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05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05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62 - 알제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2년 오늘 아프리카 북서부 나라 알제리가 독립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지 132년 만의 일이다.
1954년 11월 4일 발족한 민족해방전선(FLN)이 8년 동안 벌인 독립운동이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알제리의 무장 독립투쟁 기간에 무려 150만여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드골 정부는 앞서 이틀 전인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했다.
수도 알제의 시민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독립이 선포되자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2) 1987 - 한국의 민주화운동 이한열(李韓烈) 사망

이한열 [李韓烈, 1966.8.29~1987.7.5] 

연세대생 이한열군 사망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이한열군이

27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5분 끝내 숨을 거뒀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 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9일

연세대 교문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한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다.

 

3) 1975 - 아서 애쉬, 윔블던 테니스대회 결승전 승리

[역사속의 인물] 테니스 인종편견 깬 아서 애쉬

1975년 오늘 윔블던 테니스대회 결승전에서 ‘인종 반란’이 일어났다. 1877년 이 대회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흑인 우승자가 나온 것이다. 그 주인공은 아서 애쉬. 그가 테니스의 인종장벽을 깬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968년 US오픈 우승, 1970년 호주오픈 우승으로 흑인도 테니스를 잘한다는 것을 입증한 바 있다. 윔블던 우승은

그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테니스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그러나 흑인은 대부분 가난하다. 애쉬는 흑인이 테니스를 못하는 것이 인종적 결함이 아니라 가난 때문임을 보여줬다.

3개 메이저대회를 포함, 통산 13개의 타이틀을 차지했고 두번이나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1943년 버니지아주 리치먼드에서 가난한 경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교 재학중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소개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테니스 장학생으로 UCLA에 입학했으며 국가대항 테니스대회인 데이비스컵에 흑인 최초의 미국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1975년 심장질환으로 은퇴한 뒤에는 인권운동, 자선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많은 미국인의

존경을 받았다. 심장수술 도중 에이즈에 감염돼 1993년 사망했다. 뛰어난 재능과 인간미를 겸비한 따뜻한 사람이였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07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6976&yy=2010

                  1)                                     2)                                         3)

 

1) 1955 - 한국의 로빈손 크루소 조병기 귀국

[역사 속의 인물] 한국판 '로빈슨 크루소' 조병기

1955년 7월 5일, 남태평양의 베레레우 섬에서 한 동양인 남자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넘겨졌다. 그는 충북 단양 출신의 조병기 씨였다. 조사 결과 그는 1942년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베레레우 섬에 온 지

4개월 뒤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전멸하자 다른 두 명의 한국인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가 13년 동안이나

그 섬에서 살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미군에 사로잡히면 귀와 코를 자르고 혀를 뽑아 죽인다"는 일본군의 말에 속아 도망쳤던 것이다.

그는 미군이 주둔하고 원주민이 2천 명이나 되는 그 섬에서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고 숨어 지냈다. 같이 도망친 2명마저 행방불명되고 홀로 남은 그는 달팽이와 무 등으로 연명하면서 토굴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왔다. 유리병 속에

나뭇가지를 꺾어 넣어 날짜를 계산했으며 우연히 주운 미군 성냥으로 지핀 불씨를 11년 동안이나 꺼트리지 않았다.

그는 미군에 잡힌 지 두달 뒤인 1955년 오늘, 마침내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 생후 수개월이던 아들은

열 네살이 돼 있었지만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는 이미 재가한 상태였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7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5848&yy=2011

 

2) 1946 - 비키니 수영복 등장

[어제의 오늘]1946년 비키니 등장

ㆍ“차마 못 보겠다” 세상이 경악

폭발하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눈부신 여체가 한껏 멋을 내는 비키니의 계절이 돌아왔다.
비키니로 대표되는 수영복의 기원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만큼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기원전 350년쯤 그리스의 여성들이 수영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중세 들어 여성의 수영복은 사회악으로

