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 06.18 건설의 날
2009 - 정병칠 연평해전 사령관 별세
2009 - ‘독도는 우리땅’ 안용복재단 출범
“이제 독도 수호 사업에 민간이 본격 나서겠습니다.”
18일 오전 11시 대구시 북구 호텔 인터불고엑스코에서는 각계 인사와 경북도민 등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용복재단 출범식이 열렸다.
이날 노진환(65·사진·영남유교문화진흥원장) 재단 이사장은 “감성적인 독도 수호 운동을 넘어 체계적인 연구, 국내외 홍보, 청소년 교육 등을 통해 실질적인 영토 수호 운동으로 발전시키겠다”며
“울릉군에 안용복 장군 기념관과 사당을 지어 그의 뜻을 기리겠다”고 밝혔다.
안용복재단은 김관용 경북지사를 명예이사장으로 두고, 하춘수 대구은행장, 노동일 경북대 총장 등
각계각층 인사 22명이 이사로 참여한다.
대구/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한겨레 2009-06-18 오후 07:13:3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1172.html
2005 - 한국, 브라질에 패배…16강 좌절
안타까운 90분이 지나도록 브라질의 골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기다렸던 두번째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18일(한국시각) 네덜란드 에멘의 에멘경기장에서 열린 2005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 에프(F)조 조별리그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0-2로 졌다. 이로써 1승2패(승점3·골득실-2)가 된 한국은 조3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전체 6개조 3위 가운데 베냉(2무1패·승점2)을 빼고 터키, 칠레, 독일, 이탈리아가 승점 혹은 골득실에서 한국을 누르고 16강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은 경기 초반부터 뛰어난 개인기와 경기 운영 능력을 선보인 브라질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박성화 감독은 김승용-신영록-박주영을 스트라이커로 내세우고 김진규-이요한-이강진을 수비로 배치한 3-4-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으나
경기는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다.
한국은 전반 8분만에 너무 쉽게 브라질에 첫골을 내어줬다. 에르나네가 오른쪽 구석차기를 올린 공을 ‘천재 미드필더’로 불리우는 헤나투가 머리로 방향만 살짝 바꿔 골문을 가른 것. 한국은 미드필더 백승민과 백지훈이 상대 진영에서 좋은 움직임을 보이며 자유차기 기회를 얻어냈으나 골로는 연결하지 못했다. 브라질은 정확한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경기장을 넓게 쓰며 한국의 압박을 피했다.
박성화 감독은 후반 시작하자마자 이요한을 빼고 박희철을 투입하며 4-4-2 포메이션으로 변형을 꾀했다. 박주영과 신영록이 투톱에 서고 김승용이 왼쪽 미드필더로 내려가는 방법으로 보다 공격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꾀한 것. 한국은 후반 2분만에 김승용이 상대 진영 왼쪽에서 올려준 크로스를 신영록이 머리로 받았으나 골문을 살짝 외면하는 등 전반전에 비해서는 빼앗긴 주도권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10분 뒤에는 박주영이 벌칙구역 왼쪽에서 수비수 1명을 제낀 뒤 오른발 슈팅을 날렸으나 공은 수비수 몸을 맞고 튀어 나가버렸다.
그러나 대회 2연패를 노리는 ‘호나디뉴의 후예들’의 공 터치는 확실했다. 결국 후반 11분 보보가 왼쪽 미드필드서 전해준 패스를 하파엘 소비스가 한 차례 드리블에 이은 강력한 슈팅으로 두번째로 한국의 골문을 갈랐다.
왼쪽 팔꿈찌 부상을 우릅쓴 박주영과 턱과 왼쪽 엄지발가락이 성치 않은 신영록, 오른쪽 무릎 부상의 안태은 등 젊은 ‘태극전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브라질 벌칙구역 침투를 노렸으나 기다렸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은 경기 내내 미드필드에서의 공 전개보다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곧장 이어지는 긴 패스 위주로 경기를 펼쳐 팀의 특성을 살리는 데 다소 소극적이었다.
박성화 감독은 “나름대로 준비하고 최선을 다했으나 부족한 게 패인이 됐다”며 “아직 우리가 기술이나 체력적인 면에서
세계 무대에 진출하기까지는 부족했다”고 이번 대회를 평가했다.
