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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23 올림픽의 날

오늘의 사건 06.23   올림픽의 날 

 

"슈호프가 집을 나선 것은 1941년 6월 23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폴롬냐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던 사람들이 전쟁이 터졌다고 알려주었다."

 

- 솔제니친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이 소설에서 슈호프는 전쟁에 참여하여 포로가 되고 조국을

배반한 죄목으로 수용소에서 3,653일째의 날을 보낸다.)

 

 

2010 - 허정무호,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

[앵커멘트]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새 역사를 썼습니다.
이정수와 박주영이 나란히 골을 터트린 대표팀은 나이지리아와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2 대 2로 비겼습니다.
남아공 더반에서 김동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출발은 좋지 않았습니다.
대표팀은 전반 11분 우체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갑니다.
만회골을 노리던 대표팀, 결국 세트피스에서 기회를 잡습니다.
전반 37분, 기성용의 프리킥을 이정수가 발로 차 넣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태극전사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후반 3분, 박주영이 그림 같은 프리킥으로 역전골을 성공시킵니다.
그동안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내는 통쾌한 장면입니다.
앞서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대표팀.
염기훈의 크로스를 이어받은 박주영의 슈팅이 골키퍼 선방에 막힙니다.
후반 24분, 야쿠부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승부는 다시 2 대 2가 됩니다.
그러나 대표팀은 남은 시간을 잘 버텼고 귀중한 승점 1점을 따내며 조 2위를 확정짓습니다.
원정 월드컵 사상 첫 16강 진출입니다.
[인터뷰: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
"우리 선수들이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우리 선수들이 정말 월드컵 무대에 나와서도 제 기량을 펼치고 주눅들지 않고,

제 역할을 충분히 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유쾌합니다."
뛰어난 활동량을 앞세워 경기 흐름을 주도한 박지성은 맨어브더매치로 선정됐습니다.
[인터뷰:박지성, 축구대표팀 미드필더]
"모든 선수들이 16강 진출이 얼마나 어려운 지 깨달았을 것이고,

하지만 그 힘든 과정을 이겼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 축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태극 전사들은 이제 16강을 너머 8강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더반 경기장에서 YTN 김동민입니다.

YTN 2010-06-23 07:55

http://www.ytn.co.kr/_ln/0107_201006230755021720

 

2010 - 한국, 월드컵 원정 첫 16강 진출 쾌거!

축구 강국 대한민국. 이제는 세계 어디서라도 가슴을 펴도 되겠다. 한국 축구가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16강 숙원을 풀었다.
한국은 23일(한국시간) 더반에서 열린 B조 예선 최종전서 나이지리아와 2-2로 무승부를 거뒀다.

매번 불리하게 작용했던 ‘경우의 수’가 이번에는 한국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한국은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아르헨티나(3승)에 이어 조 2위로 16강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마지막까지 16강 진출을 꿈꿨던 그리스는 아르헨티나전 패배로 1승 2패에 머물렀다.
한국은 홈에서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4강까지 올랐지만, 외국에서 열린 7차례의 월드컵에서는 16강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 땅에서 일궈낸 4강 신화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원정길에서의 성과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
한국은 두 차례나 월드컵 정상에 오른 아르헨티나·유로 2004 우승국 그리스·아프리카 강호 나이지리아와 일전을 펼쳐야

하는 힘겨운 일정표를 받아들었다. 대회 시작전 대부분의 외신은 한국의 16강 가능성을 희박하게 봤다.

그들의 시선에 한국은 여전히 축구 약소국이었다.
묵묵하게 대회를 준비해 온 한국은 13일 그리스를 완벽하게 제압(2-0승)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의 16강행을 점치는 외신의 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리스전을 통해 보여준 한국의 경기력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르헨티나전 대패(1-4) 이후에도 한국 축구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선수단 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은 그 이상이었다. 1승 1무를 거두고도 심적으로 밀린 상태에서 스위스와의 최종전을 준비했던 2006 독일월드컵과 달랐다.
나이지리아와의 결전에서 선제골을 내주고도 연속골을 터트렸다. 이후 동점골을 허용했지만 흔들림없이

16강 진출을 위한 승점 1점을 지켜냈다.
한국이 만들어낸 성과는 아시아 축구의 역사도 바꿔놨다. 한국의 남아공월드컵 선전으로로 아시아에도 역대 2회 이상

16강 진출국이 탄생했다. 일본이 16강에 합류한다면 2회 이상 진출국이 두 개국으로 늘어난다.
물론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한국은 26일 포트엘리자베스에서 A조 1위 우루과이를 상대로 8강 진출을 노린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조인스 뉴스 2010.06.23 05:31

http://news.joins.com/article/455/4262455.html?cloc=home%7Csonagi%7Cclick

 

2009 - 5만원 신권 발행

5만원 신권 2700만장 오늘부터 시중 유통

23일부터 시작되는 5만원권 신권 발행에 따라 신권 2700여만장이 시중에 유통된다.

한국은행은 새 고액권인 5만원 발행을 시작한다고 23일 밝혔다. 고액권이 나오는 것은 1973년 6월의 1만원권 이후

36년만에 처음이다.

신사임당 초상이 들어가는 5만 원권은 가로 154㎜, 세로 68㎜로 새 1만원권보다 가로는 6㎜가 크고,

세로는 같으며 색상은 황색 계열이다.

한편 금융기관(은행, 우정사업본부 등) 대상 수요 조사에 따른 5만원권 신권 인출 수요액은 1조3530억원에 달했다.

한은은 이달 말까지 4000만장(2조원) 내외의 5만원권 수요 예측에 따라 신권을 충분히 공급할 계획이다.

공급된 신권은 은행과 우체국 창구 등에서 교환할 수 있고 한국은행 발권국(남대문로)과 각 지역본부 화폐교환

창구에서도 1인당 20장(100만원)까지 교환할 수 있다.

금융기관들은 5만원 입출금이 가능한 현금 취급기기(CD/ATM)를 점포당 1대씩 운영할 수 있도록 기기 교체를 진행 중이다.

한은은 5만원권 발행을 맞아 한은 본관 1층 현송장에서 이성태 총재, 김대식 금융통화위원, 이주열 부총재 등이 참석하는

발행 개시 행사를 가졌다. 행사에서는 테이프 커팅이 진행됐고 5만원권 실물이 공개됐다.

일련번호가 빠른 5만원권 경매 방식은 다음달 중 세부 내용이 발표될 예정이다. 빠른 번호(AA*******A) 100만장 가운데 1∼100번은 한은 화폐금융박물관에 전시하고 101∼2만번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인터넷 경매가 실시된다.

