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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19

오늘의 사건  06.19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아웅산 수지 여사

2007 - 버마서 아웅산 수지 여사 석방 요구 시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버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가 19일 62세 생일을 맞은 가운데 지지자들이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수지 여사가 사실상 이끌고 있는 버마의 제 1 야당 민주주의 민족동맹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오늘(19일) 당사에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풍선을 날리며 수지 여사의 석방을 촉구했습니다.

수지 여사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전세계 12개 나라에서 열렸거나 개최될 예정이며 미국에서만

300 여개의 행사가 준비돼 있습니다. 미국 의회 의원들의 모임인 인권 코커스는 오늘 수지 여사를 위한 특별 행사를 개최합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아세안의 국회의원들 모임인 아세안 IPMC 는 오늘 성명을 내고 수지여사에 대한 지지를 밝혔습니다.

이 의원모임은 또 아세안이 버마 군사정부에 정치개혁을 촉구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버마당국은 19일  지난 18년 세월의 대부분을 가택연금으로 보내고 있는 수지 여사의 랭군내 자택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습니다. 버마 군사정부는 지난 5월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라는 국제사회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가택연금기간을 1년

더 연장했습니다.

수지 여사의 전화선은 끊겨있으며 사실상 외부인의 방문도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은 지난 1990년 선거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버마 군사정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07-06-19

http://www.voanews.com/korean/2007-06-19-voa10.cfm 

 

2006 - 1st Session, UN Human Rights Council

UN, Switzerland, 19 Jun 2006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2005 - 경기도 연천군 최전방 부대 내무반서 총기난사사건 발생, 8명 사망

2004 - ‘이승복 장학회’ 설립 창립총회 개최

2003 - 중국 양쯔강서 여객선-화물선 충돌 90명 실종

1999년 6월 19일 결혼식을 올린 영

국의 에드워드 왕자와 존스 양이 그

들을 뒤따르는 군중에 손을 흔들고

있다. /조선

 

1999 -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 소피 라이스 존스와 결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막내아들 에드워드(35) 왕자와 평민 출신 소피 라이스 존스(34)양이 1999년 6월 19일

오후 5시 윈저성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형 찰스-앤드루와는 달리 이날 결혼식은 왕실 가족잔치로 조촐하게 진행됐다. 여왕 부부 등 왕실 가족, 소피 친정 식구,

하콘 노르웨이 왕세자, 브루나이 술탄 등 각국 왕족, 캔터베리 대주교,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

가수 엘튼 존 등 560명만 식장에 들어갔다. 인근 주민 8000명은 윈저성 경내에서 혼례행진을 지켜봤다.

이날 에드워드 왕자는 소피를 위해 손수 디자인한 백진주와 흑진주를 섞어서 만든 목걸이를 결혼 선물로 준비했다. 결혼식은 금반지가 소피 손가락에 잘 들어가지 않아 에드워드가 쩔쩔 맨 해프닝을 제외하고는 45분간 순조롭게 진행됐다. 신랑 신부는 성당 회랑에서 첫 키스를 나눈 뒤, 군중들이 샴페인을 터트리며 환호하는 가운데 마차를 타고 피로연 장소인 윈저성으로 향했다.

여왕은 결혼식 직전 "에드워드를 웨섹스 백작에, 소피를 웨섹스 백작 부인`에 봉한다"고 발표했다. - 조선

 

1994 - 콜롬비아 대통령선거, 자유당의 삼퍼 피사노 후보 당선

1993 - 영국의 소설가 골딩 사망 - 1983년 `파리대왕`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90 - 한국-이스라엘, 학술교류 협력의정서 체결

 

1981 - 대한체육회, LA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81 - 유럽 10개국이 공동개발한 우주로켓 `아리안` 발사  

1981 - 유럽이 공동개발한 우주로켓트 `아리안`호 남미 가이아나에서 발사

 

1981 - 카이로서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유혈충돌

1977 - 고리 1호기 원자로 초임계(원자로 점화, 핵분열 시작)

1977 -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점화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성대회 본회의 모습. 

