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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8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미국, 수지여사 석방위해 미얀마 군부와 접촉

미국은 미얀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풀기위해 미얀마 군부와 협의중이라고 국무부가 28일 밝혔다. 톰 케이시 국무부 대변인은 에릭 존 국무부 차관보가 중국의 중재로 이번주 베이징에서 미얀마 정부 각료들과 ’드문’ 접촉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협의를 통해 미얀마측에 수지여사와 수천명의 다른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을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다면서 미얀마측은 그러나 수락여부를 밝히지 않고있다고 케이시 대변인은 덧붙였다. 케이시 대변인은 에릭 차관보가 3명의 미얀마 각료들과 협의를 통해 양측이 솔직한 의견교환을 가졌으나 불행이도 미얀마측의 기본태도가 변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케이시 대변인은 미얀마측이 미국과의 협의를 요청했으나 그들은 미 관리들이 수지 여사를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대문에 협의 장소가 베이징으로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진행중인 미국과 미얀마측과의 협의는 근래 양국간에 이뤄진 최고위급 직접 접촉이다.

연합뉴스 /조선닷컴 2007.06.29 05:3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9/2007062900172.html

 

 

 


2001 - 미국 항소법원,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명령은 무효라고 판결 

미국 항소법원이 2001년 6월 28일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을 명령한 하급법원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재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MS사는 2000년 6월 미 법원으로부터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향후 연방과 각 주의 반독점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를 두 개 그룹으로 분할하라는 판결을 받았었다. 항소법원은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불법적으로 윈도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판결 내용은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 심리를 담당할 판사가 적절한 제재 조치를 결정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특히 판결 과정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시하며 "사건을 맡은 토머스 잭슨(Thomas Jackson) 판사의 태도가 재판 절차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으며, 사법제도의 완전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법적 조치를 숙의할 수 있도록 사건을 돌려보낸다"며 "새로운 재판부가 사건을 맡아 재심리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MS사는 2월 연방항소법원에서 잭슨 판사의 판결이 회사와 최고경영자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처벌을 목적으로 내려졌다고 주장했었다. 한편 이번 판결로 MS의 주가는 한때 전날 대비 5.7%까지 폭등해 나스닥시장에서 거래가 정지되기도 했다. /조선

 

 

 

 

 

 

1997 - 쿠바와 아르헨티나 법의학팀,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 유해 발견

늙을 수 없는 ‘젊은 혁명가’의 귀향

‘범중남미 대륙 혁명’이란 야심을 품고 쿠바를 떠났던 혁명가 에르네스 토 체 게바라가 지난 7월12일 31년 만에 유골이 되어 쿠바 수도 아바나로 돌아왔다.

19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활동 도중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시신은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수도 산타크루스에서 2백40㎞ 떨어진 발레그란데 공항 주변에서 7구의 다른 유골과 함께 발굴됐다. 70년대 이 후 일본 적군파 등 세계 극좌 테러단체 청년들로부터 우상으로 추앙받던 체 게바라의 유골은 곧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아르헨티나·쿠바·볼리비 아 전문가들에 의해 정밀 감식됐다. 그 결과 쿠바 출신 게릴라로 신원이 밝혀진 다른 3구의 유해와 함께 쿠바로 송환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의사로 중남미 일대를 방랑하던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의기투합해 1958년 쿠바 혁명에 가담하면서 게릴라로 혁명에 몸을 던졌다.

쿠바혁명 성공 직후 그는 카스트로의 천거로 산업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등 요직에 앉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식 개혁’을 도모한다며 장관 의 몸으로 카메라 앞에서 손수레를 끄는 등의 무리한 사회주의 정책 때문 에 체 게바라는 쿠바 지도부 내에서 잦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오늘날 “ 쿠바 경제를 망친 장본인 중 하나”란 비판도 받고 있다.

결국 그는 쿠바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엮은 자신의 ‘게릴라 전술’ 이 론을 중남미에 퍼뜨려 좌익운동의 새로운 일가를 이루겠다는 야심을 품고 쿠바를 떠났다. 그러나 1966년 볼리비아에 도착한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도 “조건이 성숙지 않았다”는 현지 공산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게릴라 전술을 고집하다가, 67년 서부 산악지대에서 토벌군에게 포로로 잡혀 11월9일 총살됐다. 당시 토벌군은 체 게바라가 사살됐다는 증거로 시신에서 손을 잘라 쿠바로 보냈는데, 이 덕분에 지난 6월 발굴된 손뼈 없는 유해가 그의 것으로 쉽게 판명될 수 있었다.

