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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7 소 서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7     소 서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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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2 - 제1차 개헌(발췌개헌)에 의한 개정헌법 공포

제1차 헌법개정
제1차 개정은 1952년 7월 7일의 이른바 '발췌개헌'이다. 당시 여당과 야당은 정치적으로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여ㆍ야는 각각 개헌안을 제출하면서 더욱 심하게 대립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두 개헌안의 내용을 절충한 개헌이

이루어졌다. 개정은 통치구조에 관하여만 이루어져서 21개 조항이 수정ㆍ삭제 ㆍ증보되었다.

주요한 내용으로 대통령ㆍ부통령 직선제, 양원제국회 등을 들 수 있다.

세계 헌법재판소장 회의

http://www.ccourt.go.kr/home/20symposium_kor/0402.html 

 

2) 2009 - 교황,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규제받지 않은 시장을 경고하다

교황 “자본주의, 거대한 일탈과 실패”

교황과 자본주의. 신정분리는 아니더라도 왠지 어색한 조합이다. 하지만 교황이 경제시스템을 언급하는 건,

이례적인 만큼 더욱 의미심장하다.

교황 베네딕토16세가 7일 ‘비세속적 경제학자’로서 전 세계에 충고를 건넸다.

그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은 “죄악의 치명적 영향을

받은 게 명백하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보면 위기를 초래한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앙적 설교에 불과한 거 아니냐는 선입관을 확인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교황은 좀 더 구체적인 문제를 지적해나간다. 그는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인 금융집단에 “저축하는 이들의 이익을 배신할 수 있는 복잡한 금융상품을 남용하는 게 아니라, 활동의 진정한 윤리적 토대를 재발견해야만 한다”고 촉구했다. 또 기업가들에겐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요구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짚어내기도 한다. 그는 “거대한 일탈과 실패”라고,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를 매섭게 질타했다. 이 때문에 <뉴욕 타임스>는 베네딕토16세를 “구 유럽사회주의 학파”로 표현했다. 확실히 그의 언어는 좌파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이다. 그는 “수익이 배타적인 목적인 된다면,

또 궁극적 목적으로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 없이 부적절한 수단을 쓴다면, 그것은 부를 파괴하고 빈곤을 만들어낼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부의 재분배도 강조했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개발 원조도 모두의 부를 창조하는 타당한 수단으로서 고려돼야 한다고 말한다. 베네딕토16세의 이런 발언들은 지난 2005년 교황된 이후 나온 그의 세번째 회칙에

오롯이 담겨 있다. 모두 144쪽에 이른다.

이날 그의 발언이 더욱 주목받은 까닭은, 이탈리아 라퀼라에서 주요8개국(G8) 정상들이 경제회생의 해법 등을 논의하는 회담을 열기 하루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회칙은 ‘세계화, 시장경제, 외주, 노조, 대안 에너지’ 등의 단어로 넘쳐났다. 예를 들어 생산의 외주화가 노동자와 공급자, 소비자, 공동체 등 이해관계자들을 향한 회사의 책임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교황이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규제받지 않은 시장를 공격했다”며 “그는 더욱 강한 정부

규제를 요구했다”고 전했다. 그는 전 세계에 호소했다. “현 위기의 악화와 불균형의 심화를 피하고,

위기에 의해 타격을 입은 경제를 회생시키려면 세계경제를 관리할 진짜 세계 정치기구가 필요하다.”

교황의 말은 지난 30년동안 추구해왔던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반성의 촉구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데이튼대의 신학자 빈센트 밀러는 “교황은 시적 언어로 악덕 자본가들을 완전히 때려눕혔다. 그는 여러분들에게 ‘글로벌 자본과 주주 시스템이 관리인들에게 단기적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면서, 공동체와 노동자, 환경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명확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의 말이 ‘고장난 시스템의 재설계’에 얼마나 반영될까?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한겨레 20090708 23:30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64807.html

 

3)1907 - 미국의 공상과학(SF)소설 작가 하인라인(Heinlein, Robert) 출생

하인라인 [Heinlein, Robert, 1907.7.7~1988.5.8]

미국의 작가.

