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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사건 06.27

오늘의사건  06.27

  

2009 -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9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 탄생

‘조선왕릉’이 한국의 9번째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7일 새벽(한국시각)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33차 회의를 열어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확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경주 석굴암ㆍ불국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서울 종묘·창덕궁, 수원 화성(이상 1997년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지정)에 이어 조선왕릉을 8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추가했다. 2007년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까지 합쳐 한국의 세계유산 총수는 9건으로 늘었다. 또 2004년 문화유산에 등재된 북한·중국의 고구려 고분군을 포함하면 남북한의 세계유산은

모두 10건이 된다.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해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에 흩어진 조선시대 왕릉 42기 가운데 북한 개성 부근에 있는

제릉(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를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바 있다.

뒤이어 지난 4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왕릉 40기를 사전 실사하고

제출한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려 세계유산 등재가 유력시돼 왔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포함해 30건을 등재신청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2009-06-27 오전 01:48:01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62670.html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정-9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 탄생

한국에 9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탄생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7일(한국시각) 스페인 세비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3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에 대한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 등재를 확정했다.

이로써 한국은 석굴암ㆍ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이상 1995), 창덕궁, 수원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 그리고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2007)에 이어 통산 9번째

세계유산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이번 조선왕릉을 포함한 한국의 세계유산 9건 중 인류의 자취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은 8건이며,

자연유산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이다.

2004년 문화유산에 등재된 북한 및 중국 소재 고구려 고분군을 포함하면 한민족의 세계유산은 모두 10건이 된다.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인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즉석에서 “새로운 세계유산을

등재하게 된 한국은 그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감을 다해 조선왕릉 보존에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WHC 자문기구로 심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WHC에 제출한 '조선왕릉에 대한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등재권고' 판정을 내림으로써 이변이 없는 한, 조선왕릉의 등재가 확실시됐다.

이 보고서에서 ICOMOS는 조선왕릉이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중요한 장례전통과 풍수사상을 간직하고,

건축과 경관은 동아시아 무덤 건축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며 나아가 그곳에서 현재도 왕릉 제례가 열리고 있다고 '등재 권고'의 이유를 밝혔다.

반면 자연유산 분야로 함께 등재 신청을 한 '한국의 백악기 공룡 해안(Korean Cretaceous Dinosaur Coast)'은 그 실사를 담당한 WHC 자문기구인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등재불가' 판정을 내려

한국은 이날 세계유산 등재 심사 직전 신청을 공식 철회했다.

세계유산은 원칙적으로 '재심'이 불가능한 까닭에 추후 재신청을 위한 길을 열어 놓고자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한 것이다.

(세비야=연합뉴스) 한겨레 2009-06-27 오전 09:25:07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62675.html

- International Conference on Water Related Disaster Reduction

UN/ISDR, Kajikistan, 27-29 Jun 2008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2008 -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나체 자전거 타기 운동

6월27일 그리스 테살로니키(Thessaloníki)에서 나체 자전거 타기 운동이 열렸다. 이 행사는 테살로니키 시의 환경오염

예방과 교통 체증 완화를 위한 취지로 열렸는데, 경찰은 "민망한" 차림의 참가자 중 한 명을 경고 끝에 체포해야 했다고. (c)AFP

[테살로니키=AFP] /AFP BB News 2008/06/30 16:35 발신지:Thessaloníki/그리스 /라이프

http://www.afpbb.co.kr/article/life-culture/environment-universal/2023954/247915

 

2007 - 제주 화산섬·용암동굴 세계자연유산 등재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7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1차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신청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전문가그룹인 국제자연보전연맹의 ‘등재 권고’를 받아들여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과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거문오름,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로 이뤄졌다. 제주 세계자연유산지구는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1%인 187.2㎢와

공유수면 1.2㎢ 등 모두 188.4㎢다.

우리나라에는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등 7곳의 세계문화유산이 있으나,

자연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국제자연보전연맹은 2006년 10월 제주도를 현지 방문해 자연환경 상태를 세밀히 조사했으며, 지난 5월 경관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뛰어나다며 등재권고 의견을 세계자연유산위원회에 냈다.

세계자연유산은 에베레스트산, 미국의 그랜드캐년,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섬 등이 있고, 일본에 3곳,

중국에 5곳 등 전세계적으로 모두 162곳이 지정돼 있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한겨레 2007-06-27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218793.html

 

2007 - ‘제주 화산섬·용암동굴’ 세계자연유산 등재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27일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는 이날 오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1차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신청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전문가 그룹인 국제자연보호연합(IUCN)의

권고를 받아들여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했다.

국내 자연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명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 대표단장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세계자연유산 등재 수락 연설에서 한국의 자연유산 등재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

세계유산위원국에 감사를 표시하고 2010년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 제주도 개최를 공식 제안했다.

제주 세계자연유산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 응회환,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등 크게 3개 자연유산으로 이뤄졌고,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다시 거문오름,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 기생화산(오름)

1개와 용암동굴 5개를 포함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부문 자문기구인 국제자연보호연합(IUCN)은 지난 5월 세계유산위원회에 보낸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보고서에서 "경관적 아름다움과 지질학적 가치가 세계유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밝혔다.

IUCN은 "한라산과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에서 화산활동의 특징과 중요한 역사가 뚜렷이 나타나며, 성산일출봉 응회환은

수중분출 화산의 이해를 돕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유 청장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도 세계자연유산을 갖게 돼 삼천리 금수강산의 자존심을 세우게 됐으며, 제주를 중심으로 한국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세계에 널리 알려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남해안 공룡발자국과 조선시대 왕릉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추진과 문화재청내 세계유산관리과 신설 방침을 밝혔다.

제주도를 대표한 김태환 지사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1주년을 맞아 세계 자연유산 등재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됐다"며 "세계적으로도 유일하고 빼어난 화산섬의 경관을 보존하는데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김 지사는 이어 "아무리 훌륭한 자연유산을 갖고 있을 지라도 제주 도민의 노력이 없었다면 세계유산 등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등재 준비기간을 포함해 5년이 넘도록 한 마음이 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해준 도민들에게 감사 드린다"고 덧붙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제주도 관광업계와 학계, 시민들도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제주도관광협회 문종환 사무국장은 "그동안 중화권이나 일본에서 많이들 제주를 방문했지만 유럽이나 미주권에서 제주를 찾는 관광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며 "이번 쾌거로 전 세계적으로 제주도가 알려져서 유럽이나 미주지역의 관광객도 많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제주화산연구소 윤성효 운영위원장은 "제주도 전체는 아니지만 한라산, 성산일출봉, 검은오름, 용암동굴계가 국내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할 일"이라며 "세계자연유산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제주시에서 수산업체를 운영하는 이호성(45)씨는 "세계자연유산을 가진 제주도민이라는데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며 "앞으로 더 많은 관광객이 제주를 찾아 침체된 제주 경기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 세계자연유산 지구는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1%인 187.2㎢와 공유수면 1.2㎢ 등 모두 188.4㎢이다.

(크라이스트처치<뉴질랜드>=연합뉴스) 한겨레 2007-06-27 오후 04:03:06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218679.html

 

2007 - ‘80년 5월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씨 타계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 없는 곳으로’
‘80년 5월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씨 타계

‘5월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이 27일 오후 1시32분 타계했다. 60살.

윤 소장은 지난 25일 서울에서 폐 이식수술을 받은 뒤 경과가 좋았으나, 이날 새벽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결국 운명했다.

고인은 고문과 투옥, 밀항 등으로 건강이 나빠졌고, 1994년 폐기종이 생겨 수년째 투병 생활을 해왔다.

전남 강진 출신인 윤 소장은 민주화 운동의 외길을 걸어왔다. 전남대 농대 재학 시절인 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조작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년 만에 석방된 뒤 광주지역 청년운동의 중심 구실을 해왔다. 그는 79년 10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붙잡혀 석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5·18 민중항쟁 직후에는 배후 주동자로 전국에 수배돼 11개월 동안 도피하다가 81년 4월 3만5천t급 무역선을 타고 한평반짜리 화장실에 35일 동안 숨어서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는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세웠고, 미국·일본과 유럽에 ‘한청련’을 결성해 국외에서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망명 기간에 ‘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 때문에 미국 생활에 의도적으로 적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킨 것도 고인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윤 소장은 93년 수배가 풀리자 귀국한 뒤, 광주로 돌아와 5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인사와 단체들을 거침없이 비판해 ‘광주의 쓴소리’로 불렸다.

