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 2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줄리아 길러드, 호주 첫 여성 총리에 취임
‘광부의 딸’ 호주 첫 여성 총리 되다
줄리아 길러드, 집권 노동당 대표로 ‘만장일치’ 선출
영국 출신의 진보성향…“정부 정책 일관되게 추진”
집권 노동당의 지도부 교체는 최근 정책 혼선으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한 케빈 러드(52) 전임 총리체제로는 오는 10월로 예정된 총선을 치를 수 없다는 당내 위기감에서 촉발됐다. 전날 노동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노총이 러드 대신 길러드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보도된 직후, 각 주의 유력 정치인 등 당내 중진들이 길러드에게 당의 새 얼굴이 돼 줄 것으로 요구하면서 당권 도전에 미온적이던 길러드도 마음을 바꿨다. 당내 지지를 등에 업은 길러드는 이날 밤 총리관저에서 러드와 담판을 벌이며 사임하든가 당대표 경선을 치를 것을 요구했다. 24일 오전 경선 직전 세 불리를 확인한 러드가 경선 직전 출마를 포기하면서 당찬 여성정치인 길러드가 당대표에 무투표 당선됐다.
85년만에 이민자 출신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라는 기록도 세우게 된 길러드는 1961년 영국 웨일스에서 탄광 광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기관지폐렴을 앓던 길러드가 4살 때 그의 부모는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왔다.
길러드는 일찌감치 정치인 소양을 보였다. 대학 2학년 때 노동당에 가입했고, 멜버른 대학 재학시절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전국 학생회장에 선출됐고, 진보성향의 사회주의자포럼 사무국장으로 능력을 보였다. 졸업 뒤 산업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98년 연방의원에 당선됐고, 의정활동을 통해 ‘노동당 내 최고의 토론자’로 명성을 쌓으면서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아왔다. 2006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 부총리 외에 교육부장관, 고용장관, 사회통합장관을 겸임해 왔다.
러드 전임 총리는 2008년 말 세계 금융 위기 때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해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침체를 피하면서 한때 70%에 육박하는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천연자원 이익세, 이산화탄소 배출 거래권 등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반대에 막혀 오락가락한 행보를 보이면서 끝내 당내 반란으로 2년반 만에 총리직에서 도중하차했다.
길러드 새 총리는 “(갈팡질팡했던) 정부 노선을 제 길로 되돌리기 위해 공통의 컨센서스를 우선적으로 찾아나갈 것”이라며 전임 노동당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들을 더욱 의욕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을 취임 일성으로 강조했다. “유리천장을 머리로 깨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라 바닥에 두발로 굳건히 서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밝힌 길러드 총리는 이번 주말 캐나다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 정상회의에서 세계 외교무대에 데뷔한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10-06-24 오후 08:15:00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427377.html
1989 - 장쩌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 선출
[어제의 오늘]1989년 장쩌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 선출
ㆍ톈안먼 사태 진압 발판 권력 잡아
1989년 중국은 이전의 폐쇄사회와 개혁·개방 정책 사이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경제적 개혁에 비해 정치 개혁은 더디게 진행되면서 공산당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소득격차 확대 등으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됐다. 그해 4월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고, 마침내 후야오방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적 민주화 운동으로 확대됐다. 6월4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해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1만5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톈안먼 사태’다.
톈안먼 사태를 진압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전면에 나선 인물이 바로 장쩌민(江澤民·사진)이다.
덩샤오핑은 톈안먼 사태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진압에 나선다. 개혁파 당 총서기 자오쯔양을 축출하고 강경파인 장쩌민이 총서기, 리펑이 국무원 총리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상해시 당서기였던 장쩌민은 북경에서 시위사태가 발생하자 이에 동조적인 논조를 폈던 상해의 세계경제도보 총편집인을 즉각 해고하고 노동자 감찰대로 하여금 이 신문을 장악토록 하는 강경대응으로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의 호감을 샀다. 곧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무력진압이 시작됐다. 국무원 총리였던 리펑은 자신이 차기 지도자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자네들이 장쩌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여 훌륭하게 단결할 수 있을 것을 희망하네”라며 장쩌민을 택했다.