13일 아바나에서 거행된 체 게바라의 유해 송환 기념식에서 그의 딸 알리 에다는 “오늘 우린 그들의 시신을 맞이하지만, 그들은 패배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히 젊음을 간직한 영웅으로 돌아왔다”고 말했 다.

임민 기자 /한겨레 국제부 /사람이야기 [한겨레 21 167호]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http://www.hani.co.kr/hankr21/K_977O0167/977O0167_024.html  

 

 

 

 

1992 - Meeting of Ministers of Industry and Technology

ESCAP, Iran, 28-29 Jun 1992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99.asp

 

 

 

     

 

1991 - 코메콘, 42년 만에 공식해체

1991년 6월 28일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공식 해체됐다. 1947년 미국이 마셜 플랜 (유럽부흥계획)을 제안했을 때 동유럽 여러나라가 동요함에 따라 1949년 1월 25일 소련 주도하에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동유럽공산권국가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창립됐었다.

1960년대 이후 코메콘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눈부신 발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제체제협력으로부터 경제통합으로 활동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변혁은 코메콘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1990년 1월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개최된 코메콘 10개국 지도자회의에서 종래의 엄격한 중앙경제계획에서 시장중심의 무역제도로의 전환을 결정하였고, 1991년 6월 제46차 총회에서는 모든 조약과 문서를 취소시키고 기구해체 의정서에 정식 서명했다. /조선

 

 

 


1979 - 2차 오일쇼크 시작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준유가 59%인상

제2차 석유파동은 1970년대말의 불황기 속에서 공급과잉을 유지하던 석유가격이 1978년의 이란 혁명을 계기로 다시 상승함으로써 발생했는데 이란 혁명은 촉발제였을 뿐 기본적으로는 OPEC의 산유정책이 변화하여 산유량이 크게 늘지 않은데다가 소비국들의 석유대체탄력성이 매우 낮은 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12월부터 1980년 7월 사이에 석유가격은 약 2.4배(배럴당 12.9달러에서 31.5달러로) 급등했고, 이것은 세계경제에 다시 커다란 혼란을 야기시켰다. 세계경제는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생산비용이 상승되어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교역조건이 악화되면서 경기침체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성장률은 둔화되었으며 무역수지는 악화되었고, 국제금융과 통화질서는 교란되었다. 수출산업 중심으로 성장해오던 한국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오일쇼크 기간 동안 물가의 급등, 수출신장의 둔화, 무역수지 악화, 경기의 후퇴 및 실업증대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브리태니커

 

 

 

 


1976 - 세이셸이 영국의 통치로부터 독립

프랑스인과 영국인들 사이에 오랜 기간 쟁탈전이 벌어진 뒤 1810년 영국이 이 제도를 지배하게 되었고, 1814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의 영유권이 승인되었다. 19세기에는 모리셔스의 속국이었으나, 1903년 아미란테제도·코스몰레도제도 등 많은 섬들을 합쳐서 세이셸제도라 하고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1964년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F.A. 르네가 이끄는 세이셸인민연합(SPUP)과 J.R. 맨첨을 당수로 영국과의 연계를 바라는 민주당(SDP)이 탄생하였다. 1967년 처음 보통선거가 실시되고 양당의 세력이 대립하였으나 1970년 민주당이 승리하고 맨첨이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맨첨이 내세우는 연계를 거부했기 때문에 1973년 방침을 바꾸어 단독 독립을 시도하였다. 1975년 입헌회의에서 독립준비정부가 성립하였고, 1976년 6월 28일 영국연방의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대통령에 맨첨이, 총리에 르네가 선출되었다. /yahoo

 

 

 

 

 

1970 - 제37차 세계작가대회 개막 (6.28~7.4, 서울)