가장 문학적이고 세련된 공상과학소설가로 여겨진다. 1929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해군에서

복무했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의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고, 제2차 세계대전중 해군에서 엔지니어로 복무한 것을 제외하고 1939년부터 평생 전업작가를 고수했다. 첫 단편 〈생명선 Life-Line〉이 액션

모험잡지 〈애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 Astounding Science Fiction〉에 게재되었다. 그는 계속 다른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들과 함께 1942년까지 작품을 써서 출판했다. 전쟁이 터지자 엔지니어로 복무했으

나 1947년 다시 문단에 복귀하여 보다 세련된 안목을 가진 독자를 위해 작품을 썼다. 첫 저서 〈우주선 갈릴레오 Rocket Ship Galileo〉(1947)를 출판한 후 많은 소설과 단편집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1940년대부터는 단편소설은 잘 쓰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해가 갈수록 높아졌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

〈낯선 땅의 이방인 Stranger in a Strange Land〉(1961)이 발표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독특한 성격묘사와

기술공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일반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밖의 인기작으로는 〈지구의 푸른 언덕 The Green Hills of Earth〉(1951)·〈이중의 별 Double Star〉(1956)·〈여름을 향한 문 The Door into Summer〉(1957)

〈은하의 시민 Citizen of the Galaxy〉(1957)·〈메두셀라의 아이들 Methuselah's Children〉(195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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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3 - 미국의 소녀 스미스 '최연소 친선대사'로 소련 방문



[어제의 오늘]1983년 미국 소녀 서맨사 스미스의 소련 방문

ㆍ언론들 ‘어린 친선대사’에 열광

“안녕하세요, 미스터 안드로포프. 제 이름은 서맨사 스미스이고, 나이는 10살입니다. 새로운 일을 맡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는 러시아와 미국이 핵전쟁을 할까봐 무서워요. 혹시 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게 아니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지 제게 얘기해 주세요.”
1982년 11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미국인 소녀의 편지가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실렸다. 스미스는 다시 미국 주재 소련 대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답장을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83년 4월26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친애하는 서맨사,

편지는 잘 받았다. 네 질문에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답하마. 소련은 지구상에 그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단다.” ‘Y 안드로포프’라는 서명이 담긴, 안드로포프의 답장이었다.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물려받았을 당시 미국 언론들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는 ‘서방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올라 ‘스타워스’로 알려진 군비경쟁에 불을 붙였다.
스미스는 캐나다와 가까운 메인 주의 맨체스터에 살았다. 그는 안드로포프 취임 기사를 읽은 뒤 “이 사람이 그렇게 무서우면 편지를 써서 전쟁을 할 건지 물어보면 되잖아요”라 말했다고 한다. “네가 해보지 그러니”라는 어머니의 대답이 소녀의 삶을 바꿨다. 냉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스미스의 편지는 두 슈퍼파워를 잇는 다리가 됐다. 스미스는 마침내 83년

7월7일 안드로포프의 초대를 받아 소련 땅을 밟았다. 2주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을 둘러본 스미스는 미국에 돌아가서 “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정작 안드로포프와

만나지는 못했고, 전화 통화만 했다고 한다.
언론들은 ‘어린 친선대사’에 열광했다. 그러나 85년 8월 스미스는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3년의 짧은 삶을 살다간 소녀의 죽음에 세계가 슬퍼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미 대통령도 애도 서한을 보냈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061745345&code=100100&s_code=ap005

 

2) 1950 - UN안전보장이시회, 유엔군사령부 설치안 가결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

뉴질랜드·필리핀·태국·터키·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한국 전쟁)

 

3) 1901 - 스위스의 아동문학가 요하나 슈피리(Spyri, Johanna) 사망  

슈피리 [Spyri, Johanna, 1829.6.12~1901.7.7]

스위스의 작가.

아동소설 〈알프스 소녀 하이디 Heidi〉(2권, 1880~81)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이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유머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불후의 명작들을 남길 수 있었다. 1852년 편집일에 종사하던 법률가 베른하르트 슈피리와 결혼한 뒤 취리히로 이주했다.

