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사건 06.30
2009 -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전시회
'뚱보들의 천국' 보테르 전
[앵커멘트]
마른 체형을 선호하는 현대사회에 새로운 미감을 선보이는 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작가 '보테로'인데 풍만한 화면 속에 라틴 특유의 낙천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이양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풍선처럼 가득 부풀려진 얼굴, 그에 반해 눈, 코, 입은 아주 작습니다.
팔목에 꽉 낀 팔찌와 유난히 작은 손, 얼굴에 가릴 듯한 귀고리는 뚱뚱한 인체를 더욱 두드러지게 합니다.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풍만한 뚱보들을 그리는 '보테로', 작가는 뚱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의 형태를 강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동글동글한 양감이 극대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다보니 고전명화에 대한 연구도 철저히 했습니다.
16세기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는 보테로 식으로 변형됐습니다.
비정상적인 형태와 밝고 화려한 색채 속 인물들은 무표정, 작가는 감정해석을 관객들에게 맡겼습니다.
다인종에 혼성된 문화,열정과 삶을 즐기는 여유, 라틴아메리카의 독특한 문화를 자유롭게 느끼라는 것입니다.
[인터뷰:보테로, 작가]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것은 걱정을 벗어나서 예술을 해야합니다. 테마를 정해서 하는 것보다
즉흥적인 감각도 필요합니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1980년대 이후부터 최근의 작품 회화 89점과 조각 3점.
1996년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열렸던 초대전 이후 13년만의 국내전으로 현대미술의 유행을 좇지않는
그의 독자적인 화풍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인터뷰: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50, 60년대 추상표현주의의 '즉흥성'이 주를 이뤘던 아메리카미술과 달리 굳건한 형태감과 색채감을 추구했다는 데
호평을 받았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표적인 라틴미술가로, 라틴문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보테로.
전시회를 다 돌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라틴인 특유의 밝은 감성이 온 몸에 스며드는 듯합니다.
해학 넘치는 ‘뚱뚱보의 미학’
남미 예술의 거장 보테로 전시회
작은 눈코입, 터질 듯 통통한 볼살과 몸집.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77)의 ‘뚱뚱보’ 그림은 말 그대로 풍만하고 해학이 넘친다.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풍만한 양감을 통해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감성을 환기시킴으로써 20세기 유행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남미 예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보테로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중구 덕수궁미술관에서 30일부터 9월17일까지 열린다. 1996년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열렸던 초대전 이후 13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보테로전이다. 전시는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의 작품 가운데 회화 89점, 조각 3점이 선보인다.
1998년 작 '악기'와 2006년 ‘꽃’은 보테로 작업의 출발점이 된 정물 작품들이다.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장의 작품들을 패러디한 작품들도 전시된다. 2005년 작 ‘벨라스케스를 따라서’는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를, 2006년 작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를 따라서’는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테로식
뚱뚱한 인간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라틴댄스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춤추는 사람들’과 스페인 소설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희비극’에 등장하는 셀레스티나를 모델로 한 ‘셀레스티나’ 등은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또 투우와 서커스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1992년 작 ‘자화상’에서
그는 투우복을 입은 투우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전
페르난도 보테로전은 풍만한 양감을 강조하여 변화하는 20세기 유파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형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 및 야외 조각 등 총 92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조형적, 미학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그의 작품을 통해 라틴 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I.전시개요
o 전시일기 : 6월 30일~9월 17일
o 전시장소 : 덕수궁 미술관
o 부문 : 회화 89점 및 조각 3점
o 개막식 : 6월 29일(월) 오후 5시
o 부대행사
- 작가와의 대화(6월 30일)
- 라틴 음악회(전시기간 중 2회)
- 갤러리 토크 및 강연회
II. 작가소개
-1932년 콜롬비아 출생
-1952년 스페인 이주 이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각광을 받음
2009 - 마이클 잭슨 콘서트 사상최대 환불 사태
환불 대신 티켓 간직하겠다는 팬도 많아
마이클 잭슨은 다음달 13일 영국 런던의 O2아레나 공연을 시작으로 12년만의 복귀 콘서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잭슨이 지난 25일 사망하면서 '디스 이즈 잇(This is it)' 50회 공연은 물거품이 됐다.
티켓을 구매한 75만명의 팬들은 물론이고 공연을 계획한 공연기획사 AEG 라이브도 충격에 빠졌다.
AEG는 30일 성명을 내고 공인된 경로로 구매한 티켓은 티켓가격과 수수료를 모두 돌려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환불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8월 14일까지 신청을 마치면 잭슨이 디자인한 그래픽이 새겨진 실제 티켓을 받게 된다.
티켓 판매액이 무려 8천5백만 달러에 달했던 만큼 이번 환불은 사상 최대 규모의
티켓 환불 사태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AEG가 전액환불방침을 밝혔지만 이번 콘서트를 둘러싼 '회계악몽(accounting nightmare)'은 당분간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잭슨이 남긴 상당한 빚과 자산, 3명의 자식들 양육 등 재정문제를 둘러싼 법적분쟁에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AEG가 잭슨의 사망으로 생긴 재정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는 보험사들이 손실을 어느 선까지
보전해 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기획사들은 공연 취소나 스타의 불참석 등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데 보험조항은 매우 자세하고 취소이유에 따라
지급액이 달라진다.
영국 재보험사인 로이즈의 바트 내시 대변인은 이번 공연을 위해 AEG가 가입한 보험이 여러 개라고 밝혔다.
그는 "보험에는 변수가 매우 많고 작은 것들도 모두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예를 들어 죽음의 원인이
평소 건강상태 때문이라고 발표되거나 의학적 부주의가 발견되면 보험들마다 지급액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만약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검시관들이 6주 후에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을 약물로 결론 내린다면 AEG가 받는
보험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이베이나 비아고고 같은 입장권 재판매 사이트는 티켓 전액환불을 일찌감치 약속했지만
환불 대신 티켓을 간직하겠다는 팬들도 적지 않다.
2009 - 150명 탑승 예멘 여객기 추락
승객과 승무원 150명이 탑승한 예멘 국영 예메니아 항공 소속 여객기가 30일 인도양의 섬나라
코모로에 추락했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프랑스 라디오 방송 RFI와 CNN, BBC 등은 150명을 태운 예멘 여객기가 이날 오전 코모로에 추락했다고 전했다.
생존자 여부는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디 나드호임 코모로 부통령은 사고가 이날 이른 시간에 발생했다면서 "탑승자 150명 가운데 생존자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정확한 추락 장소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바다에 추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예멘 공항 관계자는 AP 통신에 코모로로 향하던 사고기가 바다에 추락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승객 대부분이 파리에서 코모로로 돌아오던 코모로 주민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고기 기종은 에어버스 310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소식통도 사고 여객기가 바다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해상 구조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코모로의 본섬인 그랑드코모로 미차미울리 마을의 한 의료인은 현지 병원으로부터 여객기가 추락했다며
긴급 호출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대륙과 마다가스카르 사이의 모잠비크 해협 북쪽 입구에 위치한 코모로는 그랑드코모로, 앙주앙,
모엘리 등 3개 화산섬으로 이뤄져 있다.
2009 - [부고]獨안무가 피나 바우슈 별세
독일의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슈가 별세했다. 향년 68세.
1940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졸링겐에서 태어난 바우슈는 1962년 요스의 주역 무용수가 되기 위해 독일에서
안무를 시작했으며, 1969년에는 쾰른 안무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이름을 날렸다.
특히 바우슈는 무용과 연극을 통합한 ‘춤연극(탄츠테아터)’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 현대무용계의 거장으로 꼽혔다.
이 양식을 연극계에서도 인정받아 유럽 연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 1986년 이탈리아 로마를 소재로 한 ‘빅토르’로
시작해 도시와 국가를 소재로 한 시리즈 작품들을 창작해왔으며,
2005년에는 한국을 소재로 창작한 ‘러프컷’을 초연하기도 했다.
피나 바우슈
2009 -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슈 별세
‘현대무용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독일의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슈가 30일 별세했다고
독일 부퍼탈무용단이 밝혔다. 향년 68.
무용단은 “그가 닷새 전 암 진단을 받았으나 손 쓰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했다. 피나 바우슈는 이달 말 쿠르트 바일이 곡을 만들고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대본을 쓴 오페라 <7대 죄악>을 모스크바의 체호프 국제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피나 바우슈는 70년대 이후 세계 무용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안무가로 평가받았다. 그는 부퍼탈 무용단을 이끌며 새로운 형식의 연극과 현대무용, 무언극을 통합한 독창적인 무용극 ‘탄츠테아터’를 만들어 현대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피나 바우슈의 춤이 이끌어내지 않는 유일한 반응은 무관심”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공연되는 작품마다 세계 무용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왔다.
세계적인 안무가 월리엄 포사이드는 “피나 바우슈는 무용을 근본적으로 재창조해냈다. 그녀는 지난 50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 중 하나다. 그녀 자신이 무용의 한 카테고리이며, 그녀 이전에 댄스시어터는 없었다”고 평가했다.
1940년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난 피나 바우슈는 엣센 폴크방 발레학교와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무용과 음악, 연기, 마임 등을 배웠다. 그 후 무용가와 안무가로 일찍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뒤 33살 때 독일 부퍼탈 무용극장 수석 안무가가 되면서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탄츠테아터’를 처음 선보여 세계 무용계를 놀라게 했다. 1974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을 시작으로, <봄의 제전>(1975), <카페 뮐러>(1978), <카네이션>(1982), <빅토르>(1986) 등 인간의 실존에 관한 심오한 주제를 담은 그의 ‘탄츠테아터’는 현대무용에 일대 혁명을 몰고 왔다. 특히 그는 1986년부터 이탈리아 로마를 주제로 한 <빅토르>를 시작으로 한 도시에 장기 체류하며 그 도시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하는 ‘도시 시리즈’에 매달려왔다.
피나 바우슈는 ‘실존하는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정서로 다루었던 독일 표현주의 무용을 계승했다.
