업 기자 한겨레 2005-07-12 오후 05:54:00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428.html
2005 - 모나코王 알베르2세 즉위
모나코 공국의 알베르 2세(47)가 12일 즉위식을 갖고 왕권을 공식 계승했다. 알베르 2세는 이날 베르나르 바르시 모나코 대주교의 집전으로 열린 대성당 미사 등 일련의 행사를 통해 선왕 레니에 3세의 뒤를 이어 지중해 연안 소공국의 군주가 됐다. 알베르 2세는 지난 4월 레니에 3세의 별세 뒤 자동적으로 왕권을 이어 받았으나 공식 취임 행사는 갖지 않았었다. 알베르 2세는 이날 검은색 양복에 하늘색 넥타이를 맨 채 엄숙한 표정으로 바르시 대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축복을 받았다. 이 자리에는 그의 누이들인 카롤린 공주와 스테파니 공주 등 왕족들이 함께 했다. 알베르 2세는 시민들의 환호 속에 왕궁 앞 연설에서 모나코의 돈 세탁 이미지를 일소하고 세계적인 금융과 예술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파리연합) 매일신문 2005년 07월 1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3485&yy=2005
2004 - 국내 연구팀,`형광 닭` 최초 생산
녹색의 형광 단백질이 몸 곳곳에서 발현되는 형질전환 닭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생산됐습니다.
대구가톨릭대 의대 김태완 교수팀은 건국대 이훈택 교수팀과 축산기술연구소 장원경 박사팀, 충남대 형질전환복제돼지 연구센터 등 4개 기관이 공동으로 녹색 형광 단백질이 몸 곳곳에 발현되는 형질전환 닭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연구팀은 동물의 체내에 유전자를 넣을 때 일종의 운반체 역할을 하는 레트로바이러스벡터 시스템을 자체 개발해 녹색 형광 유전자를 유정란에 주입시켜 태어난 닭들을 자외선에 노출시킨 결과, 부리와 머리 등 신체 여러 부위에서 녹색 형광현상을 나타냈다고 설명했습니다.김태완 교수는 녹색형광유전자를 주입한 계란에서 형광닭을 부화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른 유전자를 주입해 부화시킨 닭으로부터 각종 치료제 등에 유용한 단백질을 얻을 수 있음이 확인됐다고
말했습니다.YTN 2004-07-12 15:47
http://search.ytn.co.kr/ytn_2008/view.php?s_mcd=0105&key=
200407121523006201&q=%B5%C5%C1%F6%BA%B9%C1%A6
2004 - 계란에 유전자 주입 ‘형광닭’ 생산
국내 연구진이 녹색의 형광 빛을 내는 닭을 생산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해 계란에서 인체에 유용한 물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대구가톨릭대 의대 김태완(金泰完·49) 교수는 12일 “수정란(受精卵)에 해파리의 녹색 형광유전자를 주입한 후 21일 만에 부리, 머리 등 여러 부위에서 형광 빛을 내는 ‘형질전환 닭’을 생산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밝혔다.이번 연구는 건국대, 충남대, 축산기술연구소와 공동으로 이뤄졌으며 국제학술지 ‘생화학 및 생물물리 연구’ 7월호에 실렸다. ‘분자 생식 및 발달’ 8월호에도 게재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쥐, 돼지, 물고기 등에 녹색 형광유전자를 주입해 형질전환에 성공한 적은 있었지만 닭에 이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주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김 교수는 “계란이 부화하는 데 21일밖에 걸리지 않고 부화된 병아리는 6개월 만에 다시 알을 낳을 수 있다”며 “이번 기술을 활용하면 계란에서 혈액응고인자, 조혈촉진인자 등 인체 유용 단백질을 대량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충환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4년 07월 13일
http://news.dongascience.com/HTML/News/2004/07/13/20040713
200000000001/200407132000000000010102000000.html
2001 -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 2001) 개막 (7.12~20)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을 시작으로 환상적인 영화 여행을 시작한다.
총 140편의 영화가 상영될 이번 부천영화제에는 <철도원>의 일본 거장 후루야타 야스오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필두로
로이드 카우프먼, 마지드 마지디 등이 장,단편의 영화들을 심사하게 된다. 환상적인 영화 외에도 씨네락 나이트,
그린 콘서트, 판타쥐 마라톤 등의 다양한 부대 행사도 펼쳐진다. 9일간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소름>과 <아멜리에>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FILM2.0
http://www.film2.co.kr/festival/default.asp?wyear=2001
에티오피아에서 발굴 된 인류의 화석
2001 - 미국 `네이처`지 580만년 전의 인류화석이 발굴됐다고 보고
약 580만년 전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인류의 화석이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됐다. 발굴된 인류 화석은 현존 최고(最古)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이 초원에서 등장했다는 기존 학설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요하네스 하일레·셀라시에 교수 연구팀은 과학전문지 `네이처` 2001년 7월 12일자호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에티오피아 사막지역에서 인류와 유사하게 직립보행을 한 동물의 치아와 뼈를 발굴했다"며 "뼈에 섞여 있던 화산재 속에 갇혀 있던 아르곤 가스를 통한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초기 인류보다 약 100만년가량 앞선 520만~580만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연구팀은 발굴이 이뤄진 수도 아디스아바바 북동쪽 225km 지점의 사막지역은 화석의 주인공이 살았던 당시에는 삼림지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발표는 삼림의 건조화로 초원에서 살게 된 인류의 조상이 직립보행을 하게 됐고,
유인원과 영원히 분리됐다는 기존의 통설과 달라 논란이 분분했다. 기존의 고고학계에서는 약 500만~800만년 전 인류와
침팬지가 같은 조상에서 분화를 시작했고 인류가 등장한 이후부터 직립보행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번 발굴이 인류진화 연구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발굴된 유골이 인류의 것인지 그리고 이들의 서식지가
당시 삼림이었는지 아직 분명치 않다고 지적했다. \
1998 - 잠수복 차림에 기관단총을 휴대한 북한 무장간첩 시신1구와
침투용 수중추진기 1대가 강원도 동해시 해안에서 발견
1998 - 1998년 FIFA 월드컵 대회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브라질을 3:0으로 이겨 처음으로 FIFA 월드컵 우승
1997 - 체 게바라 유해 쿠바 송환
1997년 7월 12일 쿠바 혁명의 지도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유해가 볼리비아 중남부지역의 활주로에서 발견된 후 매장을 위해 제2의 조국 쿠바로 옮겨졌다.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한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나면서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조금씩 실현시킬 수 있었다.
1959년 1월 2일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뒤, 게바라는 쿠바 시민이 되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 정권에서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다. 1965년 4월 이후 게바라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한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1966년 가을부터는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하다가
1967년 10월 9일 생포된 뒤 총살당했다. 게바라의 유해는 쿠바 산타클라라 기지의 쿠바 혁명지도자 기념비 아래에 묻혔다.
1997 - 체 게바라 유해 쿠바로
지난 50년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주도했던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유해가 12일 쿠바로 송환됐다.
지난 달 쿠바와 아르헨티나 전문가들에 의해 볼리비아의 한 공동 묘지에서 발굴된 게바라의유해는 이날 오후 8시30분 쿠바 비행기편으로 아바나에서 약 30㎞ 떨어진 산 안토니오 데 로스 바뇨스 군기지에 도착, 쿠바측에 인도됐다.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67년, 볼리비아에서 무장 농민 봉기를 일으키려다 볼리바아 정부군에 체포돼 처형됐다.
게바라의 유해 발굴 작업에서는 두개골과 손뼈, 치아, 군복 등이 발굴됐으며 안토니오 아라니바르 볼리비아 외무장관은 이 유해가 게바라의 것이라고 확인했다.
출전: 조선일보 1997년 7월 13일Latin21 - 라틴 아메리카 문학 21
http://www.latin21.com/board3/view.php?table=pds_p1&bd_idx=23
1997 - 늙을 수 없는 ‘젊은 혁명가’의 귀향
‘범중남미 대륙 혁명’이란 야심을 품고 쿠바를 떠났던 혁명가 에르네스 토 체 게바라가 지난 7월12일
31년 만에 유골이 되어 쿠바 수도 아바나로 돌아왔다.
19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활동 도중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시신은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수도 산타크루스에서 2백40㎞ 떨어진 발레그란데 공항 주변에서 7구의 다른 유골과 함께 발굴됐다. 70년대 이 후 일본 적군파 등 세계 극좌 테러단체 청년들로부터 우상으로 추앙받던 체 게바라의 유골은 곧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아르헨티나·쿠바·볼리비 아 전문가들에 의해 정밀 감식됐다. 그 결과 쿠바 출신 게릴라로 신원이 밝혀진 다른 3구의 유해와 함께 쿠바로
송환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의사로 중남미 일대를 방랑하던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의기투합해 1958년 쿠바 혁명에 가담하면서 게릴라로 혁명에 몸을 던졌다.
쿠바혁명 성공 직후 그는 카스트로의 천거로 산업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등 요직에 앉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식 개혁’을 도모한다며 장관 의 몸으로 카메라 앞에서 손수레를 끄는 등의 무리한 사회주의 정책 때문 에 체 게바라는 쿠바 지도부 내에서 잦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오늘날 “ 쿠바 경제를 망친 장본인 중 하나”란 비판도 받고 있다.