그녀의 조국애, 자연에 대한 감성, 겸손한 신앙심, 재기발랄함은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독특한

 면모를 지니게 했다. 그밖에도 〈프로니 무덤

위의 꽃잎 하나 Ein Blatt auf Vronys Grab〉(1870)·〈실향 Heimatlos〉(1881)·〈그리틀리 Gritli〉(188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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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 - 노태우 대통령,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발표 (7ㆍ7선언)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1.남북한 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들의 자유로운 남북왕래 2.이산가족 교신

상호방문 주선 3.남북한간 물자거래, 문호개방 4.우방국과의 북한무역 불반대 5.대결외교 지양, 국제무대 협력 6.북한은 미일, 한국은 중소와의 관계 개선 등 6개항을 골자로 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를 7ㆍ7선언이라 한다.즉, 지금까지의 북한과의 체제우위적 대립관계를 탈피, 선의의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며

또 다른 체제로 인정, 남북한이 상호교류를 통해 사회 경제 문화 부문에서 공동체로 통합해 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공동체로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통일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2) 1981 - 태양전지 비행기 `솔라 챌린저`호 도버해협 횡단비행 성공  

역사 속의 오늘-솔라챌린저호 영불해협 횡단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1903년 12월 '키티호크' 비행으로 하늘을 날고픈 인류의 꿈을 실현시킨 이래 1981년

7월 7일에는 항공 개발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가 하나 세워졌다.

미국의 폴 맥크레디는 이날 태양전지로 만든 '솔라 챌린저'호를 타고 파리 북쪽의 한 공항을 출발해 5시간 30분 동안 163마일(262km)을 날아 런던 남쪽의 공군기지에 안착했다. 1954년 발명된 이래 태양전지가 하늘을 여는 운송수단에까지 쓰이게 된 것이다.

길이 9m, 날개 14.3m, 무게 90kg의 솔라 챌린저호로 역사적인 비행을 한 폴 맥크레디는 전 글라이딩 챔피언이었다. 맥크레디는 1979년에는 인력으로 모는 '고써머 알바트로스'호를 타고 영불해협을 건넌 적이 있다.

14세 때부터 미국 전국모형비행기 대회에서 7개의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비행에 관심이 많았던 맥크레디의 열정의 결과였다. 솔라 챌린저호는 맥크레디가 태양력을 '기업과 정부가 환경.에너지 문제를 인식하고 지향점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면서 탄생한 항공기였다.

청정 에너지원 개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조문호기자news119@msnet.co.kr /매일신문사 2006년 07월 0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781&yy=2006 

 

3) 1901 - 이탈리아의 배우, 영화감독 데 시카(de Sica, Vittorio) 출생

데 시카 [de Sica, Vittorio, 1901.7.7~1974.11.13]

이탈리아의 배우,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함께 신사실주의 영화운동의 걸작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제를 연민 어린 시각으로 그려냈다.

이탈리아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원래 은행이나 정부에서 일하려 했으나 생활이 궁핍해지자, 1923년 극단에 들어가 여성에게 인기있는 미남배우 겸 가수가 되었다. 처음 출연한 영화인 마리오 카메리니 감독의 〈악당들 같으니! Gli uomini, che mascalzoni!〉(1932)로 스타가 되었고, 〈빨간 장미꽃 24송이 Due dozzine di rose scarlatte〉(1940)로 감독으로서 크게 성공했다. 데 시카는 연출방법을 신사실주의 양식으로 바꾸어, 그 특색인 감정 압축과 사회성 짙은 주제 및 인간의 본질적 동포애에 대한 신념을 표현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점차 인간주의적인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그의 영화에서는 이른바 점잖은 계층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처절하게 펼쳐진다. 〈구두닦이 Sciuscià〉(1946)는 이탈리아의 가난한 어린이들의 이야기이며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1948)은 전쟁 후 가난해진 한 가족이 자전거를 도둑맞고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밀라노의 기적 Miracolo a Milano〉(1950)은 사회 풍자와 환상을 결합시킨 영화이며 〈움베르토 D. Umberto D.〉(1952)는 외로운 연금생활자를 그린 영화로 그의 유일한 동반자인 개가 죽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데 시카의 4편의 영화 〈구두닦이〉·〈자전거 도둑〉·〈사랑의 변주곡 Ieri, oggi, domani〉(1963)·〈핀치 콘티니가(家)의 정원 Il giardino dei Finzi-Continis〉(1970) 등은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받았다. 후기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신사실주의적인 작품들만큼 높이 평가되지는 않는다. 마지막 작품으로는 〈짧은 휴가 Una breva vacanza〉(1974)와, 그의 죽음과 때를 같이하여 파리에서 초연된 〈항해 Il viaggio〉(1974)가 있다.