따라서 그의 움직임의 주제는 언제나 ‘인간’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움직이게 만드느냐?’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와 16개국 20여 명의 무용수들로 이뤄진 부퍼탈무용단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냈다. 사랑과 욕망, 불안과 공포, 상실과 고독, 슬픔과 고뇌, 폭력과 파괴 등과 같이 인간의 내면을 자연스런 춤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무용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아름답고, 정형화된 무용과는 전혀 다른 양식을 띠고 있다. 그는 “나는 인생에 대해 얘기한다. 사람들이 나의 작품에서 많은 것들을 찾아냈다고 얘기해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바우슈는 특히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그는 1979년 2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봄의 제전> 공연으로 한국과 충격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래 2000년 <카네이션>, 2003년 <마주르카 포고>, 2005년 <러프 컷>, 2008년 <네페스:숨> 등 대표작들을 잇달아 소개하며 한국무용계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특히 그의 ‘도시 시리즈’ 중 한국을 소재로 엘지아트센터에서 세계 초연한 <러프 컷>은 그가 2004년 10월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에 대한 느낌을 무용으로 옮긴 작품이다. 한국인의 역동적이고, 끈끈한 정서와 수려한 자연경관, 한국 사회가 지닌 다양성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한국 무용가들을 독일에 소개하는 등 변방에 머물던 한국 현대무용을 세계와 이어주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는 현대무용가 안은미와 전통춤꾼 하용부, 배정혜 예술감독이 이끌던 국립무용단을 유럽에 처음 소개한 것도 그였다. 안은미씨는 “작년 12월 독일에서 만날 때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타계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며 “현대무용의 횃불로 타올랐던 20세기의 거장이 너무 일찍 졌다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피나 바우슈는 내년에 3월에도 엘지아트센터에서 영화 <그녀에게>에서 그가 직접 춤을 추는 장면이 나왔던 작품
<카페 밀러>와 대표작 <봄의 제전>를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더 이상 무대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한겨레 2009-07-01 오후 06:15:49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363385.html
■ 피나 바우슈는 누구?
1940년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 졸링겐에서 태어난 피나 바우슈는 14살부터 엣센 폴크방 발레학교에서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던 쿠르트 요스에게 음악, 연기, 마임, 댄스뿐 아니라 회화, 조소, 디자인, 사진 등 다양한 예술적 훈련을 받았다. 그는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 특별 장학생으로 진학한 뒤 폴 사나사르도, 도나 푸어, 아메리칸 발레단의 폴 테일러와 함께 작업하고, 안토니 튜더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예술적인 자산을 쌓았다. 1962년 독일로 돌아온 피나 바우슈는 쿠르트 요스가 창단한 폴크방 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1968년에 벨라 바르톡의 곡에 붙인 작품 <프라그먼트>를 발표해 안무가로 데뷔한 그는 1969년 <시간의 바람 속으로>가
쾰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안무가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그 후 폴크방 발레의 예술감독겸 안무가로서
활동하다 1973년 부퍼탈 시립극장 발레단의 예술감독 및 안무가로 취임한 뒤 무용단의 이름을 ‘부퍼탈 탄츠테아터’로
바꾸면서 세계 무용계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했다.
한겨레 2009-07-01 오후 06:15:49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363385.html
2008 - 박인비, US여자오픈 우승
박인비, 10년만에 그 감동 꽃피웠다
세리 ‘맨발투혼’ 보고 골프채 잡은 10살소녀…
박인비, US여자오픈 우승
대회 역대 ‘최연소 우승’…박세리 기록 깨
“박세리 언니가 유에스여자오픈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돼야지’하고 마음먹었습니다.” 10년 전인 1998년,
10살짜리 꼬마 박인비(20)는 졸린 눈을 비비며 부모와 함께 박세리의 유에스여자오픈 우승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봤다. 이틀 뒤 부모는 여성용 골프채를 사왔고, 골프채를 처음 잡은 꼬마는 꼭 10년 만에 자신의 꿈을 이뤘다.
유학파 박인비가 30일(한국시각) 미국 미네소타주 에디나 인터라켄컨트리클럽(파73·6789야드)에서 열린 63회 유에스여자오픈골프대회(총상금 310만달러) 최종 4라운드에서 경쟁자들이 무너지는 사이 침착한 플레이로 2언더파 71타를 쳐,
최종합계 9언더파 283타로 역전승을 거뒀다. 유에스오픈 사상 최연소(19년11개월6일·1988년 7월23일생) 우승으로
이전 박세리의 기록(20년9개월)을 깼다.
박인비는 함께 경기를 한 43살의 베테랑 헬렌 알프레드손(스웨덴·5언더파 287타)을 4타차 2위로 따돌리고, 엘피지에이 투어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걸린 이 대회(총상금 325만달러)에서 58만5천달러(6억여원)를 손에 쥐었다.
1번홀(파4)에서 18m짜리 칩샷 버디, 2번홀(파5) 칩샷 뒤 버디퍼팅으로 잇따라 두 타를 줄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전날 선두였던 스테이시 루이스(미국·4언더파 288타)와 2위였던 폴라 크리머(미국·3언더파 289타)가 약속한 듯이 1번홀 파, 2번홀 더블 보기로 미끄러지면서 전반에 순위가 뒤집어졌다. 박인비는 “선두가 곤두박질치고, 함께 플레이한 알프레드손도 헤매면서 부담이 적어졌다. 우승은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주변에서 도와주어야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박세리에 영향을 받아 골프채를 쥔 ‘박세리 키즈’ 가운데 하나인 박인비는 2001년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유에스주니어선수권우승(2002년), 올해의 주니어선수 선정(2002) 등으로 일찍부터 기대를 모았다. 미국주니어골프협회 대회에서는 통산 9회 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4월 프로로 전향해 그해 2부인 퓨처스투어 상금순위 3위로 2007년
엘피지에이 출전권을 땄다. 지난해 유에스여자오픈 때는 공동 4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인비는 드라이버샷 평균 비거리가 248야드(79위), 그린적중률 64%(86위)로 좋지 않다.
그러나 그린당 평균 퍼팅수 1.74개(1위)의 정교한 퍼팅으로 약점을 보완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그린의 경사가 심했지만
정확한 라이 읽기로 1~4라운드 언더파 성적을 냈다. 올해 15개 대회에서 5회 톱10에 들면서도 마지막 라운드에서 번번히 무너졌던 아쉬움도 날려 버렸다. 박인비는 “당장 근사한 저녁을 먹고 싶다. 밤에 잠은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우승의 즐거움을 표시했다.
박인비 프로필
-1988년 7월28일생
- 경기도 분당 서현초등, 죽전중 거쳐 2001년 미국 유학
-현재 광운대 생활체육과 1년 재학 중
- 2001년, 제주도지사배 주니어선수권 중등부 우승.
- 2002년, 미국주니어아마추어선수권 우승
- 2007년, LPGA 데뷔. 유에스여자오픈 공동 4위 등 톱10 2번
- 2008년, 유에스여자오픈 우승. 톱10 6번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한겨레 2008-06-30 오후 07:34:44
http://www.hani.co.kr/arti/sports/golf/296250.html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30일 저녁 ‘국민존엄 선언·국가권력 회개 촉구 비상시국 미사’를 집전하
려고 십자가를 앞세운 채 서울시청 앞 광장 한복판으로 줄을 지어 들어서고 있다. 탁기형 기자
2008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비상 시국미사 열고 `美쇠고기 재협상` 촉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30일 오후 7시30분 서울시청 광장에서 ‘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국가권력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를 열고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했다.
천주교 사제단과 교인,일반 시민 등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이날 미사에서 사제단은 시국선언문을 통해 “국민이 촛불을 들고 일어선 것은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굴복해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때문”이라며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뜻을 끝내 짓밟았다”고 비난했다.
사제단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만을 주장하는 보수 언론,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 등도 문제지만 국가
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해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이라며
“대통령이 국민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제단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의
확보”라며 “이 대통령은 즉각 폭력 진압을 지시한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연행자들을 전원 석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8시50분께 미사를 마친 사제단과 참가자들은 신부와 수녀들을 앞세우고 남대문과 한국은행 을지로를 돌며 행진했다.
이 일대 도로는 이들의 불법점거로 인해 교통이 전면 통제되는 등 퇴근길 운전자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사제단은 1일 오후 7시부터 시청광장에서 집회를 갖겠다고 밝혔다.
또 일부 사제들은 조만간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날 경찰은 전날과 달리 시위 자체를 원천 봉쇄하지 않았고 불법적인 도로 점거도 방관했다.
전날 시위 장소인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을 차량으로 차단하고,시위대가 도로 행진을 시작하자 인도밖으로
밀어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 시위 참가자는“사제단의 가세로 평화 시위로 되돌아 갈 수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이 이뤄질 때 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제단의 불법 도로 점거 시위와 관련,상당수 시민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거리로 나와 불법시위를 벌이는 것은 정국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또“검찰 경찰 등이 전방위로 나서 불법시위를 막겠다고 공언해놓고 사제단의 불법 시위를 방조했다”며 경찰을 질타했다.
한국경제 2008-06-30 23:52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063019367&sid=0106&nid=006
2008 - 정의구현사제단 시국 미사
'쇠고기 전면 재협상·국민과 대화' 요구
"비폭력" 호소… 거리행진 뒤 자진 해산
지난 30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오후 7시40분부터 '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국가권력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를 열고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했다. 이날 미사에는 천주교 성직자들과 교인,
일반 시민 등 8000명(경찰추산, 주최측 추산 3만명)이 모였다.
100여명의 천주교 사제단은 이날 '국민을 이기는 대통령 어딨어?' '공안 정권 끝을 알지' '고시철회 명박퇴진'이라는
피켓을 들었다.
사제단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통해 '쇠고기 전면 재협상'과 '국민과 대화에 나설 것'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사제단은 선언문에서 "국민이 촛불을 들고 일어선 것은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해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제단은 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의
확보"라며 "이 대통령은 폭력 진압을 지시한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참석자들은 밤 9시부터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에 앞서 사제단 김인국 신부는 "평화의 원칙을 지켜달라. 촛불을 지키는 힘은 비폭력이다. 비폭력의 원칙이 깨지면 촛불은 영영 꺼진다"며 참가자들에게 폭력 자제를 호소했다.
참가자들은 이어 "촛불이 승리한다" "평화시위 보장하라" "재협상을 실시하라" "국민들을 때리지 마"라는 등의 구호를 외친 뒤, 숭례문과 을지로를 거쳐 다시 서울광장으로 돌아오는 경로로 행진을 벌였다.
거리 행진에서 사제단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대통령의 교만과 무능이 민주주의를 짓밟는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섰고, 참가자들은 "이명박은 물러가라", "이명박은 회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거리행진 도중 마스크를 쓴 20대 청년 10여명이 "종각으로 가자"고 선동했으나, 시위대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시위대는 사제단이 "오늘은 빨리 끝내자"고 호소함에 따라 밤 10시쯤 대부분 해산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통합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 민주노동당 천영세 대표와 강기갑 의원, 진보신당 심상정 공동대표, 창조한국당 문국현 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과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참석했다. 전날 서울광장 집회를 원천봉쇄했던 경찰은 이날은 서울광장 둘레 중 태평로 쪽과 프라자 호텔 앞쪽만 전경버스로 차벽을 세웠고 프레지던트 호텔과 인권위 쪽은 출입을 막지 않았다. 한편 사제단은 1일 저녁부터 시청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안준호 기자 libai@chosun.com 이석호 기자 yoytu@chosun.com -조선닷컴 2008.07.01 02:57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1/2008070100063.html
2008 - 정의구현사제단 시청 앞 시국미사 열어
사제단 “공권력이 촛불의 평화를 깨고 있다”
[현장 1신] 정의구현사제단 시청 앞 시국미사 열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대표신부 전종훈, 이하 사제단)이 주최하는 ‘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교만한 대통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가 30일 오후 7시30분부터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신부와 수녀,
일반시민 등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리고 있다. 이에 앞서 오후 6시부터는 사전미사가 진행됐다.
