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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 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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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알제리의 독립 기념일 

 

2009 - 이은정, 생애 첫 LPGA 우승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 클래식에서 이은정(21, 사진) 선수가 생애 첫 LPGA 우승을 기록했다.

투어 2년차인 이 선수는 4일(토) 3라운드 경기서부터 신들린 듯한 샷감각으로 10타를 줄여 18언더파 195타를 기록,
단독 선두에 나섰으나 마지막 4라운드에서 이븐 파를 기록해 합계 18언더파 266타로 모간 프레슬 선수와 타이 스코어를
기록해 우승자를 가리기 위한 플레이 오프를 치루는 등 접전을 벌였다.

함께 출전한 김송희 선수와 이선화 선수, 미쉘 위 선수는 모두 총 16언더파로 공동 3위를 차지해

한인 여성 골퍼들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 한국일보 2009-07-05 (일)

http://www.koreatimes.com/article/533724

 

이은정 LPGA 첫 우승

20대 신예 이은정이 LPGA 투어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 클래식 연장전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은정은 5일 오하이오주 실베이니아 하일랜드 메도우스 골프장에서 열린 대회 최종일 합계 18언더파 266타로 모건 프레셀과 동률을 이뤘으나 18홀 연장 접전 끝에 감격의 승리를 따냈다. 이은정이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2009-07-06 (월) http://koreatimes.com/article/533739

 

2009 - 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 별세

성균관대 총장과 민주당 공동대표를 역임한 정치학계의 원로 장을병(張乙炳) 씨가 5일 오전 11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고인은 1933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1959년 성균관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모교 교수로 한국정치와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다 1980년 신군부의 계엄령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강제 해직되는 고초를 겪었다.

1984년 복직해 1991년부터 5년 동안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했고,이후 정계에 발을 디뎌 민주당 공동대표,국민신당

창당준비위원장,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는 등 정치 활동도 활발했다.

주요 저서론 ‘한국정치론’,‘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여’,‘민주주의와 언론’,‘정치적 커뮤니케이션론’,

‘커뮤니케이션과 정치발전’ 등이 있으며 학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월봉저작상’과 ‘심산학술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윤선 여사와 1남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 삼성의료원이며 발인은 8일 오전 9시, 02-3410-6909.

연합뉴스 - 서울신문 2009-07-05

http://www.kdaily.com/news/newsView.php?id=20090705800047&spage=44

 

2009 - 中, 우루무치서 폭동 140여명 ‘사망’

신화통신 보도…교통통제령 등 사실상 계엄상태

중국 서북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 최악의 폭동사태가 발생해 140여명이 숨졌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5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도인 우루무치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해 현재까지 140명이 숨지고 828명이 부상당했으며, 261대의 차량이 불에 타고 상점 203곳과 주택 14채가 파괴됐다고 보도했다.
시위는 현지시간으로 5일 밤 8시 위구르족 시위대 3천여 명이 민족차별에 항의하면서 시작돼 새벽까지 계속됐으며, 경찰 1,000명이 저지하자 폭력시위로 번졌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신화통신은 칼과 각목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시내 곳곳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건물과 차량을 부수고 불을 지르며, 약탈을 자행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외신은 3천 명의 위구르족이 소수민족 차별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BBC 방송은 약 1만명의 위구르족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우루무치 정부는 6일 새벽 우루무치 시내에 교통통제령을 내려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으며, 현지에는 인민해방군과 무장경찰이 투입돼 사실상 계엄상태라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또 시위 참가자와 주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루무치 정부는 “폭동이 미리 준비되고 조직된 폭력범죄로 외국에서 선동하고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정부는 이번 시위가 위구르족 망명 지도자인 레비야 카디르가 이끄는 세계위구르대표대회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미국에 망명 중인 레비야는 위구르 분리독립 운동 지도자로 중국의 위구르족 차별과 탄압을 서방에 폭로해온 대표적인 중국의 반체제 인사 중 한 명이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에 망명한 위구르 독립 옹호자 딜사트 락시트는 이번 소요사태가 지난달 말 광둥성의 한 공장에서 발생한 한족과 위구르족 노동자간 집단 폭력사태로 두 명의 위구르인이 살해된 사건에서 촉발됐다고 주장했다.
락시트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집회로 시작돼 수천명의 위구르족이 소수민족 차별을 중단하고 해명을 요구했으나 경찰이 막아서면서 양측간 충돌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중국 광둥(廣東)성 사오관(韶關)시의 한 대형 완구공장에서 지난 25일 밤 위구르족과 한족 노동자들 간에 집단


충돌이 발생해 위구르족 2명이 숨지고 양측의 10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당시 이 공장에서는 위구르인들이 한족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악소문이 돌면서 한족 노동자들이 위구르 노동자를 습격했지만, 이 같은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었다.
관영 CCTV는 오전 9시부터 시위대의 방화장면을 집중적으로 방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당국이 이번 폭동사태를 계기로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노컷뉴스> 문화일보 2009-07-06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706MW16121798269
 

2009 - “중국 위구르 유혈시위로 140명 사망”

우루무치서 분리·독립 요구…800여명 부상
신장공안국, 주동자 10명 등 수백명 체포

중국 북서부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 자치구의 수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5일 대규모 유혈 시위가 발생,

140명이 숨지고 828명이 부상했다.

신장 공안은 또 이번 유혈 시위를 주도한 주동자 10명을 비롯해 시위대 수 백명을 체포하고 90여명을 수배중이라고

외신들이 6일 보도했다.

그러나 사상자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사상자 중에 시위대와 경찰이 각각 얼마나 포함돼있는지는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사망자 수는 최근 수년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한 최악의 유혈 시위로 기록됐다.

신화 통신에 따르면 5일 오후 7시께 3천명 이상의 군중이 우루무치의 인민광장, 해방로 등 도심에 모여 신장지구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통신은 시위대가 흉기를 들고 행인들을 공격하고 차량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으나 망명 위구르인들은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됐으나 경찰의 과잉 진압 때문에 폭력 양상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시위대는 지난 6월 광둥(廣東)성 샤오관(韶關)에 있는 한 완구 공장에서 발생한 한족-위구르족 종업원 간 패싸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공안은 시위 진압을 위해 1천여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나 시위가 거세지자 전기 소몰이 막대를 사용하고 경고사격을 하기도 했으며, 시위대는 차량 260대를 불태우고 가옥 203채를 파괴했다고 신장자치구 신문국 우눙 국장이 말했다.

이번 시위로 신장자치구지역이 휴대전화망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있으나 6일 오전 도로통제는 대부분 완화되는 등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내 곳곳에는 파편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고 경찰의 삼엄한 순시속에 긴장감은 여전했다.

중국 당국은 위구르 분리주의 세력들이 분리독립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거쳐 이번 시위를 일으킨 것으로 보고 주동자들을 체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번 시위는 미국으로 망명한 위구르족 지도자인 레비야 카디르 재미(在美) 위구르협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위구르자치구는 앞서 성명을 통해 "이번 폭력시위와 범죄는 사전에 공모된 것"이라면서 "레비야가 이끌고 있는 세계위구르대표대회가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위구르인들이여 더욱 용감해지고 큰일을 하라'고 촉구했다"고 밝혀 레비야가 이 사건을 조종했음을 강조했다.

누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 신장자치구 주석은 이날 오전 TV에 출연해 이번 시위는 전형적인 외부에서 지휘하고 내부에서 행동에 옮긴 조직적인 폭력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조국의 분열활동은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달 26일 광둥(廣東)성의 완구공장에서 발생해 2명의 위구르 노동자를 숨지게 한 노사분규도 위구르인들의 테러리즘과 분리주의, 극단주의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대해 위싱턴에 있는 위구르.아메리카 연맹의 알림 셰이토프 부회장은 "우리는 중국보안군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에 큰 슬픔에 빠졌다"고 말하고 "오늘은 위구르인의 역사에 처참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주중 한국대사관이 한 관계자는 우루무치에는 300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으며 이번 시위로 인한 희생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조성대 특파원 sdcho@yna.co.kr (베이징=연합뉴스) 한겨레 2009-07-06 오후 02:41:10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364184.html

 

2008 - 이동천 박사 "새 1천원권에 실린 '계상정거도'는 명백한 위작"

이동천 박사 "'계상정거도'는 명백한 위작"

지난달 1천원권 지폐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보물 제585호)가 가짜라고 저서를 통해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던 서화감정 전문학자 이동천 박사가 이 작품이 명백한 위작이라며 강연회에서 거듭 역설했다.

