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26 세계 마약퇴치의 날
2007 - ‘일본군위안부 결의안’ 미 하원 외교위 통과
“역사적 기억상실증” 대일 경고장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가 26일(현지시각)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아직 본회의라는 관문이 남아 있고, 다른 나라 정부의 공식 사과를 강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번 결의안의 본회의 통과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이전에 두번 비슷한 결의안이 외교위를 통과한 뒤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사장된 것과는 크게 다르다. 미국 정치권에서 일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하원 지도부도 매우 적극적이다. 이변이 없는 한 다음달 중순 본회의를 통과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그들(위안부)은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왔지만, 그들의 용기를 인정하는 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며 본회의 통과를 호소했다. 톰 랜토스 외교위원장은 “전후에 독일은 올바른 선택을 했지만, 일본은 역사적인 기억상실증을 보여왔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위안부 문제는 국제분쟁이 아니라 인권문제”라며 반대 의원을 공박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인권·민주주의·시장경제는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가치”라며 “현재 미국 내 여론에 비춰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결의 반대 의사를 밝히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제훈 기자 -한겨레 2007-06-27
2007 - 세계서 가장 긴 다리 - 중국 ‘항주만대교’ 연결식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 ‘항주만대교’가 26일 연결식을 했다. 140억위안(약1조7천억원)을 들여 만든 이 다리는
중국 상하이와 저장성 닝보 사이의 36㎞를 잇는 다리로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내년 6월에 개통될 예정이다. 저장성 당국은 항주만대교의 완공으로 창장삼각주의 교통난이 크게 해소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닝보/AFP 연합 /한겨레 2007-06-28
2007 - 미 CIA, 쿠바혁명 직후 마피아 매수해 카스트로 독살 기도
쿠바 혁명 뒤 196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이 마피아를 매수해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독살 공작을 폈으나
실패한 사실이 미국 정부 문서로 확인됐다.
중앙정보국이 26일 공개한 1950~70년대 초반의 비밀공작 문서 가운데 ‘가족 보석들(family jewel)’ 부분을 보면, 미국은 59년 쿠바 혁명을 이끈 카스트로 의장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1960년 8월 중앙정보국은 ‘갱단이 하는 방식’으로 카스트로 의장을 제거하기로 하고, 로버트 마휴란 거간꾼을 세워 라스베이거스 마피아 조직 두목인 조니 로셀리와 접촉했다. 기업가로 위장한 마휴는 마피아 두목 로셀리에게 “카스트로 집권 이후 쿠바에 벌인 사업이 큰 손실을 보고 있다. 카스트로를 없애주면 15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쿠바에서 도박장 운영과 성매매로 떼돈을 벌다 혁명 뒤 쫓겨난 마피아들도 카스트로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처음에 망설이던 로셀리는 중앙정보국 요원에게 솜씨 좋은 마피아 조직원 2명을 소개해줬다. 이들은 총을 쏴서
카스트로를 죽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며 카스트로가 먹는 음식이나 물에 독극물을 몰래 넣자고 제안했다.
중앙정보국과 마피아는 카스트로 의장한테 접근할 수 있는 후안 오르타란 쿠바 관리를 매수해 알약 형태의 독약을 전달했다. 하지만 오르타는 몇주 동안 암살할 틈을 엿보다 겁을 먹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 뒤에도 중앙정보국은 카스트로 의장
독살 공작을 계속하다 1961년 4월 피그만 침공이 실패한 뒤 취소했다.
공개된 중앙정보국 비밀 문서에는 카스트로 암살 공작 뿐만 아니라 냉전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0·70년대 미국 국내 불법 도청, 반전 운동 감시, 언론인 사찰 등 ‘어두운 과거사’가 들어 있다. 미 중앙정보국도 군사독재 시절 한국 중앙정보부나 옛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처럼 국내에서 민간인 사찰과 도청 등 불법공작을 일삼았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7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외국 공산주의 정부(소련)가 미국 반전운동을 배후조종하고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며 중앙정보국에게 그 증거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규정상 중앙정보국은 미국인 대상 공작이 금지돼 있었지만 존슨 대통령 지시에 따라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했다. 중앙정보국은 7년동안 미국인 30만명과 반전조직을 감시해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관리했고, 두드러진 반전 활동을 편 7200명은 별도 감시파일을 만들었다.
〈뉴욕타임스〉는 26일 “이 문서는 냉전시기 피해망상과 무능의 어두운 증거”라며 “중앙정보국 불법 공작은 그동안 알려졌지만, 문서와 메모가 이렇게 많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며 미국 사회의 충격을 전했다. 권혁철 기자 -한겨레 2007-06-27
2006 - “舊蘇, 간도 北영토에 편입”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한 뒤 만주·간도 지역을 점령한 옛 소련이 간도를 중국에 넘겨주지 않고 북한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음을 보여 주는 중화민국 외교 자료가 공개됐다.
포스텍(포항공대) 박선영(중국사·사진) 교수는 26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1948년 7월 10일자 중화민국 외교문서 사본과 지도를 공개했다. 중화민국 국방부 2청이 외교부에 보낸 이 문서는 ‘소련이 장차 지린(吉林) 성의 옌지(延吉)·무단장(牧丹江)·무링(穆陵) 지역을 조선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제목의 보고서. 당시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이다.
