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에르미타주 박물관 한국어 안내서비스 시작
대한항공, 러시아쪽과 후원협약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한국어로 미술작품 안내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대한항공은 29일(현지시각)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미하일 피오트롭스키 박물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후원협약식을 열고, 한국어 안내서비스를 시작했다고 30일 밝혔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 고갱의 ‘과일을 쥐고 있는 여자’등 세계 걸작 290만 점이 전시돼 있으며, 한해 26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다.
그동안은 영어·독일어 등 5개 서양언어로만 작품을 안내해왔다. 멀티미디어 가이드 기기로 제공되는 한국어 안내서비스는 방송인 김성주씨와 연극인 손숙씨의 목소리로 주요작품 352점을 설명한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한국 관광객들이 자국어 안내가 없어 예술품에 대한 감동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서비스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높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10월 말까지 러시아행 항공편 탑승객들에게 멀티미디어 가이드 50% 할인권을 나눠줄 예정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한겨레 20090630 20:58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363241.html
2007 -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최연소 건축물’…공연장으로는 바르셀로나에 이어 두번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유네스코(UNESCO) 선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23일부터 7월 2일까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리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제주 화산섬ㆍ용암동굴, 스페인 테이데 국립 공원, ‘프랑스 와인의 수도’ 보르도, 일본 혼슈 섬의 은광(銀鑛), 나미비아의 암석 조각, 그리스의 고대도시 코르푸, 동부 보스니아 비제그라드의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치 다리,캐나다 수도 오타와의 리도 운하, 스위스의 라보 포도 재배지와 함께 세계문화ㆍ자연유산으로 최종 선정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whc.unesco.org)은 모두 848개. 184개국에 걸쳐있다. 그중 문화유산은 656개, 자연유산은 167개, 자연-문화유산은 25개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베르사이유 궁전, 만리장성, 타지 마할, 바티칸 시티, 예루살렘, 아우슈비츠 수용소, 모스크바 크레믈린 붉은 광장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종묘, 경주 석굴암ㆍ불국사, 화성,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경주에 이어 제주 화산섬ㆍ용암동굴이 일곱번째로 등재됐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나 음악궁전(Palau de la Musica Catalana, 1997년 등재)과 함께 음악 공연장으로는 10년만에 두번째로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선정위원회 측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위대한 예술적 기념비이자 아이콘”이라며 “20세기 후반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과감하고도 예언자적인 실험”이라고 평가했다.
1973년에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외른 우슨(89)의 설계로 개관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건축가가 아직 생존해 있는 경우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설계한 오스카 니메이어(Oscar Neimeyer)에 이어 두번째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건립은 1947년 시드니 심포니 수석 지휘자 겸 시드니 음악원장 유진 구센스(1892∼1962)가 심포니홀과 오페라극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완공까지는 2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우슨이 설계 공모에서 우승한 것이 1957년이니 설계에서 완공까지도 16년이나 걸렸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예산 변경과 잦은 설계 변경으로 우슨이 설계 도중 사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름이 ‘오페라하우스’라고 해서 오페라 극장만 있는게 아니다. 2679석짜리 콘서트홀, 1547석짜리 오페라극장, 554석짜리 드라마 시어터, 398석짜리 플레이 하우스 등을 갖춘 아트센터다. 오렌지를 잘라 놓은 듯한 모양에다 돛배를 연상케 하는 지붕으로 시드니와 호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20세기 10대 건축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사에서는 관료주의가 개입해 건물을 망쳐놓은 최대의 실패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로고에 등장했으며, 2003년에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 지정 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하버브리지, 바다의 유람선과 함께 시드니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제공해주는 장소다.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하루 24시간, 크리스마스와 성 금요일 이틀만 쉴뿐 연중 무휴로 개방된다. 연간 방문객만 200만명이 넘는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중앙일보 2007.06.29 09:53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776129&cloc=olink|article|default
2003 - 미국의 영화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사망
헵번 [Katharine Hepburn, 1907.5.12~2003.6.29]
2003년 6월 29일, ‘할리우드의 전설’이 숨을 거뒀다. 60년 영화 이력 동안 네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캐서린 헵번이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다 이날 편안히 눈을 감은 것이다.