 

1975 - 제1회 세계 여성대회 열려

1975년 6월 19일, ‘평등·발전·평화’를 캐치프레이즈로 한 제1회 세계 여성대회가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다.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대회에는 반다라나이케 스리랑카 총리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 등 세계 138개국에서 2000여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는 공통의 목표는 같았지만 국가마다 여성이 처한 상황이 달라 관심분야에 큰 편차를 보였다.

여성대회였음에도 35명의 대회 최고위직 중 여성은 사무총장이 유일할 정도로 주요직을 남성들이 차지한 것도 문제가 됐다.

특히 멕시코는 남성을 대표로 파견하고 그를 대회 의장으로 선출해 빈축을 샀다.

첫 대회인 탓에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세계 여성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고 미스·미세스로 불리던 여성을

‘미즈’로 통일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대회였다. 이후 5년마다 대륙을 달리해 대회가 열리고 있다. - 조선

 

1969 - 3선개헌반대 학생데모 시작

1965 - 알제리, 군부쿠데타 발생
1965년 오늘!
알제리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주동자는 국방장관인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
아흐메드 벤벨라 대통령을 쫓아내고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쿠데타로 실각한 벤벨라는 알제리 독립 1년 뒤인 1963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돼 범아프리카운동과

반식민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부메디아는 혁명평의회를 구성해 주요 산업과 은행 등을 국유화하면서

급진사회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1967년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1978년 12월 숨질 때까지 알제리를 통치했다. - YTN

 

1965 - 프랑스 배우 안전띠 시연(1965)
1965년 오늘!
프랑스의 한 영화배우가 자동차 안전띠의 안정성을 증명하러 나섰다.
주인공은 질레스 델라메어!
그는 충돌한 자동차 속에서 보란 듯이 걸어 나왔다.
안전띠 덕분에 목숨을 건졌음을 보여 줬다.
배우의 목숨을 건 시연으로 자동차 안전띠의 착용이 법제화된다.
실제로 프랑스는 5년 뒤인 1970년 4월 1일부터 자동차 앞 좌석의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한다.
안전띠는 1959년 스웨덴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볼보사에 의해 처음 설치됐었다. - YTN

 

1963 - 케네디 미국 대통령, 인종차별철폐에 관한 특별교서를 의회에 제출

1961 - 쿠웨이트, 영국의 보호령(62년간)으로부터 독립

1961년 6월 19일 영국 정부는 보호령이었던 쿠웨이트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했다. 쿠웨이트가 처음으로 유럽 강대국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세기말이다.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막기 위해 영국과 쿠웨이트는 1899년 영국에게 쿠웨이트의

외교권을 넘겨 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1914년 영국-터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쿠웨이트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1923년에는 이라크와 북쪽 국경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한 이후 아랍 연맹도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1980년에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쿠웨이트의 안보를 위협했고,

1990년 쿠웨이트가 이라크군에게 점령당하자 미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이라크에 대한 공중폭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1960년 6월 19일 방한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오른쪽)을 허정 과도정부 대표가 영접하고 있다.

 

1960.6.19-6.20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 허정 국무총리 면담, 공동성명 발표 (6.20) 

http://www.agendanet.co.kr/zb41pl7/bbs/view.php?id=dip_sub1&no=29

 

1960 -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한(1960)
1960년 오늘!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미국 대통령이 1박2일 일정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한 아이젠하워!
서울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정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이젠하워는 이튿날 우리 국회에서 두 나라 사이의 협력를 강화하자고 연설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공산 세력의 침략에 적극 대응할 것을 약속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허정 과도정부 수반과 두 차례에 걸쳐 한미 고위회담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합의했다. - YTN

 

1960 - 아이젠하워 내한

4·19 후 2개월 만에 100만명의 인파가 다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웠다. 얼굴에는 분노 대신 반가움이,

두 손에는 돌멩이 대신 국기가 잡혀 있는 것이 그때와 다른 점이었다.

1960년 6월 19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이후

78년 만의 첫 방문이었고, 아이젠하워로서는 두 번째였다.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한

선거 공약을 지키기 위해 1952년 12월 당선자 자격으로 방문했다.

오후 4시3분, 미 대통령 전용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원래는 필리핀(14일)·대만(18일)·일본(19일)을 거쳐 22일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내 좌익 세력의 극렬 반대로 방일을 포기하고 한국행을 앞당긴 것이었다.

