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06.20 세계 난민의 날

우표로 본 오늘06.20   세계 난민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99 - 조진호, 한국인으로 두번째 메이저리그에서 승리

조진호(보스턴 레드삭스)가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메이저리그 승리투수가 됐다. 조진호는 1999년 6월 20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 6이닝동안 홈런2개 포함, 5피안타 4실점했으나 타선의 도움으로 첫 승리를 땄다. 삼진6개에 볼넷은 1개. 1998년 7월5일 빅리그에 첫 등판했던 조진호는 메이저리그 6번째 등판에서 첫승을 신고했다. 방어율은 4.50이 됐다.

조진호는 최고구속이 146Km에 불과했지만 절묘한 제구력으로 서부지구 1위팀 레인저스 강타선을 요리했다. 레드삭스는 7대4로 이겼다. 1998년 12월 귀국후 부친의 사망소식을 뒤늦게 알고 통곡했던 조진호는 "18일이 아버님 제사였는데 호텔에서 절을 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아버님께 첫승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금강산 관광 기념, 1998.11.18 발행  
 

1999 -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북에 억류

1999년 6월 20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인 민영미씨에 대해 북한 환경감시원을 상대로 남한 `귀순 공작`을 했다며 그녀를 북한에 억류, 장전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감금, 조사했다. 북한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북측 여자 환경감시원과 10여분간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다 북한 귀순자에 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측 환경감시원은 대화가 끝난 직후 민영미씨에게 관광증 제시와 벌금을 요구했으며, 민영미씨는 관광증을 건네주고 2회에 걸쳐 총 1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다. 북측은 "더 조사할 것이 있다"며 민영미씨를 연행, 장전항 출입국관리소 옆 북측 금강산관광총회사 사무실로 데려가 강제 구금했다.

그후 5일 만에 북한이 현대측에 민영미씨를 인도했고, 다음날 새벽 속초항에 도착,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렸다. 그일이 있은후 한동안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었다가 8월 5일 다시 재개됐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외항선 1000만톤 돌파, 1995.6.20 발행
 

1995 - 외항선 보유량 1,000만톤 돌파

정부는 대한해운공사법을 제정, 1950년 1월 대한해운공사를 발족시키면서 해운산업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큰 뿌리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더구나,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해 항만시설은 물론이고 많은 선박이 피폭됨으로써 우리 해운산업이 좌초되는 듯 했으나, 남과 북의 분단은 해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55년 2월 정부 조직법 개정을 통하여 해사행정을 총괄하는 해무청을 신설하여 체계적인 해운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1967년에는 해운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해운진흥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우리나라 해운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해방 이후 2만여톤에도 못미치던 한국상선대 규모는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해운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1974년 선박보유량이 100만톤을 넘어섰으며, 1995년에는 1,000만톤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특히, 2006년말 현재 한국상선대는 모두 609척에 1,520여만톤에 달하고 있으며, 해외에 치적한 선박을 포함한 1,000톤 이상의 선박은 모두 1,900여만톤으로 반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세계 8위의 해운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더구나 용선선박을 포함하여 우리 외항해운기업들이 운항중인 선대규모는 6,700여만톤으로 세계 전체상선대의 10%에 달할 정도로 해운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 외항해운의 비약적인 발전을 나타내는 지표는 이뿐만이 아니다. 외항해운업계의 해운수입은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1억달러를 밑돌았으나, 1970년대 후반에 10억달러를 돌파한데 이어 15년 뒤인 1995년에는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2004년에는 최초로 200억달러를 돌파했으며, 2006년에는 28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외화가득 효자산업으로서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해운항공신문
http://www.cargotimes.net/bbs/sview.php?code=ship&idx=1537&search_str=%C2%BC%C2%B1%C2%B7%C3%89  /Google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94 - KT(구 한국통신), 아시아 최초의 상용 인터넷 서비스 ‘코넷’ 시작