2005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미군기지 확장반대 시국미사 이후 3년 만이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서 대규모 시국미사를
올리는 건 1987년 6월항쟁 이래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80년 광주민중항쟁과 87년 박종철 군 사망사건 진상 공개 등 사제단이 시국의 분수령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만큼, 이번 ‘시국미사’ 역시 그 의미가 크다.
사제단은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강론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들을 지켜보며 분노한다”고 밝혔다. 이어 사제단은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또 “공권력이 저지르는 폭력과 오늘의 혼란을 아프게 바라보면서 주권재민을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에 동참하되 기도와 성찰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여겨 오늘까지 의견 표명과 행동을 하지 않고 지냈지만 이제는 그런 절제가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고 미사 이유를 밝혔다. 사제단은 “신앙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의 오만을 엄중하게 나무라고, 복음의 지혜로 우리의 나아갈 바를 궁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사제단은 “정부는 26일 장관고시를 관보에 게재해 국민 건강권과 검역권 그리고 국가 주권과 자존감 회복을 요구하던 국민의 염원을 철저히 짓밟았다”며 미국산 쇠고기 장관고시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사제단의 시국미사가 끝난 오후 8시께부터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하는 촛불문화제가 열리며, 사제단도 참석할 예정이다.
한편, 천주교에 이어 불교계도 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국법회를 봉행한다. 기독계도 YMCA와 NCC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기도회를 7월3일 열 계획이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현장 2신] 사제단 “서울광장서 천막 치고 무기한 단식농성”
“우리는 남쪽으로 행진할 것이다. 더 이상 대통령을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진짜 소통해야 할 대상은 국민이다.
대통령은 국민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우리가 돌보지 않아서 소실된 남대문을 찾아갈 것이다. 화재로 소실된 남대문의 참상은
오늘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참상이다.”
8시30분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인국 신부가 미사가 끝난 뒤 가두행진을 선언하며,
시민들에게 ‘비폭력’ 원칙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촛불을 지키는 힘은 비폭력이며, 이 원칙이 깨지면 촛불이 영영 꺼지고,
다시는 서울광장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며 “비폭력의 힘으로 서울광장에서
국민의 건강권과 검역주권을 우리의 손에 넣자”고 제안했다.
김 신부는 또 사제들이 6월30일부터 단식기도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이날 사제단 상임위원회 신부 10여명은 시청 앞 서울광장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사제단은 “참회와 세상의 아픔을 나누고 정부와 국민 사이의 교착상태에 활로를 열기 위해
단식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그동안 21년 전 박종철 군 사망사건 진상 공개를 통해 ‘6월항쟁’을 촉발시켰던 사제단이 ‘광우병 쇠고기’ 국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실제 사제단은 이날 봉헌 노래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광야에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선택했다.
이에 앞서 사제단은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고시를 폐기하고 쇠고기 전면재협상을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사제단은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검역주권”이라며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제단은 또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거리행진은 8시50분께 시작됐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대열 맨 앞에 섰다.
시국미사에는 원혜영 통합민주당 원내대표, 이석현·김재윤 의원을 비롯 10여 명,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문국현 창조한국당 의원, 천영세 민주노동당 대표, 노회찬·심상정·이덕우 진보신당 공동대표, 김용철 변호사 등이 참석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현장 3신] 시국미사·촛불행진, 밤 10시께 평화롭게 끝나
9시50분께 거리행진이 평화롭게 끝이 났다.
4만여 시민들은 “조중동은 찌라시다” “어청수는 물러나라” “재협상을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남대문-명동 입구-을지로입구를 거쳐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1시간 남짓 진행된 거리행진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촛불이 이긴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든 사제단 소속 300여명의 신부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행진 중간에 “조중동은 폐간하라” “이명박은 회개하라” “어청수는 물러나라” “최시중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울광장에 도착한 뒤엔 서로를 격려하며,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우리모두 만세”를 불렀다.
문정현 신부는 <한겨레> 취재영상팀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축산업자를 돕는 대신 우리의 농촌과 국민 건강권을 죽이는 쇠고기 협상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어서, 촛불은 꺼질래야 꺼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촛불문화제에 올 수 없게 된 건 공권력 때문”이라며 “공권력이 촛불집회의 평화를 깨고 있음이 오늘 열린 촛불문화제를 통해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밤 10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되는 노래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서울광장에 울려퍼졌다.
이어 김인국 신부가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시민들을 향해 호소했다. “오늘 촛불문화제는 끝났다.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달라. 대신 7월5일 ‘100만 촛불대행진’에 참석해달라. 아니 내일 촛불문화제도 참석해 달라. 내일은 더 재미있을 거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늦은 밤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서울광장을 지켰다.
시국미사와 촛불문화제가 끝난 뒤 사제단은 서울시청 오른쪽 광장에 천막을 설치했다. 이날부터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가는 김인국 신부는 <한겨레> 영상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사제의 눈으로 확인해 존경심으로 여러분 앞에 온 것”이라며 “신부 노릇 할 수 있도록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제단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 강론 전문]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마태 7,15)
▶대한민국 민주주의 심각한 위기 맞고 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주권재민을 힘껏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를 마음에 품고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하여 사제들이 오늘까지 이렇다 할 의견표명과 행동 없이 침묵 중에 지냈으나 이제 그런 절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끓는 국민여론을 제압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로써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탄식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조중동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
먼저 보수언론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광우병의 위험성을 무섭게 따지고 들다가 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의 절대 안전을 강변하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입니다. 정론직필의 본분을 버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말을 뒤집는 언론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순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궤적을 잘 알면서도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 대선의 결과를 빚어낸 것뿐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금번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울분을 터뜨릴 일이지만, 높이 받들고 깊이 새겨야 할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 많은 부분 속이고 있는 현실 더 큰 불행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드는 맹목적 사대주의도 딱한 일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재앙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에서 비롯했음을 지적합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 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일으킨 졸속협상이나마
정부의 주장대로 이에 복종하는 것이 한미 FTA 체결 조건에 유리하고, 그래서 자유무역이 혹시 경제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억측이 설령 옳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게 교회의 판단입니다. 결국 정부는 불행한 미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공권력을 악용하여 국민의 통곡과 신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경찰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 꺼지지 않도록 지키겠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5)는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까지 촛불을 지켰던 민심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청정한 수도자들과 전국의 모든 교우들과 함께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자 합니다.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이런 모진 마음 때문에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대통령에게 호소합니다.
1. 국민은 너그럽습니다. 대통령은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고시를 폐하고 쇠고기 전면재협상을 선언하길 바랍니다.
2.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길 바랍니다.
3. 국민은 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입니다.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합니다.
4.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십시오.
그리하여 존엄을 바라는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길 바랍니다.
5. 국민 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2008년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겨레 2008-06-30 오후 05:49:2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6177.html
2007 - 한-미, FTA 합의문 공식 서명
미 민주당 하원 지도부 반대…의회 비준동의 난항
슈워브 "합의문 추가 내용변경없이 확정될 것"
김현종 "양국 의회, 조속히 비준동의하길 기원"
한미 양국이 30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합의문에 공식 서명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수전 슈워브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오전 10시(현지시각)부터 미 의회 캐넌빌딩에서 한미 FTA 서명식을 갖고 작년 2월부터 17개월간 진행돼온 양국 정부간 협상을 마무리했다.
FTA 합의문이 서명됨에 따라 양국은 FTA 발효를 위해 양국 의회에서 비준동의를 받기 위한 절차에 본격 착수하게 된다.
하지만 미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 하원 지도부가 29일 "현재 체결된 대로는 한미 FTA를 지지할 수 없다"며 반대입장을
표명하는 등 양국 정치권에서 한미 FTA 체결에 대한 반대의견도 제기되고 있어 최종 의회 비준동의까지 난항이 예상된다.
특히 한국이 올 연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고, 미국은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는 등 의회 비준동의 과정이
양국의 중대한 정치일정과 맞물려 있어 한미 FTA 비준동의 문제가 정치쟁점화되면서
찬반 양론이 격화되는 것은 물론 비준동의가 상당 정도 늦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날 서명식에서 카를로스 구티에레즈 미 상무장관은 "한미 FTA는 미국이 지난 15년간 체결한 무역협정 가운데 상업적으로 가장 의미있는 협정"이라면서 "미 행정부는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의회가 이번 한미 FTA로 인한 미국의 이득에 대해
확신토록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슈워브 USTR 대표는 한미 FTA가 미 의회가 대통령에게 부여한 무역촉진권한(TPA) 시한내에 체결된 마지막 FTA임을 언급하면서 "역사적인 한미 FTA에 서명하는 오늘은 한미 두나라는 물론 세계 무역에 있어서 위대한 날"이라며 "한미관계에 중요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했다.
슈워브 대표는 또 "한미 FTA 서명이 이뤄짐으로써 합의문에 대한 추가적인 변경은 없다"면서 "한미 FTA가 양국에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주는 협정임을 미 의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educate)하겠으며 이를 통해 한미 FTA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사라지고 의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종 본부장도 "한미 FTA는 한미 양국의 희망을 상징한다"면서 "한미 FTA를 좌초시키면 더 안정된 미래가 열릴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일각의 한미 FTA 비판을 반박했다.
그는 또 "양국 국민들이 한미 FTA가 가져다 줄 모든 이익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미 FTA가 한미 양국에서
빠른 시일내에 비준(동의)되기를 기원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양국은 지난 4월 2일 양국 FTA 협상을 타결했으나 미 행정부와 의회가 노동.환경 등의 요건을 강화하는 신통상정책을 채택한 뒤 미국측이 한미 FTA에 이를 반영할 것을 요구, 양국은 지난 22일부터 27일까지 두 차례 추가협상을 갖는 등 우여곡절 끝에
최종 합의했다.
한미 FTA가 양국 의회 비준동의를 거쳐 공식 발효될 경우 한국은 중국.일본.아세안을 합친 것보다 큰 미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한층 높일 수 있게 되고 소비자들은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산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는 등 개방화 시대의 새 장을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또 국가신인도도 올라가고 안보리스크가 줄어들면서 국내기업들의 자본조달 비용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시장개방으로 인해 쇠고기를 비롯해 일부 농업분야의 부분적 타격이 불가피하고, 방송.통신을 제외하면 의료.교육 등
서비스시장은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비관세장벽.원산지규정 등도 성과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재홍 김병수 특파원 bingsoo@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한겨레 2007-06-30 오후 11:55:31
2007 - 피아니스트 임동혁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4위
피아니스트 임동혁(23)씨가 지난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3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4위를 차지했다.