헵번은 1930~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연기파 여배우’의 대명사였다. 또렷한 광대뼈, 적갈색 머리, 상류층 억양 등이 특징인 그녀는 강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헵번은 ‘모닝 글로리’(1933)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 ‘겨울의 사자’(1968) ‘황금연못’(1981) 등으로 네 차례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모두 12차례 후보로 지명되는 진기록도 남겼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의 전설’이라는 별명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동시대 여성들은 그녀를 역할 모델로 삼을 정도였고, 1985년 한 여성잡지는 헵번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기도 했다.
1907년 5월 코네티컷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볼티모어의 증권사에서 일하다 1928년 뉴욕에서 ‘요즘 나날’이라는 연극으로 데뷔했다. 그해 사교계 인사 러들로 오그덴과 결혼한 헵번은 6년 만에 이혼한 후 “결혼은 사랑과 명예를 갉아먹는 끔찍한 일”이라며 “결혼을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 믿음대로 그녀는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9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26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헵번은 ‘미국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바지를 입힌 여배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배우’(1999년 미국영화연구소(AFI))등에 선정되기도 했다. /조선
2002 - 한국 월드컵 3-4위전서 터키에 2대 3 패배, 아쉬운 4위 달성
"대한민국, 터키 그리고 붉은 악마의 하나된 축제!"
대구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터키는 FIFA월드컵 사상 가장 빠른 골 중의 하나를 득점했고, 결국 한국에 2 대 3의 우승을 거두었다. 하칸 수쿠르가 경기 시작후 불과 11초만에 얻은 선제골을 시작으로 일한 만시즈가 두 골 을 연신 터트리며 공동 개최국인 한국에 대한 승리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한국도 용감하게 추격하여 이을용의 놀라운 프리킥과 송종국의 뒤늦게 터진 골로 터키를 쫓아갔다.
이번 FIFA월드컵에서 수많은 이변을 일으켰던 한국에게 있어 이날 경기는 다소 실망스러운 경기였지만, 터키는 그 돌풍을 끝까지 몰고 가고야 말았다.
/방송문화원
http://www.tvmedia.co.kr/set/set_05_07.html
"아쉬운이 아니고 분에 넘치는 4위.
지금도 한국축구가 세계 4강급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상외로 많음."
- Zidane님의 멘트입니다.
1995 - 미국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 러시아우주정거장 미르에 도킹 성공
아틀란티스호[Atlantis]
89년 5월4일 처음으로 발사되었다. 같은 해 10월18일 발사한 위성 ‘갈릴레오’는 금성의 적외선 이미지와 소행성 이미지를 전송했으며 95년 12월7일 목성에 도착했다. 95년 6월26일 발사되어 10일간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와 랑데부하고 비행사들을 교환하기도 했다. 95년 12월7일 미르와 두번채 도킹할 때 태양전지와 미래의 셔틀 도킹을 위한 도킹 모듈을 운반했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1998년 11월 12일 제232호
http://www.hani.co.kr/h21/data/L981102/1p3pb201.html
1993 - 육군 상록수부대, 유엔평화유지군(PKO)으로 소말리아 파병
상록수부대 선발대 소말리아로 파견
유엔군의 일원으로 소말리아에서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할 국군 공병대대(일명 상록수부대) 의 선발대 60명이 소말리아 현지로 출발했다. 이로써 한국은 소말리아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한 25번째 국가가 됐다. 한국이 파견한 공병대대는 유엔군 평화유지사령부직할인 군수지원단에 소속돼 임무를 수행할 비전투요원들이다. 우리 국군은 발라드에서 벨렌트윈에 이르는 도로 350km에 대한 보수작업과 인근지역에 대한 급수지원등을 실시하게 된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28 09:32:00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201006280034224&category=002013&page=1
1987 -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발표
개헌논의 금지 및 제5공화국 헌법하에서 차기 대통령을 뽑도록 한다는 4.13호헌조치 이후 이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 집회 및 시위가 전국민적 차원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던 노태우 의원이 1987년 6월 29일 전격적으로 8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여야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 2.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도록 대통령선거법 개정 3.김대중씨를 포함한 시국사범에 대해 광범한 사면,복권 실시 4.구속적부심 등 인권보장 조항의 강화 및 기본권 신장 명시 5.언론자유 창달을 위한 언론관계법 개정 및 언론의 자율성 보장 6.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위한 지방 교육자치제의 실시 7.정당활동의 자유보장 및 육성 8.맑고 밝은 사회건설을 위한 과감한 사회정화조치 및 사회비리척결 등이었다.