그리고 6월24일, 중국 공산당 13기 중앙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자오쯔양이 범한 잘못에 관한 보고’를 채택하는 동시에 장쩌민을 총서기로 정식 선출했다. 상하이 당서기였지만 중앙 정치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쩌민이 중앙 무대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장쩌민의 오른팔인 쩡칭훙(曾慶紅)을 비롯해 그와 함께 성장했던 많은 이들이 그와 동행했다.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중앙권력을 ‘접수’한 장쩌민과 그의 측근을 두고 ‘상하이방’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장쩌민은 1990년 4월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2000년에는 공산당이 선진 생산력, 선진문화 발전, 광대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3개 대표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 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면서 평화적 정권이양을 이뤘다.
이윤주 기자 /경향신문 2011-06-23 21:38: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6232138045&code=100100&s_code=ap005
1989 -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사망
미소라 히바리 [美空ひばり, 1937.5.29~1989.6.24]
한국계로 알려진 일본 가요계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가 1989년 6월24일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미소라는 2년전 만성간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래 투병생활을 계속해왔었다.
생선장수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그녀는 9살 때 첫무대에서 천재소녀란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미모, 가창력에 매끄러운 스테이지 매너를 지닌 미소라는 1950년 ‘슬픈 휘파람’의 대히트로 예능계 여왕의 자리에 군림하며 일본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패전후 황폐해진 국토, 그 잿더미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했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그녀의 노래가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13번지’ ‘슬픈 술’ 등이 그 대표곡으로 그녀가 남긴 노래는 1천4백여곡에 이르며 음반판매량만도 4천만장에 달했다.
이렇듯 일본 가요계에서 신격화됐던 그녀이지만, 현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1962년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 1년반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후 혼자 살아오던 그녀는 1988년 4월 동경 돔에서의 컴백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일본의 정통 엔카 세대는 막을 내렸다. 그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신문들은 1면 또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취급,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일본대중문화에 기여한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
미소라 히바리 우표
왼쪽의 우표는 Kanashiki Kuchibue 悲しき口笛 (1949) 의 한 장면입니다. 이것은 미소라 히바리(전설적인 엔카 가수)가 12살 때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흑백 영화입니다. 슬프고도 코믹한 분위기의 영화였습니다. 영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우측의 우표는 미소라 히바리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의 사진입니다.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다는 소문이 많은데, 제가 보아도 미소라 히바리는 역시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의 얼굴에 가깝더군요. 위의 우표 사진만 해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형입니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이런 얼굴이 흔치 않지요.
미소라 히바리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장수가 넋이 나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아이스크림(하드)을 다 도둑맞곤 하는 장면이 있는데 悲しき口笛 인지 다른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東京キッド(Tokyo Kid, 1950) 의 한 장면인 것도 같고...
http://mwultong.blogspot.com/2006/07/80-misora-hibari.html
1987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Messi, Lionel) 출생
메시 [Messi, Lionel Andrés "Leo", 1987.6.24~ ]
리오넬 안드레스 메시(Lionel Andrés Messi, 1987년 6월 24일 ~ )는 아르헨티나 산타페 주 로사리오 출생의 축구 선수로 프리메라리가의 축구 클럽인 FC 바르셀로나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일원이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최연소이자 최다득표로 발롱도르(Ballon d'Or)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그 이듬해에도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2년 연속 수상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그 이전에도 수 차례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후보에 오르며 현 세대 최고의 축구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 연속 FIFPro와 월드 사커 매거진 최우수 유망주로도 뽑힌 바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능력은 축구의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마라도나는 메시를 그의 후계자라고 선언한 바 있다.
