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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22

오늘의 사건  06. 22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2009 -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담배산업 규제법에 서명

'금연 실패' 오바마 담배규제법 서명

니코틴 함유량 제한·학교주변 광고 금지등 규정

금연을 약속하고도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2일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담배규제법에 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법안에 서명하기 전 연설에서 “흡연자의 90%가 18살 이전에 흡연을 시작하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기에, 담배를 오래 피우면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어 담배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미국에서 매년 40만명 이상이 담배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800만명이 담배 때문에 한가지

이상의 질병을 앓고 있어 이로 인한 비용이 한해에 1억달러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새 담배규제법은 담배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며, 청소년 흡연을 줄여 흡연 인구를

줄여나가겠다는 목적이다. 현재 미국인의 흡연률은 20% 수준이다.

수십년 동안 궐련을 피워온 오바마 대통령이 담배 규제법에 서명한 것은 아이러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때 하루 7~8개피를 핀 적이 있고 선거운동 기간에도 가끔 한모금씩 피웠다고 실토한 적이 있지만, 개혁의 일환으로 담배규제에 나섰다.

반면 기본적으로 비흡연자였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강력한 담배산업의 로비 때문에 법안에 반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청소년들이 담배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며, 담배회사들의 공세적 마케팅의 표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되는 ‘가족흡연 예방 및 담배규제법’은 사상 처음으로 식품의약국(FDA)이 담배의 광고와

판매, 제조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두는 권한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식품의약국은 담배 제품의 성분을 평가해 니코틴 함유량을 제한할 수 있고, 청소년들을 유혹하기 위해 화학적 향기를 가미하는 것 등도 규제하게 된다.

학교 주변 1000피트 이내에서 담배광고가 금지되며, ‘라이트’, ‘마일드’, ‘저타르’ 등 담배 유해성을 감추는 문구를 쓸 수

없게 된다. 또, 흡연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대형 경고문구와 그래픽 경고라벨을 담뱃갑에 표시하도록 했다.

서명식을 마치고 돌아선 오바마 대통령은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웠냐”는 기자의 질문에 뒤돌아보긴 했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최근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니코틴 유혹에 대한 투쟁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담배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음을 시사했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 한겨레 2009-06-23 오후 08:34:1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62022.html

 

오바마 “금연 너무 힘들어…아예 피우지 마라”

담배규제법 서명앞서 금연고충 털어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2일 백악관에서 담배산업 규제법에 서명하기에 앞서 담배를 끊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며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고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담아 충고했다.

담배를 끊었다 피우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바마 대통령은 "매일 1천명의 18세 미만 청소년들이

새로 정기적인 흡연자가 되고 전체 흡연자의 약 90%가 18세 생일을 전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면서

 "나도 그런 10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래서 담배를 오래 피우면 습관을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면서 청소년들에게 담배의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청소년들이 담배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라며 담배회사들의 공세적인

광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아이들이 아무 이유없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그들은 담배회사들의 공세적인 마케팅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미국에서 40만명 이상이 매년 담배관련 질병으로 죽는다. 흡연은 예방이 가능한 사망원인 가운데 1위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80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담배로 최소 한가지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고 이러한 건강문제는 한 해에 1천억달러가 비용 부담을 낳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오바마 대통령은 "오늘 서명하는 담배산업 규제법안은 수십 년간 진행돼온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담배 유해성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몇십 년간 기울여온 의료보험 및 소비자 운동가들의 노력, 담배회사의 막강한 로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하 양원에서 여야가 초당적인 지지를 표명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완전히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담배규제법안은 미식품의약국(FDA)에 담배 광고와 판매에 대해 규제권한을 대폭 부여해 FDA가 담배 제품의 성분을 평가, 니코틴 함유량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특히 청소년층의 흡연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담배 연기의 화학적 성분을 규제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담배의 마케팅, 광고활동도 제한, 담배 유해성이 낮다고 오인할 수 있는 `라이트', '마일드', '저타르'와 같은 문구를 쓸 수 없도록 하고 2012년부터는 흡연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대형 경고문구와 그래픽 경고라벨을 담뱃갑에 표시하고

10대 청소년들이 읽는 출판물의 담배 광고를 제한하고 천연색 광고도 모두 흑백으로 바꾸도록 했다.

김재홍 특파원 jaehong@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한겨레 2009-06-23 오전 06:52:2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1853.html

 

2005 - 부산 해운대 반송동 성서침례교회에서 고 김선일씨 1주기 추모예배

2005 - 전남 진도군 남도석성에서 옛 조선소 발견

 

2005 - 세계정교회 수장인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 방한

2004 - 900년 전 목판인쇄한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敎藏)` 첫 공개

KBS1 ‘TV쇼 진품명품’이 27일 소개할 고려청자 장구. 프로그램 사상

최고인 1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사진제공 KBS] 

 

2004 - 감정가 12억짜리 청자장구 나와

감정가 12억원에 달하는 고려청자 장구가 나왔다.
KBS1 ‘TV쇼 진품명품’(일 오전 11시)은 “이달 초 녹화에서 8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역상감청자장구()’가 1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고 22일 밝혔다.
이 감정가는 프로그램 사상 최고가이며 감정 장면은 27일 오전 11시에 방영된다.
경기도에 사는 한 사업가가 소장한 이 장구는 길이 60cm, 두께 7mm에 양쪽 끝이 뚫려 있으며 꽃그림과 작은 풀잎 문양의 바깥쪽을 파내 해당 문양이 튀어나오게 한 역상감 기법으로 제작돼 있다.
감정단은 “국내에 소개된 도자기 장구 중 역상감 기법으로 제작된 것은 이 장구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감정단은 이 청자 장구를 경기대 고미술감정학과에 의뢰해 동채 현미경 및 내시경 검사를 실시한 결과 1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와 비슷한 두께의 청자를 제작해 가죽을 씌워 연주해봄으로써 이 장구가 실제 연주에 사용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백항규() 책임 프로듀서는 “청자 장구의 소리가 나무 장구보다 청아하고 높았으며 고문서에도 도자기 장구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나와 감정위원들이 연주용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의 최고 감정가 기록은 올해 3월 방송된 3등 선무공신 권협(1553∼1618)의 영정으로 9억원이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동아닷컴 2004-06-22 23:33 

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j&n=200406220464 

2004년 6월 24일 부산의료원내 고 김선일씨 빈소에서

부친인 김종규씨가 아들의 영정앞에서 울부짖고 있다. 

