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0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1) 2011 - 모나코 국왕 알베르2세 결혼
모나코 국왕 알베르2세, 내년 7월 결혼
모나코 국왕 알베르2세가 내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약혼녀 샤를렌 빗스톡과 결혼한다고 모나코 왕실이
22일 발표했다. 52세인 알베르2세 국왕은 부왕 레니에3세가 2005년 타계한 후 모나코 왕국을 통치해왔다.
그의 모친은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출신 왕비 그레이스 켈리이다. 약혼녀 빗스톡은 알베르2세보다 20살 연하로
남아공의 올림픽 대표 수영선수를 지냈으며 교사로 일했다.
경향신문 2010-07-23 17:50: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31750385&code=100100
2) 1964 - 존슨 미국 대통령, 신(新)공민권법에 서명
1964년 7월 2일 존슨 미 대통령이 흑백차별의 금지, 인종간의 평등 등을 강조한 신(新)공민권법에 서명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인권법안이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날 존슨 대통령은 TV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 법안은 사람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국민에게 정의와 희망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밝히며
법률 실현에의 협력을 호소했다.
신공민권법은 고용, 대중숙박시설, 공공시설, 노동조합 가입자격에 있어서 연방정부가 재정지원하고 각종 사업에 있어서도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은 전해 11월 22일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고 케네디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과 강력한 로비활동을 전개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으로, 이날 존슨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 또한 케네디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신공민권법이 거의 원문 그대로 적용되었다. 존슨 대통령은 이날 흑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인종차별의 원천을 봉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법 발효 후에도 백인과의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흑인의 대립은 계속됐다. 16일 뉴욕에서 경찰관이 10살 된
흑인 소년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 이로 시작된 폭동이 순식간에 뉴저지, 시카고, 필라델피아로 번져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참극을 빚기도 했다. 이는 인종차별 문제가 법률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1) 2) 3)
1) 1976 - 통일 베트남 탄생
1975년 북 베트남군의 춘기공세에 의하여 남 베트남 정권은 무너지고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협정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 된지 20년만에 전국토가 공산주의 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북 베트남의 지휘 조정을 받고 있던 남 베트남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임시혁명정부(PRG)지도자들은 독자적인 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 베트남 당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긴급히 남.북 통합정부 수립작업에 착수하였다.
북 베트남 정치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1976년 4월 25일 남.북 통일 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해 6월 24일 하노이에서 열린 국회에서 하노이 당국자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7월 2일 전국토의 통일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RV)으로 발표 하였다.
1976년 12월 14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제 4차 베트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베트남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지도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후 1977년부터 이웃 캄보디아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문제로 베트남은 중국과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내의 중국화교들에 대한 탄압으로 수많은 화교들의 중국으로의 탈출은 중국과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과거 자유주의 체제하에 있던 수많은 남 베트남인들이 자유주의
국가로 이주하기 위하여 해상 탈출을 감행한 소위 보트피플 문제로 베트남과 동남아 국가들 간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드디어 1978년말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진격하여 이듬해 1월 7일 친 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의 이러한 행동을 응징하기 위하여 중국정부는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5일까지 베트남을 침공하여 베트남 국경 40km까지 침공해 들어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베트남은 통일이후 수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2003년 10월 12일 통권 제 18호 교민 잡지 김기태 교수의 나의 베트남 생활에서)
http://www.withustour.co.kr/index.asp
2) 1994 - 94월드컵서 자살골 기록했던 콜롬비아 선수 에스코바르(Escobar, Andrés) 피살
에스코바르 [Escobar Saldarriaga, Andrés, 1967.3.13~1994.7.2]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한창이던 1994년 7월 2일 콜롬비아 동북부 메델린시의 한 나이트클럽 밖 주차장에서 12발의
총성이 울렸다. "골, 골, 골"을 외치며 방아쇠를 당긴 괴한들의 구둣발 아래 한 축구스타가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콜롬비아 축구대표팀 주전수비수인 안드레스 에스코바르(27)는 단지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실점을 기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국에 돌아와 이렇게 총탄세례를 받았다.