메시는 어린 나이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FC 바르셀로나가 그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발견했다. 바르셀로나가 그의 성장 호르몬 장애를 치료해줄 것을 약속함으로써 그는 뉴웰스 올드 보이스 유스팀을 떠나 2000년 그의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했다. 2004–05 시즌 데뷔로, 그는 라 리가 최연소 선수 기록을 세웠으며 또한 최연소 리그 골도 기록했다. 메시가 데뷔한 해에 FC 바르셀로나는 프리메라리가에서 우승했고, 다음 해인 2006년에는 프리메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더블을 달성했다. 메시는 2006–07 시즌부터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정규 주전멤버가 되었고,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리그 26경기에서 14득점을 기록했다. 2008–09 시즌에 메시는 38골을 기록하며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결과로서 2009년 발롱도르, 2009년 유럽 올해의 선수상, 2009년 FIFA 올해의 선수상, 베스트 11에 모두 선정되는 등 축구와 관련된 대부분의 상을 거머쥐며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2009–10 시즌에는 더 향상된 경기력을 선보이며 53경기 47골 14도움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이는 호나우두가 세웠던 골 기록과 동률이었으며, 출장시간에 비하면 그를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다. 그 많은 득점 중 페널티킥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메시는 2005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결승전의 두 골을 포함 총 여섯 골을 기록하여 득점왕에 올랐다. 그 직후 그는 아르헨티나 성인 국가대표팀의 일원이 되었다. 2006년 메시는 월드컵에서 뛴 최연소 아르헨티나 선수가 되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의 경기에서 후반 30분에 교체 투입되어 후반 43분에 골을 넣는 등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의 6-0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다음 해에는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그의 성인 국가대표 경력 중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때 스페인에서 국가 대표팀의 보강을 위해 메시의 귀화를 시도한 바 있으나 메시는 자신의 병마를 해결해 준 스페인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조국인 아르헨티나를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메시는 세계에서 연 수입이 가장 많은 축구선수로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데이비드 베컴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축구선수로 랭크되었다. 이로서 세계 스포츠인 중에서 남자는 리오넬 메시가, 여자는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가 각각 연수입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어린 시절 /위키백과
1978 - 북한, 유아의 가정양육 금지
북한당국은 여성 노동게급화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사 및 가정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하였다. 여성의 경제적 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자녀양육 및 가사노동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북한은 가정의 혁명화를 여성의 혁명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특히 1972년에 제 정된 「사회주의 헌법」과 1978년 「사회주의 로동법」은 국가가 여성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여 사회적 노동에 적극 참가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고 규정하였다.
다른 현존 사회주의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자녀양육 및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중심으로 여성의 노동계급화를 지원했다. 아동의 사회적 집단교육은 건국 초기부터 강조되 어 탁아소와 유아원의 설립이 증가되어왔다. 특히 1972년에 제정된 「사회주의 헌법」은 "모든 학령 전 어린이들을 탁아소, 유치원에서 국가와 사회의 부담으로 키운다"(제43조)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http://apwinc.sookmyung.ac.kr/unification/policy/wlaw01.html
1978 - 소련의 우주항공 과학자 스티슬라프 켈디시(Keldysh, Mstislav) 사망
켈디시 [Keldysh, Mstislav Vsevolodovich, 1911.2.10~1978.6.24]
Mstislav Vsevolodovich Keldysh (10 February [O.S. 28 January] 1911, Riga - 24 June 1978, Moscow) was a Soviet scientist in the field of mathematics and mechanics, academician of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46), President of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61–1975), three times Hero of Socialist Labor (1956, 1961, 1971), fellow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1968). He was one of the key figures behind Soviet space program. Among scientific circles of USSR Keldysh was known with epithet "the Chief Theoretician" in analogy with epithet "the Chief Designer" used for Sergey Korolyov.
Family
http://en.wikipedia.org/wiki/Mstislav_Keldysh
1976 - 베트남 첫 남북통일국회 개막
1975년 북 베트남군의 춘기공세에 의하여 남 베트남 정권은 무너지고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협정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 된지 20년만에 전국토가 공산주의 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북 베트남의 지휘 조정을 받고 있던 남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임시혁명정부(PRG)지도자들은 독자적인 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 베트남 당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긴급히 남.북 통합정부 수립작업에 착수하였다.
북 베트남 정치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1976년 4월 25일 남.북 통일 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해 6월 24일 하노이에서 열린 국회에서 하노이 당국자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7월 2일 전국토의 통일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RV)으로 발표하였다.
1976년 12월 14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제 4차 베트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베트남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 지도체제를 정비하였다. (발췌)
/2003.10.12 통권 제18호, 교민 잡지 김기태 교수의 나의 베트남 생활에서 발췌
http://www.withustour.co.kr/index.asp
1973 -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 방문
1973년 오늘!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 카다피가 이집트를 방문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 두 나라의 연합문제를 논의하러 왔다.
이집트 국민들은 카다피를 열렬히 환영했다.
카다피는 열달 전인 1972년 8월 사다트와 아랍연합을 건설한다는 데 합의했었다.