 

2004 - 김선일 씨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살

2004 - 가나무역 김선일씨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살

2004년 6월 22일 김선일씨가 “제발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알자지라 방송에 나온뒤 이틀도 지나지 않아

바그다드에서 팔루자 방향 35km 떨어진 지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알자지라방송이 김씨 피랍 테이프를 처음 방송한 시각은 한국 시간으로 21일 오전5시였다.

이 테이프에서 이라크 저항단체는 “24시간내에 한국군이 철군하지 않으면 인질을 참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김선일씨는 17일(현지 시각) 바그다드에서 200여km 떨어진 미군 리브지 캠프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이 같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시간이나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우리 정부는 21일 오전8시 정부 국가안보회의를 개최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은 평화와 재건을 위한 것”이라고 입장을

정리하고, 즉각 각종 루트를 총동원해 김씨 무사 석방을 위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22일 밤10시 20분(현지시각 오후5시 20분),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바그다드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미군 당국의 연락이 왔고, 이내 김씨 시신임을 확인됐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우리 측과 진행한 석방 교섭에서 우리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파병 철회와 관련한 요구를 전달했다가 이것이 수용되지 않자 김씨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2004 -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무장단체에 의하여 피살되다.

김선일(金鮮一, 1970년 9월 13일 ~ 2004년 6월 22일)은 대한민국기독교 선교사로,

이라크 미군과 거래하는 업체인 주식회사 가나무역 소속으로 이라크 현지에서 근무하는 통역사였다.

그는 아랍어를 전공하여 2003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중동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였고

가나무역에 취직하여 2003년 6월 15일에 이라크로 갔다. 가나무역이 기독교 선교를 지원했다는 설이 있다.

2004년 5월 30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팔루자 부근에서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이슬람교 계열 무장단체인 자마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아랍어로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뜻)의 인질로 납치되었다. 이 단체는 자이툰 부대 파병국인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라크로의 추가 파병 중단 및 현재 주둔하는 한국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협박하였고,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6월 22일에 그를 참살하였고 후에 버려진 시신을 발견,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김선일의 아버지와 누나 등 유가족 측근 4명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김선일의 피살 과정에서 국가의 과실 또는 불법 행위는 없었다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천재소년시인 매튜 스테파넥군이 2001년 11월 첫 시집을 출간한 뒤

메릴랜드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밝게 웃고 있다.

2004 - 미국 13세 천재소년시인 스테파넥 요절

세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미국의 천재 소년 시인 매튜 J T 스테파넥(13)군이 선천성 근육병과 싸우다 2004년 6월 22일

끝내 숨져 미국을 슬픔에 빠뜨렸다.

매튜군은 태어날 때부터 ‘자율신경 기능장애 근육병증’을 앓아왔으며 이 병은 모든 신체기능이 서서히 마비되는 희귀성 유전병으로 알려져 있다. 매튜군은 어린 시절부터 휠체어와 인공호흡기 등에 의존해야 했고, 1주일에 한 번 신장 투석을 받아야 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지난 2001년부터 ‘하트송(Heartsong)’이라는 제목 아래 다섯 권의 시집 시리즈를 출간해 일약 베스트셀러

시인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감수성 물씬한 시들은 똑같은 병을 앓았던 세 형의 투병과 죽음을 지켜보며 나온 것이었다.

그는 투병생활 중에도 ‘오프라 윈프리 쇼’나 ‘래리킹 라이브’ 등 유명 TV쇼에 출연해 천사 같은 미소와 발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티’란 애칭으로 불리던 이 인기 시인은 희귀근육병협회의 명예홍보대사로

활동해 투병 환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후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조선

 

2004 - "레닌 사망원인은 매독"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은 성병인매독에 감염돼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22일 ‘유럽신경학저널’(The European of Neurology) 6월호의 기사를 인용, “3명의 이스라엘 의사들이 참고문헌들을 뒤져 레닌이 1917년 10월혁명 전 유럽에 살면서 매독에 감염됐다는 논거를 도출해 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같은 주장이 과거 소문으로 떠돌던 내용으로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당시 유럽과 소련에서 레닌을 치료했던 의사들의 소견들을 모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논문 저자 중 한 명으로 이스라엘 브엘쉐바 정신건강센터의 정신의학장인 블라디미르 러너 박사는 “레닌을 진찰하고

파일에서 이름을 지운 뒤 감염질환 전문인 신경학자에게 소견을 묻는다면 전문가는

그 자리에서 ‘매독’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말했다.

53세에 숨진 레닌은 광기에 시달리며 신체가 점점 쇠약해지는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전문가들은 레닌의

사인으로 매독과 함께 뇌출혈, 뇌동맥경화증, 뇌졸중, 극심한 피로 등 다양한 원인들을 지목했으며,

뚜렷한 사인을 규명하지못했다.

사실 매독은 다른 병들과 증세가 비슷하기 때문에 진단하기 어렵다.

