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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21

오늘의 사건 06.21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 백범 김구,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한다>에서

 

2009 - 노 전 대통령 콘서트, 노찾사 노래로 시작

안치환, 신해철, 전인권, 정태춘, 노찾사, 우리나라, 락밴드 피아, 뜨거운 감자 등 출연

6월21일 오후6시30분에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가

연세대측의 불허로 성공회대로 자리를 옮겨 열렸다

시민들의 입장이 늦어져 콘서트는 오후7시30분경에 시작되었고, 권해효씨의 사회로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는

진행되었다.

공연이 시작되기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가 열리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며 "민주주의 승리가 재확인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찾아오신 분들께 놀라움을 느꼈으며,

힘을 보여주신 것에 감동을 느꼈다"고 인사의 말을 하였다.

이어 성공회대 총학생회장은 "민주주의 후퇴가 개탄스럽다. 공동체가 살아있고 비판정신이 살아있는 성공회대에서

더 많은 시민을 포괄할 수 없어 미안하다"며 "작지만 의미있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신해 기쁘다. 격려문자에 용기 얻었다. 옳은 일 한 것 같아 마음 뿌듯하다. 다시 부는 희망의 바람이 전국을 누볐으면 좋겠다. 여기 계신 분 모두가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며 멀리 성공회대를 찾은 시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 노무현 추모 콘서트 첫무대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로 시작되었다. 이어 '락밴드 피아', '우리나라', '안치환과

자유', '신해철과 넥스트', 뜨거운 감자, 전인권, 정태춘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시민들은 노란 손수건을 노래에 맞추어 흔들며 흥겨워하였다.

다음은 성공회대 운동장에서 열린 고 노무현 추모 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 공연 풍경들이다. (사진 생략)

임순혜(soonhea) 오마이뉴스 09.06.22 11:3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61467&PAGE_CD=12

 

노 전대통령 추모 콘서트, 난항속 성공회대서 개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콘서트가 난항 속에 개최됐다.
당초 이 콘서트는 20일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장소와 시간을 변경해 21일 서울 성공회대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연세대 총학생회 등 주최 측은 “학교 측이 행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사법고시 2차 시험의 면학 분위기 조성’과 ‘
청소의 물리적, 시간적 곤란함’을 이유로 노천극장 사용 불허가를 통보했다. 학교 측과 협의를 통한 상호간의 합의점을 찾고자 하였으나 논의가 쉽지 않았다”고 장소 변경 이유를 밝혔다.
연세대 측은 예정됐던
공연 3일을 앞두고 불허를 통보했고 19일 경찰에 ‘시설물 보호요청’을 하며 무대 설치와 정문 출입을 막았다. 표면적인 문제는 면학분위기 조성이지만 이면에는 정치적인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콘서트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행사 주최측은 19일 밤 늦게 장소 변경을 취재진에 알리고 행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다시, 바람이 분다’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추모 콘서트는 배우 권해효가 사회를 보고 YB(윤도현밴드), 넥스트, 강산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DJ DOC, 안치환과 자유, 전인권, 뜨거운 감자 등이 출연했다.
김성한 기자
wing@sportshankook.co.kr 스포츠한국 2009/06/22 06:33:22  

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0906/sp2009062206332295510.htm

 

신해철 故 노무현 추모콘서트에 삭발 울며 노래 불러

가수 신해철이 21일 오후 7시 40분경 서울 성공회대에서 열린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콘서트에 삭발을 한채 출연했다.
정장 차림에 삭발을 한 신해철은 이 자리에서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우리들이다. 우리 모두 가해자이고 모두의 잘못이다. 나는 가해자이기 때문에 문상도 못 갔고 조문도 못 갔고 담배 한 자락 올리지 못했고 쥐구멍에
숨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고 눈물을 흘렸다.
신해철은 이어 "그동안 담배 한 개피도 피울 수 없었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지는 모르지만
너무도 아까운 죽음이다"고 말하며 '그대에게'라는 노래를 불렀다.
[ 공지현 기자 ] 뉴스한국 2009-06-22 00:00:06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d20090621235713n6386

 

2005 -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서울 6.21~6.24)

2004 - 세계 최초 민간 개발 우주선 스페이스쉽 원 발사
민간 회사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민간 우주선 스페이스쉽 원이 발사됐습니다.
미국의 스케일드 콤포지츠사가 개발한 스페이스쉽 원은 터보 제트 엔진이 장착돼 있습니다.
우선 지상 만5천 미터가지 올라가 로켓 엔진을 점화해 우주에 진입한 스페이쉽 원은 대기권 밖에서

3분 정도 머문 뒤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스페이스쉽 원은 인간을 우주로 보낸 첫번째 민간 우주선으로 기록됐습니다.

사이언스 TV 2009-06-16 17:21:46 

http://www.sciencetv.kr/theme/theme_view.php?s_mcd=0101&key=200906161721423812&tcd1=01&tcd2=07

김홍업씨가 2002년 6월 21일 오후 수감 장소인 서울구치소로 가기 위해

대검찰청 청사 앞에서 호송용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2002 - 김대중 대통령, 두 아들 김홍업-김홍걸 구속문제로 국민에 직접 사과

2002 - 김대중 대통령 2남 김홍업씨 22억 수수혐의로 구속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가 청와대·검찰·국세청·예금보험공사·신용보증기금 등 국가기관의 업무와 관련해 기업체의

청탁과 함께 22억8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로 2002년 6월 21일 구속됐다.