중동 지역에 대한 서방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아랍연합으로 자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다피는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후에 사다트의 온건평화정책과 갈등을 일으키고 아랍연합의 꿈은 무산된다. /YTN
1956 - 미국의 동물학자, 성 연구가 알프레드 킨제이(Kinsey, Alfred) 사망
킨제이(킨지) [Kinsey, Alfred Charles, 1894.6.24~1956.8.25]
미국의 동물학자이자 성 연구가.
1894년 6월 24일 뉴저지 주(州) 호보컨에서 삼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1919년 메인 주(州) 브런즈윅의 보우든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191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 취득, 1929년 동 대학 동물학·식물학 교수로 재임하다가 같은 해 인디애나대학교 동물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2년 동 대학 및 부설연구소장이 되었다. 록펠러재단과 국가과학위원회의 '성문제 연구위원회'의 후원으로,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를 연구하였다.
원래 킨제이는 '어리상수리혹벌'을 연구하던 동물학자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인디애나 대학의 여학생회에서 제안한 기혼인 여학생과 결혼을 앞둔 여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킨제이가 맡게되면서 성에 대한 과학적 자료의 부족을 절감하고 대규모 집단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 성 관련 연구를 시작하게 되면서 성 연구가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1938년~1956년 까지 1만 1240명(남성 5300명, 여성 5940명)과의 개인적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자료 《남성의 성 행동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1948, W.B.Pomeroy, C.E.Martin과 공저)와 《여성의 성 행동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1953)에서 미국사회의 성행위에 대한 다양한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후 이 책들은 책제목의 민망함 때문에 '킨제이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특히 《여성의 성 행동 》은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여성의 성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엄청난 논란이 되었다. 그의 연구는 대규모 집단을 표본으로 하고 명확한 통계적 기준이 적용되기는 하였으나 불규칙적인 표본 추출과 보편적인 신뢰성 문제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이에 1954년 종교 단체의 압력으로 록펠러 재단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킨제이의 '10만명 성생활 조사'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주요저서에는 《일반 생물학 An Introduction to Biology》(1926) 《Method of Biology》(1937),《남성의 성 행동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1948, W.B.Pomeroy, C.E.Martin과 공저)와 《여성의 성 행동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1953) 등이 있다. 2004년 리암 니슨 주연의 <킨제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1956년 사망하였다. /네이버
1950 - 제4회 월드컵축구대회 개막 (브라질)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아래 열린 월드컵축구대회로, 1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0년 6월 24일부터 7월 16일까지 23일간 개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제3회대회(1938) 이후 12년만에 열렸다. 1938년 파리총회에서 브라질·아르헨티나·독일이 대회 유치를 신청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결정하지 못하다가 8년 후인 1946년 룩셈부르크총회에서 남미국가로는 2번째로 브라질을 개최지로 선정하였다.
33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브라질과 전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으나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터키·인도는 국내사정으로 본선 참가를 포기하여 13개국이 참가하게 되었다. 대회는 리우데자네이루·상파울루 등 7개도시에서 열렸으며, 제2·3회대회가 1회전부터 토너먼트로 진행된 것과는 달리 4개팀 2조, 3개팀 1조, 2개팀 1조로 나누어 리그전을 벌인 후 각조에서 1위를 차지한 4팀이 결승리그전에 진출하여 우승을 가렸다.
우루과이가 제1회대회에 이어 2번째로 우승하였고 브라질이 준우승, 스웨덴이 3위를 차지하였다. 22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133만 7000명, 평균 관중은 6만 772명, 총득점은 88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4.0점이다.
이전까지 참가를 거부하다가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축구강국 잉글랜드는 대회전 예상과는 달리 결승리그전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이변을 보였고, 브라질과 우루과이간 경기를 보던 사람들이 자살하거나 심장마비로 숨지는 등의 사건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naver
1948 - 소련 ‘베를린 행정위원회’ 폐지 선언
[어제의 오늘]1948년 소련 ‘베를린 행정위원회’ 폐지 선언
ㆍ양국의 앙금을 부순 ‘사탕폭탄’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편이 되어 싸웠던 미국과 서유럽 간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 1948년 3월. 서방은 패전국 독일 내 자신들의 관할구역을 합쳐 하나의 경제단위를 만들기로 하고 서베를린에 마르크화를 도입하는 등 ‘서독화’를 밀고 나갔다. 이에 반발한 소련은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를 박차고 나갔으며, 서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철도와 도로·수로까지 차단했다. 6월24일 소련은 미국·영국·프랑스와 소련 등 4국으로 구성됐던 베를린 행정위원회가 폐지됐다면서 “서유럽 연합국은 이제 베를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세계를 짓누른 냉전의 서막이 된 ‘베를린 봉쇄’의 시작이었다.