이 박사는 5일 오후 서울대 멀티미디어동에서 열린 '1천원권 뒷면의 정선 그림- 계상정거도 왜 가짜인가' 주제의 공개 강연회에서 '계상정거도'가 위작임을 구체적 증거 제시와 함께 또다시 주장했다.
이 박사는 강연회 개최 배경에 대해 "단순히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뚜렷한 근거도 없이 나의 주장을 폄훼함은 물론 현실을 조작한 엉뚱한 사진을 갖다 붙여 마치 작품이 진작인 양 호도하는 미술사가마저 있어

공개 강연회를 통해 검증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위작을 제작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위작을 진작으로 둔갑시키려는 행위 또한 예술혼을 더럽히는 죄악"이라고 규정한 뒤 "터무니없는 위작이 진작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겸재 정선이 안다면 통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이날 강연회에서 '계상정거도'가 위작임을 필획, 묘사, 표구 분야로 나눠 하나하나 적시하는 한편,

작품과 실경의 차이 등을 비교해 설명했다.
다음은 강연회 내용 요약-.

◆"가짜 '계상정거도'는 필획이 느리고 무기력하다" = 작가의 붓놀림은 한 시기의 작품에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노년의 완숙한 경지에서 그렇다.
가짜 '계상정거도'는 겸재가 71세 때에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70세 전후의 겸재 작품과 비교하면 가짜 '계상정거도'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겸재가 67세 때 그린 '우화등선' '웅연계람'과 72세 때 그린 '불정대' '총석정' '문암' '삼부연' '화적연' '만폭동'을 비교 작품으로 해보자.
이 시기에 겸재의 붓놀림은 매우 굳세고 빨랐다. 필획을 아래로 긋든, 옆으로 긋든, 그 길이가 짧든 길든 필선의 삐침과 필선 간의 연결이 굳세고 빠르게 표출됐다. 그가 붓글씨를 쓰듯이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다.
가짜 '계상정거도'는 '천연대' 부분에서 보듯이 묘사가 느리고 무기력하고 난잡하다. 위조자가 필획을 흉내내는 데 급급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잘 모르는 듯하다.
나무줄기 묘사에 쓰인 필묵도 담묵으로 그린 위에 다시 농묵으로 그리거나 대충 그려 그 졸렬함과 조작함이 금방 표시난다. 진작의 경우는 먹의 농담을 정교하게 조절했다. 특히 농묵으로 한 번에 자신있고 분명하게 묘사했다.
기와지붕 묘사를 봐도 그렇다. 겸재는 '총석정' '해산정' '장안사' 등에서처럼 굳센 필력을 이용해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기와집을 그렸다. 반면, 가짜는 겸재의 특징과 필획의 두께마저 조절하지 못한 채 겉모습 흉내에 급급했다.
물결 묘사를 비교해보자. 진작 '화적연' '삼부연' '만폭동' 등은 물결이 중봉으로 거침없이 경쾌하게 이어져 그려진 데 반해, 가짜는 물결이 측봉으로 느리고 끊어지게 그렸다.
전체적으로 봐, 겸재가 아주 적절하게 농묵과 담묵을 구사한 데 비해 위조자는 농묵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사물 묘사가 어설프고 유기적이지 못하다" = 겸재 작품의 붓놀림은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유기적이다. 그래서 사물 묘사가 작품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고 있다.
'우화등선' '웅연계람'의 경우 강바람의 방향을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두툼하고 힘 있는 소나무 잎을 독특하게 유기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가짜 '계상정거도'의 나뭇가지에서는 작가가 뭘 의도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필획의 두께마저 균일하게 조절하지 못한 채 엉성하게 묘사됐고, 소나무의 잎 또한 얇고 가볍게 그려졌다.
물가의 묘사에서도 겸재는 강한 필획의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표현했으나 가짜 '계상정거도'는 얇고 가벼운 필치로 흉내냈고, 패필(敗筆) 또한 많다.
요컨대, 가짜 '계상정거도'는 수준 낮은 위조자가 겸재의 창작 의도와 화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원작을 옆에 놓고 베끼는 데 급급한 임본 위작이다. 터무니없는 위작이 진작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겸재 정선이 안다면 통탄할 것이다.
◆"장표 부분까지 그림을 그린 건 위조자 수준이 얼마나 졸렬한지 보여준다" = 가짜 '계상정거도'는 장표(표구) 부분까지도 그림이 그려졌다. 화가가 화폭 밖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식에 위배된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위조자가 원작을 보면서 베끼는 과정에서 먼저 그린 부분들이 원작보다 크게 묘사되면서 나중에 그린 부분들을 제대로 원작의 위치나 크기에 맞게 그리지 못해서다.
위조자가 자신이 잘못 그린 부분들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장표 부분까지 그린 것은 명백한 사족이며 위조자가 위조자로서의 전문성조차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임을 단번에 확인시켜준다. 수준이 그만큼 졸렬한 것이다.
그림 속의 도산과 서취병은 가까운 산이기에 전통화법으로 그린다면, 먼저 산의 능선과 봉우리의 윤곽을 그린 뒤에 산의 질감을 필선 등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가짜 '계상정거도'는 원작의 우측과 하단 부분부터 베끼기 시작해 좌측을 그린 다음 상단 부분을 가장 늦게 그렸다.
위조 과정에서 예상보다 사물들이 커져 화폭 윗부분에 산을 그릴 만한 공간이 나오자 않자 위조자는 당황한 나머지 담묵을 사용해 장표 부분에 서취병 산봉우리와 능선을 그려넣은 것이다.
◆"실경 서취병과 그림 속 서취병의 형태가 다르다" =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도산서원 주변의 유적지를 보면 가짜 '계상정거도'와 다른 풍경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실경의 서취병과 가짜 '계상정거도'의 서취병, 지폐 그림의 '서취병'의 형태가 모두 다른 것이다.
언뜻 보기에 실경에서 도산과 그 옆 서취병 부분의 산 높이가 비슷해 가짜 '계상정거도'가 맞게 그려진 것 같지만 서취병에서 우뚝우뚝 솟은 부분과 그 옆 낮은 서취병 부분을 비교하면 가짜 '계상정거도'의 도산 옆 서취병 부분이 낮게 그려졌다. 미숙한 위조자가 임의 방식으로 위조하면서 미처 비슷하게 그려넣지 못한 것이다.
미술사가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가 5월 26일 MBC TV의 '화제집중'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산 옆 서취병이 실경에 의해 그려졌다는 걸 증명하면서 실제 도산 옆 우뚝우뚝 높이 솟은 서취병 부분이 아닌 도산서원 대각선 맞은 편, 그리고 실제 서남쪽에 위치한 낮은 서취병 끝부분의 실경을 '도산 옆 서취병'이라고 슬쩍 갖다 붙였는데, 이는 교묘하고 터무니없는 조작이다.
가짜 '계상정거도'에 그려진 서취병 부분과 실제 서취병 부분이 달라서 그림 속의 서취병 부분과 비슷한 낮은 서취병 끝자락 부분을 도산 옆에 높이 솟은 서취병 부분으로 둔갑시켜 속이려든 것이다. 미술사가가 학자적 양심을 버리고 진실을 감추는 데 앞장선 듯해 한심하다.

이 박사는 강연 후 원작 검증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개인 소장품인 '계상정거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돼 있는 걸로 안다. 국가 문화재인 만큼 의혹이 제기된 이 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고 진위 재검증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은행 등 유관기관이 진위 논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한 뒤 "진작이면 왜 진작인지를 설득력있는 근거로 밝혀야 하며 내 주장이 틀렸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구체적으로 반박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위대한 화가였던 겸재가 위작 때문에 예술성이 폄하돼서는 안된다"면서 "미술품 감정은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호하는 데 있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위작 제작은 물론 두둔 또는 은폐도 예술혼을 더럽히는 죄악"이라고 전제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거나 '연구중'이라며 진실 규명을 회피하는 것은 우리 예술발전에 도움이 안된다"며 작품성과 사실관계에 입각한 토론을 다시한번 촉구했다.  <연합> 좋은뉴스 2008/07/06 11:21


http://news.isegye.com/category/%EB%AC%B8%ED%99%94?page=3

 

2007 - ‘2007 서울오토살롱 with 오토애프터코리아’전 개막 (5~8일 코엑스)

2007 - 외계인을 믿는 사람들-로즈웰 축제 (5~8일)

"민주당이 집권하면 외계인과 UFO 관련 기밀이 모두 공개될 것이다." UFO와 ET현상을 정치 문제로 다루어 온 스티븐 배셋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지금 같은 정치상황이라면, 힐러리 클린턴 뉴욕 상원의원이나 리처드슨 뉴멕시코주지사 등에겐 이미 모두 보고됐을 것"이라며, "비밀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며, 진실의 엠바고(보도제한)는 끝나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UFO 문제를 다룬 < UFO와 국가안보>의 저자 리처드 돌란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려 하겠냐"며 "그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UFO의 추락현장에서 수거한 금속 파편이나 외계인 시체 일부로 '재생 금속' 따위의 기술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란 의혹도 제기했다.