검찰에 따르면 홍업씨는 2000년 2월 삼보판지 유종규 부사장으로부터 모범납세자로 선정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국세청 간부에게 청탁해주겠다며 1억원이 든 통장을 받았고, 같은 해 9월∼2002년 2월 성원건설 전윤수 회장으로부터 화의 인가와 관련한 청탁조 및 사례비조로 4차례에 걸쳐 1억4000만원을 받았다. 홍업씨는 또 2000년 6월 당시 대한주택공사 오시덕 사장에 대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내사종결 사례비로 오 사장으로부터 2000만원을 받는 등 총 2억6000만원을 직접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홍업씨가 직접 받은 1억4000만원과 별개로, 김성환·이거성씨 등이 성원건설에서 10억원을 받는 과정에서 예금보험공사 이형택 당시 전무에게 "화의안을 신속하게 동의해달라"고 청탁했고, 2001년 평창종건의 신용보증서 취득과정에서 당시 신용보증기금의 모 전무와 이 회사 간부의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공범혐의를 적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3남 김홍걸씨에 이어 차남 김홍업씨도 구속되자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국민여러분 앞에 섰다"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일반 금광개발 현장.

 

1999 - 경북 성주서 발견한 수륜광산, 국내 최대 금광맥으로 확인

대한광업진흥공사가 1999년 2월말부터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광산, 전남 진도군 가사도광산, 충북 음성군 금풍광산 등

3개 광산을 대상으로 시추탐사를 벌인 결과 1999년 6월 21일 수륜광산이 국내 최대의 금광맥으로 확인됐다.

수륜광산의 금광석 가채매장량은 184만4000t으로, 당시 국내 총 금광석가채매장량(400만t)의 절반에 가까웠다.

순금으로 환산하면 9˙9t이며, 당시의 국제금값으로 계산하면 943억원에 이른다고 산자부는 추정했다. 당시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최대 금광은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광산으로 가채매장량은 78만t에 불과했다. 수륜광산의 품위(금광석 1t당 금함유량)는 442˙4∼530˙4g/t으로, 무극광산(10g/t)의 50배 수준에 달했다.

국내에서는 무극광산에서 연간 1t 안팎의 금을 생산했으나 매장량이 고갈되면서 1997년 말부터 금생산이 중단돼 필요한 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국내 최고품위의 최대 금광맥을 발견함으로써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금의 상당 부분을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조선

 

1998 -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김교만(滿) 사망


김교만 [滿, 1928.9.7~1998.6.21]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 욱. 두 사람의 인연 덕에

오늘날 윤동주 의 육필원고들이 살아남아 '사진판 전 집' 출간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1998 - 시인 윤동주, 육필원고 150점 공개

윤동주-정병욱교수 두 집안 운명적 인연 육필원고 보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

일제말의 캄캄한 어둠 속에 이렇게 노래했던 시인은 조국의 광복을 몇달 안 남겨놓고 고문과 생체실험의 의혹 속에

이국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비명에 갔다.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1백50점의 육필 원고와 애장서 40권, 신문스크랩 등은

후손들에 의해 곱게 간직됐다가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8월15일 한권의 책이 돼 세상에 모두 공개된다.

21일 공개된 미발표시 8점을 포함, 윤동주의 모든 체취를 담아 민음사에서 발간되는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은

한국출판사상 처음 시도되는 종류의 시인 전집. 한 시인의 모든 원고들을 사진판으로 육필 그대로 공개한다는 발상은

지금까지의 한국 출판사에는 없었다.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성균관대 교수)씨는 "50년 넘게 집안에서 보관해 왔으나

분실 훼손의 염려가 항상 있어 더 늦기 전에 모든 자료를 컬러 사진 판으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집 출판의 더욱 중요한 학술적 의미는 1차 자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우리 학계 풍토에 대한 경종이라고

편집에 관계했던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광복 후 윤동주에 대해 발표된 연구 논문과 저서는 2백49종.

 

그러나 지금까지 후손을 찾아가 그가 남긴 자료나 육필원고를 보자고 요청한 한국인

국문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96년 한국인 학자론 최초로 이들 원고를 검토한 단국대 왕신영 교수는 "사진판을 통해

윤동주의 모든 육필원고들을 검토하면 그의

고심에 찬 퇴고 과정, 생각의 단초를 보여주는 메모 등을 볼 수 있어 시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이렇듯 온전하게 남아있는 데는 윤동주 집안과 고 정병욱 서울대 국문과

교수 집안간의 운명적 인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며 자필 시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의 육필 원고를 연희전문 1년 후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정병욱에게 맡겼고, 정병욱은 일제말 징병돼 떠나면서 "일제에 발각되지 않도록 마루 밑에 잘 보관하고

혹시 내가 전장에서 죽더라도 해방되거든 발간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윤동주의 남동생(일주)과 정병욱의 막내 여동생(덕희)이 후에 결혼, 50년 동안 자료들을 목숨처럼 지키고

관리해온 것이다. 윤동주의 제수이며 윤인석 교수의 어머니인 정덕희씨(68)는 "15세 때부터 간직해온 것을 세상에

내보내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정씨와 윤 교수는 "윤 시인의 시가 중요한 것이지 우리가 왜 나서겠느냐"며

한사코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이들은 "언젠가는 모든 자료를 신뢰할 만한 곳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태익기자·tikim@chosun com> 조선닷컴 1998.06.22 22:18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62270456 

당선후 파스트라나와 그의 가족들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1998 - 콜롬비아 대통령에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당선

콜롬비아가 개혁성향의 40대 새 대통령을 선출, 12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뤘다. 1998년 6월 21일 대선 결과

안드레스 파스트라나(44)전 보고타 시장이 과반수 이상을 득표, 집권 자유당 오라시오 세르파(49)후보를 누르고 당선됐?