"오는 6월 28일부터 7일간 우리나라에서 국제 P.E.N.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oets, Essayists and Novelists)의 연차총회인 제37차 세계작가대회가 개최된다.
P.E.N.은 시인, 극작가, 문학지 편집자, 평론, 수필가, 소설가를 뜻하는 영어의 첫버리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국제 P.E.N.은 제1차 세계대전후 영국의 여류작가인 스코트 여사가 비참한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문필가의 국제적 유대와 상호이해를 깊게 할 필요가 있다고 제창하여 1921년에 설립되었다.
국제 P.E.N.은 각국민 상호간의 이해와 선의를 증진시키고 현실의 자유를 수호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범세계작가기구이며 문학자의 모임으로는 유일한 국제기구로서 현재 회원국은 62개국이다.
우리나라는 1954년 10월에 국제 P.E.N. 한국본부를 창립이후 빠짐없이 연차대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번 대회의 의제는 「동서(東西)문학의 해학(諧謔)」인데 우리나라는 한국문학가와 한국문학의 해외소개에 최선을 다하며 이번 기회에 문학, 예술, 풍속, 관광 및 국가발전상도 소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체신부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빛나는 문학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나라임을 알림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람과 아울러 국내외에 이를 널리 알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9 - 스위스의 축구 선수 샤퓌자(Chapuisat, Stéphane) 출생

샤퓌자 [Chapuisat, Stéphane, 1969.6.28~ ]

 

 

스테판 샤퓌자 (Stéphane Chapuisat, 1969년 6월 28일, 스위스 로잔 ~) 는 Chappi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클럽과 스위스 대표팀에서 모두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이다.

고향의 축구 팀 로잔 스포츠 (Lausanne Sport) 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바이어 웨르딩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영 보이즈 등에서 활약했으며,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시절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1996-97 우승을 경험하고 총 228경기에서 106골을 기록하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스위스 대표팀 소속으로는 1994년 FIFA 월드컵, 유로 96, 유로 2004에 나서 스위스의 대표 공격수로 뛰었고, 1989년 데뷔해 2004년 은퇴하기까지 103경기에서 21골을 넣었다. 2003년 11월에는 스위스 축구 협회의 추천을 받아 지난 50년간 자국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 50명에 선정되었다.

수상 경력 /위키백과

 

 

 

 

 

 

1967 -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병합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국이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하였다. /naver

 

 

 

 

1962 - 군사 정권, 새로운 언론 정책을 '권장'

군사 정권의 새로운 언론 정책
1962년 6월 28일 군사 정권은 새로운 '언론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는 언론 자유와 책임, 언론인의 품위와 자질, 언론 기업의 건전성, 신문 체제의 혁신, 언론 정화 등 5개 항의 기본 방침과 20개 항의 세부 지침으로 구성돼 있었다. 군부는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권장'이라는 이름으로 이 같은 정책을 강요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신문 발행 요건이 까다로워져 사실상 신규 언론사의 출현이 불가능하게 됐으며 하루에 두 번을 내던 조, 석간제가 조간 또는 석간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루에 한 번 신문을 내는 단간제로 바뀌었다. 8월 4일 당국의 조정아래 6대 중앙지는 조간이냐 석간이야를 정했는데 8월 20일부터 동아 서울 경향 대한 등 4개사가 석간을, 조선 한국 등 2개사가 조간을 택했다.
단간제는 신문의 정보량을 대폭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뉴스의 속보성과 정론성도 크게 후퇴했다. 결국 단간제는 신문의 비판적 기능을 현저히 약화시킨 반면 지면의 잡지화, 상업화 현상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언론 정책이 모두 다 나쁜 결과만 가져온 건 아니었다. 그 긍정적 측면에 대해 언론인 송건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요 신문'을 발간케 하고 하루 8면 이상으로 증면케 하였다. 서울의 중앙지의 경우는 일 12면 이상으로 늘리게 했다. 기자 보수의 기준을 정한 점도 평가할 만했다. 서울 시내에 본사를 둔 일간 신문과 통신사의 중견 기자의 봉급을 월 1만원 이상으로 한다고 한 점이다. 물론 당장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무보수 기자'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기자들의 보수 기준을 설정한 것은 크게 잘한 일이었다.
2년 반의 군정 기간에 일어난 가장 큰 필화 사건은 『동아일보』주필 고재욱과 논설위원 황산덕의 구속과 『한국일보』사장 장기영의 구속이었다. 『동아일보』는 1962년 7월 28일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을 게재해, 1963년 여름으로 예정된 민정에 앞서 군사정부가 새 헌법을 기초하여 이를 국민투표에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군사 정권은 이를 문제삼은 것이었다. 반공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된 고재욱은 8월 14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황산덕은 12월 7일 공소취하로 석방되었다.
『한국일보』는 1962년 11월 28일 1면 톱으로 혁명 주체 세력이 영국 노동당과 비슷한 정당 창당을 추진중에 있다고 보도하였는데, 이 기사로 다음 날 장기영 사장 겸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 4명은 혁명위 포고 등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정부의 자진 정간 권고를 받은 『한국일보』는 29일 1면 톱에 문제의 기사가 사실무근이었다는 사과문을 게재하고 12월 2일부터 사흘간 자진 휴간하였으며, 장 사장은 12월 6일 사장직에서 인책 사퇴하겠다고 밝힘으로써 그 날 밤 두 간부와 함께 석방되었다. 장기영은 1963년 1월에 사장직에 복귀하였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100