미 공군, 60년 전 UFO·외계인 주검 입수
로즈웰 사건 60주년 기념 축제도 열려

사람들은 이런 주장들을 '헛소리'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5일부터 8일까지의 뉴멕시코주 로즈웰시에서는 그처럼 '까칠하게' 대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간 이곳에선 최소 3만5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로즈웰 사건 6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에 참석했다. UFO 관련강연 및 세미나가 열려 진지한 면을 보이는 한편, '외계인 변장대회'나 '외계인 잡기 놀이' 등으로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기도 했다.

로즈웰 사건은 1947년 7월 미국 전역에서 관측됐다는 보고가 잇달았던 UFO가 5일 로즈웰에 추락했으며, 추락 잔해와 사망한 탑승 외계인 주검을 미 공군이 입수했다는 내용이다.

미 제8공군은 추락 당일 '공군에 붙잡힌 비행접시'라는 보도자료를 내, "비행접시 소문은 사실"이었으며, "제8공군 509폭격대 정보장교가 비행접시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정보장교로 알려진 제시 마르셀 소령은 "금속이 웨하스처럼 얇았지만 매우 단단했다"며, "매우 가벼운데도 칼에 잘리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추락한 것은 기상관측 기구”
24시간 뒤, 말바꾼 군 당국

"추락한 것은 비행접시가 아닌, 기상관측 기구였다"고 밝히는 새로운 보도자료를 내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군과 미 정부는 줄곧 같은 입장을 취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1994년 회계감사원의 질의에 대해 공군성장관실이 <로즈웰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기상관측 기구가 수행하던 작전이 '기밀'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소련이 핵실험을 실시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센서를 달아 기구를 띄웠는데 추락했다"는 내용이다. 또 현장에서 발견된 주검은 기구에 실려있던 "실험용 마네킹"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죽고 나서야 밝힐 수 있었던 또 다른 진실
“나는 UFO와 외계인을 봤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다른 내용을 알고 있었다. 당시 글렌 데니스라는 이름의 현지 장례업자는 추락 직후 군 당국으로부터 "어린이용 관을 몇개 준비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관을 만들어 부대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한 간호사가 "UFO가 추락했고 외계인이 발견됐다"는 얘기를 해줬다. 하지만 그는 그 간호사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또 최근에는 사건발생 60주년을 앞두고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공군에 붙잡힌 비행접시'란 보도자료를 냈다가, 24시간 뒤에 새로운 보도자료로 수정·발표했던 당시 공보장교 월터 호트 중위의 유서가 공개된 것이다. 그는 2005년 12월 15일 8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호트 중위는 2002년 작성된 이 유서에서, 그가 생전에 남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주어진 자료들을 보도자료로 취합해 배포했을 뿐" 등의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미 공군이 입수한 추락비행접시와 외계인의 육체를 봤다"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는 "격납고에서 달걀모양으로 생긴 15피트(약 4.5미터) 길이의 비행체와, 4피트(약 120cm) 정도의 키에 머리가 큰 작은 육체들을 봤다"고 적고, "이들이 그 비행체에서 나온 외계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기록했다.

현장에 대해서도 호트 중위는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동체의 잔해가 떨어진 지점과 동체가 추락한 지점이 달랐다"며, 사건 당시 "일반인들은 잔해 추락지점만 알았을 뿐, 동체 추락지점은 알지 못해 일부만 공개했다"고 기록했다. 결국 군 당국은 일반인들에게 이미 노출된 잔해 추락 지점만 공개하기로 하고, 동체 추락지점에는 군을 대거 동원해 현장의 잔해를 모두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군 당국 일각에서 비행접시 잔해를 기념품으로 수거했다'는 기존의 한 증언과 일치하는 내용이라 눈길을 끌었다.

전세계의 관심은 다시 로즈웰로

이 유언장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왔다. 영어권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선데이텔레그라프>가 지난 1일 '유언으로 다시 살아난 로즈웰 이론'이라는 기사로 이 소식을 다루고 온라인으로도 게재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콘텐츠 스크랩-공유 사이트 '딕닷컴'에서 2029회(8일 현재)의 '딕', 즉 스크랩을 받아 이 사건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을 반증했다. 한국에서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것은 연예계 소식이나 해외토픽 류의 뉴스를 주로 보도하는 인터넷매체 <팝뉴스>였다. <선데이텔레그라프>와 같은 루퍼트 머독계열의 <폭스뉴스> 기사를 인용해, <팝뉴스>는 '"로스웰 외계인은 사실", 사건 담당 미군 장교 '유언' 공개'라는 기사를 네이버 기준 3일 12시44분에 게재했고, 이 기사는 댓글이 2560개를 기록해 네이버 뉴스의 주간 최다 댓글 기사로 올랐다.

로즈웰 사건에 대해 UFO와 외계인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동시에 이들은 지난 60년동안 외계인을 향한 전세계적인 상상력에 '모티브'를 제공해왔다. <멘인블랙><스타워즈><엄마는 외계인>이나 미국 외계인 영화들은 물론, 한국의 <아기공룡 둘리>나 최근 영화화된 일본의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외계세계도, 그 생김새나 아이디어는 로즈웰에 출현한 비행접시·외계인과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 뉴멕시코주의 평온한 소도시 로즈웰은 60년전 UFO사건만 아니었어도 그저그런 인구 4만5천의 작은 도시였을 것이다. 지금 외계인을 신봉하는 이들은 로즈웰을 일종의 '성지'처럼 여기며 돌보고 있다.

과연 외계인은 있는 것일까? 사는 사람 숫나만큼의 방문객들을 맞이했던 이 도시에서, 이번 축제의 진행요원을 맡았던 기 말론은 빙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천사, 요정, 악마, 악령, 외계인 등등 모두 같은 현상 아닐까요? 수백년전에 인간을 동굴로 데려가고, 요술 방망이로 마법을 부리고, 숲속에서 이상한 성경험을 시켜준 존재를 우리는 '요정'이나 '천사'라고 불렀죠. 그런 존재들을 지금은 '외계인'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습니다."

*현장 내용은 <에이피>통신과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2007-07-1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221738.html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웰 마을의 UFO 전시관

 

[미국은 지금] 미국 뉴멕시코 주 마을, UFO 축제열어

미국내 주요 관심사와 화제들을 알아보는  ‘미국은 지금’  시간입니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로스웰에서  UFO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확인비행물체, UFO가 로스웰 인근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 있은지 60주년에

열리는 UFO 페스티벌과 관련된 얘기를  문철호 기자와 함께   관해 알아봅니다.

Q:  먼저 로스웰의 UFO 사건 발단에 관해 얘기해야 할 것 같군요. 뉴멕시코주, 로스웰 북서쪽 사막에 UFO가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난 것은 60년전 7월 4일이었던 것으로 돼 있지 않습니까?

A: 네, 그렇습니다.   당시 이 지방의 로스웰 데일리 레코드 신문은 로스웰 지역의 한 목장에 비행접시가 추락했는데 미군 당국이 추락한 비행물체의 잔해를 수거해 인근 미 육군기지로 가져갔다고 보도했고 군 당국은 추락한 비행물체가 기상관측용 풍선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군 당국이 앞서 미확인 비행접시 추락 잔해라고 발표했다가 곧 뒤이어 기상관측용 풍선이라고 정정한 것이 UFO에 관한 의혹을 확산시켰고 그 이후 로스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금 같은 UFO 페스티벌도 열리게 됐습니다. 