이 부문 1등은 없고 미로슬라프 쿨티셰프(러시아)가 2위, 알렉산드르 루뱐체프(러시아)가 3위를 차지했고 세르게이 소볼료프(러시아)가 임동혁과 함께 4위에 올랐다. 한국인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입상한 것은
정명훈(1974년·공동2위), 백혜선(1994년·3위), 임동민(2002년·5위)에 이어 네번째다. 임동민(27)은 동혁씨의 친형이다.
또 바이올린 부문에서는 윤소영(23), 신현수(20)가 각각 4위와 5위를 차지하면서 1994년 이경선씨가 6위 입상한 이후
최고 성적을 거뒀다.- 쿠키뉴스 2007.07.01 21:25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0584304&code=11110000
2007 - 일 방위상 “미국의 원폭투하 어쩔 수 없었다” 발언 (7월 3일 사임)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일본 방위상은 30일,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과 관련,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져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나의 정리된 생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교도(共同)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이날 지바(千葉)현의 한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이같이 말하고 "그것에 대해 미국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그의 발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어 파문이 예상된다. 특히 1개월 앞으로
다가온 참의원 선거 정국에서도 이런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예상된다.
규마 방위상은 또 "(미국은) 일본이 질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도 굳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려 전쟁이 끝났다. 다행히 홋카이도(北海道)가 점령되지 않고 끝났지만 잘못됐으면 홋카이도가 구소련에 넘어갈 뻔 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구소련의 일본 참전을 막기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그는 또 "승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원자폭탄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이 지금도 있지만 국제정세,
전후의 점령상태 등으로부터 보면 그것도 선택 방안이 될 수 있었다는 점도 머릿속에 넣어가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최이락 특파원 choinal@yna.co.kr (도쿄=연합뉴스) /한겨레 2007-06-30 오후 02:13:1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219395.html
2004 - 오르가니스트 한지윤씨 독일 뉘른베르크 콩쿠르서 1위
2002 - 브라질 월드컵축구 사상 5번째 우승-2002한일월드컵 폐막
2002 - 브라질이 2002년 축구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을 2:0으로 꺾고 다섯번째로 우승하다.
2002년 FIFA 월드컵 한국/일본™(영어: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일본어: 2002 FIFAワールドカップ 韓国日本™)은 대한민국과 일본이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공동 개최한 제17회 월드컵으로,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을 기본 이념으로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각각 10곳, 모두 20개의 도시에서 31일간 64경기를 치렀다.
브라질이 우승, 독일이 준우승하였다. 주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은 이 대회에서 각각 4위,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대한민국의 4위 뿐만 아니라 터키의 3위와 세네갈의 8강 진출, 그리고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등 의 조기 탈락 등 많은 이변이 일어났다.
2001년 6월 30일 오후 중국에서 망명을 요청한 장길수 가족 7명이 제3국을 경유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마중나온 보도진과 환영인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2001 - 탈북한 장길수 군 가족, 서울 도착(2001)
2001년 오늘, 북한을 탈출한 장길수 군 가족 7명이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중국 베이징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사무실에서 나흘간 농성한 끝에 '제3국행 출국 허가'를 받았던
길수군 가족 7명은 싱가포르와 필리핀 등을 거쳐 서울에 왔다.
탈북을 시도한 지 4년만의 일이었다.
지난 97년 3월 외할머니와 외삼촌 정씨가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방으로 떠난 것이 시작이었다.
99년 1월에 길수 군이, 같은해 8월 장한길 씨가 중국 연변의 은신처로 도망쳐 나오는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네 가족 15명이
탈북한 것이다.
장길수군의 외할머니 김춘옥 씨는 인천국제공항 도착 후 7명 가족을 대표해 '이렇게 한국 땅을 밟으니
인생이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다' 라며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짤막한 '서울 도착 소감'을 발표했다.
이들은 당국이 준비한 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가며 창문을 통해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YTN
2001 - 탈북한 장길수군 일가족 7명, 서울 도착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국제사회에 폭로하며 중국 내에 은신해 왔던 탈북소년 장길수(17·가명)군의 가족과
친척 7명이 2001년 6월 30일 서울에 도착했다.
험난했던 4년 3개월여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들의 탈북은 지난 1997년 3월 외할머니가 두만강을 넘은 것을 시작으로, 1999년 8월까지 차례로 이뤄졌다. 탈북할 당시의 길수군 가족과 친척은 모두 4가족 15명이었으나, 길수군 어머니 등 5명은 중국 공안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송환돼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고, 나머지 가족의 소재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길수군과 형 한길(20)씨의 존재가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1999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NGO 대회에 북한의 실상을 폭로한 그들의 그림이 뉴스위크, 영국 TV 등을 통해 처음 소개되면서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들의 서울 도착은 6월 26일 목숨을 걸고 중국 베이징 시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하면서 시작됐다.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다렌(大連)에 은신해 있다가 UNHCR 사무소에 진입한 길수군 가족은 "자신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고, 한국으로 보내주지 않을 경우 자결하겠다"는 비장한 의지를 UNHCR에 전달했다.
결국 UNHCR과 한·중간의 막후협상으로 이들은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거쳐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의 비상한 관심과 올림픽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정치적 부담 등 대외환경에 의해 사건이 해결됐기 때문이다.
탈북자의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나쁜 선례를 남긴 것도 외교적 악수로 지적됐다. - 조선
2001 - '체조요정' 코마네치, 미국시민권
'체조 요정'으로 불렸던 나디아 코마네치(39)가그토록 원했던 미국 시민권을 마침내 얻었다.
코마네치는 30일(한국시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법원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지 11년만에 정식 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 시민으로서 선서를 했다.
코마네치는 "오늘 세계가 열렸다.
그러나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루마니아 대표로 출전, 3관왕에 올라 세계에 이름을알린 코마네치는 이후 물질적으로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지만 자신에게 자유가 없음을 아쉬워했었다.
코마네치는 지난 89년 자유를 찾아 헝가리로 탈출한 뒤 미국으로 망명 신청을했고 이듬해부터 미국에서 생활하며
1996년에는 미국인 체조 코치와 결혼까지 했으나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해왔다.
코마네치는 "오클라호마시티에 살면서 미국 남자와 결혼하고 결국 여기에까지서게 될 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클라호마시티 AP/연합뉴스) - 한겨레 2001.06.30(토) 15:50
http://www.hani.co.kr/section-006000000/2001/06/006000000200106301550423.html
1999년 6월 30일 새벽, 화염에 휩싸인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1999 - 씨랜드수련원 참사(1999)
1999년 오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에 있는 '씨랜드'수련원에서 불이 나 건물 600여 평을 태웠다.
이 불로 수련원에서 잠자던 서울 소망유치원생 등 어린이 19명을 포함해 모두 23명이 숨졌다.
방 안에 피워둔 모기향 불이 이불에 옮아 붙었거나, 누전에 의한 화재일 가능성이 커 보였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999 - 씨랜드수련원 화재로 캠프중이던 유치원생 19명 포함해 23명 사망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3층 컨테이너 숙소에서 화재가 발생, 서울 문정동 소망유치원생 18명과
부천 이월드외국어학원 유치원생 1명 등 어린이 19명과 마도초등학교 김영재 교사 등 어른 4명이 숨졌다.
불은 어린이들이 자고 있던 수련원 3층 301호실에서 시작돼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3층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불이 처음 난 301호에 있던 소망유치원생 18명은 문을 열지 못해 모두 사망했다.
불이 난 뒤 화재신고가 늦게 이루어진 데다 소방서가 현장에서 70km나 떨어져 있어 소방차 출동마저 늦어 인명피해가 크게 늘었다. 검찰은 씨랜드 화재 원인에 대해 301호실에 놓인 모기향불이 주변의 옷과 종이 등
가연성 물질에 접촉하면서 발화된 것으로 최종 발표했다.
1997 - 영국이 156년간 다스렸던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이 반환받다.
`신라의 달밤` 등 주옥같은 곡으로 우리네 삶을 달래줬던 작곡가 박시춘씨.
1996 - 작곡가 박시춘씨 별세
`신라의 달밤`의 작곡가 박시춘씨(83)가 숙환으로 1996년 6월 30일 별세했다. 박씨는 1926년 밀양보전을 졸업하고
1931년 `OK레코드`에 전속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모두 2천여곡의 작품을 작곡했다.
일제말기 무명가수였던 남인수가 불러 인기를 모았던 `애수의 소야곡`은 당시 이동 연예단의 악사였던 박씨의 손에서 나왔고
해방직후 나온 `가거라 38선`은 38선의 비극을 노래로 엮어낸 첫 작품이었다. 박씨는 또 1947년 가수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을
비롯 `고향만리` `럭키서울` `비내리는 고모령`과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여 잘있거라` 등 주옥같은 멜로디로 한국 가요계를 이끌었다.
본명이 순동인 박씨는 밀양서 권번을 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당시 명창 손만갑-이동백-이화중선-김창용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읍내에 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축음기의 신식노래에 도취하여 11세에 그 카페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가요인생의
시발이었다. 6.25 때 국방부 정훈국에서 `승리의 용사` 등 국군 장병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고인은 5.16후 10년 동안 한국연예인협회이사장을 맡았으며 예총부회장 작가동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씨는 한국대중가요계를 이끈 공로로 보관문화훈장과 문공부장관상을 받았다.
동경 도립대 하타다 다카시 명예교수.
1994 - 하타다 다카시 교수 별세
일본 내 한국사 연구의 권위자 하타다 다카시 동경 도립대 명예교수(86)가 1994년 6월 30일 별세했다.
1908년 경남 마산 태생인 하타다 교수는 한국사를 전공 `조선사` `조선중세 사회사연구` `일본인의 한국관` 등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남기는 등 평생을 한국사 연구에 바쳤다. 아울러 전후 대부분의 일본 내 한국사연구자를 길러낸 교육자이며
한-일간 역사문제를 비롯한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일본 사회의 편견을 지적하고 시정을 위해 노력했던
일본의 양심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하타다 교수가 중심이 되어 1959년 결성된 `조선사연구회`는 30년 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월례발표회를 가지며
식민사관에 근거한 한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에 대해 "황국사관을 청산하지 못한
일본 사학계의 한계를 드러낸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는 하타다
교수는 이런 업적으로 성균관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92 - 경부고속전철 기공
1992 - 경부고속철도 기공식 거행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한 피델 라모스.
1992 -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
피델 라모스가 1992년 6월 30일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난 5월 11일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 피델 라모스 전 국방장관은 아키노 대통령의 6년 재임기간 중 군합참의장과 국방장관직을 차례로 맡았었다. 라모스는
1986년 2월 그의 사촌형인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항한 군부반란을 주도하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당시 군부반란은 피플스 파워로 대변되는 국민들의 대규모 민주시위를 촉발, 마르코스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어 후임 대통령에 오른 아키노 정권하에서는 7차례나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아키노 대통령의 신망을 공고히 했다.
이를 계기로 마르코스 정권에서 탄압의 주체였던 그의 이미지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탈바꿈됐다.