 

 

 

 


1958 - 제6회 스웨덴 월드컵서 브라질 우승, 펠레 일약 스타로 부상

1958년 6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주최국 스웨덴을 5대2로 이기고 우승했다. 이날 브라질 승리의 원동력은 신장 168cm, 체중 67kg의 17세 소년 펠레(Pele, 1940~ )였다. 가히 이번 스웨덴월드컵은 훗날 ‘축구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펠레를 위한 대회였다. 수줍음 잘 타는 앳된 얼굴의 17세 소년 펠레는 등번호 ‘10’을 달고, 프랑스전 해트트릭과 결승전 2골 등 6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에 첫 줄리메컵을 안겼다.
특히 이날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그가 뽑아낸 골은 역대 최고의 골 장면으로 남아 있다. 왼쪽 사이드에서 올라온 센터링을 정확한 트래핑으로 수비 한명을 제친 뒤, 다시 수비 머리 위로 공을 띄운 후 돌아 들어가 발리슛으로 넣은 골은 신기(神技)에 가까웠고, 상대편이던 스웨덴 관중의 기립박수까지 쏟아져 나왔다.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시멘토가 본명인 그는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축구공 하나로 명예와 부를 얻었다. 펠레는 13세에 브라질 프로축구 산토스에 입단한 이래 1363경기에 출전해 1281골을 뽑아내며 축구 황제로 군림했지만, 따뜻한 인간미로 더욱 사랑받았다.
브라질은 이후 1971년 7월 18일 펠레가 은퇴하기 전까지 62년 칠레월드컵,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해 ‘3회 우승한 나라가 영구 보유한다’는 FIFA의 규약에 따라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게 됐다. /
조선

 

 

 

 


1954 - 저우언라이-네루, '평화 5원칙' 발표

평화 5원칙

1954년 6월에 공포된 중국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인도대표 J.네루(Nehru, Pandit Jawaharlal)의 공동성명 속에서 중국-인도 양국의 우호적인 국가관계의 기초로서 확인된 5개 원칙으로, 평화적 공존의 5원칙이라고도 한다. 그 내용은 영토 ·주권의 상호존중, 불침략, 내정불간섭, 평등 ·호혜, 평화적 공존 등의 5개 원칙이다.

원래 이 5원칙은 1954년 4월에 체결된 중국-인도 양국간의 티베트에 관한 협정 전문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데, 인도차이나전쟁 해결을 위한 제네바회의가 난항 중이었던 이 시점에서 동서간의 냉전과 식민주의전쟁 등을 종식시키고, 세계평화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제관계 원칙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두 나라 수뇌의 희망이 재확인되고, 전세계를 향하여 제창되었다.

두 수뇌는 ‘이 평화5원칙을 확인한 나라들이 평화지역을 형성하고, 이 평화지역을 전세계에 파급시킨다’라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1954∼1955년 미얀마 ·북베트남 ·유고슬라비아 ·이집트 ·소련 등도 이 평화5원칙을 승인하고, 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참가 29개국은 이 원칙을 바탕으로 한 ‘평화10원칙’을 채택하였고, 그 후로 국제관계의 새로운 원칙으로 등장하였다. /네이버  

  

 

 

 

 