그는 94년 5·18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하고도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다만, ‘노동자의 누이’ 고 박기순씨와 5·18 민중항쟁 때 영면한 윤상원·박용준씨 등 ‘들불 열사’ 7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아

5·18 상무공원에 추모 조형물을 세웠다.

윤 소장은 지난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시상식 때 지인들에게 “폐가 10%밖에 기능을 못해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가쁘다”며 “바깥출입을 못하는데 ‘들불’ 때문에 어렵게 왔다”고 말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고인의 옆 감옥에 갇혔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이날 저녁 9시께 빈소에 도착해 “한국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 스러져 가슴이 아프고 애석하다”고 말했다.

윤 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신경희(46)씨가 있다. 장례는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을 중심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30일 오전 민주사회장(4일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장지는 국립 5·18민주묘지다. (062)231-8901.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 2007-06-27 오후 06:52:38

http://blog.ohmynews.com/leerberg/tag/%EB%93%A4%EB%B6%88%EC%95%BC%ED%95%99 

 

2007 - 영, 브라운 시대 개막…블레어 ‘중동특사’로

‘만년 2인자’ 털고 총리관저 입성…친미정책 약화 예상

영국이 ‘10년 총리’ 토니 블레어를 떠나보내고, 고든 브라운 새 총리의 시대를 맞았다.

브라운 신임 총리는 27일 총리실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다우닝가 10번지 총리실에 입성해 “변화의 작업을 시작합시다”라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전했다. 앞서 브라운 총리는 부인 세라와 함께 버킹엄궁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방문해 정부를 이끌어 달라는 여왕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는 군주에 대한 충성의 뜻으로

여왕의 손에 입맞춤해 신임 총리직을 맡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브라운 총리는 1997년 노동당 집권 후 10년 동안 연평균 2.7%의 경제성장률로 유럽 최고 호황을 기록한 영국 경제성장

신화의 주역이다. 무뚝뚝한 표정에 일밖에 모르는 실무 행정가 스타일인 그는 ‘블레어의 만년 2인자’ 10년을 견뎌내고 총리에 올랐다. 실용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중시하지만 블레어 총리보다는 좌파 성향이 좀더 강하다.

이라크전과 관련해 “실책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그의 통치 동안 친미 정책도 약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블레어 총리는 27일 의회에서 ‘총리와의 질의’를 마지막으로 공식 일정을 마감했다. 그는 이날 영국 병사들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닥친 위험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이다”라며 이라크에서 예정보다 병력을 더 감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에이피>가 전했다. 그는 버킹엄궁에서 여왕에게 사직서를 냈다. 퇴임 뒤엔 곧바로 유엔,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의 ‘중동 평화 특사’로 변신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다.

노동당 출신 최장수 총리로 기록된 그는 영국 경제의 체질을 개선했다는 호평도 받았지만, 이라크 전쟁에 앞장서는 등

지나친 친미 외교로 ‘부시의 푸들’으로 낙인찍혀 있다.

박민희 기자, 연합뉴스 minggu@hani.co.kr 한겨레  2007-06-27 오후 11:52:3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218894.html 

 

2005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서 `박지성길` 개통식 

박지성길 개통

6월 27일 오후 4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서는 길이 1.38Km, 폭 35m의 왕복 6차선 도로인 「박지성 길」이 주인공인 박지성 선수와 손학규 경기도지사, 김용서 수원시장 등의 내빈과 지역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정식 개통식을 가졌다.
이 도로는 손학규 지사가 도지사 당선 직후 2002년 6월 17일 포르투갈 전에서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을 결정하는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의 수원 자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민들과 대화 중 영통구 신동부터 망포동까지 도로를 개설해 달라는 건의를 듣고 “박지성 도로”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개설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 「박지성 길」에 대한 도비를 지원하여

이날 개통하게 되었다.
박지성 선수는 지난 6월 1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과 관련하여 많은 고민이 있던 중에도 경기도청을 방문하여

손학규 경기도지사를 만나 네델란드리그 챔피언 넥타이를 선물하며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총 315억(국비 10억,도비 175억, 시비 130억)원이 투입된 이 도로에는 느티나무, 넝쿨장미 등 1만여 그루의 가로수가 식재되어있고, 박지성 캐릭터(3.5m×2.0m)로 장식된 163평(540㎡) 규모의 쌈지공원과 메타세콰이어와 사철나무가 식재된 90평 규모의 박지성 숲, 지성쉼터와 방죽쉼터로 이름 붙여진 각각 35평규모의 쉼터가 있다.
또한, 박지성 선수의 어제와 오늘을 그려 넣은 86m의 방음벽에는 박선수의 경기사진과 족상이 전시된다. 이외에도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이사장 손학규)은 경기장 1층에 위치한 월드컵기념관 안에 '박지성 기념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이날

오후 2시 30분에 박지성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오픈 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박지성의 유니폼·축구화·각종 기념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코너 제막식과 한국선수 최초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골을 터트릴 때 신었던 축구화 전달식 등으로 이뤄질 예정이며 박 선수가 세계적 축구선수로 인정받아 빅리그에 진출하게된 것을 축하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박지성 길」이 이미 전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된 만큼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들과 박지성 선수의 팬

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사랑받는 명소가 되고, 박선수 개인에게도

고향을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http://www.openchronicle.com/stories/89/posts/1657?lang=en

 

월드컵 영웅 이름 딴 수원 박지성 길(路) 

'박지성 길'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이 16강 진출을 결정짓는 골을 넣은 뒤 수원 출신인

박지성 선수의 집을 방문한 당시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약속에 의해 2004년 5월에 착공해 2005년 6월 27일에 개통된 길로

경기도 화성시 기산동에서 시작해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 영통대로까지 이어지는 길이 1.38km, 왕복 6차로의 길이다.

- 즐거움을 찾아서 2008.05.21 22:03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Ejat&articl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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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로(路) 개통식

■ 2000여 팬들 북새통

맨-U 맨 박지성(24)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2005년 6월 2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만포동에 위치한 '박지성 로(路)'

개통식에 참석한 박지성은 2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안전상의 문제로 행사 도중 황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박지성이 온다는 소식에 지역 주민들과 축구 팬들은 부슬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2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해

왕복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웠고, 박지성이 행사장에 나타나자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2000여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에 오른 박지성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만큼 기쁘고 영광스럽다.

약속의 땅 영국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 힘들 때마다 이 길을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기념사가 끝난 뒤 박지성은 손학규 경기지사, 김용서 수원시장 등 경기도 및 수원시 관계자들과 함께 테이프 절단(식)을

가졌다. 이때 먼발치서 '축구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팬들은 일제히 단상 주위로 몰려들어 박지성을 에워쌌다.

■ 영국서 맹활약 약속

박지성은 단상을 정리하고 팬 사인회를 시작하려 했지만 이미 주변은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 프리미어리그 최고 명문구단 유니폼을 입게 된 영웅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려는 팬들의 광적인 열기에

질서는 일찌감치 묻혀버리고 없었다.

밀고, 당기고, 넘어지고, 깨지고…. 결국 박지성은 안전요원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쳐준 덕분에 겨우 대기하고 있던 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박지성이 자신의 인기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박지성은 앞서 오후 2시에 수원월드컵경기장내 월드컵 기념관에 마련된 박지성 기념코너 개장 식에 참석해 동아시아 쓰나미 피해복구 자선기금 마련 세계올스타전에 출전했을 때 입었던 유니폼과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터트렸을 당시 신었던 축구화를 기증했다.