6.29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개인의 견해로 전격발표되었으나 7월1일 전두환 대통령의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로 정부와 민정당의 공식입장으로 확정됐다. /조선
1986 - 86년 멕시코 월드컵서 `축구의 신` 마라도나 탄생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에 이어 또 한 명 "축구의 신"이 탄생했다. 6월 22일 잉글랜드와의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Maradona) "신"으로 거듭났다.
그는 잉글랜드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공중에 뜬 공을 손으로 쳐 넣었다. 주심은 보지 못했고, 경기 후 마라도나는 "그것은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가 두 번째로 뽑아낸 골은 완벽한 개인기로 빚은 신기(神技)였다. 마라도나는 센터라인에서부터 잉글랜드 수비 5명을 제치며 드리블한 뒤 득점하고 포효했다. 마라도나는 당시 서독과의 결승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아르헨티나에 월드컵을 안겼다. 숱한 화제 속에 끝난 멕시코 월드컵은 지금도 전세계 축구팬에게 "마라도나의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는 신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천재였지만, 사생활에선 끊임없이 광기를 뿜어낸 "문제인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역대 최연소인 16세에 국가대표로 뽑혔고,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1986년 우승, 1990년 준우승했다. 마라도나는 국가대표 외에도 그가 소속했던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팀에 무수한 우승트로피를 헌납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진출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자들에게 공기총을 쏘아대고, 툭하면 여자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마라도나는 1994년 미국월드컵 조별 리그 도중 도핑 테스트에서 흥분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쫓겨났다. 마라도나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고, 악동과 축구의 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마라도나의 선수생활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1981 - 전두환 대통령, 동남아 순방 중 말레이시아 도착
6.29~7.1 전두환 대통령 말레이시아 공식방문.
1981 - 중국 전인대 국가주석에 후야오방[胡耀邦],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덩샤오핑[鄧小平] 선출
1976년 4월 7일 4인방에 의해 세번째로 실각했다 4인방 제거후 1977년 7월 19일 다시 국방상 섭검영의 도움으로 세번째 부활에 성공한 등소평이 1981년 6월 29일 전인대 제11기 6중 총회에서 아직 파워게임에 미숙한 모택동 후계자 화국봉을 실각시키고, 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등소평은 "포스트 毛의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의 개방-실용노선을 주도함으로써 "모택동 시대"와 결별하는 길을 걸었다. 6중 총회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이 역사결의 7항에서는 모택동의 무오류성도 부정되었다. /조선
1979 -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미 합중국 카터(Carter, Jimmy) 대통령 각하 내외분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초청으로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카터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1960년), 죤슨 대통령(1966년), 포드 대통령(1974년)에 이어 한국을 공식방문하는 4번째 미국 대통령이며, 이러한 일련의 방한 사실은 한ㆍ미 유대가 얼마나 공고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금번 방한은 양국간 우호 협력관계를 재차 다짐하고 국ㆍ내외에 선양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카터 대통령은 방한중 박대통령 각하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공동 관심사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할 것이며, 한반도 정세 및 아국의 신장된 국력을 직접 시찰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온 국민은 국빈으로 방한하는 우방국 원수에게 따뜻한 영접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체신부에서는 카터 대통령 각하 내외분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양국간의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를 기원하면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72 - 평화의 사절로 소련을 방문한 미국 소녀 스미스(Smith, Samantha) 출생
스미스 [Smith, Samantha Reed, 1972.6.29~1985.8.25]
(참고) [책갈피 속의 오늘]1983년 美사만다 스미스양 소련 방문
“안드로포프 씨 귀하,
제 이름은 사만다 스미스입니다. 열 살이고요.
