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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28

오늘의 사건 06. 28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2009 - ‘오발탄’ 유현목 감독 타계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유현목(兪賢穆) 감독이 28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84세. 유 감독은 지난 2007년 뇌경색 진단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당뇨합병 증세까지 보이는 등 악화된 병세로 경기도 고양시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1925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휘문중·고등학교와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56년 ‘교차로’로 감독 데뷔했으며, 이후 1960년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영화 ‘오발탄’(1961년)을 비롯해 ‘아낌없이 주련다’(1962년), ‘잉여인간’(1964년), ‘순교자’(1965)와 ‘사람의 아들’(1980년) 등 40편이 넘는 영화들을 선보였다.

지난 1976년부터는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활동하다 1990년 정년 퇴임했으며, 1995년에는 70세의 나이로 영화 ‘말미잘’을 내놓아 대종상에서 ‘영예로운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영화감독협회와 대한민국예술원은 장례준비위원회를 꾸릴 계획이다. 영화감독협회는 이날 “본 협회 고문이자 한국영화의 살아 있는 전설인 유현목 감독의 장례를 범영화인장으로 거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서양화가인 부인 박근자 여사 등이 있으며, 빈소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발인은 새달 2일. (02)2258-5940.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서울신문 2009-06-28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629600001

 

'오발탄' 유현목 감독, 28일 84세 일기로 타계

'오발탄'으로 유명한 한국 영화계의 거장 유현목 감독이 28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현목 감독은 이날 오후 12시 30분께 경기도 고양시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지난 2007년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진 유현목 감독은 최근 당뇨합병으로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받아왔다.
1925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휘문고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입문해 1956년 영화 '교차로'로 감독 데뷔했다.
1961년 '오발탄'으로 전후세대의 암울한 현실을 그려내 호평받은 유 감독은 '아낌없이 주련다'(1963), '잉여인간'(1964), '순교자'(1965), '춘몽'(1965) '막차로 온 손님들'(1967), '카인의 후예'(1969), '분례기'(1971) '사람의 아들'(1980) 등 40여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고인은 1969년 '카인의 후예'로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받은 것을 포함해 각종 영화제에서 30여개의 상을 받았으며 지난 2005년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을 비롯해 2007년에는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1976년부터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0년 정년퇴임했으며 유작은 1995년 발표한 '말미잘'이다.
영화감독협회는 고인의 장례를 '대한민국 영화인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 차려진다. 발인은 7월 2일.
고경석 기자
kave@asiae.co.kr /아시아경제신문 2009-06-28 17:39
http://www.asiae.co.kr/uhtml/read.php?idxno=2009062817231223091

 

 

전후세대 아픔 안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유현목 감독 별세

<오발탄>, <아낌없이 주련다> 등으로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유현목감독이 28일 별세했다. 향년 84. 유 감독은 2007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최근 당뇨 합병증까지 겹치며 병세가 악화돼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고인은 1925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56년 영화 <교차로>를 연출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61년 만든 대표작 <오발탄>은 전후 세대의 암울한 현실을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초빙되기도 했다. 이범선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지만, 개봉 당시엔 반사회적이고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한달 만에 상영이 중지되기도 했다.

56년 ‘교차로’ 영화계 입문…기복없는 활동
‘오발탄’ 국제적 호평…2일 ‘영화인장’으로

그는 이후 기복 없는 작품 활동으로 <아낌없이 주련다>(1963), <춘몽>(1965), <막차로 온 손님들>(1967), <분례기>(1971) 등 40여 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고인은 특히 문학과 종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영화에 반영했다. <김약국의 딸들>(1963·박경리 원작), <잉여인간>(1964·손창섭 원작), <순교자>(1965·김은국 원작), <카인의 후예>(1969·황순원 원작), <장마>(1979·윤흥길 원작), <사람의 아들>(1980·이문열 원작) 등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문예영화들이었다. <순교자>와 <사람의 아들>은 종교적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76년부터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90년 정년퇴임한 이후, 영화 제작을 그만둔 지 15년 만에 재기작인 <말미잘>(1995년)을 내놓아 화제를 낳기도 했다. 62년 이래 아홉 차례 대종상 감독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78), 대한민국예술원상(1982) 등 30여개의 상을 받았다. <한국영화발달사>(1981), <영화인생>(1995) 등 저서 6권을 펴냈으며 <일본영화 이야기>를 번역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범영화인장’으로 닷새 동안 치러진다. 한국영화감독협회와 대한민국예술원은 이날 고인의 장례를 가칭 ‘대한민국 영화감독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수영 감독이 위원장을, 영화감독협회의 정인엽 이사장과, 배우 이덕화씨가 부위원장을 맡는다. 2일 오전 영결식과 발인을 거쳐 오후에는 고인이 생전에 영화를 제작했던 서울 충무로 인근에서 노제를 진행할 예정이다.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 유족으로는 서양화가인 부인 박근자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반포동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02)2258-5940.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한겨레 2009-06-28 오후 09:47:26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62852.html

 

유현목(兪賢穆, 1925년 7월 2일 ~ 2009년 6월 28일)은 대한민국영화감독이다.

황해도 사리원시 출생으로 서울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동국대 재학 중인 1947년이규환의 조감독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했다.

데뷔작은 1956년 발표한 《교차로》이다. 이후 대표작인 《오발탄》(1961)으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이 영화는 이범선의 원작을 영화한 것으로,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불러온 의미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사회고발적인 비판의식이 포함된 영화로 해방촌에 살고 있는 월남 피난민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다.

박경리 원작 《김약국의 딸들》(1963), 손창섭 원작 《잉여인간》(1964), 김은국 원작 《순교자》(1965), 황순원 원작 《카인의 후예》(1968), 윤흥길 원작 《장마》(1979), 이문열 원작 《사람의 아들》(1980) 등 대표작들은 대부분 소설을 영화한 것이었다.

주로 다룬 주제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과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으로서 절실하게 느꼈던 이념 갈등에 대한 묘사이며, 《순교자》와 《사람의 아들》에서와 같이 구도와 신앙의 본질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기법적 측면에서는 순수한 사실주의라기보다는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여 모더니스트, 표현주의자라는 평을 들었다.

진지하고 장중한 주제 선택과 사회 비판을 위한 도구로서의 영화관, 그리고 세련된 연출 솜씨가 특징이다.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는 평도 있을 만큼 한국 영화계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3·1문화상을 수여받았다. /위키백과

 

  

2008 - 중국 ‘여중생 피살 의혹’ 격렬 시위

‘공안간부 아들 연루-편파수사’ 인터넷 급속 확산

중국 구이저우성 웡안현에서 일어난 여중생 피살사건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로 촉발된 주민들의 항의시위가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이에 중국 공안당국은 주민들의 시위 소식을 전하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삭제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28일 발생한 주민 1만여명의 격렬한 시위는 시위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거의 실시간으로 올라오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한 사진에는 휴대전화로 시위 장면을 찍는 누리꾼들이 적잖게 보였다. 인터넷 게시판과 토론방에서도 누리꾼들의 접속이 이어졌다. 소방관들이 불타는 인민정부와 공안국 청사에서 진화작업을 벌이는 장면도 인터넷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다. 한 동영상에선 검은 연기와 깨어진 창문, 뒤집어진 채 불타는 차량들이 그대로 보였다. 동영상에 보이는 시위대의 숫자는 1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이런 사진과 동영상은 시위가 진압된 이후 대부분 삭제됐다. 외신들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적 불안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중국 당국이 인터넷을 청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당국은 최근 B형 간염과 에이즈 환자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의 사이트도 석연찮은 이유로 차단한 바 있다.

이번 시위는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한 한 여중생(15) 사건에 대한 공안당국의 수사가 미흡하다는 불만이 폭발하면서 촉발했다. 하천가에 유기된 여중생의 주검이 물 위로 떠올랐으나, 공안당국은 이를 ‘자살’로 단정짓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현지에선 공안국 고위 간부의 아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돌고 있다.

