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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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6 - 프랑스의 역사가 블로크(Bloch, Marc) 출생
블로크 [Bloch, Marc, 1886.7.6~1944.6.16]
프랑스의 역사가.
역사연구에 다른 학문분야를 폭넓게 적용하는 접근방법으로 20세기 역사서술에 혁명을 가져왔다.
고대사 교수의 아들이었던 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육받고(1904~08) 가르치면서 라이프치히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1908~09). 제1차 세계대전중 프랑스 보병으로 복무(1914~19)하면서 뛰어난 무훈을 세워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1919~36). 첫번째 중요한 저서인 〈영국과 프랑스에 있어서 왕권의 초자연적 성격에 관한 연구 Les Rois Thaumaturges:Étude sur le caractère surnaturel attribué à la puissance royale, particulièrement en France et en Angleterre〉(1924)는 왕이 질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중세적 믿음에 대한 연구이다. 1929년 동료인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근대사 연구에서 영향력 있는 평론지 〈경제 사회사 연보 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를
창간하고 공동편집을 맡았다(1929~38). 2번째 저서 〈프랑스 농촌사 Les Caractères originaux de l'histoire rurale française〉(1931)는 프랑스 농촌의 사회사로 전래 기록과 역사적 자료뿐 아니라 수확방식과 농경법 등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한 책이다. 1936년에는 소르본대학교의 경제사 교수로 임명되었다. 3번째 주저인 〈봉건사회 La Société féodale〉(1939)에서는 유럽 봉건제에 대한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1939년 군으로 복귀해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한 뒤에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944년 붙잡혀 총살형을 받았다.
사후에 〈이상한 패배:1940년에 작성된 증거 문서 L'Étrange défaite:Témoignage écrit en 1940〉(1946)·〈역사가를 위한 변명 Apologie pour le métier d'historien〉(1949) 등이 출판되었다.
2) 1854 - 독일의 물리학자 옴(Ohm, Georg) 사망
옴 [Ohm, Georg (Simon), 1789.3.16~1854.7.6]
에를랑겐 출생. 기계와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에를랑겐대학에 입학했으나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가 고드슈타트 ·뇌샤텔 등지에서 교사를 하면서 1811년 학위를 받았다. 1826년 베를린에서 실험에 전념,
얼마 후 ‘옴의 법칙’을 풀이한 논문을 발표, 이듬해에는 《갈바니회로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1827)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노작은 한동안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833년 뉘른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윽고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를 통하여 영국학자들에게 옴의 업적이 알려져, 1841년 왕립학회는 최고의 영예인 코프리상을 수여했다. 이것을 계기로 독일 학회에서도 인정받아,
1841년 뮌헨대학 초청교수, 1849년 정교수에 취임했다. 전기저항의 단위 ‘옴’은 그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3) 1758 - 교황 클레멘스 13세, 248대 로마 교황 취임
교황 클레멘스 13세(라틴어:Clemens PP. XIII, 이탈리아어:Papa Clemente XIII)는 제248대 로마 교황(재위: 1758년7월 6일 - 1769년2월 2일)이다. 세속명은 카를로 델라 토레 레초니코(이탈리아어:Carlo della Torre Rezzonico)이다.
생애
1693년 3월 7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볼로냐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파도바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14년 로마의 외교관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2년 후에 사제가 된 뒤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리에티와 파노의 지사로 일한 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1737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1743년 파도바의 교구장이 되어 모범적인 생활을 하여 훌륭한 사목자라는 평을 받았다. 파도바에서는 성인(il santo)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1758년의 콘클라베에서 여러 쟁쟁한 후보자들을 물리치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접하게 되었다. 문제는 유럽의 군주들이 더는 교황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페브로니아니즘과 이신론이 등장하여 정통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회를 추방하기 위하여
결속되어 있었다.예수회 추방 운동은 클레멘스 13세를 늘 괴롭혔다. 1759년 포르투갈의 재상 폼발, 1764년에는 프랑스, 1767년에는 에스파냐, 나폴리, 파르마 등지에서 예수회 추방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클레멘스 13세의 수명을 단축시킨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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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96 -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Nikolai I) 출생
니콜라이 1세 [Nikolai I, 1796.7.6∼1855.3.2]
니콜라이 1세는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파벨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알렉산드르 1세가 갑자기 죽은 후,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진압하고 1825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로 인해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실시해 출판물 검열을 엄격히 하고, 대학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 또한 러시아인과 유럽인의 여행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비밀경찰로써 질서유지를 꾀했다. 대외정치 역시 공격적이어서 폴란드와 헝가리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이란과 터키를 간섭했다. 그 때문에 터키를 돕는 영국·프랑스와 충돌하게 되었고, 1853년 크림 전쟁이 일어났다. 화폐제도의 개혁, 철도의 건설, 기술 학교의 개설 등 내정 개혁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농노제 폐지를 두려워했고 모든 독립적 발안과 대중의 참여에 의혹을 품어 전제정치 유지를 결심한 니콜라이와 그의 정부는 절실하게 필요한 근본적 개혁을 도입할 수는
없었다 "내 힘이 다 할 때까지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리라."
