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1) 1801 - 미국의 해군 제독 패러것(Farragut, David) 출생
패러것(Farragut, David (Glasgow), 1801.7.5~1870.8.14]
미국의 제독.
남북전쟁(1861~65) 때 북군 해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두드러진 승리를 거둠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어린시절에 뉴올리언스에서 데이비드 포터 해군대령(후의 준장)의 양자가 되어 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1812년 미·영 전쟁 때 포터가
이끄는 프리깃함 '에식스호'에서 복무했다. 에식스호는 여러 척의 영국 포경선을 나포했는데, 패러것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이런 포획선 가운데 하나를 지휘했고 20세에는 숙련된 장교가 되었다. 1823년에는 소함대에서 포터 밑에서
복무하면서 카리브 해의 해적을 진압하는 일을 했다. 1824년 '페릿호'에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지휘권을 얻었다.
수년 동안 일상적인 업무를 하다가 1861년 12월 멕시코 만 서부지역에서 북군 봉쇄함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미시시피 강으로 들어가 남군이 주로 전쟁물자를 공급받고 있던 뉴올리언스를 함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육군부는 그에게 뉴올리언스 시에서 떨어진 하류지역의 요새 2곳을 박격포로 공격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대담하게 대포공격을 퍼붓고 요새 뒤로 도망치는 독자적인 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1862. 4. 24).
그의 해군은 요새에서 상류 쪽에 정박하고 있던 남군의 소함대 대부분을 괴멸시켰다. 북군 수송부대는 패러것의 후원포격 덕분에 상륙할 수 있었고 요새와 뉴올리언스 시는 함락되었다. 이듬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미시시피에 있는 빅스버그를 향해 진격했을 때 패러것은 레드 강 하류의 허드슨 요새에서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남군의 수비부대를 뚫고 그랜트를 원조했으며, 강의 지류 아래쪽의 남군 수송을 차단했다.
빅스버그는 1863년 7월에 함락되었고 북군은 곧 미시시피 강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후 패러것은 앨라배마에 있는 모빌 만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곳은 요새 몇 개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큰 요새는 모건 요새였다. 모빌 만에는 한쪽에 어뢰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건 요새에 접근하려면 만의 다른 쪽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남군의 장갑함 '테네시호' 역시 모빌 만에 정박하고 있었다. 패러것이 이끄는
부대는 무장한 모니터함을 선두로 하고 목선(木船) 프리깃 함대가 그뒤를 따르게 하여 2열종대로 모빌 만에 들어갔다(1864. 8. 5). 그러나 선두 모니터함인 '테쿰세호'가 어뢰에 의해 파괴되자 목선의 선봉에 서 있던 '브루클린호' 역시 놀라서 진격하지 못했고 나머지 전함은 모건 요새의 포격에 당황해 방향을 잃고 표류했다. 패배가 임박한 듯이 보였을 때 패러것은 머뭇거리고 있던 브루클린호를 향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외쳤다. "빌어먹을 어뢰, 전속력으로 진격하라."
그는 자신의 배 '하트퍼드호'를 앞세워 무사히 어뢰를 통과했고 나머지 배들도 그뒤를 따라 진격해 요새에 상륙했다.
요새에 피해 있던 테네시호가 나타나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으나 테네시호는 계속 후퇴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남군의 요새들은 이제 고립되어 차례차례 항복했고 마지막으로 모건 요새가 항복했다. 이 싸움은 패러것의 경력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나 그는 건강이 나빠져 더이상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1862년 소장, 1864년 중장이 되었고 1866년 제독의 자리에 올랐다. 1877년 유럽으로 가서 강대국들의 해항(海港)을 공식방문했다.
2) 1761 - 프랑스의 화가 부아이(Boilly,Louis-Léopold) 출생
부아이 [Boilly,Louis-Léopold, 1761.7.5~1845.1.4]
프랑스의 화가.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제국 시기의 파리의 생활과 풍속을 풍자적으로 다룬 초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석판화법을 새로이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1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785년 파리로 가서 재미있는 장면들을 그렸으며 이것으로 인해 유명해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당대의 도덕을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가 혁명파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그후 혁명의 지도자인 장 폴 마라를 찬양한 그림 〈마라의 개선 Le Triomphe de Marat〉으로 혐의를 벗었으며, '공화파 예술협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총재 정부와 집정 정부 시기에는 계속해서 풍속을 묘사한 그림들을 그렸다.