1950 - 북한 공산군 서울 점령

○ 6월 28일, 느닷없이 맞은 인공
“오전 3시경 식구들과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불이 번쩍하면서 ‘쿵, 쾅’ 하는 요란한 폭음에 소스라쳐 깼다. 둥실 떴다가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현희 교수가 회고하는 1950년 6월 28일의 기억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폭음은 한강인도교를 폭파하는 소리로 이때까지 남하하지 못한 서울 시민은 모두 고립됐다. 이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시민들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인공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밤사이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야 말았다”는 김성칠 교수의 기록처럼 서울은 이날부터 순식간에 인공 체제로 바뀌었다.
“거리에는 이미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고 학교 깃대엔 말로만 듣던 인공기가 나부끼고 있다.”(김성칠)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트럭을 탄 채 웃음을 띠고 시가지를 왕래하며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이현희)
아버지가 남로당 간부였던 김원일 씨는 “우리 가족도 28일 충무로에 인공기가 나부끼는 것을 보고야 서울이 점령된 것을 알았다”며 북한의 서울 점령이 순식간에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신분 역전 현상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보통(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해 소송기록을 순한글로 쓴대도 이해할 수 없을 판무식꾼이던 구멍가게 이윤기 씨가 인민위원회 간부이자 재판관으로 선출되고… 이력서의 출신에는 빈농과 노동자로 쓰는 게 제일 좋다고 한다. 갑자기 빈농의 아들이 되고 노동자의 아우가 된 교수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김성칠)

유성운 기자 /기독일보 2010/09/27

http://dc.christianitydaily.com/forum/board/cd_board.htm?mode=view&no=957&page=5&id=freeboard

 

한강인도교 폭파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한강 철교의 폭파는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한국전쟁-경과-발발) /위키백과

 

 

 

- Josip Broz Tito


1948 - 코민포름, 유고 공산당 제명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이 체코 공산당 기관지에 티토 중심의 유고공산당을 비난하며 유고공산당을 제명했다.

비난내용은 유고공산당과 지도자가 반소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계급투쟁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세력이 유고의 각 지방에서 발달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유고공산당은 이 비난결의를 거부했고 7월 21일 당대회에서도 거부를 재차 확인했다. 이후 코민포름과 유고공산당은 정면으로 대립, 동구권 여러나라는 유고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유고와 소련은 서로를 '적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




- 'A Kind of Loving'

 

1928 - 영국의 소설가 스탠 바스토우(Barstow, Stan) 출생





바스토우 [Barstow, Stanley "Stan", 1928.6.28~2011.8.1]



Stanley "Stan"Barstow FRSL (1928 6 28 - 2011 8 1 )은 영어 소설가였습니다.

전기

BarstowYorkshire, Wakefield 근처 Horbury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탄 광부 였고 그는 Ossett Grammar School에 다녔습니다. 그는 엔지니어링 회사의 기안자와 영업 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1960 년 소설 'A Kind of Loving'로 유명했으며, 영국 학교에서 오랫동안 세트 텍스트로 사용되어 왔으며 영화, TV 시리즈, 라디오 게임 및 무대 플레이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저자의 다른 소설로는 Ask Me Tomorrow (1962), The Watchers on the Shore (1966), The Right True End (1976)가있다. 그는 그가 자란 Ossett과 그의 생가 인 Horbury의 공개 행사에 자주 참석했습니다.

 

Barstow의 다른 작품으로는 Patrick Stewart, Raging Calm, Eros가있는 시즌, Right True End, A Brother 's Tale, Just You Wait See, Modern delights, 자서전 등이 포함 된 Joby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1).

 

최신 생활에서 Barstow는 그의 파트너 인 Diana Griffiths와 함께 사우스 웨일즈의 Pontardawe에서 살았습니다.







1921 - 자유시사변(흑하사변) ; 러시아 적군과의 교전으로 독립군 2백70명 전사, 9백여명 포로

자유시사변 []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한국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

흑하사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노령()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미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독립군은 다시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을 자유시에 집결해,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상하이파[]의 이동휘계인 박애 등이 장악했던 극동공화국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그 관할 아래 두도록 하였다.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사할린의용대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네이버 



 

1919 - 베르사유 강화조약 조인

제1차대전 발발의 원인이었던 사라예보 총격사건이 있은지 만 5년째가 되는 1919년 6월 28일 오후 3시12분, 베르사유궁에서 독일대표단이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영토의 일부를 넘겨야 했다. 이 결과 독일은 전쟁전에 비해 10% 이상이나 되는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지됐다. 육군은 10만 이하로, 해군은 보유함 10만톤 이하로 제한됐고 공군과 징병제는 금지됐다. 200억 마르크의 배상금도 결정됐다.

