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담배산업 규제법에 서명
'금연 실패' 오바마 담배규제법 서명
니코틴 함유량 제한·학교주변 광고 금지등 규정
금연을 약속하고도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2일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담배규제법에 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법안에 서명하기 전 연설에서 “흡연자의 90%가 18살 이전에 흡연을 시작하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기에, 담배를 오래 피우면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어 담배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미국에서 매년 40만명 이상이 담배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800만명이 담배 때문에 한가지 이상의 질병을 앓고 있어 이로 인한 비용이 한해에 1억달러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새 담배규제법은 담배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며, 청소년 흡연을 줄여 흡연 인구를 줄여나가겠다는 목적이다. 현재 미국인의 흡연률은 20% 수준이다.
수십년 동안 궐련을 피워온 오바마 대통령이 담배 규제법에 서명한 것은 아이러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때 하루 7~8개피를 핀 적이 있고 선거운동 기간에도 가끔 한모금씩 피웠다고 실토한 적이 있지만, 개혁의 일환으로 담배규제에 나섰다. 반면 기본적으로 비흡연자였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강력한 담배산업의 로비 때문에 법안에 반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청소년들이 담배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며, 담배회사들의 공세적 마케팅의 표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되는 ‘가족흡연 예방 및 담배규제법’은 사상 처음으로 식품의약국(FDA)이 담배의 광고와 판매, 제조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두는 권한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식품의약국은 담배 제품의 성분을 평가해 니코틴 함유량을 제한할 수 있고, 청소년들을 유혹하기 위해 화학적 향기를 가미하는 것 등도 규제하게 된다. 학교 주변 1000피트 이내에서 담배광고가 금지되며, ‘라이트’, ‘마일드’, ‘저타르’ 등 담배 유해성을 감추는 문구를 쓸 수 없게 된다. 또, 흡연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대형 경고문구와 그래픽 경고라벨을 담뱃갑에 표시하도록 했다.
서명식을 마치고 돌아선 오바마 대통령은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웠냐”는 기자의 질문에 뒤돌아보긴 했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최근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니코틴 유혹에 대한 투쟁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담배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음을 시사했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한겨레 2009-06-23 오후 08:34:1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62022.html
2002 - 한국 월드컵 4강 진출
한국, 아시아 첫 '4강 신화' 달성.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에 5대 3 승리
이제 더 이상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23명 태극전사의 땀과 투지,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4700만 국민적 열망이 함께 어우러진 `아시아의 힘`이었다. 한국이 2002년 6월 2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IFA랭킹 8위인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120분 연장사투 끝에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5―3으로 이겨 아시아 첫 4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은 전반부터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던 빠른 측면돌파가 촘촘히 망을 친 스페인의 수비에 힘을 잃었다. 오히려 제공권을 빼앗기며 여러 차례 실점위기를 내줬다. 그러나 그때마다 수문장 이운재의 선방이 빛났다. 모리엔테스, 데페드로, 이에로, 호아킨 등의 날카로운 슈팅을 정확한 위치선정과 순발력으로 막아냈다. 후반 15분 유상철 대신 이천수를 투입하며 공격의 활로를 튼 한국은 박지성과 이천수의 슛 등으로 맞서며 연장까지 0―0 공방전을 펼쳤다.
한국은 승부차기에서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이 모두 골을 넣고, 이운재가 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 호아킨의 슛을 막아냈다. 마지막으로 주장 홍명보가 침착하게 찬 볼은 오른쪽 네트에 시원하게 꽂혔다. 한국의 `파워사커`가 다시 한번 전 세계를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조선
2001 - 성악가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 국내 첫 합동 공연
'3대 테너 콘서트' 관중 열광 속 개최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 3대 테너'의 첫 한국 합동공연이 22일 오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4만5천여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려하게 개최됐다.
예정시간보다 약 30분 늦은 오후 8시에 시작한 이날 콘서트는 '음악회라기보다 상업적인 쇼'라는 일부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3대 테너'가 한 무대에 서는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의 열띤 호응 속에 진행됐다.