용산 미군기지로부터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숙소인 덕수궁 뒤 미 대사관저로 가려 했으나 “아이크(Ike·아이젠하워의 애칭)! 아이크”를 연호하며 서울역부터 시청 앞까지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 때문에 결국 샛길을 이용해야 할 만큼 그를 맞는 한국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신문들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면에 ‘Dear Ike, Welcome to New Korea’라는

장문의 영문 기사를 쓴 신문도 있었고, 조병화 시인은 ‘세기의 날개’라는 제목의 시를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로젠버그 부부의 아이들을 선두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탄원하기 위해

데모행진을 하는 사람들. 플랭카드에 "아빠와 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쓰여져 있다.

 

1953 - 로젠버그 부부 사형 집행  

미국 전역이 매카시 선풍으로 이성을 잃고 있던 1953년 6월 19일, 미국의 전기기사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부인 에설 로젠버그가 뉴욕주의 싱싱형무소에서 전기의자에 의한 사형에 처해졌다. 1944년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비밀을 빼내

소련에 넘겼다는 것이 처형이유였다.
로젠버그는 35세였고 부인은 37세였다. 이들은 1951년 4월 5일 스파이 주모자와 적극적 협력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이들 부부는 1950년 여름 간첩활동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아왔다. 공산당원이었던 로젠버그는 재판기간 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간첩행위에 대한 물증도 없었지만 마녀사냥의 광기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의 연방수사국장 에드거 후버는 이 사건을 `세기의 범죄`로 규정했고,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담당 판사 어빙 카우프먼은 "이들이 조국을 배반하고 소련에 원폭 기밀을 넘김으로 인류 역사가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사형선고는 세계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수많은 미국 시민을 비롯, 교황과 아인슈타인, 피카소, 사르트르, 러셀 등 세계의 지성들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건의 진실은 이들이 처형된 지 44년이 지난 1997년 `워싱턴 포스트`지에 의해 밝혀졌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로젠버그를 50여차례나 비밀리에 만난 전 KGB 요원 알렉산더 페크리소프의 증언을 통해 로젠버그가 원폭 제조기밀을 소련에 넘기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증언에 따르면 로젠버그는 소련에 고급 산업정보를 제공한 스파이이긴 했지만 원폭 기밀은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로젠버그는 간첩이 아니라는 좌파의 주장도, 원폭기밀을 제공했다는 우파의 주장도 모두 거짓임이 입증된 셈이다. /조선



1953 - 미국에서 로젠버그 부부소비에트 연방간첩 혐의로 사형이 집행되다. 

에델 그린글래스 로젠버그(Ethel Greenglass Rosenberg, 1915년 9월 28일1953년 6월 19일)와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 1918년 5월 12일1953년 6월 19일)는 미국공산주의자였으며,

소련에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로젠버그 부부가 정말로 간첩인지,

아니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위키백과

 

1950 - 2대 국회 개원(의장 신익희, 부의장 장택상 조봉암)

1950 - 제2대 국회 개원(1950)
1950년 오늘, 제2대 국회가 개원했다.
국회의장에 신익희씨, 부의장에는 장택상, 조봉암, 김동성씨가 선출됐다.
제2대 국회는 우리 나라 의정 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해 구성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제2대 국회의원 210명은 20일 전인 5월 30일 소선거구,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됐다.
무소속이 60%인 126석,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이 각각 24석을 차지했다.
2대 국회는 엿새 뒤 6.25전쟁이 일어나자 수도(首都)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1946 -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발표(1946)
1946년 오늘!
미 군정청은 국립 서울종합대학교 설립안을 발표한다.
경성대학과 8개 관립전문학교, 사립학교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해 서울대를 설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설립안이 발표된 지 두 달 만인 8월 22일 9개 단과대학과 한 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된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종합대학인 서울대가 출범한다.
서울대학교는 1975년 서울 동숭동을 떠나 지금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1945 -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 출생

1945 - 미얀마의 정치가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출생

아웅산수치 [Aung San Suu Kyi, 1945.6.19~ ] 

 

1944 - 마리아나 해전서 일본군 참패

1940 - 일본 프로야구 선수 장훈 출생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제임스 배리.

