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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6 세계 마약퇴치의 날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6  세계 마약퇴치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미 CIA, 쿠바혁명 직후 마피아 매수해 카스트로 독살 기도

50~70년대 비밀문서 공개
도청·언론인 사찰도 드러나

쿠바 혁명 뒤 196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이 마피아를 매수해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독살 공작을 폈으나 실패한 사실이 미국 정부 문서로 확인됐다.

중앙정보국이 26일 공개한 1950~70년대 초반의 비밀공작 문서 가운데 ‘가족 보석들(family jewel)’ 부분을 보면, 미국은 59년 쿠바 혁명을 이끈 카스트로 의장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1960년 8월 중앙정보국은 ‘갱단이 하는 방식’으로 카스트로 의장을 제거하기로 하고, 로버트 마휴란 거간꾼을 세워 라스베이거스 마피아 조직 두목인 조니 로셀리와 접촉했다. 기업가로 위장한 마휴는 마피아 두목 로셀리에게 “카스트로 집권 이후 쿠바에 벌인 사업이 큰 손실을 보고 있다. 카스트로를 없애주면 15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쿠바에서 도박장 운영과 성매매로 떼돈을 벌다 혁명 뒤 쫓겨난 마피아들도 카스트로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처음에 망설이던 로셀리는 중앙정보국 요원에게 솜씨 좋은 마피아 조직원 2명을 소개해줬다. 이들은 총을 쏴서 카스트로를 죽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며 카스트로가 먹는 음식이나 물에 독극물을 몰래 넣자고 제안했다.

중앙정보국과 마피아는 카스트로 의장한테 접근할 수 있는 후안 오르타란 쿠바 관리를 매수해 알약 형태의 독약을 전달했다. 하지만 오르타는 몇주 동안 암살할 틈을 엿보다 겁을 먹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 뒤에도 중앙정보국은 카스트로 의장 독살 공작을 계속하다 1961년 4월 피그만 침공이 실패한 뒤 취소했다.

공개된 중앙정보국 비밀 문서에는 카스트로 암살 공작 뿐만 아니라 냉전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0·70년대 미국 국내 불법 도청, 반전 운동 감시, 언론인 사찰 등 ‘어두운 과거사’가 들어 있다. 미 중앙정보국도 군사독재 시절 한국 중앙정보부나 옛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처럼 국내에서 민간인 사찰과 도청 등 불법공작을 일삼았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7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외국 공산주의 정부(소련)가 미국 반전운동을 배후조종하고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며 중앙정보국에게 그 증거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규정상 중앙정보국은 미국인 대상 공작이 금지돼 있었지만 존슨 대통령 지시에 따라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했다. 중앙정보국은 7년동안 미국인 30만명과 반전조직을 감시해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관리했고, 두드러진 반전 활동을 편 7200명은 별도 감시파일을 만들었다.

〈뉴욕타임스〉는 26일 “이 문서는 냉전시기 피해망상과 무능의 어두운 증거”라며 “중앙정보국 불법 공작은 그동안 알려졌지만, 문서와 메모가 이렇게 많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며 미국 사회의 충격을 전했다.

권혁철 기자 /한겨레 20070627 18:3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218758.html 

 

 

 


 


 

2000 -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 지도 초안 발표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의 분석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여온 국제 공공 컨소시엄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와 미국 민간업체 '셀레라 제노믹스'가 유전자 염기의 배열 지도를 2000년 6월 26일 워싱턴에서 공동발표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통해 "인간 유전자 지도는 인류가 생산해 낸 가장 경이로운 지도"라며 축하했다.

이날 발표한 '인간 유전자 지도'는 생명공학의 신대륙 발견으로 평가됐다. 인간 게놈은 인체세포에 존재하는 23쌍의 염색체, 염색체를 이루는 DNA(핵산), DNA를 구성하는 30억쌍의 염기들의 이중나선형 조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에 규명된 것은 염기의 배열로, 이제 이 염기배열지도를 통해 개별 유전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작업이 남게 됐다. 인간 유전자 정보의 97%를 해독했고 85%의 염기배열 순서 분석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들은 암 심장병 당뇨 비만 탈모 천식 파킨슨씨병 알츠하이머병 에이즈 등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일반인은 현재의 '진료기록'보다 훨씬 정확하고 풍부한 자신의 유전정보를 담은 극소형 DNA칩을 의사에게 제시하고 유전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제8차 세계 마약퇴치의 날 (1995.6.26 발행)


