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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3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3




1956 - 나세르, 이집트 초대 대통령에 당선

1952년 7월, 34세의 청년장교 나세르가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무혈쿠데타를 감행, 영국의 비호를 받아온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렸다. 1차 중동전의 영웅 나기브를 1인자로 내세우고 무대 뒤에서 힘을 비축한 나세르는 예상대로 2년 뒤 나기브를 축출했다.

1956년 1월에 일당 정치체제에 사회주의 아랍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공포하고, 6월 23일에는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를 실시, 99.9%의 찬성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개월 뒤에는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 중동지역을 세계 질서의 주요 변수로 부각시켰다.

아스완댐 건설 비용 마련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서방국가로부터 운하 소유권을 되찾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국유화 조치가 야기한 2차 중동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 ‘서방세계에 도전한 첫 아랍인’이 돼 단숨에 아랍세계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나세르는 여세를 몰아 지리멸렬한 중동지역에 아랍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블록을 형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를 경찰국가로 만들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아랍통합을 꿈꾼 진정한 지도자였다. /조선

 

 

 

 

1945 - 오키나와 미·일 전투 종지부

[어제의 오늘]1945년 오키나와 미·일 전투 종지부

ㆍ‘자결 강요’ 가슴에 맺힌 恨은 남아

64년 전 오늘 감청색 바다와 흰 모래밭이 아름다운 동중국해의 류큐(琉球)제도에 석 달간 몰아쳤던 피바람이 마침내 멎었다. 제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1일부터 6월23일까지 83일간 치러진 류큐제도의 오키나와섬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간 전투는 양측의 인적·물적 피해도 막대했지만, 오키나와인 12만명이 무참하게 살해되거나 자결을 강요받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군은 일본 본토진격 작전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사이먼 버그너 중장의 지휘 아래 18만3000명의 대규모 병력이 투입됐고, 상륙지점인 가네다만 주변에는 미리 3만발의 포탄을 쏟아부어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滿) 중장을 사령관으로 한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4월1일 미군상륙 이후 나흘간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투는 4월5일부터 일본군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슈리(首里)성의 동굴진지로부터 미군을 향해 총탄이 불을 뿜으며 치열한 교전상태에 돌입했다. 미군은 무수한 동굴참호를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제압했고,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양측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처참한 백병전 끝에 미군은 5월29일 슈리성을 함락시켰고, 일본군 지휘부는 섬 남쪽으로 퇴각했다.
6월11일 오로쿠(小祿) 지구에서 일본 해군 지휘관 오오타 미노루(大田實)와 그의 군대 전원이 옥쇄했고, 6월15일에는 남은 병력 6000여명이 미군의 화력에 괴멸됐다. 마침내 6월23일 오후 4시30분 우시지마 중장과 쵸 이사무(長勇) 소장이 할복자살하면서 전투는 끝났다.
석 달간의 전투과정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자결을 명해 주민들은 일본군이 건넨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졸라 죽이는 참극이 발생했다. 또 일부 주민들은 일본군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살해당하면서 근대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비극이 연출됐다. 이 전투에서 숨진 오키나와 출신 병사 및 주민은 12만명으로 본토 출신 일본군 사망자(6만명)의 두 배에 이른다.
본래 류큐제도는 19세기 후반에 일본에 복속되기 전까지는 일본과 중국 간에 균형외교를 펼쳐온 자치국이었고, 편입 이후에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간직해왔다. 그런 이곳 주민들에게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본토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7년 9월 문부과학성이 오키나와 주민 집단자결 사건에 대한 교과서 기술을 삭제·수정하려 하자 오키나와 주민 11만명이 규탄대회를 열며 반발, 문부성의 역사왜곡 시도를 무산시켰다.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 시도는 이웃나라뿐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22 17:53:4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6221753435&code=100100&s_code=ap005

 

 

 

 

1945 - 미국의 발명가, 잠수함 제작자 사이먼 레이크(Lake, Simon) 사망  

레이크 [Lake, Simon, 1866.9.4~1945.6.23]

미국의 발명가.

공해상에서 널리 운항되었던 ' 아고노트호'(Argonaut)라는 잠수함을 건조했다.