결국 그는 쿠바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엮은 자신의 ‘게릴라 전술’ 이 론을 중남미에 퍼뜨려 좌익운동의 새로운 일가를 이루겠다는 야심을 품고 쿠바를 떠났다. 그러나 1966년 볼리비아에 도착한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도 “조건이 성숙지 않았다”는 현지 공산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게릴라 전술을 고집하다가, 67년 서부 산악지대에서 토벌군에게 포로로 잡혀 11월9일 총살됐다. 당시 토벌군은 체 게바라가 사살됐다는 증거로 시신에서 손을 잘라 쿠바로 보냈는데, 이 덕분에 지난 6월 발굴된 손뼈 없는 유해가 그의 것으로 쉽게 판명될 수 있었다.
13일 아바나에서 거행된 체 게바라의 유해 송환 기념식에서 그의 딸 알리 에다는 “오늘 우린 그들의 시신을 맞이하지만, 그들은 패배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히 젊음을 간직한 영웅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임민 기자 /한겨레 21 1997년07월24일 제167호
http://h21.hani.co.kr/hankr21/K_977O0167/977O0167_024.html
1996 - 일본 우익, 주일 한국대사관 테러
1996년 7월 12일 오후 2시 9분경 일본 도쿄에 있는 주일 한국 대사관 정문을 일본의 우익단체 소속 청년이 승용차로 들이받아 철제문이 반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범인은 우익단체인 황국헌 정당 회원인 소가메 신이치로 밝혀졌으며 현장에서 경비 중이던 경찰에 체포됐다. 범인은 이날 승용차로 높이 5m의 정문을 들이받은 뒤 ‘대한민국은 지난 1952년부터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다. 독도는 일본의 어민 이외에는 누구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일본의 고유영토다. 한국의 부당한 침략행위에 단호히 항의한다’는 내용의 손으로 쓴 항의문 수십 장을 살포했다. 대사관 정문을 들이받은 승용차는 범인의 방화로 15분 가량 불타다 출동한 소방차에 의해 진화됐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2 09:14:24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90 - 보리스 옐친, 탈당 선언
[어제의 오늘]1990년 보리스 옐친, 탈당 선언ㆍ소련 공산당 해체 ‘신호탄’
보리스 옐친은 회의 도중 불쑥 발언권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나는 러시아 국민에 대한 책임감과 다당제에 대한 개인적 신념에 비춰 당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회의장은 이내 술렁거렸다. 옐친은 이어 “나는 공화국의 고위급 선출직으로서 모든 국민의 뜻에 복종할 뿐”이라고 말한 뒤 주저없이 회의장을 떠났다. 소련 공산당 탈당 선언이었다. 옐친이 공산당에 가입한 지 39년 만이었다.옐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련 최고권력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굳은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옐친이 자리를 뜨자 회의장은 박수 소리와 “부끄러운 줄 알라”는 비난이 뒤섞였다. 1990년 7월12일 소련 공산당 28차 전당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옐친의 탈당은 한때 동지였던 고르바초프와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했다. 31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정반대 스타일의 정치인이었다. 고르바초프는 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국가수반이 되면서 옐친을 당 제1서기로 발탁하고 모스크바 시정을 맡겼다. 옐친은 특유의 우직하고 헌신적인 자세로 공직자 부패 척결 등 임무에 헌신했다.우랄산맥 소도시 출신의 옐친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시민과 접촉하는 것을 좋아했다. 농민·노동자와 스킨십을 즐기는 ‘서민형 정치인’이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로 해외에서 각광받을 동안 옐친은 국내에서 인기를 쌓고 있었다. 80년대 말부터 개혁정책의 부작용이 서서히 표출되면서, 권력층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물가가 치솟아 고통은 민중에게 전가됐다.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어정쩡한 개혁주의자로 여기며 개혁정책이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옐친은 급진적 개혁주의의 대변자였다. 87년 옐친은 공산당에서 맡은 직책을 반납했다. 이때부터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갈등은 노골화했다.
옐친의 탈당은 소련 공산당 해체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가 속한 급진 개혁진영 공산당원들이 잇따라 당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 서방 언론은 이를 가리켜 ‘1903년 볼셰비키·멘셰비키의 결별과 맞먹는 소련 공산당의 분열’이라고 평했다. 90년 말 소련 헌법에서 일당제 규정은 삭제되고 다당제를 허용하는 길이 열렸다. 소련 공산당이 붕괴된 지 1년 후인 92년, 등록된 정당 수는 20개를 넘었다.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7-11 17:32: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11732295&code=100100&s_code=ap005
1988 - 소련의 화성 탐사선 포보스 2호 발사
구 소련이 화성으로 보냈던 인공위성 이야기
1988년 7월 12일, 구 소련은 화성탐사 목적의 인공 위성인 포보스 2호를 대기권에 발사 하였습니다.
발사 직후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 포보스 2호는 1989년 1월 화성의 궤도로 진입 한 후
구 소련의 우주 항공국이 있는 칼리닌그라드에 여러가지 사진들을 전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보스 2호는 10여년전 이보다 먼저 화성궤도를 진입한 뒤 연락이 두절되었던 미국 나사의 바이킹
인공 위성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 하였으며 1989년 3월 28일 칼리닌그라드와 연락이 두절된 포보스
2호는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된 것으로 추측 되었습니다. (발췌)
http://www.ddangi.com/1-959.html
<포보스 2호>
소련의 화성 탐사선, 5,000 kg
발사: 1988년 7월 12일
포보스 2호는 1989년 1월 30일에 화성궤도에 진입하였다. 모선은 포보스에 800 km 까지 접근하였으나
그 후 통신이 두절되었고, 착륙선은 포보스 표면에 착륙하는데 실패하였다. (발췌)
민경기 2008-05-28 18:57:13 항공우주박물관
http://aerospacemuseum.co.kr/bbs/view.php?id=qna&page=3&sn1=&divpage=
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
1585&PHPSESSID=076a7690e2d3c6667fa4dc43ac0ecc74
1983 - 중국, 한국대표 입국 거부
1982 - 한국-호주, 조세의 이중과세 및 탈세방지협약 서명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김대중씨(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문익환씨(왼쪽).
1980 -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김대중 등 9명 내란음모혐의로 구속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1980년 7월 12일 김대중씨 등 9명을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위반
그리고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구속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김대중씨 등과 같은 혐의로 송치된 사람들은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 김상현 이신범 장기표 심재권 등이었다.
원심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씨에 대해 대법원은 1981년 1월 23일 그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내려진 바로 같은 날 김대중씨는 무기로 감형됐다. 무기로 감형된 김대중씨는 1월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됐고 이듬해인 1982년 3월 3일 다시 무기형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받았다.
그는 같은 해 11월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한달여 뒤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
1980 - [오늘의 역사] 김대중 내란음모혐의 구속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1980년 7월 12일 김대중씨 등 9명을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위반
그리고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구속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김대중씨 등과 같은 혐의로 송치된 사람들은 문익환·이문영·예춘호·고은·김상현·이신범·장기표·심재권 등이었다.
원심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씨에 대해 대법원은 1981년 1월 23일 그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내려진 바로 같은 날 김대중씨는 무기로 감형됐다. 무기로 감형된 김대중씨는
1월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됐고 이듬해인 1982년 3월 3일 다시 무기형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받았다.
충청투데이 2010.07.11 23:03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689
1979 - 차범근, 서독 축구팀 프랑크푸르트팀 입단
1979 - 키리바시,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9 - 키리바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키리바시(Kiribati, 문화어:키리바티)는 오세아니아에 있는 섬 나라이다.
수도는 남 타라와(과거에는 타라와)이며 공용어는 영어다.
1979년 이전에는 길버트 제도라고 불렀다. 당시 앨리스 제도 소속이었던 투발루는 불만을 일으켜 독립했다.
1892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79년 독립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키리바시의
수도인 타라와에서는 미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
1977 - 대한민국의 모델 겸 배우 마르코 출생
마르코(Marcos Benjamin Lee, 1977년 7월 12일)는 아르헨티나 교포 출신의 한국 배우이다.
현재 소속사는 엠앤제이컴퍼니다. 2010년, 그는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준비 중이다.
경력
마르코는 아르헨티나에서 유소년 축구선수로서 활약한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한 적이 있는 마르코였기에 그의 축구실력은 발군이었으며 이것을 인정받아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초대 주장이 되었다.
1975 - 상투메 프린시페,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975 - 상투메 프린시페가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다.
상투메 프린시페(포르투갈어: República Democrática de São Tomé e Príncipe, 문화어: 산토메 프린시페)는
아프리카의 섬나라이며 수도는 상투메 섬에 있는 상투메(문화어: 산토메)이다.