1988 - 제1차 '세계 마약 퇴치의 날' 

(발췌) 6월 26일은 1987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지정한 세계마약퇴치의 날이다. 전 세계적으로 마약류를 비롯한 약물남용의 폐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국제연합(UN)은 1987년 이래 매년 6월 26일을 '세계마약퇴치의 날' 로 정해 불법 마약류의 사용 및 유통을 근절하고 마약중독자의 치료 재활을 돕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제주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장 , 중독전문가 고 광 언 /제주매일 2011년 06월 22일 (수)

http://www.jejumaeil.net/news/articleView.html?idxno=80371

 

 

 

 

1987 - ‘6ㆍ26 대행진’, 비폭력ㆍ평화시위

‘6ㆍ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1987년 6월 26일 오후 6시를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전주 춘천 등 전국 37개 시ㆍ군 지역에서 국민운동본부, 민주당, 재야인사, 학생들에 의해 시도됐다.
이날 대행진은 6월 10일 대회에 비해 개최도시 및 시위발생지역, 시위가담인원이 훨씬 많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서울과 지방에서 일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렸고 연도의 시민, 학생들이 태극기와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일부 성당, 교회, 사찰에서도 타종이 있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7시 이후 시민들의 가세로 규모가 불어나 서울에서는 한때 서울역의 2만여명을 비롯, 동대문 영등포 일대 3만여명, 광주에서는 5만여명, 부산에서는 2만여명 등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가했다. 6만여명을 동원해 저지에 나선 경찰은 이날 하루에만 2천9백60여명의 시위참가자를 연행했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경찰이 버스로 강제 격리시켜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기도 했다. /조선
 

 

 

 

    

 

1976 - 토론토 CN타워 개장

[어제의 오늘]1976년 토론토 CN타워 개장

ㆍ30여년 ‘세계 가장 높은 자립구조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828m의 높이로 세워진 부르즈 칼리파(옛 부르즈 두바이)는 건설 과정에서 ‘세계 최고(最高)’라는 수식어가 달린 기록들을 잇달아 갈아치웠다. 3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립구조물’의 지위를 누려온 캐나다 토론토의 CN타워도 그렇게 1인자의 자리를 내놓았다.

캐나다 국철 소유의 CN타워는 1976년 6월26일 TV·라디오 송신탑으로 문을 열었다. 60~70년대 부흥기를 맞은 토론토는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는 건축물 탓에 방송 수신 장애를 겪고 있었다. 그 어느 건물보다 높은 곳에 안테나를 꽂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73년 2월6일 첫 삽을 뜬 지 40개월 만에 완성된 CN타워의 높이는 553.33m였다. 미국 노스다코타주의 KVLT-TV탑(628m)보다 낮았지만, 케이블로 지탱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서있는 구조물로는 최고 높이였다.
날씬한 꼬챙이 위쪽에 동그란 떡을 끼워놓은 듯한 모양의 CN타워는 수십년간 토론토의 상징으로 사랑받았다. 맑은 날이면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보이는 전망대(447m)와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유리바닥(342m) 전망대가 각지의 관광객을 끌어모았다. CN타워라는 이름은 95년 캐나다 토지공사로 소유권이 넘어간 뒤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연중무휴지만, 개장 34주년을 맞는 오늘은 관광객들을 맞지 못한다. 27일까지 메트로 토론토 컨벤션센터에서 열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보안 문제로 일대가 전면통제되기 때문이다.
기네스 세계기록위원회는 아직 CN타워를 ‘가장 높은 자립 탑’으로 보고 있지만, 그 순위가 유지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미 광저우 TV탑(610m)에 자립 탑으로서의 최고 높이를 빼앗겼으며 바레인 마나마에 1022m로 세워질 머잔 타워 등 마천루 경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과 함께 서울 곳곳에 추진 중인 초고층빌딩들의 높이도 CN타워를 훌쩍 넘어선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는 스포츠에만 쓰는 표어가 아닌 모양이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6-25 17:54: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6251754205&code=100100&s_code=ap005

 

 

 



1970 - 두브체크, 공산당적 박탈

1970년 6월26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체코 공산당으로부터 당적을 박탈당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1968년 '프라하의 봄'도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다.