2005/6/28(화) 11:16

http://www.magnussoccer.com/board/read.cgi?board=news&y_number=6661

 

수원시 ‘박지성길’→‘동탄지성로’로 변경

경기도 수원시 망포동과 화성시 반송동을 잇는 도로 명칭 '박지성길'이 '동탄지성로'로 변경된다.
수원시는 "도로명 주소 재정비 정책에 따른 도로명 통합과정에서 지난달 화성시가 이같은 명칭을 대안으로 제시해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올 하반기 도로명판 및 건물번호판 일제 정비작업 때 기존의 '박지성길' 표지판을 '동탄지성로'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22일 밝혔다.
시는 다만 '박지성길'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명예도로명으로 새 도로명에 병기해 사용할 방침이다.
'박지성길'은 2개 이상 시군구에 걸쳐 있는 도로는 명칭을 통일해야 하고 생존인물 이름을 딴 도로명은 각종 공적장부에 기재되는 주소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정부 지침에 따라 명칭변경 대상에 올랐다.
총연장 4.7㎞ 중 1.3㎞ 구간은 수원시, 3.4㎞ 구간은 화성시에 걸쳐 있는 이 도로의 명칭을 두고 수원시는 '박'을 빼고 '지성로'로, 화성시는 동탄신도시 공원 이름에서 따온 '센트럴파크로'로 변경하겠다는 의견을 고수해 진통을 겪었다.
수원시 토지정보과 관계자는 "도로가 두 시에 연결돼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화성시가 공감대를 가질만한 제3의 도로명을 제시해 받아들인 것"이라며 "'지성' 명칭은 생존인물 이름을 떠나 도로 주변지역에 이미 '지성공원', '지성숲', '지성유치원' 등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어 새 도로명 사용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시는 도로명 주소가 2012년부터 법적 주소로 전면 사용됨에 따라 올해 건물번호판 및 도로명판 교체작업을 마치고 내년에 주민등록등본, 건축물대장, 등기부등본 등 355가지 공적장부를 정비하기로 했다.
도로명 주소 재정비에 따라 작은 길 이름이 큰 길 이름에 통합되면서 현재 2천200여개의 도로명이 150개 이내로 줄어든다.
(수원=연합뉴스) /동아닷컴 2009-04-22 16:36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4220450

 

2005 - 가수 김창남, 간암으로 자택서 사망

가수 김창남(48)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간암으로 투병중이던 김창남은 27일 오후 9시 30분 자택서 사망, 밤 11시 15분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사촌동생 김태관 씨는 27일 "간경화를 앓아온 형이 봄에 미국 공연을 다녀온 뒤 갑자기 간암 증세를 보여 몇 개월간 서울아산병원에서 투병했고 26일 의지로 이겨내기 위해 퇴원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상태가 악화돼 결국 세상을 등졌다"며

안타까워했다.

현재 유가족은 발인 날짜와 장지 등 장례 절차를 논의중인 상태. 김태관 씨는 "형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평소 다니던 온누리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길 원했는데 갑작스런 죽음이어서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986년 그룹 '도시와 아이들'의 멤버로 가요계에 데뷔한 김창남은 '달빛 창가에서', '선녀와 나뭇꾼'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2년 전부터 간질환 증세를 보여온 그는 신앙에 의지해 투병하면서도 노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유가족으로는 미망인 정임채(46) 씨와 슬하에 1남 1녀가 있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5-06-28 오전 12:34:0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5788.html  

KBS1 ‘TV쇼 진품명품’이 27일 소개할 고려청자 장구. 프로그램 사상 최고인 1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2004 - KBS 'TV쇼 진품명품'에서 12억 최고가 감정 <고려청자역삼강장구> 소개

2004.6.22 - 감정가 12억짜리 청자장구 나와

감정가 12억원에 달하는 고려청자 장구가 나왔다.
KBS1 ‘TV쇼 진품명품’(일 오전 11시)은 “이달 초 녹화에서 8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역상감청자장구

()’가 1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고 22일 밝혔다.
이 감정가는 프로그램 사상 최고가이며 감정 장면은 27일 오전 11시에 방영된다.
경기도에 사는 한 사업가가 소장한 이 장구는 길이 60cm, 두께 7mm에 양쪽 끝이 뚫려 있으며 꽃그림과 작은 풀잎 문양의 바깥쪽을 파내 해당 문양이 튀어나오게 한 역상감 기법으로 제작돼 있다.
감정단은 “국내에 소개된 도자기 장구 중 역상감 기법으로 제작된 것은 이 장구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감정단은 이 청자 장구를 경기대 고미술감정학과에 의뢰해 동채 현미경 및 내시경 검사를 실시한 결과

1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와 비슷한 두께의 청자를 제작해 가죽을 씌워 연주해봄으로써 이 장구가 실제 연주에 사용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백항규() 책임 프로듀서는 “청자 장구의 소리가 나무 장구보다 청아하고 높았으며 고문서에도

도자기 장구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나와 감정위원들이 연주용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의 최고 감정가 기록은 올해 3월 방송된 3등 선무공신 권협(1553∼1618)의 영정으로 9억원이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동아닷컴 2004-06-22 23:33 

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j&n=200406220464 

 

고려역상감청자장구() 

일요일 오전, 세월 속에 묻혀있던 우리 것을 만나는 시간인 ‘TV쇼 진품명품’. 1995년 3월 5일 선풍기를 첫 의뢰품으로 시작한 ‘TV쇼 진품명품’이 햇수로 10년을 맞았다. 그동안 진품명품을 통해 방송된 의뢰품은 출장감정을 포함해 3900여점.

많은 명품들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동안 진품명품팀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역대 최고가가

얼마냐?”라는 것. 그렇다면 과연 최고 감정가 베스트 5는 어떻게 될까?

처음엔 화분 아닐까 추측도
대망의 감정가 1위는 지난 (2004년) 6월 27일 방송된 고려청자 역상감 장구로 1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몇 점 없는 도자기 장구의 희소성, 상감기법과 반대로 문양의 바깥쪽을 파내 문양을 살린 역상감기법을

사용한 것 등이 12억원의 감정가를 받게 한 귀한 도자기였다.
12억원 도자기 장구. 처음 이 의뢰품 사진이 왔을 때 제작진도 이게 뭔가 싶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화분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뭔가 독특한 용도로 쓰인 것 같다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9년 12월 감은사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에 악공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에서 이 의뢰품과 비슷한 장구의 모습을 보고, 또 신라시대에 만든 동종의 문양에서도 장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성종 때 음악사전인 ‘악학궤범’의 ‘장구 허리는 나무에 칠포를 붙인 것이 제일이고 사기가 다음이고 질그릇은

좋지 않다’는 구절에서 도자기 장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품명품 감정위원으로 참여한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전인평 교수는 “이 도자기 장구는 신안 보물선에도 들어있고, 일본에서는 동대사 정창원이라는 곳에 신라시대 가야금과 함께 이 도자기 장구가 있는데, 굉장한 보물로 여기고 있어서

1년에 하루만 공개할 정도”라고 밝혔다. 그리고 부산 박물관에서 제작진은 또 다른 도자기 장구를 만날 수 있었는데, 비슷한 형태였지만 분청자로 허리 부분이 나뉘어 있는 것이 달랐다.
그런데 도자기로 만든 장구가 있었음을 확인하자마자 또 드는 의문점은 과연 이것을 실제로 연주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관상용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제작진은 똑같은 형태의 장구를 만들어 보았다. 도자기 장구가 어떤 소리를

낼 것인가도 궁금했고, 청자와 백자와 분청자는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서울대학교 음파연구소를 찾아 조사를 해봤더니 그 결과 나무 장구는 부드럽고 긴 여운을 남기지만, 재현된 도자기 장구는 높으면서 통통 튀는 음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나무가 소리를 흡수하는 데 반해서 도자기는 소리를 반사시키기 때문에

퉁겨내는 듯한 음을 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무 장구의 경우 소리를 반사하고 여운을 남기는 울림통이 있지만, 도자기 장구에는 울림 장치가 없다.

다만 도자기 장구의 한 쪽 끝 부분을 동그랗게 오므려 놓고 있고 또 다른 한 쪽은 완전히 펼쳐두어 소리를 밖으로

퍼져 나가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자기 장구 중에서도 백자는 청자보다 더 높고 맑은 소리를,

분청자는 청자보다 조금 더 낮은 음을 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saida8286 2006-05-17 11:14  /daum 신지식-http://k.daum.net/qna/view.html?qid=2f2yd

 

2002 - 한국극지연구위원회(KONPOR) 설립 총회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

1990년 설치된 남극과학위원회(KONCAR)와 2002년에 설치된 북극과학위원회(KASCO)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양 위원회의 통합체인 한국극지연구위원회(Korean National Committee on Polar Research, KONPOR)가 설립되었다.