에멘/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한겨레 2005.06.19(일) 00:53
http://www.hani.co.kr/section-006000000/2005/06/006000000200506190053001.html
2004 - 영생교주 조희성씨 사망
2004 - 피아니스트 안수진씨, 한국인 첫 슈만콩쿠르 3위 입상
2002 - 한국 월드컵 우승후보 이탈리아 2대1 승. 꿈의 8강 달성
1960년대 한국 여자농구 최고 스타였던 박신자씨.
1999 - 1960년대 농구스타 박신자,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1960년대 한국 여자농구 최고스타였던 박신자씨가 1999년 6월 18일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박신자씨는 세계 여자농구 107년 사상 위대한 선수 및 지도자 25명에 포함되어 사진과 국제대회에서
획득한 메달 등이 영구전시되는 이같은 영예를 안았다.
이 전당은 1999년 6월초에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 건립됐다.명예의 전당측은 박씨가 1960년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계라고 말했다. 박씨는 1963년 제4회 페루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유일한 동양선수로 베스트5로 선정됐고,
1967년 제5회 체코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며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1967년 은퇴한 그는 1982년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을 맡아 한국 스포츠사상 첫 여성사령탑 기록을 세웠다.
1983년에도 여성으론 첫번째로 여자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박씨는 1971년 미8군 문관 스티븐 브래드너씨와 결혼했다.
1998 - 금감위, 55개사 퇴출대상 기업 발표
1998 - 55개 퇴출기업 발표(1998)
55개의 대표적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강제로 밀려나게 됐다.
IMF로부터 금융과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조속히 시행하라는 권고를 받아온 우리 정부는 1998년
오늘 55개의 퇴출대상 부실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삼성과 현대,LG 등 5대 재벌그룹의 계열사 20개가 포함됐다.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부실대기업 정리방침이 공식 결정된 지 두 달 만이다.
55개 기업은 이로써 은행권의 신규여신 중단과 함께 부도처리에 이은 청산과 3자 인수, 모기업 흡수합병 등
여러 절차를 통해 간판을 내리게 됐다.
정부는 이후로도 부실징후가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강력한 조치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오발탄` 등 7백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씨
1998 - 원로배우 김진규씨 별세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75)씨가 1998년 6월 18일 골수암으로 별세했다. 온화한 인상에 차분함이 느껴지는 김씨는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까지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를 이끈 톱스타였다. 192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그는 연극무대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의 권유로 `피아골`에서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데뷔, 빨치산으로 귀순하다 총을 맞고 죽어가는 애절한 라스트 신 연기로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듬해인 1956년 사극 `옥단춘`을 찍으면서 신인 여배우 김보애씨와 결혼한 그는 가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멜로 드라마와 문예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후 `로맨스 빠빠(1960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새 엄마(1963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고 1970년대 이후에도 `삼포 가는 길` `불꽃`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씨가 성실하게 일에만 매달리면서도 가족들의
불행을 막지 못하는 맏이 철호 역을 맡아 열연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은 한국영화 사상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화려했던 연기생활에 비해 실제 삶에서는 많은 부침을 겪었다. 1970년 사재를 털어 직접 제작,감독한 `성웅 이순신`이 실패한 뒤 1978년 같은 소재로 `난중일기`를 제작했으나 이 역시 흥행에 참패,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연기생활 40여년 동안 출연한 작품만도
7백여편에 이르며 청룡상, 부일영화상,
한국연극영화 예술상, 대종상, 서울시문화상 등 거의 모든 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을 한 차례 이상씩 받았다. - 조선
1994 - 김일성, 방북한 미국 카터 전 대통령 통해 남북정상회담 제안(1994. 6. 18)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6월 15~18일까지 나흘간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강조하면서, 북한이 현 시점에서 핵 시설를 동결하고
추방 예정인 IAEA 사찰관 2명의 잔류를 허용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카터는 귀국길에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일성이 요청한 '남북 정삼회담' 제의를 전달했다. 김 대통령은 불과 1시간만에
조건없는 정상회담의 수락을 발표했지만,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됐다.