6월16일 조약내용이 알려지자 샤이드만 수상은 서명을 거부했고 내각은 21일 총사퇴했다. 학생들은 프랑스기를 불태우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2일 샤이드만 수상의 뒤를 이은 바우어 내각은 국민의회를 통해 조약수락을 결정했다. /조선

 

 

- 제1차 세계대전

 

1914 -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역사속의 오늘-'사라예보 사건' 발생

"탕, 탕"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주도 사라예보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한 세르비아 청년이 쏜 이 두 발의 총알이 인류의 운명을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 살상전으로 변할 줄 당사자는 알고나 있었을까?

청년(가브릴로 프린치프)의 흉탄에 희생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계승자였던 F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였다. 육군연습을 독려하려 이날 방문한 이들을 차량 행렬 도중 저격한 것이다.

당시 발칸반도는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말 그대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던 일종의 ‘화약고’였다.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슬라브주의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특히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줄곧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당해 있었다. 민족 독립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남슬라브민족의 통일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바로 ‘사라예보 사건’이었던 것.

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여기에 민족주의가 작용, 러시아와 독일, 영국`프랑스까지 개입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종극을 향해 치닫던 제국주의는 결국 전 인류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어 버렸다.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매일신문 2005년 06월 2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0936&yy=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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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 괴페르트 마이어(Goeppert-Mayer, Maria) 출생  

괴페르트 마이어 [Goeppert-Mayer, Maria, 1906.6.28~1972.2.20]

 

독일의 물리학자.

독일의 J. 한스 다니엘 옌젠, 미국의 유진 폴 위그너와 함께 원자핵이 지닌 미세한 성질을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껍질구조로 설명하여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30년 괴팅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의 물리화학자 조지프 E. 마이어와 결혼하여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로 갔다. 1939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서 우라늄 동위원소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1945년 시카고대학교의 핵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1949년 마이어는 핵껍질이론을 써서 특정한 수의 중성자(50, 82, 126)와 그것과 똑같은 특정한 수의 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의 안정성과 풍부함을 설명했다. 옌젠과 함께 〈핵 껍질구조에 대한 기초이론 Elementary Theory of Nuclear Shell Structure〉(1955)을 썼다. /브리태니커

 

 

 

 

 

1902 - 미국의 뮤지컬 코미디 작곡가 로저스(Rodgers, Richard) 출생

로저스 [Rodgers, Richard Charles, 1902.6.28~1979.12.30]

미국 뮤지컬 코미디의 대표적 작곡가.

특히 대본가 로렌츠 하트와 오스카 하머슈타인 2세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명하다. 젊은시절 아마추어 소년 클럽 쇼를 위한 노래를 작곡했고, 1918년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에서 하트를 만나 1919년 컬럼비아에서 공연한 버라이어티쇼 〈Fly with Me〉 제작에 참여했다. 뮤지컬(뮤지컬 코미디) 작곡에 전념할 생각으로 1년 반 만에 컬럼비아대학을 중퇴한 뒤, 2년 동안 뉴욕 시에서 오늘날 줄리어드 스쿨의 전신인 뉴욕 음악예술원에서 작곡을 배웠고 하트와 함께 몇몇 아마추어 쇼를 제작했다.

로저스와 하트가 처음으로 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은 레뷰 〈The Garrick Gaieties〉(1925)로, 이 작품에는 노래 〈맨해튼 Manhattan〉이 포함되어 있다. 1936년 코미디 〈On Your Toes〉을 제작하였으며 이 작품에서 조지 밸랜친의 안무에 의한 재즈 발레 〈10번가의 살인 Slaughter on Tenth Avenue〉를 도입하여 무용을 뮤지컬 코미디의 한 부분으로 확립하였다. 하트와 공동작업 한 또다른 작품으로는 〈Babes in Arms〉(1937:〈My Funny Valentine〉·〈The Lady Is a Tramp〉가 포함되어 있음), 〈천사와의 결혼 I Married an Angel〉(1938), 셰익스피어의 〈실수연발 Comedy of Errors〉을 개작한 〈시라쿠스 출신 소년들 The Boys From Syracuse〉(1938) 등이 있다. 존 오하라의 일련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역시 하트와의 공동작 〈친구 조이 Pal Joey〉(1940)는 현실 도피적 여흥에서 진지한 극으로 방향을 바꾼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제작 당시로서는 너무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1952년 재공연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노래 가운데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가 유명하다. 이들의 공동작업은 하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나온 〈By Jupiter〉(1942)가 마지막이 되었다.