6월 27일 서울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그 설립 총회가 있었다.

극한지공학기술연구회 공지사항 - Notice(2002. 6. 29)

http://oceanus.kmaritime.ac.kr/ice/notice.htm

 

2000 - 금강산호텔서 남북적십자 회담 개최
2000 - 북한, 남북적십자회담 취재차 방북한 김인구 조선일보 기자 입북 거부
  

제3차 일본 문화 개방 문화협정 합의 후 한일 관광장관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00 -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발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0년 6월 27일 가요 공연 전면 개방, 일반 극영화 극장 상영, 애니메이션 개방 등을 골자로 하는 `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의 이번 개방은 1999년 9월 있었던 2차 개방조치보다 대폭 확대된 것으로, 영화 애니메이션 가요 게임 방송 등 일본 대중문화 전 부문에 걸쳐 개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향후 국내 관련 분야에 미칠 파장이 주목됐다.

3차 개방에 따라 대중가요 공연 분야는 `2000석 이하 실내공연`으로 제한했던 개방 제한 규정이 완전 철폐됐다.

음반은 일본어 가창을 제외하고 연주음반, 제3국어 가창음반, 한국어 번안음반 등이 개방됐다. 애니메이션은 우선 국제영화제 수상작(약 30편 가량)에 한해 개방한다고 밝혔으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감안할 때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영화는 폭력과 선정성이 강한 `18세 미만 관람불가`는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종래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했던 개방범위를 일반 극영화 전체로 대폭 확대했다. -조선

 

1998 - 클린턴 미대통령,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북경에서 정상회담

1998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중국 장쩌민(江澤民) 주석, 베이징에서 정상회담

1996 - 007시리즈 제작가 앨버트 브로콜리 사망

 

1995 -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1995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1995)
1995년 오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됐다.
기초의회 의원과 단체장, 그리고 광역의회 의원과 단체장을 동시에 뽑는 4대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름으로써

우리 나라는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이 선거를 통해 해당 지역의 살림을 책임질 광역자치단체장 15명과 기초단체장 236명, 의회의원 5천여 명 등

모두 5768명이 선출됐다.
민자당과 민주당, 자민련의 3당 체제로 치러진 6.29선거에서 시,도지사의 경우 민자당 5명, 민주당 4명, 자민련 4명,

그리고 무소속 2명이 당선돼 여당인 참패로 판가름났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민자당의 정원식 전 총리, 민주당의 조순 전 부총리,

무소속의 박찬종 전 의원이 이른바 빅3로 불리며 접전을 벌인 끝에 민주당의 조순 후보가 승리했다. -YTN

 

1992 - 대한민국의 가수, 영화배우 안소희 출생

소희(1992년 6월 27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본명은 안소희 (安昭熙). JYP 엔터테인먼트 소속 5인조 여성

음악 그룹 원더걸스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종교는 기독교이다. 숭덕초등학교,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했고,

최근 청담고등학교에 재학중이다.

JYP 엔터테인먼트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예, 현아에 이어 3번째로 원더걸스에 합류하였다. 원더걸스 1집 타이틀 곡

〈Tell Me〉 뮤직비디오의 원더우먼 역할과 노래의 ‘어머나’ 구절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강애’ 역을 맡기도 하는 등 영화배우도 겸업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1990 - 문학평론가 김현 사망

1990 - 서울지하철 5호선(방화동-고덕동) 건설공사 착공

1990 - 니카라과 우익 반군 게릴라들인 `콘트라' 지휘관들, 신임 비올레타차모로

대통령에 무기 자진반납하고 투항해 니카라과 내전 종식  

구속 20일 만인 1989년 7월 17일 오후 서경원의원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고 있다.

 

1989 -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으로 구속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1988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1989년 6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서의원은 유럽여행 중 성낙영 목사를 통해 접촉한 북한인사 정모씨의 주선으로 체코를 경유, 방북했다. 북한체류중

김일성 종매부 허담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면담, 통일문제 등에 관해 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국회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고 서의원이 활동해온 정치권과 재야단체에 수사의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특히 당시 김대중 총재의 사전인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조사과정에서 정국에 팽팽한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이길재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장, 방양균 비서관 등 9명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의 혐의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고 서의원은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에 추징금 3천여만원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8년 12월 31일 5공특위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언하는 중에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증언대로 나와 `살인마`라고 외치며 삿대질을 하자, 민정당 권해옥 의원 등이 이를 저지하고 있다.

 

1988 - 5공비리특위 구성 

5공화국 비리를 조사할 목적으로 설치한 5공비리특위(위원장 이기택)가 1988년 6월 27일 발족했다.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가 정식명칭이다.

특위는 산하에 4개 소위를 두고 있으며 제1소위는 정치권력에 의한 비리, 제2소위는 경제비리, 제3소위는 인권 및 인사비리,

제4소위는 사회 및 기타 비리를 다루고 있다.

조사대상으로는 일해재단, 새세대 심장재단, 전씨 일가 해외재산 도피, 연희동 사저, 노량진 수산시장 등

44건을 1차대상으로 선정했다.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속에 11월 2일 제1차 청문회를 시작으로 수차례 청문회가 개최되었으나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1985 - 서울 지하철 3호선 개통
강북의 구파발에서 강남의 양재역까지 27km 그 뒤 구파발에서 지축역까지 연장되고 다시 일산까지 연결되었고
양재에서 수서까지 연장, 다시 분당까지 연결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지하철은 서울역-청량리간 1호선 9.5km로
1971년 4월 착공하여 1974. 8.15에 개통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1863. 1.10에 영국 런던에서 개통
당시는 증기기관로 운전되다가 1890년에 전철화
 

88올림픽고속도로 전경.

 

1984 - 88올림픽고속도로(광주-대구 173.3km) 개통
1984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1984)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14년이 지난 1984년 오늘.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공사비 2천39억 원을 들여 착공한 지 33개월 만에 완공됐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구간 시멘트 콘크리트 포장도로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영,호남 지역의 인적, 물적 교류가 원활해지고 주행시간도 종전 국도의 3시간 30분대에서

2시간 30분대로 줄었다.
개통식이 거행된 지리산휴게소에서는 영,호남 출신 신랑, 신부 여덟 쌍의 결혼식이 열려 동서 화합의 의미를 되새겼다.


1984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영남과 호남을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1984년 6월 27일 개통됐다. 건설부는 이날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

건설부장관 등 관계인사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88고속도로의 양쪽 시발점인 전남 담양 인터체인지와 경북 옥포 인터체인지에서 개통테이프를 끊고 중간지점인 지리산휴게소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착공 33개월 만에 이날 준공, 개통된 88올림픽고속도로는 전남 담양군과 경북 달성군을 연결하는 175.3km의 2차선도로로

전구간이 국내처음으로 시멘트콘크리트로 포장됐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구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기존 국도망을 통한 195km보다 20km가 단축됐고 주행시간은 종전의

5시간대에서 2시간30분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통행은 개통식이 끝난 직후부터 허용되었으며

1984년말까지 통행료가 면제되기도 했다.

 

1977 - 지부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7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라울 곤살레스 출생

라울 곤살레스 블랑코(스페인어:Raúl González Blanco, 1977년6월 27일, 마드리드) 또는 줄여서 라울스페인축구 선수로, 공격수이다. 그는 1994년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성인팀에서 뛰면서 클럽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전으로 뛰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세 차례(1998, 2000, 2002), 프리메라리가에서 여섯 차례(1995, 1997, 2001, 2003, 2007, 200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네차례(1997, 2001, 2003, 2008) UEFA 슈퍼컵에서 한 차례(2002)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두 차례(1998, 2002) 우승을 차지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역사상 대회 최다 득점자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그는 스페인 국가대표로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이다. 페르난도 이에로가 은퇴하면서 레알 마드리드와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차례로 이어받았으나, 2006년 이후 국가대표에 한 번도 선발되지 못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피납됐다가 엔테베공항에서 약 1주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인

인질들이 7월 4일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 가족 친지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다. -조선

 

1976 - 팔레스타인 게릴라, 항공기 탈취해 엔테베공항에서 농성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1976년 6월 27일 프랑스 항공기를 하이재킹한 후 우간다 엔테베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서독,프랑스,이스라엘,스위스,케냐에 수감중인 자신들의 동지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테러에는 일관되게 강경입장을

고수해 온 이스라엘도 7월1일 260여명의 인질들 생명을 위해 그들과 교섭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게릴라들은 일부 인질을 석방시켰지만 아직도 102명의 인질이 남아있었고 그중 과반수 이상이 이스라엘인이었다.