보고서는 “원동(遠東)의 소련 당국이 모스크바 정부의 정책에 근거하여, 우리 동북 9성의 영토를 점차적으로 침략하고 있다”며 “소련 대표는 장차 지린 성의 옌지·무단장·무링 및 그 부근 지구를 북한의 영토로 획정하려 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이 지역은 현재 우리 영토 내에 있으나 북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는 데다 조선인들이 해당 지역의 지방행정을 주관하고 있어 실제 이 지역이 북한에 합병된 것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평양협정’을 언급하고 있다. 보고서는 “1948년 2월 소련(蘇), 중공(匪), 북한(韓)이 체결한 ‘평양협정’에 따라 장차 동북지역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획정해 주려 한다”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안둥(安東), 지린, 간도 3개 자치구를 획정한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지도에서 조선자치구로 획정된 영역은 1735년 프랑스 지도학자 당빌이 제작한 ‘조선왕국전도’, 1882년 일본이 제작한 조선국전도 등에서 조선의 영토로 간주된 간도의 영역과 유사하다.
당시 만주·간도 일대는 소련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중국은 국공내전 중이라 이를 돌려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북한은 공식
정부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같은 공산세력인 소련, 중국 공산당, 북한이 1948년까지만 해도
간도를 한국의 영토 내지 특수관계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모종의 협정을 체결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그 후 왜, 어떤 경위로 간도를 중국에 양보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북한과 중국은 1962년
비밀리에 국경협정을 체결했다.
박 교수는 “평양협정의 실재 여부와 내용에 대해선 좀 더 규명이 필요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지도는 2차대전 이후 작성됐음에도 두만강 유역의 동간도는 물론 백두산정계비에선 제외된 압록강 유역의 서간도 지역까지 아울러 한국 영역으로 간주할 근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간도는 청과 조선 사이에 영유권 분쟁을 겪다가 1909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간도협정에 따라 중국의 영토가 됐으나 일본이 식민지에서 체결한 조약은 모두 무효화한다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등에 의거해
한국학계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동아닷컴(국제) 2006-06-27 03:00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6270062
2005 - US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김주연 선수 우승
2005 - 당뇨병으로 투병중이던 탤런트 김진해씨 사망
2003 - 미국 항공우주국(NASA) 화성의 북극지역 사진공개, 화성의 물(凍土) 발견
2002 -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제9 순회항소법원 '충성의 맹세'에 대해 위헌 결정
'국기에 대한 맹세'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도 '충성의 맹세'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는 매일 아침 수업 전 학생들이 '충성의 맹세'를 외운다고 한다. '충성의 맹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미국의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공화국―하나님 아래 하나로 뭉쳐 있고, 갈라질 수 없으며,
모든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가 있는 나라―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다."(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2002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제9 순회항소법원은 이 '충성의 맹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충성의 맹세' 자체가 위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충성의 맹세' 가운데 '하나님 아래'(under God)라는
문구가 정교(政敎)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반(反)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문구는 냉전(冷戰) 시절이던 1954년, 무신론(無神論)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미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가톨릭교회의 제안으로 의회에 의해 삽입되었다.
법원의 위헌 결정이 내려지자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이번 판결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원 의원들은 위헌 결정이 알려지자 항의의 표시로 의사당 동쪽 계단에 모여 '충성의 맹세'를 외쳤으며,
상원은 국방예산 논의를 중단하고 판결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결국 제9 순회항소법원은 판결을 내린 다음날인 6월 27일 판결의 시행을 '보류'했다. /월간조선 2006-04-19
장길수 가족이 UNHCR 사무소에 들어가기 전에 촬영한 가족사진.
왼쪽부터 장길수, 외할모니 김춘옥, 외할아버지 정태준, 이모 정선희, 이종사촌 이화영, 이모부 이동학, 이종사촌 이민철
2001 - 장길수 가족 UN판무관실 진입(2001)
중국에 숨어 지내던 16살 장길수 군 등 탈북 가족 7명이 2001년 오늘 중국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했다.
이들은 북한으로 송환되면 자결하겠다며 한국 망명을 요청했다.
장길수 군의 가족은 1999년 1월 두만강을 넘어 중국 옌지와 다롄 등을 전전하다 한국행을 위해 유엔 사무소에 진입했다.
길수군 가족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진입한 지 나흘 만인 6월 30일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다. - YTN
2001 - 탈북한 장길수군 일가족 7명, 북경 유엔판무관실 진입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국제사회에 폭로하며 중국 내에 은신해 왔던 탈북소년 장길수(17·가명)군의 가족과 친척 7명이
2001년 6월 26일 오전 중국 베이징 시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UNHCR) 베이징 사무소에 진입, 자신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고
한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길수군 가족은 요령성, 대련에 은신해 있다가 22일 밤 베이징으로 이동, 이날 UNHCR 사무소에 진입했다. 이 사무소에 들어간 사람은 길수군을 비롯, 외할아버지 정태준(69), 외할머니 김춘옥(68), 이모 정선희(49), 이모부 이동학(49), 이종사촌 이화영(여·17)·이민철(15) 등이다. 이들은 한국 NGO인 `길수가족 구명운동본부` 문국한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아 2∼3명씩 세 팀으로 나뉘어 잇따라 7명이 UNHCR 사무실에 들어갔으며, 진입과정에서 심각한 제지는 받지 않았다.
길수군 가족들은 자신들의 한국행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살을 하겠다며 강력히 한국행을 희망했다. 이들은 UNHCR에서 3일간 머문 후 29일 베이징을 떠나, 싱가포르와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30일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처리한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길수군 가족이 한국으로 올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세계에서 쏟아진 비상한 관심, 2008년 올림픽 유치라는 대사를 앞두고 있는 중국의 정치적 부담 등
대외환경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국은 인천공항에 7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들었으나,
기본적인 기자회견조차 가로막고 일가족을 `안가`로 데려가 버렸다. -조선
2001 - 한국인 유전자지도 발표(2001)
한국인의 고유한 특성을 DNA 수준에서 밝힐 기초자료인 유전자 지도 초안이 2001년 오늘 공개됐다.