- 니콜라이 1세
2) 1878 - 핀란드의 시인 레이노(Leino, Eino) 출생
레이노 [Leino, Eino, 1878.7.6~1926.1.10]
본명은 Armas Eino Leopold Lönnbohm.
핀란드 시형식의 대가로서, 환상적이며 신비적인 것에서부터 시사 문제를 다룬 소설·소책자·비평기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다. 헬싱키대학에서 공부한 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는데, 특히 자유주의 신문인
〈페이벨레티 Päivälehti〉·〈헬싱긴 사노마트 Helsingin Sanomat〉에서 주로 문학과 연극에 대한 평론을 썼다. 남은 일생을 자유분방하게 보냈으며 단테의 〈신곡 Divina Commedia〉을 비롯한 많은 고전 작품들을 핀란드어로 번역했다.
첫 시집인 〈3월의 노래 Maaliskuun lauluja〉(1896)에서는 명랑한 분위기와 자유롭고 리듬감있는 문체를 볼 수 있는데, 동료시인인 J. L. 루네베리와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핀란드 민요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차츰 시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면서 고독과 독백의 시, 러시아 압제기에 대한 비판적이고 애국적인 시, 황량한 발라드의 주제, 신화적인 모티브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신화적인 모티브가 우세한 그의 주요작 〈헬카의 찬가(讚歌) Helkavirsiä〉(1903~16)에서는 민담의 정신과 운율이 되살아났다. 그밖의 시집으로는 〈겨울밤 Talviyö〉(1905)·〈서리 Halla〉(1908), 역사시
〈탐정 시모 Simo Hurtta〉(1904~19) 등이 있다. 또한 희곡집으로 〈가면 Naamioita〉(1905~11)이 있으며 당대의 소설·동물우화·수필 등을 수집·편찬했다. 작품의 질은 고르지 않으나 그의 수작들은 가장 손꼽히는 핀란드 서정시들에 속한다.
3) 1823 - 오스만 제국의 학자, 정치가 아메드 베피크 파샤(Ahmed Vefik Pasa) 출생
아메드 베피크 파샤 [Ahmed Vefik Pasa, 1823.7.6~1891.4.2]
오스만 제국의 학자·정치가.
1877년 오스만 제국 최초의 의회가 소집되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투르크 학문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외교관
가문에서 태어난 아메드 베피크 파샤는 다뉴브 공국들을 담당하는 제국 행정장관(1849)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페르시아 및 프랑스 주재 대사를 지냈다. 그는 투르크의 첫번째 국회(1877) 의장을 맡았으며, 1878, 1882년에 잠시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1879년에 부르사 총독이 되어 공중위생과 교육·농업 분야에서 중요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고, 오스만 제국 최초의 극장을 세웠다.
아메드 베피크 파샤는 한가할 때면 몰리에르의 희곡을 번역하고 투르크 사전과 역사와 지리에 관한 책자들을 편찬했고, 1876년에는 〈투르크인의 언어 Lehçe-i Osmanî〉라는 책을 출판했다. 축소판 사전인 이 책은 순수한 투르크어를
강조했고, 다른 투르크 학자들의 연구에 토대를 제공했다. 1882년 12월부터 그는 아브둘아미드 2세의 명령으로
보스포루스 해협 연안의 루멜리 이사르에 있는 집에 연금되었다. 그의 장서는 빚을 갚기 위해 모두 팔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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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3 - 스웨덴의 생화학자 테오렐(Theorell, Axel Hugo) 출생
테오렐 [Theorell, Axel Hugo (Theodor), 1903.7.6~1982.8.16]
스웨덴의 생화학자.