우선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핵전쟁이 일어날까 봐 걱정입니다. 전쟁을 하실 생각이 있는 건가요? 아니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 하실 건지 얘기해 주세요. 왜 세계를, 적어도 우리나라를 정복하려 하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도록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사만다 스미스.”
1982년 11월 미국의 초등학교 5학년 소녀가 유리 안드로포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해 세계에 핵전쟁의 공포가 높아가던 때였다.
어린이의 글로서는 당돌하기까지 한 이 글은 이듬해 4월 소련 관영 일간지 프라우다에 실렸다. 안드로포프는 다정함이 넘치는 답장을 사만다에게 보냈다.
“넌 ‘톰 소여’의 친구 베키처럼 용기 있고 정직한 소녀 같구나. …우리는 지구의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를 원한단다. 우리의 아이들과 너 사만다를 위해서도….”
안드로포프는 이어 스미스를 소련에 초청했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 소련이 ‘악의 제국’이 아님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초청을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미국 내에선 큰 논란이 벌어졌다. 공산주의자의 선전술에 말려들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최연소 친선대사’의 소련 방문을 지지했다.
스미스는 1983년 7월 7일 부모와 소련을 방문했다. 와병 중이던 안드로포프는 스미스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대신 전화를 걸어 꼬마 손님의 방문을 환영했다.
소련은 2주간의 일정을 치밀하게 짰다. 숙소 주변에 영어를 하는 교사와 학생들까지 배치했다. 그러나 스미스의 눈에는 소련이 감추고 싶었던 식품 부족과 같은 문제점이 띄었다.
방문을 마치며 스미스는 “소련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상대국에 해코지를 할 사람들이 아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살고 싶으냐는 질문엔 “우리나라에서 사는 게 더 좋다”고 답했다.
스미스는 귀국 후 여러 토론회에 참여하고 TV에도 출연했다. 일본의 한 심포지엄에선 “미국과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각자의 손녀를 교환 방문케 하자”는 깜찍한 제안도 나왔다.
그러나 운명이 그의 인기를 시샘했던 것일까. 1985년 여름 TV 출연을 마치고 비행기로 집에 돌아오던 스미스는 악천후 속에 착륙을 시도하던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면서 목숨을 잃었다. 겨우 열세 살 때였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동아닷컴 2007-07-07 03:06
1956 - 마릴린 먼로, 극작가 아더 밀러와 결혼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onroe, Marilyn)가 "세일즈맨의 죽음" 극작가로 알려진 아더 밀러(Miller, Arthur)와 뉴욕에서 1956년 6월 29일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신문은 이 결혼을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미국의 위대한 육체의 결혼"이라고 표현했다. 신혼여행을 위해 여권을 신청했으나 공산주의운동을 이유로 신청이 기각된 밀러가 국무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어서 이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못하는 먼로는 밀러에게서 지성의 경외로움과 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유태교의 밀러를 위해 유태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던 그녀는 매스컴의 집요한 추적, 결혼한 아서 밀러에 대한 열등감, 우수한 연기자가 되려는 강박 관념 등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다 1962년 8월5일 자살해 또 한번 전 미국을 놀라게 했다. /조선
1950 - 맥아더 원수 한국 전선 시찰
북한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의 요청은 북한에 의해 묵살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고, 27일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한반도의 전쟁이 타이완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제7함대를 급파,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28일 도쿄[東京(동경)]에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관할권을 미국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남한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남한을 원조하기 위하여 파견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yahoo
1944 - 한국의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사망
한용운 [韓龍雲, 1879.8.29~1944.6.29]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4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눈을 감았다.