야노스 악스가 지휘하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캔디드 서곡」 연주로문을 연 1부에서는 카레라스-도밍고-파바로티가 차례로 출연, 피에트리의 오페라 「마리스텔라」중 '한 정원을 알고 있네', 푸치니의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중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전해주오', 「토스카」중 '오묘한 조화'를 돌아가며 불렀다.
가스탈돈의 '금지된 노래'와 소로자발의 「항구의 선술집 여주인」중 '냉정한여인이 될 수 없네', 라라의 '그라나다'를 역시 카레라스-도밍고-파바로티 순으로부른 이들은 1부 마지막 순서에서 '마리아 마리' '카니발의 아침' '물망초' 등을 합창,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20분간의 휴식 뒤에 이어진 2부에서는 주옥같은 오페라 아리아인 칠레아의「아를의 여인」중 '페데리코의 탄식', 푸치니의 「토스카」중 '별은 빛나건만', 「투란도트」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카레라스-도밍고-파바로티가 차례로 열창,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특히 파바로티가 특유의 청아한 미성으로 하이 B음까지 올라가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무시무시한 마지막 악구를 힘차게 마무리하자 카타르시스를 느낀 청중들이 일제히 '브라보'를 외치며 열광했다.
'3대 테너'의 삼중창으로 이어진 「세계 민요 메들리」에서는 '마레키아레' '산타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 친숙한 칸초네곡의 멜로디가 청중들을 매료시켰으며 뒤이은 「할리우드 메들리」에서는 '마이웨이' '투나잇' '문리버' 등 귀에 익은 영화 주제가를 열창, 박수와 환호를 자아냈다.
「할리우드 메들리」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났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관중의 환호와 기립박수가 계속되자 테너들은 베르디의 「리골레토」중 '여자의 마음'과 카푸아의 '오 나의 태양' 등 2곡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한편 이날 메들리곡의 반주자로 특별출연할 예정이던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개인사정으로 막판에 출연이 무산돼 아쉬움을 남겼으며 앙코르곡으로 부를 것으로 기대됐던 한국 가곡도 부르지 않았다.
2시간여에 걸친 이날 공연은 MBC TV를 통해 생중계됐으며 공연이 끝난 뒤에는약 5분간 주최측이 준비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져 한껏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밤 11시가 다 돼 공연을 마친 '3대 테너'는 바쁜 일정 때문에 숙소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인천국제공항으로 직행, 내한할 때 타고 온 전용기편으로 다음날 공연이 예정돼 있는 중국 베이징으로 떠났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1.06.22(금) 23:17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6/009000000200106222317110.html
1986 - 마라도나 ‘신의 손’ 논란
[어제의 오늘]1986년 마라도나 ‘신의 손’ 논란
ㆍ멕시코월드컵 8강전 ‘손’으로 득점
아르헨티나에는 독특한 종교가 있다. 이름하여 ‘마라도나교’. 1998년 아르헨티나의 전설적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의 38번째 생일에 그의 열성팬이 창시했다고 한다. 신도들은 마라도나를 숭배하는 ‘주기도문’을 외며, “그가 착용했던 유니폼을 경외하라” “아이들 이름에 디에고를 넣어라” 등의 ‘십계명’을 따른다. 성당 모형의 신주 꼭대기에는 축구화를, 종탑에는 축구공을 매단다.
1986년 6월22일 멕시코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 대 잉글랜드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든 ‘신의 손’ 사건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스포츠 경기는 한·일전과 같은 대표적인 앙숙 경기다. 82년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는 포클랜드(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 섬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양국은 이 섬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영유권 분쟁을 벌여왔고,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타개하기 위해 섬 탈환 전쟁을 택했다. 74일에 걸친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참패로 끝났다. 이 전쟁을 치른 지 불과 4년이 지났으니 당시 월드컵 무대에서 만난 양국 분위기는 짐작할 만하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존심 회복을 바라는 국민적 염원을 안고 경기에 나섰다. 양국이 득점 없이 맞서던 후반 6분, 기회가 왔다. 골키퍼와 1 대 1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공중에 뜬 공을 손으로 쳐 넣었다. 주심은 이를 보지 못했다. 마라도나는 다시 4분 만에 혼자서 경기장 중앙부터 수비수 5명과 골키퍼를 잇달아 제치고 아르헨티나에 두번째 골을 안겼다. ‘20세기 월드컵 최고의 골’로 꼽히는 멋진 골이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는 2-1로 승리했다.