취급됐다. 여성이 속살을 보이는 행위는 죄악으로, 수영 자체가 금지되다시피 했다. ‘정조대’라는 희대의

물건이 만들어진 시대이니 그럴 만도 하다.
수영복이 하나의 의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들어서다. 당시 유럽에서는 의사들이

우울증 치료를 위해 환자들에게 수영을 권했고, 수영은 일종의 놀이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여성의 수영복은 그냥 옷이었다. 여성들은 수영할 때면 코르셋에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1900년대 초 수영복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것도 하이넥 칼라에 긴 소매, 무릎 밑으로 길게 내려오는 바지 등

외출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도록 몸에 붙게 입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러던 1946년 7월5일,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 디자이너 루이 레아가 새로운 개념의 투피스 수영복을 발표했다.

등과 배는 훤히 드러나고 손바닥만한 천이 최소한의 가릴 곳만을 덮고 있는 수영복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발표되기 며칠 전 미국은 남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원폭을 투하하는 핵실험을 했다.

이 때문에 지구촌의 눈과 귀는 온통 비키니 섬에 쏠렸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을 선보이려던 루이

레아로서는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낼 뭔가가 필요했다. 루이 레아는 고심 끝에 자신의 작품에다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낚시질’을 한 셈이다. 그의 예상대로 비키니는 원폭 못지않게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심각한 노출에 로마 교황청은 ‘부도덕한 옷’이라고 비난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착용을 금지시켰다.
심사위원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1951년까지 미스월드 콘테스트에서 착용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비키니 몸매 성형수술’이 생겨날 정도로 비키니는 많은 여성의 꿈이 됐다.
한편 ‘동방예의지국’ 한국에서 비키니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61년의 일이다. 그 해 백화사라는 업체가

여성 해방의 상징이자 젊음의 새로운 문화코드라며 비키니를 선보였다. 그러면서 내세운 브랜드명이 ‘상어표’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042126365&code=100100&s_code=ap005

 

3) 1943 - 제2차 세계대전, 쿠르스크 대전차전 개전 (7.5~8.23)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 러시아어:Курская битва게르크샤 비토바)는 성채 작전(독일어:Unternehmen Zitadelle)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었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공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독일군은 오랫동안 이 전투를 준비하여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 곧 반격을 개시하여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 벨고로트, 하르코프를 재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여름에 승리한 전투로는 최초였으며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어 회복에 시일이 걸렸으며,

이후로 독일군은 두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련의 파상공세에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                                            2)                                       3)

 

1) 2004 - 유로2004 그리스 포르투갈에 1대 0으로 우승 

2004년 7월 5일 유로2004 포르투갈전에서 그리스가 포르투갈을 꺾고 ‘앙리 들로네’ 트로피에 입을 맞추었다.

2004유럽축구선수권 전에 도박사들이 점쳤던 이 나라의 우승 확률은 100대1. 라트비아 등과 함께 16개국 중 최하위권으로 꼽혔다. 이런 그리스가 처음으로 유럽 축구의 왕좌에 올랐다. 1980대회에서 1승도 못하고 탈락(1무2패)한 뒤

24년 만에 출전해 축구사를 새로 쓴 것. 이번 대회엔 첫 기록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리스는 개막전과 결승전서 개최국과 만나 다 이긴 첫 번째 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번 대회서 매 경기 한 골 이상씩 넣은 유일한 팀이기도 했다.

우승은 기적이 아니었다. 후반 12분, 바시나스가 오른쪽에서 코너킥을 올리자 카리스테아스가 달려들며 머리로

받아 넣은 골이 1대0 승리를 결정지었다. 독일 출신인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감독은 모국이 아닌 나라를 정상에 올린

첫 외국인 감독으로 등록했다. 역대 최고령 사령탑(65세) 기록도 바꿨다.