본명이 정옥(貞玉)인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법호인 만해(萬海)와 법명인 용운(龍雲)으로 더 친숙하다. 충청남도 홍성 출생인 그는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는 등 일찍이 글과 독립운동에 눈을 뜬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1896년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온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던 1910년 한ㆍ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ㆍ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희대의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으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한편, 지난해 8월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 마다 찾았던 백담사 소재 강원도 인제에 ‘백담사 만해마을’이 준공돼 운영되고 있다. 조선일보사는 지난해 12월 18일 이곳에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 초판본, ‘불교대전’ 1914년 초판본 등 만해의 저서 원본들과 관련된 희귀자료 115점을 전달한 바 있다. /조선
- J. R. Oppenheimer
1943 - 루스벨트, 오펜하이머에 비밀서한
[책갈피 속의 오늘]1943년 루스벨트, 오펜하이머에 비밀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섬뜩한 별칭이 붙었지만 생전에 그는 오피(Oppie)라는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를 3년 만에 마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재 이론물리학자였다. 신문도 보지 않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였다. 1929년 대공황으로 주식시장이 대폭락했다는 소식을 1932년에야 처음 듣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그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든 것은 애국심이나 공명심보다는 순수한 탐구욕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과학기술자 12만5000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의 과학 프로젝트는 가동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8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인재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는 어디까지나 대학원 세미나 같은 토론 방식으로 그들이 직접 운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행정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펜타곤(미 국방부 건물) 건설을 지휘해 명성을 날린 공병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여서 한번 화를 내면 목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불뚝 튀어나오곤 했다.
그는 ‘이제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괴짜와 변덕꾸러기 집단’을 군대식으로 운영하려 했다. 과학자에게 계급을 부여하고 복장을 통일했으며 군사훈련까지 시키려 했다.
뉴멕시코 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지내는 것을 못 견뎌 하던 과학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오펜하이머는 “만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원자폭탄은 꿈도 꾸지 말라”며 그로브스에게 맞섰다.
이런 갈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루스벨트는 1943년 6월 29일 오펜하이머에게 한 통의 서한을 보냈다. 큰 글씨로 비밀(secret)이라고 표시된 이 서한에서 루스벨트는 ‘박사께서 잘 아시는 비밀 계획’을 거론하며 오펜하이머를 과학자들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특히 루스벨트는 ‘그 문제(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의 반목)’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며 과학자들을 진정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과학은 적의 어떤 도전도 충분히 감당해 낼 것”이라고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이 서한은 오펜하이머의 승리를 뜻했다. 원자폭탄은 엘리트 과학자들의 자유분방한 연구 방식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비록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 대부분은 1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신’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려야 했지만….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동아닷컴 2007-06-29 03: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629/8460263/1
1941 -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파데레프스키(Paderewski, Ignacy) 사망
파데레프스키 [Paderewski, Ignacy Jan, 1860.11.18~1941.6.29]
세기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독립 폴란드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1941년 6월 27일(29일로 정정) 뉴욕에서 사망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미군 만이 안장될 수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장차 폴란드가 자유의 땅이 될 때까지라는 잠정적 조치였다. 결국 1992년 서거 51주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860년 러시아령 폴란드 쿠릴쿠프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 컨서버토리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연주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7세부터 빈, 파리, 런던, 뉴욕 등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1차세계대전 무렵 그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일원으로 워싱턴 주재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조국을 구하는 데 십분 발휘했다.
미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드로우 월슨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그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가 16세기 야젤로왕조 이후 이웃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는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는 데 헌신했다. /조선 (6월 27일 오늘의 역사)
- Paul Klee - 'Birds in Garden'
- 'Early Morning in Ro..., 1925'
1940 - 스위스의 화가 클레(Klee, Paul) 사망
클레 [Klee, Paul, 1879.12.18~1940.6.29]
스위스의 화가로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이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이다.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솜씨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21세 때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R.바그너와 R.슈트라우스, W.A.모차르트의 곡들에 심취,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세기 말의 화가 F.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 제작은 모두 어두운 환상적인 판화가 많으며 W.블레이크, A.V.버즐리, L.F.고야 등의 영향이 짙다.