모 생명공학 벤처기업은 '20대 한국인 남성의 정자에서 DNA를 추출해 9만6700여 개의 BAC, 즉 박테리아 인조 염색체 조각으로
구성된 한국인 게놈 지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지도 초안은 한국인에게 유난히 잦은 암·당뇨·고혈압 등 질병의 연구와 예측의학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됐다. - YTN
클린턴 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인간 유전자 지도를 규명한
`셀레라 제노믹스` 크레이그 벤터 대표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00 -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지도 초안 발표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의 분석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여온 국제 공공 컨소시엄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와 미국 민간업체 `셀레라 제노믹스`가 유전자 염기의 배열 지도를 2000년 6월 26일 워싱턴에서 공동발표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통해 "인간 유전자 지도는 인류가 생산해 낸 가장 경이로운 지도"라며 축하했다.
이날 발표한 `인간 유전자 지도`는 생명공학의 신대륙 발견으로 평가됐다. 인간 게놈은 인체세포에 존재하는 23쌍의 염색체, 염색체를 이루는 DNA(핵산), DNA를 구성하는 30억쌍의 염기들의 이중나선형 조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에 규명된 것은 염기의 배열로, 이제 이 염기배열지도를 통해 개별 유전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작업이 남게 됐다. 인간 유전자 정보의 97%를 해독했고 85%의 염기배열 순서 분석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들은 암 심장병 당뇨 비만 탈모 천식 파킨슨씨병 알츠하이머병 에이즈 등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일반인은 현재의 `진료기록`보다 훨씬 정확하고 풍부한 자신의 유전정보를 담은 극소형 DNA칩을 의사에게
제시하고 유전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이한동 국무총리서리가 선서를 하고 있다.
2000 - 국회, 이한동 총리서리를 상대로 사상 첫 인사청문회
2000년 6월 26일~27일 양일간 국회 사상 첫 인사청문회를 실시했다.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명의 신탁 파문으로 물러나
후임 총리로 임명된 자민련의 이한동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였다.
이 총리서리가 총선 당시 "국민회의와의 공조복원은 없다"고 몇차례나 강조한 후 말을 바꾼 점, 또 1970년대 초 포천 농지를 구입한 것은 위장전입이며 농지개혁법 위반이라는 점 등 때문에 자격 시비가 제기됐다.
이 총리 임명동의안은 6월 29일 국회 표결에서 찬성 139, 반대 130, 기권 2, 무효 1로 통과됐다. 139표는 민주당 119, 자민련 17,
민국당 2, 한국신당 1석을 모두 합친 것으로 한나라당 대 비한나라당 구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 조선
1997 - 자민련 전당대회에서 김종필 총재를 대선 후보로 선출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중인 1세기 경 불교문서.
1996 - 영국서 1세기 경 자작나무에 기록된 불교 최고문서 발견
현존하는 불교기록 중 가장 오래된 문서가 발견 확인됐다. 고아시아 전문가인 미시애틀시 워싱턴대의 리차드 살로만 교수는 1996년
6월 26일 영국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인 불교문서가 서기 1세기쯤에 제작된 진본으로 현존하는 불교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학자들은 자작나무 껍질에 고대 간다라어로 기록된 이 문서가 불교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며 기독교의
사해문서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모두 60개 조각인 이 기록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설교 시 인식론 등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북부 파키스탄과
동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불교 중심지 간다라에서 나온 것으로 초기 불교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됐다.
1992 - 한미연합사령부, 의정부의 캠프 레드 클라우드 연병장에서 해체식
1990 - 박철언, 북방정책의 기본구도 발표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중인 1993년 2월 이전에 북한과 평화공존 및
자유 왕래를 실현하고 99년 이전까지 평화통일을 달성한다."
홍성철 통일원 장관, 남북불가침협정 제의 검토중이라고 언급
*정부가 검토중인 남북불가침협정 내용
현경계선의 존중 및 상대방의 정치사회질서 존중
무력불사용 및 분쟁의 평화적 해결-불침략의 국제적 보장
1988 - 제1차 '세계 마약 퇴치의 날'
1987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매년 6월 26일을 세계 마약퇴치의 날로 지정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도록 촉구함.
* 한국은 이와 관련 6월 한 달 동안 정부유관기관, 민간단체, 언론기관이 공동 참여하여 마약류퇴치국민대회,
포스터전시회 등 각종 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함.
http://www.drug.go.kr/app/sys/download/2002_chapter04.pdf?id=2419817700373511156590
오는 6월 26일은 `세계 마약 퇴치의 날’이다. 마약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마약을 우리 주변에서 몰아내기
마약은 진통과 마취 효과를 특징으로 한다. 그것이 병 치료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는 유익하지만 환각 효과를 얻기 위해
마약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기원전 3천년 경부터 이집트에서 앵속(罌粟)이 재배되었는데 의약품이 부족하던 당시 상황에서 앵속은 상비약으로 사용되었다. 앵속이 서아시아의 상인들을 통해서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唐)나라 때인
앵속은 꽃잎이 붉고 풍만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양귀비(楊貴妃)라고 불렸다. 양귀비를 복용하면 진통효과도 크고
양귀비가 문제가 된 것은 그것에서 마약의 원조 격인 아편(Opium)을 제조하면서부터 였다. 아편 중독자가 늘어나자
치료를 목적으로 제조한 약이 오히려 새로운 마약이 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합성마약인 필로폰까지 생산되면서 마약의 독성은 갈수록 강력해졌고 그 폐단도 심각해졌다.