1968년 1월에 당 노선경쟁에서 보수파 당관료를 물리치고 제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는 곧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 당의 권력독점을 비판하고 집회와 결사를 허용하는 등 체코 전역에 자유화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이 이를 '반혁명'으로 간주한 것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자유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이미 자유를 만끽해 본 체코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소련군을 위시한 20만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 국경을 넘었지만 국민들은 온 몸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

결국 '프라하의 봄'은 침략자 군화발에 짓밟혀 파국을 맞았고 소련에 연행된 두브체크는 자신의 행동이 반동적이었음을 시인해야 했다. 1969년 4월에 당 제1서기에서 해임되고 잠시 터키 대사로 전출됐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고향에서의 산림노동자였다. /조선

 

 

 

 

1963 - 케네디 미국 대통령 서베를린 방문, "Ich bin ein Berliner" 연설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독일어: Ich bin ein Berliner,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라는 말은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의 라트하우스 쇠네베르크에서 한 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그 당시 했던 연설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케네디가 한 연설 중 최고라 여겨진다.

이 연설은 소련의 지원 하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동독이 언제 자신들을 침략할는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던 서베를린 시민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설 당시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Civis romanus sum)’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이러한 발언은 당시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겨냥한 것이었을뿐만 아니라, 동독 및 소련에 맞서 서베를린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어조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당시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인파(서베를린 시민의 80% 이상)가 연설장과 거리, 인근 건물을 가득 메운채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환호하자 '연설의 달인'이라는 케네디 대통령조차 연설 중간중간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위키백과

 

 

 

 

1953 - 일본인들 독도 점거

독도-역사

1953년 1월 12일 한국 정부는 평화선 내로 출어한 외국 어선에 대한 나포를 지시하였다. 그 이후부터 일본 어선에 대한 총격과 나포 사건이 잇따르게 되었다. 2월 4일에는 일본의 어선 第一大邦丸의 일본인 어로장(漁撈長)이 한국 경비정의 총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일본 측에서는 한일 관계 정상화 이전까지 총 328척의 배가 포격 당하여 44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일본인 3929명이 억류되었다고 주장한다.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 홍순칠을 중심으로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다. 6월 26일 미국 선박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상륙한 일본인이 조난어민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 시마네 현 오키군 고카촌’이라는 내용의 영유 표지를 설치하면서 한국의 독도 근해조업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에 따라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는 독도를 일본의 수비로부터 지킬 것을 결의했고, 독도 의용 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4월 8일이라는 설도 있음) 대한민국 경찰이 경비 임무를 인수할 때까지 독도에 상주하게 되었다. 이후 독도에 대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위키백과

 

 

 

   

 

1950 -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피난을 결심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이미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위키백과

 

 

  


 

1949 - 백범 김구(金九) 암살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김구, 경교장에서 암살당해

1949년 6월 26일 낮 12시30분, 서울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에 갑자기 4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에게 쏜 총소리였다.

73세 노혁명가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검거에 순순히 응했다. 범인이 확보되고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음도 밝혀져 사건의 전모가 곧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사건은 지금까지도 배후설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신병을 확보한 헌병대가 범인을 감방에 가두기는커녕 의무실에 보호조치한 점, 임정계열인 헌병사령관을 이튿날 춘천지구로 전격 발령한 점 등이 의문이었다. 특무대로 넘겨진 안씨에게 김창룡이 “안의사, 수고했소”라고 격려하며 술·담배 등을 제공한 사실은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25 발발과 함께 특사조치로 석방돼 육군 중령으로 복귀한 점 역시 배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 배후에 대한 물증은 없고 심증만 구구한 채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선

 

 

 

 

 


- Berlin Airlift, 10th Anniv.          - Berlin Airlift, 40th Anniv

 

 

 