[배성민 기자]  머니투데이 (moneytoday) /OhmyNews 09.06.23 08:4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62318 

 

5만원권, 발행 첫날 3292만장 풀려

5만원권이 발행된 23일 하루 모두 3292만 4000장이 시중에 공급됐다.
한국은행은 이날 금융기관 인출 및 한은 창구에서의 화폐교환 등으로 모두 1조 6462억원어치의

5만원권이 발행됐다고 밝혔다.
전날 오후까지 한은이 집계한 금융기관 인출 수요는 1조 3530억원, 2706만장이었다.

결과적으로 한은의 예상보다 586만 4000장(2932억원)이 더 발행됐다.
정상덕 한은 발권정책팀 차장은 "일부 은행이 오전에 발행한 뒤 오후에 추가로 발행을 요구해 예상보다

규모가 커졌다"면서 "여기에 한은 발권국에서 찾아간 물량도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23일 은행과 우체국 등 금융기관은 5만원권을 구하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신권을 바꿔주는 영업점 창구마다 3~4명씩 줄을 섰고, 자동화기기(ATM) 앞도 북적였다.
한은 발권국에도 5만원권을 구하는 발길은 이어졌다. 오전 9시 이전부터 100여명이 몰려 있었고,

이 가운데 10여명은 전날부터 밤을 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배정받은 5만원권 가운데 약 3/4를 고객들이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예상보다 5만원권 인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정 차장은 "당초 이달 말까지 약 2조원(4000만장) 내외의 인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날 움직임을 볼 때

실제 수요는 이를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금융기관의 5만원권 발행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충분히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병욱 기자 -머니투데이 2009/06/23 18:18

http://news.mt.co.kr/view/mtview.php?no=2009062318140012102&type=2

 

5만원 권, 유통 첫날 3300만장 가까이 풀려 

5만 원권 지폐가 유통 첫날인 23일 1조6462억 원어치가 한국은행과 각급 금융기관에서 인출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날 지역별로 인출된 금액은 서울 7685억 원으로 제일 많았고, 제주 가 152억 원 정도로 가장 적었다.
한국은행 정상덕 발권정책팀 차장은 “5만원 권에 대한 관심이 많아 당초 예상보다 많이 인출됐다”고 말했다.
금융기관들은 오전 9시 점포 문을 열면서 은행창구와 현금취급기를 통해 고객들에게 5만원권을 공급했고,

한국은행도 발권국과 지역본부에서 1인당 20장(100만원) 한도로 5만원 권을 교환해줬다.

이달 말까지 누계로 2조원(4천 만장) 안팎의 5만원 권 인출 수요를 한국은행은 예상하고 있다.
-조선닷컴 2009.06.23 18: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3/2009062301433.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2&Dep3=h2_01

 

2009 - 국내 첫 존엄사 시행

인공호흡기 뗀 순간 눈물 한 방울...

판결따른 첫 연명치료중단 시행-의료진 "약하지만 스스로 호흡"

23일 오전 10시21분, 김아무개(77)씨의 목 성대 안까지 들어와 있던 인공호흡기가 1년4개월 만에 제거됐다.

주치의인 박무석 연세의료원 교수가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김 할머니의 아들과 사위는

마치 얼어붙은 듯했다.

순간 김 할머니의 호흡이 흔들렸지만, 이내 스스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호흡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산소 포화도’도 정상 범위인 90%를 넘긴 92~93%를 가리키고 있었다.

혈압도 105~80으로 거의 정상 범위였다. 김 할머니는 이날 오후 늦게까지 스스로 호흡을 계속했다.

이날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존엄사’가 시행됐다.

대법원이 지난달 21일 ‘연명치료 중단’ 판결을 내린 뒤, 연세의료원은 윤리위원회를 열어 가족과 합의하고

이날 김 할머니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병원 쪽은 “약하지만 환자가 스스로 호흡을 계속하고 있다”며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에 따랐고, 나머지 치료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2월 폐 쪽의 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이 생겨, 뇌 조직 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그 뒤 1년4개월 동안 이 병원 호흡기내과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왔다.

가족들은 ‘더 치료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평소 김 할머니의 뜻이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에서 연명치료 중단 판결을 받았다. 김 할머니가 자발호흡을 멈춰 사망선고가 내려지면 부검이 이뤄질 예정이다.

의료진의 과실에 대한 민형사 소송이 제기돼 있기 때문이다.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박수진 기자 himtrain@hani.co.kr -한겨레 2009-06-23 오후 07:59:2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1993.html

 

식물인간 할머니, 호흡기 떼고도 자가호흡

국내 첫 존엄사 대상인 김모 할머니(77)가 23일 오전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자가호흡을 하고 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김 할머니가 오후 2시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자가호흡을 하고 있다면서 세밀하게 관찰한 뒤

완전히 호흡이 멈추면 사망 판정을 내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병원 측은 김 할머니의 자가호흡이 장기간 지속될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앞서 이날 오전 10시21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낸 지 1년4개월 된 김 할머니를 상대로 인공호흡기를 떼는 방식으로

국내 첫 존엄사를 실시한 병원 측은 "사지마비인 사람의 경우 폐 용적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잘 사는 사람이 있다. 이 환자의 경우 자발호흡이 많이 감소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호흡기를 떼고 나면 금방 운명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몇 시간이나 그 이상 생명이 유지될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김 할머니에 대한 공식 사망선고는 자가호흡이 멈추면 이루어진다. 김 할머니의 시신은 부검 절차를 거쳐 영안실에

안치된다. 부검을 하는 이유는 가족이 의료진의 과실로 김 할머니가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면서

지난 3월 민사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한국아이닷컴 뉴스부 reporter@hankooki.com /한국일보 2009/06/23 14:26:00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06/h2009062314255921950.htm

 

2009 - 네이키드뉴스 국내 서비스 시작

여성 앵커들이 알몸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네이키드 뉴스의 국내 서비스가 23일부터 시작됐다.
네이키드뉴스 코리아는 이날 여성앵커들과 노출 수위, 서비스 방식 등을 공개하고 정식으로 유료 인터넷방송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네이키드뉴스는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한 '어덜트' 버전과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틴' 버전을 나눠 서비스되고

어덜트 버전은 여성앵커들이 상반신을 노출한 차림으로, 틴 버전은 비키니와 란제리 룩 차림으로 진행된다.
앵커는 모델과 연기자, 회사원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한국인 20대 여성 9명으로 구성됐고, 유료 회원 가입비는

월 정액으로 9천900원이다.
뉴스 형태는 매일 같은 방식의 뉴스를 전하는 프로그램과 요일별로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는 프로그램으로 나뉘고,