공안 당국의 강간살인범 수사에 불만을 품은 주민 1만여명은 28일 오후 공안국 청사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고 홍콩 <명보>가 보도했다. 주민들은 청사를 점거한 뒤 집기와 유리창을 부수고, 1~3층을 모두 불태웠다. 목격자들은 이 과정에서 차량 20여대가 불타거나 폭발했다고 밝혔다. 부상자 수는 150명에 이르며, 시위 참가자 200여명이 이튿날 공안에 체포됐다고 홍콩의 한 인권단체가 전하기도 했다.

<아페프페>(AFP) 통신은 피해자의 삼촌(교사)이 공안에게 심하게 얻어맞아 28일 결국 숨을 거뒀다고, 한 현지 주민의 말을 따 보도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곧장 공안 청사로 몰려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공안으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이 가세하는 등 시위가 격화·확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공안은 최루탄을 쏘며 강제진압에 나섰다. 무장경찰이 투입돼 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발포하면서 주민 1명이 숨졌다는 전언도 나왔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한겨레  2008-06-30 오후 09:40:10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96292.html

 

 

2007 - 러시아 ICBM 발사 성공

러시아는 서북지역의 백해(White Sea)에 있는 핵잠수함으로부터 '불라바'라 불리는 대륙간미사일(ICBM)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고 28일 밝혔다.
러시아군 대변인은 미사일 탄두가 극동지역의 캄차카 훈련장에 예정된 시한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대륙간미사일은 핵잠수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로부터 발사됐는데 지난해 10월 동일한 잠수함에서 실시한 미사일 발사는 실패로 끝난 바 있다. 2007-06-29 부산일보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29/050020070629.1012100722.html

2007 - 워싱턴회담 앞두고 ICBM 발사한 러시아의 속셈?

오일머니로 군비강화 박차..동유럽 미 MD 대응 시위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MD)계획에 반발해 온 러시아가 미국 워싱턴에서 양국 정상회담을 하기 직전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한 것을 두고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28일 서북 백해(White Sea)에서 핵잠수함 `디미트리 돈스코이호'로부터 '불라바' 대륙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러시아측은 유럽에서 발사된 이 미사일 탄두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모스크바 동쪽 6천700km지점인 극동 캄차카 훈련장 지역에 예정된 시한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불라바 미사일은 사거리 1만km에 6개의 핵 탄두를 장착하고 있으며 현재 건조 중인 3척의 보레이급 핵 잠수함에도 장착될 예정이다.

발사 실험 성공 후 푸틴 대통령은 "어떤 미사일 방어시스템도 깨뜨릴 수 있는 불라바 미사일은 러시아의 미래 핵 군비를 이루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자랑했다.

이번 미사일 실험은 일단 자국 미사일의 공격 능력과 기술 향상을 위한 단순 훈련 차원의 실험 발사로 보여진다.

왜냐면 과거 똑같은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지만 3차례나 실패,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실제 러시아 군은 지난해 12월 불라바 미사일 실험 실패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는데 당시 러시아 언론은 군이 현재 제1부총리로 내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의 뒤를 이을 주요 인물로 간주되는 세르게이 이바느포 전 국방장관을 곤란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여기에 구소련 붕괴 후 수년간 자금 부족으로 미사일 실험을 하지 못했지만 최근 `오일머니' 유입으로 경제가 나아진 상황에서 그동안 미뤄왔던 무기 정비가 절실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러시아는 지난 5월 다중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실험에 이어 최근에는 현재 무기보다 더 사거리가 늘어난 전술 크루즈 미사일 발사 시험도 실시했다.

하지만 이번 미사일 발사는 미국의 MD계획에 반발해 온 푸틴 대통령이 내달 1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두고 `기선제압용'으로 내 놓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폴란드와 체코에 각각 요격 미사일과 레이더 기지 설치 계획을 발표했고 러시아는 자국을 겨냥한 또 하나의 도전이며 새로운 군비 경쟁을 촉발시킬 우려가 있다며 반발해 왔다.

푸틴 대통령은 이달 초 독일서 열린 G8(G7+러시아)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아제르바이잔 미사일 기지 공동 사용을 미국에 제안, 미국을 압박했다.

양국 정상은 이틀간 미국 메인주(州)의 케네벙크포트에서 만나 북핵문제, 이란 핵개발 프로그램, 미국의 MD시스템 동유럽 배치 문제 등 현안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현호 기자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6-30

 

 

2007 - 재외국민에 투표권 준다

헌재 “선거권 제한은 헌법 불합치” 결정
내년 말까지 법 개정해야…올 대선부터는 힘들어
2012년 대선·총선부터 적용 가능성

그동안 투표권이 없던 재외국민들이 앞으로 각종 국내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종대 재판관)는 28일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법률고문 김아무개씨 등 미국과 캐나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 15명이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공직선거법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 심판에서 헌법 불합치를 결정하고, 개정 입법시한을 2008년 12월31일로 정했다. 그 이전에 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2009년부터 관련 법률은 효력을 잃게 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선거권은 헌법상 기본권인데 공직선거법은 단지 주민등록이 돼 있는지 여부에 따라 선거인명부에 오를 자격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결정하고 있다”며 “이는 주민등록법상 주민등록을 할 수 없는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재외국민의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하고, 보통선거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단순위헌을 선언할 땐 선거인 명부 작성이 불가능해 오는 17대 대선 등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는 법적 혼란의 가능성이 있다”며 “재외국민에 대한 신분확인 등 구체적 방안을 검토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선 올 12월 대선 이전에 헌재의 결정 취지를 담은 법 개정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개정 시기의 유·불리를 놓고 각 당과 후보자 사이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새로 유권자로 편입될 만 19살 이상 재외국민의 정확한 수는 외교통상부가 취합 중이지만, 대략 21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대선의 당락을 결정하고도 남을 수치다. 2002년 대선과 1997년 대선에서 당선자와 차점자의 표차는 각각 57만여표와 39만여표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적 계산 때문에 정치권은 내년 4월 총선 이후로 논의 자체를 미룰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날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선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제 도입을 뼈대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심의했으나, 투표권 부여 범위를 놓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장·노년층이 많은 영주권자까지 투표권을 주자는 태도인 반면, 열린우리당은 젊은층이 다수인 단기체류자부터 우선 투표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안효수 중앙선관위 공보과장은 “준비와 교육에 걸리는 시간 등을 거려할 때 최소한 대선 6개월 전에는 입법이 이뤄져야 재외국민 투표의 안정적인 시행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선거관리를 담당할 기구와 투표소 설치, 투표자의 신분확인 절차, 투표방식 등 선결과제가 많다는 것이다.

헌재의 결정 취지대로 2008년 12월31일 이전에 법이 개정되면, 바뀐 법률은 2010년 지방선거부터 적용된다. 그러나 헌재가 지방선거에 미치는 이번 결정의 효력 범위를 ‘국내 거주 재외국민’으로 한정함에 따라 지방선거의 경우에는 적용 대상이 많지 않다. 따라서 새 법률이 재외국민 전체로 확대 시행되는 시점은 2012년에 치러질 대선과 총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희철 고나무 기자 /한겨레 2007-06-28

 

 

2007 - ‘가뭄 몸살’ 중 선양시…로켓 100발 쏴 인공강우 성공

56년 만에 찾아온 극심한 가뭄으로 몸살을 앓던 중국 선양(瀋陽)시가 수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인공강우에 성공했다.

28일 현지 언론에 따르면 선양시 기상당국은 27일 오후 4시께 기상레이더에 비구름이 포착되자 로켓 발사대 10대를 동원해 캉핑(康平), 신민(新民), 둥링(東陵), 쑤자툰(蘇家屯) 지역 등 시 외곽 상공의 비구름 속으로 로켓 100발을 쏘아 올려 마침내 비를 내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로켓을 쏘아 올린 지 수 시간이 지난 자정께부터 시내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해 28일 오전까지도 가느다란 빗줄기가 계속 내렸다.

선양시는 지난 24일까지 가뭄 해갈을 위해 모두 3차례 인공강우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간 바 있다.