이로써 2004아테네 올림픽 개최국인 그리스는 2004년 세계 스포츠의 주인공이 됐다. 반면 포르투갈은 개막전에서 진

첫 개최국이고, 결승까지 오르고도 우승하지 못한 첫 개최국이라는 불명예 기록만을 세우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스콜라리 감독은 2위 메달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2) 1957 - T-33 제트기 인수식
1957년 오늘 수원 공군기지에서 우리 나라와 미국의 고위급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T-33 제트기 인수식이 열렸다.
우리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T-33 9대를 넘겨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의 뜻으로 미 공군 장성에게 표창장을 주고 우리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게 군기도 수여했다. 

 

3) 1975 - 가봉 봉고 대통령 방한

경회루 리셉션에, 서울대 명예박사에, 자동차 이름도 헌정

아프리카 서부, 적도 남단에 위치한 가봉 공화국은 지난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1962년에는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했지만 1974년 북한과 도 외교관계를 시작했다.
신생 독립국들이 속속 유엔에 가입하고 비동맹 그룹이 친북노선을 노골화하던 무렵, 냉전 대결 외교의 첨병이던 한국은 가봉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치열한 외교전 끝에 한국 정부는 1975년 7월 가봉 공화국의 봉고 대통령을 국빈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위원장이고 각부 장관이 위원이 되는 '국빈영접 방한 준비위원회'까지 열렸다.

그리고 희극은 봉고 대통령이 입국한 김포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가봉이 어디 있는지 봉고가 누군지도 모르는 1400명의 정관계 인사들이 김포공항에 나와 영접했고

연도에는 수십 만 명의 시민들이 동원돼 힘차게 가봉국기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봉고 대통령의 방한 첫날 밤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주최로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김종필 국무총리 등 정부 3부 요인이 모두 참석한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까지 참석했을 정도.
다음 날 경희 의료원 시찰에 나선 봉고 대통령은 침술 치료를 받고 보약을 처방받는다. 평소 몸 챙기기에 지극 정성인

봉고 대통령을 위한 한국 정부의 배려였던 것. 정부는 심지어 한의사를 가봉에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기아자동차가 신형 승합차를 출시하면서 '봉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압권. 봉고 대통령에 앞서 방한했던

포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물론,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방한한 그 어떤 외국 정상도 이같은 환대를 경험하진 못했다.
방한 마지막 날 만찬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특히 유엔총회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에 대해 계속적으로

지지를 해주신 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서 본인의 심심한 경의와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고 말했다.
공전절후의 환대 이유가 이 문장에서 설명된 것. 당시 뜨거운 남북외교전에서 북한은 콩고를,

남한은 봉고를 아프리카 돌파구로 삼았던 것이다.
봉고 대통령은 3박 4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그해 7월 8일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떠났다가 도로 돌아와서

몇 시간을 더 머문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당시 '성접대설'과 맞물려 갖가지 뒷말을 낳았다.
또한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가봉을 방문했을 때는 가봉 군악대가 한국의 애국가가 아닌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봉'의 '봉고'대통령을 아시나요?")
윤태곤/기자  2007-08-10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20070810114634 

 

2007 - 외계인을 믿는 사람들-로즈웰 축제 (5~8일)

"민주당이 집권하면 외계인과 UFO 관련 기밀이 모두 공개될 것이다." UFO와 ET현상을 정치 문제로 다루어 온 스티븐

배셋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지금 같은 정치상황이라면, 힐러리 클린턴 뉴욕 상원의원이나 리처드슨 뉴멕시코주지사 등에겐 이미 모두 보고됐을 것"이라며, "비밀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며,

진실의 엠바고(보도제한)는 끝나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UFO 문제를 다룬 < UFO와 국가안보>의

저자 리처드 돌란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려 하겠냐"며 "그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UFO의 추락현장에서 수거한

금속 파편이나 외계인 시체 일부로 '재생 금속' 따위의 기술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란 의혹도 제기했다.