 

2009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장례식

굿바이 마이클 잭슨…장례식 애도물결

전설이 된 `팝의 황제'가 지상에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팝 역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이 7일 오전 10시(이하 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잭슨의 가족과 일반 팬 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이날 장례식은 가수 스모키 로빈슨이 장례식장에 참석하지 못한 다이애나 로스와 넬슨 만델라의 조사를 대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곧바로 황금색 관이 무대 중앙으로 옮겨졌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상단을 붉은색과 노란색 꽃으로 단장한 잭슨의 관은 이에 앞서 이날 오전 8시께 할리우드 '포리스트 론' 공원묘지에서

잭슨의 가족과 친지들만 참석한 비공개 장례식을 치른 후 검은색 영구차에 실려 스테이플스 센터까지 운구됐다.

`팝 디바' 머라이어 캐리는 잭슨이 `잭슨 파이프' 시절 불렀던 명곡 `아일 비 데어(I'll Be There)'를 트레이

로렌즈와 듀엣으로 열창하면서 추모공연의 막을 열었다.

장례식은 고인의 다양한 생전 모습이 무대 중앙스크린을 영상으로 수놓은 가운데 시종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 노래와 고인의 생전 기억을 되살리는 추모사가 번갈아 이어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2시간이 넘게 계속된 장례식은 애초 예상했던 `지상 최대의 쇼'라고 할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내내 차분하면서도 고인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가득한 감동의 무대였다.

라이오넬 리치와 스티비 원더, 제니퍼 허드슨 등 팝스타들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추모곡을 선사했다.

농구스타 코비 브라이언트와 매직 존슨, 잭슨의 여자친구였던 배우 브룩 실즈는 단상에 올라 잭슨과 함께했던

잊지 못할 추억을 되새기면서 고인의 안식을 기원했다.  

흑인인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는 잭슨이 흑인 연예인들도 슈퍼스타가 되는 길을 열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는 "마이클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였고 서로 함께 하도록 가르쳤다"고 말했다.

영국 장기자랑 프로그램인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 출연, 잭슨을 완벽히 모사해 화제가 됐던

초등학생 새힌 자파골리도 추모곡을 선사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장례식 말미에는 추모사와 추모공연을 했던 인사들과 유족들이 모두 단상에 올라와 추모객들과 함께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와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를 합창하는 감동을 연출했다.

특히 잭슨의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11)이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눈물을 참지 못한 채

"아빠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해 잭슨 팬과 추모객들이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날 스테이플스 센터 주변에는 새벽부터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추모객들이 몰렸으나 경찰이 장례식장 주변에

통제선을 설치하고 장례식장 입장권을 얻은 1만7천500명에 한해 입장을 허용해 큰 혼잡은 없었다.

미국의 방송사들은 아침부터 `포리스트 론' 공원묘지에서 열린 비공개 가족 장례식에 이어 공개 장례식을 생중계했고,

전 세계 수백만명의 팬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세기의 장례식'을 지켜봤다.

아시아 지역 팬들은 장례식이 열린 시각이 한밤중이었지만 밤을 지새우며 잭슨이 지상과 이별을 고하는 장면을

지켜봤고, 파리와 시드니 등지의 방송사들은 정규 프로그램을 잠시 중단한 채 잭슨의 장례식 행사를 생중계했다.

