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53 - 유네스코(UNESCO) 한국위원회 설치령 공포 (1954.1.30 창립)
우리나라는 1949년 9월 제4차 유네스코 총회에 처음으로 옵써버를 파견하였고 1950년 6월 14일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개최된 제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되었다.
그 뒤 1952년 11월 10일 국회에서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 승인안이 정식 통과되었으며 1953년 7월 6일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설치령이 공포되었다. 1954년 1월 30일에 제1차 유네스코 총회가 소집됨으로써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정식으로 창립되어 우리나라에서의 유네스코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우표발행안내)
2) 2009 - 이명박 대통령, 재산 331억 사회 기부 결정
이 대통령, 재산 331억 원 장학재단 기부
<앵커 멘트>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당시 약속한대로 자신의 재산 331억여원을 장학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이춘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명박 대통령이 장학재단에 기부하기로 확정한 재산은 모두 331억 4천 2백만원입니다.
서울 서초동 영포빌딩을 비롯해 서초동,양재동 빌딩과 토지 등 395억원 상당의 부동산과 예금 8천 백만원에서
임대 보증금과 담보대출을 제외한 전액입니다.
이에따라 이 대통령의 남은 재산은 44억원 상당의 서울 논현동 자택을 포함해 골프 회원권 등
49억 600만원이라고 청와대는 밝혔습니다.
장학재단은 이 대통령의 호를 따 재단법인 청계로 결정됐으며 송정호 전 법무장관을 이사장으로,
김도연 울산대 총장과 김승유 하나금융회장 등 9명의 이사로 구성됐습니다.
<인터뷰> 송정호(재단법인 청계 이사장/ 전 법무장관) : "돈이 없어서 공부를 포기하거나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지론과 마음에서 나온 행위입니다."
송 이사장은 통상 석달 정도 걸리는 재단 설립 절차를 최대한 앞당겨 다음달초 완료할 예정이며
주로 초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장학 기금은 연간 11억원 정도의 부동산 임대수입을 바탕으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KBS 뉴스 이춘호입니다.[정치] 이춘호 기자 - KBS 2009.07.06 (13:14)
http://news.kbs.co.kr/article/politics/200907/20090706/1805528.html
3) 1962 - 미국의 소설가 포크너(Faulkner, William) 사망
포크너 [Faulkner, William (Cuthbert), 1897.9.25~1962.7.6]
미국의 작가. 1897년 9월 2일 미시시피주(州)의 뉴올버니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두 차례 퓰리처상을 받았다.
남부(南部)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근처인 옥스퍼드로 옮겨 그의 생애의 태반을 이 곳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여 고교 시절 시집(詩集)을 탐독하고 스스로 시작(詩作)을 시도하였으나 고교를 중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지원해서 캐나다의 영국공군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 퇴역군인의 특혜로 미시시피대학교에 입학하여 교내 정기간행물에 시를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1920년 대학도 중퇴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와, 1924년 친구의 도움으로 처녀시집 《대리석의 목신상(牧神像) The Marble Faun》을 출판하였다. 그후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26년 전쟁으로 폐인이 된 한 공군장교를 주인공으로 한
첫작품 《병사의 보수 Soldier’s Pay》를 발표하고, 1927년 풍자소설 《모기 Mosquitoes》
1929년 남부귀족 사토리스 일가(一家)의 이야기를 쓴
《사토리스 Sartoris》를 발표하였다.
이어 1929년 또 다른 남부귀족 출신인 콤프슨 일가의 몰락하는 모습을 그린 문제작 《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를 발표하여 일부 평론가의 주목을 끌었다.
다시 1930년 가난한 백인 농부 아내의 죽음을 다룬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 As I Lay Dying》, 1931년 한 여대생이 성불구자에게 능욕당하는 사건을 둘러싸고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작품 《성역(聖域) Sanctuary》(1931)을 발표하여 일반 독자에게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8월의 햇빛 Light in August》(1932) 《압살롬, 압살롬 Absalom, Absalom!》(1936) 《야성의 종려(棕櫚) The Wild Palms》(1939) 《마을》 《무덤의 침입자 Intrudrer in the Dust》(1948) 《우화(寓話) A Fable》(1954, 퓰리처상 수상) 《읍내(邑內) The Town》(1957) 《저택(邸宅) The Mansion》(1959), 그리고 유머를 특색으로 하는
《자동차 도둑》(1962, 퓰리처상 수상) 등 장편소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이 밖에도 중편과 단편도 상당히 써서 《곰 The Bear》을 비롯한 몇 권의 단편집도 펴냈다.