국내와 아시아권에서는 KT가 1994년 6월20일 처음으로 ‘코넷’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고 데이콤이 같은 해 10월,아이네트와 나우콤이 11월 인터넷 시장에 뛰어들었다.
코넷을 상용화하기 이전에는 대학교나 일부 연구기관에서 연구 정보교류와 교육용으로 학술망을 통해 인터넷을 사용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다.
국내 학술 인터넷망인 ‘하나망’을 이용해 상용화된 코넷은 초기에는 월 4만원에 9.6Kbps(초당 전송속도)로 제공됐는데 이는 현재 인터넷 평균 속도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기업용 인터넷 전용회선은 1.544Mbps 회선 한달 사용료가 무려 400만원에 달했을 정도.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128Kbps 속도를 내는 종합정보통신망(ISDN) 서비스는 90년대만 해도 인터넷의 총아로 주목받았다. 98년 케이블 모뎀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에 이어 99년 기존 전화망을 활용한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제공되면서 인터넷은 연간 100%가 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코넷 사용 초기에는 이용자가 많지 않아 가입 개통을 해주러 갔다가 고객서버 데이터베이스(DB)를 몽땅 날리기도 했고 사이버주식거래 초기에는 주가가 폭락하는 날이면 접속불만에 대한 민원이 폭주해 KT 전화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인터넷 이용자는 99년에 1000만명을 넘어선 뒤 현재 2800만명에 달하고,2002년에 1000만명을 넘어선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현재 1150만명에 이르고 있다. /www.castel.co.kr /Google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80 - 남북총리회담 대비한 판문점 자유의 집 별관 준공

자유의 집은 1998년 7월 9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우리측 지역에 건립되었다.
자유의 집은 건물 중앙에 투명한 지붕을 가진 4층건물(전체규모 1,437평)로서 남북연락사무소, 남북적십자연락사무소가 설치되어 남북간의 연락업무를 수행하는 건물로 쓰여지며,각종 남북회담, 접촉, 교류시 이를 지원하는 시설로 활용된다.
또한 남북관계 발전에 따라서는 남북이산가족면회소, 남북우편물교환소로도 활용이 가능하도록 지어졌으며, 우리의 통일에 대한 소망과 자유, 평화에 대한 이미지를 상징화 하였다.

평화의 집은 자유의 집으로 부터 남서쪽으로 130여m 떨어져 있다.
지난 1980년 6월에 남북간 총리회담을 대비해 지어졌다가 1989년 12월 지금의 장소에 새로 건립되어 남북간의 군사회담을 제외한 민간부문의 회담이 개최되고 있다. /dema.go.kr /Google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73 - 중앙선 청량리-제천 구간 전철 개통

중앙선은 경부선()에 이은 한국 제2의 종관철도로, 연선(沿) 일대의 광산 ·농산 및 임산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되었으며, 영서(西) 내륙지방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다.

더욱이 충북선()과 태백선()이 제천에서 교차하고, 경북선()과 영동선()이 영주에서 교차하여 경부선과도 직접 연결되며, 청량리∼원주 구간의 복선전철화() 공사도 진행되고 있어 수송 능력이 더욱 증가될 예정이다. 1973년 6월 청량리~제천 간, 1987년 12월 제천~구단양 간, 1988년 12월 단성~영주 간이 전철화되었고, 2005년 12월 청량리~덕소 간의 수도권 복선 전철이 개통되었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8 - 100m `魔의 10초벽` 돌파

100m 달리기에서 인간의 한계로 여겨 온 `마의 10초 벽`이 마침내 무너졌다. 전미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1968년 6월 20일이 세계 육상사를 다시 쓰게 한 그날이다.

1912년에 세계기록 공인이 시작되고 1960년에 독일의 아민 해리가 10초F를 끊은 이래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10초 벽이 같은 날 그것도 세 사람에 의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무너진 것이다. 수동시계로 9초9. 준결승전 1·2조에 출전한 하인즈·스미스·찰리가 주인공이었다. 기록이 믿기지 않아 트랙 길이를 재조사했으나 오히려 10㎝가 더 길었다. 지미 하인즈는 4개월 뒤 열린 멕시코올림픽에서 9초95를 또 기록해 명실공히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20여년 동안 깨지지 않던 9초9 벽이 88서울올림픽에서 9초79를 기록한 벤 존슨에 의해 깨지는 듯했으나 곧 약물중독임이 밝혀져 기록이 취소됐다. 이후 9초9 벽은 1991년 칼 루이스(9초86)가, 9초8 벽은 1999년 모리스 그린(9초79)이 깨뜨렸다. 현재의 세계최고기록은 2002년 9월 팀 몽고메리가 세운 9초78이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The White House and the Kremlin