에스코바르는 94년 미국월드컵 축구대회 미국과의 대결에서 팀의 1-2 패배를 부른 자책골을 허용했다. 그는 미국의
존 하크스가 콜롬비아 골문 앞으로 찔러 넣은 공을 걷어내려다 그만 공이 자기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콜롬비아는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에스코바르의
죽음은 갈등과 반목, 폭력 등 축구의 부정적인 측면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콜롬비아뿐 아니라
전세계 축구팬들을 경악시켰다.
3) 1928 - 영국의회, 평등선거권법 가결, 21세 이상 여성에게 남성처럼 선거권 부여
(제3차 선거법 개정)
1880년에 재집권한 글래드스턴은 1884년 제3차 선거법개정을 통해서 약 200만의 농업노동자에게 선거법을 부여함으로써 차아티스트 이념인 성년남자의 보통선거제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아직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 가운데도 셋방 살이
하는 총각이나 하인 등은 선거권에서 배제되었다.
1885년에는 평등선거구제(People's Charter , 제4조)가 실현되어 모든 선거구가 평등하게 1구 1인제로 통일되었다. 1911년에는 의회법(Parliament Act)의 통과로서 모든 법안은 하원에서 법률화 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에 의하면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은 1개월이 경과되면 상원의 인준여부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유효하게 되고
또한 모든 법안이 상원으로부터 거듭 반송되더라도 하원에서 3회이상 가결되면 상원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영국 부르조아지의 승리를 의미했다.
1918년에는 30세 이상의 여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1928년에는 남, 여에게 동등한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이로써 차아티스트 이념이 대부분 실현되었다.
-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 개최 기념 (2006.6.30. 발행)
2006 -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 개최 (2~11일)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 (IChO-2006)
전 세계 화학 영재들의 친선교류의 장(場)이 될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 (IChO-2006)가 2006년 7월 2일부터
11일까지 영남대학교 (경북, 경산)에서 개최될 예정으로, UNESCO가 인정하는 IChO-2006 대회는
화학 중흥과 도약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대회개요
1) 대 회 명 :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 (38th International Chemistry Olympiad)
2) 대회 기간 : 2006년 7월 2일(일)~11일(화)
3) 대회 장소 : 경상북도 경산시 소재 영남대학교
4) 참가 규모 : 74개국 850여명(국외: 480여명, 국내: 360여명)
5) 주 최 : 한국과학재단, 대한화학회
6) 주 관 : IChO-2006 조직위원회
7) 후 원 : 과학기술부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한국화학산업연합회
한국세라믹학회, 한국화학공학회
한국화학공학회
http://www.kiche.or.kr/sub6/menu2.html?act=read&page=15&aid=333&sc=&keyword=
국제화학올림피아드 개막 (2006.7.3. 경산)
세계 화학 영재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루고 우정과 화합을 다지는 기회인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가 3일
경북 경산시 소재 경산시민회관에서 시작됐다.
이번 대회는 세계 67개국을 대표하는 학생 254명, 단장 165명, 게스트 23명 등 442명이 참가,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개회식에는 대회 참가자 외에 김우식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비롯, 권오갑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채영복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박호군 인천대 총장, 나도선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성재갑 한국화학산업협회 회장 등 관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우식 부총리는 축사를 통해 “각국을 대표하는 참가 학생들이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세계 과학사에 한 획을 긋는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하고, 다양한 소양과 폭넓은 사고를 겸비한 존경받는 오피니언 리더로 자라줄 것”을 당부했다.
화학계의 원로이며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김시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화학이 인류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화학자들이 도전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해서 후손에게 깨끗한 자연을
물려주어야 하는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개회식을 시작으로 11일까지 영남대학교에서 계속될 제38회 국제화학올림피아드는 5일과 7일 이틀에 걸쳐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실험 및 이론 경시를 통해 미래 화학인의 자질을 검증하게 된다.
한편 이번 대회에는 아르메니아,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몽고,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가 처음으로
학생 대표가 참가했고, 몰도바가 참관국으로 참여했다. 미수교국인 쿠바에서도 대표 학생과 단장이 참가했다.
전필수 기자 | 2006/07/03 머니투데이
http://stock.moneytoday.co.kr/view/mtview.php?no=2006070316393652587&type=1
2006 - 새로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 도굴됐다?