역사
1471년 포르투갈인이 발견하기까지는 무인도였으며, 1483년부터 포르투갈 본국으로부터의 유형수와 노예로서의 아프리카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는 서인도 제도에 앞서서 사탕수수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도되어 16세기 전반까지 이 섬의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중심은 서인도 제도로 옮겨졌으며, 그 대신 이 섬은 앙골라로부터의 노예 무역의 중계 기지가 되었다. 19세기에 노예 무역이 폐지되면서 카카오와 커피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어 현재 이 나라의 주산업이 되었다.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승인되었으며, 1951년 포르투갈의 해외주가 되었다. 1960년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상투메프린시페 해방위원회(CLSTP)가 창설되었고, CLSTP는 1972년 코스타의 지도로 상투메프린시페 해방운동(MLSTP)으로 개칭되었다. MLSTP의 투쟁은 지하 활동, 특히 지방 노동자에 의한 저임금 반대 투쟁의 형태로 행해졌다. 1974년 4월 민주화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포르투갈 새 정권은 상투메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 같은 해 11월 독립 협정에 조인했으며, 1975년 7월 12일 정식으로 독립되어 MLSTP의 코스타 서기장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독립을 한 후에도 1979년까지 빈번하게 쿠데타 미수사건이 잇따랐고, 1981년에는 식량 부족으로 폭동이 발생하였다.
1973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크리스티안 비에리 출생
크리스티안 "보보" 비에리 (Christian "Bobo" Vieri, 1973년 7월 12일, 이탈리아 볼로냐) 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공격수이다.비에리는 최고의 골 결정력과 힘을 갖춘 이탈리아 최고의 공격수로, 그의 빠른 스피드와 발에서 나오는 강력한 대포알 슛은 상대 수비수를 두렵게 만들지만, 반대로 이 능력은 팬들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로베르토 바조, 주세페 시뇨리등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공격수 계보에서, 힘과 테크닉을 함께 갖춘 비에리의 등장은 큰 충격과 기대를 주었으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 과거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던 로베르토 비에리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 그 곳에서 럭비, 크리켓, 육상 등 다양한 종목을 경험하면서 실력을 쌓았고, 결국 15세 때 이탈리아로 돌아와 토리노에 입단하게 됨으로써,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비에리까지 축구 선수의 길을 걸으면서, 전형적인 축구 선수 출신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비에리는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클럽들을 이적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라치오에서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할 때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는 인테르 밀란에 정착하여 최고의 득점력을 자랑하였고, 02-03시즌 세리에 A에서 23경기 24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며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비에리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멋진 활약을 펼쳤으며, 1998년 FIFA 월드컵, 2002년 FIFA 월드컵를 합하여 9경기에서 9골을 넣어,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 유로 2004를 기점으로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했고, AC 밀란으로 팀을 옮겼으나, 얼마지 않아 AS 모나코 FC로 이적하였다. 모나코에서 점차 회복세를 보인 비에리는 당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마르첼로 리피가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명단에 합류시키려 하였으나, 본선을 앞두고 대표팀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 월드컵 본선 무대의 꿈을 접었다.이후 모나코와 계약을 해지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탈란타와 일정한 득점 수당을 받는다는 계약을 체결한 그는 아탈란타와의 계약 이전에 삼프도리아와 계약을 파기하기도 하였다. 아탈란타의 계약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탄
그는 피오렌티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2008년에 아탈란타로 이적하였지만, 시즌이 끝난 후 다시 팀을 떠났다.
보보 애칭
보보라는 애칭의 의미에는 몇가지가 존재한다.
* 비에리가 인터뷰 도중 자주 '보-'라는 표현을 자주하여, 보보라는 애칭이 붙었다는 설
* 라치오에서 인터밀란으로 이적할 당시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기록하였고, 이로 인해 5000만불의
사나이라는 의미로 보보라고 불렸다는 설.
이탈리아 축구팀이 우승컵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1982 - 이탈리아, 제12회 월드컵축구대회서 서독 꺾고 우승
이탈리아가 월드컵을 차지했다. 1982년 7월 12일 새벽 마드리드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열린 제12회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는 접전끝에 서독을 3대1로 물리치고 44년 만에 대망의 월드컵을 가슴에 안았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2회(1934년)
3회(1938년)에 이어 브라질과 함께 영광의 3번째 우승국이 됐으며 월드컵을 영구 보존하는 두번째 국가가 됐다.
전날 벌어진 3~4위전에서는 폴란드가 프랑스를 3대2로 물리쳤다. 이탈리아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선수들은 한데 엉켜 울었고
응원석도 국기를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이날의 영웅은 단연 첫 골을 헤딩슛으로 성공시킨 로시였다.
로시는 개인득점 6골로 단독 득점왕이 됐다. 결승전이 거행된 10만명 수용능력을 갖고 있는 베르나베우경기장 주위에는
11일 저녁부터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들 대부부은 차안에서 밤을 지새거나 경기장 근처에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1981 - 프랑스, 서독정상 미국 미사일의 유럽 배치. 서구 방위력 증강 합의
1981 - 러시아의 소설가 보리스 폴레보이(Polevoi, Boris) 사망
폴레보이 [Polevoi, Boris Nikolaevich, 1908.3.17(4)~1981.7.12]
1973년 9월 12일 개막된 한미안보협의회의
1971 - 제1차 한미안보협의회의 개막
한반도의 안보에 관한 제반 문제를 중점적으로 협의하는 제1차 한미안보협의회의가 1971년 7월 12일 서울에서 개막됐다.
회의는 1968년 5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국방장관 회담이 모태였다. 제1차부터 3차 회의까지는 한미국방장관 회담이었으나 1971년 회의부터 양국 국방장관을 대표로 하는 한미안보협의회의(한미연례안보협의회)로 칭했다.
협의회는 한미간의 각종 안보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협의기구로 매년 교대로 회의를 가졌다. 그 후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창설에 따라 양국간 군사적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양국 합참의장을 대표로 하는 군사위원회가 1978년부터 별도로 설치 운영되고 있다.
1971 - [오늘의 역사] 서울서 한미안보협의회
한반도의 안보에 관한 제반 문제를 중점적으로 협의하는 제1차 한미안보협의회의가 1971년 7월 12일 서울에서 개막됐다.
회의는 1968년 5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국방장관 회담이 모태였다. 제1차부터 3차 회의까지는
한미국방장관 회담이었으나 1971년 회의부터 양국 국방장관을 대표로 하는 한미안보협의회의(한미연례안보협의회)로 칭했다.
협의회는 한미간의 각종 안보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협의기구로 매년 교대로 회의를 가졌다.
그 후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창설에 따라 양국간 군사적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양국 합참의장을 대표로 하는 군사위원회가
1978년부터 별도로 설치 운영되고 있다.충청투데이 2010.07.11 23:03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689
1971 -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크리스티 야마구치 출생
크리스티 야마구치(Kristine Tsuya "Kristi" Yamaguchi, 1971년 7월 12일 ~ )는 미국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일본계로 캘리포니아 주 출신이다. 1986년 미국 주니어 피겨 선수권 대회 페어 부문에서 우승하며 그 이름을 알렸고, 1988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하였다. 그 후 싱글로 전향, 1991년 세계 피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이어 1992년 동계 올림픽에서 동양계로는 처음으로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 후 프로 무대에서 활동했다. 2000년 NHL에서 활동하는 아이스하키 선수인 브레트 헤디컨과 결혼하였다.
1970 - 토르 헤이에르달의 파피루스 배 라-2호, 57일 만에 대서양 횡단 성공
1970 - 헤이에르달, 대서양 뗏목 횡단 성공 (5.17~7.12)
1970 - 헤이에르달, 대서양 뗏목 횡단 성공(1970)
노르웨이의 탐험가 헤이에르달(Heyerdahl)의 뗏목이 1970년 오늘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파피루스로 만든 그의 뗏목 '라-투(Ra-2)'호가 이날 남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5월 17일 아프리카 모로코의 항구 사피(Safi)를 떠난 지 57일 만이다.
12미터 길이의 작은 뗏목으로 바닷길 6천여km를 완주한 것이다.뗏목의 이름은 고대 이집트 태양신 '라 Ra'에서 따 온 것이다.
그는 고대 이집트인이 자신처럼 파피루스 뗏목으로 대서양을 오갔으며 남아메리카 문명은 이집트인들의 이주와 함께 시작됐다고 주장했다.헤이에르달은 앞서 1947년 역시 뗏목을 타고 페루에서 폴리네시아까지 항해함으로써 폴리네시아인이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했다고 주장했다.
라[ Ra ]
토르 헤이에르달이 남대서양 횡단에 차례로 이용했던 2척의 파피루스 배.
노르웨이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헤이에르달은 1969~70년 아프리카와 중남미 고대인들 사이의 문화적 접촉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라'를 타고 남대서양 횡단을 시도했다. 그는 당시 갈대 보트가 매우 흔하던 차드 호에 가서 배 만드는 사람들을 고용해 와 이집트에서 '라'를 건조했다. 이 배는 1969년 5월 25일 7개국에서 뽑힌 7명을 태우고 모로코 사피를 출항했다. 그러나 설계상의 결점, 배에 실은 짐, 경험부족 등으로 인해 4,800㎞를 항해한 뒤인 7월에 '라'는 서서히 침몰하고 말았다. 1970년 헤이어달은 티티카카 호(湖)의 아이마리족 인디언이 만든 '라 2호'에 전과 거의 같은 수의 선원을 태우고 재도전을 시도했다. 마침내 그는 3월 17일에서 7월 12일까지 단 57일 만에 사피에서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까지의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1970 - 대한민국의 배우 이병헌 출생
이병헌(李炳憲, 1970년 7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소속사인 BH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1991년, KBS 공채 14기로 데뷔했다.
2008년엔 일본어 싱글 〈이쓰카〉를 발매했고, 이 곡은 자신이 출연한 토요타 자동차 RAV4의 광고에 사용됐다.