 

1963 - 미국과 소련, 핫 라인 설치

1963년 6월 20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직통통신 연락선 설치에 관한 미소각서'가 조인되어 워싱턴 D. C.의 백악관과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사이에 직통전화가 설치되었다. 이 핫 라인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핵전쟁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나자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정상간의 직접대화를 통해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9월 30일에 체결된 협정에 의해 인공 통신위성의 지원을 받았으며, 1984년 7월 17일 협정에 의해서는 팩시밀리 장치도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어 프랑스-소련, 영국-소련 간의 핫 라인도 설치되었다. 남북한의 경우에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서울과 평양 사이의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이 합의된 바 있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0 - 말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탐험가들이 이 지역을 탐험했으며 19세기 후반 세네갈에서 내륙으로 진격해 온 프랑스군에 의해 이 지역은 프랑스령 수단으로서 식민지화되었다.
수단은 그 후 세네갈과 합병되거나, 영토의 일부가 프랑스령 기니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1920년 영역이 확정되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이곳에도 독립운동이 활발해져 1960년 6월 세네갈과 함께 말리연방으로 독립했으나 8월에 세네갈이 연방을 이탈하여, 9월에 단독으로 말리공화국이 탄생했다. /yahoo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60 -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가원수 취임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독립 후에는 사실상 노로돔 시아누크의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다.

노로돔 시아누크(Sihanouk, Norodom, 1922~ )는 1955년 4월 왕정지지자 정당을 소집하여 ‘사회주의 인민공동체(상쿰)’를 결성하고 왕위는 아버지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9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 상쿰이 의석 전체를 독점하였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다시 왕위에 올랐고, 독립 이후 폴포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유학파 지식인계층이 귀국하여 1963년 학생시위를 벌인 후 노로돔 시아누크의 대규모 좌익 숙청으로 지하조직화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공산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1년 타이, 1963년에 베트남,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정책으로 기울었다. 캄보디아는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에 보급로 설치를 허용하였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하였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47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

올림픽대회는 단순한 국제경기대회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스포츠외교의 정상무대이다.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독립한 신생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에 개최되는 런던올림픽대회에 어떤 일이 있어도 출전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우선 올림픽 출전을 위해서는 국내 올림픽위원회(NOC)를 구성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어야 했고, 또한 올림픽 종목의 경기단체들이 각각 국제경기연맹에 가입되어 있어야 했다. 조선체육회는 1946년 6월 16일에 런던올림픽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원회는 위원장에 유억겸(조선체육회 부회장)을 비롯하여 부위원장, 상무위원을 구성하고 조선체육회 산하의 경기단체 중 올림픽종목에 해당되는 육상, 수영, 축구, 농구, 역도, 권투, 레슬링, 빙상 등의 각 경기단체로 하여금 각각의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하도록 했다. 한편 1947년에 봄 전경무 부위원장은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버리 브란데지(Avery Brundage)를 만나 한국의 올림픽참가를 위한 협조를 교섭해 승낙을 얻었다. 이리하여 대한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6월15일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총회에 참가하고 동년 6월 20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을 받게 되었다. /contents.archives.go.kr /Google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46 -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발족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라고도 한다. 1944년 브레턴우즈협정(Bretton Woods Agreement)에 따라 국제연합의 전문기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전쟁피해 복구와 개발을 위해 1946년에 설립되었다.
주요 목적은 ① 가맹국의 정부 또는 기업에 융자하여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② 국제무역의 확대와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③ 저개발국(개발도상국)에 대하여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금은 가맹국에의 주식할당에 의한 자기자본, 특별준비금, 차입금(세계은행채의 발행으로 조달), 투자이윤 등으로 이루어지며 예금은 없다.
주로 개발도상국의 공업화를 위해 융자를 해주고 있는데 5~6%의 이율로 융자조건이 엄격해 융자대상은 선진국과 중진국이 많다.
회원국은 2001년 현재 183개국(IMF 회원국은 자동가입)이며, 한국은 1955년에 가입하여 1970년 대표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제40차 총회는 IMF 총회와 합동으로 1985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본부는 미국 워싱턴에 있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45 - 캐나다 가수 앤 머리(Murray, Anne) 출생