3주전에 실시된 1차 투표에서는 어느쪽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이날 다시 결선투표를 하게 된 것이었다.

방송기자 출신의 파스트라나는 고 미사엘 파스트라나 전 대통령의 아들. 1994년 대선때 에르네스트 삼페르

현 대통령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으나 잇단 재도전끝에 집권에 성공했다. 이날의 정권교체는 그의 개인적 인기와

삼페르 정부가 출범때부터 칼리 마약카르텔과의 연계설을 비롯, 온갖 부패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삼페르 정권 부정부패에 대한 민심 이반의 합작품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파스트라나 당선자는 "권력층 아들로 자라 노동자들의 고충을 모른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1995 - 오영선 선생 등 독립유공자 7위 유해 환국

납치된 하네다발, 하코다테행 전일공 857 여객기가 하코다테공항에 착륙, 유도로에 멈춰 서 있다.

 

1995 - 일본 전일공(ANA) 857편 여객기 피랍

1995년 6월 21일 오전 11시32분 일본 동경 하네다 공항을 출발, 홋카이도 하코다케로 향하던 전일공(ANA) 857편

점보여객기가 야마가타현 상공에서 공중 납치됐다. 여객기에는 일본 북해도 관광길에 나선 승객 3백50명과 승무원

15명이 탑승해 있었다. 범인들은 단 1명의 승객도 풀어주지 않은 채 탑승자 전원을 볼모로 철야 대치를 계속했다.

범인은 이날 여객기 2층 뒷좌석에 앉아 있다 아이스스틱을 들고 스튜어디스 1명을 먼저 인질로 잡았다. 범인은 스튜어디스를 위협, 승무원실로 간 뒤 자신이 옴교도인 고바야시 사부로라며 객실에 또다른 동료가 승객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2일 새벽 3시43분 일본경찰의 전격적인 진압작전으로 검거된 범인은 옴진리교인도 아니며 휴직한 은행원 출신

구쓰미 후미오로 단독 범행임이 밝혀졌다. 이번 납치 사건은 1인 단독범행으로 15시간 30분 만에 해결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정치헌금 추문으로 영국 보수당을 위기에 빠뜨린 네이디르가

북키프로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93 - 네이디르 사건 발생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도피한 거부실업가인 에이질 네이디르(52)의 돈을 받고 금지된 키프로스섬 터키점령지역을 여행하고

또 거기에 호화 주택까지 마련했다는 사실이 1993년 6월 21일 야당인 노동당에 의해 정치쟁점화 됐다.

이른바 네이디르 사건의 시작이었다.

터키국적의 네이디르가 그동안 저질렀던 사기와 횡령 등의 중죄를 수사하다 보니 그 배후에 집권 보수당의

중진 의원들이 이른바 비호세력으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북키프로스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네이디르는 1981년 영국으로 와서 `폴리 펙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 대기업의 회장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축재과정에서 많은 의혹을 받았던 그는 1994년 4월 마침내 탈세 사기를 비롯한 13종의 범죄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돈을 내고 보석을 받아 풀려난 뒤 북키프로스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정치추문 소동은 여기서 시작됐다. 기부금 때문에 법망이 좁혀들자 그의 돈을 받은 사람 중 누구하나 그를 감싸주려 하지 않자 앙심을 품은 네이디르가 도망지에서 잇따라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이선념


1992 - 중국 원로 이선념 사망

중국 전국 인민정치 협상회의 주석 이선념(83)이 1992년 6월 21일 북경에서 사망했다. 이선념은 중국의 정치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이른바 8원로 가운데 한 명으로 중국지도부의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보수파 본류`이다.

그는 지난 1983년 제6기 전인대에서 문화혁명 후 부활된 첫 국가주석으로 선출돼 5년 간 재임했으며

1988년 국가주석을 물러난 뒤엔 정협 주석직을 맡아왔다.

공식전기에 따르면 1909년 중국중부의 호북성에서 출생한 이선념은 27년 공산당에 입당, 1930년대엔 인민해방군 연대장으로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했고 그때 입은 총상으로 평생 다리 속에 총알이 박힌 채 지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호북성 전후복구사업을 맡았고

1954년엔 부총리 겸 재정부장으로 발탁돼 모의 대약진운동을 도왔다.  

리히터 규모 7.3을 기록한 강진으로 폐허가 된 마을.

 

1990 - 이란 대지진, 5만여 명 사망(1990)
1990년 오늘!
이란 북서부 카스피해 인접 지역을 규모 7.3의 대지진이 덮쳐 백30여 개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 지진으로 5만여 명이 사망하고 20만여 명이 부상했다.
이재민도 5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번 지진은 1976년 7월 27일 24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규모 8.3의 중국 당산 대지진 이후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됐다.