-The DailyNK 자료실 2005-06-22 11:47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300&num=7432
축구선수 차범근
1989 - 차범근, 서독에서 축구선수 은퇴
차범근 선수가 1989년 6월 18일 서독에서의 축구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서독 분데스리가 기록은 3백8게임 출장에
98득점이었다. 차범근 선수가 서독 축구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78년 12월30일이었다. 서독 프로팀인 다름슈타트클럽에 단신으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은 것이 그때였다. 그러나 차의 본격적인 서독생활은 1979년 7월 12일 프랑크푸르트팀과
입단계약을 맺으면서였다. 당시 연봉은 22만마르크(6천6백만원)였다.
그는 입단 첫 해 12골을 터뜨리며 소속팀을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팀으로 끌어올렸으며, 덕분에 다음 시즌
연봉 40만 달러(1억 1천만원)의 `갈색 폭격기`로 자리잡았다. 그의 서독생활은 19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진가를 더했다. 당시 레버쿠젠에는 차의 서독진출을 시기, 고의적인 파울로 척추뼈를 다치게 한 `독일 병정` 겔스돌프가 있었지만
차범근은 모든 것을 화해하며 이적에 동의했다. 이적료 1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6천 마르크(1억6천만원)도 동양인 선수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적을 용서하는 차의 태도에 서독 축구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차는 은퇴후 쾰른체육대에서 본격적인 축구 정교사 코스를 밟아 자격증도 땄다. - 조선
1989 - 이효상 국회의장 사망
중공 전인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된 등소평.
1983 - 중국 전인대, 국가주석에 이선념, 국가중앙군사위주석에 등소평 선출
1983년 6월 18일 중공 전인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에 등소평이 선출됐다. 쓰촨성 출생 등소평은 고급중학졸업 후,
1920년 프랑스에서 고학하였다. 젊어서는 모택동을 지지했으나 1978년 3차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경제의 현대화 건설·사상 해방·문호 개방책이라는 대전환을 가지며, 1979년 미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3년 제6기 전인대에서 등소평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함에 따라 중국의 권력기관의 하나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서 등소평은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후 등소평은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11월 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장쩌민 총서기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 조선
1983 - 여성우주인 샐리 라이드, 우주왕복선 첫 탑승
1981 - 건설의 날 제정-건설인의 날-유래 및 의의
1947년 5월 1일 대한건설협회 창립일을 기념하여, 1980년부터 5월 1일을 건설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식을 갖게 되었다.
1981년 건설부 창립기념일인 6월18일로 기념식 일자를 통합하고, '건설인의 날'로 개칭하여 기념하였다.
그후 1982년부터는 건설 기념식 명칭을 '건설 진흥 촉진 대회'로 변경하여매 짝수년에 행사를 갖고 있다. 이 날은 건설 종사자들의
사기 앙양과 총화단결, 건설 산업의 위상 제고 및 대국민 이미지 개선, 열악한 여건속에서 건설업에 매진하는
건설 가족에 대한 노고를 치하하고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날이다.
http://kdaq.empas.com/qna/3187312
지난 1980년 제정된 건설의 날은 모든 건설인들이 참여해 화합과 새로운 도약을 다지는 명실상부한 건설인 최대의 축제로 성장,
건설산업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 포상 등을 통해 건설인의 사기를 진작하고 건설산업의 위상을 제고하는 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건설의 날 기념행사는 1980년 이후 2년마다 개최돼 왔으나 올해(2003년)부터는 건설인들의 자긍심 고취와 건설업계의
일체감 조성을 위해 매년 개최하는 행사로 확대됐다. (일간건설) 2003-6-18
http://www.aak.or.kr/technote/read.cgi?board=t2&y_number=528
1981 - 국제기능올림픽서 4연패
1980 - 한국-아랍에미레이트연합, 국교수립
1980 - 한국-아랍에미리트 국교 수립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비엔나에서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에 조인했다.
1979 - 미소 SALT2 협정 조인(1979)
솔트-투(SALT2) 즉, 제2단계 전략무기제한협정이 1979년 오늘 교섭 시작 7년 만에 결실을 봤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있는 합스부르크궁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SALT-2에 조인했다.
소련은 이 SALT-2 협정에서 핵무기에 대한 기존 자료는 물론 협정 이후에
나올 새 자료를 미국과 정기적으로 교환한다는 데 동의했다.