2009년에는 영화 《G.I. 유격대: 전쟁의 서막》에서 배우로 출연했다.
2009년 KBS 수목드라마 아이리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며 2009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1962 - 한국의 테니스 선수 유진선 출생
유진선 [1962.7.12~ ]
1961 - 농어촌고리채정리법 시행령 공포
1959 - 통가 전 총리 라바카 아타 울루칼랄라 출생
라바카 아타 울루칼랄라 왕자(통가어:Lavaka Ata ʻUlukalala, 1959년7월 12일 ~ )는 통가의 타우파아하우
투포우 4세의 셋째 아들로 2000년부터 6년간 통가의 국무총리였다. 왕실이 정부에서
맡는 역할을 축소하라는 시위가 연달아 발생한 지 6개월 후인 2006년2월 11일 퇴임하였다.
* 전임 : 호우마의 바에아
* 후임 : 펠레티 세벨레 (2006년 ~ 현재)
1957 - 담배와 폐암의 관계가 밝혀짐
담배의 과거, 현재, 미래
3.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논쟁
담배가 해롭다는 이야기는 처음 콜럼버스에 의해서 담배가 유럽에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첫 학문적인 발표는 1638년에 영국인 의사 토비아스 버너(Tobias Verner)에 의하였으며 그는 담배가 모든 장기에 피해를 입힌다고 보고를 하였고, 1761년에 영국인 의사 존 힐(John Hill)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서 비강암이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고한 바 있다.영국의 제임스 1세는 1604년에 영국 의사회의 도움을 받아 A Counterblast to Tobacco: Tobaccogenic Cancer라는 책자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각 나라에서 담배를 전매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담배의 해독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게 되었다.1900년대에 들어서 미국과 유럽에서 흡연률이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흡연에 대한 피해도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1900년 초에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급속하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보건통계학자들이 먼저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 말까지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학술 논문들이 다수 있었으나 연구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큰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초 미국의 Wynder와 Graham, 1954년과 1956년에 영국인 Doll과 Hill 그리고 1958년에는 미국인 Hammond와 Horn 등의 역학적인 연구로 담배가 폐암 발생과의 관련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계속 발표되었다.
이에 대해 담배회사들은 자체 연구를 실시하여 1954년에 담배가 건강에 해를 주지 않는다고 발표함으로서 큰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57년에 미국 교육보건성(DHEW)에서는 담배의 건강상의 피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기 위해 과학위원회(Scientific committee)를 구성하였으며 이 위원회에서는 그간의 모든 학술적인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담배는 폐암을 위시한 각종 암의 원인이며 폐기종과 심장병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니코틴은 중독을 일으키는 약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담배회사는 이 결론에 승복하지 않고 자체 연구에 의하면 담배는 절대 해롭지 않으며 니코틴은 중독을 일으키는 물질이 아니라는 주장을 거듭했다. 이에 미국 대통령 산하에 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를 구성하여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으며, 이 위원회에서 그간 발표된 모든 연구결과를 검토하고 또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담배가 해롭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1964년에 보고서(Surgeon General's Report: Smoking and Health)를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이로서 미국정부가 공식으로 담배가 해롭다는 사실을 선포한 결과가 되었으며 이 선포가 이루어진 1964년이 세계적으로 금연운동의 시발의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미국에서는 거의 매년 담배에 대한 Surgeon General Report를 발간해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연구결과를 정리해왔다.1986년에는 간접흡연의 피해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함으로서 흡연자를 규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고 1992년에는 미국 환경보호청(EPA)에서 공식적으로 간접흡연의 피해를 확인하였다.
의학 역사 이래 담배와 건강에 대한 연구만큼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과제는 없었으며 아직도 매년 수만 건의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이 많은 논문들이 한결 같이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논문일수록 담배의 해독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지선하
http://www.dj1388.com/pds/edudata/%EA%B8%88%EC%97%B0%EC%9A%
B4%EB%8F%99%EC%9D%98%20%EC%97%AD%EC%82%AC1.hwp
< 폐 암 >
오늘날 미국에서 만도 매년 37,500 여명이 폐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는 30년 전의 폐암으로 인한 사망자 수의 열매가 되는 숫자이며 다른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의 증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것이다.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여성들에
있어서도, 비록 남성들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폐암의 진료라던가 조기발견은
지극히 곤란하며 최근에 이르러서까지도 겨우 5 % 의 치료율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여전히 담배로 하여금
폐암의 원인이 되도록 방심할 것인가?
증거
문제의 중대성은 미국 암협회가 50세에서 70세까지의 187,783명에 대해서 4년간의 광범위한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 연구의 요점은 1957년 6월에 미국 의학협회지에 발표되었는데 통계부분 책임자인 하몬드(Dr. E. C. Hammond) 박사와 평가 계획 책임자인 혼(Dr. Daniel Horn) 박사에 의해서였다. 그 중요 내용을 발췌해 보기로 한다.
@ 연간 폐암 사망률은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열 배가 되며 하루 두갑 이상 피우는 사람은 스무 배가 된다.
@ 흡연을 중지한 사람들의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저하되었으며, 하루에 한 갑 이상을 피우던 사람이 일년 이상 끊으면 계속 피우던 사람보다 적어도 절반 가량의 사망률밖에 기록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 잎담배나 파이프 담배 흡연자의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궐련(필터 담배) 흡연자 보다 상당히 낮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00swc
담배의 생애
담배는 미대륙의 원주민들이 의식용, 의약용으로 사용하던 것을 1492년 콜럼버스가 유럽에 소개함으로써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광해군 10년에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우리나라 국민의 애환과 역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흡연은 한때 멋의 상징이었고 여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나 건강에 미치는 해독으로 이제는 만인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1498년과 1502년에 각각 콜럼버스와 동행했던 바돌로매 드 라 카사는 담배가 사악한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성직자들이 도덕적인 차원에서 담배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약이며 아편성 물질로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쾌락과 위안의 힘을 가진 악마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1604년 "담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라는 비난문을 발표해서 "흡연 습관은 보기에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냄새도 고약하고, 두뇌에도 위험하며, 폐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나쁜 것은 지옥에서나 있을 법한 더러운 연기를 흡연가가 직접 퍼뜨린다는 점이다" 라고 흡연 습관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1800년대의 국가 전매 사업화로 인해서 담배와 건강에 관한 논란은 1950년대에 영국에서 담배와 폐암에 관한 연구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중지되었습니다. 담배의 유해성에 관한 의학적 연구는 18세기에 담배가 입술암의 발생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시초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1920년에 담배와 입술암과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 게재되었고 1938년에는 흡연자의 평균 수명이 비흡연자에 비해 짧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폐암의 급격한 증가로 담배와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촉진되었고 1950년에 담배와 폐암의 관계가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957년 영국 의학연구위원회가 담배와 폐암과의 관계를 보고하였고, 이어서 1962년 왕립 내과학회는 담배가 폐암과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만성 기관지염, 심장병 및 위궤양을 일으키고 구강암 등 여러 가지 암의 발생에 관여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후 1983년에는 담배가 국민 사망률의 15~20%의 원인이 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1962년 7월에 담배와 건강에 대한 연구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1964년에 첫 보고서가 제출되어 담배와 폐암과의 관계를 확인하였고 금연에 관한 국가적 대책을 촉구 하였습니다. 이후 거의 매년 연구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1979년에는 담배가 인체에 미치는 전반적인 영향에 대해서 그때까지의 연구 결과를 총 집대성한 6.5cm 두께의 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1964년부터 25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총정리 하였으며 1990년에는 금연의 효과 및 건강 증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이들 보고서의 결과에 미국 정부는 1960년에 담뱃갑에 건강에 관한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하였고 1971년에는 방송 매체에서의 담배 광고를 금지시켰으며, 1983년에는 담배에 대한 연방 정부세를 두 배로 인상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담배의 주요 성분인 니코틴을 중독성 물질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관리 권한이 정부 기관인 식품의약품국(FDA)에 있다는 법안이 통과되어 정부에서 규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http://health.korea.com/healthguide/health_v.aspx?srno=7&group=20
1950 - 한국군 통수권의 미군이양에 관한 협정(한미대전협정) 체결
1950 - 대전(大田)협정 조인(1950)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오늘!
우리 나라와 미국은 임시수도 대전에서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기는 이른바 '대전협정(大田協定)'에 서명한다.
대전협정이 서명과 함께 발효됨에 따라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은 미국의 워커 중장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부여한다.앞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맡아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북한군의 기습적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시급한 상황에서 보낸 구조요청이었다.
맥아더가 이승만 대통령의 이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각서 교환 형식의 대전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우리 나라는 이 대전협정 때문에 6.25 휴전회담에서 협의 당사자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
1953년 7월 휴전이 이뤄진 이후 한·미 사이에 '합의 의사록'을 체결하면서 '작전 지휘권 (operational commands)'의
명칭이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으로 바뀐다.
그 뒤 40여 년이 지난 1994년 12월 1일에야 한국군은 평시 작전 통제권을 환수한다.
1948 - 제헌국회, 대한민국 헌법 제정
1948 -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대한민국의 헌법을 의결하다
1948 - 제헌국회, 헌법 제정(1948)
1948년 오늘!