 

1990 - 이란 라쉬트 대지진 발생. 5만여명 사망-20여만명 부상

1990년 6월 21일 자정, 이란 북서부 카스피해 인접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5만여명의 사망자와 20여만명의 부상자,

50여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리히터 지진계로 7.3을 기록한 이 대지진은 1백30여개 도시와

마을을 완전히 폐허화시켰으며 수일 동안 3백60여 차례의 여진이 계속돼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79년 회교혁명 이후 폐쇄적인 자세를 보였던 이란 정부도 어쩔수 없이 서방측에 긴급원조를 요청했으며 세계각국은

신속하게 구호의 온정을 전달했다. 이라크와의 8년전쟁에 이은 이 지진참사는 이란을 덮친 또하나의 비극으로 기록됐다. 

1997년 9월 8일 송태호 문체부장관이 세종대왕상 수상단체인 필리핀 노트르담 자선활동기금

미르나 림 대표(왼쪽)와 토고공화국 토고면직회사 아야서르 캄바쿠 사무총장에상장을 수여하고 있다. 

 

1989 - 유네스코, 문명퇴치 공로상인 <세종 대왕상> 만듬

1989 - 유네스코 문맹퇴치 공로상인 `세종대왕상` 창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한국어 이름의 상이 제정됐다. 1989년 6월21일 유네스코 집행위원회는 세계적으로

문맹퇴치에 공헌한 개인 또는 단체에 수여하는 문맹퇴치 공로상의 이름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으로 결정했다.

이날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세종대왕상은 우리 정부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으로, 유네스코 심사위원회가 매년 선발하는

수상대상에게 3만 달러를 한국정부가 상금으로 제공하며 1990년부터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문맹퇴치의 날인 매년 9월 8일 시상하고 있다. 상은 본상과 장려상의 2부문으로 수여된다.

수상대상은 1. 문맹퇴치사업에 직접 종사한 경우 2. 국가 또는 지역 단위의 문맹퇴치사업 종사

3. 문맹퇴치를 위한 언론캠페인 종사 4.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자재개발 생산 5. 문맹퇴치관련 학술연구

6. 문맹퇴치사업계획 수립 및 이를 위한 조사업무 7. 청소년의 문맹퇴치사업 참여유도 8. 문맹퇴치에 공이 있는 언론 등이다.

 

1988 - 소설가 전광용 별세

1983 - 체코 프라하 시민 300여명, 68년이후 처음으로 반정시위

1982 - 반 베트남,캄푸차 연합정권 구성 선언

 

1977 - 이스라엘 새 내각 출범(1977)
1977년 오늘!
이스라엘의 새 내각이 출범한다.
이스라엘의 제6대 신임 총리는 보수우익 정당인 리쿠드당의 당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베긴이 이끈 리쿠그당은 한 달 전 총선에서 시몬 페레스의 노동당연합에게 승리했다.
1949년 1차 총선 이래 28년 만의 정권 교체다.
베긴 총리는 중동 지역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온건파 인물인 모세 다이안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베긴 총리는 이집트와 평화 교섭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1977 - 프랑스 화가 루시엔 쿠토(Coutaud, Lucien) 사망

쿠토 [Coutaud, Lucien, 1904.12.13~1977.6.21] 

1974 - 이슬람제국 외상회의 쿠알라룸프르서 개최, 38개국과 PLO참가

 

1972 - 주한태국군 철수 완료

1972 - 천연기념물 까막딱다구리가 설악산에 서식하고 있음이 밝혀짐

1971 - 국제사법재판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미비아통치 위법판결 

줄리메컵을 든 축구황제 펠레가 월드컵 통산 3회 우승에 기뻐하고 있다. 

 

1970 - 브라질 제9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통산 3회 우승 달성

브라질이 1970년 6월 21일 열린 제9회 월드컵 경기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꺾고 우승해 통산 3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3번째 우승으로 브라질은 줄리메컵을 영구 보관하게 됐다.

결승전은 11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12시부터 멕시코시티 아즈테카경기장에서 열렸다. 시합전에 내린 비로 운동장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양 팀은 전력투구, 멋진 묘기를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전반전은 1:1이었지만 후반들어 대공세를 펼친 브라질이 연거푸 3골을 넣어 이탈리아를 압도했다.

이로써 월드컵 우승 회수는 브라질이 3번, 이탈리아와 우루과이가 2번, 독일과 영국이 각각 1번을 기록하게 됐다. - 조선

 

1970 -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 사망

수카르노 [Sukarno, 1901.6.6~1970.6.21] 

1970 - 미국, 앨버트 크루 원자분리 촬영

 

1970 -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쿠루 교수, 세계 최초로 원자분리 촬영 성공

1968 - 플로리다에서 휴고 빌렌, 1.83m의 보트로 84일 간의 대서양 횡단 항해

1965 - 영국 의회 7백주년 기념식(1965)
1965년 오늘,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영국 의회 개원 7백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된다.
세계 21개 나라의 대표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7백년 전 처음으로 영국 의회를 소집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백작의 공을 찬양한다.
몽포르 백작은 당초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왕의 실정(失政)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그 지도자가 돼

1258년 헨리 3세에게 국정개혁안인 '옥스퍼드 조례(條例)'를 시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이 이를 무시하자 1262년 궐기를 주도하고 1264년 루이스전투에서 왕을 포로로 잡았다.
몽포르 백작은 이듬해인 1265년 1월 귀족·성직자 외에 기사·시민도 참가한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영국 의회의 시초로 기록됐다.