경기 후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마라도나는 “그것(첫 골)은 나의 손이 아니었다.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도 반칙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대국에 맞선 모국의 설움을 풀어준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남았다.
그해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해결사 역할을 하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다. 24년이 지난 2010년,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월드컵 무대에 다시 섰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유명한 두 골을 만들어낸 마라도나. 그가 만들어낼 축구 드라마에 축구팬들의 눈이 쏠려 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6-21 17:26:4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6211726445&code=100100&s_code=ap005
1981 - 이란 호메이니, 바니 사드르 대통령 해임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1981년 6월 22일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을 해임했다. 호메이니의 해임선언은 정치적 매장과 신변불안을 함께 의미했다. 사드르는 결국 7월 29일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호메이니의 전폭적인 신뢰로 지난 1980년 1월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온건파 바니 사드르가 해임되고 망명해야 했던 이유는 강경파인 회교혁명평의회(IRP)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은 온건파 사드르를 제거키로 결정한 IRP가 1981년 3월 5일 사드르 연설장에서 소란을 피우자 사드르 지지파와 이들간에 충돌사건이 발생,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부터였다. 이 사건후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는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총동원돼 사드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사드르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 은신에 들어갔다. 6월 20일 혁명검찰부는 체포령을 내렸고 호메이니는 이날 그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했다. /조선
1974 - 프랑스의 작곡가 미요(Milhaud, Darius) 사망
미요 [Milhaud, Darius, 1892.9.4~1974.6.22]
프랑스의 작곡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1909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전공하였으나 다시 작곡에 전념, 뒤카와 댕디 등에게 사사하여 재학시절부터 창작력에 넘친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시인 외교관 클로델의 비서로 브라질에 체재하면서 그 곳 민족음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한 뒤 1920년에는 이른바 ‘6인조’가 탄생하여 그는 그 일원으로 오네게르와 함께 활발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망명하였으며, 대전 후에는 격년으로 도미하여 작곡의 교편을 잡는 한편, 1962년까지 파리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있었다.
다조(多調) ·복조(複調)에 의한 폴리포니를 특징으로 하였고, 모든 음계를 친근하기 쉽도록 선율과 불협화음을 교묘하게 융합하고 있다. 클로델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크리스토프 콜롱》(1928), 발레음악 《옥상의 황소》(1929) 《세계의 창조》(1923), 관현악곡 《브라질의 추억》(1921) 《프로방스모음곡》(1936)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방대한 작품이 있다. /naver
1973 - 남해대교 개통
우리나라 3번째 큰 섬인 남해와 경남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남해대교(南海大橋)가 1973년 6월 22일 오전 11시 개통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은 이 남해대교 개통식에는 건설부장관 등 정부고위층과 건설공사관계자 및 현지주민들이 참석했다. 길이 660m, 폭 12m의 새 남해대교는 우리나라 첫 현수교(서스펜션 브리지= 적당히 늘어지게 친 케이블이 본체를 구성하는 다리)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케 됐다. 지난 1968년 5월에 착공, 만 5년 만에 준공된 이 다리는 18억7천만원을 들여 세웠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14만명의 인구를 가진 남해섬의 화방사, 용문사, 상주해수욕장 등 관광지가 크게 각광을 받게 됐다. /조선
1973 - 첫 유인우주실험실 스카이랩에서 우주인 3명이 28일간의 우주체재 기록 세우고 귀환
스카이랩계획 [Skylab Program]
아폴로계획 다음으로 추진된 미국의 유인 우주정거장 계획.
아폴로응용계획이라고도 한다. 스카이랩은 'sky laboratory(실험실)'의 약어이다. 1973년 5월 14일 새턴 5형 로켓 3단을 거주할 수 있게 개조한 우주정거장(스카이랩)이 발사되었고, 같은 달 25일 3인승 개량형 아폴로우주선이 발사되어 스카이랩과 도킹해 탑승원은 스카이랩으로 옮겨 타고 28일간 생활한 다음 돌아왔다. 7윌 28일 제2차 팀이 발사되어 59.5일간 머물렀고, 제3차 팀은 11월 16일 발사되어 84일 동안 그곳에서 생활했다.