매독에 감염되면 처음에는 뇌를 포함해 전신에 궤양이 생기며, 열과 발진, 무기력증에 시달린다. 심할 경우에는 두통,

신경장애, 위통, 근육통을 앓기도 한다. 그러나 몇년간 병세와 건강한 상태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며

꽤 오랫동안 별 증상없이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감염 후 20년 이상 지나 말기에 이르면, 환자는 우울증, 무기력증, 치매와 함께 기분이 수시로 바뀌고

폭발적인 창조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레닌은 수개월간 이같은 매독 증세와 유사한 욕지기, 불면증, 부분적 마비, 심한 두통, 주기적 발작에 시달렸고,

스탈린이 공산당 지배의 음모를 획책할 때 명석함과 무능함의 양 극단을 오갔다. 때때로 그는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수두:천재, 광기, 매독의 신비’의 저자인 데보러 하이든은 “레닌의 임종을 지켜본 의사들이 매독을 사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고 많은 레닌의 전기작가들이 발표했지만, 이번 논문은 관련 정보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았다”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며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소비에트 시대 공중보건과 성 문제를 전공한 드류 대학의 프란세스 번스타인 부교수는 “소비에트 보건부는 혁명 후

매독 치료 캠페인을 전개했다”면서 “레닌이 매독 때문에 숨졌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라며 논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서울=연합뉴스 - 조선닷컴 2004.06.22 17:28 40'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6/200406220295.html

 

2003 - 이승엽 국내 최초로 300 ㆍ301호 연타석 홈런

2003 - 이승엽, 300호 홈런 신기록(2003)
2003년 오늘, 프로야구 삼성의 이승엽 선수가 세계 최연소 300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승엽 선수는 이 날 저녁 대구에선 벌어진 SK와의 경기에서 8회 솔로 홈런을 터뜨려 개인통산 300홈런을 기록했다.
이승엽 선수의 300 홈런은 26세 10개월만에 세워진 것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로드리게스보다는 10개월,

일본 프로야구 왕정치보다는 5개월여 앞선 기록이다.
이승엽 선수는 또 4대 4로 비긴 9회말 만루찬스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만루홈런을 추가해 자신의 300홈런을 자축했다.

2002년 6월 2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스페인 8강전에

승리한 한국 선수들이 우승 세레모니를 선보이고 있다.

2002 - 한국, 월드컵축구 4강 진출 

2002년 오늘!  한국 축구가 스페인을 꺾고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일궈낸다.
한국과 스페인은 광주에서 열린 경기에서 전후반 90분과 연장 30분에서 0대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승부차기에서 이운재 선수가 스페인 네 번째 킥을 막아낸 뒤 홍명보 선수가 마무리 킥을 성공시켜 5대 3으로 승리했다.

아시아 국가가 4강에 오르기는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었다.
대한민국은 온통 환희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 YTN


2002 - 한국, 아시아 첫 `4강 신화` 달성.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에 5대3 승리

이제 더 이상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23명 태극전사의 땀과 투지,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4700만 국민적

열망이 함께 어우러진 `아시아의 힘`이었다. 한국이 2002년 6월 2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IFA랭킹 8위인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120분 연장사투 끝에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5―3으로 이겨 아시아 첫 4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은 전반부터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던 빠른 측면돌파가 촘촘히 망을 친 스페인의 수비에 힘을 잃었다. 오히려 제공권을 빼앗기며 여러 차례 실점위기를 내줬다. 그러나 그때마다 수문장 이운재의 선방이 빛났다. 모리엔테스, 데페드로, 이에로, 호아킨 등의

날카로운 슈팅을 정확한 위치선정과 순발력으로 막아냈다. 후반 15분 유상철 대신 이천수를 투입하며

공격의 활로를 튼 한국은 박지성과 이천수의 슛 등으로 맞서며 연장까지 0―0 공방전을 펼쳤다.

한국은 승부차기에서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이 모두 골을 넣고, 이운재가 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 호아킨의 슛을 막아냈다. 마지막으로 주장 홍명보가 침착하게 찬 볼은 오른쪽 네트에 시원하게 꽂혔다.

한국의 `파워사커`가 다시 한번 전 세계를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2002 - 아웅산 수지 여사, 가택 연금 해제 이후 처음으로 지방 방문길 올라

버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가 19개월간 계속됐던 가택 연금이 해제된 지난달 이후 처음으로 수도 랑군을

벗어나, 지방 당직자들과의 정치 논의를 위해 지방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족 민주동맹의 관계자는 아웅산 여사가 아무런 제지없이 22일 아침 일찍 랑군을 출발해

여행길에 올랐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57세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는 버마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시와 여러곳의 지방 소도시들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버마 군사정부는 지난달인 5월 6일, 아웅산 수지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했으며 활동에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을것 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 2002-06-22

http://voanews.com/Korean/archive/2002-06/a-2002-06-22-5-1.cfm

 

2001 - 성악가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 국내 첫 합동 공연

1999 - 미국의 대표적 현대작가 JD 샐린저가 27년전 쓴 연애편지 1억9천만원에 경매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 욱. 두 사람의 인연 덕에 오늘날 윤동주

육필원고들이 살아남아 '사진판 전 집' 출간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 조선

 

1998 - 시인 윤동주, 육필원고 150점 공개 - 21일로~ 

윤동주-정병욱교수 두 집안 운명적 인연 육필원고 보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

일제말의 캄캄한 어둠 속에 이렇게 노래했던 시인은 조국의 광복을 몇달 안 남겨놓고 고문과 생체실험의 의혹 속에

이국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비명에 갔다.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1백50점의 육필 원고와 애장서 40권, 신문스크랩 등은

후손들에 의해 곱게 간직됐다가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8월15일 한권의 책이 돼 세상에 모두 공개된다.

21일 공개된 미발표시 8점을 포함, 윤동주의 모든 체취를 담아 민음사에서 발간되는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은 한국출판사상 처음 시도되는 종류의 시인 전집. 한 시인의 모든 원고들을 사진판으로 육필 그대로 공개한다는 발상은 지금까지의 한국 출판사에는 없었다.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성균관대 교수)씨는 "50년 넘게 집안에서 보관해 왔으나 분실 훼손의 염려가 항상 있어 더 늦기 전에 모든 자료를 컬러 사진 판으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집 출판의 더욱 중요한 학술적 의미는 1차 자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우리 학계 풍토에 대한 경종이라고 편집에 관계했던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광복 후 윤동주에 대해 발표된 연구 논문과 저서는 2백49종.