[문화재가 털린다] (하) 사라진 ‘안동 광흥사 활자본’의 진실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보다 발간 연대가 50년 앞서는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 도난 과정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주장이 나와, 정치권과 불교계가 비상한 관심 속에 이 책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금속활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세계적인 발견이기 때문이다.
“발간 연대 직지심체요절보다 빨라”-“조선초 목활자본”
도굴꾼=교수 주장 엇갈리지만 행방 아무도 몰라
어쨌든 귀중한 자료…누군가 ‘선의취득’ 노리는듯
엇갈리는 주장=최근까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위원을 지낸 김원웅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은 2일 “7년 전 경북 안동 광흥사에서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 도굴됐으나 그 뒤 행방이 묘연하다는 주장이 있어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 충남 공주교도소를 방문해 이 금속활자본을 도굴했다는 ‘희대의 문화재전문털이범’ ㅅ아무개(45·수감 중)씨를 면담했다.ㅅ씨는 김 위원장에게 “1999년 여름 광흥사 응진전에 침입해 토불을 깬 뒤 복장유물을 털었고
여기에서 나온 불경을 대전의 ㅈ아무개(68)씨에게 가져가 감정을 받았다”며 “ㅈ씨가 책을 살펴본 뒤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ㅈ씨는 고서·불경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장물 감정을 해주는 이른바 ‘상선’이다. (관련기사 <한겨레> 6월30일치)
ㅈ씨는 최근 <한겨레> 기자와 만나 “ㅅ씨가 불경 한 권을 가져와 봤더니 금속활자본이 틀림없었다”며 “책의 맨 뒤 여섯째 줄에 책의 발행 연대를 알리는 ‘간기’가 적혀 있었는데 <직지심체요절>보다 50년 앞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ㅈ씨는 “책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며 앞의 서너쪽이 번져 있어 판독이 어려웠으나 사찰에서 발행한 책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책을 봤다는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문헌정보학)는 “2000년께
상주의 ㅈ아무개씨 부탁으로 책을 봤더니 원나라 때 지어진 불서인 <설두화상어록>이라는 책이었다”며 “종이 재질과
책의 모양, 활자체 등으로 판단할 때 조선 세조 때 간행된 목활자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책이 집필된 연대가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이를 발간 연대와 혼동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금속활자? 목활자? 책은 사라져=이처럼 양쪽 인사들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대해, 이들이 착각이나 실수로
서로 다른 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많다. 문화재털이범 ㅅ씨나 상선 ㅈ씨, 남 교수 등은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인 탓이다.
전문가들은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서는 금속활자본이 광흥사에서 발견됐을 ‘개연성’을 인정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이 발간되기 140여년 전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다, 광흥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문명대 동국대 교수(미술학부)는 “광흥사는 지금은 쇠락했으나 고려시대 귀중한 전적이 많았던 유명한 절이므로 불타지 않은 응진전 불상엔 고려시대 유물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을 찾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실물’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문화재털이범 ㅅ씨는 “훔친 책을 경북 상주에 사는 ㅈ씨에게 3천만원을 주고 팔았는데 ㅈ씨가 다시 아는 교수에게 맡긴 걸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ㅈ씨는 취재진과 전화 통화에서 “2001년께 ㅊ아무개씨에게 팔았는데 ㅊ씨는 이후 숨졌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원웅 위원장은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든 <설두화상어록>이든 책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누군가 ‘선의취득’을 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현숙 계명문화대 교수(서지학)는 “설령 이 책이 <설두화상어록>이라고 해도 아직까지 국내 서지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귀중한 보물급 문화재”라고 말했다.
풀리지 않고 있는 ‘사라진 고려시대 금속활자본 미스터리’는 문화재 보호에 무방비인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셈이다.
이유주현 이정국 기자 edigna@hani.co.kr 한겨레 2006-07-03 오전 07:30:24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37899.html
문화재 키워드 직지심체요절이란
1372년 백운화상이 역대 불조선사들의 주요말씀을 초록한 것을 1377년(고려 우왕3년)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청주의 흥덕사에서 간행했다. 정식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이라 소개돼 한때 잘못 불리기도 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3년이 앞서는 세계적인 유물로,
상·하 두 권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하권 1책뿐이다. 구한말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콜랭 드 플랑시(1853~1922)에 의해 반출돼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선 금속활자본 실존 가능성은 얼마?