1804년 '살롱전'에 〈운수회사의 안마당에 도착한 승합 마차 L'Arrivée d'une diligence dans la cour des Messageries〉·〈작업실에 있는 조각가 우동 Le Sculp-teur Houdon dans son atelier〉을 출품해 둘 다 상을 받았다. 1823년에는 익살스러운 〈찡그린 얼굴들 Grimaces〉을 연작 석판화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생 동안 5,000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 500여 점은 파리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3) 1872 - 프랑스의 정치인, 저술가 에리오(Herriot, Édouard) 출생
에리오 [Herriot, Édouard, 1872.7.5~1957.3.26]
프랑스의 정치가·저술가.
오랫동안 급진당의 지도자였고 9차례의 서로 다른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으며, 3차례(1924~25, 1926, 1932) 총리를 역임했다. 육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1894년에 졸업했다. 낭트의 국립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특히 리옹에서는 학자 겸 교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명성은 〈레카미에 부인과 그녀의 친구들 Madame Récamier et ses amis〉(1904)이라는 연구와 〈프랑스의 문학소사 Précis de I'histoire des lettres françaises〉(1905)에 실린 날카로운 문예비평에 의해 더욱 높아졌다.
에리오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지역정부를 통해서였다. 리옹 시정관(1904)과 리옹 시장(1905)으로 선출되어 제2차 세계대전중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리옹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시장재임시 성장하는 산업도시 리옹에서는 시의 행정과 공무원의 태도가 개선되었고, 그의 지역적 명성은 확고해졌다. 1910년 도의회 의원(conseil général), 1912년 론의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의 전(全)정치활동은 급진당원으로서 이루어졌다.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에서 1916년 12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첫 각료직을 역임한 에리오는 전시(戰時)의 물자공급과 수송업무를 재조직하는 데 정치적 통찰력과 행정능력을 보여주었다. 1919년 11월 프랑스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론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곧 급진당 당수가 되었다. 타고난 웅변술을 이용하여 그는 의회에서 급속하게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에리오는 전후의 우파조직인 전국연합(Bloc National)에 대한 반대를 주도했다. 1924년 5월의 하원의원 선거에 대비해 결성된 급진당과 사회당의 연합조직인 좌파연합(Cartel des Gauches)이 승리했을 때 이 연맹을 주도했던 에리오는 1924년 자신의 첫 내각을 구성하고 외무장관직을 겸임했다. 그는 우익 정당들을 공공연히 지지했던 공화국 대통령 알렉상드르 밀랑을 강제로 사임시켰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적법성을 인정했는데, 그는 이미 2년 전에 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도즈 안(案)'을 승인했으며, 전(前)총리 레이몽 푸앵카레가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강제하기 위해 루르에 파견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1925년 4월 제1차 에리오 내각은 재정정책 때문에 실각했고, 1926년 7월에 구성된 제2차 내각도 단 3일 만에 무너졌다. 그뒤 1926~28년 에리오는 교육장관으로 레이몽 푸앵카레 내각에 참여했으며 1932년 6월에는 다시 권력을 잡아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제3차 에리오 내각은 하원이 미국에 갚아야 할 전쟁부채 12월분 지불을 거절하자 6개월 만에 붕괴했다. 이후 에리오는 1934년 가스통 두메르그, 1934~35년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총리 밑에서 부총리로 일했다. 1936년 6월에는 하원의장에 선출되어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할 때까지 재직했다.
1940년 7월 10일 비시의 국민의회에서 마르샬 필리프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에리오는 기권했다. 페탱이 1942년 8월 하원과 상원의 상설 기구들을 해체하자 에리오는 상원의장 쥘 장네와 연합하여 이에 저항했다. 이때문에 체포된 에리오는 독일로 송환되었지만 1945년 4월 소련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리옹 시장으로 재선된 그는 리옹으로 돌아와 의무를 재개했으며, 급진당 당수직도 되찾았다. 1945, 1946년에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고 이듬해 제4공화국의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54년 1월에 은퇴했다. 1948년부터 유럽 위원회에 참여한 그는 1952~54년 동안 서독의 재무장을 염려하여 유럽 방위공동체(EDC)의 결성에 반대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유주의적인 국제협력 이념을 신봉했으며, 타고난 지성과 정직함으로 널리 존경받았다.