버라이어티 형식의 프로그램도 편성될 예정이다.
네이키드뉴스 코리아측은 우선 홈페이지를 통해 뉴스를 내보내고,

휴대전화로도 시청이 가능하도록 KT와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1999년 출범한 네이키드뉴스는 현재 캐나다 등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인터넷방송이나 TV 등을 통해 서비스되고 있다.
음란성과 선정성 문제와 관련해 네이키드뉴스 코리아측은 법적 검토를 통해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있으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결과에 따라 뉴스 서비스가 계속될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방통심의위 관계자는 "이제 서비스가 시작되는 만큼 모니터링을 통해 19세 이상 서비스의 음란성 수준을 판단할 것"이라며 "음란물로 판단된다면 서비스가 차단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5∼19세 미만 서비스의 경우도 선정성을 검토해 청소년 유해매체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한국일보 2009/06/23 16:24:22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6/h2009062316242184340.htm

 

2009 - 오바마, "금연은 너무 어려워"

[앵커멘트]
청소년을 위해 담배산업을 규제하는 법안에 서명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도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끔 담배를 피우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류환홍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금연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인터뷰: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95%가량은 치유가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엉망이 될 때가 있습니다."
간혹 담배를 입에 대지만 매일 피우는 것은 아니라며 이해도 구했습니다.
[인터뷰: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매일 피우느냐고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들 앞에서나 가족들 앞에서는 피우지 않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십대 시절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만 아내의 부탁으로 지난 대선 때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최근에는 담배산업 규제 법안에 서명도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경험담을 언급하며 청소년들이 담배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습니다.
http://www.ytn.co.kr/_ln/0104_200906250652020770

 

금연 중인 오바마, "95%는 성공"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美 대통령이 출마 당시 약속했던 금연에 대해 "95%는 성공했지만

가끔 무너질 때도 있다"고 밝혔다.
23일, 백악관(White House)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항상 금연과 싸우고 있다.

무심코 담배에 손이 가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YES'이다. 하지만 평소에 담배를 피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NO'이다.

 어린아이들과 가족들 앞에서는 피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날 담배 규제법에 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 번 담배를 피우게 되면, 좀처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규제법은 더욱 중요하다. 어린이들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 기자가 규제법과 대통령 자신의 금연을 관련시켜 질문하자 대통령은 "규제법과 나는 관계없다.

차세대 어린이를 위한 법안이다"라고 강조했다. (c)AFP
[워싱턴 D.C.=AFP] 2009/06/24 13:29 발신지:Washington D.C.-미국

http://www.afpbb.co.kr/article/politics/politics-politics/2040897/1081098

 

오바마 "95% 금연성공, 가끔 절제안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3일 담배를 완전히 끊기가 쉽지 않은 고충을 재차 털어놓았다.
그런 만큼 청소년들에게는 아예 담배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거듭 촉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담배를 끊으려고 항상 애를 써왔지만 절제를 못 할 때도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매일 담배를 피우는 상습 흡연자는 아니다"라면서 "아이들과 가족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95% 정도 금연 치유가 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때로는 엉망진창이 되는 때가 있다"며 절제가 되지 않는 때가 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술과 마찬가지로 담배는 "계속 싸워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며 금연 노력을 지속해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또 담배산업 규제법이 중요한 이유는 자라는 아이들이 이런 길로 가지 않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날 담배산업 규제법 서명에 앞서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면서
청소년들에게 담배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조언한 바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김재홍 특파원 -한국일보 2009-06-23 (화) 

http://www.koreatimes.com/article/531436

미셸 위

 

2003 - 14세 재미교포 미셸 위, US여자아마 최연소 우승

‘골프 신동’ 미셸 위(14·한국명 위성미)가 2003년 6월 23일 US여자아마추어 퍼블릭 링크스(Public Links)

챔피언십에서 대역전극을 펼치며 역대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날 플로리다주 팜코스트의 오션해먹골프장(파72)에서 36홀 매치플레이(홀별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로

치러진 대회 결승전에서 미셸 위는 비라다 니라파스퐁폰을 1홀차로 꺾고 우승했다.

2000년부터 이 대회에 출전한 미셸 위는 네 번째 도전 끝에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으며

지난 2000년 캐서린 카트라이트가 세운 이 대회 최연소 우승기록(17세)을 ‘13년8개월11일’로 갈아치웠다.

미셸 위와 결승에서 맞붙은 비라다 니라파스퐁폰은 NCAA(전미대학체육협회) 챔피언으로 태국판 ‘박세리’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선수였다. 결승은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었다. 미셸 위가 2번홀(파5)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먼저 기선을 올렸다.

하지만 니라파스퐁폰은 3번홀 버디를 시작으로 반격을 시작, 8번홀(파3)에선 무려 4홀차로 앞서나갔다.

승부는 35번째 홀(파3·135야드)에서 갈렸다. 둘 다 1m가 채 안 되는 파 퍼트를 남긴 상황에서 니라파스퐁폰은 파 퍼트에 실패했고,

미셸 위는 파를 잡아 대접전을 ‘해피 엔딩’으로 장식했다. 위성미는 “열 살 때부터 출전한 전국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해서 기쁘다”며 “나는 다른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꺾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조선

 

2003 - 납북됐던 '대영호'기관장 김병도씨 30년만에 귀환

1999 - '99 건축문화의 해 기념 엽서 발행

’99 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회(위원장 이광노)는 29일 오후 2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선포식을 갖고 본격적인

건축문화의 해의 닻을 올린다.

‘삶의 터전, 문화의 바탕’이라는 공식 슬로건 아래 펼쳐질 중점 사업은 △건축문화엑스포 △한국현대건축100년 특별기획전

△밀레니엄 기념조형물 조성 △동서양 건축문화 비교 국제심포지엄 △아카시아(ARCASIA) 국제포럼

△내가 가꾼 우리 마을 콘테스트 △전국 건축문화자산 조사 체계화 등이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사업은 9월 28일부터 10월 25일까지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펼쳐지는 건축문화엑스포. 주제관인

‘한국건축문화 5000년전’을 비롯한 ‘동서양 건축 미래의 건축’등 건축의 종합문화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또한 밀레니엄 사업으로 문화관광부 산하 ‘문화비전 2000위원회’와 연계해 기념조형물 건립안을 마련하고, 모든 건축문화

자료의 중심이 될 자료관 건립을 위한 각 자료 등을 수집한다. 또한 건축이 가장 큰 관광 자산이라는 인식아래 전국의 건축문화

자산을 조사해 이를 정보화하고 외국인과 일반시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제별, 지역별 건축문화기행도 연중 실시한다.