 

Q: UFO에 관한 의혹이 깨끗이 풀렸더라면 로스웰에서 오늘 날까지 UFO 페스티벌이 계속 열렸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현재 인구 약 5만 명의 작은 도시인 로스웰은 UFO 박물관, UFO 연구소, 우주센터 등이 차려져 이곳을 찾는 수 많은 관광객 덕분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얻고 있는데요, 아무튼 로스웰 주민들의 

UFO 의혹에 관한 견해는 아직도 반신반의로 나뉘어져 있다고 합니다.

A: 네, 그렇습니다. 당시 비행접시건 UFO건, 무엇인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고 미국 정부당국이 이를 덮어두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두 부질없는 얘기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곳의 데니스 발타세르라는 주민은 미국 정부가 많은 것들을 비밀로 감추어 두고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이 로스웰 북쪽 인근, 로스 알라모스에서 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관련돼 10년 동안이나 추진됐었는데

비밀로 돼 있었던 사실을 한 가지 사례로 지적합니다.

 

Q:  미국 군당국은 1994년에도 로스웰에서 발견된 물제가 소련의 핵무기 실험을 관측하기 위한

특수 장비를 갖춘 풍선의 잔해였다고 발표했는데도 UFO에 관한 의혹은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의혹이 깨끗이 풀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A:  로스웰의 발타세르 주민은 이 곳과 다른 여러 곳의 많은 사람들이 UFO를 실제로 믿는 것은 분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렇지만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 정부들처럼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밝히기 전엔 UFO에 관한 의혹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에만도 프랑스와 영국 정부 등은 UFO에 관한 모든 정부문서들을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는데 미국 정부는 그렇게 할 의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발타세르 주민은 지적합니다.

 

Q:  로스웰의 주민들의 생각이 어떻든 새로운 극적인 증거가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어쨌든 로스웰은 UFO와 관련해 호텔과 레스토랑 등 관광업 덕분에 이 분야의 고용만도 12퍼센트나 된다고 하니까 의혹이 풀리지 않는채 있는 게 더 좋을 것도 같군요. 지금 열리고 있는 UFO 페스티벌도 매년 계속되고 말이죠.

A:  그렇습니다.  올해의 페스티벌은 ‘어메이징 로스웰 UFO 페스티벌’이라는 공식 타이틀로 오는 8일까지 열리는데요,

이를 알리는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정말로  굉장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올해 페스티벌의 일정을 보면  ‘UFO 비밀과 마리린 몬로의 죽음’ / 네필림 스타게이츠와 목격자들의 증언 등 일종의 환상적인 프로그램들이 있는가 하면 토요일에는 ‘ 미국 정부는  UFO에 관한 진실을 미국 국민들에게 왜 말해야만 하고  말하게 될 것인가? 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에 이어 ‘ 미국 정부는 왜 UFO에 관한 진실을 미국 국민들에게 결코 말하지 않는가?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이 특히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Q: 그렇지만, 이 페스티벌의 프로그램들 가운데는 ‘스케이트 보드와 BMX 스턴트’ 외계인 의상 퍼레이드, 카니발 같은 것들은 UFO와 별로 관계없는 내용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60년전 당시 미군 공보장교의 UFO 관련 유언이 공개됐다고 폭스 뉴스 등이 보도한 것으로 한국 신문들이 전했군요.      

A:  네, 당시 미군의 월터 하우트라는 공보장교가  외계인의 시체를 봤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고 폭스 뉴스

인터넷 판이 보도한 것으로 전했지만 미국의 신문 등 다른 뉴스 매체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비슷한 내용의 뉴스는

전혀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하우트 유언 내용은 그가 당시 비행물체의 파편뿐만 아니라 외계인의 사체를 보았으며 방수외투를 입은

사체 2구도 발견했었다고 돼 있는데, 폭스 뉴스의 이 같은 인터넷 보도가 신뢰성 없는 것으로 판단된 것인지 다른 매체들에는 언급된 것을 볼수가 없습니다.

 

Q:  그러니까 폭스 뉴스 인터넷판 보도가 UFO와 관련해 지금까지 수 없이 제기됐던 많은 음모설들의 하나로 보인다던가 아니면 몽상 같은 얘기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쨋거나 로스웰시로선 UFO와 외계인에 관련된 일종의 유적구실을 함으로써 당분간 관광업 분야 등에서 경제적 이익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고 올해 UFO 페스티벌 주관 담당자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스웰시 당국은 얼마 전에 로스웰에 외계인과 관련된 테마파크를 건립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죠?   

A: 네,  로스웰시는 지난 5월에 ‘에일리언 에이펙스 리조트’라는 명칭의 테마파크 건설계획을 발표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습니다.

AP 통신 기사는  ‘이런 계획은 로스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서두로 로스웰시의 외계인 테마파크 계획을 소개했습니다. 1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외계인 테마파크는  150 에이커, 6백 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에 우주개발,

탐험 전시장과 모의 외계인 납치를 내용으로 하는 롤러코스터 등을 갖추게 된다고 합니다.

로스웰시는 민간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될 이 외계인 테마파크 건설을 위한 최종 설계예산으로 2

5만 달러를 책정해 놓고 있습니다.  

로스웰시는 이 테마파크 건설에 관한 제안서를 전세계적으로 공모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들은 로스웰시 홈페이지에

소개되고 있는데요, 로스웰시 홈페이지를 열면 폭스 텔레비전 드라마 X-파일의 주제음악이 흘러나와 UFO 유적의

도시다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미국내 주요 관심사와 화제들을 알아보는  ‘미국은 지금’, 문철호 기자와 함께 알아봤습니다.

미국의 소리 07/05/2007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7-07/2007-07-05-voa18.cfm?moddate=2007-07-05

 

2005 - 강원도 DMZ 155마일 이어달리기(5일~9일)  

2004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그리스의 카라고우니스가

우승컵을 들고 동료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2004 - 유로2004 그리스 포르투갈에 1대 0으로 우승

2004년 7월 5일 유로2004 포르투갈전에서 그리스가 포르투갈을 꺾고 ‘앙리 들로네’ 트로피에 입을 맞추었다.

2004유럽축구선수권 전에 도박사들이 점쳤던 이 나라의 우승 확률은 100대1. 라트비아 등과 함께 16개국 중 최하위권으로 꼽혔다. 이런 그리스가 처음으로 유럽 축구의 왕좌에 올랐다. 1980대회에서 1승도 못하고 탈락(1무2패)한 뒤 24년 만에 출전해 축구사를 새로 쓴 것. 이번 대회엔 첫 기록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리스는 개막전과 결승전서 개최국과 만나 다 이긴

첫 번째 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번 대회서 매 경기 한 골 이상씩 넣은 유일한 팀이기도 했다.

우승은 기적이 아니었다. 후반 12분, 바시나스가 오른쪽에서 코너킥을 올리자 카리스테아스가 달려들며 머리로 받아 넣은 골이 1대0 승리를 결정지었다. 독일 출신인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감독은 모국이 아닌 나라를 정상에 올린 첫 외국인

감독으로 등록했다. 역대 최고령 사령탑(65세) 기록도 바꿨다.

이로써 2004아테네 올림픽 개최국인 그리스는 2004년 세계 스포츠의 주인공이 됐다. 반면 포르투갈은 개막전에서 진 첫 개최국이고, 결승까지 오르고도 우승하지 못한 첫 개최국이라는 불명예 기록만을 세우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스콜라리 감독은 2위 메달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 조선

 

2004 - 신행정수도 충남 연기-공주로 확정

2003 - 중화민국세계 보건 기구로부터 마지막으로 SARS 위험지역에서 해제되다.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重症急性呼吸器症候群) 또는 사스(영어: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는 2001년 11월중국 광둥 성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이후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등 전세계로 확산된 전염병이다.

사스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한다. 보통 잠복기는 2 ~ 7일이며, 10일이 걸릴 수도 있다.

사스가 의심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38도 이상의 발열 증상이 있고

2. 최근 10일 이내에 사스로 진단 받은 사람과 접촉한 적이 있는 경우

3.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지정한 사스가 발생한 국가로 여행을 다녀온 경우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환자 중에서 흉부 방사선 사진상 이상 증상이 보이면 증증 급성 호흡 증후군의 가능성이

높은 사례로 분류할 수 있다. 확실한 진단을 위해서는 사스-코로나 바이러스를 세포 배양해서 분리해 내거나

역전사 중합효소 연쇄반응(RT-PCR)법을 이용하여 바이러스의 핵산을 검출해야 한다. 