선양시 기상당국은 "이번 비는 29일까지 계속되면서 대략 30㎜ 안팎의 강우량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조계창 특파원 (선양=연합뉴스) 2007-06-28 /한겨레 

 

 

2007 - 네이버, 다음 '본인확인제' 시행

2007 - 네이버·다음, 오늘부터 ‘본인확인제’ 실시

댓글 달려면 실명 인증 거쳐야

28일부터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려면 본인 실명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보통신부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따라 다음달 27일부터 제한적 본인확인제가 적용되는 35개 인터넷 사업자 가운데 주요 사업자부터 조기 시행한다고 27일 밝혔다.

이에 따라 누리꾼이 댓글 등의 정보를 이들 사이트 게시판에 올리려면 실명 인증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기존에는 주민등록번호나 실명 확인 없이 회원 가입을 통해 이용이 자유로웠다. 업계는 신용정보기관을 통해 실명 인증이 이뤄지며 민·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누리꾼들이 악성 댓글이나 게시물을 올려 피해를 주는 사례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포털들은 만 14살 미만의 아동일 경우, 법정 대리인의 동의로 회원가입 때 본인 확인을 대신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은 외국인 등록번호로 본인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네이버 홍보팀은 “당분간 팝업창을 통해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라며 “본인 확인을 하지 않은 이용자는 메일, 쪽지, 블로그, 카페 등 개인화 서비스에서만 글쓰기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음 홍보팀은 “한달 최소 한차례 다음을 로그인하는 회원만 2200만명 정도”라며 “실명인증 없이 개인 카페 등에 올린 콘텐츠도 공개 게시판으로 이동시키려면 실명인증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실명 인증 절차를 거치면 인터넷 필명 등으로 글을 올리는 것은 가능하다. 임인택 기자 2007-06-27 /한겨레

 

 

2007 -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 타계

미와자와 기이치 전 일본 총리가 28일 도쿄 시부야구 자택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향년 87.

미와자와는 일본 헌법 9조 개정에 신중한 자세로 일관해 자민당 호헌파의 대표적 보수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두고서도 “이웃 나라에 대한 배려라는 관점에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1991년 11월 다케시타파의 지원을 업고 나이 일흔둘에 총리에 당선된 그는 거품경제 붕괴 이후 경기불황과 정치개혁 실패로 재임 내내 악전고투를 겪었다. 총리 퇴임 뒤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총리 경험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장상, 재무상에 재기용되기도 했다.

그는 도쿄대 법학부를 나온 뒤 1942년 옛 대장성에 들어가 이케다 하야토 대장상 밑에서 전후 ‘경무장 경제우선’ 노선의 기조를 만들었다. 62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입각한 그는 통산상, 외상, 관방장관, 자민당 총무회장 등을 역임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한겨레 2007-06-28

2007 - 미국, 수지여사 석방위해 미얀마 군부와 접촉중

미국은 미얀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풀기위해 미얀마 군부와 협의중이라고 국무부가 28일 밝혔다. 톰 케이시 국무부 대변인은 에릭 존 국무부 차관보가 중국의 중재로 이번주 베이징에서 미얀마 정부 각료들과 ’드문’ 접촉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협의를 통해 미얀마측에 수지여사와 수천명의 다른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을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다면서 미얀마측은 그러나 수락여부를 밝히지 않고있다고 케이시 대변인은 덧붙였다. 케이시 대변인은 에릭 차관보가 3명의 미얀마 각료들과 협의를 통해 양측이 솔직한 의견교환을 가졌으나 불행이도 미얀마측의 기본태도가 변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케이시 대변인은 미얀마측이 미국과의 협의를 요청했으나 그들은 미 관리들이 수지 여사를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대문에 협의 장소가 베이징으로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진행중인 미국과 미얀마측과의 협의는 근래 양국간에 이뤄진 최고위급 직접 접촉이다. 연합뉴스 2007-06-2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9/2007062900172.html

2007 - 아웅산 수지 가택연금 해제 협의
미국은 미얀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풀기위해 미얀마 군부와 협의중이라고 국무부가 28일 밝혔다.
톰 케이시 국무부 대변인은 에릭 존 국무부 차관보가 중국의 중재로 이번주 베이징에서 미얀마 정부 각료 3명과 드문 접촉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협의를 통해 미얀마측에 수지 여사와 수천명의 다른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을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요구했지만, 미얀마측의 기본태도가 변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미얀마측과의 협의는 근래 양국간에 이뤄진 최고위급 직접 접촉이다. 2007-06-29 부산일보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29/050020070629.1012100722.html 

2004년 6월 28일 바그다드에서 치

러진 이라크 주권이양식에서 미 군

정의 폴 브리머 최고행정관(오른쪽)

이 마흐디 알 마흐무드(왼쪽) 이라크

 대법원장에게 주권 이양 서류들을

건네고 있다. 이라크 임시정부의 이

야드 알라위 총리(가운데). /조선
 

2004 - 미국, 이라크에 주권 이양(2004)
2004년 오늘, 미국이 이라크에 주권을 넘겨줬다.
바그다드 중심부 '그린 존'의 옛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GC) 본부 내 한 사무실에서 열린 이양식에는 폴 브레머 전 미군정 최고행정관과 셰지크 가지 알 야와르 이라크 대통령, 이야드 알라위 총리, 마크 키미트 이라크 주둔 미군 대변인 등이 참석했다.
이라크 주권 이양식은 너무도 단촐하게 약 5분만에 끝나 버렸다.
브레머 전 최고 행정관이 주권 이양문서를 낭독한 뒤 미드하트 알 마모디 이라크 대법원장에게 이양서류를 넘겨줌으로써 1년2개월19일만에 이라크 주권은 연합군 임시행정처(CPA)에서 이라크로 넘어갔다.
이라크 임시정부 각료들은 취임식에서 미군정의 종료를 공식 선언했고 알라위 총리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감격해 했다.
알라위 총리 등은 차례로 코란에 손을 얹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취임선서를 했다.
야와르 대통령은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신의 가호 아래 우리 국민들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YTN
2004 - 미국, 이라크에 주권이양 

미국에서 이라크로의 주권 이양식이 당초 일정을 이틀 앞당긴 2004년 6월 28일 오전 10시26분(현지시각), 삼엄한 경비 속에서 바그다드 도심에 위치한 옛 과도통치위원회(IGC) 본부에서 은밀히 치러졌다. 폴 브리머 연합군 임시행정처(CPA) 최고 행정관은 이날 주권이양과 관련된 법률문서를 가지 알 야와르 임시정부 대통령에게 공식 인계하고 서명식을 가졌다.

이로써 지난해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 함락으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정권이 붕괴되면서 미군 주도 연합군의 점령통치가 시작된 지 1년2개월19일 만에 이라크는 다시 주권국가가 됐다. 연합군은 이날 후세인과 측근들의 사법적 관할권도 이라크 법무부에 넘겼다고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지라가 전했다.

미 군정 당국과 이라크 임시정부가 당초 예정일을 이틀 앞당겨 전격적으로 주권이양 행사를 가진 것에 대해 당초 예정일에 맞춰 감행될 저항세력들의 대규모 테러공격을 피하고 이라크 안정화를 조기 실현하려는 포석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한편, 아랍어 위성방송 알 아라비야 등에서는 ‘미국이 권력이양을 서두르는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임시정부에 실어주기 위한 조치”라는 전문가의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

 

 

2004  - 이라크가 쿠르드어를 아랍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다. /위키백과

쿠르드어(쿠르드어: Zîmane Kurdî / كوردي)는 중동에 있는 쿠르디스탄에서 쓰이는 언어이다. 라틴 문자로 표기된 것과 아랍 문자로 표기된 것 두 가지가 있다.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분포해있는 터키 동남부지역에서는 일상어로서의 위치가 확고하다. /위키백과

 

 

2003 - 서기7세기 추정의 마애불상 발견

 

 

2002 - 러시아 과학자 등 1백여명 탄 남빙양(南氷洋) 조난 선박 구조

영국의 BBC방송은 6월 14일 러시아 과학자 79명과 선원 등 1백7명이 탄 선박이 남빙양(南氷洋)의 빙산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이들을 구하려는 비상 작전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남극의 러시아 기지인 노보라자레프스카야에서 탐사 및 연구활동을 마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으로 가기 위해 프린세스 아스트리드 해안에서 독일 국적의 막달레나 올덴도르프호를 탔다가 얼음 바다 위에서 발목이 잡혔다. 선박이 빙산과 유빙(流氷)에 갇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선장은 가장 가까이 있는 남아공의 남극 탐험기지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구조요청을 받은 남아공과 아르헨티나는 즉각 구조선을 띄우려 했지만 현재 이 지역이 한겨울에 접어들어 최저 기온이 섭씨 영하 50도까지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밤이 이어지는 악조건이 계속되기 때문에 구조가 매우 어려웠었다.

