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30 (2)
1919 -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Rayleigh, John Strutt) 사망
레일리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1842.11.12~1919.6.30]
에식스의 맬던 출생. 1861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1865년 졸업했다. 1870년 논문 〈공명(共鳴)의 이론에 대하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음향학에 대한 연구의 시초가 되었다. 1871년 색의 연구에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레일리산란(散亂)의 법칙을 도출해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광학 연구를 하게 되었다.
1871년 이집트여행 중 고전적인 명저 《음의 이론 Theory of Sound》을 쓰기 시작했고, 귀국한 뒤에는 유체역학(流體力學) 실험을 하여 그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1877년 《음의 이론》 2권을 펴냈다. 1879년 맥스웰의 후임으로 캐번디시연구소장,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나, 5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실험·연구에 몰두했다. 1887년 J.틴들의 후임으로 왕립과학연구소장, 1905∼1908년 왕립학회장을 거쳐, 1908년 케임브리지대학 명예총장이 되었다.
초기 연구는 광학 및 진동계(振動系)에 관한 수리적인 것이었으나, 후에는 물리학 거의 전반에 걸친 이론적·실험적 연구로 나아가, 음향학·파동론·색채론·전기역학·전자기학·빛의 산란·유체역학·기체의 밀도와 점성, 모세관현상·탄성·사진술 등을 연구했다.
또한, 전기저항·전류·기전력(起電力)에 대한 표준측정을 하였다. 또 물의 성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여 수소·산소에 이어서 질소의 질량을 측정하는 과정 중 1894년 W.램지와 함께 아르곤을 발견, 그 공로로 190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후년에는 전자기(電磁氣)에 관한 여러 문제를 다루어 복사(輻射)에 관한 레일리진스의 공식을 유도했다. /네이버
1911 - 폴란드의 시인, 비평가 밀로즈(Milosz, Czeslaw) 출생
밀로즈(미우오슈) [Milosz, Czeslaw, 1911.6.30~2004.8.14]
폴란드 태생 미국의 작가·번역가·비평가.
198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토목기사의 아들로 당시 폴란드 영토였던 빌노(빌니우스)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쳤다. 21세 때 첫 시집 〈얼어붙은 시간의 시 Poemat o czasie zastygłym〉를 발표했다. 그는 이 무렵 21세의 나이에 사회주의자이자 시인 단체의 지도자였는데 그 단체는 절박한 세계의 재앙을 예견한다는 뜻에서 '격변설지지자'(Catastrophist)라는 이름을 지녔다.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시기에는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정복할 수 없는 노래 Piesn niepodlegla〉(1942)와 같은 수많은 작품을 비밀리에 쓰고 편집·번역했다. 시집 〈구원 Ocalenie〉(1945)은 공산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책에 속했다. 새 정부는 그를 외교관직에 임명하는 보상을 해주었다. 워싱턴 D. C.의 폴란드 대사관 문화담당관과 파리의 폴란드 대사관 문화담당 제1서기관을 지낸 뒤, 1951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9년 뒤 미국으로 이주하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970년에는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본래 시인이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공산주의에 순응한 많은 폴란드 지성인을 비판한 평론집 〈사로잡힌 마음 Zniewolony umysł〉(1955)이다. 그의 시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를 주제로 고전적인 문체를 쓴 점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1918년에서 1950년대의 폴란드 역사를 시로 결합한 〈시적인 논문 Traktat poetycki〉(1957)이 있다. 자서전으로는 〈조국 Rodzinna Europa〉(1959)·〈개인의 의무 Prywatne obowiazki〉(1972)가 있으며, 소설 〈이사 계곡 Dolina Issy〉(1955)·〈폴란드 문학사〉(1969), 시집 〈겨울 종(鐘) Bells in Winter〉(1978) 등 여러 권의 시선집과 폴란드어 번역성서가 있다. /브리태니커
- 50th anniv. of the falling of the Tungus meteor
and the 75th anniv. of the birth of L. A. Kulik, meteorist
1908 - 시베리아 퉁구스카 지역에서 '퉁구스카 대폭발 사건' 발생
퉁구스카 폭발사건은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경에 지금의 러시아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크라이의 포트카멘나야퉁구스카 강 유역 북위 60° 55′, 동경 101° 57′ 지점의 밀림에서 발생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규모의 공중폭발 사건이다. 불덩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폭발했다. 폭발한 불덩이는 후에 10-15 메가톤가량 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나무 6천만 그루에 해당하는 2,150 제곱킬로미터의 숲을 파괴하였다. 파괴된 숲에서는 사건으로 죽은 천오백마리의 순록시체와 옆으로 뉘여진 나무들이 발견되었으며, 어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당시 목격자들도"450km나 떨어진 곳에 있던 기차를 타고 있었음에도 심한 땅울림과 함께 돌풍이 몰아쳐서 열차가 전복되었다.","사건현장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 방목하던 가축 천오백마리가 타 죽었다"라며 '공포의 불덩이'가 일으킨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언하였다. 1931년 옛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모스크바 대학교의 과학자들이 조사했으나, 정확한 결론은 내지 못했다. 단지 대운석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폭발의 원인으로는 블랙홀추락설, 운석추락설등의 수많은 가설이 나왔지만 소행성 또는 혜성의 파편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공중폭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며, 폭발 직전에 찍은 사진에 불덩이가 긴 S자를 그리며 폭발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대규모 UFO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또 하나의 경우에는 지상 8km 상공에서 크기 60m 정도의 소행성이 폭발하였다는 설도 있다. /위키백과