치사율

치사율은 약 10퍼센트로 일반적인 호흡기 질환보다는 훨씬 높지만 4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1918년

스페인 독감만큼 높지는 않다. 또 WHO 관계자들은 이 괴질의 원인이 통제가 훨씬 쉬운 독감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인 독감의 사망률보다 낮으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변종을 일으켜 백신생산이 지연되어 사망률이 높다. 

 

2003 - 투르 드 프랑스 대회 개막 (100주년 기념대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로 사이클 경기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 대회가 지난 5일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올해로 백주년을 맞는 이 대회에는 예년보다 많은 팬들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이

5년 연속 우승을 이룰 수 있을지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올해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서 스페인의 미겔 인두라인이 세운 대회 5연패와 같은 대기록을 세울 것으로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지난 4년동안 비교적 손쉬운 승리를 거뒀고, 특히 지난 해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선두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3주일 동안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의 높은 언덕들을 비롯해서 4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는 투르 드 프랑스 대회의 특성을 감안해 본다면 암스트롱이 이룬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암을 이겨내고 그같은 업적을 거둔 암스트롱은 프랑스

팬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지난 18년 동안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지만, 약 25만명의 사이클 선수가 있는 프랑스에서 이 대회는 하나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아예 휴가를 대회 일정에

맞추기도 합니다.

올해 투르 드 프랑스는 대회 백 주년을 기념해 지난 1903년의 1회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파리 근교에서 출발됐습니다.

시계 방향으로 프랑스를 일주하는 이 대회는 오는 27일 파리에서 끝나게 됩니다. /VOA news 2003-07-08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3-07/a-2003-07-08-3-1.cfm  - Google

 

2003 -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 아사벨 도를레앙 에 브라강스 별세

2001 - 박찬호 선수,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발됐다.
2001년 오늘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공식 발표한 11명의 내셔널리그 올스타 투수진 명단에 박찬호 선수의 이름이 올랐다.
당시 박찬호 선수는 다승부문 11위와 평균자책 5위, 그리고 탈삼진과 피안타율 부문에서 각각 4위와 2위를 기록해 각 부분에서

고르게 상위에 올라있었다.
이로써 199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8시즌 만에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다.
 

배추김치

 

2001 - 국제식품규격위원회, 김치를 국제규격식품으로 승인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음식 `김치`가 국제 식품으로 공인받았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는 2001년 7월 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24차 총회를 열고 김치를 국제 규격 식품으로 승인했다. 이에따라 `김치`는 `절임배추에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무 등 여러 양념을 혼합한 뒤 젖산 생성에 따른 적정한 숙성과 보존성이 확보되도록 저온에서 발효한 제품`으로 국제규격화됐다.

우리 특유의 채소 가공법인 김치담금의 특성이 모두 인정된 것이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공인에 따라 김치는 `kimchi`라는 영문

명칭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었으며, `기무치`란 일본식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우리 정부는 `기무치`란 경쟁상품을 들고 나온 일본과 지난 1997년 네 차례에 걸쳐 실무 협의를 벌인 뒤, 제품명을 김치(kimchi)로

통일하는 단일 규격안을 마련해 CODEX에 제출했다. CODEX는 식품 분야의 국제표준을 정하는 국제협의체로, 총 8단계에 걸쳐

심사를 진행한 다음 국제규격의 식품을 공인한다. 농림부는 "이번 결정은 국제 사회가 한국을 김치 종주국으로 확인했다는 의미이며, 김치가 세계적 식품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조선

 

2001 - 대우조선 소속 12인승 헬기 추락, 동국제강 회장 등 8명 사망-실종

2001 - 민주당 추미애 의원, 취중 욕설 파문 

한국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코오롱감독. 

 

2001 - 한국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감독 별세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67) 코오롱 감독이 2001년 7월 5일 밤 만성 신부전증과 당뇨에 의한 합병증을 앓아오다 별세했다.

1990년 이후 한국 마라톤의 힘을 세계에 알렸던 정 감독이 20여년의 `마라톤 여정`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단거리 선수 출신이었던 정 감독의 마라톤 인생은 1987년 코오롱 이동찬 회장이 마라톤팀을 창단, 그에게 지휘봉을 맡기면서

시작됐다. 창단 멤버는 김종윤 1명. 곧바로 김완기, 이창우를 영입해 팀 골격을 갖췄다. 1990년 김완기의 한국 최고기록(2시간11분34초) 수립, 1991년 황영조의 유니버시아드 제패 및 이창우의 요미우리마라톤 2연패, 1992년 황영조 올림픽 제패, 1994년 황영조 아시안게임 제패, 1996년 이봉주 올림픽 은메달, 1997년 권은주 한국 여자 최고기록(2시간26분12초), 1998년 이봉주 아시안게임 제패….

정 감독은 끊임없이 꿈나무를 발굴하고 단련시켜 스타로 만들어 냈다. 일본 실업팀에서 거액을 주겠다며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헌신적으로 지원해준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정 감독은 코오롱 감독 재임 시절 가족을 `팽개치고` 선수들과 숙소생활을 함께 했다. "마라톤 선수는 세세한 것까지 살피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선수들은 때로 그런 감독에 반발하곤 했지만, 마라톤에 대한 고인의 `맹목적인 사랑`만큼은 거역할 수 없었다.

 

2001 - 9인승 대형택시 첫 운행

1998 - 일본이 화성 탐사선을 띄움으로서 미국러시아에 이어 세 번째로 우주 탐사를 하는 국가가 되다. 

윔블던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있는 마르티나 힝기스.

 

1997 - 마르티나 힝기스, 윔블던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

마르티나 힝기스(16세)가 1997년 7월 5일 윔블던 테니스대회 여자단식에서 야나 노보트나에게 2대1(2-6, 6-3, 6-3)로 힘겹게 승리했다. 힝기스는 이로써 1997년 1월 호주 오픈에 이어 두 번째 그랜드 슬램 정복에 성공했으며 윔블던 역사상 110년 만의 최연소 챔피언으로 기록됐다. 소녀와 여인, 기술과 힘, 패싱샷과 강서브의 대결은 시종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었다.

1세트는 파워와 강렬한 서비스, 질풍같은 네트 대시로 도전한 노보트나의 압승이었다. 힝기스가 리듬을 찾기 시작한 것은 2세트. 스트로크의 정확성이 살아나면서 대등한 경기를 벌이던 힝기스는 6번째 노보트나의 서비스 게임을 멋진 패싱샷으로 빼앗으며 4-2로 균형을 허물고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착실히 지켜 세트 스코어 1-1을 만들었다. 힝기스는 3세트 초반 몇 번의 브레이크 포인트를 놓쳐 0-2로 몰렸지만 네트로 달려드는 노보트나의 허점을 날카로운 패싱샷으로 추궁, 5게임을 연달아 따내며 승부를 갈랐다. 

영국 에든버러 로슬린 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 박사와 7개월된 복제양 `돌리`.

 
1996 - 영국 로슬린연구소의 아이언 월머트 박사에 의해 세계 최초의 복제양 '돌리'가 태어남

1996 - 복제양 돌리 탄생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인간복제 가능성이 유전공학 실험으로 증명됐다. 1996년 7월 5일 복제양 `돌리`가 이를 증명했다.

영국 에든버러 로스린 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박사팀은 6년생 암양의 DNA유전자를 다른 양의 난자와 결합, 암수 성교나

수컷 정액 없이도 미수정란 핵을 체세포 핵으로 바꾸고 유전적으로 똑같은 양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윌머트박사는 세포핵을 갖게 된 이 수정란을 또 다른 암양 자궁에 이식, 첫번째 양과 유전자가 똑같은 새끼가 태어났다고 밝혔다.

이 새끼양 `돌리`는 이후 인류생활에 혁신적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2003년 2월 14일 정상수명의

절반에 불과한 여섯살의 나이에 폐질환 증세를 보임에 따라 도축됐다. 돌리를 복제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로슬린 연구소는 이날 복제양 돌리가 진행성 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도축했다고 밝혔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총리 

 

1995 -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총리 별세

후쿠다 다케오(90) 전 일본총리가 1995년 7월 5일 지병인 만성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후쿠다 전 총리는 1976년 12월부터

1978년 11월까지 총리로 재임하면서 안정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 1차 오일쇼크 이후 일본경제 재건에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05년 군마현에서 태어나 1930년 도쿄대를 졸업, 대장성관료 생활을 거쳐 1952년 고향에서

중의원의원(자민당)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했다.