 

드디어 남극 연안 얼음 속에 갇힌 막달레나 올덴도르프호의 과학자들과 승무원이 남아프리카공화국 헬리콥터 2대에 의해 6월 28일 구조됐다.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막달레나 올덴도르프호로부터 350km까지 얼음을 뚫고 접근한 남아공의쇄빙선 아굴하스호에서 이륙한 헬기 2대는 이날 수차례 비행 끝에 48명을 막달레나 올덴도르프호로부터 아굴하스호로 이송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지난 25일 부에노스아이레스항을 출발한 아르헨티나 해군 쇄빙선 알미란테 이리자르호도 오는 7월 7일까지 남아공 구조반에 합류해 막달레나 올덴도르프호가 자력으로 얼음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항로를 만들어 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극한지공학기술연구회 공지사항 / Notice (2002. 6. 29)

http://oceanus.kmaritime.ac.kr/ice/notice.htm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오

른쪽)과 제프 레이크스 부회장이 M

S 분할명령에 무효 판결을 받은 후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조선 

 

2001 - 미국 항소법원,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명령은 무효라고 판결 

미국 항소법원이 2001년 6월 28일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을 명령한 하급법원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재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MS사는 2000년 6월 미 법원으로부터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향후 연방과 각 주의 반독점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를 두 개 그룹으로 분할하라는 판결을 받았었다. 항소법원은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불법적으로 윈도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판결 내용은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 심리를 담당할 판사가 적절한 제재 조치를 결정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특히 판결 과정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시하며 "사건을 맡은 토머스 잭슨(Thomas Jackson) 판사의 태도가 재판 절차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으며, 사법제도의 완전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법적 조치를 숙의할 수 있도록 사건을 돌려보낸다"며 "새로운 재판부가 사건을 맡아 재심리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MS사는 2월 연방항소법원에서 잭슨 판사의 판결이 회사와 최고경영자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처벌을 목적으로 내려졌다고 주장했었다. 한편 이번 판결로 MS의 주가는 한때 전날 대비 5.7%까지 폭등해 나스닥시장에서 거래가 정지되기도 했다. /조선

 

 

2000 - `요도호` 납치범, 범행 30년 만에 일본으로 송환

 

 

1998 - 김정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선거 후보자로 선출

1997 - 체 게바라 유해 발굴

늙을 수 없는 ‘젊은 혁명가’의 귀향

‘범중남미 대륙 혁명’이란 야심을 품고 쿠바를 떠났던 혁명가 에르네스 토 체 게바라가 지난 7월12일 31년 만에 유골이 되어 쿠바 수도 아바나로 돌아왔다.

19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활동 도중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시신은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수도 산타크루스에서 2백40㎞ 떨어진 발레그란데 공항 주변에서 7구의 다른 유골과 함께 발굴됐다. 70년대 이 후 일본 적군파 등 세계 극좌 테러단체 청년들로부터 우상으로 추앙받던 체 게바라의 유골은 곧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아르헨티나·쿠바·볼리비 아 전문가들에 의해 정밀 감식됐다. 그 결과 쿠바 출신 게릴라로 신원이 밝혀진 다른 3구의 유해와 함께 쿠바로 송환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의사로 중남미 일대를 방랑하던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의기투합해 1958년 쿠바 혁명에 가담하면서 게릴라로 혁명에 몸을 던졌다.

쿠바혁명 성공 직후 그는 카스트로의 천거로 산업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등 요직에 앉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식 개혁’을 도모한다며 장관 의 몸으로 카메라 앞에서 손수레를 끄는 등의 무리한 사회주의 정책 때문 에 체 게바라는 쿠바 지도부 내에서 잦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오늘날 “ 쿠바 경제를 망친 장본인 중 하나”란 비판도 받고 있다.

결국 그는 쿠바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엮은 자신의 ‘게릴라 전술’ 이 론을 중남미에 퍼뜨려 좌익운동의 새로운 일가를 이루겠다는 야심을 품고 쿠바를 떠났다. 그러나 1966년 볼리비아에 도착한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도 “조건이 성숙지 않았다”는 현지 공산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게릴라 전술을 고집하다가, 67년 서부 산악지대에서 토벌군에게 포로로 잡혀 11월9일 총살됐다. 당시 토벌군은 체 게바라가 사살됐다는 증거로 시신에서 손을 잘라 쿠바로 보냈는데, 이 덕분에 지난 6월 발굴된 손뼈 없는 유해가 그의 것으로 쉽게 판명될 수 있었다.

13일 아바나에서 거행된 체 게바라의 유해 송환 기념식에서 그의 딸 알리 에다는 “오늘 우린 그들의 시신을 맞이하지만, 그들은 패배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히 젊음을 간직한 영웅으로 돌아왔다”고 말했 다.

임민 기자 [한겨레 21 167호] 1997-07-24 /한겨레

http://www.hani.co.kr/hankr21/K_977O0167/977O0167_024.html

32년만에 유해로 귀환

‘돌아온 혁명 영웅 체 게바라’는 오는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매장된다. 지난 7월12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진 게바라의 유 해가 이날 마침내 이 쿠바혁명 전적지를 안식처로 삼는 것이다. 게바라 군대가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 전투 뒤 39년, 콩고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의 일이다. 이 날은 또 쿠바 정부가 정한 게바라 추모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쿠바 정부는 게바라의 유해를 우선 수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11일부터 13일까지 전시할 예정이다. 그 뒤 14일에 아바나에서 3백km 동 쪽에 있는 산타클라라의 묘지로 옮긴다. 아바나에서 산타클라라까지의 행 진루트는 지난 58,59년 그가 산타클라라에서 아바나로 가던 꼭 그 길이다 .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10월17일 매장행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될 예정이다.

이렇게 게바라가 30년 만에 자신의 안식처를 찾은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처럼 보인다.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서쪽 240km 떨어진 바예그란데 공항 근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게바라 유해의 행방 은 지난 30년간 갖가지 추측만을 낳았다.

게바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그간의 조사와 연구는 아주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됐다. 우선 희생된 게릴라 대원들의 시체가 땅에 묻혔는지조차 확실 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군이 게바라의 주검을 헬리콥터로 아마 존 밀림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들은 따라서 이미 게바라 의 주검은 사나운 동물의 밥이 돼 버렸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렇게 게바라 유해 발굴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볼리비아 군대가 시체가 묻혔을 수도 있는 지역과 장소에 대한 정보 차단했던 탓도 컸다.