봉쇄 사흘째부터 미국과 영국은 항공편으로 서베를린에 생필품을 공수했고, 수출길이 막힌 서베를린의 공업생산품을 밖으로 실어 날랐다. 서독과 서베를린 간 도로가 끊기자 서방국들은 공중에 다리를 놓아 매일 7300t의 물자를 서베를린에 공급했다. 이후 11개월 동안 인구 200만의 서베를린을 살리기 위해 서방은 2억2400만달러를 퍼부었다. 동시에 서방은 동유럽 금수조치를 실시, 소련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소련은 결국 이듬해 5월 봉쇄를 풀었다.
봉쇄 당시 공수작전에 참가한 서방국 조종사들은 2차 대전의 적국이던 독일 국민들에 대한 미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나 서베를린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게일 핼버슨이라는 미군 조종사는 굶주린 독일 어린이들에게 껌을 건넸고, 점차 여러 조종사가 아이들에게 껌과 사탕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은 껌과 사탕을 손수건에 싸 공중에서 떨어뜨렸다. 이런 행동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옛 적국 어린이들을 위한 ‘사탕폭탄’ 이야기가 언론에 실리면서 미국에서는 사탕 모으기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핼버슨은 ‘사탕 폭격기(Candy Bomb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사탕폭탄은 냉전 기간 두고두고 미국과 독일 간 우정의 상징이 됐다. 독일 정부는 74년 핼버슨에게 최고의 영예인 ‘연방 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핼버슨은 89년 옛 유고연방 내전이 시작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미군 C130 수송기를 타고 날아가 다시 사탕을 투하했다. 미군은 2004년 핼버슨을 시켜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곰인형과 축구공 등 장난감을 투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60년 전 독일인들을 감동시켰던 사탕폭탄이 발칸과 이라크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23 17:47:5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6231747545&code=100100&s_code=ap005
[베를린 봉쇄와 공수 일지]
1949-09-30(10-31?) 베를린 공수 종료
1949-05-12 베를린 봉쇄 해제
1949-05-04 소련, 베를린 봉쇄 해제에 동의
1948-06-26 미국-영국 베를린 공수 시작
1948-06-24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1947 - 미국의 케네스 아놀드 최초의 UFO 목격
1947년 6월 24일 미국의 소화기 사업가 케네스 아놀드(Kenneth Arnold)가 자신의 전용기를 타고 사업처 확장을 위해 비행하던 중 워싱턴 주 레이니어 산 맥 상공에서 마치 가오리 형태로 생긴 아홉 대의 미확인 비행물체가 목격되었고 아놀드는 이를 지상에 알리게 된다.
지상에 착륙한 아놀드는 각 언론사들의 취재에 응했고 당시 AP통신 기자가 “마치 물위를 톡톡 튀어 날아가는 접시같았다”는 아놀드의 말을 인용해 ‘비행접시(Flying Saucer)’라는 기사를 외신(外信)으로 타전했고 이 말이 UFO라는 용어(用語)가 나오기 이전에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용어였다.
그랬던 것이 로즈웰 사건을 지나 프로젝트 사인에서 시작된 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한 민관군 합동 조사가 본격화 되던 블루북 프로젝트(Project Bluebook, 1952~1968) 기간동안 이 프로젝트 팀원이었던 에드워드 J.루펠트 대위가 ‘미확인 비행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라는 중립적인 용어(用語)를 처음으로 착안 사용하게 된다. 이 말이 UFO의 최초 사용이며 그 근원이다.
http://www.wavero.net/forum/showthread.php?t=9939
1933 - 히틀러, 아우토반공사 설립
[어제의 오늘]1933년 히틀러, 아우토반공사 설립
ㆍ자동차도로 건설에 실업자 투입
1929년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을 강타했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독일 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 32년 독일 노동인구의 40%가량이 실업상태에 빠졌고, 국민총생산은 1890년대 수준으로 퇴보했다. 경제파탄은 극좌와 극우 같은 극단적 정치세력과 노선을 불러오게 마련. 아돌프 히틀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의회주의로 분열된 정치상황에서 극단주의에 기반한 나치당을 내세워 민주주의 세력을 전복시키고 집권한다.