그는 1928년 3월 18일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백76㎞ 떨어진 링가옌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마르시소 라모스는 외무장관 및 대만대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여동생 레티시아 샤하니는 현재 필리핀 상원의원이다. 1950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 뒤 미 일리노이대에서 건축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필리핀군 소대장과 중대장 계급으로 공산게릴라 토벌작전에 참여했으며 한국동란에도 참전, 필리핀군 정찰소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군부에서 일단 퇴임했으나 마르코스
대통령이 그의 임기를 연장, 군의 다른 주요 장성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그는 1986년 대선 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후안 폰세 엔릴레에 합세해 군부반란을 주도, 마르코스 정권에 종지부를 찍는데 일조했다.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임수경양.
1989 - 전대협 대표 임수경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
1989년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외국어대 불어과 4년)양이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위해 단신으로
평양을 방문했다.전대협은 정부가 평양축전에 참가하지 못하게하자
극비리에 임수경대표를 제3국을 통해 평양축전에 파견했다고 밝혔다.
평양에 도착한 임양은 북한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평양축전에 참가하는 동안 북한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8개항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백두산을 출발,
한라산을 향해 국토를 종단하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난 후
임양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 조선
1989 - 임수경이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다.
임수경양, 문규현신부 방북 사건
80년대 후반 민간통일운동이 고양되면서 학생운동진영에서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통감하며,
`89년 6월 10일 "6·10항쟁 계승과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어 전대협의 평양축전 결사참가 의지를 표명하였다.
4. 사건내용
임수경양은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동경에 도착했고, 6월 28일 동경을 출발하여 6월 29일 서베를린을 경유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임수경양은 1989년 7월 1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7월 7일 '조선의 날' 행사에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벌였다.
한편 당시 한국가톨릭교회 전주 교구청 소속으로 미국에 유학중이었던 문규현 신부는 6월 5일 북한을 방문하였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임진각에서 통일염원미사를 가졌고, 문규현 신부는 북한의 한 성당에서 같은 성격의 미사를 집전하였다. 문신부는 방북의 가장 큰 목적이 통일염원미사를 남과 북에서 동시에 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7월 27일 판문점에 도착한 임수경 대표는 판문점 귀환에 동행하기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로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미군정전위원회에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었고, 8월 1일까지 6일간 단식투쟁을 벌인 후 8월 15일 분단이래 최초로 판문점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미군에 의해 연행되어 곧바로 구속되었다.
5. 관 련 자
임수경, 문규현, 임종석 전대협의장, 전문환 평축위원장이하 전대협 전 조직.
6. 사건성격
북한방북사건은 7·4 남북공동성명, 7·7선언과 같은 형식적 통일정책에 대하여 통일에 대한 시각이 정부에 의한
단일창구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간부문에서의 남·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또한 통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더욱 고조되면서 정권차원에서도 통일에 대한 활동들을 수동적이나마 진행하였다.
7. 참고문헌
`89한국사회 평화사정보고서 中 61-64P (청년YMCA서울시연맹 평화사랑클럽),
전대협, {전대협}, 돌베개, 1991, 103-124쪽.
{1989한국사회연감}, 백산서당, 1989, 219-221쪽.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http://www.demos.or.kr/data/viewbody.html?code=datacenter&page=9&number=346&bkind=&dkind=import!!!!!ance&keyfield=&key=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평양에서 개최되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임수경을 파견하였다.
임수경은 1989년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하고, 6월 28일 도쿄를 출발하여 6월 29일 서베를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다시 동베를린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임수경은
7월 1일 오후 7시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행사에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전대협의 깃발을 앞세우고 참가하였다. 7월 7일 평양시내 청년공원 야외극장에서‘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조선 인민과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연대성집회’가 열렸다. 평양축전에 참가한 여러 나라의 청년 대표들이 참석하여 연설하였는데, 마지막 순서로 임수경과 조선학생위원회 김창룡 위원장이 8개 항으로 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국제평화대행진을 시작하여 7월 27일 판문점에 도착한 임수경은 판문점 귀환에 동행하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로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미군 정전위원회에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요구하였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판문점 귀환이 거부되자, 8월 1일까지 6일간 판문점 귀환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8월 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분단 이래 최초로 판문점을 돌파하였다. 그 결과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미군에 의해 연행되어 곧바로 구속되었다. 그 후 임수경은 1990년 6월 11일 항소심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오늘의 사건-6/30)-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History/sub_01_view.asp?Num=7183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1> 임수경
통일이 되든, 안 되든… 그녀는 영원한 '통일의 꽃'이다
20년은 긴 세월이다. 기쁨과 환호, 슬픔과 비탄을 눅일 만한 세월이다. 그것은 또 세상에 알려졌던 한 이름을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는 세월이다. 특히 생애 첫 번째 20년에 다다른 세대에게,
그 이름은 처음부터 아예 입력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1980년 스무 살에 이른 세대 다수에게, 김주열이라는 이름은 설었을 것이다. 2000년 스무 살에 이른 세대 다수에게, 윤상원이라는 이름은 설었을 것이다. 2009년 스무 살에 이른 세대에게, 임수경이라는 이름은 어떨까?
물론 공동체의 기억 공간 속에서, 임수경의 처지는 김주열이나 윤상원보다 다소 낫다. 김주열은 죽음으로써
1960년 4월혁명의 불을 댕겼고, 윤상원 역시 죽음으로써 1980년 5월항쟁을 마무리했으나, 임수경(41)은 여전히 건재해 1989년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청축)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스무 살에 다다른 세대 가운데 '청축'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축은 반제 자주, 반전 평화의 기치 아래 주로 사회주의 나라 청년ㆍ학생들이 모여 열었던 행사다. 1945년 10월 런던에서 결성된 세계민주청년연맹이 이듬해 파리 이사회에서 창설을 결정한 이 축전은 1947년 7월 프라하에서 처음 열렸다.
1989년 7월에 열린 평양 청축은 열세 번째 행사였다. 그것은 그 전 해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에 맞서 평양 당국이 부랴부랴 조직한 대항행사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4학년생이었던 임수경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대표해 이 행사에 참가했다.
임수경은 그 해 6월 30일 평양에 도착해서 46일 뒤인 8월 15일 남으로 귀환했다. 가는 길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녀는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서, 일본과 독일을 거쳐 열흘 만에야 평양에 닿았다. 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다.
8월 15일 광복절, 그녀는 공동경비구역(JSA)의 높이 7cm, 너비 40cm의 시멘트 경계를 가볍게 건너 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안기부(지금의 국정원)로 끌려가 구속되었다.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민간인은 임수경이 처음이었다. 임수경이 혼자 내려온 것은 아니다. 도드라지게 당차 보였으나 어쩔 수 없이 여린 21세 여성이기도 했던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문규현 신부를 북으로 보냈고(그는 7월 25일 평양에 도착했다), 문 신부는 임수경의 손을 잡고 함께 분단의 벽을 넘었다.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은 국가보안법의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녀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구형받은 뒤
10년의 선고를 받았고, 항소심에선 형량이 5년으로 줄었다.
문규현 신부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선 5년을 선고받았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92년 성탄절 전야에 두 사람은 함께 가석방되었고,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역시 함께 사면복권되었다.
오늘날의 스무 살 청년이 1989년의 한국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두 해 전의 6월시민항쟁으로 기지개를 켠 정치적 민주화는 일부 운동권세력에게 좀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의 전망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도 '조국통일촉진운동'에 강한 운동량을 실어주었다.
소위 북방외교가 노태우 정부 대외정책의 기조로 설정된 것도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자들을 격려했다.(한국은 그 해 2월 '공산국가' 헝가리와 수교했다.)
성급한 이들에게 통일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실상 임수경이 그 해에 평양을 방문한 유일한 남쪽 민간인은 아니었다. 그 해 3월 20일 소설가 황석영이 평양에 들어갔고, 닷새 뒤에는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과 포옹했다.
남쪽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뿌리깊은 반북 감정에다 정권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매스미디어의 편향 보도로 방북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졌고, 그것은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소위 '공안정국'을 조성해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도록 만들었다.
당초 평양 축전을 교류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며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까지 만들었던 노태우 정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참가를 불허한다고 못박았다. 임수경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바로 이런 정세 아래에서였다.
임수경은 그 해 평양축전의 헤로인이었다. 여느 때라면 뉴스가치가 크지 않았을 청축은 임수경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국제 언론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북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임수경에게 열광했고,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북녘 곳곳에 울려 퍼졌다. 뒷날 관측자들이 지적했듯, 임수경의 존재는 또 북한 당국에게 달갑지만은 않은 효과를 낳기도 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이 여성은, 북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파쇼와 미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남녘 대학생'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한으로 돌아간 뒤 들려온 임수경의 소식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에서라면 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중형을 받았을 사람이 '고작'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그것도 3년이 조금 지나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것은 임수경이 아무리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정치범이라 할지라도, 북한에서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위 '임수경 방북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판문점을 통한 그녀의 귀환이다. 그녀는 이미 평양 도착 성명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고 선언해 놓은 참이었다. 그녀는 당초 정전협정 기념일인 7월 27일에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한국 정부의 동의가 없는 한 판문점 통과를 허용할 수 없다는 유엔사령부의 입장에 따라 귀환이 무산되었다.
임수경의 신변 안전에 확신이 없었던 북한 당국도 제3국을 통한 귀환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의 '판문점' 발언에 그녀가 제 전 실존을 실었음이 점점 명백해졌다. 그녀는 제3국을 통해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뜻을 북한 당국에 내비쳤고, 북한 당국도 이 고집센 남녘 처녀를 통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제3국을 통해 귀환했다면, 그녀의 방북 의의는 한결 줄었을 것이다. 그녀가 금을 내고 싶었던 것은 판문점으로 상징되는 남북의 분단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100여 명의 청축 참가자들이 동조 단식을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판문점에서 매일 반미 시위를 조직했다. 7월 27일 못지않게 상징적인 8월 15일, 그녀가 '무단'으로 분단의 벽을 넘어 남으로 돌아오는 순간, 국내외 미디어는 긴장 속에서 판문점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스펙터클이었다. 거대한 스펙터클이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스펙터클이라는 말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일종의 '보여주기'였을지라도, 임수경은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그 '보여주기'를 '연기(演技)'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전세계에 증언했다. 그녀는 지혜롭고 용감했다.
앞으로 20년이 더 지난 날 1989년 여름을 돌이켜본다면,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은 한국 민주주의 회복기의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 때까지도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 작은 에피소드와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을 기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은 길고 험난했던 통일운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될 것이다.
'회의적 통일론자'로서, 나는 스물한 살 임수경의 모험에 썩 높은 값어치를 매기진 않는다. 나는 젊은 시절의 임수경 같은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통일이 지고의 가치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의 최저치는 대한민국이 이웃 동족국가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며 아옹다옹 싸우는 가족보다는, 옆집에서 따로 살며 사이좋게 지내는 가족이 훨씬 보기 좋다. 통일과 평화가 조금이라도 맞바꿈 관계에 있는 한, 나는 망설임 없이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취한다.