1894년 그의 최초의 실험 잠수함인 ' 아르고 주니어호'가 건조되었는데, 길이가 약 4m이고 선체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수동식 바퀴로 바다 밑을 이동했다. 1897년 건조된 아르고호는 길이가 11m이고, 30마력의 가솔린 기관으로 동력을 얻었다. 기관과 승무원에게 필요한 공기는 물위에 떠 있는 호스(hose)를 통해 끌어들였으며, 나중에는 고정된 관(tube)을 사용했다. 이 잠수함 역시 바닥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바퀴가 있었다. 1898년 버지니아의 노퍽에서 뉴욕 시까지 약 500㎞를 항해했다.

그가 만든 약 18m 길이의 ' 프로텍터호'(1906)를 미해군에서 사려고 했을 때 미의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그래서 이것을 소련에 판매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취항시켰다. 그는 수년 동안 그곳에서 잠수함의 재조립과 승무원훈련을 감독했다. 소련의 요청으로 잠수함을 몇 척 더 건조했고, 미국에 판매한 55척을 포함해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100척 이상의 잠수함을 건조했다. 또한 잠망경 개발과 수중 기어의 발명에도 참여했다. /브리태니커

 

 

 

 

1940 - 히틀러 점령지 파리 방문

[어제의 오늘]1940년 히틀러 점령지 파리 방문

ㆍ프랑스 치욕의 날, 히틀러 최고의 날

더블트렌치코트형의 전형적인 독일군 군복을 입은 장성들이 저 멀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걷고 있다. 앞줄 오른쪽 두 번째에서 고개를 살짝 돌리고 시찰을 하듯 걸어가고 있는 인물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제2차 세계대전을 기록한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히틀러는 1940년 오늘 점령지 파리를 걷고 있었다. 독일군의 전격 작전에 10여일 만에 무너진 프랑스는 바로 전날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70여㎞ 떨어진 콩피에뉴 숲에서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는다. 말이 휴전이지 사실상 항복이다. 이곳은 1918년 독일과 프랑스 간에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는 독일이 패배했다. 히틀러는 22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프랑스에 복수를 했다.

히틀러는 휴전협정이 끝나자마자 파리를 방문했다. 독일군은 이미 6월14일 파리에 무혈입성했다. 새벽 5시30분 비행기로 파리에 도착한 히틀러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 샹젤리제, 개선문 그리고 에펠탑을 구경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물인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안내원에게 50마르크의 팁을 줬지만 안내원은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안내원은 히틀러의 사인을 받았다. 이어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무덤과 몽마르트에 있는 사르레 쾨르 성당을 방문하고는 3시간 만에 파리를 떠난다.
파리와 프랑스에는 치욕의 날이었지만 히틀러에게는 최고의 날이었다. 히틀러는 수행원에게 “파리를 보는 것은 내 일생의 꿈이었어. 지금 그것을 이루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라고 말했다. 또 그날 밤 측근들에게 “파리는 정말 아름답지 않나. 베를린을 더 아름답게 해야 하네. 사실 파리를 파괴해야 할까 남겨둬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지. 하지만 베를린이 완성되는 날, 파리는 그림자로 변할 거야. 그러니 파리를 파괴할 필요가 있겠나”라고 말했다. 승자의 아량이라 할까.
그러나 그 아량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며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패전을 예감한 히틀러는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인 디히트리 폰 콜티츠에게 “파리에서 후퇴할 때 도시의 모든 기념물과 주요 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콜티츠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같은 해 8월23일 히틀러가 콜티츠에게 직접 전화를 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이 과정은 1966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로 만들어졌다. 영화에는 장 폴 벨몽도, 커크 더글라스, 알랭 들롱 등 당대의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다.
김준기 기자 jkkim@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6222119385&code=100100

 

 

 

 

 

 

 

1940 - 미국의 단거리 육상선수 루돌프(Rudolph, Wilma) 출생

루돌프 [Rudolph, Wilma (Glodean), 1940.6.23~1994.11.12]

미국의 단거리 육상선수.

올림픽 육상종목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딴 미국 최초의 여자선수이다.