미 공군, 60년 전 UFO·외계인 주검 입수
로즈웰 사건 60주년 기념 축제도 열려

사람들은 이런 주장들을 '헛소리'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5일부터 8일까지의 뉴멕시코주 로즈웰시에서는

그처럼 '까칠하게' 대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간 이곳에선 최소 3만5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로즈웰 사건

6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에 참석했다. UFO 관련강연 및 세미나가 열려 진지한 면을 보이는 한편, '외계인 변장대회'나

 '외계인 잡기 놀이' 등으로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기도 했다.

로즈웰 사건은 1947년 7월 미국 전역에서 관측됐다는 보고가 잇달았던 UFO가 5일 로즈웰에 추락했으며, 추락 잔해와

사망한 탑승 외계인 주검을 미 공군이 입수했다는 내용이다.

미 제8공군은 추락 당일 '공군에 붙잡힌 비행접시'라는 보도자료를 내, "비행접시 소문은 사실"이었으며,

"제8공군 509폭격대 정보장교가 비행접시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정보장교로 알려진 제시 마르셀 소령은

"금속이 웨하스처럼 얇았지만 매우 단단했다"며, "매우 가벼운데도 칼에 잘리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추락한 것은 기상관측 기구”
24시간 뒤, 말바꾼 군 당국

"추락한 것은 비행접시가 아닌, 기상관측 기구였다"고 밝히는 새로운 보도자료를 내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군과 미 정부는 줄곧 같은 입장을 취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1994년 회계감사원의 질의에 대해 공군성장관실이 <로즈웰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기상관측 기구가 수행하던 작전이 '기밀'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소련이 핵실험을 실시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센서를 달아 기구를 띄웠는데 추락했다"는 내용이다.

또 현장에서 발견된 주검은 기구에 실려있던 "실험용 마네킹"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죽고 나서야 밝힐 수 있었던 또 다른 진실
“나는 UFO와 외계인을 봤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다른 내용을 알고 있었다. 당시 글렌 데니스라는 이름의 현지 장례업자는 추락 직후 군 당국으로부터 "어린이용 관을 몇개 준비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관을 만들어 부대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한 간호사가 "UFO가 추락했고 외계인이 발견됐다"는 얘기를 해줬다. 하지만 그는 그 간호사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또 최근에는 사건발생 60주년을 앞두고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공군에 붙잡힌 비행접시'란 보도자료를 냈다가, 24시간 뒤에 새로운 보도자료로 수정·발표했던 당시 공보장교 월터 호트 중위의 유서가 공개된 것이다.

그는 2005년 12월 15일 8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호트 중위는 2002년 작성된 이 유서에서, 그가 생전에 남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주어진 자료들을 보도자료로 취합해 배포했을 뿐" 등의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미 공군이 입수한 추락비행접시와 외계인의 육체를 봤다"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는 "격납고에서 달걀모양으로 생긴 15피트(약 4.5미터) 길이의 비행체와, 4피트(약 120cm) 정도의 키에 머리가 큰 작은 육체들을 봤다"고 적고, "이들이 그 비행체에서 나온 외계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기록했다.

현장에 대해서도 호트 중위는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동체의 잔해가 떨어진 지점과 동체가 추락한 지점이 달랐다"며, 사건 당시 "일반인들은 잔해 추락지점만 알았을 뿐, 동체 추락지점은 알지 못해 일부만 공개했다"고 기록했다.

결국 군 당국은 일반인들에게 이미 노출된 잔해 추락 지점만 공개하기로 하고, 동체 추락지점에는 군을 대거 동원해 현장의 잔해를 모두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군 당국 일각에서 비행접시 잔해를 기념품으로 수거했다'는 기존의

한 증언과 일치하는 내용이라 눈길을 끌었다.