그러나 지금까지 후손을 찾아가 그가 남긴 자료나 육필원고를 보자고 요청한

한국인 국문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96년 한국인 학자론 최초로 이들 원고를 검토한 단국대 왕신영 교수는 "사진판을 통해 윤동주의 모든 육필원고들을

검토하면 그의 고심에 찬 퇴고 과정, 생각의 단초를 보여주는 메모 등을 볼 수 있어 시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이렇듯 온전하게 남아있는 데는 윤동주 집안과 고 정병욱 서울대 국문과 교수 집안간의

운명적 인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며 자필 시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의 육필 원고를 연희전문 1년 후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정병욱에게 맡겼고, 정병욱은 일제말 징병돼 떠나면서 "일제에 발각되지 않도록 마루 밑에 잘 보관하고

혹시 내가 전장에서 죽더라도 해방되거든 발간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윤동주의 남동생(일주)과 정병욱의 막내 여동생(덕희)이 후에 결혼, 50년 동안 자료들을 목숨처럼 지키고 관리해온 것이다. 윤동주의 제수이며 윤인석 교수의 어머니인 정덕희씨(68)는 "15세 때부터 간직해온 것을 세상에 내보내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정씨와 윤 교수는 "윤 시인의 시가 중요한 것이지 우리가 왜 나서겠느냐"며 한사코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이들은 "언젠가는 모든 자료를 신뢰할 만한 곳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태익기자·tikim@chosun com> 조선닷컴 1998.06.22 22:18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62270456 

어선 그물에 걸려 좌초됐던 북한 잠수정이 6월 28일 바지선 동경호에 실려

해군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동해항을 출발해 진해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1998 - 북한 잠수정 영해 침범(1998)
1998년 오늘!
강원도 속초 근해에서 70톤급 북한 잠수정 1척이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을 우리 어민이 발견했다.
우리 해군이 이 잠수정을 동해항으로 예인해 내부 수색을 벌인 결과 북한 승조원 등 9명이 총상을 입고 숨져 있었다.
남한의 음료수 병과 수중 침투용 공기흡입기, 작전일지 등이 발견됨에 따라 이들이 침투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발각되자

자폭한 것으로 추정됐다.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을 '명백한 영해침범이며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위반한 침투작전 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의 사과를 촉구했다.
잠수정에서 발견된 북한 측 시신 9구는 사건 발생 12일 만인 7월 3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됐다. -
YTN

 

1998 - 북한 잠수정 동해안에서 어선 그물에 걸려 좌초

1998년 6월 22일 오후 4시 33분쯤 강원도 속초 동쪽 11.5마일 해상에서 북한 잠수정 1척이 대남공작 임무를 마치고

귀환중 우리 어선의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우리 군에 예인됐다. 잠수정은 속초 앞바다에서 조업중이던 동일호 선장

김인용씨가 처음 발견해 우리 군에 신고했다.

잠수정의 내부 해치를 특수장비로 절단하고 수색한 결과 잠수정에는 승조원과 공작원 등 9명이 총상을 입고 집단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이밖에 잠수정안에서 PG-7 대전차로켓포 2정,

7.65mm 체코제 기관권총 4정, AK소총 3정, 수류탄 4발 등의 무기도 발견됐다.

잠수정안에서 발견된 항해메모에 의하면 잠수정은 20일 오후 6시30분 북한 공작원을 태우고 대남 침투기지인

원산 황토성의 훈련장을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1일 오후 7시 하선지 부근에 도착해 10시경 안내조가 육지를 향해 출발했다. 이들이 대남공작 임무를 마치고 잠수정으로 귀환해 하선지를 벗어나 북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은 22일 오전 0시38분이었다.

잠수정에서 발견된 시체9구는 7월3일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송환됐다. -조선

 

1998 - 경주 석굴암 37년만에 보수공사 실시

경북 경주시 진현동 국보 제 24호인 석굴암에 지난 1961년 외부 돔 설치이후 37년만에 처음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된다.
22일 문화재관리국 관계자는 석굴암의 원형보존을 위해 이달말부터 1억8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문화재
보수 전문업체인 창성건설에 맡겨 11월 10일까지 보수작업을 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6월 대한건축학회가 낸 '석굴암 구조 안전 진단 보고서'에따르면 더 이상 보수를 미룰 경우 원형훼손이 우려돼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보수공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보수 부위는 1910-1920년 일제때 만든 내부 콘크리트 돔의 균열부분과 콘크리트돔의 누수부분이다.
내.외부 돔의 누수부분은 특수 방수처리를 하게되며 균열부위는 온.습도의 영향이 없는 무수축 콘크리트로 보강하게 된다.
한편 보수 공사기간중 일반인들의 관람은 현재처럼 허용된다.- 문화닷컴 1998-06-2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80622454 

 

1994 - 러시아-나토, 군사 정치적 관계 정립을 위한 `평화동반관계`에 서명  

콘스탄트 비르질 게오르규

 

1992 -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사망

소설 `25시`로 유명한 작가이자 루마니아 정교회 총주교인 콘스탄트 비르질 게오르규가 1992년 6월 22일 향년 76세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게오르규는 억압적 체제, 획일주의, 물질만능사상 하에서 상실되어가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탐구해온 전후 문학의

주춧돌 같은 존재로 꼽힌다. `25시` `제2의 찬스` `키랄레사의 학살`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세계는 소외당하고

천대받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참모습을 돌아보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1916년 루마니아의 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24세 때인 1940년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왕국 시인상을 받으며 필명을 날렸으나

루마니아가 소련에 의해 적화되자 1946년 파리로 망명했다. 1949년 파리에서 출간된 `25시`는 모든 구원이 차단된 절망과 불안의

시간을 상징함으로써 서구문명의 삭막함과 인간상실의 황폐함을 경고하고 있다.

1963년 루마니아 정교회 파리교회 사제가 된 그는 작품 못지 않게 사제로서도 조국의 독재체제에 맞서 투쟁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루마니아여 깨어나라`는 라디오방송 연설로 조국 루마니아 사람들을 깨우치기도 했다.