마침내 7월 3일 100여명의 이스라엘 특공대가 군용기 3대로 공항을 기습, 총격전을 벌인 끝에 게릴라 7명 전원과

우간다 군인 20여명을 사살했고 7대의 우간다 전투기도 파괴했다. -조선

 

1975 - 방위세 신설

1974 - 닉슨 미국대통령 소련 방문

1973 -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전권, 울산권, 마산-창원-진해권, 춘천권,

청주권, 전주권, 진주권, 통영권 지정

 

1972 - 영국과 아일랜드공화국(IRA)간의 무기한 정전 발효

1970 - 경부고속도로 완공   

경부고속도로

1. 공사기간  1968년 2월 1일 - 1970년 6월 30일 완공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개통
2. 서울 강남구 제3한강교 --부산시 구서동까지 총 428km

http://www.gangje.go.kr/netizen_edit.asp?idx=8107&page=1 

 

1970 - 북아일랜드 구교도 폭동(1970)
1970년 오늘 북아일랜드 런던데리 거리!
구교도, 즉 가톨릭교도의 지도자 버너데트 데블린(Bernadette Deviln)의 구속을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구교도들은 전날 데블린이 런던데리의 집회에 가는 도중 체포돼 '아머형무소'에 수감됐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데블린은 9일 전인 6월 18일 영국 하원 선거에서 구교도의 지지에 힘입어 중부 얼스터 선거구 의원으로 당선됐었다.
그런데 그녀는 바로 전 해인 1969년의 폭동에 관계된 혐의로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몸이었다.
구교도 주민들은 데블린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사흘 동안에 부상을 입은 사람만 250명에 달했다.
또 벨파스트에서도 군대와 구교도가 충돌해 수백 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후 구교도와 군대 사이에 총격전까지 벌어져 많은 사람이 부상했다.

 

1970 -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오스카상 수상(1970)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970년 오늘,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으로부터 오스카상을 받는다.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전기영화에 출연해 피아니스트로서는 이례적으로 오스카상까지 받게 됐다.
쇼팽 해석의 대가로 이름난 루빈스타인은 1982년 12월 20일 아흔세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9 - 축구전쟁의 실마리가 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월드컵 예선전(예선 최종전) 

1969 -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축구 시합뒤 난투극 벌임  

 

멕시코월드컵 예선전과 축구전쟁

1차 예선전 (1969.6.08) (온두라스 테구시갈파) 온두라스 1:0 승리

2차 예선전 (1969.6.15)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엘살바도르 3:0 승리

3차 최종전 (1969.6.27) (멕시코 멕시코시티) 2:2 무승부,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 3:2 승리

축구전쟁 시작 (1969.7.14) 엘살바도르 국군(공군, 육군) 온두라스 침공 

 

[유레카] 축구전쟁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유혈사태로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전쟁이 꼽힌다. 멕시코월드컵 북중미 최종예선에서 맞붙은 두 나라가 격전을 치르다 2100여명이 전사하는 실제 전쟁까지 벌였다는 얘기다. 실제 역사는 조금 다르다. 축구 때문에 충돌이 빚어진 것은 사실이다. 6월15일 2차전에 원정 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홈 관중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두라스에선 엘살바도르인을 겨냥한 방화와 집단폭행으로 희생자가 속출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 수입금지로 대응했다. 6월23일 두 나라는 국교를 끊었고,

그 나흘 뒤 멕시코에서 열린 플레이오프에선 엘살바도르가 이겼다. 전쟁은 7월14일 엘살바도르의 전격 침공으로 시작됐다.

전쟁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온두라스에는 국경을 넘어온 30만명가량의 엘살바도르인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온두라스는 69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을 제외했고, 수만명을 추방했다. 양국의 국민감정은

축구 이전부터 이미 악화해 있었던 것이다.

‘축구전쟁’은 홍보전의 산물이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축구에서 지자 소요사태를 벌여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온두라스는 ‘한 엘살바도르 녀석이 온두라스 여인을 향해 오줌을 눈 것이 이 모든 사태를 촉발했다’고 맞받았지만,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세계인을 들뜨게 하는 월드컵이 다음달 11일 개막한다. 한국도 어제 ‘숙적’ 일본과의 평가전을 시작으로

월드컵 원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북한이 월드컵 본선에 함께 진출한 한반도에선 축제에 대한 기대감 대신 전쟁을 불사할 듯한 가시 돋친 말들만 오가고 있다. 홍보·외교전도 한창이다. 이런 모습은 나중에 어떻게 비칠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한겨레 2010-05-24 오후 09:36:5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2310.html

 

축구전쟁 []  

축구 전쟁1969년엘살바도르온두라스간에 벌어진 5일간의 전쟁이다. 100시간 전쟁이라고도 한다. 축구전쟁은 1969년의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붙은 시비가 명분이 되었지만, 진짜 이유는 두 나라 간에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고, 축구 시합은 기폭제 역할으로 작용하였다.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영토 문제 등으로 발발했으며, 엘살바도르에서

온두라스로 간 이민자 문제도 포함되었다. 전쟁은 엘살바도르군이 1969년 7월 14일, 온두라스를 전격 침공하면서 벌어졌고, 미주기구의 중재 끝에 8월초 엘살바도르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일단 끝났다.

11년 후인 1980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영토 문제 해결 등을 포함한 양국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일로 엘살바도르는 주변국들과의 무역이 끊기면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온두라스는 국토의 일부가 초토화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경기 결과

전쟁의 기폭제가 된 예선전의 공식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69년 6월 6일      테구시갈파    온두라스 1:0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의 승리

1969년 6월 15일    산살바도르     엘살바도르 3:0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의 승리

1969년 6월 27일    멕시코 시티    엘살바도르 3:2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의 승리

플레이오프 전(6월 27일)에서는 엘살바도르가 연장전에서(후반전 종료시 2-2 무승부) 3-2로 승리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C%B6%95%EA%B5%AC_%EC%A0%84%EC%9F%81 

 

축구전쟁
100시간 전쟁이라고도 한다. 근본원인은 영토확장을 둘러싼 양국의 국경문제에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엘살바도르로부터 수십만 명이 온두라스령(領)으로 불법월경하여 정착한 데에 기인한다. 온두라스는 1969년부터 농지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월경자들은 제외되었고, 같은 해에 온두라스 정부는 수만 명의 월경농민을 국외로 추방하였는데, 그들이 온두라스에서 학대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양국 팀의 축구경기를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다.
그해 7월 14일 엘살바도르의 육군과 공군은 국경을 넘어서 온두라스를 공격하였으며, 온두라스는 방위에만 치중하였다.

미주기구(美洲機構:OAS)가 조정에 나서 7월 29일 엘살바도르는 무조건철수에 합의하였으나 화평교섭은 난항을 계속하다가 197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양국은 중재자의 교섭개입에 합의하고, 1980년 페루의 리마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전쟁으로 엘살바도르는 인접한 국가와의 무역에 지장을 초래하여 타격을 크게 받았다.