이경숙 기자 -현대불교 1999-01-27
http://news.buddhapia.com/news/BNA007/BNA0076320_1.html 

 

’99 건축문화의 해 선언문
인간의 삶은 존엄하다. 그 존엄한 삶을 담는 건축 또한 존엄하다. 건축은 모든 문화행위의 바탕이 되고

동시에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표상하는 문화자산이다. 
건축가는 예술적 능력과 고유한 철학을 가지고 높은 수준의 기술을 활용하여 보다 나은 사회와 환경을 만들려는 전문인이다.

또한 그 시대, 그 지역의 역사, 경제, 사회, 문화를 건축으로 창조하는 실천인이며,

인류공동의 절대적 사명인 환경보전의 전면에 서는 시대의 증인이다.
지난 30여 년 한국의 건축은 경제발전을 선도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개발과 성장의 뒷면에는 전통적 문화가치가

심하게 왜곡된 질곡의 역사가 있었고 환경윤리가 무시된 채 급속히 진행된 근대화 운동으로 경제 제일주의,

개발 우선의 논리 그리고 이에 편승한 이기주의에 의해 건축과 도시는 비인간화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국토와 자연환경은 파괴되어 우리와 우리 후손의 생존조차 위협받는 위기에 처해 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첫 세기가 열리는 역사적 전환기에 있다. 근대 산업사회의 종언과 정보문화 사회의 시작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경제성장만이 삶의 질의 향상이 아님을 깊이 반성하고 인간 환경의 본원적 가치를 새로이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감으로 오늘의 위기를 의식전환의 기회로 바꾸어야 한다.

이제 건축은 모든 시민이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문화적 대상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선조들의 위대한 건축문화유산, 개발된 과학기술, 축적된 경제력 그리고 확고한 정체성에

근거한 철학의 기반 위에 이 시대, 우리의 건축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으자.
1999년은 건축문화의 해이다. 문화가 일상을 채우는 새로운 세기, 지혜의 시대를 여는 새 출발에 모두 함께 하자. (1999. 1.)

http://www.kcaf.or.kr/yearbook/2000/misul/ms06.html

 

1999 -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모습이 1400여년 만에 재현되어 국립공주박물관서 공개

1999 - 클린턴 미국 대통령, 국가 미사일방위체제 (NMD) 법안 서명

 

1998 -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자원자 5천여명 지원한 가운데 사상 첫 대규모 에이즈 백신 임상실험 시작

「에이즈백스(AIDSVAX)」가 5,000명의 환자에게 실험한 결과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이 약품의 제조회사

백스겐이 99년 10월 12일 발표하였습니다. 이 실험은 6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돼 56개 병원이 참여했으며,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이 에이즈백스가 안전하고 효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봄 3년간에 걸친 대규모 에이즈백스 실험을 허용한 바 있습니다.
http://www.hidoc.co.kr/HealthPedia/AllPedia.aspx?MODE=VIEW&srno=8701&ContentType=3

 

지난해 가을, 국제에이즈치료전문의협회(IARAC)가 생백신 임상 실험을 자원하고 나선 것을 계기로 백신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올해초 `에이즈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오는 2007년까지 백신 개발을 목표로 예산을 대폭 늘이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립보건연구소(NIH) 안에 에이즈백신연구위원회(AVRC)를 따로 두는 한편 독립된 백신센터 건물도 최근 착공했다. 백신연구위원회 책임자인 데이빗 볼티모어는 “내년에는 정부가 에이즈 예방에 투자하는 예산에서 백신 개발에 할애하는 비율이 처음으로 10%를 넘어서게 된다”며 “앞으로

그 비율을 점차적으로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민간 분야에서도 백신 개발 열기가 뜨겁다. 대형 제약회사인 백스젠사는 지난 6월 자원자 5000명을 상대로 최대 규모의

에이즈 백신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특히 이번에 임상시험에 들어간 백신은 안전성 논란이 있었던 이른바 `생백신'으로서,

미 식품의약국의 정식 승인을 받은 마지막 3단계 임상실험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다양한 백신 모델 개발도

한창이다, 올해 들어 전 세계에서 모두 25개의 후보 백신이 1단계 임상시험을 시도해 그중 3개가 2번째 임상을 통과했으며, 1개 백신은 3단계 임상시험을 준비중이다. 국제에이즈백신연구소(IAVI)는 “전 세계적인 전략”을 모토로

유엔에이즈위원회(UNAIDS), 미 국립보건연구소(NIH), 프랑스 에이즈연구소 등이 서로 협조 체계를 구축하는 데

향후 9년간 대략 350만~500만 달러를 쏟아 붇기로 했다.

http://www.hani.co.kr/special/21century/data/102602.html 

 

1997.6.23-6.27  김영삼 대통령, 유엔환경특별총회(뉴욕) 계기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

http://www.agendanet.co.kr/zb41pl7/bbs/view.php?id=dip_sub1&no=29

1997 - 민간지원 북한구호식량 첫 국적선 <장영호>, 부산에서 흥남으로 출발 /물배 

 

1996 -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 승찬 스님 입적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곧 생사요,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이 누구를 말미암아 있는 일이냐,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손등과 손바닥이니라" 1996년 6월 23일 입적한 승찬 스님이 남긴 임종게(臨終偈)이다.

승찬 스님은 효봉(1888∼1966), 구산(1909∼1983)스님으로 이어지는 송광사의 근대 승맥을 잇는 인물이다. 평남 개천 출신인

승찬 스님은 동국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1947년 10월 지리산 칠불암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송광사 초대~2대 방장을

역임한 구산 스님은 절집안에서 그의 형님뻘이고 법정스님, 시인 고은씨 등은 아우가 된다.

1960년 통영 미래사의 주지가 된 승찬 스님은 이후 충무 용화사, 순천 송광사 등 중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중앙감찰위원 등으로 종단운영에도 참여했다. 1984년 조계총림 제3대 방장으로 추대된 승찬 스님은 이후

효봉문도회 회장, 보조사상연구원 총재, 전국불일회 총재 등으로 한국불교의 한 축을 형성하는 송광사 문중을 이끌어 왔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

 

1996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 사망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77)가 1996년 6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는

그리스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다. 반군사독재 투쟁 끝에 두 차례의 투옥과 망명, 3차례의 총리 재임과 세번의 총선 패배,

그리고 두 번의 결혼 등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1981년 총선에서 대승, 그리스 최초의 좌파사회당(PASOK) 총리가 됐다.
총리가 된 그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간통죄 폐지, 이혼 허용, 사회보장 확대 등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1985년 재선되기도 했다. 그리스 내 미군기지 철수를 주장하는 등 냉전의 틈바구니에서도 독자노선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 EU 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그리스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그는 당시 신처럼 추앙받았다. 그는 그러나 1988년 사회당 각료들의 대규모 뇌물수수 사건이

터지면서 재판에 회부되는 등 오욕을 겪었고, 1989년 이후 세번의 총선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뇌물 스캔들 혐의를 벗고 1993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1919년 에게해의 섬에서 태어난 파판드레우는 아테네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급진적 좌파이념에 눈을 떴다.