그러나 스물한 살 임수경의 모험은 매혹적이었다. 그것은 한반도 전체를 무대로 삼은, 어쩌면 전세계를 무대로 삼은 걸작 퍼포먼스였다. 대본도 채 준비되지 않은 이 진솔하고 위험한 퍼포먼스를 임수경은 훌륭히 해냈다.
통일이 되든 안 되든, 임수경은 '통일의 꽃'이다. 스물한 살 임수경을 되돌아보면, 그 어여쁜 '통일의 꽃'을 떠올리다보면,
문득 마음이 울렁거린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 한국일보 aromachi@hk.co.kr 2009/06/22 02:29:19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6/h2009062202291986330.htm
1988 - 교황청,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1988)
1988년 오늘!
프랑스의 가톨릭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가 자동파문됐다.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 바오로 2세의 마지막 경고를 무시한 채 이날 주교 4명에 대한 서품식을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가 임명한 4명의 주교들도 마찬가지로 파문됐다.
보수정통주의 노선을 고수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1961년 12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뤄진 로마 가톨릭의 개혁에 반기를 들고
보수적이고 독단적인 교구통치를 추진해 물의를 빚었다. - YTN
1987 - 전국 전화자동화사업 완성
모두 9조 9191억여 원이 투입된 전국전화 광역자동화사업은 폼스킨 케이블(Foamskin Cable) 전환에 따른 통화품질 및
경제성 개선, 통신구(通信構) FC관 대체로 인한 예산절감 효과, 지하철 개통 및 광케이블 도입으로 인한 혁신적인 통신구
운용 등 다방면에 걸쳐 통신 선진화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전화 적체를 완전 해소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서든
세계 각국과 즉시통화가 가능한 통신 선진국이 되었다. 1987년 6월 30일 완성된 전국 전화자동화사업으로 인해 그해
9월 30일 전화 1000만 회선을 돌파한데 이어 1993년 12월에 2000만 회선을 넘어섬으로써 세계 8위 시설국으로 떠올랐다.
http://www.nia.or.kr/open_content/01_open/open05_it/it03_cont.jsp
1984 - 서울~대전 고속도로 4차선 신설 확정
1984 - 볼리비아 쿠데타 진압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생방송 장면.
뒤쪽으로 이 프로의 진행자 김동건 아나운서가 보인다.
1983 -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1983 -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시작(1983)
6.25전쟁 33주년을 기념하는 KBS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1983년 오늘 시작됐다.
당초 3시간 정도 방영할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산가족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자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 프로그램을 닷새 동안 연속 생방송했다.
이 방송은 이후에도 같은 해 11월 14일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에 모두 19만9백여 건이 신청돼 만백여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 YTN
1983 -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그해 여름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의 `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983년 6월 30일부터 방송이 시작돼
장장 138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처음 방송할 때 만해도 90분 길이 단발성 특집이었다.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1000명이 넘게 몰려왔다. 방송도중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쏟아졌다. 진행을 맡은 유철종 이미연씨는 이날 새벽 3시까지 연장방송을 해야했다. 방송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 결국 138일간 계속됐다. 진행자로 김동건 신은경 황인용 강부자씨 등이 합세했고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방송과는 별도로 여의도 KBS 본관 벽과 그 앞 광장에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붙인 벽보가 어지러이 등장했다.
한국전쟁후 생사를 모른채 33년을 애태우던 남북이산가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방송이벤트였다. 방송중 1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참여해 애탄 절규를 했고 1만189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일의 공영 ZDF를 비롯, 일본 NHK, 미국 CBS 등 해외 미디어 취재도 뜨거웠다. -조선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겨레의 서사시
1983년 6월 30일, 그날은 우리 방송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땀과 눈물의 날이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바로 이 한
마디가 우리들의 가슴에 멍들어 있던 한을 풀어 주는 겨레의 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 거대한 운명의 드라마는
어떻게 탄생됐을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1시간의 아주 작은 프로그램이 물꼬를 터뜨렸다.
17년 전, 지금의 ‘아침 마당’ 전신인 ‘스튜디오 830’에서 진행한 6·25 연속 기획물 중 두 번째 시리즈로 6월 21일에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오’가 방송됐다. 당시 전후 33년이 되도록 혈육을 찾지 못하고 애태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소박하게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이산가족의 현실을 보게 됐다. ‘이것으로는 안 된다’.
한국 방송사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기획제작국 안국정 제작1부장,
이석우 ‘스튜디오 830’ 팀장, 이원군, 최종건 두 PD가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6·25가 남긴 이산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다룬 138일 동안의 이산가족 찾기 대장정에 오른 것이다.
첫 방송이 바로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이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
출연할 이산가족을 찾는다는 광고가 나가자마자 이산가족의 애타는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이틀 동안 신청을 받는다는 예고가 나가자, 전화 문의와 신청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준비된 상황으로는 이 이산가족의 목소리를 모두 담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수요일부터는 방송국에서 직접 면접을 하여 출연자를 결정했다. 모두 820명이었다.
이들을 심사(?)를 거쳐 A에서부터 D등급으로 나누었다.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순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제한된 시간에 어떻게 모두 소개할 것인가. 긴급 소집된 회의에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비인간적이어서 안 된다던 당시 안국정 부장이 제안한 사연판을 제작하여 소개하게 됐다. 이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이산가족을 찾는 사연판이 되었던 것이다.
방송 첫날 폭발적인 반응으로 당초 예정된 2시간의 시간은 무너져 버리고 2시간 30분이나 더 연장 방송됐다.
제작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민족의 일이라는 감동이 솟구쳐 올랐다.
방송이 나가면서 처음으로 특별 생방송에서 상봉한 가족은 신영숙 씨였다. 1·4 후퇴 당시 부산에서 헤어진
사촌 남매 8명 중 7명이 서울에서 방송을 보고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인 7월 1일, 밤을 세운 스태프들과 출근하는 직원들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달라진 방송국 주변의 분위기에
놀라고 만다. 몰려든 이산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이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즉시 강용식 이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이산가족 찾기 추진본부’가 설치되어 방송 체계가 갖춰지게 되었다. 이어 7월 1일 밤 10시 15분부터 재개된 방송에서는 TV 연주시설이 갖춰진 9개 지방 방송국(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춘천, 제주, 강릉)에서도 지역별로 접수받은 이산가족을 출연시키기로 했다. 메인 스튜디오 진행은 당시 ‘스튜디오 830’의 진행자인 유철종, 이지연 아나운서가 맡았고, 김동건, 신은경 아나운서가 교대로 진행을 했다. 나중에 김동건, 신은경 콤비는 김동건,
이강자(프리랜서)로 바뀌었고, 황인용, 강부자도 하룻동안 철야 방송을 진행했다.
국내에서 세계로, 감동에는 국경이 없다
국내는 물론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산가족 찾기는 7월 10일부터 해외 동포를 위한 생방송을 실시하기로 했다.
7월 6일에는 미국 LA 교민들의 반응이 위성중계로 국내에 14분 동안 전해졌고, 7월 7일에는 여의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혈육을 찾는 애타는 모습이 인공위성에 의해 세계 각국으로 송출됐다.
이 방송을 통해 이날 4시 LA에 사는 송기순 씨가 서울에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 송금자 씨와 33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했다. 한편, 외국 매스컴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던 7월 12일 ABC 방송은 심야 뉴스 프로인 ‘나이트 라인’에서 혈육을 찾는 애타는 모습을 위성중계로 보도했고, 7월 29일에는 동시 위성 송수신으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거주 동포가 참여한 생방송이 펼쳐졌다. 8월 13일 국내에서는 5천 번째 상봉 가족이 탄생했고, 밤 11시 50분부터 다음 날 새벽 2시 25분까지는 ‘해외 동포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실시됐다. 또 8월 19일 밤에는 재미작가 피터 현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촬영한 동포들의 모습과 사연이
소개됐다. 9월 3일 생방송 시간에는 중국 동포 12명이 가족을 찾는 애절한 모습이 현지 녹화로 전국에 방영됐다.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국내에서 국외로 확대되면서 그 감동의 폭은 세계적으로 확대됐다. 그것은 취재 경쟁으로도
알 수가 있는데, ABC, NBC, CBS, BBC, NHK 등을 비롯한 10여 개국의 25개 방송사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카메라에
담아 자국에 보도했다. 그 동안 전세계 42개국이 인공위성을 통해 하이라이트 장면만을 방영한 것만 보아도
여의도에 쏠린 세계인의 관심을 알 수가 있다.
전국민이 만났던 만남의 광장
KBS 본관이 TV 기지였다면 여의도 만남의 광장은 라디오 기지였다. 1983년 8월 6일 오전 10시, 만남의 광장은
그 거대한 만남의 문을 열었다. 이산가족들의 애절한 소망을 담고 인류를 사랑하는 의지를 담아서 ‘만남의 광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서 KBS 건물과 그 주변 광장에 마구잡이식으로 붙여졌던 벽보들을 본적지와 도별로 분류하고,
TV와 라디오를 연결하는 스튜디오, 명부 열람실, 컴퓨터 조회실 등을 갖추어
이산가족들이 손쉽게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KBS의 모든 매체뿐 아니라 국내의 언론과 정부기관이 총동원되어 연출한 거대한 드라마의 주인공은 바로 이 땅의 이산가족들이었다. 총 138일 간의 방송은 11월 14일 새벽 4시에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민족의 대서사시로 불린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은 100,952건의 신청 접수 중 53,536가족이 출연하여 10,189가족이 만나 19.03%의 상봉률을 나타내고 종료됐다. 이날 새벽 4시까지의 생방송 시간은 총 453시간 45분이었다. 이날의 마지막 상봉 가족은 새벽 2시 15분 평북 서면이 고향인 고모 윤찬숙 씨가 조카 윤금영 씨를 만난 것이었다.