마약의 해로움을 알지 못하던 유럽노동자와 중국인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갔다. 아편은 18세기부터 산업화가 시작되던 유럽의 도시들에서 공장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며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18세기에 중국에 유입된 아편은 중국인들을 중독 시켜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파탄하게 만들었다. 중국 아편의 심각성은 영국 등 열강들이 의도적으로 중국에 인도 아편을 밀수하여 중국인들을 중독 시켰다는데 있다.
아편으로 백성들의 건강과 국가 재정의 위기를 맞은 중국이 아편단속에 나서자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중국이 패함으로써 중국은 세계 최대의 아편시장이 되어 버렸다. 중국도 아편을 재배하고 생산하면서 19세기 말엽에 이르면 중국은 세계적인 아편생산국이자 소비국이 되었다. 이제 마약문제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마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국제회의가 1909년에 세계적 아편 도시인 상하이(上海)에서 열렸다. 이를 계기로 국제아편회의가 1912년에 헤이그에서 창설되었다. 이후 1961년의 단일국제아편조약이 출범하여 지금까지 국제적인 마약 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의 공산화로 그토록 극성을 부리던 마약문제가 사라진 듯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중독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도 있었고 생산과 유통을 적극 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의 변화에 따라 마약 문제가 다시 등장하였다.
중국 정부는 뇌물 및 인신매매범과 함께 마약사범을 최고형으로 다스렸지만 윈난(雲南)성 등 변경지역의 마약문제는 심각해져 갔다. 이에 중국 정부는 1998년부터 마약사범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시작하였으며 2007년 12월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금독법’을 통과시켰고 올 6월 1일부터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금독법(禁毒法)?은 신 중국이 처음 제정한 마약법이다. 이것은 중국의 마약 단속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포괄적인 법률이라는 평가와 함께 지금까지의 단속 일변도에서 예방과 치료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번 마약법의 제정과 실시를 통해서 중국이 마약 단속에 성과를 거두어 국제적인 마약국가로서의 오명을 벗어나기를 바라며 마약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1987년 6월 26일 부산에서의 반정부시위 모습. 반 나체의 한 시위자가
"최루탄 쏘지마"라며 절규하며 시위하고 있다.
1987 - 전국에서 평화대행진에 1백만명 참가,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
1987 - ‘6ㆍ26 대행진’, 비폭력ㆍ평화시위
‘6ㆍ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1987년 6월 26일 오후 6시를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전주 춘천 등 전국 37개 시ㆍ군 지역에서 국민운동본부, 민주당, 재야인사, 학생들에 의해 시도됐다.
이날 대행진은 6월 10일 대회에 비해 개최도시 및 시위발생지역, 시위가담인원이 훨씬 많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서울과 지방에서 일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렸고 연도의 시민, 학생들이 태극기와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일부 성당, 교회, 사찰에서도
타종이 있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7시 이후 시민들의 가세로 규모가 불어나 서울에서는 한때 서울역의 2만여명을 비롯, 동대문 영등포 일대 3만여명, 광주에서는 5만여명, 부산에서는 2만여명 등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가했다. 6만여명을 동원해 저지에 나선 경찰은 이날 하루에만 2천9백60여명의 시위참가자를 연행했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경찰이 버스로 강제 격리시켜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기도 했다.
1987 - 6ㆍ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 37개 시군에서 벌어지다.
6월 항쟁은 1987년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원인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노태우의 수습 선언으로 마무리되어,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2007년6월 10일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렸다.
경과-항쟁기간
이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6월 26 -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987 - 네덜란드 작곡가 바딩스 사망
1986 - 행정전산망 종합계획 확정 발표
1986 - 정부, 행정전산망 종합계획 확정
1982 - UN, 레바논주둔 이스라엘군 전면철수 결의
1981 - 전두환 대통령,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정상회담
1980 - 공업진흥청, 국민표준체위 첫 발표
1980 - 공업진흥청, 국민생활용품의 표준규격화위해 국내최초로 국민표준체위조사 발표
1980 - 남아프리카공화국군, 앙골라 침공
무하마드 알리
1979 - 미국의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은퇴하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년 1월 17일 ~ )는 미국의 전직 권투 선수다.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태어났으며,
1964년 맬컴 엑스 등이 이끄는 이슬람운동에 가담하기 전까지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2세(Cassius Marcellus Clay, Jr.)였다. 알리는 1975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키 191cm, 팔길이 200cm. 아마추어 복서로서 복싱을 시작해,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프로로 전향한 뒤 무패로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고, 그후 3차례에 걸쳐 타이틀 획득에 성공해 통산 19차례 방어에 성공했다. 1964년 2월 25일 소니 리스턴과 대결에 앞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호언장담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베트남 전쟁당시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말을 남기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고, 민권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기도 했다. 소니 리스턴과 두차례
대결에서 KO승으로 확실한 헤비급 챔피언으로의 발판을 다졌으며 그 이후로 플로이드 패터슨,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켄 노턴 등과 승부를 겨뤘다.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 BB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됐다.
복싱 역사상 위대한 챔피언 중 한 명으로 불리고 있다. 프로 통산전적은 56승(37KO)5패. 1980년대 초부터 파킨슨 병을 앓기 시작해 현재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딸 라일라 알리도 권투 선수다.
약력
1960년 :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 같은해 10월 29일에 프로 데뷔.