1939년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대 초 귀국, 1964년 아버지인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 밑에서 장관직을 맡았으나 1967년 쿠데타로 독재 체제가 들어선 뒤 투옥됐다가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군정이 붕괴된 1974년 조국으로 돌아와 PASOK를 창당했다. -조선

 

1995 - 김영삼 대통령, 김정일 주석직 승계후 남북정상회담 재추진 시사

1995 - '95 미술의 해 기념 엽서 발행

1995 - 북한-일본, 동경에서 쌀 제공문제 관련 협상

 

1994 - 강원도 철원군 구 노동당사에서 평화를 위한 열린음악회 열림

KBSTV 열린음악회 93년 5월9일 처음 방송된 KBS TV의 ‘열린 음악회’가 오는 2월14일 방송 3백회를 맞는다.
‘열린 음악회’는 지난 6년동안 제목처럼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의 장르간, 중·장년층과 청소년층의 세대간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동안 1백1회가 치러진 야외공연이 찾은 곳도 이색적이다. 94년 6월 한국방송사상 처음으로 민간인통제구역인 철원지역의 옛 노동당사에서 ‘평화를 위한 열린음악회’가 열렸는가 하면, 94년 10월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아름다운 정치를 위한

열린 음악회’에는 5만여명의 관객이 운집했다. -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12022000801

 

1994년 6월 25일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민간인 통제 구역인 철원의 구 노동당사에서 제작된 '열린 음악회'는

야외 공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더불어 의자 등의 기자재 등을 공급하던 업체들이 때아닌 호황을 누릴

정도로 공연장을 찾는 청중 수의 증가는 폭발적이었다.
백승현 cori23@hanmail.net KBS 저널-
http://www.kbs.co.kr/jnal/0109/text_04.html 

 

1994년 6월 26일 밤,‘ 비무장지대 노동당사 평화를 위한 열린 음악회’란 긴 이름의 공연이 열리던 그 밤, TV 화면에는

그 거추장스러운‘죄 패’가 비치지 않았다. 노동당사 앞면 42개의 부서진 창문엔 그날 밤 50여 년 만에 불이 밝혀졌다.

테라스와 창문 위에 사람이 올라서 있었다. 그들은 마네킹처럼 서있지만 모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동당사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 저주의 건물에 평화를 덧씌우기 한 기막힌 이벤트에 노동당사는 마침내‘전향’하고 있었다.
북으로 돌아간 이인모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를 다룬 영화와 찬가까지 만들어졌다.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리인모인민학교’로 개명됐다. 2007년 6월 16일

그는 80세로 사망했다. 60년을 공산주의자로 살면서 그 가운데 34년을 공산주의를 위해 옥고를 치를 그의 장례식은‘인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그런 이인모의 소식을 듣는 동안 노동당사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1994년, 그 무렵 그룹‘서태지와 아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전설이었다. 그해 8월, 3집 앨범‘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

배경으로 노동당사가 찍혀나갔다. 이미‘열린 음악회’에서 평화를 염원했던

노동당사는 순식간에 평화의 상징물로 각인 됐다.
글 _ 함광복(GTB DMZ 연구소 소장) /THE ARMY 월간 아미
http://www.thearmy.co.kr/base_5/menu_4/menu_26.phpcom_board_basic=

read_form&com_board_idx=20&submenu=26&menu=4&&com_board_search_code=

&com_board_search_value1=&com_board_search_value2=&com_board_page=&

 

1993 - 나이지리아 군부 독재자 이브라힘 바방기다, 대통령 선거결과 무효화하고 민주주의로의 복귀 거부

1991 -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서 남북단일팀, 8강 진출

 

1991 - 주식회사 세가에서 제네시스소닉을 발매하다.

주식회사 세가(일본어: 株式会社セガ, Sega Corporation)는 일본의 게임 개발사이다.

1960년 6월 3일 설립되었다. /위키백과

 

소닉 더 헤지호그(Sonic the Hedgehog, 일본어: ソニック・ザ・ヘッジホッグ)는 세가

가정용 게임기 메가 드라이브게임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이다. /위키백과

 

1987 - 전남 영광 원전 7,8호기 준공 (발전 용량 190만 kw)

1987 - 제1회 올림픽의 날 

1986 - 미국 오하이오주 페리 원전에 화재

 

1986 - 일본 이바라키현 토카이 사업소 핵연료검사중 방사능 오염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관 12명 방사능 오염

1985 - 인도항공 보잉747기 아일랜드 남쪽 대서양상공서 공중폭발. 329명 사망

 

1981 - 우리나라 최고의 태극기(미국인 윌리암 롤스턴 소유)가 91년 만에 귀환. 정부에 기증

1981 - 미국 윌리엄 롤스턴 소유 최고 태극기, 91년만에 한국 귀환

1981 - 한-미 경제협의회 서울에서 열림

 

1981 - 프랑스 정부, 공산당 4명 입각

1980 - 베트남, 태국 국경 침범

 

1980 - 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영내로부터 타이 영내로 침입

1979 - 윤보선 전 대통령 등 20여명, 화신 백화점 앞에서 카터 방한 반대시위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대북정책인 ‘6ㆍ23선언’이 발표되자

이를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를 지나가던 시민들이 받아보고 있다. 