전문가들은 <직지심체요절>보다 빠른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학문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까지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밝혀진 것은 고려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다. 현재 목판본으로 남아있는 이 책은 발문에 책을 찍게 된 사연을 밝히고 있다. 몽골의 침략으로 수도를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던 것을 1239년 강화도에서 책을 뒤집어 이를 목판으로 새긴 뒤 다시 찍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학계에서 공인하고 또한 실물로 확인된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심체요절>(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1377년)과 <직지…>
활자를 이용해 찍은 <자비도량참법> 두 가지밖에 없다.
ㅅ씨가 금속활자본을 훔쳤다고 주장하는 안동 광흥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안동 광흥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절로 고려시대 크게 번창했으나 이후 쇠퇴했으며 특히 1940~50년대엔 대화재와 전란으로 대웅전·극락전 등 주요 전각이 불타거나 무너져내려 응진전만 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와중에 고려시대 불경인 <취지금니묘법연화경(翠紙金泥妙法蓮華經)>(보물 제314호)과 <백지묵서(白紙墨書)묘법연화경>(보물 제315호) 등 잘 알려진 중요 문화재들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문명대 동국대 미술학부 교수는 “광흥사는 지금은 쇠락했으나 고려시대 귀중한 전적이
많았던 유명한 절이므로 불타지 않은 응진전 불상엔 고려시대 유물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2006-07-03 오전 07:30:24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37899.html
- '98 사진영상의 해 기념 (1998.7.2. 발행)
1998 - '98 사진영상의 해' 기념엽서 발행
1998 - `98 사진영상의 해 기념 '격동의 한국 현대사진전' (2~10일, 세종문화회관)
`98 사진영상의 해
1997년 말에 결성된 `‘98 사진영상의 해 조직위원회’는 1998년 1월 14일 오전11시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송태호
문화체육부 장관 및 임응식 조직위원장, 사진계, 예술계를 총망라하여 1,0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사진의 기반조성과 한국사진사 120년의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며 한국적 사진영상의 독창성을 모색하고, 21세기 한국 사진문화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사진영상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변화의 전기를 마련하며 제3영상 시대에 대비하고 온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의 한마당을 펼치는 데 있다고 강조하며 개막 선포식이 열렸다.
조직위원은 임응식, 이봉하, 이명동, 이경모, 홍순태, 한정식, 이철규, 이봉섭, 양세민, 유경선, 조유성, 주명덕, 강봉규,
박현기, 최민, 임동일, 하진규, 김용문, 집행위원은 구성조, 김영수, 김종호, 박성복, 박재건, 박주석, 백현기, 심동주,
오강석, 오형근, 이병훈, 이성우, 이원곤, 정인숙, 조의헌, 조태병, 최인진, 최재영, 홍계인이다.
사업개요는 「’98 사진영상의 해 선포식」이 1월 14일에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대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사진의 날 기념대회」가 4월 15일에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조병화 예술원장, 하진규 문화관광부 예술진흥국장, 임응식 조직위원장, 조직위원, 집행위원, 사진인 등 1,000여 명이 참석, 「’98 사진영상 축전」은 5월 28일∼8월 7일 테크노마트 종합홍보전시장 및 드림랜드 야외마당에서 한국 사진가 1,000명이 참석, 외국 사진가전이 있었고, 사진영상 모델 선발대회,
보디 페인팅 촬영대회, 추억의 웨딩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진전」은 7월 2일부터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정부수립 50년간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275점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남북 산하 사진전」은 9월 7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전시실에서 개최되었으며
남한 사진가의 작품 130점, 북한 사진가의 작품 110점이 전시되었고 지방 순회전도 가졌다.