1948 - 소련의 육로 봉쇄로 베를린 공수 시작

1948년 오늘, 서베를린 지역에 대한 생필품 공수가 시작됐다.
소련이 이틀 전인 6월 24일부터 시작한 서베를린 봉쇄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였다.
서베를린은 소련이 관리하는 동독 영역 깊숙이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소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이 소련의 점령지를 제외한 독일 땅을 통합해 전후 유럽 경제 재건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계획에 반발해 서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베를린 봉쇄에 이어 7월 중순 소련이 동베를린 주둔 병력을 증강하고 이에 대해 미군 폭격기들이 파견되면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맞는다.
이 사태는 이듬해 5월 초 소련이 봉쇄를 해제하면서 해결된다. /YTN
 

 

 

 

[베를린 봉쇄와 공수 일지] 

1948-06-24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1948-06-26  미국-영국 베를린 공수 시작

1949-05-04  소련, 베를린 봉쇄 해제에 동의

1949-05-12  베를린 봉쇄 해제

1949-09-30  베를린 공수 종료

 

 

 



1945 - 국제연합헌장 조인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에서 국제연합헌장이 조인되었다. 국제연합(UN)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와 안전의 유지, 국제우호관계의 증진,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도적 문제에 관한 국제협력을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기구이다. UN은 1920년에 설립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국제연맹을 계승하고 있다. UN에 대한 구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41년의 대서양헌장에서였다. 1944년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 대표들이 워싱턴 D.C.의 덤바턴 오크스에서 '일반 국제기구 설립에 관한 제안'을 발표한 이래 몇 가지 난제에 부딪혔지만, 1945년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모인 얄타 회담에서 이런 난제들이 해결되어 국제연합헌장이 탄생했다. 국제연합헌장에 조인한 국가는 당시 모두 51개국에 이르러, 헌장이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유럽국가들이 중심이 된 종전과 달리 세계 전지역의 대표성이 확보된 명실상부한 국제회의임을 입증했다. 국제연합헌장은 1945년 10월 24일 발효되었다. /브리태니커
 

 

 



1943 -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Landsteiner, Karl) 사망

란트슈타이너 [Landsteiner, Karl, 1868.6.14~1943.6.26]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면역학자·병리학자.

주요혈액군을 발견했고, 수혈의 보편화를 가져온 ABO식 혈액형계를 개발해서 1930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빈 병리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을 때(1898~1908) 인간 혈액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고, 아무 혈액이나 구분 않고 수혈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혈액형 판정).

인간의 혈액에는, 적혈구의 원형질막에 붙어 있으며 항원으로 알려진 당분 함유물의 종류에 따라, 적어도 3가지의 주요혈액형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고(1901), 이를 A형, B형, O형이라고 불렀다. A항원과 B항원을 모두 갖고 있으며, AB 항체는 갖고 있지 않은 4번째 혈액형(AB형)은 다음해에 발견되었다. 그뒤 M과 N식(1927) 혈액형, 그리고 리서스(Rh) 인자도 발견했는데(1940), Rh 인자란 그것이 발견된 원숭이종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Rh 인자는 산모와 태아의 혈액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산·유산 또는 신생아에게 위험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Rh식 혈액형계).

그의 연구는 친자확인소송이나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며 법의학 발달에도 큰 몫을 했다. 혈액형이 특정한 유전자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은 인류유전학과 인류학 연구에 유용한 수단을 제공했다. 빈대학교(1909~19)와 뉴욕에 있는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1922~43), 면역학을 확립시키는 데 기여한 〈혈청반응의 특성 The Specificity of Serological Reactions〉(1936)을 저술했다. /브리태니커

 

 

 



1925 - 소련의 우주비행사 벨리야예프(Belyayev, Pavel) 출생

벨리야예프 [Belyayev, Pavel Ivanovich, 1925.6.26~1970.1.10]

소련의 우주비행사.

1965년 3월 18일 발사된 소련의 8번째 유인우주선(有人宇宙船) 보스호트 2호를 조종했다. 이 비행에서 부조종사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처음으로 우주유영을 했다. 1943년 전투기 조종사로 훈련받기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후반에 일본군과 전투를 했으며, 전쟁후 해군 항공대에 있었다. 모스크바의 소련 공군사관학교에 다니던 1959년말 최초의 우주비행사 그룹의 일원으로 뽑혀 훈련을 받았다. 보스호트 2호의 임무수행으로 소련의 영웅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922 - 모나코 대공, 해양학자 알베르 1세(Albert I) 사망

알베르 1세[Albert I, 1848.11.13~1922.6.26]

 

 

 

 

 

 

 

정식 이름은 Albert-Honoré-Charles Grimaldi.