이상의 여러 작품을 통해서 포크너는 미국 남부사회의 변천해온 모습을 연대기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요크나파토파군(Yoknapatawpha郡)’이라는 가공적인 지역을 설정하고 그 곳을 무대로 해서 19세기
초부터 20세기의 1940년대에 걸친 시대적 변천과 남부사회를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한결같이 배덕적(背德的)이며 부도덕한 남부 상류사회의 사회상(社會相)을 고발하였다.이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와 휴머니즘의 역설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규명하려는 그의 의지의 발현(發現)이라 할 수 있다.
1) 2) 3)
1) 1980 - 스페인의 프로 농구선수 파우 가솔(Gasol, Pau) 출생
가솔 [Gasol Sáez, Pau, 1980.7.6~ ]
파우 가솔
본명 Pau Gasol Saez
출생 1980년 7월 6일
출생지 스페인
직업 농구선수
소속 LA 레이커스 포워드
기본정보
신체 215cm, 115kg
데뷔 2001년 멤피스 그리즐리스 입단
가족관계
동생 농구선수 마크 가솔
경력
2009년 2009 NBA 올스타전 서부컨퍼런스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
2008년 LA 레이커스
2006년 제15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스페인 국가대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스페인 농구 국가대표
2001년-2008년 멤피스 그리즐리스
/네이트 인물검색
http://people.nate.com/people/info/pa/ug/paugasol/
2) 1946 -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랑뱅(Lanvin, Jeanne) 사망
잔 랑뱅 [Lanvin, Jeanne(-Marie), 1867.1.1~1946.7.6]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어린시절부터 의상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양장점에서 아동복과 모자 등을 디자인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1890년 생오로네에서 자신이 경영하는 양장점을 연 후 섬세한 감각으로 여성복을 디자인해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히 야회복과 무대의상의 디자인에서 뛰어난 감각을 발휘, 랑뱅이라는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6년경부터는 남성복의 디자인도 시작했다.
1926년 의상 디자인 부문의 공헌이 인정되어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46년 죽었으며,
그후 랑뱅의 사업은 니나리치의 주임 디자이너였던 프랑수아 크라에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3) 1932 - 영국의 아동문학가 케네스 그레이엄(Grahame, Kenneth) 사망
그레이엄 [Grahame, Kenneth, 1859.3.8~1932.7.6]
영국의 작가.
영국 아동문학의 고전 〈버드나무 속의 바람 The Wind in the Willows〉(1908)을 썼다. 작품의 등장인물인 두더쥐·쥐·오소리·
두꺼비는 매력적인 인간의 특징과 진짜 동물의 습성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재미있게 읽는 이야기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2명의 남동생과 누이 동생,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하여 남부로 내려가 옥스퍼드의 세인트에드워드고등학교에 다녔다. 대학에 갈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영국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1907년에 건강이 나빠져 사직할 때까지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은행에 다니면서도 〈세인트 제임스 가제트 St. James Gazette〉와 〈옐로 북 Yellow Book〉 같은 잡지에 글을 기고했고, 〈이교도의 서류 Pagan Papers〉(1893)·〈황금시대 The Golden Age〉(1895)·〈꿈꾸는 나날 Dream Days〉(1898)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어린이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버드나무 속의 바람〉은 앨런 알렉산더 밀른이 〈두꺼비집의 두꺼비 Toad of Toad Hall〉(1930)라는 희곡으로 각색하였으며 크리스마스 연극으로 자주 공연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The Wind in the Willows]
[책의발견]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 환상의 영역/김용석
고전은 언제라도 재발견된다. 고전이라서 재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재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고전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케니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현대 문학의 고전이다. 필자에게 좀 의외인 것은 이 책과 그 지은이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꽤 생소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정도는 <피노키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 <어린 왕자> 등이 즐기고 있는 명성에 훨씬 못 미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재미를 넘어서
감동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동화라면 그 어느 것에 못지 않다.