1911년 칸딘스키, F.마르크, A.마케와 사귀고, 이듬해 1912년의 ‘청기사’ 제2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14년 튀니스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세계로 들어갔다.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 후에 뒤셀도르프 미술학 교수가 되어 1933년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스에 의한 예술탄압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 102점에 이르는 작품을 몰수당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라 말하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저술에는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조형사고(造形思考) Das bildnerische Denken》(1956) 《일기 Tagebucher》(1957)가 있다. 작품수장집은 스위스의 베른미술관 내 클레재단에 약 3,000점이 소장되어 있고, 대표작은 《새의 섬》 《항구》 《정원 속의 인물》 《죽음과 불》 등이다. /naver
1926 - 뉴질랜드의 시인 백스터(Baxter, James K.) 출생
백스터 [Baxter, James K(eir), 1926.6.29~1972.10.22]
뉴질랜드의 시인.
탁월한 작시법과 인상적인 이미지 구사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뉴질랜드 문단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다.
뉴질랜드와 영국에서 공부한 뒤 첫 시집 〈울타리 너머 Beyond the Palisade〉(1944)를 펴내면서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떠올랐다. 〈불어라, 풍요의 바람이여 Blow, Wind of Fruitfulness〉(1948)는 얼핏 보아서는 그저 그렇지만 깊이 있는 시집이다. 첫 비평집 〈뉴질랜드 시의 최근 동향 Recent Trends in New Zealand Poetry〉(1951)에서는 나이에 비해 원숙한 판단력이 엿보인다. 그뒤에 펴낸 시집으로는 〈쇠락한 집 The Fallen House〉(1953), 풍자적인 〈쇠로 된 빵도마 Iron Breadboard〉(1957), 〈돼지섬에서 온 편지 Pig Island Letters〉(1966)가 있다. 〈뉴질랜드 시의 양상 Aspects of Poetry in New Zealand〉(1967)을 펴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911 -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公)(Bernhart, Prince of The Netherlands) 출생
베른하르트 [Bernhart, Prince of The Netherlands, 1911.6.29~2004.12.1]
정식 이름은 Bernhard Leopold Frederik Everhard Julius Coert Karel Godfried Pieter, Prins der Nederlanden, Prins van Lippe-Biesterfeld.
네덜란드의 공(公).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 망명정부와 영국군 간의 연락책임을 맡았고, 1944~45년에는 네덜란드 국내군을 지휘했다.
베른하르트 카시미르 공의 아들이며 리페 비스터펠트가(家)의 마지막 통치군주 레오폴트 4세의 조카로서, 로잔·뮌헨·베를린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33년 이후 대부분의 독일 소공자와 마찬가지로 'SS 기사단'에 가입했다. 1936년 파리에 있는 독일 화학재벌 'IG섬유회사'에서 일할 때 율리아나 공주(뒤에 여왕이 됨)를 만나 1937년 1월 7일 결혼했다. 그뒤 네덜란드 시민권과 네덜란드 공 칭호를 얻었다.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략에 반대해 가족을 안전하게 영국으로 보낸(1940. 5. 12) 뒤 곧 네덜란드로 돌아와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독일군과 싸웠으며, 네덜란드가 독일에 항복(1940. 5. 14)하자 자신의 잔류부대와 함께 영국으로 도망갔다.