또 두 나라는 군사위성을 통한 사진촬영이 상대방의 협정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합법적 수단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감시를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의 유효기간은 1985년 12월 31일까지로 설정됐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SALT-2 조인 이후 소련군의 쿠바 주둔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문제로 팽팽한 긴장관계로 접어든다. - YTN
1979 - 카터, 브레즈네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 서명
미국 카터 대통령과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1979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2차 미소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에
조인했다. SALT II는 1.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한 각종 미사일 총수 제한 2. 다목적유도복수탄두(MIRV)미사일과
전략폭격기 총수 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조인된 SALT II도 1979년 12월말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다.
카터(1979)
1979 -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상 조인
1979년 6월 1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소련의 레오니드 L. 브레주네프가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I)에 조인했다.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은 1972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주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사이에 조인되었다. 곧 미국과 소련은 SALT II 협상에 들어갔다. SALT II는 진정한 의미의 조약과 합의성명 및 양해사항을 제시한 의정서, 백파이어의 항속거리와 생산을 제한하겠다는 브레주네프의 약속, 그리고 SALT III의 원칙에 관한 성명서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협상을 재개하며 이름을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으로 바꾸었다.
이 협상은 1983년 11월 중단되었다. - 브리태니커
1976 -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74 - 소련군 원수 주코프(Zhukov, Georgi K., 1896~1974) 사망
1974 - 소련 주코프 원수 사망(1974)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대표로서 나치 독일군의 항복문서에 확인서명을 한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 원수!
1974년 오늘 일흔여덟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코프는 러시아제국의 차르군 출신으로 러시아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아 군 고위직을 계속 유지했다.
스탈린과 가장 가까운 군사고문이었고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주코프는 스탈린이 죽은 뒤 1957년 흐루시초프에 의해 해임되지만 곧장 복권돼 소련군의 최고 영예인 레닌훈장을 받았다.
1972 - 영국 여객기 추락(1972)
1972년 오늘!
승객과 승무원 118명을 태운 영국항공 소속 여객기가 런던의 히드로 공항을 이륙하자마자 추락했다.
이 사고로 탑승자가 모두 숨졌다.
구조대원들이 사고현장에 도착했지만 여객기의 연료탱크가 폭발해 기내진입이 불가능했다.
블랙박스를 수거해 해독한 결과 사고 여객기의 기장과 부기장이 조종사들의 파업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하다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 YTN
1969 - 신상옥-김지미, 제15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여우주연상 수상
1968 - 서울서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의 경희대학교 연표
1965.6.29 - 조영식 총장 세계대학총장회의(IAUP) 결성을 주도하여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창립총회 개최
1968.6.18 -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의 본교 유치 개최(기념우표 발행)
http://web.khu.ac.kr/~bulletin/
1964 - 한국-버마 무역협정 체결
1964 - 뉴욕시 할렘에서 흑인폭동
1963 - 소련, 첫 여자우주인 테레시코바가 탄 보스토크 6호 발사
1962 - 박정희 내각수반 취임
1962 - 건설부 신설
1954 - 과테말라 내란
반공포로 석방을 환영하는 경북 영일군민들.
1953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전격 석방
1953 - 반공포로 석방(18일 0시를 기해)
1953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단행(1953)
1953년 오늘!
이승만 대통령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에게 반공포로들을 극비리에 석방할 것을 명령한다.
자유세계에 남기를 원하는 반공포로들을 남한에서 석방하지 않고 한 달 반 동안 중립국 관리 아래 두기로 한
UN과 북한의 포로교환협정에 반발한 조치였다.
당시 UN군이 남한에서 관리하던 반공포로는 3만5천여 명!
수용소에 근무하던 한국군 헌병들은 UN군의 눈을 피해 새벽에 일제히 수용소 문를 열었다.
이때 포로 2만7천여 명이 석방됐다.