 


축구전쟁

월드컵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면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전쟁을 꼽는다.
지난 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이듬해 열릴 제9회 멕시코월드컵대회 본선출전 티켓을 놓고 북중미 최종예선 A조에서 맞붙는다. 결과는 엘살바도르의 승리.
그러나 양국은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5일전쟁이 불가피했다. 전쟁의 싹은 2차전이 끝난 뒤 움텄다.
69년 6월 8일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 갈파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패한 엘살바도르는 1주일 뒤 자국의 수도 산살바도르로 옮겨 열린 2차전에서는 3-0으로 크게 이긴다.
그러나 2차전에서 비극의 서곡이 울린다.
원정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엘살바도르의 텃세판정에 항의하다 두들겨맞고 쫓겨나고 만 것.
구타 소식은 단숨에 온두라스 전역으로 퍼졌고, 흥분한 온두라스 국민은 그날밤 보복에 나선다.
수도 테구시갈파에 있는 엘살바도르인의 집을 습격해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엘살바도르사람만 만나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희생자가 속출했고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다.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의 수입금지로 맞대응했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 양국은 마침내 국교를 단절하고 만다.
긴장이 한껏 고조된 가운데 두 팀은 6월27일 멕시코시티에서 마지막 승부인 3차전을 치른다.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에서 펼쳐진 이 경기서 두팀은 전·
후반을 2-2로 비겼으나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터뜨린다.
엘살바도르는 승리의 환희에 젖었지만 온두라스에서 희생된 자국국민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며 7월13일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야포와 전차·전투기를 총동원한 전면전은 5일만에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의 항복을 받아내막을 내리지만 양국에서 2천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다.
http://www.soccerline.co.kr/slboard/view.php?code=totalboard&page=

1&uid=1997310263&keyfield=&key=&period=

 

1968 - 주요 도시에 대공미사일 설치, 서울에만 7개 호크 기지  

파데레프스키 /조선

 

1941 -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 사망 - 29일로~  

세기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독립 폴란드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1941년 6월 27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미군 만이 안장될 수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장차 폴란드가 자유의 땅이 될 때까지라는 잠정적 조치였다. 결국 1992년 서거 51주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860년 러시아령 폴란드 쿠릴쿠프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 컨서버토리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연주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7세부터 빈, 파리, 런던, 뉴욕 등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1차세계대전 무렵 그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일원으로 워싱턴 주재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조국을 구하는 데 십분 발휘했다.
미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드로우 월슨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그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가 16세기 야젤로왕조 이후 이웃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는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는 데 헌신했다. /조선

(파데레프스키의 사망일자가 대부분 자료에 29일로 되어있습니다. ^.@)

 

 

1940 - 미국의 수학자 대니얼 퀼런 출생 /위키백과

대니얼 퀼런 (Daniel Quillen, 1940년 6월 27일 -)은 미국에서 태어난 수학자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1961년에 학사 학위를, 1964년에 박사 학위를 마쳤다. 잠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몸을 담았다가, 지금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맥댈런 칼리지(Magdalen college)의 웨인플레트(Waynflete) 석좌 교수이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만든 고차 대수 K-이론(higher algebraic K-theory)에 대한 업적을 평가받아 1978년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위키백과

 

 

1932 - 시암(현 태국), 헌법 공포

1929 - 미국 벨 연구소, 뉴욕에서 컬러텔레비전 첫 공개

1918 - 각도에 금융조합연합회 설치

 

1918 - 두명의 독일 비행사가 낙하산을 타고 최초로 탈출 성공

1917 - 중립이었던 그리스가 전 동맹국에 선전 포고를 하다.

1917 - 제1차 세계 대전: 중립국이었던 그리스가 모든 동맹국에 선전 포고를 하다.

 

1910 - 광화문 우체국 낙성식 거행 

(참고 - 1905.9.11 광화문우체국 개국)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지도자 알렉산더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언론의 자유를 도입하는 등 개혁정책을 폈다.

 

1968 - 체코 자유파 인사 70인, 2천어선언 발표

1968 -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1968년 6월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이 발표됐다. 작가 바츠리크가

기초한 선언에는 마라톤 영웅 자토펙과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포함, 7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했다.
`자유민주화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해 보수세력을 몰아내라`는 호소를 담고 있는 이 선언으로,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을 추진해 온 두브체크와 당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년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 조선

 

1966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고정운 출생

고정운(高正云, 1966년 6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현 지도자이다. 현재 성남 일화 천마

코치를 맡고 있다.

개요

전라북도 완주군 출생으로 이리고등학교, 건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선수 시절 소속 구단인 일화 천마의 마스코트가

'천마'인 점과 빠른 스피드와 상대 골 에리어로 헤집고 들어가는 저돌적인 모습에 착안하여 '적토마'라는 별명이 붙었다.

 타고난 파이팅과 특유의 파워를 이용한 돌파력과 몸싸움에 능하여 '코뿔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965 - 미국 흑백인교회 개장 파문(1965)
1965년 오늘!
미국의 한 신부가 흑백분규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모리스 울레트(Maurice Oulette) 신부가 인종차별이 심한 앨라배마주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이용하는

가톨릭교회를 설립했다.
이에 대해 많은 백인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교회의 개장으로 앨라배마주의 인종갈등이 악화되자 해당 가톨릭 교구청은 울레트 신부를 다른 교구로 보내고 만다.
인권운동가들은 울레트 신부에 대한 교구청의 전임 결정이 비겁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1964 - 대한민국의 배우 박준규 출생 /위키백과

박준규(朴俊奎, 1964년 6월 27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미국 엘카미노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1988년에 데뷔하였다. 배우 박노식의 아들이기도 하다. 소속사는 세도나미디어이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쌍칼 역으로 박노식의 아들에서 배우 박준규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작품에서 감초 연기와 예능에서도 랩규라는 별칭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62 - 중국의 배우 양조위 출생

양조위(정체: 梁朝偉 간체: 梁朝伟 병음: Liáng Zhāo wěi 량짜오웨이 영문명: Tony Leung Chiu Wai, 1962년 6월 27일 ~ )는 홍콩의 영화배우이며 음반을 낸 가수이기도 하다. 중화권에서 불리는 닉네임은 '웨이짜이'(偉仔)이다. 홍콩 금상장, 대만 금마장 등 다수의 영화상을 수상한 실력파 배우로 중화권에서는 '영화황제'란 의미로 '잉띠'(影帝)라고 부른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로 깐느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8년 7월 21일 오랜 연인이었던

홍콩 여배우 유가령과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중경삼림》,《해피투게더》,《화양연화》,

무간도》,《2046》,《색계》등이 있다.

 

1958 - 서울운동장 개장

1955 - 프랑스의 영화배우 이자벨 아자니 출생

이자벨 야스민 아자니(Isabelle Yasmine Adjani 1955년 6월 27일 ~)는 프랑스 세자르 영화상을 네 번 수상하고,

아카데미 영화상에 두 번 수상후보에 오른 프랑스 파리 시 태생의 영화 배우 겸 가수이다.

걸어온 길

알제리인 아버지(베르베르족에 속하는 카바일 족)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나라의 피를 물려받은 이자벨은 이 때문에 종종 프랑스의 극우파 정치인들과 긴장관계에 있다. 참고로 이자벨 아자니와 혈통이 일치하는 유명인사로는 전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이 있다.

학교 컨테스트를 통과하여 12살에 아마추어 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4살때는 영화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쉰 살이 지난 지금까지도 20대 때의 외모를 그대로 간직해 늙지 않는 여자로도 잘 알려졌다. 여러 차레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81년 영화'Quartet'와 'Possession'으로, "깐느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두편의 영화로 수상했으며, 영화 '아델 H의 사랑이야기' 와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로, 미국 "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외국어 영화에 인색하고 보수적인 아카데미위원회는 해당 영화들이 프랑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자벨아자니를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릴 만큼 놀라운 연기를 펼쳤다고 극찬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영화상인 "세자르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역대 최초로 4번 수상했으며, 세계 3대영화제 중 하나인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도 영화'카미유 클로델'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탔다.

 

1954 - 변영태 제5대 국무총리 취임

1954 - 구소련 모스크바 인근 오브닌스크에 건설된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발전 시작

원자력 발전소(原子力 發電所, Nuclear Power Plant)는 원자로핵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열을 가지고 발전을 하는 발전양식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다른 발전소보다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할수 있으며, 이산화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으며,

경제적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전체 생산 전력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의 응용원리는 화력발전소와 같으나, 연료가 다르다. 원자력은 우라늄 235를 분열시켜 열을 얻고 그 열로 증기를 만들어 터빈발전기를 돌리는데 화력은 석탄이나 기름을 사용한다는 것이 다르다. 연료로는 우라늄 235를 농축시킨 농축 우라늄과, 천연 우라늄(CANDU, 가스 냉각형 원자로(마그녹스), RBMK형 원자로)을 사용한다. 현재는 플루토늄을 우라늄과 같이 혼합하는 MOX 연료가 시험중에 있다.