1962년 11월 15일 : 전 세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와 대결. 경기 전에 대기실 칠판에 "무어를 4회에 KO시킨다"고 쓴 뒤 링 위에 올라갔고, 그 예언대로 4회 KO승을 거둠. 경기 전에 KO 라운드를 예고하는 `떠벌이 클레이' 전설이 시작됨.
1964년 2월 25일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홀에서 열린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소니 리스턴을 7회 TKO로 물리치고 챔피언이 됨. 링지 선정 `1964년 올해의 대결'로 선정. 이 경기후 이름을 무하마드 X와 무하마드 알리로 바꿈.
이후 9차례 방어. 1966년 8월 6일 : 브라이언 런던을 3회 KO시킴.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 카메라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속 펀치를 퍼부으면서도 모든 펀치가 클린 힛트여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1967년 : 양심적 병역거부 때문에 헤비급 타이틀을 빼앗김. 프로복서 라이센스도 박탈당해 3년간 복서 기간의 공백이 생김.
1970년 10월 26일 : 세계 헤비급 1위 제리 쿼리와 3년만의 경기에서 3회 TKO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
1971년 3월 8일 : 조 프레이저가 갖고 있던 WBC, WBA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15회 레프트 훅을 얻어맞은 끝에
판정패. 생애 첫 패배. 1972년 4월 1일 : 일본 도쿄에서 열린 마크 포스터와 대결에서 15회 판정승.
1973년 3월 31일 : 켄 노턴에게 판정패로 생애 두번째 패배. 1973년 9월 10일 : 켄 노턴에게 판정승하며 설욕.
1974년 10월 30일 :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에서 벌어진 WBC, WBA 헤비급 타이틀전(럼블 인 더 정글)에서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물리치고 챔피언 등극(킨샤사의 기적). 이후 10차 방어 성공.
1975년 3월 24일 : 무명의 척 웨프너와 1차 방어전에서 15회 KO승을 거두긴 했지만 경기 도중 다운을 당하기도 함.
이 경기를 본 실베스터 스탤론이 무명의 복서가 무적의 챔피언에 도전해 선전하는 스토리를 구상했고,
이는 후일 영화 록키의 시나리오가 된다.
1975년 10월 1일 : 필리핀에서 열린 타이틀 방어전에서 조 프레이저에 14회 TKO승.(드릴러 인 더 마닐라)
1976년 6월 26일 : 일본 무도관에서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 격투기 대결을 벌였지만 결과는 무승부로 끝남.
1978년 2월 15일 : 레온 스핑크스에 판정패해 타이틀 상실. 그후 스핑크스는 지명 도전자였던 켄 노턴 대신 알리와 재대결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세계복싱평의회(WBC)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세계복싱협회(WBA) 타이틀만 보유하게 됨. WBC 타이틀은 켄 노턴에게 돌아감.
1978년 9월 15일 : 레온 스핑크스에게 판정승해 WBA 타이틀을 되찾으며 3번째 타이틀 획득에 성공.
1979년 9월 6일 : 알리 은퇴 선언. 타이틀 반납.
1980년 10월 2일 : 링 컴백. 과거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 홈즈가 갖고 있던 WBC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10회 TKO패.
1981년 12월 11일 : 트레버 버빅에 10회 판정패한 뒤 현역 은퇴.
1996년 7월 19일 : 애틀랜타 올림픽 개회식에서 최종 성화 점화자로 등장. 금메달을 다시 받음.
2003년 : 메이저리그(MLB) 올스타전에서 시구.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냄.
2005년 11월 9일 : 미국 백악관에서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자유훈장을 받음.
1978 - 광화문 데모 사건
서울대생 등 7백여명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유신반대 가두시위
1978 - 최초의 해양위성 시샛 발사
1978 - 남예멘의 두바이 대통령 피살
1977 -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최초 발전
1974 - 한-미 원자력협정 체결
1974 - 한미원자력협정 발효
1974 - 나토 회의 개막, 대서양 헌장 조인
1973 - 한-독 경제협력위원회, 함부르크에서 창립
자유화의 기대에 부풀어오른 체코 프라하 시민과 두브체크 제1서기(1968년).
1970 - 체코 공산당 제1서기염 자유화운동의 기수인 두브체크 축출
1970 - 두브체크, 공산당적 박탈
1970년 6월26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체코 공산당으로부터 당적을 박탈당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1968년 `프라하의 봄`도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다.
1968년 1월에 당 노선경쟁에서 보수파 당관료를 물리치고 제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는 곧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 당의 권력독점을 비판하고 집회와 결사를 허용하는 등 체코 전역에 자유화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이 이를 `반혁명`으로 간주한 것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자유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이미 자유를 만끽해 본 체코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소련군을 위시한 20만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 국경을 넘었지만 국민들은 온 몸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결국 `프라하의 봄`은 침략자 군화발에 짓밟혀 파국을 맞았고 소련에 연행된 두브체크는 자신의 행동이 반동적이었음을
시인해야 했다. 1969년 4월에 당 제1서기에서 해임되고 잠시 터키 대사로 전출됐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고향에서의 산림노동자였다.
1970 - 한국-엘살바도르, 문화협정 체결
1967 - 전력부족으로 20시이후 TV방송 중단
1967 - 미국, 통신위성 이용하여 전세계에 TV 중계 성공
1965 - 몰디브,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5 - 서울 FM 방송 시작
1963 -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을 방문, "Ich bin ein Berliner"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다.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독일어: Ich bin ein Berliner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라는 말은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의 라트하우스 쇠네베르크에서 한 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그 당시 했던 연설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케네디가 한 연설 중 최고라 여겨진다.