루돌프는 어린시절에 병을 얻어, 11세가 될 때까지 왼쪽 다리에 브레이스(보조기)를 대지 않고는 걷지 못했다. 그러나 남들과 당당히 겨루겠다는 결심으로 테네시 주에 있는 클라크스빌 고등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농구선수 겸 단거리 육상선수가 되었다. 루돌프는 1957∼61년까지 내슈빌에 있는 테네시주립대학교에 다녔다. 16세가 되던 해인 1956년에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 400m 릴레이 주자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땄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200m 달리기에서 22초 90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100m 달리기에서 11초 20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고, 200m 달리기와 400m 릴레이에서도 금메달을 따서 3관왕이 되었다. 이 릴레이 팀은 44초 40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는데, 1961년 루돌프가 마지막 주자로 뛰었던 또 다른 미국 팀이 44초 30으로 기록을 단축시켰다. 루돌프는 아마추어 경기연맹(AAu)이 주최한 100야드 단거리 선수권대회에서 1959∼62년까지 4년 연속우승을 차지했다. 1961년에 그해의 가장 뛰어난 아마추어 선수로 뽑혀 제임스 E. 설리번 상(賞)을 받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1960년대에 시카고의 데일리 시장 청소년재단에서 부총재로 일하면서 여자 육상 팀을 육성했으며, 그후에는 미국 전역에서 달리기를 장려했다. /브리태니커

 

 

 

 

 

1937 - 영국의 지질학자, 기후학자 섀클턴(Shackleton, Nicholas) 출생  

 

 

 

섀클턴 [Shackleton, Nicholas John, 1937.6.23~2006.1.24]

 


Nicholas 경의 존 샤클 턴 (John Shackleton) FRS (1937 6 23 ~ 2006 1 24 )는 영국 제 4 학년을 전문으로하는 지질학 자이자 기후 학자입니다. 그는 저명한 지질학 자 Robert Millner Shackleton FRS의 아들이었고 탐험가 Ernest Shackleton의 조카였습니다. ...


http://en.wikipedia.org/wiki/Nicholas_Shackleton

 

빙하기

존 그리빈, 메리 그리빈 저

김웅서 역

사이언스북스

지구의 숨겨진 역사를 밝히다

3장 「바다는 알고 있다」는 과거의 이론들을 토대로 한 증거를 찾아내기까지의 시간을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제임스 크롤에서 비롯된 해저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과학에서 한 이론이 정립되기까지의 시간은 처음 시작된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적절한 기술이 확보되는 시간―크롤의 경우 100년―을 뛰어 넘어야만 한다. 바다는 육지와는 달리 안정된 바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생명체의 잔해들과 기후의 변화에 따른 퇴적층의 변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저 퇴적물에 대한 연구는 빙하기의 증거를 수집하는 일과도 같다. 이것은 지구가 겪어 온 수천만 년의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질문이다. 3장에서는 이러한 연구를 수행해 온 존 임브리와 니콜라스 섀클턴을 통해 지질학적 연대를 밝혀내고, 다양한 화석에서 발견되는 생물 개체군의 변화를 살펴보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반복되는 주기를 통해 빙하기의 주기를 추론해 본다. 퇴적층과 해수의 온도 변화는 빙하기의 반복되는 천문학적 주기를 밝혀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http://www.yes24.com/24/goods/1947983

 






 

1924 - 스리랑카의 정치가, 대통령 프레마다사(Premadasa, Ranasinghe) 출생

프레마다사 [Premadasa, Ranasinghe, 1924.6.23~1993.5.1]

 

 

 

스리랑카의 정치가, 대통령.

 

 

콜롬보의 세인트조셉대학을 졸업하고 정계에 진출하여 1950년 콜롬보 시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968∼1970년 지방자치장관을 지내고, 1976년 통일국민당(UNP)의 부총재에 올랐으며, 1977년 지방자치장관 ·주택장관 ·건설장관을 역임하였다. 1977년 총선거에서 반다라나이케 정권이 무너지면서 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983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8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국방장관을 겸하였으며,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반군과 내전중이던 1993년 5월 1일 콜롬보에서 자살 폭탄테러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1912 - 최초로 컴퓨터를 개발한 영국의 수학자 튜링(Turing, Alan) 출생

튜링 [Turing, Alan (Mathison), 1912.6.23~1954.6.7] 

영국의 수학자·논리학자.