<버드나무에…>는 엄밀히 말해 `페어리 테일'이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 속에는 동물들이 의인화되어 나올 뿐이지, 요정이나 환상적 인물, 상상의 세계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강가에 이웃하여 사는 래트, 모울, 토드 등 주인공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다. 그레이엄은 일상을 동화의 재미로 풀어내는 독특함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피터 팬>처럼 일상을 벗어나 환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으로 환상적 아이디어를 끌어들인 것이다.
또한 이 책의 기존 독자들도 쉽게 지나치는 것이지만,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피노키오나 앨리스처럼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 어른들이다. 그것은 책의 곳곳에서 관찰될 수 있는데, 독자들은 이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한다. 흔히 어른 속에서 아이의 심성을 발견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아이들 이야기 구조 속에 어른의 심성을 집어넣는 기교를 발휘했다. 주인공들이 `아이 어른'이든 `어른 아이'든, 이 점에서도 그레이엄은 다른 아동문학 작가들과 다르다.
이 책의 초판은 1908년에 나왔다. 그것은 포드사가 `T형' 자동차의 대량 생산에 들어간 해이기도 하다. 서구의 전지역에서 일어난 거센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도 그레이엄은 고전적 귀족(그는 14세기 스코틀랜드 독립의 영웅 로버트 1세의 후손이다)의 품위를 지키려 했던지, 자신의 글에서 문장의 목가적 서정성을 중요시했다. 특히 `새벽녘의 피리 부는 목신(牧神)', `우리 모두 방랑자' 등의 장(章)에 나타난 시적 표현들은 감동적이다. 요즈음 모두들 영어 학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정말 멋진 영어 표현들을 무겁지 않게 접해 보려면 가족과 함께 이 책을 영어 원본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아동문학 작품의 번역작업이 일천한 우리 나라에서, 또 하나 의외의 사실은 이 책의 한글 완역 본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출판사(시공사)는 축약번역보다는 완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용석/전 로마 그레고리안대 교수·철학자 - 인터넷 한겨레
http://www.hani.com/section-009046000/2000/p009046000200003191905005.html
1) 2) 3)
1) 2004 -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대통령 클레스틸(Klestil, Thomas) 사망
클레스틸 [Klestil, Thomas, 1932.11.4~2004.7.6]
토마스 클레스틸(독일어: Thomas Klestil, 1932년 11월 4일 ~ 2004년 7월 6일)은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이다.
1992년 ~ 2004년 제10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빈에서 태어났으며, 빈 경제경영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외교관으로 재직,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근무했다.
1982년 ~ 1987년 미국 주재 대사, 1987년 ~ 1992년 외무 차관을 지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지명되어 출마, 당선되었다. 2004년,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그의 후임을 뽑는 선거에서 하인츠 피셔가
이미 선출된 상태에서 임기 종료를 3일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2) 1940 - 카자흐스탄의 대통령 나자르바예프(Nazarbayev, Nursultan) 출생
나자르바예프 [Nazarbayev, Nursultan Abishuly, 1940.7.6~ ]
카자흐스탄의 정치가.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Almaty) 부근에서 출생. 젊은 시절 철강 노동자로 일하였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1989년 구소련 시절 카자흐스탄공화국 장관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1989∼1991년 카자흐스탄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하였다.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1년 12월 독립 직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취임 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경제개혁 등을 추진하였다. 1995년 4월 대통령 임기 연장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2000년까지 임기가 연장되었고, 같은 해 8월 신헌법을 채택하여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하였다. 1999년 1월 조기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79%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되었다.
2005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오탄당 후보로 출마하여 91%를 득표, 투야크바이(Tuyakbay) 전 하원의장(6.7% 득표)을 압도적인 차이로 물리치고 3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야당이 부정선거라고 항의하였고, 유럽계 선거감시기구도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 선거라고 비난하였다.
대통령의 업적으로 경제 분야에서는 연평균 9%의 성장을 보이고 외국 투자가 몰려 경제붐을 이루었으나,
정치에서는 야당 탄압과 언론 통제를 계속하고 대통령과 일족이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3) 1978 - 제9대 대통령 선거
1978년 오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공화당의 단일 후보로 나선 박정희 현직 대통령이 당선됐다.
출석 대의원 2,578명 가운데 2,577명으로부터 찬성표를 받았다.
나머지 한 표는 무효였다.