「21세기 사진영상 학술대회」는 9월 25일부터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으며 주관은 ‘한국사진학회’, 발표자, 토론자 포함하여 150여 명이 참석, 일반인은 900명이 참석했다. 전국민 사진 찾기 운동은 묻혀 있는 중요한 사진사적 자료를 수집하고자 발간하고 사진 문화재를 데이터베이스화할 예정이다. 「한국 사진역사전」은 11월 20일부터 12월 19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으며 무려 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사진의 시각적 확장전」은 12월 22일부터 99년 1월 24일까지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새로운 장르의 수용에 의미가 있었다. 전국민 사진축제로는
사진 공모전, 지방 지원행사가 있었다.筆者 : 홍순태 (사진작가)
http://www.arko.or.kr/yearbook/1999/misul/pic.htm
1997 -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스튜어트(Stewart, James) 사망
스튜어트 [Stewart, James (Maitland), 1908.5.20~1997.7.2]
1백90cm가 넘는 껑충한 키에 온화한 인상, 그리고 비음 섞인 느린 말투…. 스크린과 실생활 모두에서 품위와
도덕적 용기를 갖춘 중산층 미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스튜어트가
1997년 7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9세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절정기를 이룬 스튜어트는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버릇없는 재벌 상속녀(캐서린 헵번)와
사랑에 빠지는 기자 역을 해낸 1940년작 `필라델피아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년) `멋진 인생`(1946년) `하비`(1950년) `살인 분석`(1959년)으로 4차례나 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1941년 공군에 입대, 폭격기 조종사로 2차 대전에 참전한 그는 20여 차례의
출격 기록이 있으며 무공십자훈장을 받기도 한 예비역 공군준장이다.
1975 - 새 경주박물관 개관
경주박물관은 1945년 8·15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되었으며,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1975년 7월 2일 새 경주박물관을 건립하여 준공식 및 개관식을 가졌다. 제1실은 선사시대실(先史時代室)
제2실은 고신라 토기실(古新羅土器室), 제3실과 제4실은 고신라 공예실, 제5실은 와전실(瓦塼室), 제6실은 통일신라
토기실, 제7실은 통일신라 금속공예실, 제8실은 조각실, 별관은 천마총(天馬塚)과 제98호 고분 유물실이며
정원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및 석탑·석불 등 석조물이 전시되어 있다.
1961 -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사망
헤밍웨이 [Hemingway, Ernest (Miller), 1899.7.21~1961.7.2]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겨울철 휴양지로 유명한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자살로 여겨지는 엽총사고로 1961년
7월 2일 사망했다. 그는 1899년 시카고교외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고교졸업후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 스타'지의 기자가 됐다. 1923년 3편의 단편을 시작으로 작가로 등단한 그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1920년대의 파리와 스페인을 배경으로 전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메마른 허무감과 절망적 쾌락을 그린 것으로,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대표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헤밍웨이는 문체도 독특했다. 간결하고 힘찬 하드보일드풍의 문장으로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 6편의 장편과 '킬리만자로의 눈' 등 50여 단편을 남겼다. 그중 1952년에 발표한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 1953년에는 노벨상을 잇따라 수상해 작가로서의 최고절정에 올랐다.
정력적인 행동가였던 그는 스페인내전에 참전하는 등 유럽전역을 돌며 작품소재를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했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두번이나 비행기 사고로 중상을 입어 말년을 요양의 세월로 보냈다.
"현대 전쟁에서 죽는 것에 전혀 아름다운 것도 타당한 것도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개처럼 죽을 따름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1937 - 미국의 비행사 에어하트(Earhart, Amelia), 남태평양 비행 중 실종
에어하트 [Earhart, Amelia, 1897.7.24~1937.7.2(실종)]
1937년 당시, 대서양ㆍ태평양 항로가 개설될 정도로 항공술이 발달했지만 적도 주변을 도는 긴 항로로 지구를
일주한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39세의 미국 여성 아멜리아 에어하트(Earhart, Amelia, 1897~1937)가
이 모험에 도전장을 냈다.