우주 체제 중에 의학·생리학적 측정, 천체물리·지구자원 등의 관측이나 실험, 무중량 상태에서의 야금(冶金)이나 생물학적 실험에 성공하고 많은 연구 데이터를 얻었다. 발사되었던 스카이랩은 예상보다 빨리 궤도의 고도를 낮추어 1979년 7월 12일 남대서양 상공에서 대기권으로 돌입하여 타버렸고 남은 파편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서부에 추락하였다. /네이버
1973 - 미소핵전쟁방지협정(美蘇核戰爭防止協定) 체결
미소핵전쟁방지협정 [美蘇核戰爭防止協定]
1973년 6월 22일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 R.M.닉슨과 소련 공산당 서기장 L.I.브레주네프가 서명한 핵전쟁방지에 관한 미·소 간의 협정.
1972년 5월 29일 미·소 양국 정상이 모스크바에서 조인한 ‘미·소관계의 기본원칙’에서 발전된 것으로, 이 원칙에 천명된 “두 국가는 군사적 대결을 피하고, 핵전쟁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한다”는 합의 아래 맺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전문과 본문 8개조로 되어 있고, 조인과 동시에 발효되었는데, 유효기간은 무기한이다.
쌍방의 정책목표가 핵전쟁·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상호간 및 제3국과의 사이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행동하기로 약속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행사(行使)를 삼가는 전제(前提)에서 출발할 것, 핵전쟁의 위험이 있을 때는 긴급히 협의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협정 체결로 핵전쟁포기가 선언된 것은 아니다. /naver
1969 - 미국의 뮤지컬 가수, 배우 주디 갈런드(Garland, Judy) 사망
갈런드 [Garland, Judy, 1922.6.10~1969.6.22]
미국의 포퓰러가수·여배우.
본명은 프란시스 에셀 검. 미네소타주 그랜드 래피즈 출생. 3세 때부터 무대에 섰으며(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제가인 《무지개의 저편에서》는 그녀의 테마 음악이 되었다. 연기와 노래에 뛰어나 뮤지컬·영화 등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주연 영화로는 《부활절 퍼레이드 Easter Parade》(1942), 《스타 탄생》(1954) 등이 있다. /naver
1965 - '한·일 기본조약' 조인
[어제의 오늘]1965년 ‘한·일 기본조약’ 조인
ㆍ국민 무시한 외교… 일본의 情夫였던가
‘너는 무엇이 무서우냐? 네 생명은 동물적 생명에 있느냐, 국민적인 정신에 있느냐? 너는 정말 이 나라의 정부(政府)냐? 일본의 정부(情夫)냐?….’
함석헌 선생은 1964년 4월 ‘사상계’ 특별호에 한·일회담을 밀어붙이던 정부를 향해 “매국적 외교를 집어치워라”며 이같이 소리쳤다. 한·일회담 반대는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 집회에 70여만명이나 몰린 것은 국민 여론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부는 여론을 챙기기보다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며 경찰력 등 힘을 앞세웠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식인과 학생·재야인사들의 구속을 통해 입을 막았다. 이른바 ‘6·3사태’다.
정부는 65년 오늘, 부당성을 지적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한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 사이에 합의한 ‘김-오히라 비밀메모’까지 동원됐다. 외무장관 이동원·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스사부로·회담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 사이에 조인된 조약은 기본조약과 4개의 부속협정, 25개의 관련 문서로 구성됐다.
부속협정은 양국연안 12해리의 어업전관수역 설정 등을 담은 어업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 협정, 무상자금과 차관 제공의 재산·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 문화재 반환 등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협정이다. 이 한·일협정은 당시나 지금이나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게 전반적 평가다.
무엇보다 ‘삼무(三無) 회담’이란 조롱과 비판에서 보듯 일본의 강제침탈에 대한 사죄나 배상, 독도의 한국 영유권에 관한 표현이 없다. 어업협정은 지금도 논란을 낳고 있고, 극히 일부 환수에 그친 문화재협정은 오히려 강탈당한 문화재를 일본 소유물로 인정해주는 꼴이 됐다. 강제 징용·징병, 강제종군위안부 등도 언급되지 않았다.