컴퓨터 이론을 개척했고 컴퓨터 과정의 논리적 분석에 크게 기여했다. 인도 공무원이었던 한 영국인의 아들인 튜링은 셔본학교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935년 킹스 칼리지에서 대학원 연구원으로 공부하는 동안 수리논리 연구를 맡았다. 이 기간에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인정받게 된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Entscheidungsproblem)에의 응용〉(1936)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고정되고 명백한 과정(그는 이 과정을 자동기계로 수행될 수 있는 과정이라 정의했음)으로 풀 수 없는 수학의 문제들이 있음을 증명했다. 또한 그는 실제 계산기와는 달리 고정된 최대 자료 저장량으로 제한받지 않고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이론적인 계산장치를 가정했다. 이 튜링 기계(뒤에 붙여진 이름)는 자동화이론의 기초토론에 참고조항으로 자주 쓰인다. 또 1940년대에 나온 디지털 컴퓨터 이론의 기초이기도 하다.

튜링의 설계설명서에 따르면 튜링 기계는 일련의 불연속 단계들을 통해 기능을 하며 지정된 때에 유한개의 내부 상태들 중 하나를 취한다. '패시브'(passive)라고 지정된 상태 이외의 어떤 상태에서도 기계는 정4각형으로 나뉜 무한한 테이프를 정밀 조사하는데 각 정4각형은 비어 있거나 유한 개의 기호 중 하나가 찍혀 있다. 기계는 조사된 정4각형의 조건을 바꾸거나(지우거나 인쇄하거나 또는 둘 다) 테이프를 움직여 조사된 정4각형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하나씩 옮겨가도록 하거나 지정된 순간과 그 다음순간 사이에 상태를 바꾼다. 이런 모든 행위는 기계의 내부상태와 지정된 때 조사된 정4각형의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기계의 출력은 기계가 '패시브' 부호를 만나 멈춘 뒤 테이프 위에 남은 기호들에 의해 해석된다.

튜링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수학 연구를 계속해 미국의 수학자 A. 처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끝냈다. 그뒤 영국으로 돌아와 킹스 칼리지에서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버킹엄셔 블레칠리에 있는 정부 암호학교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독일의 '난해한' 암호를 푸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45년 그레이터런던에 있는 국립물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자동계산기계(ACE)라는 거대한 전기 디지털 컴퓨터를 설계·건설·이용하도록 지도했다. 1948년 맨체스터대학교의 컴퓨팅 연구소의 소장 대리가 되어 그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억용량을 가진 컴퓨터인 맨체스터 자동 디지털 기계(MADAM)를 만들었다. 초기 컴퓨터 건설과 프로그램 기술에 쏟은 그의 노력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이론에 동조했고 룰렛 바퀴와 같은 무작위 요소를 도입할 수 있다면 기계의 생각도 사람의 생각과 훨씬 더 비슷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주제에 대한 튜링의 논문은 인공지능 연구의 기초로 널리 인정받는다.

1952년 생물기관의 형태 형성에 대한 이론 연구의 첫 눈문을 발표했다. 어떻게 균일하고 대칭적인 구조가 확산을 통해 일정한 형태를 지닌 전혀 비대칭적인 구조로 되어 발달하는가를 보이려는 것이 그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연구를 끝내지 못했다. 그는 자살한 것이 확실한데 동성연애를 치료하기 위해 감옥을 가는 대신에 겪어야 했던 강압적인 의료처방 때문인 듯하다. 그는 청산가리를 바른 사과를 준비하여 먹은것으로 여겨진다. A. 호지가 쓴 전기 〈앨런 튜링 : 수수께끼의 인물 Alan Turing : The Enigma〉이 1983년에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909 - 중국의 정치가, 주석 리셴녠[念] 출생

리셴녠 [(이선념), 1909.6.23~1992.6.21]

 

 

중국의 정치가.

후베이성[] 훙안현[]의 빈농 집안에서 출생. 1926년 홍군()의 일원으로 반군벌()투쟁에 참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년 후 국공합작()이 와해되면서 홍군의 청년지휘관으로 부상(), 루이진[]의 소비에트구()에 들어가 장정()에 참가한 후 옌안[]의 항일 군정대학()에서 공부하고 홍군 제4방면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 말에는 허난성[] 등 중위안[] 지구에 들어가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여 항일전의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1941년 신4군 제5사단장 겸 정치위원, 1945년 당 제7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46년 중국공산군의 중위안[] 철수와 더불어 중위안해방구로부터 북방으로 이동하였는데, 1947년 인민해방군의 반공() 개시와 함께 류보청[]과 다시 중위안지구로 들어가 중위안해방구를 확대하였다.