잭슨은 지난달 25일 LA 홈비힐스 자택에서 갑자기 급성심박정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최재석 특파원 bondong@yna.co.kr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한겨레  2009-07-08 오전 06:36:1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64565.html

 

2007 -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만리장성, 마추픽추 등 선정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민간재단에 의해 새롭게 선정됐다.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 재단은 7일 중국의 만리장성과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

멕시코 치첸 이차의 마야 유적지, 로마의 콜로세움,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를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새롭게 선정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유력후보로 거론되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칠레의 이스터섬 조상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터키 하기아 소피아 등은 탈락했다.

스위스의 영화제작자  베른하르트 베버가 주도한 이 재단은 지난 1999년부터 200곳의 후보지를 선정해 지난해

1월 21곳으로 확정했다.불가사의 선정은 인터넷과 전화 투표를 통해 이뤄졌으며 1억여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번 7대 불가사의 선정은 문화유산의 과학적·고고학적 가치보다는 대중적인 인기도에 의해 결정됐고,또한 투표에 앞서

각국이 자국의 문화유산을 7대 불가사의에 포함시키기 위해 온라인 투표를 독려하기도 해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다.

고대에 선정된 7대 불가사의는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 로도스 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 알렉산드리아 의 파로스 등대 등이다.

이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당초 재단은 피라미드를 후보지에 포함시켰으나 이집트측이 강하게

반발해 투표에서 제외됐다. 조선닷컴 2007.07.0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7/08/2007070800039.html 

 

1973 - 경주 황남동 98호고분(황남대총) 발굴 시작

황남동 제98호 고분(황남대총)은 경주시내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이다. 거의 원형이 유지된 무덤의 규모는 동서 80m, 남북 120m, 높이 22.2m() ·23m()로 1973년도부터 1975년도까지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의 발굴조사에 의해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이 T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으뜸덧널은 당시의 지표()를 45cm 깊이로 파고 그 위에 맷돌과 자갈을 깔아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덧널[]은 내외 이중으로 설치되었는데, 내외덧널 사이는 잔자갈로 채워져 있었다. 다시 안쪽덧널 안에는 널과 껴묻거리[] 칸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널 안의 피장자()는 금동핀 ·목걸이 ·허리띠 ·고리자루칼[]을 착용하고 있었고, 껴묻거리 칸에는 은관 ·

금제관장식 등의 무기류가 들어 있었다. 피장자는 머리를 동쪽으로 둔 유골() 일부가 남아 있어 60살 전후의 남자로 밝혀졌는데, 그 외에 20대의 여자 유골 일부가 안쪽덧널 안에서 더 수습되어 한 무덤덧널 안에 순장()된 여자가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돌벽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딸린덧널에서는 둥근밑항아리와

굽다리접시를 비롯한 토기류, 덩이쇠[]를 비롯한 철기, 안장 등의 말갖춤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북분은 남분의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연이어 축조되었는데 남분과는 달리 딸린덧널이 없는 외널무덤[]이다.

남분과 마찬가지로 덧널 안에는 널이 안치되어 있고 널 위 동쪽에 따로 껴묻거리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널과 껴묻거리 칸에는 금관 ·목걸이 ·허리띠 등의 장신구, 유리와 토제 등의 용기, 고리칼 등의 무기가 들어 있었다. 또한 덧널 위에서도

귀걸이 ·옥제품 ·말갖춤 ·토기 등 신라고분에서는 가장 많은 금제()장신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북분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많은 반면 무기류가 적었으며 또한 ‘(부인대)’라는 명문이 있는 허리띠끝꾸미개가 출토되어

부부묘()인 북분과 남분 중 북분이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황남대총은 신라고분을 여러널무덤[]과 홑무덤[]으로 구분할 경우 어울무덤에 속하며,

형태상 표형분에 속하는 무덤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의 형식상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기원 4~5세기내 돌무지덧널무덤의 등장과 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1970 -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428㎞의 도로는 2년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밀어붙이기식 공사로 77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 박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1947 - 로스웰 UFO 추락사건 발생