제헌국회는 대통령책임제와 국회 단원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제헌헌법은 일본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모방해 3권 분립을 규정하고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또 미국식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가미하고 지방자치를 규정했다.
두 달 전 5.10 총선거로 성립된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국회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책임제와 국회 단원제로 수정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같은 해 8월 15일까지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쫓겨 1948년 오늘 국회에서 첫 헌법이 통과됐다.제헌헌법은 닷새 뒤인 7월 17일 공포됐다.
1948 - 대한민국 헌법 제정
[어제의 오늘]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ㆍ첫 헌법 서둘러 국회 통과
7월17일은 제헌절(制憲節), 말 그대로 우리나라 헌법이 제정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은 그날 만들어지지 않았다.1948년 5월10일의 총선거로 구성된 후 5월31일 첫 국회를 열어 이승만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한 제헌국회는 가장 먼저 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광복 후의 혼란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해 6월3일 헌법기초위원 30명과 유진오 박사 등 전문위원 10명으로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됐으며, 이들은 서둘러 초안을 완성했다. 원안은 국회를 양원제로 하고,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의장이 정부를 대통령책임제로 하고, 국회를 단원제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그렇게 수정돼 본회의에 상정됐다.
당연히 반발이 따랐고, 본회의에서는 여러 수정안이 쏟아졌다. 하지만 8월15일까지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에 쫓긴 국회는 헌법 제정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의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모방해 만든 우리나라 첫 헌법이 국회를 통과한다. 그날이 7월12일이다. 닷새 뒤인 17일은 그 법이 서명·공포된 날이다. 이승만 의장이 밝힌 공포문에도 ‘단기 4281년 7월12일에 헌법을 제정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이렇듯 7월12일에 만들어진 헌법을 닷새 뒤에 공포한 것과 관련해 ‘조선이 건국된 날과 때를 맞추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니, 의도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사실일 수는 없다. <태조실록> 등을 보면 1392년 7월16일 배극렴과 정도전 등이 고려 왕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에 몰려가고, 다음날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새 왕으로 등극하는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그러나 실록 등에 나오는 날짜는 음력이다. 우리가 양력을 쓴 세월은 100년 조금 넘는다. 1896년 1월1일 이전의 한국사 사료들은 모두 음력으로 기록돼 있다고 보면 된다. 사료 속의 1392년 7월17일을 양력으로 따지면 그해 8월5일이다. 이를 잘 아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8월5일 새 전시관인 ‘조선실’의 문을 열었다. 조선 건국일에 맞춘 것.아무튼 당시 정치인들이 정말로 조선 건국일과 날짜를 맞추기 위해 7월17일에 헌법을 공포한 것이 사실이라면, 참 뭘 모르고 한 일이다.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11 21:07: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112107115&code=100100&s_code=ap005
1948 - 제헌의회 헌법안 통과
[책갈피 속의 오늘]1948년 제헌의회 헌법안 통과
1948년 7월 12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제헌의회 본회의장. 의원들이 헌법 초안을 한 자 한 자 읽으며 첨삭 작업을 하는
‘본회의 독회(讀會)’의 12번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138명의 의원이 자리에 앉자 ‘재(在)일본 조선물산회사’가 보낸 축전이 낭독됐다.
“국회의 성공을 기복(祈福)하나이다. 우리는 조속한 정부 수립을 바라나이다.”
이후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인 서상일 의원이 헌법 초안을 낭독하기 시작했다.‘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윤치영 의원이 “제6조에서 ‘국방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이라고 했는데 ‘국방군’을 ‘국군’으로 고칠 것을 동의(動議)한다”고 말했다.국방군은 국군보다 대외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좁은 의미라는 지적이었다.
당시 이승만 의장이 표결에 부쳤다. 찬성 125표, 반대 12표로 가결. 이처럼 한 자 또는 한 단어를 결정하는 표결은 회의 내내 계속됐다.외국인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제7조 중 ‘국제관습’이란 말을 빼는 것도, “지불(支拂)은 왜인(일본인)들이 많이 쓰는 단어이니 ‘지급’으로 고치자”는 제안도 표결로 확정됐다.
‘일본 냄새’ 나는 출두(出頭)를 출석으로 바꾸는 안건은 1표의 반대 없이 통과됐다.
심지어 ‘국회의원은 동시에 지방의회의 의원을 겸할 수 없다’(헌법 초안 제48조)에서 부사 ‘동시에’를 빼는 결정조차도 거수투표로 했다.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독회가 모두 끝났다. 서정희 의원이 발언권을 얻었다.
“오늘 우리 국회의원은 참 경사스럽고도 기쁜 낭독을 다 마친 줄 압니다. (중략) 이 헌법은 비로소 통과하기를 동의하는 것이올시다.”“재청(再請)합니다. 삼청(三請)합니다. 사청(四請)합니다. 오청(五請)합니다.”
이승만 의장의 소감이 이어졌다.“삼천만 민족이 지난 40년 동안 남의 법률 밑에서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의 대표들이 자유선거로 여기에 모여서 삼천만을 대표하는 민의를 받아서 이 헌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우리 헌법의 제정은 실로 해방의 기쁨입니다.”최근 최고 권력자에게서 ‘그놈의 헌법’이라는 말까지 들은 대한민국 헌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동아닷컴 2007-07-12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2/8465586/1
1948 - 영국 공군 제트기, 대서양 횡단 성공
1941 - 영국-소련 상호원조 협정(1941)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오늘!
영국과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상호원조 협정(Anglo-Soviet accord)에 서명한다.
소련 수상 스탈린도 배석해 소련 주재 영국대사와 몰로토프 소련 외무인민위원의 조인식 장면을 지켜본다.
두 나라는 이 협정에서 가능한 모든 상호 원조를 통해 나치스 독일의 침략에 항전하기로 약속했다.
독일은 20일여 전인 6월 22일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1937 - 중국 국민정부, 항일전쟁 결의. 중앙군에 동원령
1935 - 프랑스의 육군장교 드레퓌스(Dreyfus, Alfred) 사망
드레퓌스 [Dreyfus, Alfred, 1859.10.19~1935.7.12]
1933 - 미국 의회가 미국에 첫 번째 연방 최저 임금 법을 통과시키다.
최저임금(最低賃金)은 고용자가 피고용인을 저임금으로 부리는 착취를 막기 위해, 국가에서 정한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할 최소한의 임금을 말한다. 각 나라는 자국의 법과 규정에 의해 최저 임금을 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그렇지 못하다.
첫 최저임금제는 1894년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고 미국이 1938년, 프랑스가 1950년, 영국이 1999년에
도입하였다. 대한민국은 1986년에 최저임금법을 제정하였고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도입 배경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능력을 존속하고 가족을 지속적으로 부양함으로써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이 생존임금(subsistence wage)이다. 그리고 생존임금에 더해 자식들의 교육과 최소한의 문화 수준을 누릴 수 있는 수준으로 상승한 임금은 생활임금(living wage)이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자유롭게 결정된 임금이 노동자의 생활임금이나 생존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국가는 노동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보장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를 위하여 정부가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의 최저 수준을 시장 균형임금 이상의 일정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해 설정한 임금이 최저임금이다. 따라서 최저임금제도는 빈곤 퇴치와 소득 불평등의 완화에 일조할 수 있다.
법률제정
최저임금제도의 효시는 1984년 뉴질랜드의 '산업조정 중재법(Industrial Conciliation and Arbitration Act)'이다. 미국은 1938년 '공정노동 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을 제정하면서 최저임금제도를 시행했다. 공정노동 기준법에서 그 제정 취지를 '남녀 노동자의 노동 노력에 합당한 임금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최저임금은 명목임금이므로 물가상승에 따라 실질임금은 하락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 의회가 실질임금 수준으로 최저임금의 인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공정노동 기준법'을 개정해 최저임금 수준을 인상한다.
최저임금제도란?
최저임금제도는 1929년 미국의 대공황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대공황이 있기 전 까지는 미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기 때문에 타국에 비하여 상대적인 물가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지냈습니다. 이 때문에 최저임금을 법으로 정할 필요가 없었죠.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면서 미국의 많은 공장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40%에 육박하는 실업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임금이 대공황 이전보다 70%이상 떨어지게 되었죠. 이렇게 떨어진 임금으로는 한 가족이 더이상 살아갈 수 없을정도로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후 1932년 당선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3R정책(회복, 구제, 개혁)을 통하여 미국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이때의 노력중 하나가 바로 1938년에 시행하게 된 공정노동 기준법입니다. 이법령을 통하여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남녀가 다른 임금이 아닌, 그리고 어떠한 한도보다 낮은 금액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법은 2가지 의의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는 남녀가 평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미국사회는 남녀불평등이 엄청 심했습니다. 같은 노동을 했을 시에도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2배정도 많은 임금을 받았고, 정치적 차별도 심하여 흑인보다 여성이 더 늦게 선거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사회는 흑인대통령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여성대통령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둘째는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업률이 너무 높자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을 거의 노예처럼 부리며 이용하였고, 이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은 하고 있으나 생필품을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저임금제가 보장되고 난 뒤에는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국민권익 2011.01.17 11:36
http://blog.daum.net/loveacrc/3452
1925 - NHK 동경방송국 본방송 개시
1920 - 칠레 혁명 발발
1917 - 미국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Wyeth, Andrew) 출생
와이어스 [Wyeth, Andrew (Newell), 1917.7.12~2009.1.16]
1916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박동진 출생
1913 - 중국, 제2혁명 (8.5 손문등 망명) 시작
1909 - 기유각서 조인 (일본에 사법권도 위임)
1909 - 기유각서 조인(일본에 조선 사법권 위임)
1907 - 이토 히로부미, 대한 강경책 훈령
1906 - 이민조례 공포
알프레드 드레퓌스.