 

전세계의 관심은 다시 로즈웰로

이 유언장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왔다. 영어권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선데이텔레그라프>가 지난 1일 '유언으로 다시 살아난 로즈웰 이론'이라는 기사로 이 소식을 다루고 온라인으로도 게재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콘텐츠 스크랩-공유 사이트 '딕닷컴'에서 2029회(8일 현재)의 '딕', 즉 스크랩을 받아 이 사건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을 반증했다. 한국에서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것은 연예계 소식이나 해외토픽 류의 뉴스를 주로 보도하는 인터넷매체

<팝뉴스>였다. <선데이텔레그라프>와 같은 루퍼트 머독계열의 <폭스뉴스> 기사를 인용해, <팝뉴스>는 '"로스웰 외계인은 사실", 사건 담당 미군 장교 '유언' 공개'라는 기사를 네이버 기준 3일 12시44분에 게재했고, 이 기사는 댓글이 2560개를 기록해 네이버 뉴스의 주간 최다 댓글 기사로 올랐다.

로즈웰 사건에 대해 UFO와 외계인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동시에 이들은 지난 60년동안 외계인을 향한 전세계적인 상상력에 '모티브'를 제공해왔다. <멘인블랙><스타워즈>

<엄마는 외계인>이나 미국 외계인 영화들은 물론, 한국의 <아기공룡 둘리>나 최근 영화화된 일본의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외계세계도, 그 생김새나 아이디어는 로즈웰에 출현한 비행접시·외계인과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로즈웰…외계인 진짜 있는 거냐

미 뉴멕시코주의 평온한 소도시 로즈웰은 60년전 UFO사건만 아니었어도 그저그런 인구 4만5천의 작은 도시였을 것이다. 지금 외계인을 신봉하는 이들은 로즈웰을 일종의 '성지'처럼 여기며 돌보고 있다.

과연 외계인은 있는 것일까? 사는 사람 숫나만큼의 방문객들을 맞이했던 이 도시에서, 이번 축제의 진행요원을 맡았던 기 말론은 빙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천사, 요정, 악마, 악령, 외계인 등등 모두 같은 현상 아닐까요? 수백년전에 인간을 동굴로 데려가고, 요술 방망이로 마법을 부리고, 숲속에서 이상한 성경험을 시켜준 존재를 우리는 '요정'이나 '천사'라고 불렀죠. 그런 존재들을 지금은

 '외계인'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습니다."

*현장 내용은 <에이피>통신과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년적 호기심 http://blog.hani.co.kr/oscar/  한겨레 2007-07-11 오후 04:18:1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221738.html  

 

2003 - 투르 드 프랑스 대회 개막 (100주년 기념대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로 사이클 경기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 대회가 지난 5일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올해로 백주년을 맞는 이 대회에는 예년보다 많은 팬들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이 5년 연속 우승을 이룰 수 있을지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올해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서 스페인의 미겔 인두라인이 세운 대회 5연패와 같은

대기록을 세울 것으로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은 지난 4년동안 비교적 손쉬운 승리를 거뒀고, 특히 지난 해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선두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3주일 동안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의 높은 언덕들을 비롯해서 4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는 투르 드 프랑스 대회의 특성을 감안해 본다면 암스트롱이 이룬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암을 이겨내고

그같은 업적을 거둔 암스트롱은 프랑스 팬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지난 18년 동안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지만, 약 25만명의 사이클 선수가 있는 프랑스에서

이 대회는 하나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아예 휴가를 대회 일정에 맞추기도 합니다. 올해 투르 드 프랑스는 대회 백 주년을 기념해 지난 1903년의

1회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파리 근교에서 출발됐습니다.

시계 방향으로 프랑스를 일주하는 이 대회는 오는 27일 파리에서 끝나게 됩니다. VOA news 2003-07-08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3-07/a-2003-07-08-3-1.cfm 

 

2001 - 국제식품규격위원회, 김치를 국제규격식품으로 승인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음식 '김치'가 국제 식품으로 공인받았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는 2001년

7월 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24차 총회를 열고 김치를 국제 규격 식품으로 승인했다. 이에따라 '김치'는 '절임배추에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무 등 여러 양념을 혼합한 뒤 젖산 생성에 따른 적정한 숙성과 보존성이 확보되도록

저온에서 발효한 제품'으로 국제규격화됐다.