 

1937 -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배리(Barrie, James, 1860~1937) 사망 

1937 - ‘피터팬’ 저자 제임스 배리 사망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피터팬’의 저자 제임스 배리가 1937년 6월 19일 사망했다. 1860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배리는 에든버리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으나

곧 연극에 흥미를 갖게 돼 이후 많은 희곡을 남겼다.
이런 그를 단연 최고의 극작가 반열에 세운 것이 ‘피터팬’이다. 1902년 씌어진 ‘작은 백조’라는 소설에 입각해 5막짜리 희곡 ‘피터팬’을 썼는데 이것이 1904년 처음 무대에 상연된 후 100년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된 것이다. 아기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요정이 하나씩 태어난다는 깜찍한 발상, 행복한 생각을 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고 피터 팬처럼 세상의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의 고통과 하루하루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어른들에게도 작지 않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정작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은 희망과 즐거움만이 아닌 절망과 슬픔도 상징한다.

피터팬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엄마의 품과 가족 간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어두운 성장 배경이 반영된 것으로

그는 어린시절 죽은 형과 자신을 비교하는 어머니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즉, 작가 자신이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는 키가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다고 하니,

그 자신이 피터팬이 되어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 조선

 

1935 - 국제노동회의서 1주 40시간 노동제의 원칙을 근본조약으로 채택

1931 - 조만식 양주동 등, 한글연구회 조직

조만식 양주동 등, 한글연구회 조직

http://www.hangeul.or.kr/cap_np/hgn/024.htm  /Google

 

1918 - 안중식 등 서화협회 창설 

1918 - 화가 안중식(安中植) 등 '서화협회(書畵協會)' 창설

서화미술회의 재정을 일제 총독부 관할에 들어가 버린 창덕궁 왕실이 담당했고 서화미술회는 강습소를 만들어

당시 유명한 서화가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강습소에는 서과와 화과가 있었고 수업 연한은 서화 전문별로 3년이었다.
교수진은 조석진과 안중식을 비롯하여 글씨와 문인화로 명성이 높았던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그리고 산수화와 인물화로 활약하던 강필주와 청년 화가 이도영 등이었다.
학생들은 가난한 집안의 자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유층 자제들로 취미와 교양으로 서예와 그림을 배웠다.
이 서화미술회에 소속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서화협회에서 주도적인 역할과 활동을 했다.
서화미술회는 신문에 학생모집 광고까지 내면서 서화계 후진 양성을 도모했으며 한때는 야학원까지 모집하며

무료로 가르쳤지만 처음부터 학생 수는 많지 못했다.
1911~14년 제1기생으로 오일영(1890~1960)과 이용우(1904~52)가 있고, 1912~15년 제2기생으로 김은호가 있으며,

1913~16년 제3기생으로 박승무가 있고, 1915~18년 제4기생으로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1899~1965)이 있다.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훗날 일본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유학한 이한복도 제1기생 반에서 수학했고,

조석진의 외손자 변관식은 자연스럽게 이곳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듯 1910년대의 서화미술회 강습소는 근대 동양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1918년 제4기 졸업생을 배출한 무렵 후속 학생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안중식이 민족대표

 33인 중 몇몇 인사와 절친했던 관계로 수사기관의 심한 문초를 당한 후 후유증으로 평소의 병약이 악화되다가

그 해 11월에 타계하자 서화미술회 강습소는 문을 닫고 말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서화협회가 탄생했는데 『서화협회회보』(1921)에 의하면 1918년 5월 19일 경성 장교정(지금의 청계천) 8번지

김진옥의 집에서 고희동의 주동으로 13명이 발기했고, 6월 16일 창립총회에서 안중식을 회장에, 고희동을 총무에,

김균정을 간사에 선출했으며, 회칙을 만든 후 18인의 정회원을 상호 추천하기로 했다.
협회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은 1921년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많은 회원이 참여했고, 그해 11월 2일에 아중식이 타계했으며,