한일기본조약은 40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논란을 부르고 있고, 일부 학자들은 아예 새 조약 체결을 강조할 정도다.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역사나 시대적 안목 없이 정권적 차원에서 조인된 외교관계가 얼마나 큰 파장을 낳는지를 한일기본조약은 잘 보여준다. 정치는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말해준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200906211759235&code=100100&s_code=ap005
1964 -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Brown, Dan) 출생
브라운 [Brown, Dan, 1964~ ]
댄 브라운(Dan Brown, 1964년 6월 22일 - )은 미국의 소설가이다.
앰허스트 대학을 졸업했다. 필립스엑스터아카데미의 영어 교사로 있었다.
1998년 소설 《디지털 포트리스(Digital Fortress)》로 데뷔했다. 2000년 《천사와 악마》를 썼으며, 2003년에 출판한 《다빈치 코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 《디셉션 포인트》도 있다. /위키백과
1948 - 우리나라 첫 올림픽선수단 런던으로 출발
[분수대] 런던 올림픽 /사설칼럼
1948년 6월, 대한민국은 아직 미군정 체제였지만 올림픽은 출전할 수 있었다. 이상백 조선체육회 이사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브런디지 부위원장을 끊임없이 설득한 덕분이다. 브런디지 부위원장의 부탁을 받은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하지 한국 주둔군 사령관에게 협조를 요청해 일은 성사됐다.
국내 선발대회를 거쳐 6개 종목에 출전할 67명의 선수단을 꾸렸다. 국민의 성원은 대단했다. 올림픽후원회는 공채(公債) 격인 올림픽 선수 후원권 140만 장을 발매해 참가 경비를 조달했다. 제헌국회는 선수들에게 보내는 격려 메시지를 채택했다.
선수단은 출정일인 21일 아침 서울 종로 2가의 YMCA회관에 모여 단체복으로 갈아입고 서울역까지 가두행진을 했다. 남대문로에 늘어선 시민들은 “이겨서 돌아오라”고 뜨겁게 성원했다. 선수들은 한결같이 감격과 함께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선수단이 부산항을 출발한 것은 6월 22일이었다. 여권 대신 종이에 타이프로 친 신분증명서를 지참했다.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요코하마에서 여객선을 탄 이들은 7월 2일에야 홍콩에 도착했다. 유럽행 항공기는 정원 40명의 프로펠러기여서 선수단은 1, 2진으로 나누어 출발해야 했다. 항공기는 방콕(태국), 콜카타(인도), 바그다드(이란),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등 공항마다 착륙한 끝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에 내렸다. 선수단이 런던에 도착한 것은 7월 11일 저녁, 서울역을 떠난 지 21일 만이었다. 최초로 ‘한국’ 국명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여름올림픽, 14회 런던 올림픽 선수단의 ‘장도(長途)’였다.
한국이 메달을 기대한 종목은 마라톤이었지만 기나긴 여행에 지친 선수들은 20위권 밖에 머물렀다. 대신 역도의 김성집 선수와 복싱의 한수안 선수가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은 동메달 2개로 59개국 중 24위를 기록했다. 아시아권에서는 금메달 한 개를 기록한 인도 다음으로 좋은 성적이었다.
그로부터 60년 뒤에 열린 베이징 올림픽이 며칠 전 끝났다. 날마다 이어지던 메달 소식에 환호하던 국민들은 이제 올림픽 금단 증상까지 느끼고 있다. 4년 후 런던 올림픽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런던은 국제 경기 룰을 몰라 다른 나라 선수들의 연습 장면을 곁눈질하고, 복싱 경기 시간이 바뀐줄 몰라 저녁도 굶고 링 위에 올랐던 첫 선수단의 추억과 회한이 서린 곳이다. 이제는 전세기를 타고 10시간이면 갈 수 있다.