1906 - 프랑스 최고재판소, 드레퓌스에 무죄 선고
프랑스 최고재판소가 1906년 7월 12일 1894년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재심을 열고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7년전 영국으로 망명한 에스테라지 소령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음에도 권위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 군사법원은 계속해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해왔다. 이날의 무죄판결은 그동안 유태인인 드레퓌스에 대한 군대내의 편견과 선입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프랑스 법원의 양심을 드러냈다.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12월 22일 군사기밀을 독일에게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프랑스 군사법원으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단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건은 에밀 졸라가 `나는 규탄한다...`는 6단자리 기고문을 파리의 `여명`이라는 조간신문에 게재함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집단적 편견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드레퓌스를 구해낸 프랑스 지식인의 집단적 저항은, 지식인의 양심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1904 - 러시아-독일, 통상조약 체결
1904 - 칠레의 시인, 외교관 네루다(Neruda, Pablo) 출생
네루다 [Neruda, Pablo, 1904.7.12~1973.9.23]
1895 - 노르웨이의 소프라노 가수 플라그스타(Flagstad, Kirsten) 출생
플라그스타 [Flagstad, Kirsten, 1895.7.12~1962.12.7]
1895 - 미국의 작사가, 뮤지컬 대본작가 해머스타인(Hammerstein, Oscar) 출생
해머스타인 [Hammerstein, Oscar, 1895.7.12~1960.8.23]
1895 - 미국의 건축가 리쳐드 버크민스터 풀러 출생 /위키백과
1895 - 미국의 공학기사, 건축가 풀러(Fuller, R. Buckminster) 출생
풀러 [Fuller, R(ichard) Buckminster, 1895.7.12~1983.7.1]
1884 -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출생 /위키백과
1884 - 이탈리아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Modigliani, Amedeo) 출생
모딜리아니 [Modigliani, Amedeo (Clemente), 1884.7.12~1920.1.24]
[역사 속의 오늘] 모딜리아니의 아내 잔 에뷔테른
가늘고 긴 목의 여인 그림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다
36세에 요절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헌신적인 아내 잔 에뷔테른(1898~1920)이 있어 외롭지만은 않았다.
1884년 오늘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1917년 봄, 프랑스 파리 태생의 잔 에뷔테른을 만났다. 역시 그림 공부를 하던
에뷔테른은 그림 모델이 되면서 15살이나 많은 카리스마 강한 이 예술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어린 딸이 모딜리아니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이를 무릅쓴 에뷔테른은 이듬해에 첫딸을 낳았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더욱 나빠져 결국 1920년 1월 24일 사망한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에뷔테른은
둘째 아이를 임신중이었지만 다음날,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른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선택을 비난했지만 10여 년 후 모딜리아니의 옆에 옮겨 묻어주었다. 3년이 채 못되는
기간이었지만 모딜리아니를 불꽃처럼 사랑했던 그녀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극단적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헌신적 반려자'.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7월 1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7309&yy=2011
청나라 복장을 한 대원군
1883 - 대원군, 천진에 피랍
1882 - 흥선대원군 납치사건 발생
1882년 7월 12일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장수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은 군사문제로 회담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아야 한다"며 강제로 보교에 태워 남양만으로 데리고 갔다. 대원군은 이후 3년 동안 강제로 청나라에 연금당했다. 이 사건은 임오군란 직후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의 세력확대를 꾀하는 과정에서 청이 대원군을 거세하고 민씨 정권을 다시 세우려는 계획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어 청나라 상인이 조선의 상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청에 대한 종속관계를 배제하고자 1884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원군은
1885년 8월에 귀국해 운현궁에 은거해 있다가 1894년 청일전쟁 후 갑오정권에 의해 일시적으로 추대되었다.
1876 - 프랑스의 시인 막스 자코브(Jacob, Max) 출생
자코브 [Jacob, Max, 1876.7.12~1944.3.5]
1870 - 모나코의 대공 루이 2세 출생
1870 - 모나코공국의 대공 루이 2세(Louis Ⅱ) 출생
루이 2세 [Louis Ⅱ, 1870.7.12~1949.5.9]
1863 - 프랑스의 세균학자 칼메트 출생
1863 - 프랑스의 세균학자 알베르 칼메트(Calmette, Albert) 출생
칼메트 [Calmette, Albert Léon Charles, 1863.7.12~1933.10.29]
1855 - 러시아의 해군 제독 파벨 나히모프(Nakhimov, Pavel) 사망
나히모프 [Nakhimov, Pavel Stepanovich, 1802.7.5~1855.7.12]
1854 - 미국의 사진기술자 조지 이스트먼(Eastman, George) 출생
이스트먼 [Eastman, George, 1854.7.12~1932.3.14]
1854 - 코닥 창립자 이스트먼 출생
[책갈피 속의 오늘]1854년 코닥 창립자 이스트먼 출생
‘연필처럼 쓰기 편한 카메라를 만들 수 없을까….’
1880년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사진용 건판(乾板) 판매회사를 세운 조지 이스트먼은 보통 사람들에게 사진술을 확산시킬 방법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사진은 부유층과 사진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1854년 7월 12일 뉴욕 주 북쪽의 워터빌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찌감치 타계하자 열네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보험회사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0년 뒤 저축은행 직원이 된 그는 휴가를 떠나려고 카메라를 처음 샀다. 지금의 전자레인지 크기였다. 어두운 텐트 안에서 유리판에 감광액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서둘러 촬영해야 했다. 장비를 옮기려면 말 한 마리가 필요했다.
휴가는 취소됐지만 이스트먼은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3년의 실험 끝에 감광액이 마르더라도 촬영할 수 있는 건판을 개발하는 데 성공해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사진을 보급하려는 계속된 노력은 돌돌 말린 ‘롤필름’의 발명으로 결실을 맺었다. 1888년에 이 필름을 넣은 코닥 1호 카메라가 나오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5달러짜리 카메라를 산 고객은 100장을 다 찍은 뒤 10달러를 동봉해 카메라째 이스트먼 코닥사(社)에 보냈다. 얼마 후면 사진과 새 필름이 든 카메라를 우편으로 받을 수 있었다.그는 “셔터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맡겠습니다”라는 이 카메라의 광고 카피를 직접 썼다. 코닥(Kodak)이라는 브랜드도 직접 지었다. 영화의 발명도 그의 필름이 있어 가능했다. 그는 토머스 에디슨을 위해 영화용 필름을 만들었다. 뤼미에르 형제, 조르주 멜리에스 등 초기 영화 제작자들은 모두 코닥 필름을 썼다.
이스트먼은 박애주의자였다. 평생 1억 달러 정도를 매사추세츠공대(MIT), 로체스터대 등에 기부했다. 자기 주식의 3분의 1을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평생 독신으로 산 이스트먼은 척추 협착증으로 고통 받다가 1932년 목숨을 끊었다. “친구들에게,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왜 기다려야 하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본의 후지, 독일의 아그파 등이 있었지만 코닥은 20세기 내내 세계 필름시장을 주도했다. 코닥을 위협할 진정한 경쟁자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등장했다. 1981년 일본 소니는 필름 대신 ‘촬상소자’로 영상을 기록하는 카메라 ‘마비카’를 발표했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의 개막이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 21세기에 ‘디카’를 넘어 ‘휴대전화 촬영’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동아닷컴 2008-07-12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712/8601637/1
1852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이리고옌 출생
1849 - 캐나다 출생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Osler, William) 출생
오슬러 [Osler, William, 1849.7.12~1919.12.29]
1824 - 프랑스의 풍경화가 외젠 부댕(Boudin, Eugène) 출생
부댕 [Boudin, Eugène, 1824.7.12~1898.8.8]
소로, Samuel Worcester Rowse가 그린 초상화(1854)
1817 - 미국의 수필가, 시인, 철학자 소로(Thoreau, Henry David) 출생
소로 [Thoreau, Henry David, 1817.7.12~1862.5.6]
소로는 <월든 : 숲속의 생활 Walden : or, Life in the Woods>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작가이다. 매사추세츠의 콩코드 출신으로 1837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랠프 월도 에머슨의 격려로 시인이 될 뜻을 품었다. 에머슨의 집에서 이른바 뉴잉글랜드 초절주의자들과 사귀었고, 1840년에 창간된 초절주의 동인지 <다이얼 The Dial>에 시와 수필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고, 그는 계속된 실패에 좌절해 낙향했다. 1845~47년 콩코드 인근의 월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초절주의의 이상을 몸소 실천했다. 그때 쓴 일기를 바탕으로 한 <월든 : 숲속의 생활>은 자연으로 돌아가 단순하고 자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담담하게 기술한 책이다.
이 작품도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전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미국의 사랑받는 고전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 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따라서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 그처럼 소중했기 때문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다."