1920년 11월 31일에는 2대 회장 조석진마저 타계하자 협회 운영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서화협회에는 후원인단이 있었고 여기에 당시 최고 서예가이며 개화사상가인 김가진, 김윤식, 박기양, 이완용 등이 속해 있었다.
협회는 기관지이자 우리나라 최초 미술잡지라고 할 수 있는 20여 쪽의 『서화협회회보』를 소개했지만 2회에 걸쳐 발행했을 뿐이다.
회보에는 작품사진, 기념 휘호, 미술이론, 화단 소식, 협회 소식 및 회원의 동정, 회원의 명단과 주소, 협회 규칙 등이 실렸다.
작품으로 김홍도의 산수작품, 전현직 작가들의 작품 외에도 중국인 오창석의 작품, 일제 총독의 축필을 비롯해서

일본인들의 작품이 있었다.
이는 협회가 민족적 단체였다고 하지만 식민 치하에서 일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협회는 서화학원을 개설하여 수업 연한을 3년으로 한국화, 서양화, 서예 부분에 각 20명 정원으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르쳤는데, 한국화를 이도영이 맡고, 서양화를 고희동이 맡았으며, 서예를 김돈희가 맡았다.
이 학원은 경제적 문제로 1925년에 문을 닫았다. - www.artjemma.com 
 

 

1918 - 이탈리아 전투기 조종사 바라카(Baracca, Francesco) 전사

바라카 [Baracca, Francesco, 1888.5.9~1918.6.19]

프란세스코 바라카(Francesco Baracca, 1888년 5월 9일 ~ 1918년 6월 19일)는 이탈리아 왕국의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서 에이스였다. 1907년에 모데나 군사 학교에 입학했고, 기병이 되었다. 바라카는 1912년 프랑스에서

처음 비행을 배우게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비행교관으로 근무했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자, 바라카는 1914년 한 해 동안 다양한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다음 해인 1915년, 바라카는 복좌형 뉴포트기로 전환했지만, 1916년에 뉴포트 11로 전환했다.

그가 첫 번째 격추를 기록한 것은 4월 7일이었다. 이탈리아가 처음으로 거둔 군사적 성공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싸우며 격추 수를 늘려나간 그는 그해 말에 격추왕(에이스)가 되었다. 특히 그는 그의 격추 수를 말 모양 문양에 새겨넣었고, 전쟁이 끝난 후 그 말 모양은 페라리 스포츠카의 상징이 되었다.

바라카는 1917년에 91전투기대의 지휘를 맡았다. 바라카는 뉴포트와 SPAD를 조종하면서 1917년 말까지

격추 대수를 30대까지 늘려나갔다. 1918년 6월 19일에 공격 임무 수행 중 귀환하지 못했다.

그의 시체는 며칠 뒤에 발견되었는데 머리에 총알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권총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바라카 자신이 불에 타 죽기 직전에 자살을 한 것으로 믿어졌다. - 위키백과 

 

1917 - 영국 하원, 부인참정권 승인

1915 - 일본, 무선전신법 공포(무선전신법 칙령 제186호로 조선에 시행)

1912 - 미국, 공무원의 8시간 노동제 채택

 

1911 - 장서각 설립
1911년 6월 19일 조선시대 문서를 보관하던 이왕직도서관인 장서각이 설립되었다. 고종 때 규장관·홍문관·집옥재·춘방·4사고

등에 있던 책들을 사간동에 있는 인수관으로 옮기고 서고를 지으려 했으나, 1910년 한일합병으로 중단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새로 이왕직관제를 정하면서, 규장각이나 사고의 서적들을 이왕직도서관에서 관장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도서들을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옮겼고, 이왕직에서는 그밖의 서적들만을 보관했다. 여기에 새로 책들을 모아

1911년 이왕직장서각을 설립하고, 1918년에 서고 이름을 '장서각'으로 지었다. 1981년에 장서각 도서 모두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장서각은 여러 차례 보유하고 있던 책들을 정리해

<이왕가도서실장서목록 李王家圖書室臧書目錄>(1914) 등의 도서목록을 편찬했다. - 브리태니커

 

1907 - UP 통신 설립. 