그러나 쿠바와 아르헨티나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처형 당시 게바라를 바예그란데 근처로 옮겼다는 운전사의 증언을 확보하고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 6월 말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 있는 그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 당시 게바라는 두팔이 없는 상태였다. 지난 67년 볼리비아군이 게바 라의 죽음을 쿠바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주검에서 팔을 잘라 쿠바로 보 냈기 때문이다. 조사단은 곧 관련자들의 증언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유골이 게바라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게바라는 마침내 머나먼 혁명의 여 정을 마치고 제2의 고향인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묻히게 된 것이다. /靑山淸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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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서 혁명가로, 게바라 격정의 39년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과 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 이 ‘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코 스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 번에 걸쳐 실시한 남미 전역 여행은 게바라를 크게 바꾸 어 놓았다.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이 세계 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권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56년 7월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 다. 게바라는 같은 해 11월 80여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돼 거의 전멸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게바라, 카스트로 등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산맥에 숨어 게릴라활동을 벌이며 혁명군 을 모은다. 이들은 수만명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오다 58년 산타 클라라전 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는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59년 1월2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뒤 쿠바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 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 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그는 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 1년 뒤 게바라는 우루 과이의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게바라가 볼리 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해 게 바라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결국 게바라는 67년 10월8일 체포된 뒤 처형됐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생활은 다룬 다큐멘터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비아 일기>에 따르 면, 그는 “왜 인텔리 의사가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넣었느냐”는 볼리비아 여인의 질 문에 간단히 “나의 이상을 위해”라고 답한다. 다큐멘터리는 또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게바라가 처형된 뒤 반쯤 뜬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추구한 이상의 실현을 죽어서나마 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靑山淸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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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미국 여배우 라나 터너 사망

 

 

1993 - 미스코리아 선발 부정사건  

1991년 6월 28일,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

이 공식해체됐다. /조선

 

1991 - 동유럽공산권 경제기구 '코메콘' 해체

1991 - 코메콘, 42년 만에 공식해체

1991년 6월 28일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공식 해체됐다. 1947년 미국이 마셜 플랜 (유럽부흥계획)을 제안했을 때 동유럽 여러나라가 동요함에 따라 1949년 1월 25일 소련 주도하에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동유럽공산권국가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창립됐었다.

1960년대 이후 코메콘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눈부신 발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제체제협력으로부터 경제통합으로 활동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변혁은 코메콘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1990년 1월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개최된 코메콘 10개국 지도자회의에서 종래의 엄격한 중앙경제계획에서 시장중심의 무역제도로의 전환을 결정하였고, 1991년 6월 제46차 총회에서는 모든 조약과 문서를 취소시키고 기구해체 의정서에 정식 서명했다. /조선

 

 

1982 - 금리 인하 조치(6·28조치)

5. 실명제 소용돌이 - 1982년 국내 10대 뉴스

하반기 국내 경제는 실명제 소용돌이로 지고 샜다. 파격적인 금리 인하(6·28조치)를 전주곡으로 대폭적인 세율 인하 구상 과 함께 몰아친 7·3실명제 태풍은 글자 그대로 메가톤급. 금값 상승 에 따른 한국은행 보유 金 매각엄포, 부동산 투기, 정부 여당간 줄다리기 속에 주가가 춤을 추는 등 실명제 파동의 부산물이 연이어 나타났다. 「86년 이후 실시」로 연기된 실명제는 결국 엄청난 비용만 치른 채 해프닝으로 끝난 셈.

http://home.megapass.net/~jsamen/news02.htm 

 

 

1980 - 정부, 컬러TV 방영방식을 NTSC식(미국식)으로 결정

1980 - 체신부, 컬러 TV 방송의 방영방식을 NTSC로 확정 /동아사이언스

 

 

1979 -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준유가 59%인상

한편 과거 경험으로 보아 중동위기 사태는 곧바로 석유위기를 초래하고 세계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 과거 중동지역 위기와 유가 급등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Dubai유 기준).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던 1973년에는 약 3개 월 만에 2달러에서 10달러로 5배나 폭등했고, 1979년 2차 석유파동 때는 약 9개월에 걸쳐 13달러이던 유가가 30달러로 급상승했다. 걸프전이 발생했을 때(1990년)는 약 3개월만에 15달러이던 유가가 35달러로 급등했고, 1999년~2000 사이 약 1년 6개월 사이에 10달러에서 30달러로 상승했다. 그리고 2002년 3월에 19달러이던 유가가 4월 초(약 1.5개 월)에는 26달러로 상승했다. ... (정상률·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초빙연구원) /segero.hufs.ac.kr /Google

 

 

1979 - 제5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일본 동경)

 

 

1977 - 외무부, 김형욱사건 청와대 도청사건과 관련 미국에 항의각서 전달

 

 

1976 - 실론 독립. 국가명을 스리랑카로 명명 - 72년 5월 22일로~ 

 

 

1976 - 세이셸이 영국의 통치로부터 독립

 

 

1974 - 해경 초계정, 북한 함정에 피침

 

 

1970 - 서울서 제37회 세계 작가대회 개최 - 29일에서 옮겨옴 

[제37차 국제 펜 대회]가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는데, 주최측인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속칭 '한국 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외적인 일부 젊은 문인들을 뺀 거의 모든 문인들이 이 초유의 국제행사를 큰 영광으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더구나 '박정희 독재'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모처럼만에 제 격식을 갖춘 국제행사를 유치한 것을 큰 경사로만 여겨 막대한 나라 돈을 아낌없이 퍼부어가며 국가사업으로 이 행사를 진행시켰다. 대통령은 개회식장에 직접 나타나 세계 문인들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했고, 물론 대통령이 주최하는 리셉션도 마련되어 있었다. '문화 후진국'의 인상을 벗겨낼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정권안보'의 근사한 선물감이 되기도 하였다.

제37차 국제 펜대회의 주제는 '동서문학의 해학'이라는 제목이었다. 냉전구조의 최전선을 이루어 세계인이 떠맡아야 할 고통을 통째로 질머지고 있는 분단 한반도에서 열리는 최초의 국제 문학대회인만치 '전후사 냉전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나'와 같은 주제가 온당할 일이었다.

'해학'이라는 주제야말로 박정권의 '독재'를 합리화시켜주는 세계문학인의 '선물'이 될 노릇이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현재의 서울에서는 '풍자'의 시를 쓴 것이 반공법 위반이라 하여 김지하가 구속되어 있는 중이었다. '웃는 것이 반공법 위반'이 되는 나라에서 '해학'이라는 테마를 내세워 개최되는 국제 펜대회...

'세상에 이보다 더 심한 해학, 이보다 더 저질의 풍자는 있을 수 없다' 하는 심한 모멸감에 몸서리를 내는 문인들이 없을 수는 없었다.

국제 펜대회가 열리기 사흘 전부터 '한국문학인의 뜻'을 표시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지하 석방이야말로 국제 펜 대회 주제인 '해학'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임을 알려야만 하였다. 서울의 펜 대회가 '김지하 석방 요구' 결의안을 채택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혹시 이러한 제안이 나오지나 않을까 하여 주최측인 [한국 펜] 보다도 당국이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였다.

한국문인들은 겁쟁이들일 따름이었다.

김지하 석방 요구의 성명서나 호소문도 만들지 말고, 그냥 회의장 앞에서 소극적인 '의사표시'로 침묵의 도열 시위를 해보는 '최소규모'의 염치 차리기에 뜻을 모은 문인들이 16명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나라 망신'을 염려하는 문인들 중에서 '원로문인'에게 '고자질'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문인협회 이사장은 김동리였고,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장은 백철이었다. 이들로부터 '젊은 문인들 호출'이 있었고 그에 응하는 문인들이 나타났다. 16명 중에서 많은 이들이 떨어져나가고 7인의 문인만 남게 되었다. 이호철 이문구 정현종 조태일 김승옥 박태순 및 이제하였다. 특히 이호철과 이문구가 문학 내부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크게 압력을 받았다.

결국 '최소한도의 염치 차리기'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황야의 무법자 7인'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 '무법자' 되기를 포기하여 개과천선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소설가 이제하는 이 때의 문인들의 놀아나는 꼬락서니에 환멸을 느껴 이 이후로 일체의 '문학운동'에 대해 초연한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고 후일 실토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로 재직중이던 김병익은 '반드시 필요한 문학기사'를 놓치게 된 데 대한 서운함을 표하였고, 문학기자단을 대신하여 '문인들의 나약함'을 항의하였다. 문학기자들은 신문사 상부층의 압력이 있더라도 '문인 염치 차리기'가 결행될 경우 이를 기사화하기로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고 기다렸던 중이었는데 '만사휴의'가 되고 말았다.