머리 [Murray, Anne, 1945.6.20~ ]

Anne Murray (born Morna Anne Murray June 20, 1945), is a Canadian singer born in Springhill, Nova Scotia, known for her rich alto voice and her taste in choosing songs that appeal to Pop, Country and Adult Contemporary listeners alike. For many, her fame as the representative Canadian singer is rivalled only by Gordon Lightfoot. Unlike many internationally-renowned Canadian singers, she has always resided in Canada and now lives in Toronto, but spends most summers in Nova Scotia.

Murray was the first Canadian female solo singer to reach #1 on the US charts, and also the first to earn a gold record (for one of her signature tunes, 1970's ""Snowbird". She is often cited as the woman who paved the way for other Canadian international success stories such as Céline Dion, Sarah McLachlan and Shania Twain. So far, her albums have sold over 54 million copies worldwide.[1] She is the most successful crossover female artist in music history, as well 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Christmas artists of all time with her Christmas albums selling in the millions. (In fact her album Christmas Wishes is one of the Top 5 selling female holiday albums in history and her "Greatest Hits" album has sold over 7 million copies worldwide).[2]She is also the first woman (and the first Canadian) to win "Album of the Year" at the Country Music Association Awards (USA) for her 1984 album A Little Good News. /wikipedia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Germany, DDR                          www.soojip.com

 

1933 -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Zetkin, Clara) 사망

체트킨 [Zetkin, Clara, 1857.7.5~1933.6.20]

작센 비데라우 출생. 1878~1890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이 시행되던 당시부터 독일사회민주당에 참가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당내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좌익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주로 문화운동과 여성운동에 종사하였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1892~1916년 사회민주당여성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편집하였다. 1907년 최초로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를 개최하여 반전()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였다. 1918년 독일 공산당의 창설자로 1919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0년부터 연방하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코민테른의 집행위원, 1924년 그 여성국장이 되었으며, 1932년 8월 나치스(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가 제1당이 된 국회에서 최연장 의원으로서 임시의장이 되어 230명의 나치스 의원단 앞에서 반()파쇼통일전선의 결성을 호소한 일은 유명하다. 1957~1960년 동베를린에서 그녀의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연설문과 편지모음집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이 출판되었다. /naver

 

세계 여성의 날

세계 여성의 날은 매년 3월 8일로,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업적을 범세계적으로 기리는 날이다.

세계가 함께 기리는 여성의 날을 만들자는 생각은 근대의 빠른 산업화와 경제 팽창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1857년 뉴욕 시에서는 방직 및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린다며 항의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곧 경찰에 의해 공격받고 해산되었다. 2년이 지난 1859년 3월, 이 여성들은 최초로 그들의 노동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매년 3월 8일에는 더욱 더 많은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1908년의 시위는 가장 두드려졌는데, 15,0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등을 요구하며 뉴욕 시로 행진하였다. 1910년 최초의 세계 여성 회의가 Socialist International의 주최로 코펜하겐에서 이루어지고, 독일 사회주의자인 Clara Zetkin의 제안에 따라 세계 여성의 날이 정해졌다. 이듬해의 세계 여성의 날은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백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행사였다. 하지만 행사가 이루어지고 채 얼마 되지 않은 1911년 3월 25일, 뉴욕 시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츠 공장 화재는 140명 이상의 여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안전 시설의 부재로 말미암아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임박했던 1913년의 세계 여성의 날에는, 유럽을 가로지르는 평화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wikipedia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31 - 후버 미국 대통령 '모라토리움' 선언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후버(Hoover, Herbert C., 1874~1964)가 1931년 6월 20일 오후 6시 성명을 발표, 세계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미국에 진 채무와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전시배상 지불을 7월 1일부터 1년간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후버 모라토리움’이다.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전쟁ㆍ천재(天災)ㆍ공황 등에 의해 경제가 혼란하여 채무상환 기간이 도래했음에도 외채가 많아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 채무상환 기간의 일시적인 연기를 채무국이 요청하는 것, 즉 지급유예를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된 독일은 당시 배상금 1320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금액의 채무를 연차적으로 분할지급을 하거나 외국으로부터의 단기차입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정치의 불안이 가중되고 외국단기자본의 인상ㆍ유출이 격화되어 독일은행이 차례로 도산하게 되자 경제가 마비됐다.
이에 후버가 전시채무 동결을 제안하는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하자 배상지불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과 불황에 빠진 연합국 각국이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후버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쟁부채 배상안의 제안자인 오웬 영은 채권국의 현명한 처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논평했고 당초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선뜻 응하지 않던 프랑스도 결국 이에 동조했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Pancho Villa and Venustiano Carranza
 