원래 북한과 휴전협정을 이룬 뒤에 반공포로를 송환할 계획이던 UN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석방 단행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 YTN
1953 - 이승만, 반공포로 전격 석방
1953년 6월8일, 유엔군ㆍ공산군 양측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다. 조기 종전을 원한 유엔군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ㆍ폴란드ㆍ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데가 반공포로들이 6개월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6월18일 새벽2시, 미군이 경비중인 부산ㆍ대구ㆍ광주ㆍ논산 등 포로수용소의 전원이 끊기고 철조망이 뚫렸다.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들의 대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만5600여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7400여명이나 됐다. 그러나 8000여명은 다시 철조망 신세를 져야했다.
1953 - 반공포로 석방
6·25전쟁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군 가운데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석방되었다. 6월 8일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국제연합(UN)군측과 공산군측 간에 포로송환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며,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계해 총 120일 간의 설득 기간을 둔 뒤 최종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북한에 되돌려보낼 수 없다는 주장 아래 18일 0시를 기해 분산·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천·대구·상무대·논산·마산·부산·부평 등 7개 수용소에
분산·수용되어 있던 3만 7,000명의 포로 중 2만 7,092명이 석방되었다.
1953 - 나기브 이집트 초대 대통령 취임. 왕제에서 공화제로 변경
1952 - 국회, 임시의장에 신익희, 부의장 조봉암 김동성 선출
1951 - 프랑스 총선서 드골파 제1당 진출
1950 - 북한군, 정찰명령 제1호 하달
원자폭탄 개념도. 야구공 사이즈의 플루토늄 구(球)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1942 - 원폭 제조 `맨해튼 프로젝트` 가동
독일이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성공시켰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헝가리에서 망명한 물리학자 질라드는 아인슈타인을 설득,
핵분열이 군사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도록 했다.
지지부진하던 원자력 연구가 급물살을 탄 것은 1941년 12월 미국 과학연구개발청 장관 바네바 부시가 루스벨트로부터 최종승인을 얻어내면서였다. 전쟁 중인 데다가 실험실·제조시설 등을 비밀리에 건설하려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육군부가 실무책임을 떠맡았다.
1942년 6월 18일, 이를 위한 공병대가 발족됐고 9월에는 그로브스 공병대 준장이 최고 책임자로 임명됐다. 발족 당시의 이름은 ‘대용품개발연구소’였으나 8월에 ‘맨해튼 관구’로 바꿨다. 20억달러나 투입된 이른바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 연구를 주로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해 이 대학이 위치한 맨해튼이 암호명으로 쓰였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도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조선
1940 - 드골 장군, 레지스탕스 운동 선언하고 자유프랑스군 조직
프 정치인들 ‘드골 후광 업기’ 경쟁-우파 물론 좌파도 예찬 나서
신세대들 “애들처럼 추종해”
샤를 앙드레 조제프 드 골(1890~1970) 전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 전쟁영웅이자, 전후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킨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한 정치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드골이 런던에서 독일 나치점령군에 맞선 저항을 독려한 첫 방송을 내보낸 지 70주년이 되는 18일이 다가오며 프랑스에선 드골의 정치적 상속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의 경쟁이 뜨겁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이는 정치인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다. 사르코지는 18일 드골과 2차대전 전쟁영웅 얼굴들로 도배한 유로스타 특별열차를 타고 런던을 방문할 예정이다. 런던에 체류하는 몇시간 동안 그는 드골의 방송이 이뤄졌던 비비시(BBC) 방송국 본사의 스튜디오, 드골의 전시사무실 등과 함께 파리 근교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드골이 독일에 항복했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전했던 ‘희망’의 메시지를 유로화의 위기와 높은 실업률로 고통받는 지금의 프랑스인들에게 다시 전하겠다는 의도다. 우파 내에서 사르코지의 오랜 정적인 도미니크 드 빌팽 전 총리는 18일 기념일을 기해 자신의 정당 창당식을 거행해 드골의 진정한 후계임을 강조하겠다고 나섰다.