1905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원리 완성
1905년 6월 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3월에는 광양자(光量子)에 관한 논문, 5월에는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 게다가 이날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논문이 9월에 물리학연보지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다. 1915년 이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용성은 40년 후에 원자에너지로 현실화됐다. /조선
1893 - 동독의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Ulbricht, Walter) 출생
울브리히트 [Ulbricht, Walter, 1893.6.30~1973.8.1]
독일 공산당 지도자.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동독)의 최고 실력자였다. 가구제작업을 하던 울브리히트는 1912년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해 제1차 세계대전중 동부전선에서 싸우다 2번이나 탈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새로 만들어진 독일공산당(KPD)에 가입했다. 관료이자 조직가였던 그는 1923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이 등장하자 울브리히트는 그의 추종자가 되어 KPD를 볼셰비키화하고 세포조직을 근간으로 당을 편성했다. 1928년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어 1929년부터 베를린 공산당 조직을 이끌었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자 울브리히트는 해외로 망명했다. 그후 5년 동안 파리, 모스크바, 스페인 내전(1936~39)중의 스페인에서 KPD와 코민테른의 비밀첩보원으로 활동하면서 내내 트로츠키 일파와 다른 일탈자들을 가혹하게 괴롭혔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초 모스크바에 있던 그는 독일군 포로들에게 공산당선전을 하고 독일군측에서 얻은 정보를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1945년 4월 30일 독일로 돌아온 그는 KPD의 재건을 도왔으며 소련 점령 지역에 행정부를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KPD와 독일사회민주당(SPD)을 하나로 통합해 1946년 4월 과거 동독을 지배했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49년 10월 11일 동독 정부가 수립되자 울브리히트는 부총리가 되었고, 1950년에 SED의 서기장직을 겸직했다. 빌헬름 피크 대통령이 죽자(1960) 대통령 직위가 폐지되고 대신 국가평의회가 만들어졌는데, 울브리히트는 의장이 되어 공식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반대세력을 분쇄했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죽은 뒤 동유럽을 휩쓴 스탈린 격하운동을 봉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확보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1961)에야 동독 정부는 강권통치를 완화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화와 탈중앙집권화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동독은 세계에서 가장 공업화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나 울브리히트는 서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71년 5월 SED 제1서기로 은퇴하게 되었지만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간직했다. 1965년 카롤라 스턴의 〈울브리히트 정치적 전기 Ulbricht : A Political Biography〉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84 - 프랑스의 작가 뒤아멜(Duhamel, Georges) 출생
뒤아멜 [Duhamel, Georges, 1884.6.30~1966.4.13]
프랑스의 작가.
2편의 연작소설 〈살라뱅의 삶과 모험 Vie et aventures de Salavin〉(5권, 1920~32)과 〈파스키에가(家)의 기록 Chronique des Pasquier〉(10권, 1933~44)으로 유명하다. 1908년 이학사학위, 1909년 의학박사 자격을 얻었다. 과학·의학·음악·연극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으며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뒤아멜은 시·희곡·문학비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폴 클로델의 작품에 최초로 관심을 기울인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다. 1906년 크레테유쉬르마른에서 아베이(수도원)라고 알려진 작은 공동체 부락을 설립하는데 참여했는데 공동체의 회원들은 인쇄업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육체노동과 지적인 일을 결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4개월 뒤에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그렇지만 이 모임은 동지애와 사회적 책임의식을 높였으며 이 점은 특히 뒤아멜과 쥘 로맹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선에서 외과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전쟁의 고통과 무익함으로 괴로웠던 경험이 〈순교자들의 삶 Vie des martyrs〉(1917)과 〈1914~1917년의 문명 Civilisation 1914~1917〉(1918)에 기록되어 있다.
