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과 사건 06.2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14년이 지난 1984년 오늘,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공사비 2천39억 원을 들여 착공한 지 33개월 만에 완공됐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구간 시멘트 콘크리트 포장도로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영,호남 지역의 인적, 물적 교류가 원활해지고 주행시간도 종전 국도의 3시간 30분대에서 2시간 30분대로 줄었다. 개통식이 거행된 지리산휴게소에서는 영,호남 출신 신랑, 신부 여덟 쌍의 결혼식이 열려 동서 화합의 의미를 되새겼다. /YTN
1977 - 지부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7년 6월 27일 동아프리카의 지부티 공화국이 독립했다. BC 3세기경에 아블레 이민들이 아라비아로부터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말리계의 이사족이 아블레 이민들의 후손인 아파르족을 축출하고 해안지방에 새로이 정착했다. 16세기까지 아랍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1862년 프랑스가 오보크를 획득하고, 1888년에 프랑스 소말리 해안령을 창설했다. 지부티 시는 1892년에 이 프랑스령의 공식 수도가 되었다. 1946년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는 해외 준주(準州)의 자격을 얻었고, 1958년 해안령은 제5공화국하의 프랑스 공동체에 해외 준주의 일원으로 가입하기로 가결했다. 1977년 프랑스령 아파르족과 이사족 준주는 지부티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두 종족 사이에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에리트레아와 오가덴의 교전지대 난민들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브리태니커
1970 -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오스카상 수상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970년 오늘,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으로부터 오스카상을 받는다.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전기영화에 출연해 피아니스트로서는 이례적으로 오스카상까지 받게 됐다. 쇼팽 해석의 대가로 이름난 루빈스타인은 1982년 12월 20일 아흔세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YTN
1969 - 축구전쟁의 실마리가 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월드컵 예선전(예선 최종전)
멕시코월드컵 예선전과 축구전쟁 (화상 정리)
1차 예선전 (1969.6.08) (온두라스 테구시갈파) 온두라스 1:0 승리
2차 예선전 (1969.6.15)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엘살바도르 3:0 승리
3차 최종전 (1969.6.27) (멕시코 멕시코시티) 2:2 무승부,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 3:2 승리
축구전쟁 시작 (1969.7.14) 엘살바도르 국군(공군, 육군) 온두라스 침공
축구 전쟁은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간에 벌어진 5일간의 전쟁이다. 축구전쟁은 1969년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붙은 시비가 명분이 되었지만, 진짜 이유는 두 나라 간에 정치적 갈등때문이었다, 축구 시합은 기폭제 역할이었다.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영토 문제 등으로 발발했으며, 엘살바도르에서 온두라스로 간 이민자 문제도 포함되었다. 전쟁은 엘살바도르군이 1969년 7월 14일, 온두라스를 전격 침공하면서 벌어졌고, 미주기구의 중재 끝에 8월초 엘살바도르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일단 끝났다. 11년 후인 1980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영토 문제 해결 등을 포함한 양국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위키백과
축구전쟁 - 월드컵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면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전쟁을 꼽는다.
지난 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이듬해 열릴 제9회 멕시코월드컵대회 본선출전 티켓을 놓고 북중미 최종예선 A조에서 맞붙는다. 결과는 엘살바도르의 승리.
그러나 양국은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5일전쟁이 불가피했다. 전쟁의 싹은 2차전이 끝난 뒤 움텄다.
69년 6월 8일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 갈파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패한 엘살바도르는 1주일 뒤 자국의 수도 산살바도르로 옮겨 열린 2차전에서는 3-0으로 크게 이긴다. 그러나 2차전에서 비극의 서곡이 울린다.
원정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엘살바도르의 텃세판정에 항의하다 두들겨맞고 쫓겨나고 만 것.
구타 소식은 단숨에 온두라스 전역으로 퍼졌고, 흥분한 온두라스 국민은 그날밤 보복에 나선다.
수도 테구시갈파에 있는 엘살바도르인의 집을 습격해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엘살바도르사람만 만나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희생자가 속출했고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다.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의 수입금지로 맞대응했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 양국은 마침내 국교를 단절하고 만다.
긴장이 한껏 고조된 가운데 두 팀은 6월27일 멕시코시티에서 마지막 승부인 3차전을 치른다.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에서 펼쳐진 이 경기서 두팀은 전·후반을 2-2로 비겼으나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터뜨린다.
엘살바도르는 승리의 환희에 젖었지만 온두라스에서 희생된 자국국민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며 7월13일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야포와 전차·전투기를 총동원한 전면전은 5일만에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의 항복을 받아내 막을 내리지만 양국에서 2천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다.
http://www.soccerline.co.kr/slboard/view.php?code=totalboard&page=1&uid=1997310263&keyfield=&key=&period=
- Alexander Dubcek
1968 -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1968년 6월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이 발표됐다. 작가 바츠리크가 기초한 선언에는 마라톤 영웅 자토펙과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포함, 7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했다.