공산치하에 시달리던 조국의 현실을 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그는 특히 한국의 분단현실을 깊이 이해해준

친한국파이기도 했다. 1974년 첫 방한이래 모두 5차례나 한국을 찾았으며, 한국을 `새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가져

 `한국찬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1990 - 석방된 남아공의 만델라(Nelson Mandela) 유엔에서 연설

1990 - 석방된 남아동 인종차별 철폐운동가 넬슨 만델라, 뉴욕 방문해 유엔에서 연설  

 

1985 - 스포츠서울 창간

1984 - 영락교회 박조준 목사 부부. 20여만달러 밀반출 기도 혐의로 영장

1981 - 한국언론연구원 개원  

강경파 회교혁명평의회(IRP)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온건파 바니 사드르가 해임됐다.

 

1981 - 이란 호메이니, 바니 사드르 대통령 해임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1981년 6월 22일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을 해임했다. 호메이니의 해임선언은 정치적 매장과

신변불안을 함께 의미했다. 사드르는 결국 7월 29일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호메이니의 전폭적인 신뢰로 지난

1980년 1월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온건파 바니 사드르가 해임되고 망명해야 했던 이유는 강경파인 회교혁명평의회(IRP)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은 온건파 사드르를 제거키로 결정한 IRP가 1981년 3월 5일 사드르 연설장에서 소란을 피우자

사드르 지지파와 이들간에 충돌사건이 발생,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부터였다. 이 사건후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는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총동원돼 사드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사드르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 은신에 들어갔다.

6월 20일 혁명검찰부는 체포령을 내렸고 호메이니는 이날 그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했다. -조선

 

1978 -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서 교환

1974년에 체결된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서가 1978년 6월 22일 교환됐다. 협정 체결로부터 4년 5개월이나 늦어진 것은 일본 의회가

협정발효에 필요한 비준을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 체결목적은 제주도 동남방 약 8만4천 평방km의

대륙붕을 공동개발하기 위해서였다.

한일 양국은 협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실무 협의체인 한일대륙붕 공동위원회를 구성, 1978년 11월부터 1차회의를 열어 실무적인

절차를 협의하고 1979년 10월 2차회의에서 탐사작업에 들어가기로 합의함으로써

1979년 10월 30일부터 제5, 7광구에 대한 음파탐지에 착수했다.  

위에서 바라본 남해대교 전경.(항공촬영)

 

1973 - 남해대교 개통(1973)

1973년 오늘,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남해대교가 개통됐다.
1968년 5월에 착공해 5년 만에 완공된 것으로 길이 660m에 이르는 우리 나라 최초의 현수교다.
이 다리는 남해도를 육지와 연결시켜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과 남해도 전체의 개발에 이바지했다.

 

1973 - 남해대교 개통

우리나라 3번째 큰 섬인 남해와 경남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남해대교가 1973년 6월 22일 오전 11시 개통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은 이 남해대교 개통식에는 건설부장관 등 정부고위층과 건설공사관계자 및 현지주민들이 참석했다. 길이 660m,

폭 12m의 새 남해대교는 우리나라 첫 현수교(서스펜션 브리지= 적당히 늘어지게 친 케이블이 본체를 구성하는 다리)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케 됐다. 지난 1968년 5월에 착공, 만 5년 만에 준공된 이 다리는 18억7천만원을 들여 세웠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14만명의 인구를 가진 남해섬의 화방사, 용문사, 상주해수욕장 등 관광지가 크게 각광을 받게 됐다.

 

1973 - 첫 유인우주실험실인 스카이랩 귀환, 우주인 3명이 최장 28일간의 우주체재 기록 세움

1973 - 미소핵전쟁방지협정(美蘇核戰爭防止協定) 체결

 

미소핵전쟁방지협정 [美蘇核戰爭防止協定]

1973년 6월 22일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 R.M.닉슨과 소련 공산당 서기장 L.I.브레주네프가 서명한

핵전쟁방지에 관한 미·소 간의 협정.

1972년 5월 29일 미·소 양국 정상이 모스크바에서 조인한 ‘미·소관계의 기본원칙’에서 발전된 것으로,

이 원칙에 천명된 “두 국가는 군사적 대결을 피하고, 핵전쟁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한다”는 합의 아래 맺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전문과 본문 8개조로 되어 있고, 조인과 동시에 발효되었는데, 유효기간은 무기한이다.

쌍방의 정책목표가 핵전쟁·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상호간 및 제3국과의 사이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행동하기로 약속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행사(使)를 삼가는

전제()에서 출발할 것, 핵전쟁의 위험이 있을 때는 긴급히 협의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협정 체결로 핵전쟁포기가 선언된 것은 아니다. -naver 



 

1973년 6월 22일 미국 닉슨 대통령과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에 의해 서명된 핵병기에 관한 양자의 신뢰관계

확보를 위한 협정. 쌍방의 목적이 핵전쟁 방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미소 및 제3국과의 사이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행동할 것을 약속하고 위급한 경우에는 긴급협의하는 것을 정하였다. - 열린백과 오픈토리

 

1970 -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발생  

 

1969 - 미국의 뮤지컬 가수, 배우 갈런드(Garland, Judy) 사망  

갈런드 [Garland, Judy, 1922.6.10~1969.6.22] 

미국의 포퓰러가수·여배우.

본명은 프란시스 에셀 검. 미네소타주 그랜드 래피즈 출생. 3세 때부터 무대에 섰으며(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제가인 《무지개의 저편에서》는 그녀의 테마 음악이 되었다.

연기와 노래에 뛰어나 뮤지컬·영화 등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주연 영화로는 《
부활절 퍼레이드 Easter Parade》(1942), 《스타 탄생》(1954) 등이 있다.
 

1965년 2월 20일 외무부 회의실에서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이 있었다.

한국측의 이동원 외무장관(왼쪽)과 일본측 시이나 외상. 