33년 1월 총리가 된 히틀러는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에 눈을 돌린다. 아우토반 건설계획은 이미 수립돼 있었다. 13년 베를린 근교에 완공된 자동차 경주도로가 아우토반의 시초였다. 녹지대와 조경에 야생동물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설치한 자연조화형 설계도도 마련돼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과 대공황으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히틀러는 실업자를 구제하고, 병력과 물자 수송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33년 2월 건설 계획을 연내에 시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어 6월24일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이라 이름 붙인 도로 건설을 위해 아우토반공사(公社)를 만들었다. 실업자 수십만명이 공사에 투입됐다. 35년 5월 프랑크푸르트와 다름슈타트 간 고속도로 30.6㎞ 구간을 준공했다. 이후 나치 정권은 패망 때까지 3819㎞의 아우토반을 뚫었다. 실업자 구제는 이루어졌지만, 군사적 효과에선 의문이 제기됐다. 뻥 뚫린 아우토반은 적군에 노출되기 쉽고, 적군의 비행장으로 역이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토반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산업 발전을 일으킨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빠르면서도 안정감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는 아우토반이 있기에 가능했다. 벤츠, BMW,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 아우토반처럼 초고속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애초 자연보호구역, 도시 입구 등에 시속 80·100·130㎞의 제한속도를 ‘권장사항’으로 뒀지만, 독일 환경부 등은 속도 제한을 더 낮추고 의무사항으로 두려 한다. 안전 문제도 있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다. 속도와 질주의 상징인 곳에서 일시적 이벤트지만 ‘느림의 철학’을 구현하는 행사도 열린다. 다음달 18일 도르트문트와 뒤스부르크 간 도로 중 60㎞ 구간에서 걷기 행사가 진행된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6-23 17:26: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6231726325&code=100100&s_code=ap005
1916 - ‘100만 달러 여배우’ 탄생
[책갈피 속의 오늘]1916년 ‘100만 달러 여배우’ 탄생
“미스터 그리피스, 나는 배우이고 예술가예요. 10달러는 받아야겠어요.”
1909년 4월 어느 날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17세의 자그마한 금발머리 소녀는 “영화에 출연하면 하루 5달러를 주겠다”는 감독의 제안에 이렇게 당돌하게 답했다.
훗날 ‘영화예술의 아버지’라 불린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성영화 최고의 여성스타 메리 픽퍼드가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본명은 글래디스 스미스. 189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홀어머니를 도우려고 일곱 살 때 극장무대에 올랐고, 열다섯 살 때 뉴욕에 가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2년 뒤 그리피스를 만난 픽퍼드는 매주 한 편씩 10여 분짜리 단편 무성영화를 찍었다.
1912년에 파라마운트의 전신인 영화사의 창립자 아돌프 주커의 출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4년간 21편에 출연하며 픽퍼드는 ‘미국의 연인’으로 떠올랐다. 경쟁자는 찰리 채플린뿐이었다.
1916년 6월 24일 주커와 새 계약에 사인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짜리 여배우’가 됐다. 이후 자기 영화회사를 차려 수십 편의 영화를 찍었다. 20대 중반이었지만 여전히 영화 속의 역할은 어린 소녀였다.
19세 때 비밀 결혼을 했던 첫 남편과 갈라서고, 액션스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사랑에 빠진 것도 이때쯤이었다. 페어뱅크스와 그의 친구 채플린, 픽퍼드는 1919년 영화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세웠고 이듬해 픽퍼드와 페어뱅크스는 결혼했다.
행복은 길지 않았다. 1928년 어머니가 숨진 충격에 그녀는 ‘황금의 곱슬머리’를 잘랐다. 무성영화의 시대도 그해로 끝났다. 1929년 출연한 첫 유성영화 ‘코퀘트(바람둥이 여자라는 뜻)’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1933년 두 번째로 이혼했고 더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프로듀서로서 여전히 ‘할리우드의 대모(代母)’로 불렸지만 술에 취해 베벌리 힐스의 저택에 칩거하는 날이 길어졌다. 영화 ‘선셋 대로’(1950년)의 은퇴한 여배우 노마처럼.