- 헨리 D. 소로
1813 - 실험의학 창시자 클로드 베르나르 출생
1813 -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Bernard, Claude) 출생
베르나르 [Bernard, Claude, 1813.7.12~1878.2.10]
1806 - 나폴레옹, 독일 영주들로 라인 연방결성
1806 - 나폴레옹, 라인 동맹 창설
라인 동맹(프랑스어:Confédération du Rhin, 독일어:Rheinbund)은 프랑스의 속국으로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제외한 라인강 연안의 독일 연방국가들을 부추겨 결성한 동맹체제다. 나폴레옹의 꼭두각시였으며 1815년 몰락 후 해체되었다.
1771 - 제임스 쿡, 2년 11개월 간의 1차 탐험을 마치고 귀환
1730 - 교황 클레멘스 12세, 246대 로마 교황 취임
교황 클레멘스 12세(라틴어:Clemens PP. XII, 이탈리아어:Papa Clemente XII)는 제246대 로마 교황(재위:
1730년7월 12일 - 1740년2월 6일)이다. 세속명은 로렌초 코르시니(이탈리아어:Lorenzo Corsini)이다.
생애
1652년 4월 7일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콜로지오 로마노에서 수학한 후 피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상속권을 포기하고 사제가 되었다. 1691년 니코메디아의 명의주교가 된 후 빈의 교황청 사절, 추기경, 프라스카티의 교구장이 되었다. 이미 예술과 학문 및 행정의 대부로 알려져 있었고 평판이 좋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클레멘스 12세는 79살이라는 노령에 눈이 좋지 않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어도 정열적으로 일하였다. 교회 쇄신을 위해 전임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신용을 남용하여 타락한 추기경 니콜로 코시아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하였다. 교황청의 재정을 잘 관리하여 자연 재해로 고생하던 지역에 구호품을 보내고 로마의 건축에 힘썼다. 트레비 분수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보수하고 교황청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외교 면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대공 안토니오 파르네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1731년에 사망하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가 교황청의 종주권을 무시하고 대공직을 요구하여 두 마을을 차지해 버렸다. 클레멘스 12세는 엄중히 항의하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돈 카를로스가 오스트리아 세력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전쟁에 중립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얀센파에 대해서는 전임 교황들의 방침을 따랐다. 얀센파가 조금씩 쇠퇴해지자 유럽에서 프리메이슨이 조직되어 로마 가톨릭을 괴롭혔다. 이들은 비밀결사단체로서 자연윤리관을 따르고 비밀 서약에 의해 결사단체를 이루어,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엄한 벌을 주는 단체로서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맞지 않았다. 클레멘스 12세는 칙서 In Eminenti를 발표하여 이들을 파문함으로써 위협하였다.
클레멘스 12세의 큰 업적은 선교 정책에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 울라노에 그리스 전례 신학교를 세우고 프란체스코회원들을 아비시니아에 파견하여 로마와 일치하게 하였다. 레바논에는 뛰어난 신학자들과 바티칸 도서관 직원 조반니 아세마니를 파견하여 그 곳의 교회를 지원하게 하였다. 아시아 선교에 있어서는 중국식 의식과 말라바르 의식을 금하였다.
클레멘스 12세는 줄리오 알베로니 추기경이 산마리노를 점령하였으나 시민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그들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었다.
1712 - 잉글랜드 공화국의 호국경 리처드 크롬웰 사망
리처드 크롬웰(영어:Richard Cromwell, 1626년10월 4일 ~ 1712년7월 12일)은 영국의 정치가로, 1658년9월 3일에서 1659년5월 25일까지 약 9달 동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연방(영어: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의 2대 호국경으로 초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아들이다.
1691 - 교황 인노첸시오 12세, 242대 로마 교황 취임 /위키백과
1590 - 로마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출생
클레멘스 10세 [Clemens X, 1590.7.12~1676.7.22]
1562 - 마야문서 불태운 디에고 데 란다
[역사속의 인물] 마야문서 불태운 디에고 데 란다
“그들(마야인)은 미신과 악마의 속임수로부터 자유로워질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책 모두를 불태웠다.” 프란체스코회 유카탄 교구장 디에고 데 란다가 1562년 오늘 방대한 마야 문서를 불사른 뒤 한 말이다. 그의 행위는 종교와 문명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가장 야만적인 문명 파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524년 스페인 시푸엔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549년 마야문명의 중심지인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건너갔다. 선교 활동 중 마야의 유물에서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증거가 드러나자 마야의 종교와 문화는 악마에 씐 것이라며 모두 불태웠다. 란다의 분서(焚書) 이후에도 유물 파괴는 계속돼 현재 남아있는 마야 문서는 3종밖에 없다. 역설적인 것은 마야 문명을 파괴했지만 그가 남긴 ‘유카탄 견문기’라는 책이 없었다면 마야 문명은 영원히 망각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마야인들의 생활과 종교, 문화에 대한 종합보고서로 마야문명 연구의 필수적인 자료이다. 특히 이 책은 마야 문자 해독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마야문자와 라틴문자를 대조한 일람표 때문이다. ‘란다의 알파벳’이라 불리는 이 자료가 없었다면 마야문자 해독은 불가능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07월 1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7954&yy=2010
1536 -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 사망
에라스무스 [Erasmus, Desiderius, 1466?.10.27~1536.7.12]
1536 - 에라스무스 사망
중세가 저물어가던 무렵,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에라스무스다. 네덜란드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그는 코스모폴리탄이었고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주로 고전(古典)에서 구현된 자유롭고 인간적인 이상을 갈구한 탓에 그의 관심이 가톨릭의 부패상을 지적하는 데로까지 발전, 교회를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사람들의 개혁 욕구를 부추겼다. 인간성에 대한 통찰과 유머, 그리고 풍자를 담은 '우신예찬(愚神禮讚)'에서는 교회의 악폐를 꼬집었다.
마르틴 루터 역시 에라스무스의 저술에서 가르침을 얻었다. 이 때문에 교회가 "루터와 츠빙글리가 부화시킨 알을 낳은 장본인이 에라스무스"라며 비난하자 그의 항변이 걸작이다. "내가 낳은 건 달걀인데 루터는 다른 새의 알을 부화했다."
1517년의 종교개혁은 유럽을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등을 돌렸다. 민족주의, 광신적인 신앙, 불관용 등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루터와 영원히 결별했다고 해서 교회가 그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사후(死後)에 우신예찬은 금서 목록에 들어갔고 트리엔트공의회는 그를 '불경스러운 이단자'로 정죄했다.
1536년 7월 12일 67세로 스위스 바젤에서 숨졌다.
[오늘속으로(7월12일)] 에라스무스
1536년 7월12일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바젤에서 죽었다. 향년67세. 인문주의자란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그리스ㆍ로마의 언어와 학문을 연구하고 고대 문헌들을 새로 편찬하던 사람들을 뜻한다.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수도원에 맡겨졌는데, 그는 거기서라틴어 뭉치에 파묻혀 살면서 10대 후반에 이미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되었다. 또 스물 넘어서는 고대 그리스어를 깊이 공부해 그 시대에 이미 널널한휴지가 돼가고 있던 그리스 고전들을 대량으로 편집했다. 당대의 어린이들에게 고전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집필한 그리스어ㆍ라틴어 격언집 ‘아다지아’가유명하다.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은‘우신예찬’(1511)이다. 1509년 가을 절친한 벗 토마스 모어의 런던 집에 머물며 일주일만에 썼다는 이 책은 어리석음의 여신 모리아가 이세상이 얼마나 많은 어리석음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낱낱이 들어보이면서 자신의 힘을 뽐내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참고 문헌 없이 오로지 저자의 기억에의존해 집필됐다는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철학ㆍ문학 문헌들과 성경이 종횡무진으로 인용돼 저자의 박람강기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에라스무스는그 시대의 진지한 사람들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포복절도할 유머와 수다로 지식인들의 무용한 논쟁이나 성직자의 위선, 교회의 부패를 신랄히 풍자했다. 종교 개혁의 불꽃이일기 시작하던 시절을 살았던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루터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신학 논쟁의 불을 지피는 열정이 지나쳐서 그것이종교 전쟁으로 확산될 때 세상이 어떤 꼴이 될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 광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광신자들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그는 생각이 너무 많았던 회색인이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1/07/11 18:41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107/h2001071118410713510.htm
1498 - 무오사화
1498 - 무오사화 일어남
1498 - 무오사화가 일어나다 /위키백과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 음력 7월 유자광 과 조선 연산군 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원인
사림파(士林派)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인데 그 중심인물은 김종직(金宗直)이었다. 그는 임금의 신임을 얻어 자기 제자들을 많이 등용하고 주로 3사(三司)에서 은연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날이 감에 따라 이들은 종래의 벌족(閥族)인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여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또 훈구파는 새로 등장한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여 업신여기게 되니, 이 두파는 주의·사상 및 자부(自負)하는 바가 서로 달라 배격과 반목이 그치지 않았다.이러한 상태에서 특히 신진의 김종직과 훈구의 유자광은 일찍이 사감이 있었고, 또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기록한 일로 인해 세조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싣는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다 연산에 보고되어, 마침내는 큰 피바람이 일었다.