 

1965 - 한일협정 정식 조인(1965)
1965년 오늘!
우리 나라와 일본이 일본 총리관저에서 한일협정, 즉 한일기본조약에 정식으로 조인한다.
한국은 이동원 외무장관과 김동조 수석대표가 일본은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나부로와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가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두 나라 관계에 관한 기본조약과 4개의 부속 협정 등이 조인됐다.
이 조약을 위한 한일회담은 1951년 10월부터 14년 동안 진행됐으며 최종 단계에서 우리 국민들의 거센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어업과 문화재 반환 등의 문제에서 일본에게 지나치게 양보하고 체결한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65 - 한일기본조약 조인(한일국교 정상화)

한국과 일본간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이 이날 일본 수상관저에서 조인됐다.

조약은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수석대표와 시나 일본 외무장관, 일본 수석대표가 서명-조인했다. 일본자본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추진하고 정권을 강화하려는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진출을 희망하는 일본자본,

그리고 극동지역에 반공 보루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기본조약으로 한일 양국은 외교-영사관계를 개설하고 한일합병 및 그 이전에 양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측은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했다. 부속협정에서는 대일 청구권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와 대우, 어업권문제 등을 합의했다. 특히 3억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공여하기로 합의했다. - 조선

 

1965 - 한일기본조약 조인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하는 4개 협정 및 25개 문서를 총칭하는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어 같은 해 12월 18일 성립·발효되었다. 제1차 한일회담은 1952년 2월 15일부터 시작되었으나,

대일민간청구권 문제와 어업문제에 관한 의견대립으로 4월 21일 중단되었다. 이후 5차회담까지 결렬과 중단을 거듭하다가

1962년 11월 12일 도쿄[東京]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이 비밀회담을 가지고

기존의 쟁점이었던 대일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재일동포 법적지위 문제에 대한 타협점을 찾으면서 회담은 급진전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한일기본조약의 체결이 굴욕외교라는 여론과 함께 1964년 3월 24일 학생시위가 일어나고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극심해지자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6·3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65 -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은 대한민국일본이 서로간에 일반적 국교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1965년6월 22일에 조인한 조약이다.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51년 이후 외교를 위해 몇 차례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 의견이 엇갈려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는 이 조약이 맺어진 뒤 차관을 지급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관련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조약에 대해

어업과 청구권에 대해서 한국측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비판이 있다. 조약 체결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일 우정의 해 2005가 선포되였으며, 교류 행사가 다수 실시됐다. 또 2005년 1월 20일, 정일영원 외무차관이 한일 회담 당시에,

한국이 일본에 제시한 103만명여의 강제 징용, 징병 피해자수는 적당하게 산출한 수였다고 폭로한다. - 위키백과


 

1964 -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Brown, Dan) 출생

브라운 [Brown, Dan, 1964~ ]

댄 브라운(Dan Brown, 1964년 6월 22일 - )은 미국의 소설가이다.

앰허스트 대학을 졸업했다. 필립스엑스터아카데미의 영어 교사로 있었다.

1998년 소설 《디지털 포트리스(Digital Fortress)》로 데뷔했다. 2000년 《천사와 악마》를 썼으며,

2003년에 출판한 《다빈치 코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 《디셉션 포인트》도 있다. 

 

1961 - 공보부 신설

1960 - 국회의원선거법 국회통과

1957 - 소련 공산당 중앙위 총회 시작,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세피로르 추방

 

1951 - 한국의 시인 김상용 사망 

김상용(金尙鎔, 1902년 음력 8월 27일 ~ 1951년 6월 22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호는 월파(月波)이다.

생애

경기도 연천 남면 왕림리 출생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 운동과 관련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21년에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릿쿄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했다.

1927년 릿쿄 대학을 졸업했고, 1928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1930년에 연천에서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 해에 《동아일보》에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고, 이후 1931년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비롯하여 찰스 램, 존 키츠 등의 영미 작가들의

번역 작품을 내놓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하면서 활동했다.

그 외에도 1938년에 발표한 수필 〈우부우화〉를 비롯하여 많은 수필을 썼다.

김상용의 시에는 동양적이고 관조적인 허무의 정서가 깔려 있으나 낙관적인 방식으로 어둡지 않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1934년 《문학》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이 시의 마지막 연 "왜 사냐건 웃지요"가 유명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

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있다.

1943년에 일제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폐지되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 도지사로도 임명되었으나 며칠만에 사임하고 이화여대의 교수, 학무처장이 되었고, 194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 동안 보스턴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1950년에 풍자적인 수필집 《무하선생 방랑기》를 발표하였다.

한국 전쟁부산으로 피난했다가 1951년 6월 22일에 식중독으로 병사했다.

부산에서 병사하고 1년이 지난 후에 망우산에 묻혔다.

1956년 6월 24일에 세워진 묘비에는 "檀紀四二三五年 八月 十七日 京畿道 連天서 나셔서,

四二八四年 六月 二十二日 釜山서 돌아가셨고, 四二八九年 二月 三十日 이 자리에

옮겨 뫼시다."라고 써 있다.누이동생이 시조시인 김오남이다.

 

1950 - 북한, 전투명령 제1호 하달

1948 - 우리나라 첫올림픽선수단 런던으로 출발

 

1946 - 광복군 환국

1943 - 미국 디트로이트서 인종폭동  

소련 집단농장에 침입한 독일군의 Sd.Kfz251 장갑병원운송차.

 

1941 - 나치 독일, 소련 침공(1941)
1941년 오늘!
나치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히틀러는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소련 영토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독일 북부군은 레닌그라드로,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나아갔다.
히틀러는 소련군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막강하게 저항하고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 대한 원조에 나서면서 히틀러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1941 - 독일, 소련에 선전포고

1941년 6월 22일 오전 5시30분 독일 선전장관 괴벨스가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의 대소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에앞선 오전 3시, 약 300만명의 독일군이 이미 전차 등을 동원, 대진격을 개시했다. 육전사상 최대규모였다.