'동서문학의 해학'을 주제로 한 국제 펜대회는 성황리에 치르어졌다. 김지하의 구속과 이 문학행사를 연결시켜 '해학'이라는 주제를 따져보고자 하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역사적 고난'을 이겨내도록 한 낙천전인 한국문학의 전통 속에는 김삿갓이라든가 정수동 등의 반골 풍자문학이 있다든가, 저항적인 민요에 나타나는 한국기층문화의 '한'의 문학적 특성에 관해 장황히 자랑하는 주제 발표들은 속출되었으나 [오적]시에 나타나는 풍자와 해학이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골탕 먹이고 있는 중인가를 상기시키게 할 어떠한 발언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문인들의 이같은 비굴성과 '친독재성'을 방관적으로 목격하게 된 국제 문인들은 해학 아니라 조소를 보냈다. '김지하문학'에 대해 구태어 그들이 발언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입을 꼭 다물고만 있었다. 그들은 독재자가 베푸는 헐거운 선심 덕분에 잘 먹고 잘 놀고 푸짐한 대접을 받고, 그러나 흉을 보면서 돌아갔을 따름이었다(하지만 그 이후 국제 펜은 '김지하문학' 및 그의 수난과 관련하여 박정권과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던 바, 여기에는 특히 '일본 펜'과 '미국 펜'이 중요한 몫을 하게 된다. '한국 펜'은 김지하가 '시인' 아니라 '정치 선동꾼'이라 주장하면서 계속 추태를 떨게 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www.minjak.or.kr 

 

 

1967 - 지리학자 육지수 사망

 

 

1966 -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파키스탄 방문(1966)
1966년 오늘,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아유브 칸(Auvb Khan) 파키스탄 대통령이 저우언라이 총리를 맞이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아유브 칸 대통령에게 국경협정의 준수와 군사·경제원조 등을 약속했다.
이틀 동안의 방문을 통해 저우언라이 총리는 비동맹외교를 추구하는 파키스탄에서 중국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YTN

 

1966 -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 일리야 대통령 실각  

1958년 스웨덴월드컵 결

승전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는 17세의 펠

레. /조선

 

1958 - 제6회 스웨덴월드컵서 브라질 우승, 펠레 일약 스타로 부상 

1958년 6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주최국 스웨덴을 5대2로 이기고 우승했다. 이날 브라질 승리의 원동력은 신장 168cm, 체중 67kg의 17세 소년 펠레였다. 가히 이번 스웨덴월드컵은 훗날 ‘축구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펠레를 위한 대회였다. 수줍음 잘 타는 앳된 얼굴의 17세 소년 펠레는 등번호 ‘10’을 달고, 프랑스전 해트트릭과 결승전 2골 등 6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에 첫 줄리메컵을 안겼다.
특히 이날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그가 뽑아낸 골은 역대 최고의 골 장면으로 남아 있다. 왼쪽 사이드에서 올라온 센터링을 정확한 트래핑으로 수비 한명을 제친 뒤, 다시 수비 머리 위로 공을 띄운 후 돌아 들어가 발리슛으로 넣은 골은 신기(神技)에 가까웠고, 상대편이던 스웨덴 관중의 기립박수까지 쏟아져 나왔다.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시멘토가 본명인 그는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축구공 하나로 명예와 부를 얻었다. 펠레는 13세에 브라질 프로축구 산토스에 입단한 이래 1363경기에 출전해 1281골을 뽑아내며 축구 황제로 군림했지만, 따뜻한 인간미로 더욱 사랑받았다.
브라질은 이후 1971년 7월 18일 펠레가 은퇴하기 전까지 62년 칠레월드컵,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해 ‘3회 우승한 나라가 영구 보유한다’는 FIFA의 규약에 따라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게 됐다. /조선

 

 

1956 - 폴란드 포즈난에서 반공의거, 반소(反蘇) 봉기

 

 

1954 - 변영태 제5대 국무총리 취임(1954)
1954년 오늘!
한국 대표로서 제네바정치협상회담에 참석하고 서울 여의도 공항으로 돌아온 변영태 외무부장관!
귀국과 동시에 제5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이로써 외무부장관직과 국무총리직을 겸임하게 됐다.
사흘 뒤인 7월 1일 변영태 총리와 신임 5부 장관에 대한 임명식이 거행됐다.
그는 총리직을 같은 해 11월 말까지, 외무장관직은 이듬해까지 수행했다.
변 총리는 외국에 다녀올 때 여비를 남겨와 국고에 반납할 정도로 청렴하고 지조가 굳었다.
1956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서울대와 고려대 등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69년 77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YTN

 

 

1954 - 주은래, 네루의 평화 5원칙 발표

 

 

1952 - 국회 김성수 부통령 신변에 낭설, 공보처에서 부정성명  

부서진 대동강 철

교를 타고 남하하

는 피난민들 /브리

태니커

 

1950 - 북한 공산군 서울 점령

1950 - 한강 인도교 폭파

6·25전쟁 중인 1950년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서울에서 철수하던 중 군 작전상 이루어졌던 이 폭파로 한강 인도교 타이드 아치 3경간과 판형교 일부분이 파괴되었다. 또한 당시 한강 인도교에 있던 4,000여 명의 피난민 가운데 500~8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인도교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을 연결하는 한강 상 교량으로 총연장 1,005m로 한강에 가설된 최초의 인도교이다. 한강 인도교 가설 계획은 민간인 영업차가 들어온 1912년부터 수립되기 시작해 1916년 3월에 가교에 착수, 1917년 10월에 준공했다. 이어 교통량의 증가에 따라 1934년 8월에 새 한강 인도교 건설에 착수해 1936년 10월에 완공했다. 폭파 이후 책임 소재를 묻는 여론이 일어 폭파를 집행한 최창식 대령이 사형선고를 받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는 1962년 재심 결과 무죄가 확정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1957년 1월부터 복구공사에 착수해 1958년 5월에 준공, 한강대교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른다. /브리태니커

 

1950 - 한국 전쟁: 대한민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다. 서울북조선 군에게 점령당하다. /위키백과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이승만과 대한민국(남한) 정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한국 전쟁) /위키백과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뒤 6월 30일까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지 아니한 것에 대한 논란이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조선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렇듯 서울에서 3일간 머물렀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이 제기되었다.

가설

제한전쟁설

북조선의 전쟁계획이 남한 전역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가설이 있다. 즉 조선인민군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만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제한전쟁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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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제1군단은 대규모 도하작전을 수행할 도하장비조차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목표가 통일정부 수립이었던 만큼 이들은 서울 진주 후 국회소집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서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신속한 남하로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북한군은 결국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추격전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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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봉기설

하지만,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무른 사실에 대해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즉, 민중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일으키면, 이를 기반으로 남조선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봉기기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인 박헌영라디오 방송을 통해, 산업을 마비시키기 위한 파업을 선동한 것이 그 상황증거로 본다.

무엇보다도 북조선에 비해 남한에서 조선공산당남로당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점과 지주와 소작인간의 대립이 심했다는 점도 북조선 지도부가 공산주의 봉기가 민중들에 의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단점에도 불구, 토지개혁으로 계급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된 후였고, '남조선'의 공산주의 운동도 과격성으로 인해 사실상 몰락한 뒤여서 북조선 지도부가 기대한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 또는 마오쩌둥 개입설

러시아 국방부의 군사연구소 연구원 이고르 파포프는 입증 문서는 없다는 걸 전제하면서도 "스탈린은 미국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면 원자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고 우려해서 김일성의 부산 돌진을 저지시켰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또한 마오쩌둥이 "전쟁은 보급로와 퇴로를 준비해야 한다"며 급한 추격전을 하지 않도록 여러 번 경고했고 미군 개입과 이에 따른 중국군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춘천 전투