이 연설은 소련의 지원 하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동독이 언제 자신들을 침략할는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던 서베를린 시민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설 당시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Civis romanus sum)’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이러한 발언은 당시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겨냥한 것이었을뿐만 아니라, 동독 및 소련에 맞서 서베를린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어조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당시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인파(서베를린 시민의 80% 이상)가 연설장과 거리,
인근 건물을 가득 메운채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환호하자 '연설의 달인'이라는
케네디 대통령조차 연설 중간중간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많은 곡들로 서민들의 힘이 되어 주었던 남인수씨.
1962 - 가수 남인수 씨 사망
1962 - 1940~50년대 대표 가수 남인수씨 사망
1940~5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의 최고 스타로 각광받았던 남인수(본명ㆍ강문수)씨가 1962년 6월26일
오후 3시 오랫동안 앓아왔던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가요계에 발을 디딘 후 ‘눈물의 해협’에서 ‘무너진 사랑탑’에 이르기까지 무려 1천여 곡 내외의 서정가요를 부른 ‘가요황제’였다. 한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미성이었다는 그는 민족의 수난과 격동기마다 서민들에게 삶의 고개를 넘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추억의 환기, 사랑과 청춘의 격정과 이별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졌다. 특히 그의 노래는 애절함이 두드러지는 곳, 감정의 기복이 교체되는 대목에서 묘미를 발휘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바로 그렇다. ‘신라의 달밤’의 작곡가 박시춘씨와 짝이 되어 공전의 대히트를 친 ‘애수의 소야곡’ 과 ‘가거라 38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명곡들이다. 그가 자신의 생명과 바꾸면서까지 녹음한 ‘무너진 사령탑’ 또한 마지막 불꽃으로 타올라 크게 히트했다.
이렇듯 27년의 세월 동안 우리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던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45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열여덟에 떠나온 고향 진주를 못 잊어했다고 한다. 현재 전북 김제 출신의 가수이자 그의 제자였던 신해성씨가 ‘남인수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1991년부터 매년 `남인수 가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1961 - 미국, 중성자탄 개발 계획 발표
1960 - 마다가스카르공화국 독립
1960 - 영국령 소마릴랜드 독립
1959 - 한국, UN여성참정협정에 가입
1959 - 쿠바-도미니카 외교 단절
1954 - 문교장관, 한글간소화안 추진담, 각계에서 반대
1953 - 일본인, 독도에 불법 상륙
1950 - UN안보리, 북한군의 철퇴를 긴급 결의
1950 - UN 안전보장이사회,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가결
한편 대한민국(남한)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한국 전쟁)
1950 -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피난을 결심하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이미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1949년 6월 26일, 그의 거처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목숨을 잃은 백범 김구 선생.
1949 - 백범 김구, 안두희의 총에 맞아 사망
1949 - 백범 김구 피살(1949)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
1949년 오늘 암살당한다.
육군 소위 안두희는 6월 26일 일요일 오전, 서울 서대문 근처 백범의 거처인 경교장으로 찾아가 45구경 권총으로 백범을 사살했다.
백범의 죽음은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갈망하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백범의 장례식은 국민들의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그가 타계한 지 13년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암살범 안두희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판결 석 달 뒤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풀려나 바로 군에 복귀했다.
안두희가 백범 암살 1주일 전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사실 등으로 인해 배후에 대한 의혹이 일었지만
그 전모는 그가 1996년 10월 피살될 때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1949 - 김구, 경교장에서 암살당해
1949년 6월 26일 낮 12시30분, 서울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에 갑자기 4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에게 쏜 총소리였다.
73세 노혁명가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검거에 순순히 응했다.
범인이 확보되고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음도 밝혀져 사건의 전모가 곧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사건은 지금까지도 배후설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신병을 확보한 헌병대가 범인을 감방에 가두기는커녕 의무실에 보호조치한 점, 임정계열인 헌병사령관을 이튿날 춘천지구로 전격 발령한 점 등이 의문이었다. 특무대로 넘겨진 안씨에게 김창룡이 “안의사, 수고했소”라고 격려하며 술·담배 등을 제공한 사실은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25 발발과 함께 특사조치로 석방돼 육군 중령으로 복귀한 점 역시 배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
배후에 대한 물증은 없고 심증만 구구한 채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1949 - 백범 김구 암살
1949년 6월 26일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경교장 집무실에서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김구는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으며, 8·15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암살될 당시 김구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에 반대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했다. 하지만 1948년 남북한이 각기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수립을 선포하면서 김구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암살되기 한 달 전까지도 김구는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이승만과의 합작을 거부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49 - 쌩떽쥐베리 행방불명 -
1948 - 소련, 육상 수송 저지로 베를린 공수 시작
1948 - 서베를린 생필품 공수(1948)
1948년 오늘, 서베를린 지역에 대한 생필품 공수가 시작됐다.
소련이 이틀 전인 6월 24일부터 시작한 서베를린 봉쇄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였다.
서베를린은 소련이 관리하는 동독 영역 깊숙이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소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이 소련의 점령지를 제외한 독일 땅을 통합해 전후 유럽 경제 재건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계획에 반발해 서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베를린 봉쇄에 이어 7월 중순 소련이 동베를린 주둔 병력을 증강하고 이에 대해 미군 폭격기들이 파견되면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맞는다.
이 사태는 이듬해 5월 초 소련이 봉쇄를 해제하면서 해결된다.