살아 있는 세포에서 산화반응을 촉진하는 효소에 관한 연구로 효소작용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생물체가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영양물질을 이용하는 과정을 발견해 195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웁살라대학교의 생화학 조교수(1932~33, 1935~36)로 재직했고, 1932년 적근(赤筋)에서 발견되는 산소 운반단백질인
미오글로빈 결정을 최초로 분리했다. 1933~35년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그는 오토 바르부르크와
공동으로 효모로부터 당(糖)의 전환에 관여하는 고황효소(old yellow enzyme)를 순수하게 분리했다.
그리고 이 효소가 비단백질성 조효소인 황색의 리보플라빈(비타민 B2) 인산염과 단백질인 주효소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1934년 리보플라빈 분자의 특정 부위에 수소원자가 결합함으로써 포도당의 산화를 촉진시킨다는 그의 발견으로 효소의 작용이 특정 원자의 화학적 활성에 기인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1937년 스톡홀름의 노벨 의학연구소에 있으면서 철을 포함하는 비단백질 포르피린과 주효소 사이의 화학적 연결을 밝힘과 동시에 산화효소인 시토크롬
c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수소전달효소인 알코올 탈수소효소에 관한 그의 발견은 고감도 혈액검사법의 발전을 가져왔다. 노벨상 외에도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또한 스웨덴 왕립과학 아카데미와 국제 생화학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2) 1415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화형
위클리프 [Wycliffe, John, c.1330~1384.12.31]
후스 [Hus(Huss), Jan(John), c.1372~1415.7.6]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가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는 살아서 화형당했지만 위클리프는 이미 죽어있던 사람이었으므로
시신이 파헤쳐져 화형에 처한 다음 강물에 던져졌다.
위클리프는 기존 교회질서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었고, 후스는 루터보다 1백년 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설교를 열정적으로 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의 종소리'를 울린 사람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16차 공의회로, 목적은 주로 세명의 교황으로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를
재통일하라는 것이었으나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을 조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의회는 교회의
전체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내용의 교령 '사크로상타'를 공포하고,
또 교회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공의회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45개 조항과 후스의 30개 조항을 단죄한 뒤, 이들을 구제가 불가능한 이단으로 공포하고
세속 권력에 넘겨 화형당하게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더욱 강력한 개혁조치를 취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많은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07 - 멕시코의 여류 화가 칼로(Kahlo, Frida) 출생
칼로 [Kahlo, Frida (de Rivera), 1907.7.6~1954.7.13]
멕시코의 화가.
본명은 Magdalena Carmen Frida Kahlo y Calderón.
원시주의적인 양식으로 그린 강렬하고 화려한 색조의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그녀 자신은 초현실주의와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종종 초현실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1929년 벽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다(1939년 이후 별거했다가 1941년 다시 결합했음). 1925년 버스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고 35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는 동안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로는 몇 년 전부터 알게 된 리베라에게 작품들을 보여주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그림을 계속 그리도록 격려해주었다. 그녀는 결혼 후 미국의 여러 도시들에서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리베라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1930~33). 1938년에 만난 초현실주의의 기수인 앙드레 브르통은 그녀의 작품에 좋은 평을 해주었다. 브르통과 마르셀 뒤샹은 미국과 유럽에서 그녀의 작품전시회가 열리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3년 교육부 부설 미술학교인
'라 에스메랄다'에 회화과교수로 임명되었다. 코요아칸에 있던 그녀의 집은 현재 '프리다 칼로 미술관'이 되었다.
1908 - 미국의 탐험가 피어리(Peary, Robert), 북극 탐험위해 뉴욕 출발 피어리(Peary, Robert E(dwin), 1856~1920) - 펜실베이니아주(州) 크레슨 출생. 1881년 미국 해군의 토목기사가 되어 니카라과 운하의 조사대장이 되었다. 1886년에는 그린란드를 탐험, 1891∼1892년에도 재차 탐험하였다. 그 결과 극지빙하(極地얼음 빙, ㉠얼음 ㉡기름 ㉢지방 ㉣식히다 ㉤얼다">氷河)가 북위 82 °까지 연장되어 있음을 판명하고, 빙하의 형성, 에스키모의 민속(民俗) 등에 대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 후 북극을 탐험하고, 1898∼1902년에는 북위 84 °17', 1905∼1906년에는 북위 87 °6'에 도착하고, 1909년 4월 6일 드디어 북극점에 도달하였다. 1891년의 탐험대원이었던 F.A.쿠크가 피어리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착하였다고 주장하여 논쟁이 있었으나, 과학적인 조사결과 피어리의 주장이 옳다고 입증되었다. 1911년 소장이 되어 퇴역하였다. 저서에 《거대한 얼음을 넘어 북쪽으로 Northward over the Great Ice》(1898) 《북극에 가까이 Nearest to the Pole》(1907) 《북극 The North Pole》(1910) 등이 있다. |
1893 - 프랑스 작가 모파상(Maupassant, Guy de) 사망
모파상 [Maupassant, Guy de, 1850.8.5~1893.7.6]
1893년 7월 6일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이 파리 교외의 한 정신병원에서 43세로 숨졌다. 모파상은 한 해 전에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노르망디의 미로메닐에서 태어난 모파상은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중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한다. 전쟁은 그를 극심한 염전(厭戰) 감정에 빠지게 해 그의 발걸음을 문학으로 돌리게 했다.