 

1963 - 프랑스, 대서양함대 NATO철수를 통고

1962 -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설립

 

1962 - 러시아의 락 가수 빅토르 최가 태어나다. /위키백과 

1962 - 러시아의 전설적인 락 가수 빅토르 최 출생

빅토르 최 [Tchoi, Viktor, 1962.6.21~1990.8.15]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최(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는

유명한 러시아의 락 가수이며, 전설적인 락 그룹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당시 소련 카자흐 공화국크질오르다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1962년 6월 21일 태어났다.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버스에 치여 요절했다. 빅토리 최는 러시아 락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아직까지도 구소련 국가의 많은 팬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키노의 노래 몇 곡은 윤도현 밴드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불려지기도 했다.

 

1961 - 혁명재판소 및 검찰부 조직법 의결

1960 - 사상초유의 경찰데모 발생

 

1957 - 휴전협정 제B조, D항 (무기반입금지) 폐기

1957 - 191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슈타르크 사망

1957 -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 사망 

1955년 6월 21일 야크18 연습기를 타고 귀순한 북한 공군장교 이운용과 이인선.

 

1955 - 북한 공군 조종사 2명 귀순(1955)
1955년 오늘!
북한 공군 비행기 조종사 2명이 전투기를 몰고 귀순했다.
이운용 대위와 이인선 소위는 소련제 야크-18기를 몰고 북한을 탈출해 서울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다.
두 사람은 귀순 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정치와 사회 실상을 밝혔다.
또 그들이 타고 온 야크기의 성능을 직접 설명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각계 요인과 서울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귀순용사 환영식에서 서울시민증을 받고

부산에서 온 친지들과 극적인 상봉도 했다.

 

1955 - 북한 공군장교 이운용. 이인선 야크기 타고 귀순

1955년 6월 21일 북한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 소속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

두명이 야크18 연습기를 타고 귀순했다.

평양출신이며 소련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운용 상위와 평남 강서군 출신이며 중국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인선 소위 두명은 이날 오전11시경 소속부대인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에서 무단으로 나와 야크18 연습기로 평양을 탈출

, 오후1시30분경 서울상공에 도달해 수차례 선회하며 귀순의사를 밝힌 후 여의도 비행활주로에 착륙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북한의 신문지 및 연락서류를 진남포 앞바다에 있는 초도라는 섬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날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기내에서 탈출을 상의해 그대로 남으로 방향을 틀어 인천을 경유해 여의도공항에

착륙한 것으로 밝혀졌다.

8월 16일 공군본부는 귀순한 이운용, 이인선 장교를 공군으로 정식 편입해 각각 대위와 소위로 임명했다.  

1949년 6월 21일 재정된 농지개혁법 문서.

 

1949 - 농지개혁법 공포(1949)
1949년 오늘 농지개혁법이 제정, 공포됐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해 농지를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 자립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다.
정부는 이 법을 토대로 유상몰수와 유상분배, 즉 자작농이 아닌 사람의 농지를 사들인 뒤

직접 경작할 농민들에게 유상분배할 방침이었다.
이 법은 다음해인 1950년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유예됐다가 1951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농지개혁법은 1994년 12월 22일 제정된 '농지법'으로 대체됐다. -YTN

1949 - 농지개혁법 공포  

1949년 6월 21일 남한에서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이로써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갔고,

수천년간 이어온 지주계급을 몰락했다. 북한이 1946년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
당초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유상분배’안이 집중 논의됐으나

좌익세력의 약화와 농민운동의 분열-쇠퇴에 따라 ‘유상분배’ 토지개혁안이 거의 확정됐다.
국회는 농림부가 작성해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안과 국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농지개혁법안을 비교 검토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1949년 4월 28일 통과시켰다.

재정상의 이유로 정부가 보상액을 일치시켜줄 것을 국회에 요구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하고 이날 공포했다.
그러나 지주층의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로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도 시행에 들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더구나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에 대상농지가 축소됐다. 한편,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가게 한 농지개혁법은 남한에서 6.25때 농민들의 적화를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조선

 

1949 - 농지개혁법 제정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법률 제31호로 제정되었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8·15해방을 계기로 실시되었다.

8·15해방 후 미군정하의 토지정책은 기존의 지주-소작관계를 인정하는 임시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귀속농지는 1948년

'중앙토지행정처'가 설치되면서 분배되기 시작했고, 일반농지는 정부가 수립된 후에 분배되었다. 농지개혁법에 의해 몰수

또는 국유화된 농지와 소유권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정부에 귀속되었다. 1968년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으로 농지개혁은 일단락되었다. 농지개혁이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식민지지주제는 해체되었다.  

LP레코드를 개발한 콜롬비아사 공장의 모습.