1940년 8월 네덜란드 해군 대령과 육군 대령으로 임명된 뒤 점점 더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1944년에는 네덜란드 국내군 사령관이 되어 전(全)네덜란드 군대를 지휘했다. 영국군과의 연락장교로 일하면서 조종사가 되어 1942~44년에는 영국 공군과 함께 비행하기도 했다. 연합군이 네덜란드에서 공세를 펼 때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었으며, 네덜란드 와헤닝겐에서 이루어진 휴전협상과 독일 항복식에 참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율리아나 공주가 왕위에 오른 뒤 국제무역과 문화활동을 고무하는 네덜란드의 친선대사로 일했다. 1976년 그는 록히드항공회사와 관련된 뇌물부정사건에 연루되었다. 미국 의회에서 처음으로 그 사실이 폭로된 뒤 네덜란드 특별위원회는 베른하르트 공이, 네덜란드가 록히드사의 항공기를 더 많이 사도록 하는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았음을 밝혀냈다. 이 부정사건은 군주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브리태니커
1910 - 미국의 작곡가, 작사가 로서(Loesser, Frank) 출생
로서 [Loesser, Frank (Henry), 1910.6.29~1969.7.28]
브로드웨이 뮤지컬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둔 미국의 작곡가·대본작가·작사가.
〈진정한 노력 없이도 성공하는 방법 How to Succeed in Buisiness Without Really Trying〉으로 196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대중가요에 대한 그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뉴욕 시티 칼리지를 중퇴한 후로는 1920년대말 음악출판사에서 작사가의 자리를 얻을 때까지 음악과는 상관없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의 작품은 〈내가 쌍둥이라면 I Wish, I Were Twins〉(1934)이 팻츠 월터에 의해 녹음되기 전까지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 할리우드로 간 그는 그곳에서 작사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아 호기 카마이클과 함께 〈작은 파리 Small Fry〉. 〈따분한 두 사람 Two Sleepy People〉을 만들었으며, 조셉 릴리와는 〈징글, 쟁글, 징글 Jingle, Jangle, Jingle〉을 만들었다. 그밖에 그가 가사를 써준 작곡가로는 버턴 레인, 쥘 스타인, 아서 슈발츠, 프레더릭 홀랜더, 자미 맥휴 등이 있다.
그가 가사를 쓰고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는 〈Praise the Lord and Pass the Ammunition〉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대전중 군인들이 제작하는 병영 쇼를 위해 노래를 썼으며 보병들의 군가인 〈보병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What Do You Do in the Infantry?〉를 작곡하였다. 1947년 이후부터는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후 도시에 유행하는 속어를 가사에 사용한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노래 〈중국을 향한 느림보배 위에서 on a Slow Boat to China〉는 1948년 최고 인기곡이었다. 소극(笑劇)인 〈찰리의 아줌마 Charley's Aunt〉를 뮤지컬 코미디로 바꾼 〈찰리는 어디에 Where's Charley〉(1948)와 데이먼 루니언의 이야기를 뮤지컬 코미디로 만든 〈아가씨와 건달들 Guys and Dolls〉(1950)은 그에게 토니상을 안겨주었고,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각각 1952, 1955). 〈가장 행복한 펠라 The Most Happy Fella〉(1956)에서는 오페라적 성격을 잠시 보였으나, 다시 초기의 방식으로 돌아가 〈진정한 노력 없이도 성공하는 방법〉을 내놓았다.
할리우드에서 그가 만든 작품 가운데는 다니 케이가 주연했던 영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952)의 영화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이봐요 바깥은 추워요 Baby, It's Cold Outside〉로 1949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1900 - 프랑스의 비행사, 소설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 출생
1886 - 프랑스의 정치가 슈만(Schuman, Robert) 출생
1880 - 나치에 저항한 독일의 장군 베크(Beck, Ludwig) 출생
1879 - 헝가리의 사실주의 소설가 모리츠(Móricz, Zsigmond) 출생
1866 - 일본의 서양화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출생
1818 - 이탈리아의 예수회 사제로 천체물리학자인 세키(Secchi, Pietro Angelo) 출생
1798 - 이탈리아의 시인, 철학자 레오파르디(Leopardi, Giacomo) 출생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우표와 사건06.29(3) (0) | 2019.06.29 |
---|---|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06.29 (2) (0) | 2019.06.29 |
오늘의 사건 06.28 (0) | 2019.06.28 |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8 (0) | 2019.06.28 |
오늘의사건 06.27 (0) | 2019.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