히틀러는 129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그 날을 선택했다.

나폴레옹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내겠다는 히틀러의 야심찬 도전이었다.
초기에는 히틀러의 뜻대로 되는 듯 했다. 독일군은 곳곳에서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새벽 무렵에 이미 전차부대가 소련 영내 80km 지점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이유는 소련을 포함한 동부유럽의 광대한 지역이 전쟁을 위한

자원공급지로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차례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스탈린은 히틀러의 침입을 예측하지 못했다.
역사상 최강전력의 공격에 소련군은 혼란에 빠졌다. 오후 0시15분경 비로소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이 라디오로 독일군의 침공사실을 소련 국민에게 알렸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6개월 동안 4백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전통적으로 동계를 이용하는 소련군

작전에 말려들었다. 독일군은 소련의 주코프 대장이 이끄는 1백개 사단 병력의 대반격에 개전이래 처음으로 큰 패배를 맛보았고,

이때부터 히틀러는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1 - 제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을 비롯한 추축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여 소련을 침공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어:FALL Barbarossa)은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을 기습공격한 작전명칭이다. 작전 기간은 1941년6월 22일부터 1941년 12월까지였으며, 작전 이름은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명군으로 불린 전설적 인물로 동방에 관심을 기울였기에 대소련전에 걸맞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일설에는 붉은수염은 스탈린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독일 육군은 공격작전명에 색깔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어, 이것의 발전형이라고도 생각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원래 목표는 소비에트 연방유럽 부분(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정복이었으나 실패했다. 이 실패는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 전쟁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했고 결국은 나치 독일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1940 - 독일의 기상학자 쾨펜 사망

1939 - 국민당군, 신4군공격 (평강사건)  

루이스(1946)

 

1937 - 루이스, 챔피언 타이틀 쟁취(1937)
디트로이트의 '갈색 폭격기'로 이름난 미국의 흑인 권투선수 조 루이스(Joe Louis)!
1937년 오늘, 시카고에서 열린 경기에서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스물 셋!
도전자로 나온 루이스는 챔피언 제임스 브러도크를 8회전에 KO로 쓰러뜨렸다.
루이스는 이후 불패의 기록을 세웠다.
1949년 3월 1일 은퇴를 발표할 때까지 12년 동안 25회 타이틀 방어라는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다.

 

1937 -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 세계헤비급 챔피언 획득

1937 - 루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

1937년 6월 22일 미국 시카고에서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가 제임스 J. 브래독에게 8라운드 KO로 승리를 거두어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루이스는 1949년 3월 1일 은퇴할 때까지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해 당시 헤비급 역사상 최장수 챔피언이었다.

무려 25차례의 방어전을 치렀으며 그 중 21번은 KO승을 거두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복싱을 시작한 루이스는

1934년 7월 4일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1939~42년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이 저조해 에자드 찰스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1951년 10월 26일 벌어진 마지막 경기에서는 로키 마르시아노에게 8라운드 KO패를 당했다.

말년에 루이스는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현관 안내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1921 - 코민테른 제3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1920 - 그리스.터키 전쟁

 

(이순신 표준영정 우표, 유관순 우표)

1912 - 한국화가 장우성() 출생

장우성 [, 1912.6.22~2005.2.28]  

손원일 제독 - 해군자료실 

 

1909 - 해군 제독 손원일(孫元一) 출생

손원일 [孫元一, 1909.6.22(음력 5.5)~1980.2.15]

한국의 군인. 호 고산(). 평안남도 강서(西) 출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4년 중국 난징[]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1927년 중국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3년간 독일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으로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풀려나 중국으로 갔다가 광복 후 귀국,

1945년 11월 '해방병단'을 창설,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는데, 이것이 한국해군의 모체가 되었다.

1946년 해안경비대() 교장과 총사령관을 지내고, 1947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52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1953∼1956년 국방부장관을 지내고, 1957∼1960년 주독일대사(使)를 역임하였다.
1970년 대한윤활유 사장, 1972년 홍보협회장(), 1972∼1974년 한국반공연맹(현재의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

고문을 지내고, 1976년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외교·사회 등 각 방면에서 공헌하였다. - naver


 

초대 해군 참모총장과 독일(옛 서독) 대사를 역임한 군인·외교관.

일제강점기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1921년 만주로 건너간 손원일은 1925년 원광중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다. 의과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던 그는 어느 날 제복을 입은 해군의 모습을 보고 진로를 바꾸어, 1927년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3년 간 외국 선박해사에서 항해사로 근무하다가, 1934년 개성에 있는 누나를 방문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에 의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상하이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2개월 간 혹독하게 고문을 당한 뒤 무혐의로 풀려난 손원일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고,

동화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손원일은 혼란한 사회 상황에서도 해군 창설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규합하고 미 군정청과 협의한 끝에 1945년 11월 11일 한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다. 해방병단은 1948년 9월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손원일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지위에 올랐다. 손원일은 인재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1946년 1월 지금의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생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해군 창설 초기 1척의 군함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과 일본에 협상을 시도하여 1948년까지 총 37척의 군함을 인수하였고, 이후 함정건조기금을 모금하여

1949년 10월에는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도입하였다.

 

6·25전쟁이 발생하자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9·28 서울 수복작전까지 직접 전장에서 진두지휘했으며, 서울 수복작전에서는 국군 최고지휘관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손원일은 전쟁 이후에도 해군력 증강을 위해 호휘함을 추가로 인수하는 한편, 군종제도의 도입, 전사 편찬실 및 해군 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의 사기 진작과 현대화된 군 조직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3년 6월 예편 이후 제5대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재임기간중 국방력 증강뿐 아니라, 국립묘지 창설, 국방대학원 창설 등 행정면에서도 공헌하였다. 1958년 8월에 초대 주서독 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외교 일선에서 일하다가 1960년 사임한 후, 1976년까지 재향군인회, 반공연맹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상훈으로는 태극 무공훈장, 자유훈장, 미국 공로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 브리태니커

 

손원일(孫元一 , 1909년 5월 5일(음력) ~ 1980년 2월 15일)은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호는 수향(水鄕),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손제독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해방이 되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다. 그 후 해군 초대 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

초대 서독대사 등을 역임하고 1980년 2월 15일 서거하여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특히, 손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재임기간 중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 참전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였다.