1923 - 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비야 암살
1923년 6월 20일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인 판초 비야가 치와와 주 이달고델파랄 근교의 농장에서 암살되었다.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비야는 1909년 독재자 디아스에 대한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봉기에 가담하면서 혁명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1913년 마데로가 암살된 뒤에 멕시코로 돌아와 유명한 '북부사단'을 조직하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와 연합해 우에르타의 무단통치에 저항했다. 1914년 6월 두 사람은 멕시코 혁명의 개선장군이 되어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1914년부터 카란사 정권이 전복된 1920년까지 비야는 게릴라 활동을 계속했다. 1920년 비야는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조건으로 사면받았으나 3년 뒤 암살되었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11 - 삼림법(森林法) 공포

1900년초부터 전국토의 73%에 달하는 한국의 삼림자원을 조직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산림조사·지권조사·삼림식물분포조사 등 면밀히 예비 조사작업을 추진해온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1906년 한국정부와 '압록강두만강삼림협동약관'을 체결해 본격적인 산림자원수탈에 착수했다. 그후 삼림법(1908)·삼림령(1911) 등을 제정해 대부분의 임야를 국유지로 강제적으로 편입시켜, 일본인 자본가·이민자들에게 대부·양여·매각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의 시행과 더불어 1912년 '삼림산야급간지국유사유구분표준'(森林山野及墾地國有私有區分標準)을 정해 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사유로 인정하지 않은 토지는 모두 국유로 한다고 규정해 방대한 삼림·산야·미간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했다. 그러나 삼림령 등에 의한 대규모 국유임야의 창출·법인화(法認化)는 실제 임야조사에 의거하지 않은 것으로, 그결과 임야소유권 및 경계에 관한 한국 민중의 반환요구, 토지 및 임야소유권 분쟁을 야기했다. 이에 1916년 임야조사사업의 준비작업으로 일부지역에서 임야시험조사를 하고, 1918년 4월 조선총독부임야조사위원회관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에 임야조사령을 공포해 실지 조사에 의한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했다. 결국 임야조사사업은 1917~24년에 본격적으로 임야조사, 측량과 사정(제1차 사정사무), 1935년까지 임야조사위원회에 의한 재결(제2차 재결사무)을 거쳐 종료했다. /koreanhistory.tistory.com /Google

 

  

1902 - 시인 정지용() 출생

 


1899 -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 물랭(Moulin, Jean) 출생

 

  

1891 - 아일랜드의 정치가 코스텔로(Costello, John A.) 출생


 

1887 - 독일의 다다 미술가, 시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출생



1870 - 프랑스의 소설가 공쿠르(Goncourt, Jules de) 사망  

 

 

1859 - 독일의 철학자 에렌펠스(Ehrenfels, Christian von) 출생



1837 - 빅토리아(Victoria) 영국 여왕 즉위

 

 

1833 - 프랑스의 초상화가 보나(Bonnat, Leon) 출생

 

 

1819 - 미국 증기선 사바나호, 첫 대서양 횡단

 

 

1819 - 독일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 오펜바흐(Offenbach, Jacques) 출생


 

1789 - 프랑스 '테니스코트의 서약' 체결


 

1771 - 캐나다의 박애주의자 셀커크(Selkirk, Thomas Douglas) 출생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2   (0) 2019.06.22
오늘의 사건 06.21   (0) 2019.06.21
오늘의 사건 06.19   (0) 2019.06.19
우표로 본 오늘 06.19   (0) 2019.06.19
오늘 06.18 건설의 날   (0) 2019.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