 

1948 - 미국 콜롬비아사 LP레코드 첫 공개

미국 콜롬비아사가 개발한 지름 30cm LP 레코드가 1948년 6월 2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종래 1분에 78회씩

회전되는 SP를 대신해 1분에 33과 1/3을 회전하는 이 LP 개발로 연주시간이 최대 25분으로 늘어났다.

더구나 원음에 가까운 사운드를 재생할 수 있어 SP에 비해 음질이 뛰어났다.

LP개발은 음악감상자나 연주자, 가수에게도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1949년 콜롬비아사의 라이벌인 RCA빅터사가 지름 17cm의 45회전 레코드 EP를 발표했다. LP와 EP의 대결은 수년동안 계속됐으나 결국 EP는 SP와 마찬가지로 싱글곡을 수록하는

미디어가 되었다. 이로써 LP의 독주시대는 30여년 이상 계속되다 1980년대 들어 CD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조선

 

1947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한국 참가 승인  

1926 - 제2차 공산당 사건

1921 - 런던서 개최된 영제국회의서 `영연방`결성에 합의

 

1919 - 독일의 대양함대가 스카파플로우에서 집단으로 자침하다.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1919년 6월 21일 영국 해군의 정박지인 스캐퍼플로에서

독일 대양함대가 집단으로 자침한 사건이다.

독일 함대의 스카파플로우 집결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후 독일은 휘하의 모든 잠수함과 약 74척에 달하는 수상함정들의 운명은 연합국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 1918년 11월 19일 독일의 해군 전력은 영국이 지시한 무장해제를 위해 영국 해안으로 항해를 계속하였고 무장 해제를 완료하기 위해 영국의 군항으로 모여들었다. 또한 독일의 모든 어뢰정과 잠수함들은 이미 기뢰를 이용해 침물시킨 후였다.

74척의 독일 함대는 포스(Forth)만에서 11월 21일 영국의 데이비드 비티 제독이 이끄는 25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대를 만나게 되고 영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검사 받는다. 영국 함대는 검사후 독일의 함정들을 영국해군의 정박지인 스캐퍼플로로 인도한다. 그들은 11월 27일에 스캐퍼플로에 모두 입항하게 된다.

12월중순까지 스캐퍼플로의 독일함정의 독일 해군의 수는 2만명에 달하였는데 영국은 독일의 돌발적 행동을 우려하여 4800명만을 함정 관리를 위해 남기고 모두 상륙시켜 수용소로 보낸다. 1919년 6월에는 독일함정 탐승인원을 1700명으로 줄인다.

이 기간 동안 베르사유에서 진행 중이던 평화 회담은 질질끌고 있었다. 연합국들은 독일의 이 최신 함정들을 한척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애썼고(미국과 프랑스가 제일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앞으로 라이벌이 될 영국의 해군력을 따라잡기 위해 독일의 최신 함정을 자국으로 유치하려 한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는 각국의 함정 분배를 명시하려고 하였다.


독일 대양함대, 자침하다

이동안 독일 함대 사령관 루드비히 폰 로이테(Ludwig von Reute)제독은 영국이 언제 경고없이 포격을 가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모든 함선들에 대해 자침을 준비해 놓으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6월 21일 영국의 전함들은 훈련을 위해 스캐퍼플로항을 떠났고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로이테 제독은 휘하의 모든 함정들에 대해 자침을 결정한다.

아침 10시 30분 그는 "제11호 작전 허가"라는 무선을 보낸다. 이 신호는 사전에 약속된 자침을 의미하는 암호였고, 독일 대양함대 소속 군함들은 차례 차례 폭파되었다.

영국 함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 속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단지 전함 바덴호와 3척의 순양함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9명의 독일 선원들이 영국군의 사격에 전사한다. 이 전사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가장 마지막 전사자들로 기록된다.

 

그 이후

40만톤 이상의 함정들이 침물했고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분개했으나, 사실 이 일로 인해 복잡했던 독일 함선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라이벌들(프랑스,미국)은 분배할 함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독일의 함정들을 충분히 분배 받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 정보부는 이 자침결정이 베를린 정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벌였지만

어떠한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독일 해군의 기억 속에 치욕과 수치로 남아 있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사건에 대한

복수로 칼 되니츠 제독의 지시로 독일군 잠수함 U-47스캐퍼플로기습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위키백과

침몰 군함

- 자이들리츠

- 몰트케

- 폰데르탄

- 데르플링거

- 힌덴부르크

전함 : 총 10척

- 카이저

- 프린츠레겐트 뤼트폴트

- 카이저린

- 쾨니히 알베르트

-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 쾨니히

- 그로써 쿠르푸르스트

- 크론프린츠 빌헬름

- 마르크그라프

- 바이에른

기타

- 순양함 5척

- 기타 31척  

 

1914 - 주트너 사망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로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이며 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14 - 오스트리아 소설가, 평화주의자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1914) 사망 

1913 - 미국 죠지아 브로드윅, 여성최초의 낙하산강하 성공

 

1908 -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출생

윤봉길 [尹奉吉, 1908.6.21~1932.12.19]