후쿠다 전 총리는 다나카, 오히라, 미키 전 총리등과 1970년대 자민당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주역중의 한사람이다.

정치초년병 시절부터 기시파 간부로서 두각을 나타내 1959년 자민당 간사장을, 1964년 사토내각 발족 후 대장성장관, 간사장, 외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은 고 다나카 전 총리. 이전에는 사토이후의 제1주자로 불렸으나 1972년 총재선거에서

 다나카의 도전을 받아 패한 후 정국운영에서 늘 다나카와 대립, 각-복전쟁 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그는 재임 중 경제재건 외에 한일대륙붕조약·중일우호조약 체결, 나리타 공항 개항 등 업적을 남겼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연세대생 이한열군


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 로이터통신 한국지사

사진부장 정태원 촬영 - Google 사진

 

1987 - 연세대생 이한열군 사망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이한열군이

27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5분 끝내 숨을 거뒀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 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9일 연세대 교문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한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다. -조선

 

이한열(李韓烈, 1966년 8월 29일 ~ 1987년 7월 5일, 전남 화순 출생)은 대한민국의 학생 민주화운동가이다.

1987년 시위 참여 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어린 시절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화순에서 지냈으며, 광주진흥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종로학원에서 재수후,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였다.

6월 항쟁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2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를 흘리는 사진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장례

7월 9일 '민주국민장' 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서울시청 앞 → 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6 - 미국 테니스선수 나브라틸로바, 윔블든 여자단식서 5연패 달성

1986 - 1980년대 민족, 민중 미술운동을 대표하는 미술가 오윤 사망

 

1981 - 소련·폴란드 사회주의 체제 수호 성명(1981)
1981년 오늘, 소련의 그로미코(Gromyko) 외상과 폴란드의 야루젤스키(Jaruzelski) 국방장관이 만났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로미코 소련 외상은 폴란드의 사회주의 체제가 흔들리면 무력침공할 수도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연대가 세력을 확장하며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야루젤스키 폴란드 국방장관은 결국 정국불안에 대응조치로서

1981년 12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수의 자유노조 지도자를 구속한다.

 

1980 - 중국. 베트남, 국경무력도발에 관한 항의각서 교환

1980 -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단교

1977 - 파키스탄에 쿠데타, 지아 울 하크 전권 장악

 

1977 - 파키스탄 쿠데타 발발
1977년 7월 5일 파키스탄의 육군 참모총장 지아 울 하크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알리 부토 대통령을 몰아내고

계엄 사령관이 된 뒤 대통령에 취임해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던 부토를 살인 미수 혐의로 처형하고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닦았다.

지아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금지하고 언론과 출판물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면서 다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79년 소련이 인접국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파키스탄은 미국의 지원으로 군비 증강에 착수했다.

지아 울 하크는 자신의 정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정치와 문화의 이슬람화에 주력했다.1988년 지아가 비행기 사고로

죽자 파키스탄은 총선을 치렀고, 부토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승리해 이슬람권 국가에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1975 - 가봉 봉고대통령 내한

경회루 리셉션에, 서울대 명예박사에, 자동차 이름도 헌정

아프리카 서부, 적도 남단에 위치한 가봉 공화국은 지난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1962년에는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했지만 1974년 북한과 도 외교관계를 시작했다.
신생 독립국들이 속속 유엔에 가입하고 비동맹 그룹이 친북노선을 노골화하던 무렵, 냉전 대결 외교의 첨병이던

한국은 가봉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치열한 외교전 끝에 한국 정부는 1975년 7월 가봉 공화국의 봉고 대통령을 국빈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위원장이고 각부 장관이 위원이 되는 '국빈영접 방한 준비위원회'까지 열렸다.

그리고 희극은 봉고 대통령이 입국한 김포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가봉이 어디 있는지 봉고가 누군지도 모르는 1400명의 정관계 인사들이 김포공항에 나와 영접했고 연도에는 수십 만 명의 시민들이 동원돼 힘차게 가봉국기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봉고 대통령의 방한 첫날 밤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주최로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김종필 국무총리 등 정부 3부 요인이 모두 참석한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까지 참석했을 정도.
다음 날 경희 의료원 시찰에 나선 봉고 대통령은 침술 치료를 받고 보약을 처방받는다. 평소 몸 챙기기에 지극 정성인 봉고 대통령을 위한 한국 정부의 배려였던 것. 정부는 심지어 한의사를 가봉에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기아자동차가 신형 승합차를 출시하면서 '봉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압권. 봉고 대통령에 앞서 방한했던 포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물론,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방한한 그 어떤 외국 정상도 이같은 환대를 경험하진 못했다.
방한 마지막 날 만찬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특히 유엔총회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에 대해 계속적으로 지지를 해주신 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서 본인의 심심한 경의와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고 말했다.
공전절후의 환대 이유가 이 문장에서 설명된 것. 당시 뜨거운 남북외교전에서 북한은 콩고를, 남한은 봉고를 아프리카 돌파구로 삼았던 것이다.
봉고 대통령은 3박 4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그해 7월 8일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떠났다가 도로 돌아와서 몇 시간을

더 머문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당시 '성접대설'과 맞물려 갖가지 뒷말을 낳았다.
또한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가봉을 방문했을 때는 가봉 군악대가 한국의 애국가가 아닌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봉'의 '봉고'대통령을 아시나요?")윤태곤-기자  2007-08-10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20070810114634 

 

가봉의 봉고대통령, 그는 왜 한국 최고의 국빈이 되었나[발굴! 정부기록보존소]
가봉의 봉고대통령, 그는 왜 한국 최고의 국빈이 되었나
역사스페셜, 가봉의 봉고대통령을 만나다!!!

- 방송일시 : 2003년 6월 7일 토요일 20:00-21:00 KBS 1TV

- 프로듀서 : 공용철 / 작가 : 최우진
- 주요내용 :

28년전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국빈대우를 받으며 방한해 온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가봉의

봉고대통령(Bongo, El Hadj Omar).

역사스페셜 제작진이 가봉 현지에서 1967년 취임이후 현재까지 가봉의 대통령직을 맡고있는 봉고대통령을 만났다.
봉고대통령은 제작진에게 남한과 북한 모두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당시 가봉 정부의 입장과 방한,

방북에 얽힌 외교비사를 털어놓았다.
중립노선을 표방한 신생독립국가들의 지지를 토대로 국제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북한과

6,70년대 국제외교에서 북한에 밀리기 시작한 한국의 맞대응 외교전략.
그 교두보는 아프리카 적도의 작은 국가 가봉에 있었다.
1975년 이후에도 1984·1996년 두 차례나 더 한국을 방문하여 국가원수로서 가장 많은 방한 횟수를 기록하고 있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은 왜 한국 최고의 국빈이 되었을까?
이번주 역사스페셜 [가봉의 봉고대통령, 그는 왜 한국 최고의 국빈이
되었나] 에서는 가봉의 봉고대통령 방한에 보여준 한국의 열렬한 환대를 통해,

70년대 비동맹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남북한의 치열했던 외교비사를 조명해본다.
- 세부내용 :
1. 1975년 7월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 가봉의 대통령의 국빈 방한!
방한규모는 각료 급 7명을 포함한 총 수행원 70여명의 대규모였다.
봉고대통령의 방한을 기념하는 기념우표, 기념담배가 제작됐고, 대통령의 국내 일정은 연일 일간지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정도로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의전일지와 당시 보도내용을 통해