그는 이로써 1963년 직접선거로 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5선을 기록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80년대에 조국을 번영시켜야 하는 사명감에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10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1) 2) 3)
1) 1946 - 미국 제43대 대통령 부시(Bush, George W.) 출생
부시 [Bush, George Walker, 1946.7.6~ ](정식발행우표가 아닙니다. ^.@)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7.6~ )는 미국의 43대(2001년-) 대통령이며, 텍사스 주의 46대 주지사를 지냈다.
41대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의 장남으로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2000년 11월 7일 치루어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를 선거인단 수에서 꺾고 당선되어으며 2004년 11월 2일 치루어진 선거에서도
민주당 존 케리를 누르고 재선됨으로써 미국 역사상 두번째로 부자(父子) 대통령 중 재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2) 1975 - 코모로, 프랑스로부터 독립
1843년 마요트섬 술탄은 프랑스에 섬을 팔아 1886년에 모든 섬이 프랑스 속령이 되었으며 1912년 공식적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1961년 자치가 인정되어 압달라가 거느리는 코모로독립통일당이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1972년 12월 선거에서 독립파가 승리를 거둔 뒤 1974년 12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프랑스 공동체로 남기를 희망하는 마호레섬 이외 3개 섬이 1975년 7월 코모로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대통령에 압달라가 지명되었지만 그해 8월의 쿠데타로 배척되었다. 그러나 1978년 5월 백인용병의 군사쿠데타로 압달라 전대통령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같은 해 11월 신헌법이 제정되어 코모로이슬람연방공화국이 발족하여 섬 이름도 각각 개칭되었다. 1989년 압달라대통령이 백인용병에 살해당했으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2년 복수정당제를 도입하는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고 1995년 9~10월 프랑스 용병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이 진압했다.
3) 1959 - 프랑스, 자르 관리권을 서독에 반환
제2차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자르지역을 점령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묵인하에 독일로부터 떼어내 친프랑스적 자치정부를 육성함과 동시에 경제적 통합을 꾀했다. 1947년 11월 주헌법 전문에는 독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 프랑스와의 경제적
통합, 프랑스에 의한 방위권과 외교권의 행사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보호정책은 독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수립된 뒤 난항을 거듭한 끝에 주권회복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이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인정되었다. 여기에는 자르지위협정도 포함되어 자르주의 유럽화, 즉 현상유지가 요구되었다.
이 지위협정이 1955년 10월 주민투표에 부쳐지자 68%가 거부하여 친프랑스 정부는 퇴진해야 했다. 그해 의회선거에서는 서독 편입을 주장하는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는 자르주를 독일에서 떼어내는 일을 단념하고 1956년 10월 27일 서독과 자르조약을 맺었다. 이듬해 1월 1일 자르주는 서독에 편입되었다. 경제적으로 독일에 복귀된 것은 1959년 7월이었다. 프랑스의 정책전환 배경에는 프랑스로 복귀된 로렌지방 공업발전에 따라 자르주의 광공업이 전통적인
남독일시장과의 결합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1) 2) 3)
1) 1964 - 말라위 독립
1964년 오늘,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나라 말라위가 독립했다.
말라위 최대의 상공업도시 블랜타이어에서 세계 80여 개 나라의 축하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기념식이 거행됐다.
말라위의 독립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지 72년 만의 일이다.
새로 태어난 말라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독립운동 지도자인 헤스팅스 반다 박사!
그는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다 1958년 고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벌였다.
말라위는 마침내 1964년 7월 6일 영국연방의 일원으로서 독립하지만 독립을 이끈 반다는 종신대통령으로
취임해 30년 가까이 독재정치를 편다.
2) 1993 - 김영삼 대통령, 3단계 통일방안 제시
1993년 7월 6일 대통령 김영삼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제6기 개회식 연설문에서 '3단계 통일방안'을 제안하였다.
민주적 절차의 존중, 공존공영의 정신, 민족 전체의 복리라는 3가지를 기조로, '화해·협력의 단계 →
남북연합의 단계 → 1개 국가'라는 3단계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방안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마찬가지로 남북연합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1민족 1체제의 완전통일을 지향한다.
3) 1928 - 미국 워너브라더스사, 세계최초의 발성영화 <뉴욕의 불빛 The Lights of New York> 제작
세계 최초의 유성 영화는 192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제작되었다. 1926년에 만들어진 <돈 주앙 Don Juan>은
대사는 없었지만 음악을 녹음한 영화였다.