우리 특유의 채소 가공법인 김치담금의 특성이 모두 인정된 것이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공인에 따라 김치는 'kimchi'라는 영문 명칭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었으며, '기무치'란 일본식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우리 정부는 '기무치'란 경쟁상품을 들고 나온 일본과 지난 1997년 네 차례에 걸쳐 실무 협의를 벌인 뒤,

제품명을 김치(kimchi)로 통일하는 단일 규격안을 마련해 CODEX에 제출했다. CODEX는 식품 분야의 국제표준을

정하는 국제협의체로, 총 8단계에 걸쳐 심사를 진행한 다음 국제규격의 식품을 공인한다. 농림부는 "이번 결정은 국제

사회가 한국을 김치 종주국으로 확인했다는 의미이며, 김치가 세계적 식품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 메이저리그 정복자 박찬호!              (공중전화 카드)


2001 - 박찬호 선수, 한국인 첫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
2001년 7월 5일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올스타경기 출전선수로 선정됐다.

이날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시애틀 세이프코필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제72회 올스타경기 출전선수 명단을

최종 발표하고 박찬호를 내셔널리그 선수에 포함시켰다.
박찬호의 2001년 전반기 성적은 8승5패로 피안타율 2위(0.197), 투구 이닝수 3위(123과 2/3 이닝), 탈삼진 4위(128개), 방어율 5위(2.91) 등 내셔널리그 투수 주요부문에서 모두 상위에 올라있었다. 박찬호는 1994년 미국 프로야구 무대에

진출한 이후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동양인 투수로는

95년 일본의 노모 히데오에 이어 두 번째였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02 18:17:13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96 - 복제양 돌리 탄생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인간복제 가능성이 유전공학 실험으로 증명됐다. 1996년 7월 5일 복제양 `돌리`가 이를

증명했다. 영국 에든버러 로스린 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박사팀은 6년생 암양의 DNA유전자를 다른 양의 난자와 결합, 암수 성교나 수컷 정액 없이도 미수정란 핵을 체세포 핵으로 바꾸고 유전적으로 똑같은 양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윌머트박사는 세포핵을 갖게 된 이 수정란을 또 다른 암양 자궁에 이식, 첫번째 양과 유전자가 똑같은 새끼가

태어났다고 밝혔다.이 새끼양 `돌리`는 이후 인류생활에 혁신적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2003년 2월 14일 정상수명의 절반에 불과한 여섯살의 나이에 폐질환 증세를 보임에 따라 도축됐다. 돌리를 복제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로슬린 연구소는 이날 복제양 돌리가 진행성 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도축했다고 밝혔다. 

 

1969 - 독일 태생의 미국 건축가 그로피우스(Gropius, Walter) 사망

그로피우스 [Gropius, Walter (Adolph Georg), 1883.5.18~1969.7.5]



독일 출신의 미국 건축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미국 근대건축의 육성에 이바지하였다. 그의 활동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근대적인 구조로서의 건축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추구한 시기, 즉 1907년 P.베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가

10년 동안 근무한 후 독립하면서 파구스구두공장(1911)·독일공작연맹(DWB)박람회의 공장 및

사무소(1914)를 설계하였다. 특히 유리로 만든 커튼 월의 대담한 사용법이 주목을 끌었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1928년에 이르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시절이었다. 유능한 디자이너를 많이 육성할 목적으로 바이마르에서 출발하여 1925년 데소로 이전(바우하우스 신교사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운동 메이커로서의 디자인 교육의 기초자세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제3기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사임하고, 1928∼1934년까지 도시문제, 특히 집단주거 건축의 실제적인

해결을 모색하였다. 판자 모양의 고층아파트의 제안이나, 베를린 및 카를스루에에서의 주택단지 건설에 참가하였다.