국공내전() 중에는 중위안군구 사령원(),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후 1949년 중난[] 군사위원회 부주석, 후베이성 인민정부 주석, 중국공산당 후베이성 위원회 서기, 후베이군구() 사령관, 1952년 우한시장[], 정무원()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 재정부()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부총리 겸 재정부장이 되었고 1956년 당 정치국원에 선출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자본주의적 경향’으로 일시 비판받기도 하였으나 저우언라이[]의 적극적인 비호로 당 및 정부에서의 자리가 보전되었고, 또 마오쩌둥[] 사망 후 10월정변에 4인방()이 숙청되는 와중에서도 무사하였는데, 이는 군부에 지지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정치국원에 재선되고, 197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1982년 재선되었다. 1983년 6월 국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1985년 9월 재선되었다. 그 후 1987년에는 모든 당직에서 물러났고 1988년 4월 주석직을 떠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네이버

 

 

 

- Pierre de Coubertin

 

- Demetrios Bikelas

 

1894 - 올림픽 부활 결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설립

근대올림픽 부활운동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은 프랑스의 피에르드 쿠베르탱 남작(1863-1937)의 강렬한 집념과 남다른 노력에 의해서였다. 당초 그의 의도는 '보불전쟁'의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주고 아울러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하여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평화를 이룩하려는데 있었다. 이와같은 뜻을 실현하기 위해 쿠베르탱 남작은 1892년 12월 유럽 각국을 순회하면서 올림픽의 부활을 제창하고 올림픽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평화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설득하였다.
쿠베르탱 남작의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1894년 6월 23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열린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의 올림픽 부활제의는 유럽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고, 근대올림픽의 제1회 대회를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naver

 

국제 올림픽 위원회(프랑스어: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영어: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는 스위스로잔에 본부를 둔 국제 기구로 1894년6월 23일피에르 드 쿠베르탱드미트리우스 비켈라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205개의 국가 올림픽 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4년마다 하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고 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개최한 첫 번째 하계 올림픽은 1896년아테네그리스에서 열렸으며, 동계 올림픽은 1924년프랑스샤모니에서 열렸다. 1992년까지는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이 같은 해에 열렸으나, 다음 해부터는 대회 준비의 편의를 위해 2년마다 번갈아가면서 열리고 있다.

위원장 /위키백과

 

 

 

 

 

1894 - 영국 왕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출생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1894.6.23~1972.5.28]

Prince Edward, Duke of Windsor(1936~)라고도 함. 정식 이름은 Edward Albert Christian George Andrew Patrick David.

영국의 왕, 영연방의 수반, 인도의 황제(1936. 1. 20~12. 10 재위).

미국인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했다. 영국 왕 가운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인물이다.

요크 공작 조지(후에 조지 5세)와 메리 왕자비(후에 메리 왕비)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나 조지가 1910년 5월 6일 즉위한 뒤 웨일스 공(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907~11년 영국 해군에서 훈련받았으나 1914년 8월 6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고 참모장교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대 초에는 대영제국의 친선 도모를 위해 두루 여행을 다녔다. 1928년 아버지 조지 5세가 병에 걸린 뒤부터 점차 국사(國事)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 실업률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영국 전역의 임금노동자 클럽을 방문했고 20만 명이 넘는 남자와 여자를 대상으로 실업자 구제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인기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웨일스 공이었을 때 누렸던 인기에 견줄 만큼 높았다.

1930년 조지 5세는 그에게 서닝데일 근처에 있는 왕실 소유의 18세기 저택인 벨비디어 요새를 주었다. 그가 늘 '요새'라고 불렀던 이곳에서 사생활을 누리면서 전적으로 자신의 집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정원과 산림지에서 열심히 일했고 1930년대에는 원예학, 특히 장미 재배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곧 이 요새를 자신이 싫어하게 된 공직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로 생각했다. 또한 이곳에서 개인적인 사교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에는 통상적 의미의 귀족이라기보다는 그당시 '상류사회' 사람들이 참석했다.