방송 관계자는 물론 5천만 겨레가 눈이 붓도록 엉엉 울어버린 사건이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 요원만 해도 연인원 20만 명이 동원된 매머드 생방송 릴레이는 비록 이날로서 잠시 막을 내렸지만, KBS의 이산가족 찾기는 계속된다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바로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북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러한 이산가족들의 통일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글·원재훈 whonjh.chollian.net 자유기고가 http://www.kbs.co.kr/jnal/0007/text_02.html
1983 - 여천 LNG기지 준공(단일기지로 세계최대규모 저장용량 15만 2000t)
1983 - 소련, 원격조정 통한 인공위성도킹 성공
1981 - 사랑의 선교회 한국 선교
우리나라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시작은 1981년 5월 (3일)에 마더 테레사가 한국을 방문한 데 이어
6월 30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수녀 3명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사랑의 선교 수녀는..1982년 첫 한국인 수녀를 배출했다.)http://blog.aladdin.co.kr/747940194/2513705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의 방한을 계기로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정식으로 초청함에 따라 같은 해 6월 30일 세 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하였다. 원래 사랑의 선교회 본부에서는 9월경에 회원을
파견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으나 일본·대만과 동시 진출이 결정되면서 당초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겨 회원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봉천동 본당 관할 봉천 `1동 공소의 사제관에서 2개월 동안 생활하다가 같은 해 8월 21일 봉천 1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휴양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 옮겼으며, 1981년 9월에는 ‘휴양의 집’ 내에 ‘평화의 집’(양로원)을 마련하여 2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에는 11명의 지원자가 입회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9명이 같은 해 6월 수련을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그후 1983년 4월에 경기도 안양에 본원을 건립하였으나 안양시 도로 확장공사로 수녀원 부지 가운데 일부가 편입됨에 따라 1993년 10월 8일 안산시에 수녀원을 완공하고, 이듬해 5월 10일 본원을 이전하였다. 이에 앞서 1985년 5월 24일에는 3명의 회원이 첫서원을 하였으며, 1985년 6월 14일에는 인천시 만수동에 첫번째 분원을 마련하고 ‘온정의 집’(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안산과 인천의 양로원에서 각각 4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며 빈민가·병원·요양소·교도소·양로원·고아원·재활원 등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위로와 작은 사랑의 봉사로
참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며, 생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 성바오로
1981 - 경희대국토종합개발연, 국내최초로 전국토지이용현황을 그린 컴퓨터지도 작성 공개
1981 - 중국, 실용주의 체제 선언
성산대교 전경.
1980 - 성산대교 개통
1980 - 성산대교(길이 1410m, 한강12번째 다리) 개통
한강의 12번째 다리인 성산대교가 1980년 6월 30일 준공, 개통됐다. 마포구 망원동과 강건너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이 다리는
길이 1410m, 폭 21.6m의 6차선으로 양쪽에 보도(2.7m씩)를 갖추었다. 다리의 색깔은 안쪽은 회색, 바깥쪽은 주황색이다.
서울시가 1977년 4월에 착공, 2백57억9천만원을 들여 3년3개월 만에 완공한 이 다리는 1979년 개통한 성수대교에 이어 두 번째로
철재트러스 공법을 연결, 조립한 것이어서 교각사이가 120m씩으로 다른 한강다리보다 2배나 길다.
때문에 다리모습이 날렵해 보이는데다 교각과 교각사이에 반달형 아치를 세워 곡선미가 가미되어 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연세대앞∼사천고가교∼성산대교∼경인고속도로 입구를 잇는 11.7km의
성산대로건설이 마무리됐다. 다리 양쪽입구에는 각각 입체교차로가 설치돼 차량이 각방향으로 논스톱으로 달리게 돼 있어,
김포공항을 오가는 차량들의 경우 시내중심까지의 주행시간이 종전40분대에서 20분대로 절반이나 단축됐다. -조선
성산대교(城山大橋)는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다리이다. 마포구 망원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다. 1980년 6월 30일에 개통되었다. 국도 제1호선 및 국도 제48호선의 일부이며, 서부간선도로를 거쳐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진다.
사진 촬영
서부 한강에서는 성산대교가 가장 사진 찍기에 좋다. 1980년 개통 당시에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서울 시민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당시에도 밝고 어두운 부분의 차이가 뚜렷해 화사하고 선명한 사진이 나온다. 성산대교 남단에서 찍는다. 다리 바로 아래 자전거도로가 포인트이다. 다리 좌우에서 촬영하고, 정중앙에서 허리를 낮춰 교각을 찍는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에서 걸어갈 수 있다. 무지개색 조명을 설치한 선유교, 당산철교를 묶어 함께 찍는다.
1980 - 에너지관리공단 발족
1980 - 국회, 이택돈,예춘호,손주항,김녹영 의원직 사퇴
1980 - 모스크바서 서독, 소련 정상회담
1979.6.30-7.1 카터 대통령 방한,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 공동성명 발표 (7.1)
http://www.agendanet.co.kr/zb41pl7/bbs/view.php?id=dip_sub1&no=29
1978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 - 현대아파트 사건 발표
1977 - 동남아조약기구(SEATO) 해체
1975 - 전투예비군 부대 편성
1971 - UN군사령부방송, 21년 만에 폐쇄
1971 -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11호의 세 우주비행사 지구귀환중 사망
1971년 6월 6일 발사되어 24시간의 우주비행과 궤도 스테이션 "살류트"와의 도킹을 성공시킨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11호가
지구귀환을 위해 대기권에 돌입, 낙하산으로 예정지점에 연착륙을 시도했지만 3명의 비행사는 좌석에 앉은 채로 사망했다.
세 비행사의 사망원인은 명확치 않지만 계기류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우주선내에 화재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우주선내의 기압이
어떤 이유로 해서 갑자기 저하되어 세 비행사의 혈액이 비등해 절명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 사고는 획기적인 유인우주 정거장의 실험을 성공시켰고 게다가 24일에 가까운 장시간기록도 수립했지만 후의 비극적인 사고로
막을 내렸다. 조선 (29일자 내용)
1971 - 펜타곤 페이퍼 신문 게재 권리 인정
1971년 6월 30일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전억제명령사건(prior-restraint case)으로 간주된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6 대 3의 판결로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와 <워싱턴 포스트 The Washington Post>에게 펜타곤 페이퍼를 다시
게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1967년 미국의 국방장관 로버트 S. 맥나마라의 책임하에 작성된 펜타곤 페이퍼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68년 5월까지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문제의 발단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부설 국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었던 다니엘 엘스버그가 정부의 허락 없이 이 문서들을 <뉴욕 타임스>에 제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연방정부가 '최고 기밀서류'로 취급하던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미국 법무부는 이 보고서 공개가 미국의 안보이익에 '치명적이며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연방 제1심 법원으로부터 국가기밀서류의 공표를 금지시키는 임시명령을 얻어냈다. 언론의 자유와 관련한 이 재판에서
미국 대법원은 미국연방헌법 수정안 제1조 출판의 자유 조항에 따라 신문의 발표는 보호받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1970 - 경부고속도로 완공
경부고속도로
1. 공사기간 1968년 2월 1일 - 1970년 6월 30일 완공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개통
2. 서울 강남구 제3한강교 --부산시 구서동까지 총 428km
http://www.gangje.go.kr/netizen_edit.asp?idx=8107&page=1
1968 - 프랑스 총선거에서 드골파 압승
1968 - 김종필, 모든 공직서 사퇴
1966 - 태릉선수촌 개관
1961 - 제3대 대법원장에 조진만 임명
1960 - 콩고민주공화국 독립(1960)
1960년 오늘!
콩고민주공화국이 벨기에로부터 독립했다.
벨기에는 앞서 같은 해 초에 콩고에서 철수하고 독립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독립 직후 쿠데타와 내전에 휩싸였다.
초대 총리가 된 루뭄바(Lumumba)는 같은 해 11월 모부투 대령의 군대에 체포돼 이듬해 1월 카탕카주에서 처형됐다.
이후 촘베 총리가 콩고민주공화국을 다스리다 1965년 11월 모부투가 다시 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했다.
모부투 정권은 32년 뒤인 1997년 5월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가 이끄는 반군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1954 - 소련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가동시작 - 27일로~
1952 - 민중자결단, 국회의사당 포위 80여 의원 연금
휴전회담
1951 - 리지웨이, 원산만 덴마크 함상에서의 휴전회담 제의
1년 이상 계속되어 오던 한국전쟁이 1951년 6월 27일 마리크 주 유엔 소련대사의 정전회담 제의로 휴정협상에 대한
논의가 공식화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도 소련의 제의에 동의하자 이틀 뒤인 6월 2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30일 리지웨이는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는 7월 1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에따라 휴전예비회담이 7월 8일, 본회담이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개최됐다.
회담장소는 약 3개월 뒤인 10월 7일 안전상의 이유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발발 1년 15일 만에 휴전협상을
시작했으나 남한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데모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년17일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 협정이 조인됐다.
1950 - 트루만 미국 대통령, 미군 한국 출동 명령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6.25 가 발발 되자 26일 미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즉시 공군 및 해상으로부터 공격전을 부여하고, 27일에는 이들 공-해군이 출동 개시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내한하여 수원에 도착, 자동차로 한강에서 적정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그후 트루만 대통령은 30일을 기해 맥아더 장군에게 미군 지상군 사용권을 승인했다.
이로써 제일먼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 이
한국에 오게 됐다. 이로써 미국은 한반도의 자유 수호에 단호한 결의를 보이게 한 것이다.
http://blog.joins.com/21mole/4995441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미국 육군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김일성. 1953년 7월 27일 오후 2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과 조선노동당 중앙위 서기 박정애가 둘러선 가운데 김일성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9 - 조선노동당 탄생
김일성이 아무리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입북했다 하더라도 국내 토착공산주의자들은 바지저고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새파란 젊은이가 세력을 확대하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는 등 분란을 일으키자 참다못한 박헌영 등은 서울에 엄연히 당중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분파행동이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결국 김일성과 박헌영이 마주앉았다.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서울의 중앙당에 속하는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는 것. 분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련 공산당의 1국 1당 원칙 때문이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것은 1945년 10월 10일부터 나흘간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열성대회`에서였다. 김일성은 이때 분국의 책임비서가 되지 않았다.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는 소련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서였다. 대신 소련은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를 평양에서 여는 등 그의 얼굴 알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김일성은 2개월 뒤에 당 이름을 바꾼
북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북조선공산당은 1946년 8월에 조선신민당을 통합한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한차례 변신한 뒤, 1949년 6월 30일에는 기세가 완전히 꺽인 남로당마저 흡수한 조선노동당으로 탈바꿈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북한의 당 창건일은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10월 10일이다.
1949 -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 - 4월 18일로~
1949 - 하버드대, 최초로 흑인교수 임명
쇼클리(가운데)와 트랜지스터 실용화 연구를 진행하는 바딘(왼쪽)과 브래튼(오른쪽).
1948 - 트랜지스터 개발 발표
1948년 6월 30일, 20세기 기술혁명의 단초가 된 트랜지스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브래튼 등 3명의 연구원이 6개월 전에 이미 개발을 끝냈지만 특허획득을 위해 함구해오던
미국 벨연구소가 이날 그 실체를 공개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진공관을 220분의 1 크기로 줄였다는
기자회견 발표를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클리가 1950년에 최초의 개량형 트랜지스터를 들고 나오자 이 신개발품이 가져올 혁명적 변화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소비가 적고 수명도 몇 배나 길며 덩치도 작은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진공관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고,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도 현역에서 퇴장시켰다.
개발은 미국이 했지만 정작 재미를 본 것은 일본이었다.
1955년에 소니사가 세계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TR-55`를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1942 - 프랑스 작가 레옹 도데 사망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들고 있는 마가렛 미첼.