최근 구 소련의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조선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할 수밖에 없었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되었다(KBS1 역사스페셜 방영).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남침 작전 계획서는 1사단, 3사단, 4 사단, 6사단105땅크여단으로 서울을 공략하고, 2사단12사단춘천홍천을 6월 25일 당일에 점령한 뒤, 6월 28일에 수원을 점령하여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던 한국군을 포위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제로 6월 28일 당일 서부 전선에서 한국군의 가용 병력은 서울이 점령된 뒤에 남하하여 한강 방어선을 형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춘천 전투에서 북조선군은 한국군 6사단의 저항에 부딪혔다. 춘천지구의 한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는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동시에 전장병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 때문에 북한군 2만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군 6사단은 3일간 북한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북조선군은 애초 작전 계획보다 2일 뒤인 6월 27일 저녁 10시에야 겨우 춘천을 점령했고, 7월 1일에야 겨우 양평쪽의 한강을 건넌 뒤에 7월 5일에 이천,용인에 이르게 되어 서울에서 내려와 수원,오산을 점령한 북조선군과 합류하였다. 이 결과로, 한국군을 수원 이북에서 포위,섬멸하겠다는 북조선군의 작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국군은 급히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6월 28일 이후 도강한 개별적으로 후퇴한 패잔병들과 낙오병들을 긁어모아 편제를 유지하고 있던 일부 부대와 합치는 식으로 방어선을 펼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북조선군은 3일간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춘천 전투 이후에 북조선군은 전쟁을 수행했던 2사단과 12사단의 책임자들을 일제히 교체하였고 2사단장, 2군단장도 해임 조치하였다. (한국 전쟁)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위키백과

 

 

1950 - 주한 외국인 일본으로 피난(1950)
북한군이 기습남침으로 서울을 점령한 1950년 오늘!
한국에 살고 있던 외국인 피난민들을 태운 스웨덴 국적의 라인홀트호가 일본의 후쿠오카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사흘 전 발발한 6.25전쟁의 포화를 피해 가까스로 서울을 빠져나왔다.
미군들이 먼저 부상자와 임산부들을 들것에 실어 내렸다.
일본으로 피난온 주한 외국인들은 선창에서 간단한 수속을 밟은 뒤 미군이 준비한 임시숙소에 수용됐다. /YTN

 

 

1950 - 공산주의 운동가 이주하 처형

 

 

1950 - 독립운동가 이붕해 사망 - 일본왕 히로히토 암살을 시도 

1948 - 코민포름, 유고 공산당 제명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이 체코 공산당 기관지에 티토 중심의 유고공산당을 비난하며 유고공산당을 제명했다.

비난내용은 유고공산당과 지도자가 반소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계급투쟁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세력이 유고의 각 지방에서 발달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유고공산당은 이 비난결의를 거부했고 7월 21일 당대회에서도 거부를 재차 확인했다. 이후 코민포름과 유고공산당은 정면으로 대립, 동구권 여러나라는 유고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유고와 소련은 서로를 `적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

 

 

1939 - 군용자원보호법 공포

 

 

1937 - 영국 대관식 기념 증기기관차 첫 선(1937)

1937년 오늘!
이례적으로 영국 국왕의 대관식을 기념해 만든 증기기관차가 첫 선을 보였다.
16일 전인 같은 달 12일 대관식을 치른 조지 6세가 이 기차의 주인공이다.
이름도 '스코틀랜드 대관식'이었다.
빨강색과 흰색으로 매끄럽게 단장한 이 증기기관차는 런던과 글래스고(Glasgow) 사이 철로를 운행했다. /YTN

 

 

1930 - 브라질 정치가, 대통령 프랑코(Franco, Itamar) 출생  

프랑코 [Franco, Itamar (Augusto Cautiero), 1930.6.28~ ]

Itamar Augusto Cautiero Franco, usually known as Itamar Franco (born June 28, 1930) is a Brazilian politician who was President of Brazil from December 29, 1992 to January 1, 1995.

 

 

1921 - 흑하사변 발발,(소련, 무장해제에 불응하는 흑룡강 자유시의 한국독립단부대 습격)

1921 - 러시아 적군, 이만시에 집결한 한국독립군 공격(자유시사변)  

1919년 6월 28일, 독일 대표

단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강화조약에 서명을 하고 있

다. /조선

 

1919 - 연합국-독일 베르사유강화조약 조인
1919 - 베르사유 강화조약 조인 

제1차대전 발발의 원인이었던 사라예보 총격사건이 있은지 만 5년째가 되는 1919년 6월 28일 오후 3시12분, 베르사유궁에서 독일대표단이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영토의 일부를 넘겨야 했다. 이 결과 독일은 전쟁전에 비해 10% 이상이나 되는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지됐다. 육군은 10만 이하로, 해군은 보유함 10만톤 이하로 제한됐고 공군과 징병제는 금지됐다. 200억 마르크의 배상금도 결정됐다.

6월16일 조약내용이 알려지자 샤이드만 수상은 서명을 거부했고 내각은 21일 총사퇴했다. 학생들은 프랑스기를 불태우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2일 샤이드만 수상의 뒤를 이은 바우어 내각은 국민의회를 통해 조약수락을 결정했다. /조선

1919 - 베르사유조약 조인 (파리평회회의 1월 18일~6월 28일)

제1차세계대전을 종결시킨 강화조약. 1919년 6월 28일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궁전에서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서 조인되었다. 미국은 후에 이 조약에 대한 비준을 거부했다. 이 조약은 440조로 된 방대한 것으로, 베르사유체제라 하는 국제질서를 형성하여 제1차세계대전 후의 국제관계를 규정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조약에 의해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상실하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했으며 유럽에서 영토가 축소되었다. 또한 제1차세계대전 개전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 손해에 대한 배상 책임이 지워졌고 군비는 엄격히 제한되었다. 라인강 왼쪽 기슭은 비무장지대로 하되 15년간은 연합국의 보장점령하에 두기로 했다. 자르지방은 15년간 국제연맹 관리하에 두고, 그 후 주민투표에 의해 자르의 귀속을 결정하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오로지 연합국의 이해(利害)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되고 독일에 대한 압박도 심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이 조약을 <명령(Diktat)>이라고 일컫고 크게 분노했다. 이는 나치스에 의해 교묘히 받아들여져,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쳐 라인지대에서 연합국이 철수하고, 배상문제에서도 배상총액이 줄어드는 등, 사실상 베르사유조약은 조금씩 완화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갔다. 1935년 나치스정권이 베르사유조약의 군비제한 조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936년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를 무장화함으로써, 사실상 효력을 상실했다. /yahoo

1919 -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져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다. /위키백과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프랑스어: Traité de Versailles, 독일어: Friedensvertrag von Versailles)은 1919년 6월, 독일 제국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의 평화협정이다. 파리 강화 회의 중에 완료되었고 협정은 1919년 6월 28일 11시 11분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되어 1920년 1월 10일 공포되었다. 조약은 국제 연맹의 탄생과 독일 제재를 규정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독일 제재에 관한 안건은 파리 강화 회의중 다뤄지지 않았었다.

장소의 선택

프랑스에게 있어서 협약의 서명 장소를 선택한다는 것은 1870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패배한 것에 대한 수치심을 씻어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1871년 1월 18일 거울의 방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독일 제국 탄생을 발표했다.

조약 서명 당시의 상황

모든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평화 조약 체결에 초대했지만 패전국에는 지도자가 없었으며, 러시아는 1917년에 전장에서 떠난 상태였다. 몇몇 인사들은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데, 4개 승전국의 지도자들이 그들에 해당된다. 프랑스조르주 클레망소, 영국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바로 그들이다.