 

역사

역사상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는 소련의 오브닌스크 원자력 발전소로, 1954년 6월 27일 상업운전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는 영국 샐러필드에 위치하고 있는 마그녹스 원자로를 가진 콜더홀로써, 1956년 10월 17일 상업 가동을 하게 된다. 그 후 1979년 3월 28일 스리마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운전원의 조작 실수로 인한 냉각재 누출사고로 인해서, 노심용융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운전원들의 조작 실수로 냉각재 누출사고가 발생, 멜트다운(노심용융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격납용기도 없었고, 운전원들이 비상노심냉각장치를 가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는 스리마일보다 더 컸다.

대한민국에서는 1977년 6월 19일 최초의 상업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소1호기가 초임계에 도달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부산광역시에 4기, 영광군에 6기, 경주시에 4기, 울진군에 6기등 총 20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으며

신고리 1,2호기 등 6개호기가 추가로 건설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오브닌스크(1954년 5월에 임계)의 건설 

개요

소련에서는 1950년대부터 원자력의 평화적이용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의 남서쪽 약 100km에 있는 오브닌스크에서

세계 최초의 동력로 오브닌스크가 1954년 5월에 임계를 달성하고, 같은 해 6월 27일(일요일)에 운전을 개시했다.

본문

소련에서는 1950년대부터 원자력의 평화적이용이 시작되었다. 1951년에 오브닌스크(모스크바 남서쪽 약100km)에 있던

물리 및 동력공학연구소가 소련 최초의 동력로건설 책임을 맡기로 되었다. 1951년 9월에 원자로 설치장소에 대한 굴삭을

시작하여 1954년 5월에 임계를 달성하고 같은해 6월 27일(일요일)에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운전을 개시했다.

소련은 3년 미만 사이에 가장 복잡하게 얽힌 설계, 건설 및 운전의 과학적,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원자력이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소련의 신문「프라우다(진실)」는 1954년 7월 1일(목요일)자 신문(그림-1)에서 대대적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었다.

「4일전에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운전을 시작하여, 인접한 산업, 농업에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산업용 터빈이 석탄이나 기타 연료가 아닌 원자력에너지에 의하여 전력을 발생시킨 최초의 것이다」.

이 원자력발전소(APS1 : Atomic Power Station 1)의 전기출력은 5,000kW이었다.

1955년 9월에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1회 원자력평화회의(통칭: 제1회 제네바회의)에서 오브닌스크원자력발전소에 대하여 61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그 속에 다수의 사진과 설계도 그리고 운전에 대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림-2에 오브닌스크원자력발전소의 소재지를 보여 준다.
원자로는 흑연감속·수(水)냉각으로 냉각수는 원자로용기의 내부에 있는 연료다발의 외측을 통하고 있다. 연료는 5%

농축우라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오브닌스크 흑연원자로는 RBMK의 선구자로서, 1964년에 벨로야르스크 1호로(100MWe), 1969년에 2호로(200MWe)가 운전을 개시했다. 이것들은 모두 채널형 우라늄·흑연원자로이다. 이것에 이어 RBMK-1000형 원자로인 레닌그라드, 체르노빌, 스몰렌스크 원자력발전소와,

RBMK-15형 원자로인 이그나리나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오브닌스크원자로의 노심개요를 아래에 보여 준다.
전기출력 : 5,000kW
원자로열출력 : 30,000kW
노심높이 : 180cm
직경 : 150cm
연료집합체 : 128개
제어봉과 안전봉 : 22개
연료 : 각 연료집합체는 4개의 가운데가 빈 중공연료봉으로 구성되었으며, 연료피복관으로 스테인리스강을

사용하고 중공연료는 열전도도가 좋은 마그네슘매트릭스 속에 분산된 우라늄 몰리브덴 합금을 사용하였다.
우라늄농축도 : 5∼7%
감속재 : 흑연을 사용, 단면은 6각형
냉각계통 : 1차계통 100기압으로 가압한 강제냉각을 채용
2차계통
증기발생기
터빈 : 증기압력 12기압(터빈입구)
온도 260℃
그림-3은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참고문헌(4))이다. 그림-4는 오브닌스크원자로의 수직단면도(참고문헌(5)),
그림-5는 연료집합체와 노심수평단면도(Ref.5), 그림-6은 원자력발전소의 주요계통도(Ref.5)를 보여 준다.
오브닌스크원자력발전소는 연료요소의 시험 및 원자력엔지니어링에서 새로운 과학적·공학적인 면에서의 연구를 실시하고 있었다. 소련의 과학자들은 원자로내에 설치한 특수실험공을 이용해서 다른 원자로를 설계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비등조건, 핵과열, 자연순환을 연구했다. 구소련이나 동유럽 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많은 과학자가 여기서 훈련을 받았다.
오브닌스크원자력발전소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이러한 서비스를 통해 직원 및 발전소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안전이 확인되었다. 또 이 발전소의 건설 및 서비스로 축적한 경험은 대형 신규원자력발전소의 설계에 도움이 되었다. 물리 및 동력공학연구소의 직원은 우랄지방에 건설한 벨로야르스크 원자력발전소 및 츄토코 지방에 건설한 빌리비노원자력발전소(열병합)에서 과학적 측면의 감독을 하였으며 또 중성자계측장비 및 시운전에 직접 참가했다.

 

그림표

그림-1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오브닌스크의 운전개시를 보도한 1954년 7월 1일자(목요일)프라우다지

그림-2 오브닌스크원자력발전소 지도

그림-3 세계 최초의 동력용 원자력발전소 오브닌스크

그림-4 오브닌스크 원자로 수직단면도

그림-5 오브닌스크 원자로의 연료집합체와 노심 수평단면도

그림-6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의 주요 계통도-원자력지식정보관문국
http://www.atomic.or.kr/atomica/read.html?chapter=16-3-2-2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1954년 6월 26일 전기공급한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

우리는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1956년에 세워진 영국의 콜더 홀(Callder Hall)원자력발전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콜더 홀 원자력발전소보다 약 2년 앞서 일반인들에게 전기를 공식적으로 공급한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는 구
소련의 오브닌스크(Obnisk)원자력발전소입니다.
50년 전 즉 1954년 6월 26일 오후 5시 30분, 오브닌스크원자력발전소가 약 3년간의 건설을 마치고 인근의 조그마한
도시인 오브닌스크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였습니다.
원자력에너지가 평화적으로 이용된 세계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난 6월 27일부터 6일간 국제원자력기구(IAEA)주관으로 많은 세계 원자력 석학들이
오브닌스크에 모여 국제회의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의 김일성이 이 발전소의 방문자 명단에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일성은 오브닌스크에 있는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를 방문하고 언젠가는 원자력을 내 손안에 쥐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 북한은 소련의 유명 원자력연구소에 많은 기술자를 파견하여 원자력 관련 기술습득에
전력투구한 흔적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의혹을 받고 있는 북한 영변지역의 원자력 관련 기술들은 모두 구 소련에서 습득한 원자력 기술에 바탕을 두고
건설되었습니다.

http://atom4u.or.kr/200409/science/sci_sub02.html 

 

1951 - 이승만 대통령 휴전반대 성명

1951 - 이승만 대통령, 한국전 휴전반대 성명

1950 - 정부, 대전으로 이전  

 

1950 - 이승만 대통령, 국민총궐기 요청 방송하고 정부는 대전으로 옮겨감

1950 - 이승만 대통령 대전으로 피난하고,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이미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한국 전쟁)

 

1950 - 미국, 해공군 한국전 출동명령


1950 - 트루만 미 대통령, 한국전쟁에 미군 출동 명령 

 

1950 - 유엔 안보리, 남북양측에 정전 명령, 한국군 원조를 결의

1950 - 유엔 안보리, 한국 원조를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 10시(한국시각 25일 낮 11시),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비슷한 시각, 무초 주한 미 대사도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로 달려간 장면 대사는 딘 러스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3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공산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는 미국의 결의안이 9대0으로 채택됐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다시 474차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이 7대1로 채택됐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1950 - UN 안전보장이사회, 한국군 원조를 결의

한편 대한민국(남한) 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한국 전쟁)

 

1950 - 소련, 유엔안보리 복귀를 신청

1947 - 입법의원 보통선거법 통과

1946 - 북한, 농업현물에 관한 결정서 발표

 

1944 - 미군, 2차대전 당시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셰르부르항 탈환

1943 - 미군 폭격기들, 독일군 점령하에 있던 그리스 아테네 폭격

이은찬 의병장의 애국충절을 기념하여 강원도 원주시 학성2동 327-1에 세워진 이은찬공 추모비(1968.10.29)

 

1909 - 독립운동가 이은찬 의병장 순국 

구한말 경기북부 지역의 연합의병을 지휘,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이은찬(1878∼1909) 의병장이 1909년 6월 27일 순국했다.