봉고대통령의 3박 4일간의 방한일정을 추적해봤다.
2.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 가봉에 이토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당시 국내외 상황은?
* 월남 독재정권 지지로 국제적 입지가 좁아진 외교상황!
* 신생독립국을 향한 북한의 적극적 외교와 괄목할만한 성과!
* 신생독립국의 대거 UN가입으로 한국의 UN에서의 입지 불분명!
이에 한국도 UN내에서의 입지 확보를 위해 맞대응 외교를 시작한다.
특히 신생독립국가 중 드물게 親서방정책을 펼쳤던 가봉은 한국의 對아프리카 외교의 교두보였다.
3. 북미 직접협상을 막아라!
1969년 7월 닉슨독트린. 美닉슨대통령은 아시아 방위문제에서 대미의존도를 줄인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이 발표 이후 북한의 대미정책은 반미투쟁노선에서 미국과 직접 접촉을 계획하는 정책으로 변화한다.
심지어 미국내 친북세력을 키우고 주한미군철수와 한미관계 이간을 꾀하기에 이른다.
미국과의 접촉을 위해 북한이 선택한 접속채널 중 하나가 바로 가봉 등 비동맹국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가봉외교는 북한의 외교정책에 대한 견제책이었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봉고대통령이 북한방문시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요청받은 김일성의 친서를 공개한다.
4. 소모적 남북 외교대결의 전환점 - 30차 UN총회
70년대, 유엔에서의 남북외교대결이 절정에 치닫는다.
한국정부는 23개국에 달하는 아프리카 수교국의 지지를 얻기위해 매년 10만달라가 넘는돈을 무상지원했고,

북한도 75년 한해에만 무려 4천8백만달라에 달하는 돈을 지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대결구도는 서로가 표방하듯 평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 서로

갈등의 골만 깊게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러한 출혈적 남북외교대결은 1975년 제 30차 UN총회에서 남북한 결의안이 모두 통과된 이후 수그러들게 된다.

KBS 역사스페셜 - KBS 방송일: 2003607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history/vod/1267436_4855.html

1975 - 한국-사우디아라비아, 문화협정 체결

1972 - 문공부, `북괴`를 `북한`으로 호칭토록 각부처에 통고

1970 - 월남참전 6개국 외상회담 월남서 개막

 

1965 - 임진강서 북한 소형잠수함 노획

1965 - 프랑스, 유럽연합(EC) 탈퇴

1963 - 중국-소련, 양국공산당회담 모스크바서 개최

 

1962 - 알제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브리태니커-'오늘의 역사'에는 7월 3일로 기록되었는데, 7월 3일 드골정부의 독립승인이 나고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5일에 독립을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알제리 독립기념우표도 7월 5일 발행되었습니다. ^.@)

1962 - 알제리 독립(1962)
1962년 오늘 아프리카 북서부 나라 알제리가 독립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지 132년 만의 일이다.
1954년 11월 4일 발족한 민족해방전선(FLN)이 8년 동안 벌인 독립운동이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알제리의 무장 독립투쟁 기간에 무려 150만여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드골 정부는 앞서 이틀 전인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했다.
수도 알제의 시민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독립이 선포되자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1962 - 알제리가 132년간의 프랑스 통치로부터 독립하다.

 

1830년 프랑스의 침입으로 식민지가 되어, 카비리의 반란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54년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고 반불무력항쟁(反佛武力抗爭)을 개시하였다. 프랑스는 50만 이상의 병력으로 육·해·공군을 총동원하여 하루 평균 20억 프랑의 전비(戰費)를 쓰며 독립군을 토벌하였으나 허사였다. 이 알제리 문제로 몇 차례에 걸쳐 내각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4공화국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58년 FLN은 알제리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하고

프랑스 정부와 프랑스 이주민(移住民)인 콜롱(colon)에 대한 저항운동을 강화하였다.

1962년 7월 5일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선포하고 9월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1976년 국민투표로 국민헌장을 채택했고, 새헌법을 채택하였다. 알제리는 비동맹·중립노선을 취하고 있으며, 1988년 모로코·이집트와 복교하고

1989년 ‘아랍-마그레연합’을 결성하였다. 1991년 이후 선진제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알제리-역사) 

 

1961 - 문교부, 학구제 실시요강 발표

1960 - 존슨 의원, 미국 대선후보전 출마(1960)
1960년 오늘!
미국 민주당의 존슨(Lyndon Johnson)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를 선언했다.
1949년부터 11년 동안 6차례 상원의원을 지낸 52살의 존슨 의원!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존.F.케네디와의 경쟁에서 패하지만 케네디의 러닝메이트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다.
대선에서 케네디가 당선됨으로써 부통령이 된다.
존슨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1963년 11월 대통령직을 승계해 진보적인 정책을 펴고

이듬해인 196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1960 - 유엔안보리, 소말리아 가입 승인

1959 - 한국원자력원 원자로 트리가마크프형 도입

1958 - 반공청년들의 법원데모 발생

 

1957 - T-33 제트기 인수식(1957)
1957년 오늘 수원 공군기지에서 우리 나라와 미국의 고위급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T-33제트기 인수식이 열렸다.
우리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T-33 9대를 넘겨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의 뜻으로 미 공군 장성에게 표창장을 주고 우리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게 군기도 수여했다.
 

1955년 7월 5일 14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조병기씨. 

 

1955 - 한국의 로빈슨 크루소 조병기 귀국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7월 일제에 징용당해 남태평양에 끌려갔던 조병기씨가 태평양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14년간이나 남태평양 고도에서 혼자 짐승처럼 살다가 1955년 7월 5일 마침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일본군대 2만명과 한국인 2백50명이 미군의 공격으로 전멸하고 한인노무자 3명만이 살아남은

섬은 메레레우섬이다. 생존자 3명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조씨는 "미군에 잡히면 귀 코 입을 잘라 죽인다"는 일본군의 말에

속아 달팽이와 식물뿌리 등을 삶아 먹으면서 연명했다는 것이다.
조씨는 14년의 세월을 유리병 속에 나뭇가지를 꺾어 넣으면서 어림했었는데 그 섬에는 미군이 계속 주둔했었고 원주민도 2천명이나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조씨가 원주민 농장에서 고추를 자주 따먹다가 1955년 5월 7일 마침내 원주민들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원주민들이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조씨를 곧 미군에 인계해 이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54 - 할리우드 손도장 찍기 행사(1954)
유명 영화배우들이 손과 발을 찍어놓은 미국의 할리우드 선셋대로(Sunset Boulevard)!
1954년 오늘 영화배우 알란 라드(Alan Ladd)가 그 주인공이 된다.
1년 전인 1953년 개봉한 서부영화 '셰인'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알란 라드!
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손도장을 이제 막 부은 콘크리트에 찍는다.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이 행사를 통해 텔레비전이 빼앗아간 관객들이 극장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했다.

 

1952 - 임시국회, 대통령선거절차 토의

1950 - 한국군, 제1군단 창설

 

1950 - 미국 육군스미스 부대, 오산전투 패배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미국 육군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7월 5일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

태국·터키·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한국전쟁)  

1950. 7. 1 부산에 도착한 후 열차로 이동, 7. 2 대전역에 

내리고 있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장병들 -국방부 

 

오산 전투(1950. 7. 5)

이 전투는 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한국군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파병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남하 중인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에서 교전을 전개한 방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밀려드는 북한군의 보병·전차 부대를 맞아 보병·포병 협동으로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적의 전차 부대를 막지

못하고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미 지상군 부대가 6.25전쟁에서

최초로 싸운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주요 전투 - 대한민국 국방부

http://new.mnd.go.kr/mndPolicy/6war/participationCountry/usa/usa_3/index.jsp

 

1949 - 지방자치법 공포

1948 - 영국, 국민보험법 실시에 의해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보장제도 실현

1947 - 로즈웰 UFO 사건 발생

비키니를 입은 여성

 

1946 - 비키니 수영복 등장

태평양 마셜제도에 속한 산호초 비키니가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이곳에 기자단을 불러 놓고

공개 핵실험을 가진 뒤부터였다. 1946년 7월 1일,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폭탄과 같은 급의 원자폭탄이 B29로부터

투하되자 아름답던 바다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나흘 뒤인 7월 5일, 오랜 전쟁이 끝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충만하던 프랑스 파리에서도 강력한 대폭발이 있었다.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 수영복대회가 열린 이날, 대회장을 가득 메운 1만여명의 사람들 앞에 한 여성모델이 가슴과 아랫도리만 조그만 천으로 가린 채 자신의 알몸을 드러낸 것이다. 며칠 전의 핵실험 장면을 떠올린 디자이너 루이 레아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상표로도 등록했다.

노란 물방울 무늬에 상하의 투피스로 된 이 해괴한 수영복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부도덕하다는 바티칸의 비난에 이탈리아·스페인 등은 법적으로 수영복 사용을 금지시켰고,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샘플’이라며 매도했다.