1907 - 통신사 UP(United Press) 설립

1907 - 미국 뉴스통신사 UP(UPI의 전신) 설립  

 

1905 - 청나라에서 미국상품 배척운동

1903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루 게릭("Lou" Gehrig, Henry Louis, 1903~1941) 출생

1885 - 프랑스가 기증한 '자유의 여신상' 뉴욕시에 인도

 

1867 - 멕시코 황제를 지낸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사망

1861 - 필리핀의 사상가, 저술가 리살(Rizal, Jose, 1861~1896) 출생

리살 [Rizal (y Alonso), José, 1861.6.19~1896.12.30]

필리핀의 사상가, 저술가. 루손섬 칼람바 출생. 부유한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아테네오데마닐라대학 ·산토토마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82년 에스파냐 마드리드대학에 유학, 의학을 공부하는 한편, 필리핀 식민지의 개혁을 요구하는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필리핀은 300여 년에 걸친 에스파냐 식민통치의 폐해가 도처에서 나타나, 민중의 저항은 소요로 번져갔다.

1886년 발표한 첫 소설 《나에게 손대지 말라 Noli me tangere》와 《체제전복 El filibusterismo》(1891)으로 개혁운동의 대변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필리핀 혁명(1896∼1902)과 필리핀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기반은 그의 문필활동에 힘입은 바 컸다. 1892년 마닐라에서 필리핀민족동맹을 조직,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다피탄섬으로 유형되었다. 1896년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카티푸난이 일으킨 폭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2월 마닐라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1846 - 미국 뉴저지주 엘리지안구장에서 열린 야구경기, 스퀘어에 의한 최초의 야구경기로 공식 인정

1846 - 미국 뉴저지 주에서 최초의 야구 경기가 열리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해 하는 경기는 영국에서 여러 가지 종류로 발전하는데, 영국 동남부에서는 크리켓으로,

남서부에서는 원홀 캣(또는 원 오캣)의 이름으로 발전했으며, 야구와 흡사한 경기인 라운더스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경기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와 두가지 형태로 진화했는데, 뉴욕 시 주변에서 행해진 타운볼

각각 9명의 선수로 이루어진 두 팀이 하는 경기로 정비되었다.

루셔스 애덤스등은 야구의 기본적인 규칙을 확립했다. 특히 1845년에는, 미국 뉴욕 시알렉산더 카트라이트니커보커 규칙을 만들었으며, 이 규칙은 오늘날 현대 야구의 규칙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는 또한 라운더스에서 사용되었던

말랑말랑한 공을 더 작지만 딱딱한 공으로 교체했다. 1953년 6월 3일,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카트라이트가

근대 야구의 발명가임을 인정했다.

카트라이트가 소속된 구단인 뉴욕 니커보커스 팀이 1845년에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역사상 공식적인 첫 경기로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1846년 6월 19일 뉴저지 주의 '호보켄'에서,

 '뉴욕 나인'이 '니커보커스' 팀을 4이닝 동안 23 대 1로 이긴 경기이다. (야구)

 

1797 - 영국의 탐험가 흄(Hume, Hamilton, 1797~1873) 출생

1783 - 미국의 초상화가 설리(Sully, Thomas, 1783~1872) 출생

 

1782 - 프랑스의 사상가, 종교철학자 라므네(Lamennais, Felicite, 1782~1854) 출생

1764 - 우루과이 독립의 아버지 아르티가스(Artigas, Jose Gervasio, 1764~1850) 출생  

파스칼, Jean Domat가 붉은 크레용으로 그린 소묘(1649경) 

 

1623 - 프랑스 수학자·철학자 파스칼 출생 
1623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라고 말한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파스칼 출생

파스칼 [Pascal, Blaise, 1623.6.19~1662.8.19]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명상록 Pensées>으로 유명한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다.

일찍부터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나타내어 17세에 <원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22세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했다. 또한 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져, 1648년에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서 대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가설을 증명했고, 6년 뒤에는 피에르 드 페르마와 함께 근대 확률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등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일찍이 얀센주의적 신앙을 받아들였던 그는 1654년 강력한 신앙적 체험을 한 뒤,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656~57년에 쓰여진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는 예수회의 공격에 맞서

앙투안 아르노를 변호한 글로,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교 호교론을 집필하기 위한 단상들을 써 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사후에 <명상록>으로 정리·출간되었다.

인간의 실존적 비참과 신앙의 신비를 갈파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동시에, 장 자크 루소, 앙리 베르그송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브리태니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것을 으스러뜨리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도 없다.

한 줄기 바람, 한 방울 이슬로도 그것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것을 으스러뜨린다 해도, 인간은 한층 더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 블레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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