[조현욱 논설위원
조현욱 기자 [poemlove@joongang.co.kr] 2008.08.27 01:25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275568
1941 - 독일, 소련 침공
[어제의 오늘]1941년 독일, 소련 침공
ㆍ히틀러, 세계제국 꿈꾸며 공격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어마어마한 전쟁보상금을 갚아야 했다.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세계대공황의 여파를 타고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된 아돌프 히틀러는 세계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독일이 당면한 문제를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설명했던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으로 영토확장을 계속하며 세계제국 경영을 꿈꿨다. 독일은 신속한 기갑부대를 앞세워 유럽 각국을 침략했고 점령국을 확장해갔다. 마침내 유럽문화의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 히틀러는 의기양양해져서 영국 공습까지 감행했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소련이었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은 1939년 독일-소련 상호 불가침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지만 ‘적과의 동침’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영국, 지중해, 중동 사막 등지에서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히틀러는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수립했다.
바르바로사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으로 동방개척에 관심이 많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 소련은 당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서 앞선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했다.
히틀러의 목표는 공산주의자의 제거와 더불어 소련 남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돈 강 일대의 산업지대, 유전이 있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해 경제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41년 6월22일 새벽, 히틀러는 300만 병력의 독일군을 앞세워 소련을 침공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1812년 세계제패를 꿈꾸던 나폴레옹이 제2차 폴란드 전쟁을 공표하고 러시아를 침공한 날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전차 3300대, 중포 7000문으로 무장하고 2000대의 항공기를 투입해, 개전 첫날 소련의 항공기 1200대를 파괴했다.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를 목표로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작전을 수행했지만 전세는 여름까지만 독일에 유리했다.
독일이 러시아 서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여러 정황을 포착했으면서도 이를 믿지 않던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독일의 선제공격에 당황했지만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나폴레옹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던 춥고 긴 소련의 겨울 앞에 히틀러의 독일군 역시 무력했다. 가을철 폭우로 노면이 진흙탕이 되자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기동성은 떨어졌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기후 앞에 전력은 쇠퇴해갔다. 병력 분산과 보급품 수송의 어려움, 다른 전선에서의 변수 등으로 인해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패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유럽 전선의 주도권은 소련에 넘어갔으며, 이는 이후 나치 독일의 패배 원인이 됐다.
전 세계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세계대전. 전쟁은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가져왔지만 이 때문에 평화를 위한 연대의식 또한 고취시켰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비롯되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유네스코 헌장 중)
윤민용 기자 /매일신문 2011-06-21 21:35:0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6212135095&code=100100
1937 - 루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
1937년 6월 22일 미국 시카고에서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가 제임스 J. 브래독에게 8라운드 KO로 승리를 거두어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루이스는 1949년 3월 1일 은퇴할 때까지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해 당시 헤비급 역사상 최장수 챔피언이었다. 무려 25차례의 방어전을 치렀으며 그 중 21번은 KO승을 거두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복싱을 시작한 루이스는 1934년 7월 4일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1939~42년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이 저조해 에자드 찰스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1951년 10월 26일 벌어진 마지막 경기에서는 로키 마르시아노에게 8라운드 KO패를 당했다. 말년에 루이스는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현관 안내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912 - 한국화가 장우성(張遇聖) 출생
장우성 [張遇聖, 1912.6.22~2005.2.28]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호 월전(月田). 경기도 여주 출생. 1933년 육교한어학교(六橋漢語學校)를 졸업하고 1937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후, 1941∼1943년 연속 특선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1946∼1961년 서울 미술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1964년에는 미국 국무성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9년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1970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에 취임하고 그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그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이 되고, 1971년부터 홍익대 미술대 교수, 동 미술학부장을 역임했다.
작품으로 아산 현충사 및 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영정(李忠武公影幀)》, 바티칸궁전 소장 《성모자상(聖母子像)》, 경주 통일전 《김유신장군 초상화》, 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 천지(白頭山天池)》, 예산 충의사(忠義祠) 《윤봉길의사영정》과 《고사도(高士道)》 《김유신장군상(金庾信將軍像)》 등 다수가 있다. /naver
(유관순 열사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제작해 1986년 8월 15일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되었는데,
2007년 2월 28일 석천 윤여환 화백이 그린 새 표준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
1909 - 해군 제독 손원일(孫元一) 출생
손원일 [孫元一, 1909.6.22(음력 5.5)~1980.2.15]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으로 우리 민족은 35년간의 치욕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해방과 동시에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왔던 이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훗날 초대 해군총참모장(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손원일(孫元一)제독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장을 지낸 손정도(孫正道) 선생의 장남으로 1909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서 3년간 수학한 바 있는 손원일 제독은, 1930년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으로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이듬해 풀려나 중국으로 갔다가 조국 광복과 동시에 귀국하게 된다.