에어하트는 1932년 5월에 여성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하고, 하와이∼캘리포니아 간 태평양
상공도 처음으로 단독 논스톱 비행했던 당대 최고의 여장부였다. 미모까지 갖춰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리며 미국내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37년 6월1일, 에어하트는 항법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쌍발기 록히드 엘렉트라에 몸을 싣고 로스엔젤레스를 출발했다. 푸에르토 리코로 남하한 뒤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미∼아프리카∼중동∼인도를 경유해 6월28일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할 때 만해도 일정은 순조로워보였다.그러나 뉴기니를 이륙해 4000km 떨어진 하우랜드섬으로 날아가던
7월2일 오전8시45분쯤 "동경 157도, 남위 33도7분 상공을 날아가고 있다"는 무선연락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모든 연락이 끊겼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1929 -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Imelda Marcos) 출생
마르코스 [Imelda Romuáldez Marcos, 1929.7.2~ ]
이멜다 마르코스(Imelda Romuáldez Marcos, 1929년 7월 2일 ~ )는 필리핀 제10대 대통령 페르난도
마르코스의 부인이다. 독재자로 군림하던 남편이 실각하면서 함께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통령 궁의 호화로운 생활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1925 - 콩고공화국의 민족주의 지도자 루뭄바(Lumumba, Patrice) 출생
루뭄바 [Lumumba, Patrice (Hemery), 1925.7.2~1961.1.17]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Émery Lumumba, 1925년 7월 2일 - 1961년 1월 17일)는 콩고 민주 공화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60년 6월 24일부터 1960년 9월 20일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
생애
파트리스 루뭄바는 1925년에 벨기에령 콩고의 도시인 스탠리빌(현재의 키상가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체국에서 일하며 노조 활동을 했다. 1956년에 그는 횡령죄로 몰려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석방 후 그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위해 벨기에 정부에 저항한다. 루뭄바의 모토는 '자유로운 콩고의 자주독립과 통합'이었다.
루뭄바는 조제프 카사 부부, 모이스 촘베와 함께 콩고 독립운동을 지휘한다. 하지만 카사 부부는 바콩고 민족을,
촘베는 카탕가 지방만 지지하였다.
1959년이 되자 벨기에에 대한 저항운동이 거세졌다. 콩고는 점점 혼란 속으로 들어갔다. 루뭄바는 콩고의 통합을 지지하는 정당을 세우고 1960년의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루뭄바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고 카사 부부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촘베는 겨우 카탕가 지역 주지사가 되어 루뭄바와 촘베의 갈등이 심해졌다. 콩고민주공화국이
독립하자 콩고 사람들은 남아있던 벨기에 사람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치안이 불안해지자 루뭄바는 벨기에 장교들을
해임하고 참모총장에는 모부투 세세 세코를 임명하였다. 촘베는 카탕가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루뭄바는 국제연합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루뭄바는 소련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1960년 9월 14일에
모부투가 무력으로 정권을 탈환하고 루뭄바를 추방하였다. 미국은 적극적으로 모부투를 지지하였고 루뭄바는
국제연합군의 감시 아래 가택연금되었다. 11월에 루뭄바는 탈출을 했으나 며칠 만에 모부투의 군사들에게 잡혔다.
모부투는 루뭄바를 촘베에게 보냈다. 결국 1961년 1월 17일에 루뭄바는 벨기에와 미국의 묵인아래 총살당하였다.
루뭄바는 1965년에 모부투로 부터 '국민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23 - 폴란드의 시인이자 번역가 심보르스카(Szymborska, Wisława) 출생
심보르스카 [Szymborska, Wisława, 1923.7.2~]
폴란드의 시인.
동료 시인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및 타데우슈 로제비치와 함께 현대 폴란드의 투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소련 점령,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스탈린주의, 계엄령, 민주화 등을 증언했다. 고도의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욕망과 강렬한 휴머니즘으로 이것을 부드럽게 조율했으며, 199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심보르스카는 1945~48년 크라쿠프의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녀의 시는 1945년에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1952년에 첫 시집이 나온 데 이어 1954년에 2번째 시집이 나왔지만, 심보르스카는 이 두 시집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맹목적으로 헌신했다는 이유로 이 시집들을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줄곧 제외해왔다. 소련이 검열을 완화한 뒤에 처음 출간된 시집 〈예티에게 외치다 Wo anie do Yeti〉(1957)는 표제 인물인 설인(雪人) 예티를 통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 후에 나온 시집으로는 〈소금 Sol〉(1962)과 〈끝없는 재미 Sto pociech〉(1967) 등이 있다. 〈아마 Wszelki Wypadek〉(1972)의 표제작은 그가 자주 다루는 주제인 우연을 검토하고 있으며 후기
시집으로 〈큰 수(數) Wielka liczba〉(1977), 〈끝과 시작 Koniec i pocz tek〉(1993) 등이 있다.