이처럼 드골주의가 프랑스 우파의 전유물처럼 비치는 측면이 있지만, 공화국시민운동(CRM)의 장 피에르 슈벤느망(71) 전 내무장관은 “드골의 원칙들을 정치인들이 필요에 따라 왜곡시켰다”며 “드골은 좌우를 초월했다”고 주장한다. 드골의 독특한 정치적 성향에 좌우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넘나드는 정치인들이 서로 줄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신세대들은 드골이 멀게 느껴지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를 추종하는 정치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17일 보도했다. 17살의 지미 오글리오는 “드골주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도 정치인들은 애들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프랑스를 전향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정치인들을 존경할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10-06-17 오후 08:58:3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426230.html
1936 - 프랑스 인민전선내각, 주40시간 노동제 가결
1935 - 영국,독일 해군함선협정에 조인, 독일은 영국의 35%의 함대를 보유
1929 - 제5차 공산당 사건
미국의 여성비행가 아멜리아 에어하트.
1928 - 여성조종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여성최초로 대서양횡단 비행에 참가 (17~18일)
미국의 여성비행가 아멜리아 에어하트(Earhart, Amelia)가 1928년 6월 18일 여성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참여했다.
그녀가 탄 '우정호'는 미국 뉴퍼들랜드를 이륙해 20시간 40분 만에 영국 웨일즈 파리항에 도착했다.
신문들은 그녀를 '레이디 린디'(여성 린드버그)로 불렀다.
1897년 미국 캔자스주 애치슨에서 태어난 에어하트는 1차대전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곡예비행을 처음 보고 비행기에 매료됐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때 조종을 배운뒤 몇년 안되어 비행기록 500시간을 돌파할 정도로 비행에 열심이었다.
이번 비행에 자신이 조종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한 에어하트는 마침내 1932년 5월 20일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해
꿈을 이뤘다. 거센 바람과 연료탱크가 새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3,241Km를 13시간 30분만에 돌파했다.
에어하트는 이후에도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미국 대륙을 단독 횡단했고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까지 논스톱 비행했다.
남북 양극탐험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북극해에서 사라진 아문센.
1928 - 노르웨이의 극지 탐험가 아문센(Amundsen, Roald, 1872~1928) 사망
1928 - 극지탐험가 아문센 사망
노르웨이 출신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이 비행선 사고로 추락한 친구 노빌레를 구출하려다 1928년 6월 18일 북극권에서
조난당해 운명을 달리했다. 54세였다.
보르게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북극탐험을 꿈꾸며 자란 아문센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95년 1등항해사가 됐다. 북극점 정복의 제1인자를 꿈꾸던 아문센은 1909년 미국인 R.E.피어리가 그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으로 바꾸어 1910년 ‘프람호’로 남극탐험을 떠났다. 로스해의 고래만 대빙벽에 기지를 설치하고 동료와 52마리의 개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55일 만인 1911년 12월 14일,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것은 영국의 스콧 일행보다 35일 앞선 것이었다.
1925년 아문센은 비행정에 의한 북극비행을 시도했으나 실패, 다시1926년 엘즈워스와 이탈리아인 항공기술자였던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을 이용해 북극을 횡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북극 횡단 비행에 대한 신빙성의 논쟁은 죽기 전까지 아문센을 괴롭혔다.
1928년 노빌레 일행의 북극탐험대 비행선이 스피츠베르겐 근처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하기 위해
비행정으로 날아가던 중, 비행정와 함께 아문센의 소식이 끊겼다. - 조선
1923 -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에트너 화산 폭발, 카스틸리오네 지방이 괴멸
1922 - 이라크, 독립을 요구하는 반영국 무장봉기 발생
1918 -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완료
1918 - 198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모딜리아니 출생
1901 -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막내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바 출생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러시아어: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Анастас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1901년6월 18일 - 1918년7월 17일)는 로마노프 황족으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4황녀이다. 그녀 위로는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라는 세 언니가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인 황태자 알렉세이가 있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쫓겨나 볼셰비키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었다가 훗날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황제파)의 진주소식을 들은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밤중이라
자고 있던 니콜라이 2세 황제와 가족들을 이동이 있을 것이라면서 깨워서 모이게 한 뒤, 총살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세이 황태자만 살해당했으며 황후와 황녀들은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했다는 설과, 아나스타샤 혼자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DNA 조사로 증명되었다. 1월 2008년에 러시아 과학자들이 어린 남자와 여자의 시체가 8월 2007년에 발견되었다고 했으며,
그들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 그의 언니들 중 한 명이라고 하였다. 3월 2009년에 DNA 조사의 결과가
밝혀졌으며, 로마노프 공주들은 모두 죽었다고 증명되었다.