1930년부터 심프슨 부인(→ 윈저 공작부인)과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심프슨 부인은 1927년 미국 해군 대위와 이혼하고 1928년 어니스트 심프슨과 재혼한 상태였다. 심프슨 부부는 개인 사교모임의 일원으로 에드워드와 자주 만났고, 1934년에 에드워드는 심프슨 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가 아버지와 이 문제를 의논해보기도 전인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죽자 그는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서 에드워드 8세는 왕가의 영지에 과감한 경제조치를 취했다. 그해 11월에 의회를 열었고 그뒤 사우스웨일스의 낙후된 지역을 시찰했다. 이 사이 그는 왕가가 심프슨 부인(그녀는 1936년 10월 27일 예비 이혼판결을 받았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가 수장으로 있는 영국국교회와 영국 및 영연방의 확고한 반대에 부딪혔다(그의 유일한 지지자는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윈스턴 처칠이었음). 미국과 유럽 대륙의 신문 잡지들은 심프슨 부인과의 연애사건을 앞다투어 보도했지만 영국 내의 언론은 영국 정부의 설득과 압력 때문에 그가 왕위에서 물러나기 직전까지 조용한 편이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에드워드 8세에게 이혼녀와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에드워드는 귀천상혼(貴賤相婚) 형식의 결혼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12월 2일 볼드윈은 왕에게 이 일이 실행 불가능함을 분명히 했다. 다소 성급하고 강압적으로 언론과 의회에서 모든 문제가 폭로되었던 운명의 날인 12월 3일이 다가왔다. 이튿날 신문에 처음으로 '퇴위'라는 말이 나왔다. 왕은 최종결정을 내렸고 1936년 12월 10일 퇴위 의사를 밝혔다("나 에드워드는 나 자신과 내 후손의 왕위를 포기한다는 취소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음을 선언한다"). 의회는 12월 11일 퇴위 선언 문서를 확인했고 그날 저녁 에드워드는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 그날밤 그는 유럽 대륙으로 떠나 오스트리아에서 친구들과 함께 몇 개월을 살았고 심프슨 부인이 최종 이혼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녀와는 조심스럽게 떨어져 있었다. 1937년 6월 3일 에드워드는 프랑스 샤토드캉데에서 영국국교회 신부의 주례로 심프슨 부인과 결혼했다. 새 왕이 된 조지 6세는 형인 에드워드에게 1936년 12월 12일 윈저 공작작위를 내렸으나 1937년 내각의 충고를 받아들여 새 윈저 공작부인이 남편이 누리는 '전하'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거부했다. 이 결정으로 에드워드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뒤 2년 동안 윈저 공작 부부는 주로 프랑스에 살면서 독일(1937. 10)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를 방문했다. 독일에서 윈저 공작은 나치 관료들의 환대를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와 면담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공작과 왕가의 불화는 해결되지 못했고 런던을 방문한 뒤 그는 프랑스 담당 연락장교직을 수락했다. 프랑스가 함락되자 마드리드로 갔는데 나치 독일은 에드워드를 왕위에 복위시키고, 그를 이용해 기존 영국 정부에 대항한다는 가상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가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윈스턴 처칠 총리는 그에게 서인도제도에 있는 영국 식민지인 바하마의 총독직을 제공했고 그는 1940~45년 전쟁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1945년 이후에는 파리에서 살았다. 동생 조지 6세의 장례식(1952)과 어머니 메리 왕비의 장례식(1953)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동안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그와 그의 부인이 왕가 일원들과 함께 공식 의식에 참가하도록 처음으로 초대받은 것은 1967년 말버러 하우스에 있는 메리 왕비의 현판 제막식 때였다. 윈저 공작은 부인과 함께 윈저 성 부지 내 프로그모어에 나란히 묻혔다. /브리태니커

 

 

 

- '레이코의 초상'
 

1891 - 일본의 서양화가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출생

기시다 류세이 [岸田劉生, 1891.6.23~1929.12.20]

근대 일본의 서양화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선각자이자 신문기자였던 기시다 긴코[岸田吟香]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1908년 하쿠바카이 서양화연구소[白馬會西羊畵硏究所]에 들어가서 외광파(外光派)의 지도자인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에게 사사했다. 1910년 제4회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풍경화 2점이 입선되었으며, 이무렵 문예잡지 〈시라카바 白樺〉를 통해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고 선명한 색채와 대담한 필치로 혁신적 화풍을 이루게 되었다. 1912년에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등과 함께 일본에서 반(反)자연주의 회화운동의 선봉이 된 퓨제인카이(목탄회)를 창립했다. 그뒤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영향을 받아 세밀한 사실화로 화풍을 전환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 화단에서는 시대착오라고 비판했다. 1915년 소도샤[草土社]를 창립했으며, 뒤러 풍의 신비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초상화·정물화·풍경화를 발표했다.