일반적으로 세계 최초의 유성 영화로 언급되는 작품은 1927년에 만들어진 <재즈 싱어 Jazz Singer>인데,
사실 완벽한 유성 영화로 보기는 힘든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장면들에 음악이 녹음되어 있긴 했지만,
배우 앨 졸슨이 노래를 하거나 짧막한 대사를 한 것은 오직 네 장면뿐이었으니까.
1928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유성 영화였던 <뉴욕의 불빛 The Lights of New York>이 만들어졌다.
1995 -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방한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남아공 대통령이 김영삼대통령의 초청으로 2박3일간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기 위해 1995년 7월 6일 오후 특별기편으로 공식 방한했다.
만델라대통령은 7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두나라간 외교, 민주화투쟁 경험과 개혁,
경제적 협력방안 등을 협의했다. 두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무대에서 계속 긴밀히 협조해 나가기로
하고,북한이 하루빨리 고립에서 벗어나 교류와 협력의 세계 조류에 합류해야 한다는데도 인식을 같이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한국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는 한편,남아공이 오는 2004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도록 한국이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며,김대통령은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1976 - 중국의 인민해방군 '건군의 아버지' 주더[朱德] 사망
주더 [朱德, 1886.12.18~1976.7.6]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의 아버지' 주덕(朱德)이 1976년 7월 6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886년 사천성에서 태어난
주덕은 1911년 신해혁명 때 운남의 무장봉기에 참여, 지방 군벌 내에서 기반을 굳혔으나 1922년 프랑스를 경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주은래를 만나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귀국해 북벌에 참가했고 1928년 정강산에서 모택동 부대와 합류했다. 당시의 홍군이 '주모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군사능력은 뛰어났다. 1937년에는 국공합작으로
홍군을 개칭한 국민 혁명군 팔로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항일전을 지휘했다.
팔로군과 신4군을 합친 인민해방군의 초대 총사령관인 채로 1949년 건국을 맞은 주덕은 이후 국가 부주석, '10원수' 서열 1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거쳤지만 정치적으로는 두드러진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4인방'의
군 원로들을 향한 공격을 비판하여, 임표나 강청 등 급진파로부터 "모택동에게 반대했다'고 규탄받아 정치국원으로
한때 격하되었지만 실각하지는 않고, 임표 추락사 이후 이날 사망할 때까지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했다.
1971 -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가수 암스트롱(Armstrong, Louis) 사망
암스트롱 [Armstrong, Louis (Daniel), 1900.7.4~1971.7.6]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이 심장마비로 1971년 7월 6일 사망했다. 암스트롱이 죽었을 때 미국 매스컴은 `문화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추도했다. 그는 재즈의 역사였다.
재즈음악인으로서는 드물게 행복하게 일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흥청거리던 뉴올리안즈의 빈민가에서 시작됐다. 부모조차 돌봐주지 않는 버림받은 부랑소년은 소년원에서 음악을 배웠고 이후 시카고와 뉴욕으로 진출, 1929년의 대공황, 알 카포네가 휩쓴 금주법시대의 중심부에서 거의 종일 트럼펫을 불며 분투했다.
그는 트럼펫, 트럼본, 클라리넷의 대위적 선율을 주축으로 삼는 뉴올리언즈 재즈의 리듬과 아프리카의 블루 노트를 유럽의 음악유산으로 완성,1930년 이후 태동한 스윙재즈의 빅 밴드스타일로 넘겨준 사람으로 재즈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는 무지막하게 커다란 입이라는 의미의 슬랭인 `사치모(Satchmo)`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즉흥연주의 대가로 초창기의 재즈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거목 루이 암스트롱은 `블루베리 힐`(1949) `맥 더 나이프`(1956), `헬로 돌리!` 등의 명곡을 남겼다. 훗날 재즈의 황제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누군가 "재즈가 무엇이냐"고 묻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봐,뭘 알려고 드나,영원히 모를걸세"라고 대답했던 일화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1962 - 한국-모로코 국교 수립
한국은 1962년 7월 6일 모로코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9월 6일 주(駐)모로코 대한민국대사관을 개설하였다. 1988년 12월 1일에는 주한 모로코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모로코는 외교관계 수립 이후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우방국가로서, 한국의 대기업들이 전자제품, 자동차 등을 중심으로 많은 상품을 수출하고 있다.