모파상의 문학 이력에는 두 사람의 선배 문학인이 등장한다. 바로 플로베르와 그의 소개로 알게된 에밀 졸라이다.
플로베르는 그에게 직접 문학을 가르쳤고, 졸라는 자신이 주도하는 자연주의 문학동인 '메당파'에 모파상을
끼워넣음으로써 소설가 모파상을 탄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1880년 모파상은 졸라를 포함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 야화'에 자신의 출세작인 중편소설 '비곗덩어리'를 싣는다. 이 작품은 날카로운 인간관찰과 짜임새 등에서 어느 작품보다도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이로써 그의 문단 데뷔를 확고히 했다. 1883년에는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발표함으로써
문명(文名)을 더욱 높였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까지 평가받았다.
27세부터 신경증세를 앓아왔으나 고통속에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아미'(1885) '몽토리올'(1887) '피에르와 장'(1888) '죽음처럼 강하다'(1889) '우리들의 마음'(1890)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그의 작품에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어두운 염세주의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그의 무감동적인 문체를 통해 그의 작품 전체에 묘한 고독감을 감돌게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그의 질병과 맞물려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1885 -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 광견병 치료 성공
1885년 7월 6일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Pasteur, Louis, 1822~1895)가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조제프 메스테르라는 9세 된 소년의 생명을 구했다. 이로써 광견병을 예방·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파스퇴르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1882년 당시 광견병의 예방적 치료를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광견병에 걸린 동물의 타액을 접종하는 실험을 한 뒤에 이 바이러스가 신경중추에도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광견병에 걸린
개의 연수 일부를 건강한 동물에 접종하면 광견병의 증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끝에
그는 접종에 사용할 수 있는 약화된 형태의 바이러스를 얻어냈다. 1888년 파스퇴르는 광견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했다. 파스퇴르의 광견병 연구는 의학자 집단과 언론으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밖에도 파스퇴르는 발효·저온살균·맥주·탄저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1859 - 스웨덴의 시인, 산문작가 헤이덴스탐(Heidenstam, Verner von) 출생
헤이덴스탐 [Heidenstam, (Carl Gustaf) Verner von, 1859.7.6~1940.5.20]
스웨덴의 시인·산문작가.
그는 스웨덴의 자연주의 운동에 반발하여 환상, 아름다움, 국민적 주제 등을 다루는 문학의 부흥을 요구했다.
19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젊은시절의 대부분을 중부 및 동부의 지중해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첫번째 시집 〈성지순례와 방황의 세월 Vallfart och vandringsår〉(1888)은 여러 남쪽 나라의 우화와 상당 부분의 동양 철학이 수록된 작품으로, 스웨덴 대중들 사이에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수필 〈르네상스 Renässans〉(1889)에서 처음으로 스웨덴의 단명했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운동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새로운 스웨덴 문학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중에, 2권의 시집 〈시 Dikter〉(1895)·〈신 시집 Nya dikter〉(1915)을 냈는데, 이 마지막 시집의 시 대부분은 〈스웨덴 계관시인:베르너 폰 하이덴스탐 시선 Sweden's Laureate:Selected Poems of Verner von Heidenstam〉(1919)에 번역되었다.
역사소설도 몇 편 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카롤리네르나 Karolinerna〉(2권, 1897~98)·〈폴쿵스의 나Folkungaträdet〉(1905~07)이다. 20세기초 그의 작품은 대중적 호소력을 잃었고 말년의 25년간은 실제로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1837 - 불가리아의 혁명지도자 레프스키(Levski, Vasil) 출생
레프스키 [Levski,Vasil, 1837.7.6~1873.2.6]
불가리아의 혁명지도자.