UFO, 환상인가 진실인가

UFO(미확인 비행물체)는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하게 자극한다. “수만광년 떨어진 아득한 우주 저쪽에서 외계인들이 빛을 앞질러 달리는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를 찾아오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기하급 수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UFO에 대한 ‘믿음’과 관계없이 주류 과학계는 UFO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있다. 자연현상에 대한 착각이거나

집단무의식 에서 비롯된 거대한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외계인으로 보이는’ 시체의 진상

지난 6월24일 미 공군은 전세계적으로 UFO현상을 확산시킨 결정적 계기였 던 ‘로스웰사건’에 대한 최종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로스웰 보고서: 사건 종결>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지난 1947년 7월 미국 뉴멕시코 주의 작은 마을 로스웰 부근에 비행접시가 추락했으며, 외계인 사체 4구 를 미 공군이 수거해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다”는 UFO연구가들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미 공군은 워싱턴의 펜타곤(미 국방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설명한 뒤 “UFO가

존재한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 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UFO는 없다’는 것이다.

UFO현상의 진원지가 된 로스웰 사건은 꼭 50년 전인 1947년 7월7일 로스 웰의 한 목장주인이 굉음과 함께 추락한 비행물체와 “외계인으로 보이는 ” 시체 4구를 ‘목격’한 데서 비롯됐다. 신고를 받은 인근의 미 육군 항공기지는 현장에서 비행물체의 잔해를 수습하고 사체를 군병원으로 옮 긴 뒤 추락물체가 “비행접시(flying disc)”라고 발표했으나

수시간 뒤 공군에 의해 “기상관측용 기구”로 정정했다. 이후 이 사건은 해프닝으 로 끝난 듯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영국의 UFO전문가 티모시 굿이 “해 리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MJ-12’라는 암호명으로 극비리에 설 치된 정부 고위 위원회가 로스웰의 외계인 시체 조사를 지시한 뒤 이를 은폐했다”는 주장을 펴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어 19 95년 8월에는 영국인 영화제작자 레이 산틸리가 로스웰 사건 당시 외계인 사체를 해부하는 장면이라며

낡은 필름을 공개해 전세계인을 경악시켰다. 이 필름은 한국방송공사를 통해 방영돼 국내에도 UFO에 대한

관심을 증폭 시켰다.

 

미 공군의 이번 보고서는 한마디로 이 모든 것이 착각에 의한 오해이거나 조작된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미 공군은 우선 당시 로스웰 인근의 사막지역에서는 소련의 미사일 발사 와 핵실험을 탐지하려는 극비군사계획인 ‘모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상관측 기구(氣球)를 이용한 음향탐지 실험이 진행됐던 사실을 처음으 로 공식 확인했다. 이때 사용된 장비는 1백85미터 상공을 비행하는 기구 와 은빛의 반사레이더,기타 음향탐지 기구들이었다.

미 공군은 또 이 기구에는 공중 추락시 사람의 신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를 실험하기 위해 사람 크기의 인체 모형을 탑재했던 사실을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는 지난 30여년 동안 이런 기구가 약 2천5백 개 이상 띄워졌는데, 그중 상당수가 일반인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물체들인 실험장비들을 탑재하고 있었으며, 많은 수의 모형인간이

실험통 제구역 밖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공군은 바로 이런 “은빛”의 물체들 과 추락한 모형인간의 잔해들이

UFO와 외계인에 대한 상상력을 부추겼다 고 단정했다.

 

공군 발표, 시청자 80%가 불신

한편 외계인 사체를 미 공군이 인수해 극비리에 해부한 뒤 보관중이라는 주장에 대해 미 공군은 “실제 발생한 별개의

두 비행사고가 짜맞추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1956년 KC-97 비행기가 이 지역에 추락해 11명의 미

공군이 사망한 사건과 1959년 유인 기구가 추락해 2명의 조종사가 부 상한 사건이 교묘하게 “조합돼” 비행접시

추락과 외계인 사체 목격담으 로 둔갑했다는 요지다.