1) 2)
1) 1886 - 네덜란드의 정치가 드레스(Drees, Willem) 출생
드레스 [Drees, Willem, 1886.7.5~1988.5.14]
네덜란드의 총리(1948~58).
제2차 세계대전 후 연이어 4차례 내각을 이끌었다. 네덜란드의 복지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켰으며 군사적·경제적 동맹을 위해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했으나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자치령으로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암스테르담 상업학교에서 공부한 뒤 1907년 의회 속기사가 되었고 1913년 헤이그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 하원에 진출하여 1939년부터는 사회민주당 세력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레지스탕스를 조직하려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1941년 석방되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고 종전 후의 정부조직에 대비한 '조국위원회'를 주도했다. 1945~48년 빌렘 스헤르머호른 및 루이스 벨 내각에서 사회장관으로 일했다. 자유당 좌파에 속했던 드레스와 스헤르머호른은 1946년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인 네덜란드 노동당을 창설했다. 드레스는 1948년 8월 6일 총리에 취임한 이후 노동당과 가톨릭 인민당의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가톨릭 인민당이 새로운 세법안(稅法案)에 반발하여 내각에서 이탈하자 1958년 12월 12일 총리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떠났다.
네덜란드는 드레스의 지도 아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서구연합(WEU)·유럽 경제공동체(EEC) 등 여러 국제기구에 가입했다. 1948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이듬해 드레스 내각은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 연방의 자치령으로 승인했다. 1954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탈퇴했다.
2) 1805 - 영국의 해군 장교 피츠로이(Fitzroy, Robert) 출생
피츠로이 [Fitzroy, Robert, 1805.7.5~1865.4.30]
영국의 해군장교·수위측량사·기상학자.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이 타고 해외로 나갔던 '비글호'의 항해를 지휘했다. 이 항해로 다윈은 진화론에 기본이 된 많은 자료를 얻었다.
피츠로이는 1819년 영국 해군에 입대해 지중해와 남아메리카 수역에서 복무한 뒤 1828년 240t급 쌍돛대 횡범선인 비글호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파타고니아와 티에라델푸에고 근해의 남아메리카 해안을 답사하고 1830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1831년 12월 27일 피츠로이는 다윈과 함께 비글호를 타고 포츠머스를 출항했다. 이 탐험대는 케이프베르데 제도, 남아메리카 해안, 마젤란 해협, 갈라파고스 제도, 타이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몰디브, 모리셔스 등지를 방문하고 1836년 10월 2일 영국으로 돌아왔다. 1839년 피츠로이는 〈1826,1836년의 어드벤처호와 비글호의 탐험기, 남아메리카 남부 해안 답사기와 비글호의 세계일주 기록 Narrative of the Surveying Voyages of His Majesty's Ships Adventure and Beagle Between the Years 1826 and 1836, Describing Their Examination of the Southern Shores of South America, and the Beagle's Circumnavigation of the Globe〉(2권)을 출판했다. 이 책의 제3권은 일반적으로 〈비글호의 탐험 The Voyage of the Beagle〉으로 알려져 있으며 1839년 다윈에 의해 출판되었다. 1841년 더럼을 대표해 의회로 진출했던 그는 1843년 뉴질랜드 총독이 되었으나 1845년에 소환당했다. 주요이유는 마오리족의 토지 소유권 주장이 정착민들의 소유권 주장과 마찬가지로 타당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1850년 공적인 활동에서 은퇴해 1854년부터는 기상학에 몰두했다. 일기예보의 원형인 폭풍 예보 체계를 고안하고 기압계를 발명했으며 〈기후서 The Weather Book〉(1863)를 출판했다. 그는 정신병을 앓다가 자살했다.