1976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받으며 녹화된 화면을 통해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등장했고, 3년 뒤 타계했다. 에일린 휘트필드가 쓴 그녀 전기의 제목은 ‘할리우드를 만든 여성’이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동아닷컴 2008-06-24 03: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624/8593789/1
1909 - 영국의 핵물리학자 페니(Penney, William) 출생
페니 [Penney, William George, 1909.6.24~1991.3.3]
영국의 핵물리학자.
영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다. 런던대학교 과학기술 임피리얼 칼리지(1929 학사학위, 1931 박사학위)와 케임브리지대학교(1935 박사학위)에서 공부했다. 1936~45년 임피리얼 칼리지에서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국가안보부와 해군부를 위해 연구에 참여했고, 1944~45년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의 과학 및 산업연구부 과학책임자였는데, 이곳에서 미국 원자폭탄 개발을 도왔다. 1946년에 영국 군수부의 무기연구 최고 감독관으로 임명되었고 이 직위에 있으면서 영국의 자체 원자폭탄 개발을 감독했다. 1952년에 최초의 원자폭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같은 해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버크셔 올더마스턴에서 원자무기 연구소의 지휘자(1953~59)였고 영국 원자력 공사의 의장(1964~67)을 지냈다. 1967년 일대(一代) 귀족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908 - 미국의 제22, 24대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Grover) 사망
클리블랜드 [Cleveland, (Stephen) Grover, 1837.3.18~1908.6.24]
미국의 정치가로 뉴욕 주지사를 지내고 남북전쟁 후 최초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뉴욕의 주지사로 근무하던 1884년 그 공평무사한 정치능력을 인정받고 또 연방정부의 부패와 비능률에 대한 국민의 불만에 호응,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1885년 남북전쟁 후 최초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1888년 선거에서는 일반투표에서 다수표를 얻었으면서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하였는데, 1892년 재지명되어 당선되었다. 하와이 병합과 쿠바 간섭에는 반대하였으나, 베네수엘라 국경분쟁에는 먼로선언을 채용하여 강경책으로 성공하였다. 국내정책에서는 1893년 공황을 맞아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각 방면에서 비판을 받았고, 1896년 선거에서는 지명받지 못하였다. 그 후 은퇴하여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naver
- 이정희(왼쪽)와 박경원(가운데) (고객맞춤형 우편엽서)
1901 - 여류비행사 박경원(朴敬元) 출생
박경원 [朴敬元, 1901.6.24~1933.8.7]
1901년 6월 24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朴敬元)이 조종사로서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이 당시의 도쿄 아사히 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를 실어 그의 존재를 알렸다.
고국의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3년.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長春)까지 ‘일·만(日·滿)친선, 황군 위안’을 위한 장거리 비행이 허락된 것이다. 몰고갈 비행기가 없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고이즈미 현 총리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만남이 잦아져 둘 사이의 염문이 일본 신문 가십란에 실리기도 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박경원이 장장 2000km의 비행을 위해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그러나 50분 만에 그의 애기(愛機)는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박경원은 핸들을 잡은 채 숨져 있었다. /조선
- 'Self-portrait'
1901 - 피카소, 19세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피카소(Picasso, Pablo)가 1901년 6월 24일 1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전해 1900년에 이어 재차 파리에 온 피카소는 화상(畵商) C. 보라르와의 친분 덕에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피카소의 개인전을 관람한 한 미술평론가는 이 무명의 청년화가를 두고 ‘피카소는 화가이다. 근성부터 화가이다. 그는 색채를 색채로서 찬미하고 있다’고 격찬했다. 파리에서의 데뷔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향과 달리, 작은 체구에 까만 피부의 스페인 출신 청년화가 피카소의 그림은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청년시절을 모국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피카소는 그 즈음 캬바레나 선술집을 강렬한 색채와 역동감 넘치는 터치로 그려냈다. 그러던 어느날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으로 권총 자살을 한다. 이 소식은 피카소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온통 푸른색으로만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된 "청색시대"의 시작이었다.