1920년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후 주로 사회와 도덕문제를 다룬 소설과 다양한 수필을 썼다. 작품 중에는 5권으로 된 자서전 〈Lumières sur ma vie〉가 있다. 2편의 장편소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많이 반영한 것이다. 〈살라뱅〉 연작에서는 자신을 지탱해줄 종교적인 믿음이 없이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20세기 '작은 인간'의 좌절과 당혹감을 묘사하고 있다. 〈파스키에〉 연작은 1880~1920년대의 프랑스 중산층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서 특히 유머와 호의,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19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860 - 옥스퍼드 논쟁
[오늘의 경제소사/ 6월 30일] <1736> 옥스퍼드 논쟁
1860년 6월30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자연사박물관. 영국과학진흥협회의 정례 토론회에 청중 300여명이 몰려들었다. 토론주제가 진화론이었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 출간 이후 6개월 만에 열린 공개토론. 신문지상을 통해 찬반 논쟁을 벌이던 논객들의 토론회는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포문은 옥스퍼드교구 주교인 윌버포스가 열었다.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청중은 윌버포스 주교의 언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얻은 주교는 진화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댁들의 조상 중에 원숭이가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 원숭이가 할아버지 쪽입니까, 할머니 쪽입니까?'
바로 그 순간, 동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이 저 양반을 내게 넘겨주셨군.' 자리에서 일어난 헉슬리는 주교의 조롱을 맞받아쳤다. '내 조상이 원숭이라는 사실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다만 주교님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점이 부끄럽습니다.'
토론장 곳곳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지고 창조론을 믿는 한 여성은 놀란 나머지 졸도해버렸다. 치열한 논쟁이 오간 토론회가 끝난 뒤 양측은 서로 승리했다고 여겼지만 진화론은 헉슬리를 스타로 만들며 급속히 퍼졌다.
막상 '종의 기원'을 지은 찰스 다윈은 몸이 아파 불참한 이날의 토론은 '창조-진화 논쟁'의 서막이었다. 창조론은 창조과학ㆍ지적설계론으로 발전하고 진화론도 '진화론 자체가 일부 철학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서로 발전하고 있다.
옥스퍼드 논쟁을 통해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헉슬리는 뛰어난 후손도 남겼다. 유네스코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생물학자 줄리언과 '멋진 신세계'의 저자인 올더스, 196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생리학자 앤드루가 그의 후손들이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10/06/29 17:30:34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1006/e2010062917303469890.htm
1817 - 영국의 식물학자 후커(Hooker, Joseph Dalton) 출생
후커 [Hooker, Joseph Dalton, 1817.6.30~1911.12.10]
영국의 식물학자.
식물학 탐사 여행과 연구, 그리고 C. 다윈과 그의 이론을 열렬히 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윌리엄 잭슨 후커 경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1839년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839~43년 영국군함 에레버스호의 남극 탐사에 외과의사 겸 식물학자로 동승했다. 그 이후부터 자신의 탐사여행 결과들을 꾸준히 책으로 출판했는데, 저서로는 〈1839~43년의 영국 탐사선 에러버스호와 테러호의 남극 여행의 식물학 The Botany of the Antarctic Voyage of H. M. Discovery Ships Erebus and Terror in 1839~1843〉(1844~60)·〈히말라야 시킴 지방의 진달래속(屬) 식물 Rhododendrons of Sikkim Himalya〉(1849)·〈뉴질랜드의 식물상 편람 Handbook of the New Zealand Flora〉(1864)·〈영국령 인도의 식물상 The Flora of British India〉(1872~97)·〈모로코와 그레이트아틀라스의 여행지 Journal of a Tour in Morocco and the Great Atlas〉(1878) 등이 있다. 로키 산맥과 캘리포니아로의 마지막 식물학 탐사여행 후에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식물상의 관계에 대한 몇몇 중요한 논문들을 출판했다. 그는 여러 탐사여행중에 새로운 종(種)들을 발견했으며, 이들 중 많은 것이 원예계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은 그에게 식물지리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자료들이었다.
후커는 1851년 식물학자의 딸인 프랜시스 헨슬로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1874년 6명의 아이를 남겨두고 죽었다. 1876년 결혼한 2번째 부인 히야시스 시몬드 자딘과의 사이에는 2명의 아들을 두었다. 1855년 큐 왕립식물원의 부원장이 되었으며 1865년 아버지를 이어 원장이 되었고, 1885년 은퇴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많은 영예를 얻었는데 그중에는 1872~77년 왕립학회의 회장직과 1877년 받은 기사작위 등이 있다. 그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후커의 탐사여행에서 얻은 결과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식물의 지리적 분포와 예외적인 특이한 변이를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다윈의 가까운 친구이자 다윈의 초기 연구를 잘 알고 있던 후커는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 경과 함께 1858년 7월 린네 학회에서 열린 역사적 회합에서 사회를 맡았다. 그 모임은 다윈과 A. R. 월리스가 동시에 발견했던 진화의 메커니즘인 자연선택이론에 대한 우선권을 판결하는 자리였다. 후커는 비과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다윈의 이론을 지지했는데, 그는 진화론이 식물학과 식물지리학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학자였다.