매헌 윤봉길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때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다. 22세 때에는 월진회(月進會)와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과 민족운동을 더욱 열성적으로 전개하였다.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으로 민족자주독립의 기반을 다지던 윤봉길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 29일 천장절 겸 전승경축 기념식을 옹구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점령 일본군 수뇌부와 정관계 인사들이 여기에 참석하게 되자, 윤의사는 백범 김구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특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단신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군부와 정관계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섬멸하는데 성공하였다. 윤의사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 25일 현지의 군법재판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해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대한민국 문화지도 소구리 Soguri

http://www.soguri.com/seoul-teukbyeolsi/seocho-gu/yangjae2-dong/2004-02/1122067_000_006.html



 

매헌 윤봉길 의사 연보

1908-0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8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수업

1921 (14세)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

1922 (15세)  성주 배(裵)씨 용순(用順) 여사와 결혼

1923 (16세)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8 (18세)  시집 「오추(嗚推)」「옥수(玉睡)」「임추(壬椎)」등 발간

1926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매헌(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시작 

1927 (20세)  「농민독본」(3권) 저술

1928 (21세)  부흥원 설립기념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월례강연회 개최,「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심,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및 수암 체육회 조직

1930-03-06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를 남기시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1930-10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중국 청도에 도착 (처음 어머님께 편지를 송부)

1931-05-08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1931              한인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 및 노동운동

1931 (24세)   김구, 이유필,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 안공근등과 독립 운동

1932-04-26  대한민국 14년에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

1932-04-29  11시40분(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

1932-05-28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932-11-18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932-12-18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

1932-12-19  아침 7시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내용출처 : http://www.yunbonggil.or.kr/main.htm
http://k.daum.net/qna/view.html?qid=2jg5B

 

1908 - 팽크허스트, 부인 참정권을 요구하는 25만인 데모

1908 - 러시아의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하다.  

사르트르, Gisele Freund가 찍은 사진(1968)

 

1905 - 프랑스의 사상가, 소설가, 극작가 사르트르(Sartre, Jean-Paul) 출생

사르트르 [Sartre, Jean-Paul, 1905.6.21~1980.4.15]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 헤겔 및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 등을 실존주의라는 측면에서 종합함으로써, 철학적 이론을 삶과 문학, 정치적 행동 등과 결합시키려 했다. 소설 <구토 La Nausée>(1938)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인간의 실존적 의식 등은 초기 철학 저작인 <존재와 무 L'Etre et le néant>(1943)에서 철학적으로 심화되었다.

그는 인간이란 주어진 규범들에 항거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며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규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했다. 나아가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 참여문학을 주창했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본보기가 되어 정치적 참여에 앞장섰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은 사르트르 특유의 사회주의 이상을 피력한

저서이다. 자서전 <말 Les Mots>(1963)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브리태니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갓 태어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의 과거 행동들의 총화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 이외의 어떤 것을 믿는 것도 맞지 않다.

실존주의적 절망과 고뇌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신이 없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한 의지와 도덕적 통찰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는 선택을 피할 수 없다."

 

- 장 폴 사르트르

 



1904 - 서울에 공중변소 설치  

의화단이 점령한 베이징에 진입 중인 독일군.

 

1900 - 중국 '의화단 사건' 발발

1900 - 중국 외세배척 '의화단 운동' 발발

1900 - 의화단 사건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퉈 중국을 향해 탐욕의 발톱을 곧추 세우던 시기, 중국에서도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 농민집단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부패한 청조, 열강의 침략, 청일전쟁 배상금 등이 불러온 민중의 고통은 의화단의 세력확대를 도와준

자양분이었고, “권법과 봉술을 익혀 주문만 외우면 총탄도 피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문은 이들을 지탱해 준 힘이 됐다.

산둥성에서 처음 일어날 때만 해도 미미했던 세력이 1900년 5월에 부청멸양(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을 기치로 베이징에 입성할 때는 어느덧 20만의 세력으로 커져 있었다. 외국공관이 포위되고 서양 선교사가 피살되는 등 베이징 거리는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고, 철도·전선 등 서양과 관계있는 시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됐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독일·오스트리아 등 8개국이 5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미 톈진이 점령되고 베이징·톈진 간 통신선마저 파괴돼 오히려 고립되는 결과만 낳았다.

처음에는 의화단을 탄압했던 청조도 이들의 힘을 빌려 6월 21일, 열강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군사개입만 자초했다.

 2만명의 연합군이 톈진을 공략한 데 이어 8월 14일에는 베이징까지 점령함으로써 이미 실권자 서 태후가 빠져나가 주인없는 도시가 된 베이징은 연합군의 약탈장으로 변했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일어난 반제운동이었지만 그 실패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청조의 숨통을 빨리 끊어 버렸다.  

미국-스페인 전쟁

 

1898 -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스페인으로부터 을 획득하다.

미국-스페인 전쟁 (영어 :Spanish-American War, 스페인어 :Guerra Hispano-estadounidense)은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스페인 간에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쿠바의 독립 운동이 스페인에 의해서 거부되자 이를 해결할 것을 미국이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내의 강력한 확장주의적 정서가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 그리고 을 포함한 스페인의 잔존 해외 영토를 병합하도록 부추겼다. 아바나에서 일어난 혁명은 미국이 전함 메인 호를 보내 그들의 높은 국가적 관심을 보이도록 자극하였다. 메인 호의 폭발로 미국인들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스페인이 자신의 식민지를 억압하고 있다는 황색 언론은 미국의 여론을 움직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 괌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노예문제로 촉발된 내분으로 남북전쟁을 겪은 후 내부 정비와 북미 대륙 개척에 몰두하던 미국이 그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한국에서는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 흔히 호칭한다.