 

1973 - 6.23선언(1973)
1973년 오늘!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 '6.23선언'을 발표한다.
남,북한이 앞으로는 서로 내정간섭하지 말자는 게 이 선언의 뼈대다.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과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를 인정하고 호혜평등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원칙 등

모두 7개 항으로 구성됐다.
6.23선언은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에 따른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통일정책을 탈피한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평화통일 의지를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선언을 한반도에 2개의 정부를 인정함으로써 분단을 영구화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
북한은 또 6.23 선언이 1년 전 남측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측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남북공동성명의 자주,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 YTN

 

1973 - 박정희 대통령 `6ㆍ23선언` 발표

조국의 평화통일 및 개방선린외교를 표방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성명 이른바 ‘6ㆍ23선언’이 1973년 6월 23일 발표됐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다’ 등의 내용을 담은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선언에 국민들은 ‘실리(實利)’를

향한 방향전환으로 여기며 이를 차분히 받아들였다.
이날의 성명은 1970년 8월 15일 한국정부의 ‘평화통일구상선언’ 발표에 북한이 19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로 응답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의 경험을 토대로 통일 여건을 보다 실질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통일외교의 의지를 담고 있다.
모두 7개항으로 구성된 이 선언은 1.조국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2.남북한 상호 내정불간섭 3.남북대화 성실 인내 노력 계속 4.북한의 국제기구 가입 불반대 5.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불반대 6.상호평등원칙 아래 모든 국가와 문호개방 7.우방과 기존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의 의의를 크게 두가지로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사적으로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

둘째, 민족사적으로 ‘선평화 후통일’ 여건 마련의 현실적인 방향을 천명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조처에

영국과 일본 등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 ‘창조적 정책’이라고 환영했다. -조선

 

1973 - 6·23대통령특별선언 발표
1973년 6월 23일 6·23대통령특별선언이 발표되었다. 1970년대초 국제화해 조류가 조성되면서 남북한은 고위 정치교섭을 통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의 3대원칙을 천명했다. 이를 통해 북한을 협상의 실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통일을 남북한

당사자들 사이의 문제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유신체제를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해 6월 23일 '통일과 외교에 관한 특별선언'을 발표해 남북한의 불가침협정 체결 및 남북한의 국제연합(UN) 동시가입안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같은 날 북한은 '조국통일 5대강령'을 제시해 주한미군의 철수와 '고려연방국' 창설 및 '고려연방국' 하에서의 UN 가입을 내세웠으며,

8월 28일에는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브리태니커

 

1973 - 김일성, 조국통일 5대 강령 발표
조국통일 5대강령

1973년 6월 23일 후사크 체코 공산당 총비서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당시 김일성 주석이 연설을 통해

제시한 5개 항목의 통일강령.

남한의 6·23대통령특별선언과 동시에 발표되었다.

강령의 내용은

① 남북한간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 완화,

② 남북한간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 실천,

③ 북과 남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집,

④ 고려연방공화국의 단일 국호에 의한 남북연방제 실시,

⑤ 단독 유엔가입 반대 및 '고려연방공화국'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 등이다.

이 강령을 제시하기에 앞서 북한은 1971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회의에서 통일 8개항을 제시했다.

이 8개항은

① 외국군 철수·감군,

② 외국과의 조약 폐기,

③ 남북연방제 실시,

④ 각 정당·사회단체의 활동보장,

⑤ 과도기 조치로 남북연방제 실시,

⑥ 광범위한 교류,

⑦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 정치협상회의 개최 등이었다.

구성면에서 보면 조국통일 5대강령은 이 8개항을 단순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달라진 것은

일부 용어를 변경하고 연방제에 '고려'라는 국호를 첨가한 것, 그리고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주장한 것이다.

북한은 조국통일 5대강령을 발표하면서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를 사용하는 연방공화국을 창설하자는 보다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은 남한이 외세의 간섭을 배제한 자유로운 총선거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차선책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1960년대 식의 연방제와는 달리 당시 여건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도라고 주장하면서 내놓은 것이다.

秦熙官 글 | 金鍊鐵 감수 - 브리태니커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018566&v=42

 

1971 - FTP확립한 인터넷 문서 발표

 

1970 - 포항제철 중후판공장 설비공급계약 체결(1970.6.23)

포스코는 제철소 건설의 일반적인 순서인 제선 제강 공장부터 건설하지 않고

열연공장 중후판 공장부터 건설했습니다. 설비공급계약도 이들 공장부터 추진했습니다.

http://museum.posco.co.kr/museum/docs/kor/mTour/s91b3050111c.jsp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1기 설비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2-11-19  제품 해외수출 시작, 후판제품 7,400톤을 미국과 대만에 수출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3-12-01  2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4-10-21  직업훈련원 개소 및 1기생 입소식 

1975-11-29  1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78-12-08  3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9-02-01  4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9-09-27  4본주 입주식

1981-02-18  4기 설비 종합준공식(조강 연산 850만톤 규모)

1981-09-01  4기 2차 설비 착공식

1983-05-25  4기 2차 설비 종합준공식

 http://museum.posco.co.kr/museum

 

1970 - 일본 대학생들, 도쿄에서 미.일안보조약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 전개

1968 - 만원버스 춘천호에 추락, 21명 사망

 

1967 - 경기도청 서울서 수원으로 이전(1967)
1967년 오늘 서울 중앙청 앞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에 마련된 새 청사로 이전했다.
박태원 경기도지사와 정일권 총리 등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청 행사가 열렸다.
그 동안 경기도민들은 도청에 볼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을 오가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수원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새 경기도청에 나와 수원이 도청소재지가 된 것을 축하했다.

 

1966 - 사우디 국왕, 뉴욕 방문(1966)
1966년 오늘!
파이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미국 뉴욕을 공식 방문한다.
파이살 왕은 유대인이 많이 사는 이 도시에서 하필 유대인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연설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뉴욕시장은 파이살 왕과의 만찬을 일방적으로 취소한다.
뉴욕시장은 파이살 왕이 귀국길에 오른 뒤 기자회견을 열어 파이살 왕의 유대인에 대한 발언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만찬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1965 - 한국군 1개 전투사단 파월에 관한 대미합의각서 수교

미국은 1965년 3월부터 지상군을 증강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존슨 미국대통령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유우방국가들에게 월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에 우리정부는 비전투 부대파월 계획안을 수립하고 파월(播越)에 대한 제반준비를 착수하였다.

그러던중 구엔, 칸, 월남수상으로부터 한국군의 지원을 호소하는 공한이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 9월 11일 제 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이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해서 9월 22일 월남의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월남사태에 대한 처지를 밝히고, 한국군을 증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병력증파계획안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고, 국방부는 그 준비에 착수했다.

또 이어서 1965년 1월 2일에는 월남정부가 제 2차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공한을 보내와 이에 따라 1개 공병대대, 1개 경비대대, 1개 수송중대 및 1개 해병, 공병중대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떠나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

다얀으로 이동해 그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 정부는 1965년 6월 14일 월남공화국의 수상으로부터 한국군 1개 전투사단 지원 요청서를 접수하고 1965년 6월 23일 한국군 1개 전투사단 파월에 관한 대미합의각서를 수교하였다.

이에 따라 1965년 8월 29일 맹호부대가 파월 부대로 결정되었으며, 4주간의 국내훈련이 실시되었다.