손원일 제독은 정긍모(鄭兢謨) 선생 등과 함께 1945년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를 조직하고, 서울 관훈동에 사무소를 마련하여 대원들을 모집, 항해과와 선박기관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했다. 그 후, 설립 당시부터 계속되어온 재정난 극복을 위하여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가입하는 등 탈출구를 모색하던 중, 석은태(石銀泰) 선생이 이끄는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과 통합, 명칭을 조선해사협회(朝鮮海事協會)로 개칭한다.
미군에 의해 군정(軍政)이 선포되고 군정청(軍政廳)이 설치되면서, 해사협회는 군정청을 방문하여 해사협회가 해사관계에 있어 한국내 유일한 단체임을 인식시키고, 이에 군정청에서는 손원일 제독을 직접 만나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이 가능한지를 문의해온다. 손원일 제독은 군정청과의 협상을 시작, 군정청과의 합의 하에 훗날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 영문명 : Korean Coast Guard)을 1945년 11월 11일 결성, 초대 단장에 취임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삼가 이몸을 바치나이다"라는 표어 아래, 바다의 신사로서의 해군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선비 사(士)’자를 형상화(‘十’ + ‘一’)하여 정해진 이 날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기념일로 기려지고 있다.
1946년 해안경비대(海岸警備隊) 교장과 총사령관을 거쳐, 1947년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 1953∼1956년 국방부장관을 지내고, 1957∼1960년 주 독일대사를 역임하였다. 1970년 대한윤활유 사장, 1972년 홍보협회장(弘報協會長), 1972∼1974년 한국반공연맹(현재의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과 고문을 지내고, 1976년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외교·사회 등 각 방면에서 공헌하였다.그는 생전에 군인으로서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 받아 무공훈장, 미국 은성훈장, Legion of Merit, 태극무공훈장, 금성을지무공훈장, 공비토벌기장, Denmark Redcross Medal, US Medal, 6.25 종군기장, 국제연합 종군기장 및 금성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해군자료실
http://www.navy.mil.kr/pds/navyhistory/history_6.jsp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 10주년 우표'의 발행을 위해 애쓰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1906 -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제작자 빌리 와일더(Wilder, Billy) 출생
와일더 [Wilder, Billy, 1906.6.22~2002.3.27]
[역사 속의 인물] 코미디 영화의 대가 빌리 와일더
우리는 메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을 기억하지만, 감독이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메릴린 먼로가 지하철 환풍구의 바람에 확 뒤집어진 치마를 부여잡는 것은 ‘7년 만의 외출’(1955년)에서였고,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가 한껏 드러나는 것은 ‘사브리나’(1954년)였다.
감독은 코디미 영화의 대가인 빌리 와일더(1906~2002)다. 1906년 오늘, 오스트리아 시골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시나리오를 썼다. 자신의 각본을 망쳐놓은 감독들의 저급한 연출력에 분노해 1942년부터 감독 겸업을 했다. 1950`60년대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이끌며 두 개의 아카데미 감독상과 세 개의 각본상을 받은 위대한 감독이 됐다.
혼자 글 쓰는 걸 싫어했는데 보조 작가의 아이디어가 시원찮으면 심한 모욕을 주고 내쫓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영화는 탄탄한 줄거리에 시원스런 대사가 쏟아져 나오는 격조 있는 코미디물이 됐다. 코미디보다는 초기 작품인 ‘이중배상’(1944년)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살인에서도 인동꽃 향기가 난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라는 대사와 함께….
박병선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6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2407&yy=2011
1859 - 일본의 극작가, 소설가, 비평가, 번역가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 출생
쓰보우치 쇼요 [坪內逍遙, 1859.6.22~1935.2.28]
일본의 극작가·소설가·비평가·번역가.