스페인를 한자로 서반아라고 하기 때문이다.)

 

1893 -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철도 건설자, 상원의원 스탠퍼드(Stanford, Leland, 1824~1893) 사망  

1891 - 이탈리아의 건축공학자 네르비(Nervi, Pier Luigi, 1891~1979) 출생

 

1883 - 러시아의 작가 글라트코프(Gladkov, Fyodor V., 1883~1958) 출생

1870 - 청나라, 천진구교사건 발생

1863 - 228개의 소행성을 발견한 독일의 천문학자 볼프 출생

 

1856 - 일본의 서양화가 아사이 주(淺井忠, 1856~1907) 출생

1852 - 독일 교육가 프뢰벨 사망

1852 - 독일의 유치원 창시자, 교육개혁가 프뢰벨(Friedrich W, A. Froebel, 1782~1852) 사망

 

1839 - 브라질의 시인, 소설가 마차도 데 아시스(Joaquim Maria Machado de Assis, 1839~1908) 출생

1832 - 시조시인 이세보 출생  

웰링턴, Francisco de Goya가 그린 초상화(1812)

 

1813 - 웰링턴에 패한 나폴레옹, 프랑스로 줄행랑

1813 - 비토리아 전투 발발

1813년 6월 21일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과 영국·스페인·포르투갈 동맹군 사이에 벌어진 반도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인 비토리아 전투가 일어났다. 반도전쟁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러 지방에서 오랫동안 전투가 계속되면서 프랑스군은

병력과 물자가 부족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포르투갈을 방어하던 영국의 웰링턴이 1812년 스페인으로 진군했다.

결국 1813년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던 영국·스페인·포르투갈 동맹군과 조제프 보나파르트 왕이 지휘하던 프랑스군이 전선에서

맞섰다. 프랑스군은 힘겨운 전투 끝에 무너지고 팜플로나로 퇴각했다. 동맹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바스크 지방을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피레네 산맥 너머까지 퇴각했다.

 

1813 - 반도 전쟁: 비토리아 전투가 벌어지다.

비토리아 전투1813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에 스페인에서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동맹군이 프랑스군을 최종적으로 격퇴시킨 결정적인 전투이다.





전투 과정

전투는 웰링턴 공작 1세 아더 웰즐리가 지휘하는 5만 7000명의 군사와 대포 150문을 이끌고 나폴레옹의 형이자

스페인조제프 보나파르트주르당이 지휘하는 7만 2000명의 군사와 대포 90문을 이끌고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비토리아 분지에서 진을 쳤는데 분지의 길이는 19km의 길이에, 11km의 깊이 정도의 산맥이 둘러싸여 있었고

북쪽과 서쪽에는 사도라 강이 막고 있어 강에는 허술한 다리 몇개가 놓여있었다. 6월 21일 오전 8시가 지나자 동맹군은 4개 대열로 진격을 개시했고 서쪽에서는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 프랑스군 좌익과 중앙을 비토리아 분지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프랑스군 우익은 힘겨운 전투 끝에 무너졌고 오후 7시경 프랑스군은 막대한 전리품, 배낭, 대포 전부를 남겨두고 팜플로나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5000명, 프랑스군은 8000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생겼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동맹군은 바스크 지방을 장악하고 프랑스군을 피레네 산맥 넘어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1806 -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지라르댕(Emile de Girardin, 1806~1881) 출생

1646 -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 Gottfried Wilhelm von) 출생

라이프니츠 [Leibniz, Gottfried Wilhelm von, 1646.7.1~1716.11.14]

 

1633 - 교황청, 지동설 주장한 갈릴레이(Galileo Galilei)에게 유죄 선고

1633 - 교황청이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에게 유죄 선고함

이탈리아 정치가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지은

그는 강력한 실리 정치를 통해 근대 국가의 전범(典範)을 제시했다.

 

1527 - '군주론' 마키아벨리 사망 

1527 -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사망

1527 - `군주론` 저자 마키아벨리 사망

마키아벨리 [Machiavelli, Niccolò, 1469.5.3~1527.6.21]

정치행위의 냉혹한 일반이론을 제시한 비수 같은 이성의 소유자, 마키아벨리가 1527년 6월 21일 사망했다. 58세였다.

종교를 정치의 수단쯤으로 치부하고 윤리를 군주의 화장술인 양 묘사한 마키아벨리였다.

사상사에서의 그의 공적은 정치영역이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나아가 정치행위가

종교적 규율이나 도덕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한 데 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29세 때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장을 맡아 내정과 군사를 담당했으며,

대사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1512년 한동안 쫓겨났던 메디치가가 피렌체로 복귀, 권력을 잡으면서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정계에서 축출됐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정치적으로는 불운했다.
그의 대표작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작은 공직에서 밀려난 그가 자신의 무력한 처지에 대한 울분과

공직 복귀에 대한 가망없는 기대 속에서 써내려간 불행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특히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저작물로, 그는 이 책에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및 에스파냐 등 강대국과 대항해 강력한 군주 밑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가 죽자 로마 교황청은 ‘군주론’을 비롯한 그의 저서 전부를 금서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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