한편1965년 9월 1일에는 맹호부대 예하의 군수지원사령부인 십자성부대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또 뒤를 이어 1965년 9월 25일에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1965년 10월 16일 맹호부대 본대는 부산항에서 출국하여

그 해 10월 22일 퀴논항에 도착한 다음, 11월 3일 미제1공수사단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으며, 11월 6일에는 퀴논 공설

운동장에서 월남국민의 환영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어 1966년 6월 1일 월남증파전투사단으로서 백마부대가 구성되었으며,

이들도 4주간의 교육을 실시하고, 1966년 9월 22일 여의도공항에서 나트랑으로 공수되어 9월 23일 지휘소를 개소하고

 작전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http://www.reportnet.co.kr/knowledge/pop_preview.html?dn=3206039  

 

1964 - 콩고 반란

1963 - 케네디 미국 대통령, 베를린 방문(1963)
1963년 오늘!
존.F.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동서냉전의 현장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서독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케네디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
케네디는 아데나워 서독 총리와 함께 손을 흔들어 답례한다.
그는 베를린 장벽을 바라보며 서독인들에게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말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자고 연설했다.

 

1962 - 라오스, 푸마3파 연합정부 발족  

1961 - 세계12개국이 조인한 남극조약 발효

극지 개발이 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남극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12개국이 워싱턴에 모여 1959년 12월 1일 조인한 남극조약이 1961년 6월 23일부터 발효됐다. 조약은 남극지역이 평화목적으로만 이용되는 것을 원칙으로 해 군사시설 설치,

군사연습, 병기실험 등 소위 군사적 조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핵폭발과 방사능폐기물 처리도 이후의 새로운 국제협정에 의해

인정되어지지 않는 한 금지토록 했다. 또 영토청구권의 동결, 과학적 조사의 자유와 지속적인 국제협력도 구체화했다.

조약이 성립하게 된 계기는 1958년 5월 미국정부가 "국제지구관측년"(1957년 7월~1958년 12월) 회의에 참가한 12개국 대표에

남극관련 국제회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제안에 12개국 대표가 6월1일 워싱턴에 모여 최초의 예비회담을 열었고

1년여 동안 58회의 예비회담을 거쳐 1959년 12월1일 12개국 대표들이 남극조약에 조인했다. -조선

 

남극조약[ 南極條約, Antarctic Treaty ]

과학연구를 위해 남극대륙을 비무장지대로 보존할 것을 규정한 국제조약(1959. 12. 1).

워싱턴 회의 결과 체결되어 12개국이 서명했고, 이후에 다른 국가들이 가입했다. 조인 12개국은 아르헨티나·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영국·칠레·프랑스·일본·뉴질랜드·노르웨이·남아프리카 공화국·미국·소련 등으로 이 국가들을 원초서명국이라 한다.

원초서명국과 남극에 기지를 설치한 서명국으로 구성된 남극조약협의당사국(Antarctic Treaty Consultative Party/ ATCP)이

배타적 권리를 갖고 남극조약을 운영하고 있다. 남극조약은 남극대륙에 대한 영토주권의 주장을 반대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기지 설치, 군사기동훈련, 핵무기를 포함한 무기실험, 방사능폐기물의 처분 등을 금하는 것이다. 남극조약은 자유로운

과학탐사와 과학정보 및 전문인력의 교환을 장려한다. 한국은 1986년 세계에서 33번째로 가입했으며,

1989년 10월 세계에서 23번째로 협의당사국의 지위를 얻었다. 북한은 1987년 세계에서 35번째로 가입했다.

 

남극 조약과 관련 협정을 묶은 남극 조약 체제지구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지 않는 대륙남극에 관한 규정이다.

미국소련을 비롯한 12개 나라가 모여 체결했다. 남극의 평화적 이용, 과학 조사와 교류의 허용, 영유권 주장 금지,

군사 행동의 금지 등을 담고 있다. 남극 조약은 냉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맺어진 군비규제 협정이다.

남극 조약 체제

남극 조약은 1959년 12월 1일 맺어져 1961년 6월 23일부터 그 효력을 발휘했다. 1957년/1958년의 국제지구관측의

해를 맞아 남극에서 활동중인 12개 나라를 미국이 초청한 회의에서 조약이 논의되었다. 이때 초대받은 나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노르웨이·뉴질랜드·미국·벨기에·소련·아르헨티나·영국·오스트레일리아·일본·칠레·프랑스이다.

남극 조약의 내용

그밖에 환경 보존에 관한 여러 협정이 추가로 맺어졌다.

회원국

매년 "남극 조약 자문 회의"를 통해 남극 지역의 운영과 관리를 논의하고 있다. 남극 조약 가입 44개 나라 중 27개 나라가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자문 회원국이라고 하며, 처음 조약을 가입한 12개 나라 이외에 남극에서 과학 활동을 벌이고 있는 15개 나라를 포함한다. 이 추가 회원국은 네덜란드·대한민국·독일·불가리아·브라질·스웨덴·에스파냐·에콰도르·

우루과이·이탈리아·인도·중화인민공화국·페루·폴란드·핀란드이다.

나머지 17개 비자문 회원국은 과테말라·그리스·덴마크·루마니아·베네수엘라·스위스·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체코·캐나다·콜롬비아·쿠바·터키·파푸아 뉴기니·헝가리이다.

대한민국은 1986년 11월 28일 33번째로 조약에 가입했고, 1989년 10월 9일 자문 회원국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7년 1월 21일 35번째로 조약에 가입했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1956 - 이집트 초대 대통령 나세르 취임, 민정 시작

1956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당선(1956)

1956년 오늘, 나세르가 이집트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선 후보는 당시 이집트 현직 총리였던 나세르 본인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통령 권한을 강화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쓰고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토지개혁 등을 단행했다.
취임 한 달 뒤인 1956년 7월 미국과 영국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계획에 대한 자금원조를 철회하자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때문에 같은 해 10월∼11월 수에즈전쟁이 일어난다.


1956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당선

1952년 7월, 34세의 청년장교 나세르가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무혈쿠데타를 감행, 영국의 비호를 받아온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렸다.

1차 중동전의 영웅 나기브를 1인자로 내세우고 무대 뒤에서 힘을 비축한 나세르는 예상대로 2년 뒤 나기브를 축출했다.

1956년 1월에 일당 정치체제에 사회주의 아랍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공포하고, 6월 23일에는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를 실시, 99.9%의 찬성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개월 뒤에는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 중동지역을 세계 질서의

주요 변수로 부각시켰다.