1918년부터 딸 레이코[麗子]를 모델로 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으며 1922년 서양화 단체인 슌요카이[春陽會] 창립에 참가했다. 이 무렵부터 가부키[歌舞伎], 노[能], 나가우타[長唄]를 가까이 접하게 되면서 일본화도 그리게 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교토로 이주한 뒤에 초기 육필 우키요에[浮世繪:에도 시대의 풍속화]나 중국 송원화(宋元畵)의 영향을 받아 동양적 표현을 가미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1929년 만주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야마구치 현 도쿠야마에서 객사했다.

저서에 〈류세이 화집 및 예술관 劉生畵集及藝術觀〉(1920)·〈초기 육필 우키요에 初期肉筆浮世繪〉(1926) 등이 있으며 주요작품으로 〈다섯 살 난 레이코의 상 麗子五歲之像〉(1918,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소장)·〈레이코의 미소 麗子微笑〉(1921,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오마쓰상 於松像〉(1921) 등이 있다. BIE /브리태니커

 

 

 

 

- 'Hugo Alfven', Composer            - 'Folke Filbyster Statue' 

 

    

- 'Fountain of Poseidon'  

 

1875 - 스웨덴의 조각가 카를 밀레스(Milles, Carl) 출생

 

밀레스 [Milles, Carl, 1875.6.23~1955.9.19] 

스웨덴의 조각가.

유럽의 고대 조각에서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적이고 율동적인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20세기 전반 독일 표현주의 조각과 미국 조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파리 학창시절중인 1902년에 웁살라의 스텐 스투레 기념상(1925 완성) 경연대회에 나가 표창을 받기도 한 그의 표현기법은, 처음에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영향으로 인상주의에 가까웠으나 독일의 조각가이자 이론가인 아돌프 폰 힐데브란트가 평하듯이, 점차 중세 미술과 초기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좀더 딱딱하고 엄격해졌다. 그의 후기 작품은 면밀한 구도로 짜여져 있지만 그 형상은 좀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밀레스는 점토(청동상을 뜨기 위한 원형)·돌·나무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중요한 첫 작품은 스웨덴의 할름스타드에 세워진 분수대 〈에우로파 Europa〉(1926)로서, 거대한 설계와 묘한 분수 효과 및 창의적인 형상들(예를 들어 노르딕 지방의 마귀나 거인을 고전문학에 나오는 트리톤이나 파우니와 혼합한 형상)이 특징적이다. 스톡홀름의 〈오르페우스 분수대 Orpheus Fountain〉(1936)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물의 만남 The Meeting of the Waters〉(1940)도 같은 특징을 지닌 그의 작품들이다. 1931년 미시간 주 블룸필드힐스의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의 조소과 학과장이 되었으며, 1945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20년 동안 그의 집이 있었던 크랜브룩과, 스톡홀름 근처 리딩외에 있는 그의 별장(지금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55년 그가 죽고 난 직후에 그의 작품 〈아가니페 분수대 Aganippe Fountain〉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1860 - 영국의 생물학자, 인류학자 스펜서(Spencer, Baldwin) 출생

스펜서 [Spencer, (Walter) Baldwin, 1860.6.23~1929.7.14]

영국의 생물학자·인류학자.