비키니가 처음부터 성공적인 출발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모델들이 비키니를 입으려 하지 않아 카바레 스트립댄서에게

옷을 입혀 대회에 내보내야 할 정도였다. 유행의 물결을 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영화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비키니를 즐겨 입으면서였다. -조선

 

1946 - 비키니가 처음으로 등장하다.

비키니(bikini)는 두 조각으로 되어 있는 여성 수영복의 하나로, 가슴과 국부를 덮고 그 사이는 가리지 않는다.

원자 폭탄 실험이 있었던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의 이름을 따왔는데,

그 이유는 비키니가 사회에 주는 충격이 그만큼 클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역사

이러한 형식의 의상은 체육복의 일종으로 이미 기원전 1400년 즈음의 그리스고분의 그림에도 나타난다.

현대적인 비키니는 1946년 파리의 기술자 루이 레아르가 발명했으며, 1950년대에 유럽에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곧 미국으로 전파되어 유행하였다.

종류

스트링 비키니

모노키니 (유니키니)

탱키니: 소매없는 짧은 셔츠로 된 비키니

마이크로키니

퍼비키니

슬링 비키니

스포츠 비키니

비키니 속옷

남성용 비키니

 

1943 - 쿠르스크 대전차전 개전 (7.5~8.23)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 러시아어: Курская битва게르크샤 비토바)는 성채 작전(독일어: Unternehmen Zitadelle)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었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공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독일군은 오랫동안 이 전투를 준비하여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 곧 반격을 개시하여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 벨고로트, 하르코프를 재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여름에 승리한 전투로는 최초였으며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어 회복에 시일이 걸렸으며,

이후로 독일군은 두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련의 파상공세에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35 - 남경에서 민족혁명당 조직

1935 - 미국, 노동자의 단결권과 노동의 자유를 보장한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 성립

 

1926 - 활동사진 검열규칙 공포

1925 - 조선농구협회 창립 

1500m 남자육상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 테이프를 끊고 있는 핀란드 파보 누르미 선수. 

 

1924 - 제8회 파리 올림픽 개막

제8회 올림픽경기가 1924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됐다. 44개국 3092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 대회는 원래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24년전의 제2회 파리올림픽이 파리만국박람회 여흥의 일환으로 열려 부끄럽게 생각한

올림픽 창시자이자 IOC 회장인 쿠베르탕이 그 부끄러움을 씻을 생각으로 예정을 변경한 것이다.

대회 스타는 핀란드의 철인 파보 누르미 선수였다. 그는 15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30분 뒤에 열린 3000m에서도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육상에서만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46개의 미국이 차지했으며, 프랑스(금메달 15개)·핀란드(금메달 14개)·영국(금메달 9개)·이탈리아(금메달 8개)가 그 뒤를 이었다. 기록면에서는 15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비롯하여, 9개의 세계신기록이 수립됐다.

 

1923 - 조선호적령 시행

1911 -프랑스의 대통령 퐁피두(Pompidou, Georges) 출생 

퐁피두 [Pompidou, Georges-Jean-Raymond, 1911.7.5~1974.4.2]  

 

1908 - 국어학자 이숭녕 출생

1908 - 러시아령 연추(煙秋)의병 국내침투작전 개시 

1907 - 프랑스 하원, 8시간 노동법 가결

 

1905 - 한성상업회의소 발기회 개최
1905년(광무 9) 7월 5일 서울의 상인들이 민족상인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의 발기회를 가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目賀田種太郞]가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에서 300만 원을 차입해 금융공황이 빚어지자,

일제의 금융·상업 수탈에 맞설 강력한 민족상인단체를 결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서울 상인 30명이 독립관에 모여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을 위한 발기회를 갖고, 7월 19일 창립 총회를 개최해

김기영을 의장으로, 곽성삼·조진태·송석진 등 20명을 임원으로 선출했다. 선출된 대표들은 구제금 300만 원을 정부가

대부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민족상업의 보호를 위한 활동을 했다. 1915년 7월 '조선상업회의소령'이 공포되고,

그해 10월 경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되자 한성상업회의소는 여기에 흡수되었다.

 

1900 - 한강철교 준공

1900 - 한강철교 A선 준공 

콕토(1939)

 

1889 - 프랑스 시인, 극작가 장 콕토(Cocteau, Jean) 출생

콕토 [Cocteau, Jean, 1889.7.5~1963.10.11]

콕토는 다방면의 예술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프랑스의 시인·극작가·소설가·배우·영화감독·화가이다.

그는 파리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해 19세에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를 출판했다. 1916~17년에는 당시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현대 예술계의 파블로 피카소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나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문인들을 사귀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많은 예술 영역에 손을 대었지만 그 중심은

시정신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앙드레 브르통 같은 콕토에게 비판적인 비평가들은 그의 다재다능하고 변화무쌍한 변신을 보며

사기꾼 또는 딜레탕트로 비난했으나, 여러 가지 예술적 표현으로 표출된 그의 젊고

자유로운 시혼은 그에게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했다. - 브리태니커

 

"시인에게 최악의 비극은 오해를 통해 숭배되는 것이다."

 

- 장 콕토

 

1880 - 수신사 김홍집일행 일본 향발

1864 - 독립운동가 오세창 출생

 

1857 -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Zetkin, Clara) 출생

체트킨 [Zetkin, Clara, 1857.7.5~1933.6.20]

1813 - 스페인의 극작가 가르시아 구티에레스 출생

 

1811 - 베네수엘라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첫번째 남미 국가가 되다.

16세기스페인의 베네수엘라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자, 토착민들은 조직적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구아이카이푸로(Guaicaipuro), 타마나코(Tamanaco) 같은 원주민들의 지도자들은 스페인의 습격에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정복되었다. 타마나코는 카라카스의 설립자 디에고 드 로사다(Diego de Losada)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522년

스페인에 의해 현재의 쿠마나(Cumaná)에서 식민지가 되었다. 이들 베네수엘라 동부는 뉴 안달루시아에 통합되었다.

16세기 초부터는 산토 도밍고아우디엔시아로부터 관리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의 대부분이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la Nueva Granada)에 속하게 되었고,

1776년 이후로는 도독령(Captaincy General)으로 개편되었다.

잇따른 봉기의 실패 후, 베네수엘라는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던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장군의 지휘 하에

1811년 7월 5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어쨌거나, 1812년 카라카스 지방의

파괴적인 지진과 야네로(llanero)의 반란으로 베네수엘라의 첫번째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1813년 8월 7일에 선언된 베네수엘라의 두번째 공화국은 수개월 간 지속되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했다. 1819년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대 콜롬비아 공화국을

이루다가 1830년에 분리를 선언하였다. 콜롬비아로부터는 1845년에 승인을 받았다. (베네수엘라-역사)

 

1802 - 러시아 해군 제독 나히모프(Nakhimov, Pavel) 출생

나히모프 [Nakhimov, Pavel Stepanovich, 1802.7.5(구력6.23)~1855.7.12(구력6.30)]

러시아의 해군 제독.

크림전쟁러시아 함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818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22∼1824년 프리깃함() 크레이셀호()로 세계를 일주하였다. 크림전쟁에서는 1853년 11월 18일 시노프해전에서 터키함대를 격멸, 사령관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1854년 10월부터 코르닐로프 제독의 뒤를 이어 세바스토폴리 방위를 지휘하였다. 1855년 여름에 전사하였다.


 




(나히모프의 출생 사망 일자는 좀 더 검토해봐야 하겠습니다. ^.@) 

뉴턴

 

1687 - 아이작 뉴턴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판되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自然哲學의 數學的原理, 라틴어: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서양의 과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책의 하나로 여겨진다.

줄여서 ‘프린키피아(Principia)’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책에서 뉴턴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뉴턴의 운동 법칙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요하네스 케플러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알아낸 케플러 법칙을 위 법칙들로부터 유도해 낸다. 에드먼드 핼리도 이 책을 바탕으로 1530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났던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해, 이 혜성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일정한 주기에 따라 1750년대 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견했다. 뉴턴도 핼리도 죽은 뒤인 1758년

수수께끼 같은 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핼리 혜성이다.

제1편은 운동에 관한 일반적 명제를 논술하였고, 제2편은 매질속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고, 마지막 제3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궤도등의 행성의 운동을 증명하였다.

뉴턴은 그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개발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기하학적인 증명 방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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