미 공군은 이로써 이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의혹도 남지 않게 됐으며, 이 보고서가 이 사건의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못박았다. ‘모글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예비역 공군대령 앨버트 트라코프스키(75)도 지난해 극비문서 가

보안해제된 뒤 “로스웰사건은 냉전시대가 남긴 웃지못할 해프닝”이 라며 외계인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를 믿는 UFO연구가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들과 미국의 언론 들은 특히 보고서의 내용과 관련해 195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두 건의 비 행사고와 10년 이상 전인 1947년의 로스웰사건이 어떻게 혼동되어 하나의 목격담이 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표시했다. 미 공군 역시 “시간이 흐르 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설명 외에 이렇다할 ‘혼동’의

근거를 제시하 지 못했다.

UFO 전문가들은 이밖에 이처럼 불충분한 내용의 보고서를 50년만에 발표 한데 대해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즉 미 공군의 발표가 “사건을 은폐 하려는 지난 반 세기에 걸친 음모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분위기다. 로스 웰에 있는 국제 UFO연구센터 및 박물관 책임자 디온 크로스비는 “미 공 군은 사람과 마네킹을 구분할 줄도 모른다는 말인가”라며 코웃음쳤고, 또다른 연구가는 “미국인의 지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까지 비난했다. 이들은 특히 이번 발표가 7월 초 전세계 10만여명의 UFO 연구가·신봉자 들이 로스웰에 모여 대대적으로 가질 예정인 ‘외계인 지구방문 50주년 기념행사’를 방해하려는 술책으로 해석했다. 한국UFO연구협회 허영식 회장도 “이번 발표는 지난 50년 동안 계속해온 주장을 되풀이한데 불과하다”며 “해명보다는 오히려 의혹을 더욱 증폭 시켰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미 국방부 대변인 케네스 베이컨은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이것으로 UF O에 대한 의혹이 완전히 종식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물론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CNN>에따르면 미 공군 발표 보도 이후 시청자 여 론조사에서

미국 시청자의 80% 이상이 공군발표를 믿지 않은 것으로 나타 났다.

결국 전세계 UFO신화에 일격을 가하고자 한 미 공군의 의도는 특별한 성 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다.

그만큼 UFO는 이제 실재하느냐 아니냐의 차원 을 넘어선 문제로 보인다. ‘국가안보’란 미명 아래 사건진상이

즉각 공 개되지 않음으로써 로스웰사건은 불과 반세기 만에 ‘실제로 벌어진 진실 ’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또 하나의 진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 은 과학을 신비화시키고 UFO관련산업을 번창케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로스웰사건이 남긴 진짜 진상인지도 모른다.

(과학과 지성) 이인우 기자  - 한겨레21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http://h21.hani.co.kr/hankr21/K_977A0165/977A0165_067.html  

 

(로스웰 UFO 추락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자료를 찾아보면 7월 2일,

독립기념일 즈음, 5일, 7일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46 -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열사 국민장 엄수 후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

유해봉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동안 반역의 집으로 감시를 받아오던 윤의사의 집은 의사댁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한다.
8월 16일, 덕산에서 조인원 외 3백명이 회의를 열고 윤봉길 의사 유해봉환위원회를 발촉한다.(위원장 조인원,

총무 정인영) 5월 초, 제일동포 서상한·박 열·이강운 등이 윤의사 유해를 찾게 된다.
사흘동안 이곳 저곳을 팠으나 발견하지 못했는데 윤의사 사형 당시 일본국군묘지 관리인 부인이던 노파(80여세)가

일러주는 쓰레기 하치장을 파서 가매장된 윤의사의 관, 십자가 형틀과 기타 유품을 순국 14년만에 찾아낸다.
5월 중순, 윤의사를 비롯한 이봉창·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한다. 부산 동래국민학교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5월21일,부산 대신동 고설운동장에서 3열사 추도실이 엄수된다. 정부에서 마련한 임시 특급열차 관으로 서울에 도착한 유해는 태고사(현 조계사)에 봉안되고 장례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 7월7일, 10여만의 추도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처음 국민장으로 엄 수,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된다.