스펜서는 잠시 예술을 전공했으나 옥스퍼드대학교의 오웬스 칼리지에 진학했으며, 1881년 엑서터 칼리지에 입학해 1884년 자연과학 분야의 수석 졸업생으로 학위를 받았다. 1887년에 멜버른대학교의 생물학교수가 되었다. 스펜서는 1894년 혼 과학탐험대에 참여해 중앙 오스트레일리아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독립적으로 토착민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던 프랜시스 제임스 길런을 만나게 되면서 인류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6년 스펜서와 길런은 공동연구를 시작하여 그결과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부족 The Native Tribes of Central Australia〉(1899)을 발간했다. 원주민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그들의 신뢰를 확보함으로써 이들은 원주민의 관습·의식·신념 등에 관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축적하게 되었다. 1904년 이들은 카펀테리아 만을 여행하면서 식물채집과 수렵생활을 하는 반(半)유목민들의 일상적인 경제·사회 활동과 의식에 관한 생생한 자료를 수집해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부 부족 The Northern Tribes of Central Australia〉을 출간했다. 스펜서는 토착민의 사회조직이 인류발달의 초기단계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1901년 스펜서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으며 1916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그의 초기 견해를 반복하고 확증한 〈아룬타 : 석기시대 인간에 관한 연구 The Arunta : A Study of the Stone Age People〉(1927), 자신의 경험을 알기 쉽게 풀어 쓴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야를 헤치며 Wandering in the Wilds of Australia〉(1928) 등을 출간했다. 그는 우수아이아 최후의 인디언을 연구하기 위해 티에라델푸에고에서 탐험하던 중 죽었다. /브리태니커

 

 

 

- 'Coronation of the Napoleon I' by Jacque-Luis David

 

 

- 'Empress Josephine' by Pierre-Paul Prud'hon

 

1763 - 나폴레옹 1세의 황후 조제핀(Joséphine de Beauharnais) 출생  

조제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6.23~1814.5.29]

나폴레옹 1세의 첫번째 황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출생. 16세 때에 프랑스로 가서 보아르네 자작과 결혼, 두 아이를 낳았다. 1794년 남편이 처형되자, 그녀도 투옥당했다가 같은 해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 때 석방되었다. 총재정부기에는 미모와 매력으로 사교계의 꽃이 되었고, 1796년 나폴레옹과 재혼하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중에 부정을 하여 한때 위기에 처했던 일도 있었으나,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제위 후계자를 낳지 못하여 1809년 이혼하였다. /야후 백과

 

 

 


1703 - 프랑스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Marie Leszczyńska) 출생

 

 

 

 

마리 [Marie(-Catherine) Leszczyńska, 1703.6.23~1768.6.24] 

[역사 속의 인물] 외면 당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1703년 오늘 태어난 폴란드 공주 마리 레슈친스카는 21살 때 5살 어린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결혼하였다. 프랑스 궁정의 실권자 부르봉 공은 그녀가 자손들을 많이 낳을 수 있는 나이라는 점을 들어 다른 많은 후보들을 제치고 왕의 배필로 낙점했다. 가난한 폴란드 왕실 출신이라는 쑥덕거림을 들어야 했지만 처음 9년간 매년 9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부부는 좋은 금슬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루이 15세는 헌신적이고 얌전한 왕비에 싫증을 느끼면서 퐁파두르 등 여러 정부들을 두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출산에 부담을 느낀 마리 왕비가 왕의 침실 출입을 거절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그들의 사적인 관계는 끝이 났고 공적인 자리의 대화 외에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부부는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처량한 신세가 됐지만 마리 왕비는 자녀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별 불평없이 지냈다. 퐁파두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모짜르트 등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준 부르봉 공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해준 것을 빼곤 정치적으로 관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65세에 숨졌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6월 2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2712&yy=2011

 

 

 


1668 - 이탈리아의 철학자, 법철학자 비코(Vico, Giambattista) 출생

비코 [Vico, Giambattista, 1668.6.23~1744.1.23]

비코는 이탈리아의 문화사 철학자이며 법철학자이다. 가난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주로 독학으로 학문을 쌓았다. 데카르트연역적 방법이 유행했던 당시 생활감각과 역사감각의 근대적 문제를 제기했다. 주저인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1725)에서 인간사회는 성장과 쇠퇴의 단계들을 거치며, 인간의 역사는 인식의 감각과 표상력, 이성의 3단계에 호응하는 3개의 주기, 즉 신의 시대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의 끊임없는 순환을 통해 발전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 발전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임을 피력했다. 훗날 클레멘스 12세로서 교황에 오르는 로렌초 코르시니 추기경은, 인간 사회가 일찍이 '짐승 같은' 단계를 거쳤으며 사람들이 희미한 이성형태만을 소유하는 이 원시적 미개상태로 사회가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비코의 대담한 주장에 놀라 약속했던 후원을 철회하기도 했다. 오늘날 비코는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선구자로 유럽 지성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새로운 과학>은 유럽 지성사의 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브리태니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감이 상실될 때 인간성도 상실된다."

 

- 잠바티스타 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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