제4기는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을 떠나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시절인데, 영국에서는 M.플라이와 협동하여

몇 개의 건축을 이룩하고, 1937년에 도미하여 하버드대학 건축과의 대학원 교수로 많은 건축가를 육성하였다.

그의 생애는 바로 계몽가로서의 기본노선을 따라 전개되었으며, 미정리 부분을 재빨리 찾아내어 정확한

해결을 제시하고 실제로 창조해보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팬아메리칸월드항공사 빌딩은 그의 대표작이다.


 

 

1949 -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 





[그때 오늘]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 거행하다

[중앙일보 허동현] 김구가 태어난 1876년은 문명의 기준이 중화에서 서구와 그 아류인 일본으로 역전되고,

이 땅을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도 의례를 중시하는 도덕률(moral politics)에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로 뒤바뀐 대전환의 해였다.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상놈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던 그는 입신출세를 꿈꾸며 과거 공부에 몰두하다 1894년 동학군의 봉기에 참여한 반서구·반일 성향의 전통적 유교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는 1896년 청일전쟁 이후

거세진 일본의 침략에 맞설 방도로 중국과의 연대를 모색하고자 두 차례나 중국행을 단행한 친중파였으며,

명성황후 시해 후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일본인을 살해해 투옥된 근왕주의자였다.
1897년 그는 인천감옥 수감 중 접한 『태서신사(泰西新史, 원제 ‘The 19th Century: A History’)』 등 신서적을 부리

삼아 굳은 알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스승이 평소에 강조하던 존중화(尊中華)·양이적(攘夷狄) 주의가 정당한 것이 아니며, 제 소견에는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오히려 공자나 맹자에게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맞설 정도로 그때 깨침의 강도는 컸다. “빗장을 걸어 잠그고 지키기에만 급급하던 사람들이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을 자주 들은 사람들은 신앙심 말고도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1902년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새로운 문명 인식은 활짝 꽃 피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그때 그는 잠든 민족에게 깨어나라 외친 겨레의 목탁이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새로 올 나라의 시민이 되길 꿈꾼 1919년 3·1운동의 결과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는 26년간 구국을 위한 일념을 불태웠다.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그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백범일지』, 1947).” 광복 직후 그는 이승만과 함께 반공·반소·반탁의 입장에서

공통의 노선을 걸었지만, 냉전의 그림자가 조국의 앞날에 어둡게 드리우던 그 시절, 그는 현실주의자 이승만과 결별했다. “병자호란의 역사를 알지? 그때 청과 타협한 최명길의 현실주의가 없었던들 아마 나라는 망했을 거야. 동시에 3학사의

명분론과 죽음을 감수하는 민족의 기개가 없었던들 또 망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남북협상 노력이 실패로 끝날 줄 알고 있었지만 북행에 앞서 차남 김신에게 남긴 말이 웅변하듯, 하나 되는 민족의 앞날을 위한 제단에 자신을 바쳤다.

탈냉전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는 그가 내준 숙제를 마쳐야만 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조인스 사설칼럼 2010.07.05 00:44

http://news.joins.com/article/658/4289658.html?ctg=20



 

1943 - 한국의 만화가 이두호(李斗號) 출생

이두호 [李斗號, 1943.7.5~ ]

한국의 만화가.