2001년, 아나스타샤 공주는 가족 및 다른 러시아 혁명시의 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녀로 시성되었다.
전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후 안나 앤더슨이라는 여자가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자, 아나스타샤가 생존했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여, 아나스타샤 전설이 태어났다. 또 이 내용을 기초로 할리우드에서 자신이 아나스타샤
공주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공주로서의 교육을 받는다는 영화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샤 생존설에 근거한
만화영화 《아나스타샤》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아나스타샤 생존설을 믿는 사람은 여전히 적지 않다.
또한 아나스타샤 생존설에 의하면 아나스타샤는 총살을 당할 당시 총알이 아나스타샤의 몸을 관통한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입고 있던 코르셋의 철제 단추에 박혀서 아나스타샤는 살아남았고 홀로 그 곳을 탈출한 아나스타샤는
프랑스군 장교(대위)와 같이 도피행각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앤더슨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대에 독일에서 옛 제정 러시아 황실의 유산 상속권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으켰다. 그녀에게는 귀의 형태나 다리 모양 등 아나스타샤와 흡사한 신체적 특징이 있었던 데다가, 옛 황실에 관련된 측근 밖에는 알지 못했던 자세한 내막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는 점 때문에 일부 옛 러시아 제국 귀족들을 포함한 많은 지지자를 얻었지만, 정작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 점과 중요한 대목에서는 기억이 애매모호한 점 등 의문점도 많아, 소송은 장기화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진위 확정이 불가하다 하여 각하되었다. 그 후,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결혼까지 했지만, 1984년에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계속 주장하고 다녔다.
1991년에 아나스타샤의 남동생인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샤 또는 그 자매의 한 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골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미토콘드리아 DNA 감정 결과, 이 유골은 확실히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유골의 주인은 각각 아나스타샤의 친언니인 황녀 올가 니콜라예브나와 황녀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를 포함하여 당시 살해당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 그리고 관련인물들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이들 중 사망 당시 21살이었던 타티아나는 키가 65.6 inch(166cm)인 것까지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앤더슨이 죽은 후 보관되고 있던 그녀의 치아와 머리카락의 일부를 이용한 DNA 감정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언니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딘버러 공의 외가의 조모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에서 발견된 유골과 에딘버러 공, 그리고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이라고 추정되는 앤더슨 등
세 미토콘드리아 DNA를 비교한다는, 이제껏 없었던 과학적인 검증이었다.
그 결과, 에딘버러 공과 유골의 DNA는 정확히 일치했지만, 앤더슨의 DNA는 그 어느 쪽과도 일치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앤더슨과 아나스타샤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앤더슨은 그녀가 죽는 1984년까지 끝내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확신한 채로 죽었으며
그녀의 묘비에도 아나스타샤의 이름으로 적혀 있다.
1891 -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출생
1891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출생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년 6월 18일 ~ 1944년 3월 13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김진상(金眞常)이며, 김근포(金槿圃)라고도 하였다.