본명은 Vasil Ivanov Kunchev.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대항해 불가리아 해방투쟁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수사(修士)가 되었으나(1858~64) 곧 불가리아 해방투쟁에 뛰어들었고, 용감한 행동으로 레프스키('사자 같은'이라는 뜻)라는 별명을 얻었다. 레프스키는 세르비아에서 1862년과 1868년에 각각 조직된 불가리아 의용군 2부대를 통합했으나, 세르비아 정부에 실망하여 불가리아로 돌아가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혁명활동의 무대를 외국에서 자기 조국인 불가리아로 옮김으로써 불가리아 민족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869년 부쿠레슈티에서
류벤 카라벨로프와 함께 불가리아 중앙혁명위원회를 조직했고 전국 각지에 '사도(使徒)들'이라 불리던 위원회
행동대원들의 연대조직을 만들었다. 1872년 레프스키는 불가리아에서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중 투르크인들에게
체포되어 나중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1781 - 영국의 식민지담당 정치가, 싱가포르 건설자 래플스(Raffles, Thomas) 출생
래플스 [Raffles, Thomas Stamford, 1781.7.6~1826.7.5]
영국의 식민지담당 정치가·싱가포르 건설자. 14세 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동인도회사 사환으로 들어갔으며, 23세 때 능력을 인정받아 말라카해협에 위치한 영국의 새로운 식민지 피낭의 사무관보가 되었다. 그 후 인도 총독 민토에게 말라카의 중요성을 진언하여 자바 점령을 역설하였다. 당시 동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영국은 1811년 8월 프랑스-네덜란드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자바를 점령하였으며, 같은해 9월 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보인 래플스는 민토의 신임을 얻어 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 후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강제재배 ·
의무공출제도의 폐지, 지조(地租)제도의 채용, 노예해방, 사법제도의 제정 등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한편,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네덜란드 상역관(商易館) 탈취계획은 실패하였다. 1814년의 런던협정에 의하여 자바가
네덜란드에 반환되자 1818년 수마트라의 벵쿨렌으로 가서 영국의 세력확장에 진력하였다. 그 동안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자유항(港)을 건설, A.스미스 이론의 실천가로서 근대식민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만년에는 노예해방조치가 위법이라는 법원의 문책을 받았으며, 1826년 뇌종양으로 죽은 후에는 미망인에게 추징금이 과해지는 등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
저서로 자바연구에 관한 고전적 명저로 알려진 《자바사(史)》가 있다.
1747 - 미국 해군의 영웅 존스(Jones, John Paul) 출생
존스 [Jones, John Paul, 1747.7.6~1792.7.18]
미국 해군의 영웅. 본명은 John Paul.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 동부해안에서 벌어진 해전(1779. 9. 23)에서 영국 군함을 크게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스코틀랜드 상선 선주인 존 영거 밑에서 12세 때 견습선원으로 일을 시작한 존스는 선상급사로 버지니아로 가는 배에 승선하여 버지니아 프레더릭스버그에서 형 윌리엄을 만났다. 1766년 영거가 사업에 실패하자 자메이카 선적의 노예선에서 1등 항해사 자리를 얻었다. 2년 후 노예무역을 청산하고 스코틀랜드로 가는 배를 탔다. 항해 도중 선장과 1등 항해사가 열병으로 죽자 배를 지휘해 무사히 귀항시켰고 이 공로로 선장에 임명되었다. 1772년 서인도제도에서 배를 1척 구입했지만 다음해 선상 폭동을 맞게 되었다. 그는 주모자를 살해한 뒤 재판을 모면하려고 서인도제도에서 도망해 이름을 존 폴 존스로 바꾸었다. 2년 후 프레더릭스버그로 돌아왔고 독립전쟁이 터지자 필라델피아로 가서
신설된 대륙 해군의 대위로 임명되었다.