또한 해군병학교(현 해군사관학교), 해병대 등을 창설하였으며, 전사편찬실 및 해군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 사기 진작과 조직체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86%90%EC%9B%90%EC%9D%BC_(1909%EB%85%84)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으로 우리 민족은 35년간의 치욕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해방과

동시에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왔던 이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훗날 초대 해군총참모장(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손원일(孫元一)제독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장을 지낸 손정도(孫正道) 선생의 장남으로 1909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서 3년간

수학한 바 있는 손원일 제독은, 1930년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으로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풀려나 중국으로 갔다가 조국 광복과 동시에 귀국하게 된다.

손원일 제독은 정긍모(鄭兢謨) 선생 등과 함께 1945년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를 조직하고, 서울 관훈동에 사무소를 마련하여 대원들을 모집, 항해과와 선박기관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했다. 그 후, 설립 당시부터 계속되어온 재정난 극복을 위하여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가입하는 등 탈출구를 모색하던 중, 석은태(石銀泰) 선생이 이끄는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과 통합, 명칭을 조선해사협회(朝鮮海事協會)로 개칭한다.

 

미군에 의해 군정(軍政)이 선포되고 군정청(軍政廳)이 설치되면서, 해사협회는 군정청을 방문하여 해사협회가 해사관계에 있어 한국내 유일한 단체임을 인식시키고, 이에 군정청에서는 손원일 제독을 직접 만나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이 가능한지를 문의해온다. 손원일 제독은 군정청과의 협상을 시작, 군정청과의 합의 하에 훗날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 영문명 : Korean Coast Guard)을 1945년 11월 11일 결성, 초대 단장에 취임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삼가 이몸을 바치나이다"라는 표어 아래, 바다의 신사로서의 해군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선비 사(士)’자를 형상화(‘十’ + ‘一’)하여 정해진 이 날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기념일로 기려지고 있다.

 

1946년 해안경비대(海岸警備隊) 교장과 총사령관을 거쳐, 1947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 1953∼1956년 국방부장관을 지내고, 1957∼1960년 주 독일대사를 역임하였다. 1970년 대한윤활유 사장,

1972년 홍보협회장(弘報協會長), 1972∼1974년 한국반공연맹(현재의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과 고문을 지내고,

1976년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외교·사회 등 각 방면에서 공헌하였다.그는 생전에 군인으로서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 받아 무공훈장, 미국 은성훈장, Legion of Merit, 태극무공훈장, 금성을지무공훈장, 공비토벌기장, Denmark Redcross Medal, US Medal, 6.25 종군기장, 국제연합 종군기장 및 금성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 해군자료실

http://www.navy.mil.kr/pds/navyhistory/history_6.jsp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 10주년 우표'의 발행을 위해 애쓰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

 

1904 - 원산-인천 전화 개통 

1904 - 원산~인천 간 전화 개통  

레마르크

 

1898 - 독일의 소설가 레마르크(Remarque, Erich Maria) 출생

레마르크 [Remarque, Erich Maria, 1898.6.22~1970.9.25]

레마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 Im Westen nichts Neues>(1929)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독일의 소설가이다. 이 작품은 1930년 미국에서 영화화되었다. 국가사회주의인 나치 정권으로부터 반전작가로

지목되어,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유럽 각국 피난민이 모인 파리를 무대로 한 소설

<개선문 Arch of Triumph>으로 또 다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에 이 소설 역시 영화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의 마조레 호 근처 포르토 롱코에 정착해 미국 영화배우인 폴레트 고다르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우리는 미래를, 그것도 보다 나은 미래를 믿어야 한다. 세계는 평화를 원한다."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1891 - 북로전신선(한성·원산간) 준공

1881 - 주전을 중지하고 각종 도고 행위를 금지

 

1767 - 독일의 언어학자··교육개혁가 훔볼트 출생

1767 - 독일의 언어철학자, 교육개혁가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출생

훔볼트 [Humboldt, Wilhelm von, 1767.6.22~1835.4.8] 

 

1675 - 그리니치천문대 설립 /동아사이언스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Greenwich Royal Observatory)
넓은 그리니치 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왕립 천문대는 1675년 6월 22일 찰스 2세의 명령하에 천문학 연구와 경도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먼저 하루가 시작하는 곳으로, 본초자오선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270년의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살았던 천문학자들의 숙소와 업무공간을 둘러보고, 그리니치 표준시(Greenwich Mean Time)가

어떻게 세계 표준시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일련의 천문대 건물들은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크리스토퍼 렌경의 디자인으로 완공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와서 공해 등의 외부적인 영향으로 그리니치

박물관에서는 더이상 천체 관측이 불가능하게 되어 1948년 잉글랜드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서섹스의 허스트먼수

성(Herstmonceux Castle)으로 그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리니치 공원의 구왕립 천문대는 국립해양박물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http://www.chinacici.co.kr/campcici/last-camp/2005s-uk.htm 

 

1633 -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동설 철회
1587 -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고산 윤선도() 출생

윤선도 [, 1587~1671]

고산은 해남 윤씨의 16대손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윤의중에게 유심.유기.유순 세아들이 있었는데 고산은 유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1587년 6월 22일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어 입양돼 대를 잇고 있던 작은아버지 유기 역시 아들이 없자 고산은 여덟살 때부터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 연동에서 자랐다. ...
고산은 유배에서 풀려난 2년 뒤인 1671년 6월 11일 완도군 보길도 낙서제(樂書齊)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5세였다. /naver 지식iN

 

본관 해남(). 자 약이(). 호 고산() ·해옹(). 시호 충헌().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했다.

1629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 때 남인() 정개청()의 서원()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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