월진회 /윤봉길의사 탄신100주년 기념사업회
http://www.yunbonggil100.org/contents.php?h=b&m=

b74&PHPSESSID=f9e5df64d7902518416f6a1ea64ab1c0

- 대한화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1996.7.6 발행
 

1946 - 조선화학회(대한화학회 전신) 창립

대한화학회는 1946년 7월 7일 설립된 학술단체로서 화학에 관한 학술과 기술의 발전 및 보급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회원은  6,500여명(회비 납부 회원)이며 단체회원 140 단체 및 특별회원사 25개가 참여하고 있다.

현재 본 학회의 구성은 11개의 지부, 12개의 분과회, 4개의 편집위원회, 13개의 제위원회와 임원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학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간행물은 모두 4가지로 대한화학회지(격월, 국문),  Bulletin of the Korean Chemical Society(영문, 월간, 1981년 SCI등재), 화학세계(월간), 화학교육지(계간)를 발행하고 있다.

또한, 본 학회는 국제교류를 추진하기위하여 미국화학회, 영국화학회, 일본화학회, 중국화학회등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하고 있으며 화학관련 국제기구인 IUPAC과 FACS의 회원 단체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학회소개 대한화학회(KCS)

http://www.kcsnet.or.kr/main/k_introduction/k_i_introduction.htm?qpage=k_i_introduction 

 

1930 - 영국 추리소설 작가 코넌 도일(Doyle, Conan) 사망

도일 [Doyle, Arthur Conan, 1859.5.22~1930.7.7]

영국의 추리 소설가 코넌 도일이 1930년 7월 7일 사망했다.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그곳의 에든버러대학을 나온

도일은 개업의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도일이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 셜록 홈즈는 도일보다 더 유명해 사립 탐정의 대명사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1887년 발표된 '주홍색의 연구'에 처음 등장한 홈즈는 단편소설이 '스트래드'지에 연재되자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몇 번이나 중단되었으나 독자들의 성화로 연재가 계속되어 장편소설 4편,

단편 소설 57편으로까지 이어졌다.
의사를 겸하면서 소설을 쓴 도일은 보어전쟁때 군의관으로 출전, 공을 세워 Sir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추리소설을 보급하는데 한 몫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소설 '마이카 클라크' 과학소설 '잃어버린 세계' 등도 썼다. 

 

1887 - 러시아 태생 프랑스의 화가 마르크 샤갈(Chagall,Marc) 출생

샤갈 [Chagall, Marc, 1887.7.7~1985.3.28] 

샤갈은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을 그린 화가·판화제작자이며 디자이너이다.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0년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표현주의 화가인 수틴과 색채추상화가인 로베르 들로네, 입체파 화가인

페르낭 레제, 앙드레 로트 등과 아방가르드 시인인 블레즈 상드라르,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등을 만났다.

또한 파리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본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및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

샤갈은 파리에서 해마다 열리는 '독립미술가전람회'와 '가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1914년에는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1922년 다시 파리로 왔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피해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샤갈은 그의 작품에 러시아의 민담이나 슬라브 민족의 환상, 유대인의 속담과 전설, 러시아의 전원 풍경, 어린 시절의 꿈과 같은 갖가지 추억을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다. 그 결과 그의 걸작들은 현대의 작품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리태니커 

 

"예술을 판단할 때 나는 내 그림을 나무나 꽃처럼 신이 만든 대상물 옆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 만약 어울리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 마르크 샤갈


 

1884 -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포이히트방거(Feuchtwanger, Lion) 출생

1860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말러(Mahler, Gustav) 출생

1843/44 -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병리학자 골지(Golgi, Camillo) 출생

 

1833 - 벨기에의 화가, 그래픽 미술가 롭스(Rops, Félicien) 출생

1827 - 이탈리아의 정치가 셀라(Sella,Quintino) 출생

1752 - 프랑스의 자동방직기 발명가 자카르(Jacquard, Joseph-Marie)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