1889 -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장 콕토(Cocteau, Jean) 출생
콕토 [Cocteau, Jean (Maurice Eugène Clément), 1889.7.5~1963.10.11]
콕토는 다방면의 예술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프랑스의 시인·극작가·소설가·배우·영화감독·화가이다. 그는 파리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해 19세에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를 출판했다. 1916~17년에는 당시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현대 예술계의 파블로 피카소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나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문인들을 사귀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많은 예술 영역에 손을 대었지만 그 중심은 시정신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앙드레 브르통 같은 콕토에게 비판적인 비평가들은 그의 다재다능하고 변화무쌍한 변신을 보며 사기꾼 또는 딜레탕트로 비난했으나, 여러 가지 예술적 표현으로 표출된 그의 젊고 자유로운 시혼은 그에게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했다.
칸 영화제의 로고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역사가 가장 오랜 베니스 영화제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칸 영화제의 심볼 역시 베니스의 사자와 마찬가지로 칸을 상징하는 종려나무의 잎사귀. 종려나무 잎사귀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장 콕토가 디자인하였다. 타원형 중심에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는 모습으로, 수상분야나 상황에 따라 필름 모양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하단에는 'FESTIVAL DE CANNES'이라는 글귀가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원칙. 1955년부터 대상명칭 또한 '황금종려상'으로 바뀌었다
http://halloyj.egloos.com/tag/%ED%99%A9%EA%B8%88%EC%A2%85%EB%A0%A4/page/1
"시인에게 최악의 비극은 오해를 통해 숭배되는 것이다."
- 장 콕토
1857 -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클라라 체트킨(Zetkin, Clara) 출생
체트킨 [Zetkin, Clara, 1857.7.5~1933.6.20]
결혼 전 성은 Eissner.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클라라 아이스너는 라이프치히여자사범대학에서 공부한 후 교직에 있으면서 초창기의 독일 사회민주당과 접촉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가들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망명자 오시프 체트킨(1848~89)을 만나 결혼했다. 1880년대의 대부분을 스위스와 파리에서 자진 망명생활을 하면서 불법적인 글을 써서 배포하고 지도적인 많은 국제사회주의자들과 회합을 가지면서 보냈다. 1889년에 열린 제2차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 참가한 후,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로 돌아와 1892~191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 계열 여성지인 〈평등 Die Gleichheit〉을 편집했다. 1907년 그녀는 국제사회주의 여성대회의 공동창설자가 되었다.
혁명적인 작가이자 운동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친구였던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여 1915년 베른에서 제1차 국제여성협의회를 조직했다. 1916년 급진적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공동창설자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새로운 독일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20년부터는 연방 하원에서 활동했다. 1921년 제3인터내셔널 최고회의 간부로 선출된 클라라 체트킨은 모스크바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녀의 영향력은 대폭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쓴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3권의 책 〈연설문과 편지 모음집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이 1957~60년 동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세계 여성의 날
세계 여성의 날은 매년 3월 8일로,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업적을 범세계적으로 기리는 날이다.
세계가 함께 기리는 여성의 날을 만들자는 생각은 근대의 빠른 산업화와 경제 팽창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1857년 뉴욕 시에서는 방직 및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린다며 항의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곧 경찰에 의해 공격받고 해산되었다. 2년이 지난 1859년 3월, 이 여성들은 최초로 그들의 노동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매년 3월 8일에는 더욱 더 많은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1908년의 시위는 가장 두드려졌는데, 15,0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등을 요구하며 뉴욕 시로 행진하였다. 1910년 최초의 세계 여성 회의가 Socialist International의 주최로 코펜하겐에서 이루어지고, 독일 사회주의자인 Clara Zetkin의 제안에 따라 세계 여성의 날이 정해졌다. 이듬해의 세계 여성의 날은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백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행사였다. 하지만 행사가 이루어지고 채 얼마 되지 않은 1911년 3월 25일, 뉴욕 시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츠 공장 화재는 140명 이상의 여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안전 시설의 부재로 말미암아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임박했던 1913년의 세계 여성의 날에는, 유럽을 가로지르는 평화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811 - 베네수엘라가 남아메리카 국가 중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독립하다
16세기에 스페인의 베네수엘라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자, 토착민들은 조직적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구아이카이푸로(Guaicaipuro), 타마나코(Tamanaco) 같은 원주민들의 지도자들은 스페인의 습격에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정복되었다. 타마나코는 카라카스의 설립자 디에고 드 로사다(Diego de Losada)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522년에 스페인에 의해 현재의 쿠마나(Cumaná)에서 식민지가 되었다. 이들 베네수엘라 동부는 뉴 안달루시아에 통합되었다. 16세기 초부터는 산토 도밍고의 아우디엔시아로부터 관리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의 대부분이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la Nueva Granada)에 속하게 되었고, 1776년 이후로는 도독령(Captaincy General)으로 개편되었다.