아스완댐 건설 비용 마련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서방국가로부터 운하 소유권을 되찾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국유화 조치가 야기한 2차 중동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 ‘서방세계에 도전한 첫 아랍인’이 돼 단숨에 아랍세계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나세르는 여세를 몰아 지리멸렬한 중동지역에 아랍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블록을 형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를 경찰국가로 만들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아랍통합을 꿈꾼 진정한 지도자였다. -조선

 

1956 - 시토(SEATO)본부 방콕에 설치

1955 - 국립박물관, 남산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개관

1955 - 주요 도시에 양곡배급 실시

 

1953 - 베를린장벽 최초희생자 추도식, 서독서 거행

1952 - UN군 , 수풍댐 폭격

1952 - 한국-만주 국경의 수풍발전소 폭격당함

 

1951 - 소련 UN대사 말리크, 한국전 휴전 제의

1951 - 말리크 소련 유엔 대표 휴전 제의

1949 - 맹호부대 창설

 

1949 - 이란-이라크, 상호원조협정 조인 

화염방사기로 동굴진지를 공격하는 미군 병사.

 

1945 - 오키나와 전투 종료

1945 - 미군, 오키나와 수비대 궤멸(1945)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오늘, 미군이 오키나와섬을 지키던 일본 수비대를 전멸시킨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 이 섬의 주민들을 동원해 수비대를 조직했다.
수비대로 편입됐던 주민 9만여 명이 결국 미군의 총공세로 희생됐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해 섬을 함락하기까지는 두 달이 넘게 걸렸다.
1945 - 미군 총공격에 일본 오키나와 수비대 전멸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대가 1945년 6월 23일 전멸했다. 오전 4시30분경 수비대 제32군 사령관도 자결해 사실상

오키나와는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4월 1일 미군은 수백척의 상륙선을 타고 오키나와에 상륙, 2개의 비행장을 점령했다. 상륙부대는 점차 증가해 18만명에 달했다.

일본군 오키나와수비대 주력부대인 제32군(약8만명)은 2번에 걸친 총공격으로 비행장 탈환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미군에 밀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월 31일 오히려 나패(那覇)시가 점령되었다. 6월에 들어서자 제32군과 다수의 민간인들이 산악지대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오키나와를 점령하려는 미군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 수비대, 의용군, 주민 등 약 15만명이 사망했다.

미군의 사상자수도 6만5천명에 달했다. 

앨런 튜링 

 

1912 - 현대 컴퓨터의 이론적 모델을 최초로 제시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출생

1912 -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출생

1912 - 세계최초 컴퓨터 개발자 앨런 튜링(Turing, Alan) 출생

1912 -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 디지털 전자 컴퓨터 콜로서스를 만든 앨런 튜링이 태어나다. 

튜링 [Turing, Alan Mathison, 1912.6.23~1954.6.7]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년6월 23일 ~ 1954년6월 7일)은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 논리학자이다. 특히 컴퓨터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튜링 테스트튜링 기계의 고안으로 특히 유명하다. 계산기 학회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수상하는 튜링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튜링은 1912년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기질을 드러내어 3주만에 읽기를 배웠으며

계산과 퍼즐에 능했다고 한다.

1931년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했고, 1936년미국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 영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연구 중 튜링 기계의 개념을 발표했다. 1939년 9월 브렛칠리 정부 암호학교 GCCS(현 GCHQ)에 들어가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이론적으로 해독했다. 그 이론에 따른 해독기 The Bombe를 개발. 1944년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 디지털 전자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를 만들었다.

이런 경험에서 만든 계산이론은 오늘날의 컴퓨터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튜링은 당시 영국에서 범죄로 인식되던 동성애자 혐의로 체포된 후 감옥과 화학 치료 중 선택을 해야 했고,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화학 치료를 선택하여 1년 간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았다. 그는 1954년 6월 8일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주변에 반쯤 먹은 사과가 놓여져 있었다. 사망 원인은 부검에 의해 치사량의 시안화칼륨을 주사한 사과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일설에는 튜링이 “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순수한 여자같은 죽음을 택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애플 컴퓨터의 로고인 '한 입 베어먹은 사과'는 튜링을 연상시키지만, 애플 컴퓨터가 로고를 만들 때 튜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11 - 20세기 광고업계에 혁신을 일으킨 오길비(Ogilvy, David M., 1911.6.23~1999) 출생

1910 - 프랑스의 극작가 아누이(Jea-Marie-Lucien-Pierre Anouilh, 1910~1987) 출생

 

"인간은 구덩이에 빠진 쥐처럼 몸부림치기를 그만두어야 하고

도망하겠다는 보기 흉한 노력도 중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소리쳐야 한다."

 

- 장 아누이

 

1894 - 13개국 대표, 올림픽 경기 부활 결의

1894 - 쿠베르탱, 파리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설립

1894 - 올림픽 부활 결정되고 올림픽데이 제정

 

1894 - 유럽 13개국 대표, 올림픽 부활 결의

1894 - 영국왕 에드워드8세 출생

 

1884 - 청나라, 프랑스 전쟁 발발

1878 - 독립운동가 김동삼 출생

 

1763 - 나폴레옹 1세의 황후 조제핀(Joséphine de Beauharnais) 출생  

조제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6.23~1814.5.29]

나폴레옹 1세의 첫번째 황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출생. 16세 때에 프랑스로 가서 보아르네 자작과 결혼,

두 아이를 낳았다. 1794년 남편이 처형되자, 그녀도 투옥당했다가 같은 해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 때 석방되었다.

총재정부기에는 미모와 매력으로 사교계의 꽃이 되었고, 1796년 나폴레옹과 재혼하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중에

부정을 하여 한때 위기에 처했던 일도 있었으나,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제위 후계자를 낳지 못하여 1809년 이혼하였다. /

 

1668 - 이탈리아의 철학자 비코(Vico, Giambattista) 출생

비코 [Vico, Giambattista, 1668.6.23~1744.1.23]

가난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주로 독학으로 학문을 쌓았다. 데카르트의 연역적 방법이 유행했던 당시 생활감각과 역사감각의

근대적 문제를 제기했다. 주저인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1725)에서 인간사회는 성장과 쇠퇴의 단계들을 거치며,

인간의 역사는 인식의 감각과 표상력, 이성의 3단계에 호응하는 3개의 주기, 즉 신의 시대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의 끊임없는

순환을 통해 발전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 발전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임을 피력했다.

훗날 클레멘스 12세로서 교황에 오르는 로렌초 코르시니 추기경은, 인간 사회가 일찍이 '짐승 같은' 단계를 거쳤으며

사람들이 희미한 이성형태만을 소유하는 이 원시적 미개상태로 사회가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비코의

대담한 주장에 놀라 약속했던 후원을 철회하기도 했다. 오늘날 비코는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선구자로 유럽 지성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새로운 과학>은 유럽 지성사의 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감이 상실될 때 인간성도 상실된다."

 

- 잠바티스타 비코

 

1453 - (조선 단종 1)악보 인쇄 간행 /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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