지도자들은 서약을 개별적으로 작성하였고, 각각의 주장은 다양하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자신이 새롭게 구상한 14개조 평화원칙을 국제 사회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윌슨은 새로운 외교 관계는 사람들 스스로 주권을 갖고 국가간의 협력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합국의 승리에 그의 군대가 큰 역할을 했을므로 그에게 대단한 명성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복수심이 커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을 정돈하기를 원했다. 강대국 사이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프랑스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역시 강대국 독일을 방치하길 원했다. 프랑스조르주 클레망소는 반대로 독일의 경제와 정치를 압박하고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독일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그들 사이의 타협은 그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했고, 조약은 항상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처리되었고 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엉망으로 처리되었다.", "강압적인 이 평화는 새로운 증오를 키울 것이다." 또는 "유럽의 경재 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논의되지 않았다." /위키백과

 

  

1918 - 소런, 대공업의 국유화 포고

 

 

1918 - 미국 육군에 화학전부대 창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

자 페르디난트를 저격한 범인 프린

스프(오른쪽에서 두번째). /조선

 

1914 - 오스트리아 황태자 피살 

1914년 6월 28일, 인류에 대재앙을 예고한 두 발의 총소리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울려퍼졌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이곳에서 열린 육군 대연습 열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 실려 갔지만 황태자비는 이미 절명했고 황태자 역시 15분 뒤 사망했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프린시프라는 20세 청년으로 세르비아 해방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의 멤버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으므로 세르비아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라는 요구였다.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할 경우 독일도 함께 싸운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우려한 대로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동족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러시아의 참전은 독일을 불렀고, 이는 러시아와 3국협상으로 묶여 있는 프랑스·영국의 자동개입으로 이어 졌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자 피살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유럽의 강대국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4년반 동안 6000만명의 젊은이가 전장에 동원돼 900만명이 전사하고 2000만명이 부상할 정도로 두발의 총성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피해는 실로 컸다. /조선

 

1914 -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를 암살했다. 페르디난트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민족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분파적인 민족주의 정책에 반대했다. 이를 위해 그는 암살 당시 군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던 중이었으며 1913년에는 군 감찰총장이 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요구 중 2가지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세르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7월 28일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브리태니커 

 

1914 -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게 된다 /위키백과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독일어: Franz Ferdinand Karl Ludwig Joseph von Österreich-Este, 1863년 12월 18일 - 1914년 6월 28일)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요제프 1세의 조카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위 계승자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슬라브 인들을 참여시켜 제국의 개편과 확장을 도모하였으나, 범슬라브주의에 반대하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암살과 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촉발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일차적으로 폭탄테러를 당했다. 혈기왕성한 태자는 그 폭탄을 주워 테러범에게 도로 던졌다. 그리고 밤이 되어 차를 타고 가던 중 태자는 아까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것이라 생각하고 병원으로 차를 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운전사가 길을 잃었고 저격범 프린치프가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위키백과

 

사라예보 사건은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14년 6월 28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가장 맑게 갠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남슬라브 운동).

세르비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외교사 최대 실수로 평가되는 "백지수표"를 빌헬름 2세가 약속한다.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른 것이긴 하였으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의 주도를 오스트리아가 따르는 구조였으나,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때부터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찌기 이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킨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건네준 백지수표를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답변 시한은 48시간이었다.

1. 모든 반오스트리아단체를 해산할것

2. 암살에 관련된 모든자를 처벌할것

3. 반오스트리아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것

4.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데 오스트리아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것

이 조항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최후 통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는 1,2,3 항까지는 굴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 최후 통첩을 거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러시아에 대한 최후통첩은 “총동원령을 해제하라. 안그러면, 전쟁상태로 간주한다. 12시간내 답변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만일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상태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18시간내 답변하라.”라고 발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답변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위키백과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4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되어(근본적 원인은 사라예보 사건) 8월 1일에 이르면 독일 제국의 대러시아 선전 포고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다. /위키백과

 

 

1908 - 터키의 청년터키당, 마베도니아 지방에서 봉기

 

 

1902 -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3국동맹 제4차 갱신하여 6개년 연장

 

 

1902 - 미 하원, 해협운하법 가결. 미 대통령에게 파나마와 니카라과 운하부설권을 부여

 

 

1887 - 펨버턴이 미특허정에 코카콜라 시럽과 원액에대한 특허 신청 /동아사이언스

 

 

1873 -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출생

 

 

1867 - 근대 희곡의 혁신자 피란델로 출생

1867 - 이탈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피란델로 출생

피란델로 [Pirandello, Luigi, 1867.6.28~1936.12.10]

시칠리아섬 출생이다. 로마에서 공부한 후 본에 유학하고 로마로 돌아와 《불만》(1889) 등 염세적인 작풍의 시인으로 출발하였다. 가정적으로도 불우하여,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정신이상이 된 아내를 거느리고 죽음(1918)에 이르기까지 고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창작활동은 왕성하여 1894년부터 1926년까지 《버림받은 여자》(1901) 등 7편의 장편소설과 24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한편 1910년경부터 극작에 흥미를 가져 《그렇지 않다면》(1915)으로 두각을 나타낸 후 《각자가 그 진실을》(1917) 《명예의 기쁨》(1918) 《전과 같이, 전보다 낫게》(1920)를 거쳐 《작자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1921) 《헨리 4세》(1922) 《나체에 입히다》(1923)를 절정으로, 연극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계속 내놓았다. 1925년 로마에 ‘예술극장’을 개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이탈리아 연극부흥에 노력하였으나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자작을 연출하는 외국 순회공연이 주가 되었다. 그 밖에 평론으로서는 크로체의 이론을 비판한 《예술과 과학》 등이 있다. 193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피란델로의 연극은 초기 자작소설의 각색에서부터 이미 그 인간관의 근본인 동일인격의 다면성() 그리고 유동성()을 무대에 자유자재로 표현하였으며 또한 자아의 통일성이 외부로부터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눈에 의해서 변화하는 다면성 속에 소멸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의 드라마투르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고전적 수법과는 대립되며 앙티 테아트르의 선구로서 초연 때의 관객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인간관계를 환상으로서 파악하고 자타()의 모순이 가져오는 비극성을 사회적·심리적으로 추구한 극작가로서 20세기 전반의 유럽연극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naver 

 

1836 -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매디슨 사망

 

조선 22대왕 정조. /조선

 

1800 - 조선조 22대왕 정조 승하 

1800 - 조선 22대 왕 정조 사망

조선후기의 최고 군주로 꼽히는 정조(正祖)가 1800년 6월 28일 서거했다. 48세였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조선문화의 황금기를 이끈 국가 지도자였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였다. 아버지는 장헌세자로 흔히 사도세자로 불린다.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였다. 1759년 세손에 책봉돼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올랐다. 인간적인 면에서 정조만큼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민들은 부유해지고 신해통공으로 시장은 번영했으며 신분질서는 이완되고 새 시대의 꿈을 품은, 자유롭고 발랄한 예술들이 자라났다. 이처럼 밝고 풍요로운 시대의 한 가운데 더없이 어둡고 고독한 군주, 정조가 있는 것이다. 11살때 아버지는 뒤주에 갖혀 살해되고 일평생 역겨운 어머니와 목숨을 노리는 할머니, 대화가 안되는 아내, 가증스런 정적들에게 포위되어 인생의 낙이라곤 오로지 책밖에 없었던 남자가 바로 그였다. 갖가지 사회문제가 빈발하는 근대로의 전환기에 정조는 사적인 원한을 참고 공평무사한 탕평정치를 통해 국민적 통합을 도모함으로써 오랜 당쟁을 종식시켰다.
이같은 정치적 안정위에 적서차별의 철폐, 공노비 해방을 통한 신분제도의 혁파, 과거제도의 개혁 등의 의욕적인 개혁정책으로 새 문화창달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조의 문화적 이상은 조선인의 정체성에 근거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와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한 확고한 문명국가로 요약된다
 

루소, Maurice-

Quentin de La

Tour가 그린 파스

텔화(1753) /브리

태니커

 

1712 - 프랑스 사상가 루소 출생

1712 - 프랑스 사상가 루소(Rousseau, Jean-Jacques) 출생
루소 [Rousseau, Jean-Jacques, 1712.6.28~1778.7.2]

루소는 이성의 시대를 끝맺고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사상을 전개한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음악가·음악평론가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독학으로 공부했고, 30세에 파리로 가서 드니 디드로를 만나 백과전서파에 합류했다. 디종 아카데미 현상 논문으로 쓴 <학예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1750)과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에서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와 문명 때문에 타락해 자유를 잃어버리고 사회적 불평등에 예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1762)에서는 자연상태의 독립을 희생한 대가로 참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방도를 개진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 한편 금지된 사랑의 승화를 그린 소설 <신 엘로이즈 La Nouvelle Helose>(1761)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이상적인 교육을 모색한 저서 <에밀 Emile>(1762)이 종교적 문제로 파란을 일으키면서부터 정통 교회의 박해와 무신론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후 은둔 생활을 하면서 <고백록 Les Confession>(1782) 등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서전적인 글들을 쓰며 고독하고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브리태니커

  

1577 - 화가 루벤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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