1948 - 소련, 육로 봉쇄로 서베를린 공수 시작
1948년 3월 서방국가들은 그들이 점령한 독일 지역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합시키기로 결정하자, 소련은 이에 대한 항의로서
연합국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또한 당시 서베를린 내에 새로운 독일 마르크화가 도입되자, 소련은 이를 동독통화(東獨通貨)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마침내 소련은 베를린과 서방측 점령지구간의 모든 육로 ·수로를 봉쇄하였다. 7월 1일 소련은 ‘베를린에 대한 4개국 통치는 종식되었고, 서방 연합국들은 더 이상 베를린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6월 26일부터 미국 ·영국은 생필품을 베를린에 공수(空輸)하였다. 7월 중순 동베를린 내의 소련점령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강되고, 연합군 지역에는 8개 사단만이 남았다. 7월 말 3개 대대의 미전략폭격기들이 영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되어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연료 ·전기가 극도로 부족한 상황 속에서, 서베를린은 11개월 동안 서방측에 의한 공수조치로 연명하였다. 1949년 5월 4일 소련은 결국 봉쇄를 해제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이유는 연합국들이 동독 교통 ·통신시설에
보복조치를 취하였고, 특히 동유럽권의 모든 전략수출품에 대하여 서방측이 수입금지를 단행하였기 때문이었다.
베를린봉쇄[Berlin Blockade]
동서간의 긴장격화의 과정에서 1948년 6월 24일부터 49년 5월 12일까지, 동독(당시 소련 점령지구) 영내에 있는 서베를린과
서독(당시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구) 사이의 교통에 대하여 소련당국이 실시한 교통봉쇄조치. 그 계기가 된 것은 서독지역에서의 통화개혁(1948년 6월 30일 실시)이었다. 서방측 3개국이 통화개혁을 서베를린에도 확대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48년 6월 24일 소련 점령지구 내에서 독자적인 통화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육상의 교통·수송을 전면적으로 봉쇄하였다. 이에 서방 3개국은 즉각 서베를린에 대한 물자공급을 위해 대규모의 공수를 개시하였다.
그 연비행회수는 27만 7728회, 공수한 물자는 총량 234만 3300t에 달하였다. 한편 서방 3개국은 <역봉쇄>,
즉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 및 동독과 서독 사이의 통상·교통의 제한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48년 7월 말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서방3개국과 소련의 교섭이 진전되지 않아, 9월 이후 문제 해결의 무대는 국제연합으로 옮겨졌다.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49년 2월 미·소 대표회담이 열렸고 5월 4일 베를린봉쇄해제에 관한 미국·영국·소련·프랑스 4개국협정이
성립하여 베를린봉쇄문제는 11개월 만에 해결되었다. okchon-girl.ms.kr
베를린 봉쇄와 공수
1948-06-24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1948-06-26 미국-영국 베를린 공수 시작
1949-05-04 소련, 베를린 봉쇄 해제에 동의
1949-05-12 베를린 봉쇄 해제
1949-09-30(10-31?) 베를린 공수 종료
레슬리 비플 미국 대표(가운데 앉은 이)가 1945년 유엔헌장에 서명하고 있다.
1945 - 샌프란시스코 연합국회의에서 국제연합헌장 조인
국제 연합 헌장은 국제 연합의 기틀을 닦은 가장 선구적인 조약이라 할 수 있다. 헌장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945년 조인됐으며 원래 회원국이던 51개국 중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동의했다. 동해 10월 24일 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 중화민국(후에 중화인민공화국) 등 5개 상임이사국들은 국회에서 협약을 비준하였다.
헌장으로서 국제 연합 헌장은 영구적인 권한을 모두 기록해놓고 있으며 그 내용은 모든 회원국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내용들이다. 의무 사항도 규정해놓고 있으며 국제연합은 모든 다른 조약에 우선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헌장 전문
헌장은 장(Chapter)으로 구성된다
국제연합헌장 제1장 : 평화와 국제 안보를 지키려는 국제 연합의 가장 중요한 규약에 대해 그 목적을 규정해놓고 있다.
국제연합헌장 제2장 : 국제연합의 가입을 허용할 수 있는 기준 명시.
1945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 연합 헌장이 조인되다.
1945 - 국제연합(UN)헌장 조인(1945)
1945년 오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50여 개 연합국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지구상의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UN, 즉 국제연합헌장에 서명한다.
UN헌장은 국제연합의 근본조직과 기본적 활동원칙을 정한 법규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됐던 국제연맹을 UN이 대체하게 됐다.
유엔은 헌장이 조인되고 넉 달이 흐른 같은 해 10월 24일 공식출범한다.
유엔은 주요기구와 전문기구, 보조기구로 구성돼 있는데 주요기구에는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 등이 있고 전문기구에는
WHO와 IMF 등이, 보조기구에는 국제연합난민고등판무관실과 PKO 등이 있다. - YTN
1945 - 유엔 설립의 근거가 되는 `유엔헌장` 조인
유엔 설립의 기초가 되는 유엔헌장 조인식이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50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이로써 2차대전후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조직이 발족된 것이다.
4월 25일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2개월동안 헌장을 심의했다.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독일이 항복했고 동서대립도 심화됐지만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이 오히려 연합국의 결속력을 강화시킴에 따라 회의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후 10월 24일에는 유엔헌장을 토대로 유엔이 정식으로 발족됐다. 24일은 소련이 유엔헌장을 비준한 날로 전체 50개 조인국가중에서 26번째였다. 결국 비준국이 과반수가 넘게 된 바로 이날이 유엔 창설일이 된 것이다.
1945 - 국제연합헌장 조인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에서 국제연합헌장이 조인되었다. 국제연합(UN)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와 안전의 유지, 국제우호관계의 증진,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도적 문제에 관한 국제협력을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기구이다. UN은 1920년에 설립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국제연맹을 계승하고 있다.