잇따른 봉기의 실패 후, 베네수엘라는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던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장군의 지휘 하에 1811년7월 5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어쨌거나, 1812년 카라카스 지방의 파괴적인 지진과 야네로(llanero)의 반란으로 베네수엘라의 첫번째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1813년 8월 7일에 선언된 베네수엘라의 두번째 공화국은 수개월 간 지속되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했다. 1819년에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대 콜롬비아 공화국을 이루다가 1830년에 분리를 선언하였다. 콜롬비아로부터는 1845년에 승인을 받았다. (베네수엘라-역사)
1802 - 러시아 해군 제독 파벨 나히모프(Nakhimov, Pavel) 출생
나히모프 [Nakhimov, Pavel Stepanovich, 1802.7.5~1855.7.12]
러시아의 해군 제독.
크림전쟁 때 러시아 함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818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22∼1824년 프리깃함(艦) 크레이셀호(號)로 세계를 일주하였다. 크림전쟁에서는 1853년 11월 18일 시노프해전에서 터키함대를 격멸, 사령관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1854년 10월부터 코르닐로프 제독의 뒤를 이어 세바스토폴리 방위를 지휘하였다. 1855년 여름에 전사하였다.
1687 - 뉴턴 ‘프린키피아’ 출간
[어제의 오늘]1687년 뉴턴 ‘프린키피아’ 출간
ㆍ만유인력 등 현대 물리학 ‘시금석’
흔히 <프린키피아>로 불리는 아이작 뉴턴의 명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1687년 7월5일 출간됐다. 만유인력, 관성, 작용과 반작용 등 자연의 제반 운동법칙이 <프린키피아>에 담겨있다. 이 책은 현대 물리학에 시금석을 놓았고 자연에 대한 인류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프린키피아>의 탄생 뒤에는 ‘핼리 혜성’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있다. 아마도 ‘은둔형 천재’ 뉴턴이 핼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프린키피아>가 세상에 나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핼리는 1684년 8월 어느날 뉴턴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뉴턴보다 13살 어린 핼리는 당시 28살로 영국 왕립학회 서기를 맡고 있었다. 그가 뉴턴을 찾은 이유는 왕립학회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못 푼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핼리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가 어떤 모양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뉴턴은 주저없이 타원형이라 말했다. 미심쩍어 하는 핼리에게 뉴턴은 얼마후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9쪽짜리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에서 뉴턴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도 증명해 보였다. 흔히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불리는 원리다. 핼리는 감탄했고, 뉴턴에게 이 논문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볼 것을 권유하고 독려했다. 왕립학회 출판 담당이던 핼리는 뉴턴의 지식을 책으로 엮어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도 지나지 않아 뉴턴은 모든 논문을 완성하고 핼리에게 이를 전달했다. 하지만 이를 받아본 왕립학회 학자들은 핼리와 달리 선뜻 출간을 결정하지 못했다. 내용이 워낙 어려워 원고의 가치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오랜 논의를 거친 후에야 출간이 결정됐다. 핼리는 모든 출판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자청했다.
라틴어로 씌어진 <프린키피아>의 초판은 1000권이 채 되지 않았다. 핼리는 출간과 함께 책과 저자 홍보에 발벗고 나섰다. 핼리는 학술잡지에 서평을 보내고 영국 국왕에게 직접 책을 전달하기도 했다. <프린키피아>는 발행된 지 1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다수 유럽 지식인들에게는 소화하기 힘든 책이었다. 학자들 사이에서 ‘뉴턴 외에 <프린키피아>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뉴턴은 이후 발행된 책의 내용을 보완하고 다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뉴턴 생전에 <프린키피아>는 두 번 개정됐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7-04 17: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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