1936 -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간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936년 6월 30일 처음 출판됐다. 신문사기자였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옛 남부의 분위기와 남북전쟁의 일화에 기초해 10년 동안의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바람`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종래의 연애소설 여주인공과 전혀 다른 당당한 캐릭터로 불황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공감을 샀고, 금새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가 마가렛 미첼이 1037쪽 분량의 이 소설에 붙이려 했던 제목은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다`였다. 이것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타라 농장에서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외치는 마지막 대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맥밀런 출판사의 종용에 따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결정됐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기였고 이에 미국인들은 황량한 마음을 달래줄 소설을 원했다. 이 소설은 당시 뉴욕타임즈지의 서평란에서
`미국작가에 의해 쓰여진 최초로 주목할만한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미첼은 이 소설로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클라크 케이블, 비비안 리 주연의 상영시간 3시간 40분짜리
영화로 제작되어 1년 간 관객 2500만명을 동원했고, 1989년까지 관람 총인원 12억 이상을 돌파했다. -조선
1936 -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출판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마거릿 미첼이 1936년에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37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같은 이름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개봉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남부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소설의 양이 방대해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마거릿 미첼은 어느 출판사의 직원에게 원고를 떠넘기다시피 맡겼다. 직원은 원고에 매료되었고 곧 출판이 결정되었다.
결국, 마거릿 미첼이 원고를 억지로 떠넘긴 덕분에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탄생한 것이다.
1923 - 윤심덕, 한기춘의 성악회 열림
1913 - 콜롬비아의 대통령(1974-78 재임) 로페스 미첼센 출생
1911 - 폴란드의 시인, 비평가 밀로즈(Milosz, Czeslaw) 출생
밀로즈 [Milosz, Czeslaw, 1911.6.30~2004.8.14]
1910 - 통감부, 경찰관제 개정 및 조선주답헌병조례 개정(헌병경찰제 실시)
1909 - 각의, 사법권양도 및 군부폐지 결의
폭발로 쓰러진 나무. 1927년 쿨리크의 탐사에서 촬영
1908 - 시베리아 퉁구스카 지역 원시림에서 운석이 폭발한 `퉁구스카 대폭발 사건` 발생
퉁구스카 폭발사건은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경에 지금의 러시아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크라이의 포트카멘나야퉁구스카 강 유역 북위 60° 55′, 동경 101° 57′ 지점의 밀림에서 발생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규모의 공중폭발 사건이다. 불덩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폭발했다. 폭발한 불덩이는 후에 10-15 메가톤 가량 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나무 6천만 그루에 해당하는 2,150 제곱킬로미터의 숲을 파괴하였다. 파괴된 숲에서는 사건으로 죽은 천오백마리의 순록시체와 옆으로 뉘여진 나무들이 발견되었으며, 어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당시 목격자들도"450km나 떨어진 곳에 있던 기차를 타고 있었음에도 심한 땅울림과 함께 돌풍이 몰아쳐서 열차가 전복되었다.","사건현장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
방목하던 가축 천오백마리가 타 죽었다"라며 '공포의 불덩이'가 일으킨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언하였다. 1931년 옛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모스크바 대학교의 과학자들이 조사했으나, 정확한 결론은 내지 못했다.
단지 대운석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폭발의 원인으로는 블랙홀 추락설, 운석추락설등의 수많은 가설이 나왔지만 소행성 또는 혜성의 파편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공중폭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06 - 미국식품의약국(FDA) 제정
특수상대성 이론
1905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 출판
1905년 6월 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3월에는 광양자(光量子)에 관한 논문, 5월에는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 게다가 이날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논문이 9월에 물리학연보지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다. 1915년 이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용성은 40년 후에 원자에너지로 현실화됐다.
1905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출판하다.
특수상대성이론(特殊相對性理論,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줄여서 특수상대론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05년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한 물리학 이론이다. 이것은 고전 역학을 대체할 이론으로서 맥스웰 방정식에서 다루고 있는 전자기학을 포함하고 있다. 특수상대론은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하여 모든 관성계의 역학 및 전자기학을 포함하는 모든 물리 법칙이 서로 상대적이며, 특정 계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으로 정지 상태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는 이를 방출하는 물체와 관찰자 사이의
상대운동에 무관하게 언제나 일정하다.
특수상대론은 여러 가지 놀라운 예측을 하는데, 이 예측들은 전부 실험에 의해 검증되었다. 이 이론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부정하고,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길이와 시간 간격이 다르게 측정된다고 한다. 또한 이론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는 E = mc2이라는 공식에 따라 서로 변환 가능한 등가의 것이며, 이를 질량-에너지 등가성이라 한다. 그러나 특수상대론은 다루어지는 속도들이 빛의 속도에 비해 훨씬 작은 일상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뉴턴 역학의 예측과 일치한다.
특수상대론은 상대성 원리를 오로지 관성계에 대해서만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특수"하다. 아인슈타인이 나중에 개발한 일반상대론은 이를 중력의 영향을 포함한 임의의 계에 적용되도록 확장시킨 것이다. 특수상대론은 시간 등의 몇몇 양이 상대적인 것임을 밝혀냈으나, 동시에 그동안 상대적이라 여겨졌던 몇몇 양이 실제로는 절대적임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빛의 속도는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게 측정되는 것이다. 즉 이 이론에서 빛의 속도는 단순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속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얽힌 모양을 규정하는 양이다. 특히, 특수상대론에 따라 질량을
가진 어떤 물체도 광속까지 가속될 수 없다.
(꿈 속의 빛과 경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기 10년 전인 1895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6세의 소년 아인슈타인은 자주빛에 관한 꿈을 꾸었 다고 한다. "나는 꿈 속에서 빛을 뒤쫓아가곤 했다. 아주 빠르게 빛을 따라가면 빛과 속도차 이가 없어져 빛이 멈추고 만다." 아인슈타인은 이 꿈이 가지고 있는 일레마를 풀려고 노력했다. 빛이 멈추지 않으려면 빛 의 속도가 더 빨라지거나, 아무리 빨리 뒤쫓아가도 빛과의 속도 차이가 좁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에 따라 빛의 속도로 뒤쫓는다면 앞서가는 빛은 멈춰야 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인슈타인의 고민은 계속되고 또 계속됐다. 1905년에야 10년에 걸친 그의 고민이 풀리게 된다. 빛의 속도는 고전적인 상대성원리에 맞춰 덧셈과 뺄셈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인 슈타인은 발견해 낸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1899 - 독일, 스페인으로부터 마리아나, 카로린 군도를 획득
1898 - 황국협회 결성
1898년 6월 30일 대한제국은 무너진 국내상업체제를 되살리기 위해 보부상과 연합해 황국협회를 결성했다. 홍종우·이기동·고영근 등이 중심이 된 황국협회는 7월 7일 발회식을 개최한 훈련원에서 "나라를 문명부강하게 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숭하고 충군하는 대의를 밝힌다"는 설립 취지를 표명했다. 황국협회의 주요 활동은 민선의회설치운동과 상업단체복설운동이었다. 이밖에도 황국협회는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역할도 했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서로 충돌하자, 정부는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해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으며, 이후에는 황국협회도 해산시켰다. 황국협회는 청일전쟁 이후 심화된 일본의 상권침투와 조선상인의 몰락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해 전통적 특권상업체제의 복원을 꿈꾸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1893 -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의 최고실력자 울브리히트 출생
1893 - 동독의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Ulbricht, Walter, 1893~1973) 출생
1884 - 프랑스의 작가 뒤아멜(Duhamel, Georges, 1884~1966) 출생
1882 - 조선-독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1882 - 한국 독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1817 - 영국의 식물학자 후커(Hooker, Joseph Dalton, 1817~1911) 출생
1807 - 독일의 미학자, 문학비평가 피셔(Vischer, Friedrich Theodor von, 1807~1887) 출생
피셔 [Vischer, Friedrich Theodor von, 1807.6.30~1887.9.14]
피셔는 독일의 미학자이며 문학비평가이다. 그는 <미학 또는 아름다움의 과학 Ästhetik, oder Wissenschaft des Schönen>(6권, 1846~57)을 펴내는 등 근대 미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튀빙겐에버하르트카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에두아르트 뫼리케와 D. F. 슈트라우스와 친분이 두터웠다.
1844년 튀빙겐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나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취임사 때문에 2년 후 대학을 떠나야 했다. 1848년 혁명기에는 온건한 좌파로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855년 취리히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866년 다시 튀빙겐대학교로 돌아왔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패러디한 것으로 유명하며, 시와 소설을 쓰기도 했다.
"우리 작가들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귀를 틀어 막고 글을 쓴다."
- 프리드리히 T. 폰 피셔, <새것과 헌것>
1795 - 프랑스의 화학자 카방투(Caventou, Joseph Bienaimé) 출생
카방투 [Caventou, Joseph Bienaimé, 1795.6.30~1877.5.5]
말라리아 치료약
16세기 초 지금의 페루와 에콰도르 지역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이 원주민들에게서 배운 말라리아 치료방법은 ‘키나’라는 나무껍질을 달여 먹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럽에 전해졌고, 1820년 프랑스의 펠레티에와 카방투는 식물성 물질을 분리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해 ‘키나’에서 분리한 키니네라는 물질이 말라리아 치료효과를 지니고 있음과 함께 키니네의 구조식까지 발표했다. 이것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구조식을 알게 된 치료약이다.
1820년 프랑스 화학자 피에르 펠레티에(P.J. Pelletier)와 조셉 카벤투(J.B. Caventou)
1789 - 프랑스의 화가 베르네(Vernet, Horace, 1789~1863) 출생
1786 - 프랑스의 시인 데보르드 발모르(Marceline, Desbordes-Valmore, 1786~1859) 출생
1685 - 독일의 건축가 치머만(Zimmermann, Dominikus, 1685~1766) 출생
1660 - 삼각함수에 기호(sin, tan, sec)를 처음으로 사용한 영국의 수학자 윌리암 오트레드 사망
1660 - 영국의 수학자 윌리암 오트레드(Oughtred, William) 사망
오트레드 [Oughtred, William, 1574.3.5~1660.6.30]
수학 교수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저서 《수학의 열쇠 Clavis Mathematicae》(1631)에서 산술과 대수를 논하여 영국의 수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책은 수학기호의 역사상 중요한 것이며, 17세기 말경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수학기호의 ∼, 곱셈의 ×는 이 책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스위스의 뷔르기 방법을 개량한 생략 곱셈(오트레드 방법)을 안출했고, 또 계산자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1657년의 《삼각법 Trigonometry》에서는 평면 및 구면(球面) 삼각법을 다루었고 sin, tan, sec의 기호를 사용하였다.
1649 - 프랑스의 화가 시몬 부에 사망
1649 - 프랑스의 바로크 화가 부에(Vouet, Simon, 1590~1649) 사망
1470 - 프랑스의 왕(1480-98) 샤를 8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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