주요교민단체에 라바트 한인회, 아가디르 한인회, 재(在)모로코 유학생회, 라바트 한글학교, 아가디르 한인학교,
친한단체에 한국·모로코 친선협회, 한국·모로코 의원친선협회가 있다.
대사업무의 겸임국은 모리타니이다. 한국은 1960년 12월 5일 모리타니를 승인하고 1963년 7월 30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64년 12월 10일 외교관계가 단절된 후 1978년 12월 관계를 재개하였다. 모리타니는 남북한을 모두 국가로
인정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주의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모로코 대한민국대사관)
1951 - 오스트레일리아 배우 제프리 러시(Rush, Geoffrey) 출생
러시 [Rush, Geoffrey (Roy), 1951.7.6~ ]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영화배우.
1996년 〈샤인 Shine〉에서 데이비드 헬프갓 역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러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제작된 영화 〈샤인〉에서 번민에 시달리는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 역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아카데미상 외에도 골든 글로브, LA 비평가협회, 뉴욕 비평가협회, 영화배우 길드로부터 상을 받았다. 러시는 헬프갓의 성인 시절만을 맡았지만, 압제적인 아버지로 인한 감정적인 갈등(이 갈등 때문에 헬프갓은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을 효과적으로 포착했다. 러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 시어터 컴퍼니에서 연기를 시작했으며, 〈눈가리개 Hoodwink〉(1981)로 영화에 데뷔했다. 그는 계속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활동하다가 〈샤인〉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러시는 오스트레일리아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영화에도 출연했다. 할리우드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을 영화화한 작품에서는 자베르 경감 역을 맡았으며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1998)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35 - 티베트의 불교 지도자 14대 달라이 라마(Dalai-Lama XIV) 출생
달라이라마 [Dalai-Lama XIV, 1935.7.6~]
[어제의 오늘]1935년 달라이 라마 14세 출생
ㆍ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살아 있는 부처로 일컬어지는 달라이 라마와 슬픈 운명의 땅 티베트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눈길은 경외감과 연민
호기심 등의 감정으로 압축할 수 있을 법하다.
히말라야산맥과 쿤룬산맥으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3800m의 척박한 오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소박한 삶을 꾸려오던 티베트인들의 운명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티베트의 가혹한 운명은 곧 티베트 불교의 수장이자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 1935년 티베트 동북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라모 톤둡은 만 3세가 되기도 전에 달라이 라마 13세의
환생으로 인정됐고, 1940년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다.
어린 나이에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주관하게 된 소년 달라이 라마의 삶은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세계사의 격변기
티베트는 열강들의 욕망이 충돌하는 땅이었다. 19세기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신비로운 땅 티베트에 대한 신화화는
계속됐고 지정학적 이유로 티베트를 손에 넣고자 제국들은 서로 충돌했다. 한때 세계제국 당(唐)을 위협할 정도로 세를 과시했던 티베트의 운명은 19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영국과 청(淸) 사이에 끼인 상태가 됐다. 2차세계대전 이후 인도와
중국이 국민국가로 독립하고 국경을 놓고 다투면서 티베트는 충돌의 최전선이 됐다. 중국은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와
윈난성, 쓰촨성, 간쑤성 일대를 영토로 복속했고 인도는 카슈미르 지역을 병합했다.
중국의 야욕은 노골적이었다. 티베트 해방을 내세우며 51년 중국이 무력으로 티베트 동쪽의 창두(昌都)를 침공한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군주에서 시짱자치구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전락했다. 중국의 무력지배와 문화말살정책에
반감을 품은 티베트인들은 59년 반중국봉기를 일으켰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12만여명에 달하는 이들이 무참히 학살당했고, 불교사원 6000여 곳이 파괴됐다.
무력(武力) 앞에서 무력(無力)했던 달라이 라마 14세는 8만여명의 티베트인들과 함께 티베트를 탈출했다.