1953~81년 그녀는 주간지 〈문학생활 Zycie literackie〉에 〈과외 독서 Lektury nadobowiazkowe〉라는 칼럼을 기고했으며, 1980년대에는 〈아르카 Arka〉와 〈쿨투라 Kultura〉라는 잡지에 기고했는데, 〈쿨투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되는 폴란드 망명 문학 잡지였다. 심보르스카는 16, 17세기의 프랑스 시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저명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심보르스카는 개인적인 문제에 보편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폴란드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된다. 그녀의 시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더 넓은 배경 속에서 철저히 재검토된다. 섬세한 문체는 재치와 깊이와 초연함에서는 고전적이지만,
아이러니와 냉담함에서는 현대적이다. 또한 꾸밈없는 언어가 곁가지를 모두 제거하고 대상을 향해 곧장 나아가는데,
이것은 1950년대 중엽에 동유럽 시문학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어조는 잔뜩 비꼬는 대화체인 경우가 많다.
지난 30년 동안 폴란드에서 시집 7권을 발표한 이 은둔자는 기법의 미묘함 때문에 번역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알려져왔으나, 그녀의 시집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영어판 시집으로는 〈소리, 느낌, 생각 Sounds, Feelings, Thoughts〉(1981), 〈다리 위의 사람들 People on a Bridge〉(1990), 〈모래알이 있는 풍경 View with a Grain of Sand〉(1995) 등이 출간되었다.
- 공중전화카드
1922 - 한국 천주교 추기경 김수환(金壽煥) 출생
김수환 [金壽煥, 1922.7.2(음력 5.8)~2009.2.16]
김수환은 한국천주교 신부·추기경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철학과를 중퇴하고 1947년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 독일에 유학해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다. 1969년 교황 파울루스 6세에 의해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으며, 1970∼7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1984년 교황 파울루스 2세가 집전한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성회를 개최해 한국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열어 헌혈·장기기증 등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민주화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많은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저서로 <사회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등 여러 신앙수상록이 있다.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김수환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金永錫)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던 아버지는 소년 수환이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셨다.
성품이 곧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3살 차이가 나는 형 김동한(金東漢) 신부와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부 5, 6학년 과정)에 갈 때까지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 형제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너희 둘은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샘이 깊은 물」1984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동성학교 시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을 받게 된다.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 (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http://cardinalkim.catholic.or.kr/index.asp
"해방이란 인간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 김수환
1908 -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흑인 판사 마셜(Marshall, Thurgood) 출생
1906 - 독일 태생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한스 베테(Bethe, Hans) 출생
1903 - 노르웨이의 국왕 울라프 5세(Olaf V) 출생
1900 - 최초의 경식 비행선 LZ 1호가 독일컨스탄스 호에서 첫 비행을 하였으나 대실패하다
1898 -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Dryden, Hugo L.) 출생
1896 - 독립협회 결성
1888 - 소설가, 민족운동 지도자 홍명희(洪命熹) 출생
1881 - 미국의 제20대 대통령 가필드(Garfield, James A.) 피격 (9월 19일 사망)
1877 - 독일의 소설가, 시인 헤세(Hesse, Hermann) 출생
1874 - 페루의 로켓과학자 파울레트(Paulet, Pedro) 출생
1869 - 스웨덴의 소설가, 비평가 쇠데르베리(Söderberg, Hjalmar) 출생
1865 -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 구세군의 전신인 '그리스도교 전도회' 설립
1862 - 영국의 물리학자 브래그(Bragg, William Henry) 출생
1839 - 노예선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
1798 - 나폴레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점령
1724 - 독일의 시인 클롭슈토크(Klopstock, Friedrich Gottlieb) 출생
1714 - 독일의 작곡가 글루크(Gluck, Christoph Willibald) 출생
1566 - 르네상스 시대 최고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사망
1486 - 이탈리아의 건축가, 각가 산소비노(Sansovino, Jacopo)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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