UN에 대한 구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41년의 대서양헌장에서였다.
1944년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 대표들이 워싱턴 D.C.의 덤바턴 오크스에서 '일반 국제기구 설립에 관한 제안'을 발표한 이래 몇 가지 난제에 부딪혔지만, 1945년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모인 얄타 회담에서 이런 난제들이 해결되어 국제연합헌장이 탄생했다. 국제연합헌장에 조인한 국가는 당시 모두 51개국에 이르러, 헌장이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유럽국가들이 중심이 된
종전과 달리 세계 전지역의 대표성이 확보된 명실상부한 국제회의임을 입증했다. 국제연합헌장은 1945년 10월 24일 발효되었다.
1944 - 미술사학자 고유섭(1904-1944) 사망
1943 - 오스트리아 출신의 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Landsteiner, Karl) 사망
란트슈타이너 [Landsteiner, Karl, 1868.6.14~1943.6.26]
1941 - 그리스 언어학자 하드지다키스 사망
1938 - 총독부, 근로보국대조직
1931 - 이광수, 동아일보에 <이순신> 연재 시작
1931 - 연희전문, 제1회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 개최
1926 - 여운형, 광동에서 한인혁명군조직
1919 - 미국 `데일리뉴스`지 창간
1919 - 미국 '뉴욕데일리뉴스'지 창간
1918 - 이동휘 등,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 뒤에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매독
1909 - 폴 에를리히, 매독 치료약 개발
독일의 세균학자 폴 에를리히가 매독의 병원체인 스피로헤타에 대한 치료약을 개발했다. 이 약은 근대의학에 화학요법을 접목시킨 최초의 성공사례였다. 치료약이 개발당시, 매독은 파리에서만 연 3천명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이 병을 불치의 병으로 생각했다.
폴 에를리히는 매독에 감염된 토끼에 여러종류의 합성 유기화합물을 수차례 주사해 성공을 거두자 자신감을 갖고
사람에게도 실험했다. 1910년 이 `마법의 약`은 1만명의 매독환자를 치료했고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를리히는 이 약을 `살바르산(Salvarsan)`으로 명명했다.
엘리히는 명예와 많은 상을 수상했고 한 대중지는 그를 가리켜 `과학계의 왕자`라 했다. 살바르산은 1940년대
중반까지 매독의 초기치료에 이용되었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주요 치료제가 되었다.
1906 - 최초 여성 잡지 '가정잡지' 창간, 발행인 신채호
1892 - 미국의 작가 펄 벅(Buck, Pearl) 출생
벅 [Buck, Pearl, 1892.6.26~1973.3.6]
벅은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작가이다. 선교사였던 부모와 함께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고향 버지니아에서 대학을 마친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1933년까지 살았다. 1923년부터 미국 잡지에 중국 생활에 대한 논설 및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고, 1931년에는 <대지 The Good Earth>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그녀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문체 및 인생의 근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중국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평생 동안 그녀가 저술한 65권 이상의 책 대부분은 중국 및 중국인들을 호의적으로 그린 작품들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중국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증진시키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각지에 남긴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펄 벅 재단을 세웠고,
수입의 대부분을 이 재단에 희사했다.
"나는 오직 인간에 대한 믿음만을 필요로 한다.
공자가 그랬듯이,
대지와 그 위의 생명들이 지닌 경이로움에 몰두한 나머지
저 하늘 위의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 펄 벅
1884 - 한국과 이탈리아, 수호통상조약 조인
1884 - (조선 고종 21)조선과 이탈리아, 수호통상조약 조인
1836 -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의 작곡자, 작사자 루제 드 릴 사망
1827 - 영국의 발명가 크럼프턴 사망. 뮬 정방기(精紡機) 발명
1824 -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 켈빈 출생 /동아사이언스
1821 - 아르헨티나의 군인 ·정치가 ·역사가 ·시인 미트레(Mitre, Bartolomé) 출생
미트레 [Mitre, Bartolomé, 1821.6.26~1906.1.18]
아르헨티나의 군인 ·정치가 ·역사가 ·시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자유사상 때문에 고국에서 망명하여 1830년대는 우루과이에서 살았다. 1852년에 독재자
J.M.로사스가 물러난 뒤 귀국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의 유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1861년에 파봉의 싸움에서
우르키사군(軍)을 쳐부수어 국내 통일에 성공했으며, 1862∼1868년에는 통일국가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1865∼1870년 파라과이 전쟁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진두지휘를 하였다.
1870년에 《라 나시옹 La Nación》지(紙)를 창간하였다. 저서로는 《산 마르틴의 생애 Historia de San Martín》(1877∼1888)가 있다.
1810 - 프랑스 기구 제작자 J.M 몽골리에 사망
1792 - 덴마크의 화가 옌센(Jensen, Christian Albrecht) 출생
옌센 [Jensen, Christian Albrecht, 1792.6.26~1870.7.13]
Christian Albrecht Jensen (June 26, 1792 – July 13, 1870) was a Danish painter, born in Bredstedt, Nordfriesland. In 1818, he traveled to Rome, and met the sculptor Bertel Thorvaldsen.
His work is representative of the Golden Age of Danish Painting. /wikipedia
1730 - 체계적인 성운, 성단 목록을 편집한 프랑스 천문학자 메시에 출생
1541 - 잉카제국 정복한 피사로 피살
1541 - 잉카제국 정복자 피사로 피살
1501 - 남명 조식 출생
1501 - 조선 중기 학자 남명 조식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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