강원도 원주군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군대해산 뒤 전국 의병연합체인 `13도 창의대`를 편성, 서울탈환에 들어가 동대문밖

10리까지 진격했으나 의병간 협조체계 미비로 작전에 실패했다. 1908년에는 임진강 연합의병을 결성, 서울 재침공을 목표로

가평과 포천, 양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선생은 밀정의 신고로 서울 용산역에서 일경에 붙잡혀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조선

 

1907 - 모병령 공포 

루마니아 콘스탄츠 군항에 입항한 포템킨호와 그 수병들. 타함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고립된 포템킨호는 루마니아 경찰에 억류되었다.

 

1905 - 러시아 전함 포템킨호 수병 반란 

1905 - 포템킨호 수병 반란 

6월27일, 흑해 북쪽 오데사항에 주로 입항해 온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포템킨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혁명의 기운이 러시아 전역에 휘몰아치고 장교들의 부패와 횡포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부실한 식사를 거부하던

수병 1명이 장교에게 사살된 것이 발단이 됐다.

함장과 장교들을 모두 사살하고 파업이 한창이던 오데사항에 입항, 수병 일부가 총파업에 가담하자 가장 용맹하다는 코사크 기병대가 투입됐다. 남녀노소 할 것없는 무차별 학살이 전개되고 포템킨호도 이에 응수, 시가를 향해 포격을 시작함으로써 오데사는 피로 물들었다. 다른 흑해함대까지 동원해 포템킨호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수병들의 발포거부로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포템킨호는 육상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수병들의 투지도 급격히 떨어지자 7월8일 루마니아의 콘스탄츠 군항으로 탈출했다.

루마니아가 러시아의 수병인도를 거부해 이들 중 상당수는 루마니아에 정착하거나 캐나다ㆍ미국ㆍ브라질 등으로 이주했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수병 54명은 사형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조선

 

1905 - 러시아 전함 폭동 발발

1905년 6월 27일 러시아 전함 포툠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는 구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이 다양한 양상의 시위로 터져나왔다. 이러한 시위는 동궁 앞 광장의 군중을 무차별 살상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 해 연안지방, 그루지야 등으로 확산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차르 체제에 반발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오데사 항에 정박 중이던 전함 포툠킨호에서도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10월에 시작된 철도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되면서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 소비에트가 급속히 파급되자 니콜라이 2세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후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05년의 혁명을 기념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했는데,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이 포툠킨호 폭동을 다룬 영화 <전함 포툠킨 Bronenosets Potyomkin>을

만들었다.

 

1904 - 일본의 황무지개간요구 거절

1889 - 언론인 유광렬 출생

1884 -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 출생

 

1883 - 기기국(군기창) 신설

1883 - 조선 병기제조 관청 '기기국' 신설

 

1880 - 장애자의 희망 헬렌 켈러 출생

1880 - 미국의 작가, 장애인 복지활동가, 교육가,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출생

1880 - 미국의 장애인 저술가, 교육자 켈러(Keller, Helen) 출생
켈러 [Keller, Helen (Adams), 1880.6.27~1968.6.1]

켈러는 중증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준 미국의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다.

그녀는 19개월 되던 때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시각과 청각을 잃고 벙어리가 되었다. 7세에 스승 앤 맨스필드 설리번을 만나 특수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점자를 읽고 쓰게 되었고, 9세에는 음성기관의 촉지를 통해 말하기를 익혔다.

놀라운 학습력 덕분에 '기적의 아이'로 불리면서 유명해졌다. 1904년에는 래드클리프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1921년부터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동안 미국맹인재단을 위해 일했고, 세계 각처의 순회강연을 통한

장애자 교육에 힘썼다. <내 삶의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1902)·<나의 선생님 앤 설리번 메이시 Teacher : Anne Sullivan Macy>(1955) 등 많은 책을 썼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너무나 오래 바라보느라고

우리를 위해 열린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렌 켈러

 

1869 -  193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발생학자 슈페만 출생

1869 - 배(胚)발생 유도를 발견한 독일의 슈페만 출생

1862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게인스 밀에서 남북군 전투. 북군 패배. 북군 철수 시작

 

1844 - 미국의 예언자 조셉 스미스 사망

1831 - 프랑스의 수학자 소피 제르맹 사망

마리 소피 제르맹 (Marie-Sophie Germain, 1776년 4월 1일 - 1831년 6월 27일)은 프랑스의 여성 수학자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르블랑'이라는 남자 이름(가명)으로 '수학의 황제'라고도 불리는 가우스와 3년간 편지로 수학에 관한 견해를 주고받았다.  

다테 마사무네

 

1636 - 일본 센고쿠 시대 장수 다테 마사무네 사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1567년 9월 5일 ~ 1636년 6월 27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 오슈의 센고쿠 다이묘이자

에도 시대 센다이번(仙台藩)의 시조이다. 다테 가문 제16대 당주 다테 데루무네(輝宗)와 모가미 요시모리의

딸 요시히메(義姬,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여동생)의 장남이다.

어릴 적 이름은 본덴마루(梵天丸)이고, 자(字)는 도지로우(藤次郎)이다. 시호는 데이잔(貞山), 본성은 후지와라 씨(藤原氏)이다. 신호(神號)는 다케루히코노미코토(武振彦命)로써 아오바신사(青葉神社)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어릴 적에 앓은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후에 독안룡(独眼竜)이란 이명을 얻게 되었다.

휘(諱)인 “마사무네”는 다테가 중흥의 선조라고 알려진 무로마치 시대 제9대 당주 다이센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와

똑같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 도지로우 마사무네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1574 -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 조르지오 바사리 사망

1574 -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작가 바사리(Vasari, Giorgio) 사망  

바사리 [Vasari, Giorgio, 1511.7.30~1574.6.27]

 

1550 - 프랑스의 왕 샤를9세 출생

1462 -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 출생

1388 - 최영장군, 고봉현에 유배

 

678 - 교황 아가토, 79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교황 아가토(라틴어:Sanctus Agatho, 이탈리아어:Papa Agatone)는 제79대

로마 교황(재위: 678년6월 27일 - 681년1월 10일)이다.

아가토는 비잔티움 제국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의 협력으로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하여 단성론 논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밀라노, 잉글랜드, 갈리아, 로마의 지방 공의회를 거쳐 서유럽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125명의 주교들을 만나 세 명을 사절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였다. 사절들이 공의회의 사회를 보면서 교황 호노리오 1세를 단죄하고 공의회의 결정들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로마 공의회에서 가지고 온 서신을 돌렸다.

서신의 내용은, 서유럽의 교회는 가난하여 성직자들을 정상적으로 교육시킬 수가 없어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일들이

많으므로 성직자들의 교육을 위해 여러 가지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가토가 교황 레오 1세의 책(Tomus)의 영향을 받아 콘스탄티누스 4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교황의 무류성을 확고히 선포한다는 명확한 가르침이 제시되어 있으며 교황은 황제가 단성론자들에게 보인 관대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아가토는 영국의 요크 교구에 분열이 생기자 교구장 윌프리드 주교가 로마에 상소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로마의 성가단장 요한네스를 보내어 로마 교회의 전례를 영국 교회에 보급시키고 신임 교황들에게 바치는

세금을 면제시키고 라벤나의 주교좌를 견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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