`자유민주화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해 보수세력을 몰아내라`는 호소를 담고 있는 이 선언으로,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을 추진해 온 두브체크와 당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년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조선
1950 - 유엔 안보리, 한국 원조를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 10시(한국시각 25일 낮 11시),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비슷한 시각, 무초 주한 미 대사도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로 달려간 장면 대사는 딘 러스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3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공산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는 미국의 결의안이 9대0으로 채택됐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다시 474차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이 7대1로 채택됐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조선
정부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즉시, 주미 한국대사 장면(張勉)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알렸고,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상임이사국의 하나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케 하는 한편 유엔회원국들에게 남한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북한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의 요청은 북한에 의해 묵살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고, 27일 미국대통령 H.S. 트루먼은 한반도의 전쟁이 타이완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제7함대를 급파,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28일 도쿄[東京(동경)]에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관인 D. 맥아더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관할권을 미국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남한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남한을 원조하기 위하여 파견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yahoo
- Scenes from Film 'Potemkin' by Eisenstein
- Eisenstein and Potemkin
1905 - 러시아 전함 포템킨호 수병 반란
6월27일, 흑해 북쪽 오데사항에 주로 입항해 온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포템킨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혁명의 기운이 러시아 전역에 휘몰아치고 장교들의 부패와 횡포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부실한 식사를 거부하던 수병 1명이 장교에게 사살된 것이 발단이 됐다.
함장과 장교들을 모두 사살하고 파업이 한창이던 오데사항에 입항, 수병 일부가 총파업에 가담하자 가장 용맹하다는 코사크 기병대가 투입됐다. 남녀노소 할 것없는 무차별 학살이 전개되고 포템킨호도 이에 응수, 시가를 향해 포격을 시작함으로써 오데사는 피로 물들었다. 다른 흑해함대까지 동원해 포템킨호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수병들의 발포거부로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포템킨호는 육상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수병들의 투지도 급격히 떨어지자 7월8일 루마니아의 콘스탄츠 군항으로 탈출했다. 루마니아가 러시아의 수병인도를 거부해 이들 중 상당수는 루마니아에 정착하거나 캐나다ㆍ미국ㆍ브라질 등으로 이주했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수병 54명은 사형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조선
러시아 전함 폭동 발발
1905년 6월 27일 러시아 전함 포템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는 구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이 다양한 양상의 시위로 터져나왔다. 이러한 시위는 동궁 앞 광장의 군중을 무차별 살상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 해 연안지방, 그루지야 등으로 확산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차르 체제에 반발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오데사 항에 정박 중이던 전함 포템킨호에서도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10월에 시작된 철도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되면서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 소비에트가 급속히 파급되자 니콜라이 2세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후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05년의 혁명을 기념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했는데,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이 포템킨호 폭동을 다룬 영화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yomkin>을 만들었다. /브리태니커
1884 - 프랑스의 철학자, 시인 바슐라르(Bachelard, Gaston, 1884~1962) 출생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詩論) ·이미지론(論)으로도 유명하다. 1927년 《근사적 인식(近似的認識)에 관한 시론》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디종대학의 강사·교수를 거쳐 1940년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 대학 부속인 과학사 ·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動的)인 변화발전의 위상(位相)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非)뉴턴 역학적(力學的)인 성격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비결정론(非決定論)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樣式)을 ‘비(非)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否定)의 철학》(1940)에서 ‘비(非)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이상의 저작에서 과학이 초래하는 새로운 인식에 대하여 개방된 정신,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면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의 목표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해’의 정신분석에 의한 배제였다. 이러한 방향은 앞서 말한 과학의 진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근저(根底)에서 교착되면서 시와 이미지의 자유분방한 역동성(力動性) 자체를 구하는 ‘4원소(元素)’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으로 발전하였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상보적(相補的)’으로 전개시킨 바슐라르의 사상적인 영위는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한 동시에 J.피아제와 L.알튀세르 또는 G.캉길램을 통하여 M.푸코에게로 다채로운 영향을 끼쳤다. /naver
1880 - 미국의 교육자, 저술가 헬렌 켈러(Keller, Helen, 1880~1968) 출생
켈러는 중증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준 미국의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다. 그녀는 19개월 되던 때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시각과 청각을 잃고 벙어리가 되었다. 7세에 스승 앤 맨스필드 설리번을 만나 특수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점자를 읽고 쓰게 되었고, 9세에는 음성기관의 촉지를 통해 말하기를 익혔다. 놀라운 학습력 덕분에 '기적의 아이'로 불리면서 유명해졌다. 1904년에는 래드클리프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1921년부터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동안 미국맹인재단을 위해 일했고, 세계 각처의 순회강연을 통한 장애자 교육에 힘썼다. <내 삶의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1902)·<나의 선생님 앤 설리번 메이시 Teacher : Anne Sullivan Macy>(1955) 등 많은 책을 썼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브리태니커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너무나 오래 바라보느라고
우리를 위해 열린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렌 켈러
1872 - 미국의 시인, 소설가 던바(Dunbar, Paul Laurence, 1872~1906) 출생
오하이오주(州) 데이턴 출생.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엘리베이터 보이 등을 하면서 시작(詩作)에 전념, 제1시집 《떡갈나무와 담쟁이덩굴 Oak and Ivy》(1893), 제2시집 《장조와 단조 Majors and Minors》(1895)를 자비출판하였다.