이세크 홉킨스 준장이 지휘하는 소규모 함대의 기함인 '앨프레드호'에 배속되어 바하마에서 활약했으며, 귀환중 벌어진 영국배 '글래스고호'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76년 '프로비던스호'의 지휘를 맡아 8~10월에 버뮤다에서 노바스코샤에 이르는 대서양 일대를 항해하면서 영국 프리깃함을 2차례 기습공격해 8척의 배를 나포하고 그 이상을 침몰시키거나 불태웠다. 같은 해 '앨프레드호'를 지휘하면서 5, 6척의 배를 나포·예인하여 귀항했다. 미국 의회가 그에게 새로 건조한 '레인저호'의 지휘를 맡기자(1777. 6) 세인트조지 해협과 아일랜드 해 사이를 기세당당하게 항해하면서 수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1778년 5월 8일 브레스트에 입항하여 프랑스인으로부터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1779년 8월 '본옴 리처드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4척의 작은 배를 대동하고 영국의 섬들 주위를 항해했다. 9월에 이 소함대가 영국 군함 '세라피스호'와 '카운티스 오브 스카버러 호'의 호위를 받고 있던 발틱 상선단을 저지했다. 그후 벌어진 전투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 가운데 하나이다. 3시간 30분간 계속된 맹렬한 함포사격전의 초기단계에서 존스는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적들에게 "나는 아직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전사자가 많았지만 대승을 거둔 그는 세라피스호가 항복하자 부하들과 함께 그 배에 승선했다. 전투중에 입은 손상으로 본옴 리처드호는 얼마 후 침몰하고,
존스는 세라피스호와 나포한 카운티스 오브 스카버러 호를 몰아 네덜란드로 항진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그에게 황금 손잡이가 달린 칼을 하사했으며 그를 프랑스의 기사로 임명했다.
1787년 미국 의회가 수여하는 금메달을 받은 후 공무를 띠고 덴마크로 급파되었으며, 해외에 있으면서 러시아 해군 소장의 지위를 수락했다. 그의 인생에서 이 시기는 내내 힘든 때였다. 여러 차례 공로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모함에 빠져 괴로움을 겪기도 했다. 1790년 쓰라린 심정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와 이내 숨을 거두었으며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혔다. 1세기가 지난 뒤에야 미국 전함이 유해를 미국으로 송환했으며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그의 무덤은 국가적 성지가 되었다.
1599 - 조선 중기 명장 권율(權慄) 사망
권율 [權慄, 1537~1599]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장군이 1599년 7월 6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62세였다. 장군은 1537년(중종 32년) 영의정 권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45세인 1582년 식년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목사로 부임한 권율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를 모집, 곽영, 이광 등과 함께 4만명의 군사로 경기도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광주로 되돌아온 권율은 의병을 다시 모집, 3천여명으로 충남 이치에서 적과 싸워 고바야카와의 대부대를 참패시켰다. 이 승리로 왜군들은 그후 다시 전라도 지방을 넘보지 못했으며, 이 싸움은 임진왜란 7년에 걸친 전투중 육군의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힌다.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 군사와 승병 8천여명을 이끌고 서울 탈환에 나섰다. 서울로 향하던 중
수원의 독왕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은 경기-충청-전라도의 관군 및 의병 총지휘관이 되어 1593년 2월 28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왜군들은 북쪽에서 서울로 퇴각 중 경기 벽제관에서
명나라 군사에 승리한 터라 사기가 드높은 때였다.
마침내 2월 12일 왜군들은 3만여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에 쳐들어왔다. 왜군은 이날 하루에만 9회에 걸쳐 산성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 2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승리로 권율은 도원수의 자리에 올랐다.
1535 -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More, Thomas) 처형
모어 [More, Thomas, 1477.2.7~1535.7.6]
소설 '유토피아'의 작가1477.2.7~1535.7.6] 토마스 모어가 1535년 7월 6일 58세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는 법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재학중이던 옥스퍼드대를 중퇴하고 런던법학원에 입학했으나, 대학 재학중에 르네상스 문화운동을 접하면서 인문주의자와의 교류를 시작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1511)도 모어의 집에
기거하며 쓴 것이다. 인문주의자란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을 연구하고 새로 편찬하던 학자들을
뜻한다. 법학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으며 의회에도 진출했다.
1515년 통상외교문제로 네덜란드에 건너간 모어는 임무를 끝마치고 그곳을 여행하며 이상적 국가상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쓰기 시작해 이듬해 귀국한 후 완성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어원으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이상향과 동일시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유토피아'는 미지의 땅에서 실현된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교육평등 등을 묘사함으로써 중세말기의 유럽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작품은 그의 사후 1551년에 영역됐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아 1532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인문주의자로 신랄한 언어를 서슴지 않았으나 동시에 경건한 그리스도교이며 이름난 명문가이자 논쟁가로 서민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1935년 로마교황은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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