약 반세기 동안 일본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본명은 쓰보우치 유조[坪內勇蔵]. 최초의 본격적인 현대 일본문학 비평서인 〈쇼세쓰신즈이 小說神髓〉(1885~86)를 썼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전(全)작품을 번역해냈다. 현대적인 일본 연극 육성에 힘썼으며,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유명한 교수였다. 나고야 근처에서 무사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1883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880년대에 월터 스콧, E. G. E. 불워리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9권의 소설과,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많은 정치우화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쇼세쓰신즈이〉에서 그는 당시 일본 소설의 약점인 치밀하지 못한 구성과 빈약한 묘사를 공격했으며, 사실주의에 입각한 성격 분석에 힘을 쏟을 것을 작가들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으로서 당시 몇 명의 대학생들이 겪은 어리석은 체험을 그린 〈도세이쇼세이카타기 當世書生氣質〉(1885~86)도 그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1883년부터는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도쿄 전문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890년 이 학교에 문과를 개설하는 데 힘썼다. 또한 와세다 중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고 나중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891년에는 문학잡지인 〈와세다분가쿠 早稻田文學〉를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했다. 쇼요는 일본에서 신극운동을 창시한 사람 중 하나이다. 이 운동은 헨리크 입센과 조지 버나드 쇼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으며, 일본의 작가들이 현대 연극을 쓰는 표현수단을 마련해주었다. 1915년 와세다대학에서 퇴직한 뒤에는 여생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번역하는 데 바쳤다. /브리태니커
1845 - 뉴질랜드의 정치가 세든(Seddon, Richard) 출생
세든 [Seddon, Richard (John), 1845.6.22~1906.6.10]
뉴질랜드의 정치가.
총리 시절(1893~1906) 자유당 내각을 이끌면서 정착문제·노동자보호·노후연금 등 개혁입법을 추진했다.
영국의 철강주물공장에서 일하다가 1863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빅토리아 주의 벤디고 금광에서 일했다. 1866년 금광채굴을 위하여 뉴질랜드의 호키티카로 옮겨갔고 1869년 금광지대에서 일단의 분쟁이 발생하자 광부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지방정치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1879년 의회에 진출한 뒤, 존 밸런스가 이끄는 자유당 내각(1891~93)의 광업·공공사업 장관이 되어 공공사업과 관련한 정부의 수의계약 관행을 폐지했다. 1893년 밸런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면서 여성참정법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켰고, 윌리엄 펨버 리브스와 존 매켄지를 비롯한 유능한 전임 각료들의 보좌를 받았다. 세든의 지도 아래 리브스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산업중재조정법(1894)을, 매켄지는 소농에게 혜택을 주는 토지법(1894)을 제정했다. 노후연금법(1898)은 세든의 가장 큰 입법 관련 공적이었다. 그의 외교정책은 제국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는 피지 제도를 뉴질랜드에 통합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1901년 쿠크 제도의 합병에 성공했다. 원주민인 마오리족으로부터 광활한 토지를 사들였으며 동양인의 이민을 반대했다. 열렬한 친영파로서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2) 당시 지원군을 파견했으며 모국인 영국과의 무역에는 특혜관세를 적용했다. 리브스(1896)와 매켄지(1899)가 사임한 뒤에는 여러 장관직을 겸임했으며, 총선에서 5번째 연속 승리한 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오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1805 - 이탈리아의 정치선전가, 혁명가 마치니(Mazzini, Giuseppe) 출생
1767 - 독일의 언어학자, 철학자, 교육개혁가 훔볼트(Humboldt, Wilhelm von) 출생
1763 - 프랑스의 작곡가 메윌(Méhul, Étienne) 출생
1757 - 영국의 항해가 밴쿠버(George Vancouver) 출생
1675 - 영국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Greenwich Royal Observatory) 설립
1633 -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동설 철회
1587 -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윤선도(尹善道) 출생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3 (0) | 2019.06.23 |
---|---|
오늘의 사건 06.22 (0) | 2019.06.22 |
오늘의 사건 06.21 (0) | 2019.06.21 |
우표로 본 오늘06.20 세계 난민의 날 (0) | 2019.06.20 |
오늘의 사건 06.19 (0) | 2019.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