로맨틱한 파리생활의 또 다른 얼굴에는 잔인한 고통, 정신이상이 될 것 같은 현실이 있었다. 질병과 추위, 배고픔을 체험한 피카소는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을 짙푸른 청색을 통해 나타냈다. 이 시절 파리에서의 체험은 향후 그에게 사회 저변에 꿈틀거리는 어두운 존재들을 어두운 파란 색을 주조로 그리게 했다. /조선
1900 - 폴란드의 유대계 법학자 렘킨(Lemkin, Raphael) 출생
렘킨 [Lemkin, Raphael, 1900.6.24~1959.8.28]
Raphael Lemkin (June 24, 1900 – August 28, 1959) was a Polishlawyer of Jewish descent. Before World War II, Lemkin was interested in the Armenian Genocide and campaigned in the League of Nations to ban what he called "barbarity" and "vandalism". He is best known for his work against genocide, a word he coined in 1943 from the root words genos (Greek for family, tribe or race) and -cide (Latin for killing). He first used the word in print in Axis Rule in Occupied Europe: Laws of Occupation - Analysis of Government - Proposals for Redress (1944).
http://en.wikipedia.org/wiki/Raphael_Lemkin
제노사이드 [Genocide]
'제노사이드Genocide'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1900~ 1959)이 처음 만든 용어로,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한 복합어다. 1944년 출간된 자신의 책《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44)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에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을 부여한 렘킨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것과 같은 만행을 예방하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제노사이드를 명령한 사람과 그 명령을 집행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력의 결과로 1946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의 범죄로 공인되었고, 2년 후인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에 관한 협약이 체결됨으로써,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와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 정의되었다.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집단 구성원에 대해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집단 내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70135274
1895 - 미국의 프로 복싱 선수 뎀프시(Dempsey, Jack) 출생
뎀프시 [Dempsey, Jack, 1895.6.24~1983.5.31]
미국의 프로 복싱 선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장 이상적인 복싱 선수로 평가하고 있다. 1919년 7월 4일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제스 윌러드를 3라운드에서 KO로 이긴 뒤, 1926년 9월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진 터니에게 10라운드에서 판정패를 당할 때까지 세계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그당시 가장 인기있는 복서였던 뎀프시는 그때까지 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500만 달러의 관중수입금을 기록했다.
뎀프시는 1914년 키드 블래키라는 이름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1918년과 1919년초에 당시 헤비급 세계 챔피언인 윌러드에 대한 도전권을 얻기 위해 많은 경기를 가졌으며 대부분 1라운드에서 KO승을 거두었다. 37세의 노장 챔피언 윌러드는 이 젊은 뎀프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공이 울리자마자 맹공격을 퍼부어 1라운드에서만 7차례나 윌러드를 쓰러뜨렸다. 1923년 9월 14일 뉴욕 시에서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앙헬 피르포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를 때는 1라운드에 링 밖으로 나가떨어진 뒤, 제2라운드에는 피르포에게 야만적일 만큼 격렬한 공격을 퍼부어 그를 완전히 때려눕혔다.
그후 3년 동안 뎀프시는 시범경기만 했고, 31세 때 터니와의 첫 시합에서 지고 말았다. 치밀하게 훈련을 쌓은 터니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 1927년 9월 22일 시카고에서 열린 '롱 카운트 전투'로 알려진 시합에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뎀프시는 7라운드에 터니를 쓰러뜨렸지만, 중립 코너로 가지 않고 쓰러진 터니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기 때문에 KO승을 거둘 기회를 놓쳤다. 터니는 회복한 다음 끝까지 경기를 치르고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다.
1930년대에 뎀프시는 많은 시범경기에 출전했지만, 세계 타이틀전을 갖지 않았다. 1940년 무명 선수들에게 3번의 KO승을 거둔 뒤 현역에서 은퇴하여, 복싱과 레슬링 경기의 심판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안경비대에서 해군소령으로 복무했다. 1914~40년까지 84전 62승 51KO를 기록했다. 나중에 뉴욕 시에서 레스토랑 경영자로 성공했으며 1977년에는 자서전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92 - 한국화가 김은호(金殷鎬) 출생
1883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헤스(Hess, Viktor Franz) 출생
1852 -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아들러(Victor Adler) 출생
1850 - 영국의 육군원수, 행정관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출생
1839 - 우편엽서를 처음 만든 헤르만(Herrmann, Emanuel) 출생
1812 - 나폴레옹(Napoleon) 군대, 동유럽 니멘강 건너 러시아로 진격
1783 -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Lavoisier, Antoine Laurent), 물의 분해 성공
1768 - 프랑스 혁명기의 장군 오슈(Hoche, Louis-Lazare) 출생
1687 -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성서학자 벵겔(Bengel, Johann Albrecht) 출생
1542 - 스페인의 신비사상가, 시인, 가톨릭의 성인 요한네스(Johannes)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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