히말라야 동쪽 기슭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우고 티베트 헌법을 기초하고 학교를 세워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중국 본토에 편입된 티베트 지역에서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뿌리깊은 티베트 불교문화가 파괴되었지만,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독립운동이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을수록 암울한 티베트의 현실도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평생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달라이 라마는 그 공로로 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티베트의 현실에 눈감는 나라들도 많았다. 1990년대부터 추진됐지만
번번이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무산된 한국도 그중 하나다.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052127565&code=100100&s_code=ap005
1933 - 미국 프로야구 첫 올스타전 개막
1933년 7월 6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서 미국 야구 팬들의 열전인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개최됐다.
1845년 알렉산더 크라이트와 그의 친구들로 구성된 뉴욕클럽에서 시작된 미국야구는 1850년대 뉴욕, 시카고 등지를 시작으로 야구클럽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1870년대에 들어 이내 미국인의 대중스포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876년 2월 메이저리그의 원조인 내셔날리그가 탄생했고, 1901년에는 아메리칸리그, 1905년에는 월드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리고 1933년 오늘 미국 시카고 트리뷴지(誌)의 스포츠 담당기자 아치 워드의 제안에 따라 올스타전이 탄생했다.
출범 초기 미국 프로야구의 최대 행사인 월드시리즈의 권위에 손상을 입힐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올스타전은 일반 팬들의 투표로 선발된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단, 투수는 국내와 다르게 팬투표를 거치지 않고 감독이 뽑은 선수가 출전하도록 했다. 참가선수 인원은 50명으로 제한했고, 감독 자리는 전년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팀의 사령탑에 주어지도록 했다.
이날 수용인원 4만9천명인 야구장은 올스타전을 보려는 팬들로 성황을 이뤘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코니 마크 감독과 뉴욕 쟈이언츠의 존 마그로 감독의 지휘 아래 펼쳐진 경기 우승은 베이브 루스의 2런 홈런에 힘입은 전자(4대2)에게 돌아갔다. 올스타전에서 벌어들인 입장료 등의 이익은 선수들의 후생자금으로 쓰였다.
1921 - 몽골 인민혁명정부 수립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의 지도자들은 이를 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호기(好機)로 잡고
러시아의 지원 아래 그해 12월 우르가(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혁명을 일으켜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몽골 제1차 혁명).
그러나 중국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쳐 러시아·중국의 각서교환에 따라 자치만 인정받았고, 러시아에 10월혁명이 일어나자 그 자치도 중국에 의해서 1920년 철폐되었다. 그러나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은 하급관료·지식인 등은 반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혁명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1921년 혁명군을 조직하고, 소비에트 적군(赤軍)의 원조를 얻어 중국군과 러시아 백위군(白衛軍)을 축출하고 신정부를 수립, 독립을 쟁취하였다(제2차 혁명). 1924년에는 군주제를 공화제로 고쳐 국명을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봉건·신권제(神權制) 잔재의 일소, 재산 사유권 금지 등을 규정한 최초의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로부터 몽골은 소련의 절대적 영향하에 들어가, 그들의 장래를 소련과 함께 하게 되었다.
수흐바토르 [Suhbator(Suhbaatar, Sükhbaatar), Damdiny, 1893.2.2~1923.2.22]
러시아혁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6월 초이발산 등과 몽골인민당(인민혁명당)을 결성,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혁명의 성공과 그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그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赤軍)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우르가(울란바토르)에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30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1908 - 미국의 탐험가 피어리(Peary, Robert), 북극 탐험위해 뉴욕 출발
1907 - 멕시코의 여류 화가 칼로(Kahlo, Frida) 출생
1903 - 스웨덴의 생화학자 테오렐(Theorell, Axel Hugo) 출생
1893 - 프랑스 작가 모파상(Maupassant, Guy de) 사망
1885 -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 광견병 치료 성공
1878 - 핀란드의 시인 레이노(Leino, Eino) 출생
1859 - 스웨덴의 시인, 산문작가 헤이덴스탐(Heidenstam, Verner von) 출생
1854 - 독일의 물리학자 옴(Ohm, Georg Simon) 사망
1837 - 불가리아의 혁명지도자 레프스키(Levski, Vasil) 출생
1823 - 오스만 제국의 학자, 정치가 아메드 베피크 파샤(Ahmed Vefik Pasa) 출생
1747 - 미국 해군의 영웅 존스(Jones, John Paul) 출생
1599 - 조선 중기 명장 권율(權慄) 사망
1535 -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More, St. Thomas) 처형
1415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화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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