진행
조의제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때마침 연산군 4년인 1498년, 실록청에서는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사초를 모아 편집했다. 이때 사림파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삽입한 것을 유자광이 알고, 유자광은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해석하여 문제 삼았다. 조의제문은 겉으로는 초나라의 회왕(의제)가 꿈에 나타나 이를 조문한다는 내용이었으나, 항우에게 죽은 의제는 실제로는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문제삼아 훈구파는 유자광과 더불어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바쳤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던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훗날 중종때 사화의 단서를 제공한 사초를 누설한 이가 누구냐를 놓고 유자광을 문초했을때 유자광의 처음 진술은 허침에게서 들었노라고 하였다가 심문관이 그럴리가 없다 이극돈에게서 들은것이 아니냐 라고 하자 진술을 바꿔 이극돈에게서 들었노라고 하여 이극돈이 사초의 내용을 발설한 최초의 원인제공자로 역사에서는 가르쳐왔으나, 이극돈이 사화 당시에 사초의 내용을 알고도 보고치 않았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4개월의 유배를 갔었던 점과 중종임금이 이극돈의 3남 이세정의 상소로 삭탈되었던 직첩을 돌려주는 과정등을 종합해보면 이극돈은 훈구파의 거두로서 유자광의 번복된 진술에 의한 사림들에 의해 누명을 쓴것으로 보인다.
능지처참에 부관참시, 그 사관의 길
훈구파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34살에 죽은 김일손
연산군 4년(1498) 7월1일. 윤필상·유자광 등 훈구 공신들이 차비문에 나가서 연산군에게 비사(秘事)를 아뢰겠다고 청하자 도승지 신수근이 안내했다. 사관 이사공(李思恭)이 참석해서 듣기를 요청하자 신수근은 “그대가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잠시 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연산군일기>는 “바깥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고 전한다. 홍사호와 신극성이 달려간 곳은 경상도 청도군인데, 연산군은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隸) 중에 말 잘 타는 자를 보내 의금부 도사가 잡아오는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하게 할 정도로 재촉했다. 그렇게 체포된 인물은 김일손인데, 마침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의금부 경력 홍사호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이렇게 말했다.
무오사화의 피비린내를 예언하다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연산군일기>
4년 7월12일) 그의 예견대로 일어나는 큰 옥사가 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무오사화는 당초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기사관(記事官·정6품) 김일손과 직속 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감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長興)의 관기 등을 가까이했다고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이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부했다.
발단은 두 개인 사이의 갈등이지만 그 배후는 복잡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기 때문이다. 구세력인 집권 훈구와 신세력인 신진 사림의 대립이었는데,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세조의 즉위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사림파는 세조의 즉위 자체를 부인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이극돈이 유자광을 끌어들이고, 유자광이 다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신수근 등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훈구세력들의 세계관이 같았기 때문이다.
발단은 이극돈에 대한 사초였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적은 내용이었다. 세조가 며느리를 탐했다는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세조 10년(1464)생인 김일손은 세조가 사망했던 1468년에 다섯 살에 불과했으므로 세조 때의 궁중 비사를 알 수 없는데도 이를 적은 것은 배후가 있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이 김일손에게 ‘세조조의 일을 어디에서 듣고 기록했는지 대라’고 말하자 김일손은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라고 거부했다.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국왕이 볼 수 없었던 사초까지 강제로 본 인물이었다. 거듭된 심문에 김일손은,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을 댔을 뿐 나머지는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것은 역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라고 거부했다.
연산군은 훈구공신 윤필상·유자광 등에게 김일손의 국문을 맡겼으니 심문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초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사화로까지 번질 일은 아니었다. 유자광이 이를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을 심문할 때,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절개라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 “소릉(昭陵·단종의 모후의 능)의 재궁(梓宮·시신)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라는 등 세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물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세조(수양대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살해한 인물들이었다. 소릉은 단종의 모후 권씨의 무덤인데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이후 파헤쳐졌다는 무덤이다.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都事) 시절 “예로부터 제왕은 배위 없는 독주(獨主)가 없거늘, 문종만은 배우자 없는 독주이옵니다”라며 소릉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이를 세조 체제를 부인하는 역심으로 몰기 위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소릉 복구를 청하고, 난신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너의 반심(叛心·반역하려는 마음)을 내포한 것이다”라고 동조했다. 소릉 복위 문제도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의제문’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무오사화’조는 “유자광은 옥사가 점차 완화되어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했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놓으니 곧 김종직의 문집이었다”라고 전하는데 문집 속에 든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다. 김종직은 성종 23년(1492) 이미 사망한 뒤였다.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
<연산군일기>는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 아뢰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은유법으로 쓰였기에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조의제문’은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나는 밀양에서 경산(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라고 시작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문제는 이 글의 정축년 10월이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세조 3년 10월을 뜻한다는 점이다.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항우를 세조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암시한 것이다. 의제의 시신이 ‘빈강에 잠겼다’라는 내용도 ‘노산이 해를 당한 후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는 <아성잡설>(鵝城雜說) 등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유로 가득 찬 ‘조의제문’의 내용을 연산군에게 상세히 해석해주었는데, 예를 들면 ‘어찌 잡아다가 제부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라는 문장은 ‘김종서와 노산군(단종)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쓴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연산군은 흥분했다. 그 역시 훈구파처럼 항상 반대하기 좋아하는 사림파를 제거할 호기로 생각한 것이다.
연산군의 부친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것은 사림의 성향을 몰라서가 아니라 왕권을 능가하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사림은 훈구파의 비정과 비리를 강하게 공격했고, 훈구파는 몇 차례 역습하려 했으나 성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림파의 존재 자체가 왕권을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런 대국적 흐름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는 사림파의 쓴소리 자체가 듣기 싫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높이 평한 ‘죄’
연산군이 유자광이 가르쳐준 대로 어전회의에서 ‘조의제문’을 풀이하자 자리에 참여한 신하들은 입을 모아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보면 병자년(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 해)에 난역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라고 외쳤다. ‘난역을 꾀한 신하들’이란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켰던 인물들을 뜻한다. 이런 ‘조의제문’에 대해 김일손은 거꾸로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정의했다. 충성스런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조의제문’을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다’는 훈구파와 ‘충분이 깃들어 있다’는 사림파가 한 하늘 아래 살기는 어려웠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행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목을 베는 판국에 산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일손·권오복·권경유 세 사신(史臣)은 대역죄로 몰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불린다. 김일손이 사형당하는 날 연산군은 ‘백관(百官)이 모두 가 보게 하라’고 명하고 “근일 경상도와 제천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사람은 지진이 임금의 실덕에서 온다 하였으나, 금번의 변괴는 이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연산군은 그해 7월27일,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했다. 죽을 때 김일손의 나이 만 34살에 불과했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정여창처럼 개인 수양인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한 계열과 좀더 적극적 사회 참여인 ‘치인’(治人)을 강조하는 한 계열이 있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치인 계열의 대표이다. <월정만필>은 김일손이 정광필과 양남어사(兩南御史)가 되어 용인의 객관에 같이 묵었을 때 ‘시사를 논하는데 강개하여 과격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그럴 정도로 김일손은 뜨거운 피를 갖고 있었다.
<패관잡기>는 “계운(季雲·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은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연산군을 비판하고 있다.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하다
반면 김종직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평가가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사림의 종주(宗主)로 떠받들지만 허균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 ‘주술시’를 기술했던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었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면서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대유(大儒)로 치켜올리는 것을 안타까워한다”(김종직론, <성소부부고>)라고 평했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 ‘김일손 만시(挽詩)’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후에 벼슬이 육경(六卿·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조의제문’을 보면 분명히 우의(寓意)한 작품이었으니 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라고 비판 대열에 가담했다.
김일손은 정5품 정도의 벼슬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관을 펼쳤다. 그의 호 탁영자(濯纓子)는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 따온 것이다. 창랑의 물이 흐린데 갓끈을 씻으려 한 김일손. 그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그만큼 세상을 사랑한 것이리라.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사후에도 가혹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의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이미 사망한 김일손의 부친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첩자(妾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까지도 목을 베어 죽였다.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임금이 될 수 없었던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던 무리수는 이렇게 먼 훗날까지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종반정 뒤 김일손은 복관되고 문민공(文愍公)이란 시호도 내려졌지만 중종 때 다시 김일손과 같은 사림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처럼 역사의 어두움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한겨레 21 칼럼 2007년04월26일 제657호
http://h21.hani.co.kr/section-021147000/2007/04/021147000200704260657023.html
1429 - 프랑스 신학자 제르송 사망
685 - 교황 요한 5세, 82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교황 요한 5세(라틴어:Ioannes V, 이탈리아어:Papa Giovanni V)는 제82대 로마 교황(재위:
685년7월 12일 ~ 686년8월 2일)이다.
요한 5세는 치리아쿠스의 아들로서 시리아 출신이며 부제로서 교황 아가토의 사절로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가 교황 베네딕토 2세에게 내린 규정에 의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합법적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5세는 사르데냐 지역의 칼리아리의 대주교 치토나투스에 의해
임명된 사사리의 주교 서품을 무효로 하고 무효가 된 주교는 칼리아리의 대주교가 아니라 로마 교황의 사목권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3 (0) | 2019.07.13 |
---|---|
오늘의 역사 (7월 13일) (0) | 2019.07.13 |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1 세계인구의 날 (0) | 2019.07.11 |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2 (0) | 2019.07.10 |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0 (0) | 2019.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