생애
학창시절
황해도 장연에서 지주인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3녀로 태어났다. 김윤방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운 선각자였는데, 김마리아가 어릴때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어머니도 곧 사망하여 김윤오, 김필순 등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투철한 명문가였다. 김마리아의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인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 운동가인 김순애에게는 김마리아가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 시를 거쳐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독립운동
1919년 도쿄 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난 사이,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진링(金陵)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다.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평양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사후
2ㆍ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것이며, 안창호가 김마리아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고문을 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그는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위키백과
1883 - 우루과이의 정치가 브룸(Brum, Baltasar) 출생
1882 - 불가리아의 총리 디미트로프(Dimitrov, Georgi M.) 출생
1871 - 루마니아의 민족사가, 정치가 이오르가(Iorga, Nicolae) 출생
1868 - 헝가리의 군인, 정치가 미클로시 호르티 출생
1868 - 헝가리의 해군장교, 정치가 호르티(Horthy, Miklós) 출생
호르티(Horthy, Miklós (Nagybányai), 1868.6.18~1957.2.9]
1850 - 미국의 신문·잡지 발행인 커티스 (Curtis, Cyrus Hermann Kotzschmar) 출생
커티스 [Curtis, Cyrus Hermann Kotzschmar, 1850.6.18~1933.6.7]
커티스는 필라델피아에 언론 왕국을 세운 미국의 신문·잡지 발행인이다. 중학교 시절 수동식 인쇄기를 사서
4쪽짜리 주간지 <영 아메리카 Young America>를 펴낸 것이 그의 최초의 사업이었다. 이후 그는 보스턴으로 가 신문사
계통에서 일하다가 <피플스 레저 The People's Ledger>의 발행인이 되었다. 1879년 <트리뷴 앤드 파머 Tribune and Farmer>를 창간했고, 1883년에는 이 잡지의 여성란을 본격화한 <레이디스 홈 저널 Ladies' Home Journal>을
만들어 1년 반 만에 발행부수 20만 부를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90년 커티스출판사를 세웠고,
1897년에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Saturday Evening Post>를 인수했다. 유능한 편집인 로리머와 손잡은
그는 인수 당시 발행부수가 2,000부를 넘지 않던 이 16쪽짜리 주간지를 5년 만에 50만 부를 넘는 유명한 잡지로 키워냈다. 이 잡지의 발행부수는 1909년에 100만 부,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270만 부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들을 인수해 신문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 분야에서는 잡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코 큰 일을 이루지 못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시키는 일밖에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치루스 H. K. 커티스
1845 -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라베랑 출생 - 1880년 말라리아 기생충 발견
1845 -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기생충학자 라베랑(Laveran, Alphonse) 출생
라베랑 [Laveran, (Charles Louis) Alphonse, 1845.6.18~1922.5.18]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도주하는 나폴레옹 군대. /조선
1815 -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1814년 3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과 나폴레옹이 벨기에의 워털루에 진을 쳤다.
영국군 9만 5천명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 12만 명 등 모두 20여만명이 넘는 연합군을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했다.
이에 맞선 나폴레옹군도 12만 5천명에 달했다.
워털루에 집결하기 전 웰링턴은 북쪽으로부터 진군해 왔고,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는 블뤼허는 측면을 보조하며
웰링턴과의 합세를 시도했다. 라인강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가 그리고 러시아 연대들이 예비군대로서
독일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해 왔다. 이들이 모두 집결하기 전 이들을 분열시켜야 했던 나폴레옹은 서둘러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6월 16일 프로이센 군대의 일부를 격퇴시킨 나폴레옹은 17일 워털루로 진군했다.
6월 18일 나폴레옹은 휘하의 평범한 그루쉬 장군에게 프로이센 군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워털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웰링턴을 공격했다. 1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네 번이나 공격했으나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루쉬가 쫒았던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는 그루쉬를 따돌리고 워털루로 무사히 집결, 웰링턴과 합류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다.
프로이센 군대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내려진 나폴레옹의 공격 명령으로 결국 나폴레옹군은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항복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나폴레옹의 패배로 유럽에는 이른바 빈체제가 성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체제를 유럽 전역에 다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조선
1815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황제의 지위를 잃다.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프랑스어: Bataille de Waterloo)는 1815년6월 18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 블뤼허가 이끄는 영국, 네덜란드 및 프로이센 등이 포함된 연합군이 싸워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이며 여기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2번째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1799 -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라셀 출생
윌리엄 라셀(William Lassell, 1799년 6월 18일 ~ 1880년 10월 5일)은 영국의 천문학자이다.
볼턴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천문학을 공부하여 리버풀 교외에 사립천문대를 설립하였다.
지름 1 m짜리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1846년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을 발견하였으며, 1848년 W. C. 본드와 비슷한 시기에
토성의 위성 히페리온을, 1851년 천왕성의 위성 아리엘과 움브리엘을 찾아내었다.
1852년 지름 120 cm의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600여 개의 성운을 발견하는 데 이용하였다.
1849년과 1858년 영국왕립천문학회로부터 메달을 받았다.
618 -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당고조 이연(唐高祖 李淵, 566년: 북주 보정(保定) 5년 ~ 635년: 정관(貞觀) 9년 6월 25일)은
중국 당나라의 초대 황제이며, 농서 성기 사람이다. 자는 숙덕(叔德)이다.
출처 :함께 여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 천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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