1943년 대구 출생
1963년 대구 영남고등학교 졸업, 
          홍익대학 서양학과 입학 2년 중퇴
1961년 [피리를 불어라] [등불] [길] [태양을 향하여] 중학교 3년
<데뷔이후>
1969년 중앙일보사 "소년중앙" [투명인간] 창간 때 부터 만화 연재.
1978년 [유령타자]
1980년 [뛰어라 까목이]
1981년 [암행어사 허풍대] [바람소리]
1982년 [폭풍의 그라운드]
1985년 [머털 도사님]
1987년 [땅거미] [덩더꿍]
1988년 [뛰어야 벼룩이지] [머털도사와 또매형] [객주]
1989년 제2회 YMCA우수 만화 작가상 수상.
          [머털도사] MBC TV 애니메이션 방영
1990년 [머털도사와 108요괴] MBC TV 애니메이션 방영
          [머털도사와 또매] MBC TV 애니메이션 방영
          [바람소리] TV 미니시리즈 KBS TV 방영
1991년 [임꺽정], [장독대] MBC TV 애니메이션 방영
1992년 한국 만화가 협회 부회장
          [오리발 훈장님]
1993년 제6회 YWCA 선정 우수 작가상 수상
1995년 문화체육부 선정 한국만화문화대상 수상 [임꺽정]
1996년 [째마리]
1997년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
1998년 (사)한국만화가 협회 회장
          SICAF 운영위원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
1999년-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동아.LG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심사위원  
          한국만화문화상 심사위원 (문광부)
2004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
          2004 SICAF 코믹어워드대상 수상 - 한국만화가협회

 

1924 - 제8회 파리올림픽 개막

제8회 올림픽경기가 1924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됐다. 44개국 3092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 대회는 원래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24년전의 제2회 파리올림픽이 파리만국박람회 여흥의 일환으로 열려 부끄럽게 생각한

올림픽 창시자이자 IOC 회장인 쿠베르탕이 그 부끄러움을 씻을 생각으로 예정을 변경한 것이다.

대회 스타는 핀란드의 철인 파보 누르미 선수였다. 그는 15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30분 뒤에 열린 3000m에서도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육상에서만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46개의 미국이 차지했으며, 프랑스(금메달 15개)·핀란드(금메달 14개)·영국(금메달 9개)·이탈리아(금메달 8개)가 그 뒤를 이었다. 기록면에서는 15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비롯하여, 9개의 세계신기록이 수립됐다.

 

1911 - 프랑스의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Pompidou, Georges) 출생

퐁피두 [Pompidou, Georges(-Jean-Raymond), 1911.7.5~1974.4.2]

조르주 장 레이몽 퐁피두(프랑스어:Georges Jean Raymond Pompidou) 1911년7월 5일 - 1974년4월 2일)는 캉탈 주 몽부디프 태생으로 196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74년까지 재임한 프랑스 국민연합(우파)소속의 프랑스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 대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샤를 드골 정부하에서는 총리를 역임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드골의 후계자로서 등장하였으나, 드골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보다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외교적으로는 영국유럽공동체 가입을 이끌었으며, 산업화 계획과 유럽공동의 로켓발사계획을 주도할 프랑스 기업 아리안스페이스등에 출자하였다. 그가 임명한 총리 자크 샤방델마가 추진한 68혁명후의 정치슬로건인

새로운 사회계획에 회의적이었으며, 정부의 언론통제완화등의 정책은 드골주의를 표방하는 우파로부터 비판을 당하는등 갈등을 빚게 되었다. 퐁피두는 결국 후에 그를 경질하였다. 그러던 중 퐁피두는 예기치 못하게 희귀질환인 매크로글로브린혈증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궐위된 대통령직은 상원의장인 알랭 포에르

임시로 대행하다가, 대통령 선거에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당선되어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889 -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장 콕토(Jean Cocteau) 출생
1886 - 네덜란드의 정치가 드레스(Drees, Willem) 출생  

1872 - 프랑스의 정치인, 저술가 에리오(Herriot, Edouard) 출생

1857 -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Zetkin, Clara) 출생
1811 - 베네수엘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05 - 영국의 해군 장교 피츠로이(Fitzroy, Robert) 출생


1801 - 미국의 해군 제독 패러것(Farragut, David) 출생

1761 - 프랑스의 화가 부아이(Boilly, Louis-Leopold) 출생

1687 -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판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