모나코의 군주(1889~1922 재위).

 

항해사, 아마추어 해양학자, 과학 후원자로서 해양연구 장비와 기술을 혁신하고 기초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기관들을 설립했으며 재정지원으로 해양학 발달에 이바지했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좋아해 청년기에 스페인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나중에는 장비가 훌륭한 대형 선박을 타고 여러 차례 자력으로 해양탐사를 했다. 아버지 샤를 3세가 죽고(1889) 모나코 대공이 된 이후에도 해양학 연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나코 해양학 박물관(1899)을 세웠고 파리에 해양학 연구소(1906)를 설립했다. 아들 루이 2세(1870~1949)가 뒤이어 모나코 군주가 되었다. /브리태니카 

 

 

 


 

1914 - 미국의 만능 운동선수 제어라이어스(Zaharias, Babe) 출생

제어라이어스 [Zaharias, Babe Didrikson, 1914.6.26~1956.9.27]

본명은 Mildred Ella Zaharias. 결혼 전 성은 Didrikson.

미국의 만능 운동선수.

특히 육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농구와 육상경기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고, 나중에는 골프 선수로도 명성을 얻었다. 1930, 1931년에는 전미 여성농구대표 팀의 멤버였으며, 1930~32년에는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8종목에 걸쳐 우승을 차지했고, 1종목에서 공동우승했다. 그녀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의 80m 허들 경기와 투창경기에서 금메달을 땄고, 높이뛰기에서도 1위의 성적을 올렸으나 당시 비정통이었던 웨스턴 회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3번째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또한 야구·소프트볼·수영·피겨스케이팅·당구, 심지어는 미식축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1932년에 우연히 골프를 시작해 1934년부터 골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프로 레슬러인 조지 제어라이어스와 결혼했다. 프로 선수생활을 몇 년 하다가 아마추어로 복귀한 그녀는 1946년에 미국 여자 아마추어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했다. 다음 해에 그녀는 미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영국 여자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골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연속 17번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48년에 다시 프로로 복귀해서 1948, 1950년에 미국 여자 오픈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암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인 1954년에도 우승했다. 그녀는 1948~51년 여성 골프 선수 가운데 가장 돈을 많이 번 선수였다. 1955년에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이 인생 This Life I"ve Led〉이 출간되었다. /브리태니커

 

 

 


 

1909 - 폴 에를리히, 매독 치료약 개발

독일의 세균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매독의 병원체인 스피로헤타에 대한 치료약을 개발했다. 이 약은 근대의학에 화학요법을 접목시킨 최초의 성공사례였다. 치료약이 개발당시, 매독은 파리에서만 연 3천명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이 병을 불치의 병으로 생각했다.

에를리히는 매독에 감염된 토끼에 여러종류의 합성 유기화합물을 수차례 주사해 성공을 거두자 자신감을 갖고 사람에게도 실험했다. 1910년 이 "마법의 약"은 1만명의 매독환자를 치료했고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를리히는 이 약을 "살바르산(Salvarsan)"으로 명명했다.

에를리히는 명예와 많은 상을 수상했고 한 대중지는 그를 가리켜 "과학계의 왕자"라 했다. 살바르산은 1940년대 중반까지 매독의 초기치료에 이용되었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주요 치료제가 되었다. /조선

 

 

 

 
 

1892 - 미국의 작가 펄 벅(Buck, Pearl) 출생

벅 [Buck, Pearl (Comfort), 1892.6.26~1973.3.6]

벅은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작가이다. 선교사였던 부모와 함께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고향 버지니아에서 대학을 마친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1933년까지 살았다. 1923년부터 미국 잡지에 중국 생활에 대한 논설 및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고, 1931년에는 <대지 The Good Earth>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그녀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문체 및 인생의 근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중국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평생 동안 그녀가 저술한 65권 이상의 책 대부분은 중국 및 중국인들을 호의적으로 그린 작품들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중국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증진시키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각지에 남긴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펄 벅 재단을 세웠고, 수입의 대부분을 이 재단에 희사했다. /브리태니커

 

"나는 오직 인간에 대한 믿음만을 필요로 한다.