이어서 위의 두 시집을 정리 《하층생활의 서정시 Lyrics of Lowly Life》(1896)를 발표하였는데, 이 시집은 W.하윌스 서문에 의하여 유명해졌다. 그후 강연, 영국 여행, 국회 도서관원 일 등으로 과로가 겹쳐 결핵으로 33세에 요절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시집 《사랑과 웃음의 서정시》(1903) 《햇빛과 그림자의 서정시》(1905), 소설 《광신자》(1901) 《신들의 놀이》(1902) 등이 있다. /naver
1850 - 불가리아의 시인, 소설가 바조프(Vazov, Ivan, 1850~1921) 출생
소포트 출생. 터키 통치시대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학에 열중하여 러시아 ·프랑스의 문학서를 탐독했으며, 나중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76년 4월 터키에 대한 국민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루마니아로 망명, 거기에서 조국 국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애국의 정열을 쏟아 노래한 3부작 시집 《기(旗)와 구스라》(1876) 《불가리아의 슬픔》(1877) 《행방》(1878)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에는 산문과 극작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는데,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멍에 Pod igoto》(1890)는 탄압을 피하여 러시아에 망명했을 때 쓴 작품이다.
이어 동시대의 현실을 다룬 소설 《새로운 땅》(1896)을 비롯하여 많은 단편과 중편을 발표하였으며, 사극(史劇) 《보리슬라프》(1909) 《이바이로》(1913) 등으로 조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후기의 작품들은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후퇴하였다. /naver
1846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파넬(Parnell, Charles Stewart, 1846~1891) 출생
영국 의회의원(1875~91)을 지냈으며 19세기말 아일랜드 자치 운동을 이끌었다. 1889~90년 캐서린 오셰이와의 간통사건이 사실로 밝혀짐으로써 곧 결혼했다.
그는 보통의 영국계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 지주계층 집안과는 달리 반영 감정이 뿌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부모는 이때문에 그에게 같은 계층의 다른 아이들이 받는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기술학교를 3군데 다녔으나 거기서 불행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들어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1869년 매우 사소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학을 받았고 이후 복학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 /브리태니커
1771 - 스위스의 교육개혁가 펠렌베르크(Fellenberg, philipp Emanuel von, 1771~1844) 출생
1799년 호프빌의 토지를 사들여 노작과 농업 및 학문 교육을 결합한 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을 통해 실현하려 한 사회적 목표는 빈민의 생활조건을 개선하여 상층 계급과 조화를 꾀하는 데 있었다. 처음에는 J. H. 페스탈로치와 함께 일했으나 의견 차이로 결별했다. 처음에는 그의 계획이 비웃음을 받았으나 차츰 유럽 전역에서 농업 훈련과 그의 학설에 결부된 도덕적 훈련과 농업 훈련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 /브리태니커
- Louis XII and Lucien Grimaldi
1462 - 프랑스 왕 루이 12세(Louis XII, 1462~1515) 출생
블루아 출생. 샤를 6세의 동생 루이 오를레앙의 손자이며, 시인 샤를 오를레앙의 아들로 블루아에서 태어났다. 샤를 8세의 등극 무렵 섭정 안 드 보죄에 대한 제후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뒤에 풀려나서 국왕을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하였다. 국왕 샤를 8세가 후사(後嗣) 없이 죽자 1498년 왕위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문물을 동경하고 밀라노의 계승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여, 1503년과 1513년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 두 차례 모두 패하여 그의 꿈이 좌절되었으나,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들여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상비군제도의 정비, 도로 건설, 수리시설 개선, 농민 보호, 관료조직의 확충, 지방관습법 편찬, 소송제도의 개선 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많은 외국 학자와 문인들을 불러들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길을 열었다. 1506년 삼부회(三部會)로부터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naver
1040 - 헝가리 왕 라슬로 1세(Laszlo I, 1040~1095) 출생
1192년에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6월 27일. 헝가리의 왕.
영토를 크게 넓히고 왕국을 내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역대 헝가리 왕 가운데 국민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은 왕이다. 헝가리 왕 벨로 1세와 폴란드 왕녀 리크사의 아들로, 부모가 망명하고 있을 때 태어났다. 형제인 게자와 헝가리로 돌아온 뒤 사촌인 잘로몬과의 왕위 다툼 끝에 잘로몬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1073) 게자가 왕위에 올랐다. 게자가 죽자(1077) 그 뒤를 이어 헝가리 왕 라슬로 1세가 되었다.
헝가리 국경을 트란실바니아까지 넓히고 크로아티아 군주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인 자기 누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크로아티아를 점령했다(1091). 주교 지명과 서임(敍任) 문제를 둘러싸고 황제와 교황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교황편을 들었지만 한편으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는 화해정책을 폈다. 헝가리 영토에 사는 이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크로아티아에 로마 가톨릭을 전파했으며 자그레브 주교구를 신설했다(1091). 훌륭한 법전을 만들어 국내 질서를 바로잡고 나라를 번영시켰으나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할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헝가리의 이상적인 기사로서 국민들에게 성인으로 칭송받다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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