1942년 로저스는 하머슈타인과 공동작업을 시작했으며, 첫 작품으로 린 리그스의 희곡 〈Green Grow the Lilacs〉을 기초로 한 작품을 내놓았다. 이것은 1943년에 〈오클라호마 Oklahoma!〉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어 1944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2,248회라는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을 기록하게 되었다. 아그네스 드밀이 안무를 맡았던 이 작품에는 〈Oh, What a Beautiful Morning〉·〈The Surrey with the Fringe on Top〉·〈People Will Say We're in Love〉와 같은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로저스는 이 작품을 필두로 하여 하머슈타인이 사망할 때까지 17년 동안 함께 작업하였다. 〈카루셀 Carousel〉(1945)과 실험적인 〈알레그로 Allegro〉(1947)는 덜 성공적이었으나 〈남태평양 South Pacific〉(1949)은 브로드웨이에서 〈오클라호마〉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장기 공연되었고, 1950년 두번째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남태평양〉에서 인종적 편견을 다루고 음악과 인물을 대응시킴에 있어서 범상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작품에는 〈Younger than Springtime〉·〈Some Enchanted Evening〉·〈I'm Gonna Wash That Man Right Outa My Hair〉와 같은 노래들이 등장한다. 뒤이어 나온 작품 〈왕과 나 The King and I〉(1951)는 이국적 성격으로 주목할 만하며, 그뒤를 이어 〈파이프 드림 Pipe Dream〉(1955)·〈꽃북의 노래 The Flower Drum Song〉(1958)를 작곡했으며, 1959년 주요성공작 가운데 하나인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을 발표했다. 그외에도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에서의 승리 Victory at Sea〉(1952)가 있다. /브리태니커

 


 


1900 - 폴란드의 소설가, 극작가 크루치코프스키(Kruczkowski, Leon) 출생

크루치코프스키 [Kruczkowski, Leon, 1900.6.28~1962.8.1]

폴란드의 소설가·극작가.

사회주의적 정치관을 지닌 그는 첫번째 장편소설 〈코르디안과 촌뜨기 Kordian i cham〉(1932)를 발표하면서 유명해졌다. 작가 자신에 따르면 이 소설은 '역사적 발전의 폭넓은 시각에서 농민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통해 1830년 11월 폴란드 봉기의 원인을 계급투쟁의 한 측면으로 파악했다. 이같은 사회적·역사적 분석법은 계속해서 농민운동을 그린 또다른 작품 〈공작의 깃털 Pawie pióra〉(1935)과 화이트 칼라 노동자의 상황을 다룬 〈올가미 Sidła〉(1937)에서도 사용된다.

군대에 입대했다가 1939년 포로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고 국정 및 당무에서 매우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희곡 〈독일인들 Niemcy〉(1949)은 독일인들 사이에 나치 이데올로기가 급속히 확산되는 과정을 분석한 작품이다. 한편 〈자유의 첫째날 Pierwszy dzień wolności〉(1960)에서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성 간의 갈등을 재고하고 있다. 마지막 희곡 〈통치자의 죽음 Ṡmierć gubernatora〉(1961)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학을 검토하고 이에 반대해 사회주의 집단의 인도주의적 원칙을 내세웠다. /브리태니커

 





그 날의 오늘 사건 들

 

 

1873 - 프랑스의 외과의사, 생물학자 카렐(Carrel, Alexis) 출생

 

1867 - 이탈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피란델로(Pirandello, Luigi) 출생

 

1836 - 미국 제4대 대통령 매디슨(Madison, James) 사망

 

1831 -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Joachim, Joseph) 출생

 

1819 - 프랑스의 풍경화가, 판화가 아르피니(Harpignies, Henri) 출생

 

1813 - 프로이센의 장군, 군제개혁자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Gerhard von) 사망

 

1800 -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 승하

 

1719 - 프랑스의 외교관 겸 정치가 슈아죌(Choiseul, Étienne-François de) 출생

 

1712 - 프랑스의 철학자, 교육학자 루소(Rousseau, Jean-Jacques) 출생

 

1577 -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Rubens, Peter Paul) 출생

 

1491 - 잉글랜드의 왕 헨리 8(Henry VIII)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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