공자가 그랬듯이,

대지와 그 위의 생명들이 지닌 경이로움에 몰두한 나머지

저 하늘 위의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 펄 벅 

 

 

 


 

1869 - 덴마크의 소설가 넥쇠(Nexø, Martin Andersen) 출생

넥쇠 [Nexø, Martin Andersen, 1869.6.26~1954.6.1]

덴마크 작가.

사회개혁을 옹호한 덴마크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소설가로서 덴마크와 유럽 전역의 사회적 각성에 큰 역할을 했다.

코펜하겐 빈민가의 몹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른홀름 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처음에는 목동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구두장이의 견습공으로 지냈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겪는 쓰라린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뒤 어느 후원자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공부를 마친 뒤 그룬트비히 민속학교에서 1901년까지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저술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가 쓴 소설 2편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첫 작품 〈정복자 펠레 Pelle erobreren〉(4권, 1906~10)는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코펜하겐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열렬한 노동운동 지도자가 되는 펠레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다. 2번째 소설 〈사람의 딸 디테 Ditte mennskebarn〉(5권, 1917~21)는 가난 속에서도 용기있고 사랑스럽게 살아가지만 억압에서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는 한 여인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3번째 소설 〈하느님의 땅에서 Midt i en Joerntid〉(1929)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어난 농업 인플레이션 때의 부농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넥쇠는 제1차 세계대전 뒤에 공산당원이 되었으며 소비에트 혁명을 열렬히 지지해 소련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새벽을 향하여 Mod dagningen〉(1923)는 소련에 대한 인상을 전한다. 2권으로 된 회고록은 〈Erindringer〉(1932~39)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45년 〈정복자 펠레〉의 속편 〈붉은 모르텐 Morten hin Røde〉(2권, 1945)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모르텐은 혁명당원으로 나오고, 펠레는 서방세계의 많은 노동 지도자들처럼 부르주아 편으로 전향한 자로 묘사된다. 북대서양조약이 조인되자 1949년 덴마크를 떠나 동독에서 여생을 보냈다. /브리태니커

 

 

 

  
 

- Canada, 100 Dollars (Banknote)
 

1854 - 캐나다의 총리 로버트 보든(Borden, Robert) 출생

보든 [Borden, Robert Laird, 1854.6.26~1937.6.10]

캐나다의 제8대 총리(1911~20) 겸 보수당 당수(1901~20).

노바스코샤주() 그랑프레에서 출생했다. 1896년 하원의원, 1901년 보수당 당수, 1911년 총리가 되어 영국 본국과 긴밀하게 제휴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난국을 타개하였다. 대전 후에도 캐나다의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 힘써 베르사유조약에서는 영국 본국과는 따로 단독조인을 하였고, 국제연맹에 있어서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1920년 은퇴하여 오타와에서 죽었다. /네이버 

 

 

 


- Rouget de Lisle, by Bartholdi

 

1836 -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의 작곡가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 사망

루제 드 릴 [Rouget de Lisle, Claude-Joseph, 1760.5.10~1836).6.26]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의 작곡자·작사자.

하급 장교이자 온건한 공화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이 곡 외에는 이렇다 할 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라 마르세예즈〉는 1792년 스트라스부르에 부임하면서 동료들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원래의 제목은 〈라인군을 위한 전투가 Chant de guerre de l"armee du Rhin〉였지만 프로방스의 의용군들이 프랑스 혁명 당시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행진하던 중 이 노래를 부른 뒤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795년 프랑스 국가로 제정) /브리태니커  

 

 

1824 - 영국의 물리학자 켈빈(Baron Kelvin) 출생

 

 

1821 - 아르헨티나의 군인 ·정치가 ·역사가 ·시인 미트레(Mitre, Bartolomé) 출생

 

 

1810 - 프랑스의 열기구 발명가 J. M. 몽골피에(Montgolfier, Joseph-Michel) 사망

 

 

 

1792 - 덴마크의 화가 옌센(Jensen, Christian Albrecht) 출생

 

 

1763 - 영국의 화가 몰런드(George Morland) 출생


 

1541 -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피사로(Pizarro, Francisco) 피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