그의 생애에서 절정은 1883년 조지 벤담과 함께 쓴 〈식물의 속 Genera Plantarum〉의 마지막 권이 출판될 때였다. 7,569속과 약 9만 7,000종이 기재된 이 세계 식물지는 언급된 표본들에 대한 개인적인 조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표본들 대부분이 큐 왕립식물원에 보관되었다. /브리태니커
- 키니네 구조 발견 150주년 기념우표. 키니네 구조와 이
를 발견한 펠레티에와 카방투가 도안되어 있다. (예병일)ⓒ
1795 - 프랑스의 화학자 카방투(Caventou, Joseph) 출생
카방투 [Caventou, Joseph Bienaimé, 1795.6.30~1877.5.5]
Joseph Bienaimé Caventou (1795–1877) was a French chemist.
He was a professor at the École de Pharmacie (School of Pharmacy) in Paris. He collaborated with Pierre-Joseph Pelletier in a Parisian laboratory located behind an apothecary. He was a pioneer in the use of mild solvents to isolate a number of active ingredients from plants, making a study of alkaloids from vegetables. Among their successes were the isolation of the following compounds: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Bienaim%C3%A9_Caventou
특효약 키니네(quinine)
말라리아에는 키니네라는 특효약이 존재한다. 1500년경 남아메리카의 페루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이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에게 ‘키나’라고 하는 나무의 껍질을 달여 먹이고 완치시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후 1630년경 유럽에 말라리아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신부들은 곧 키나 나무껍질 분말을 유럽에 보냈다. 그러나 유럽의 왕립의과대학 교수들과 의사들은 의학계 전문가도 아닌 신부들이 보낸 약초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키나를 ‘예수회 분말’이라고 이름을 붙여 경멸하고 그 사용과 유통을 방해했다. 심지어 가톨릭 추기경인 루고가 키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널리 보급하려고 했음에도 의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예병일은 적었다.
1670년대에 영국의 런던과 남부 바닷가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이때 약방에서 조수로 일한 경험이 있는 ‘탈보’란 사람이 키나 분말을 자기가 발명한 말라리아 특효약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복용한 사람들은 백발백중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말라리아 환자에게 키니네를 처방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왕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다. 그는 당장에 탈보를 불러들였고 의사들이 ‘의심스러운 가루’라고 폄하하는 약을 복용한 후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 후 ‘태양왕’이라 불리던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황태자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루이 14세와 친분이 있던 찰스 2세는 탈보를 루이 14세에게 급파했고 황태자는 단시일에 생명을 건졌다.
탈보는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지만 의학계의 높은 장벽을 깨지 못하고 1681년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그의 비방약이 바로 키나 나무임이 밝혀졌다. 1820년에 프랑스의 젊은 의학도 조셉 펠레티에(Pierre Joseph Pelltier, 1788〜1842)와 조셉 카방투(Joseph Caventou, 1795〜1877)가 키나 나무에서 키니네(Quinine)란 유기화합물을 추출하였다.
그 때까지 키나가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의학계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성분과 작용 원리가 밝혀지지 않아 의학계에서 믿을 수 있는 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펠레티에와 카방투가 키나의 비밀을 밝혀내자 비로소 키니네는 전 세계에 보급될 수 있었다.
키니네는 남아메리카에서 자라는 키나 나무에서 채취한다. 그러므로 말라리아가 각 국에서 창궐하자 키니네는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남미산 키나 나무의 수입이 곤란하게 되자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등에서 본격적으로 키나 나무를 심었고 네델란드는 키나 나무를 독점하여 큰 이득을 보았다.
/사이언스타임즈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10585
- 'Battle of Friedland' - 'Battle of Wagram'
- 'Farawell at Fontainebleau' - 'Napoleon with Landscape in the Background'
1789 - 프랑스의 화가 베르네(Vernet, Horace) 출생
베르네 [Vernet, (Émile-Jean-)Horace, 1789.6.30~1863.1.17]
프랑스의 화가.
사냥 장면과 대형 전쟁화를 주로 그렸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전쟁미술관에 있는 그림들이 특히 유명하다. 유명한 화가인 카를 베르네의 아들이자 역시 유명한 화가인 조제프 베르네의 손자인 그는 규모가 큰 그림을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그결과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보나파르트주의자인 그는 나폴레옹 시대를 예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1815년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 그의 화실은 사냥꾼과 예술가 및 작가들의 회합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음모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프랑스군과 함께 지낼 때(1833)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아랍 세계에 대한 그림을 몇 점 그렸다. 그후 그는 루이 필리프와 나폴레옹 3세로부터 베르사유 궁전에 전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786 - 프랑스의 시인 데보르드 발모르(Desbordes-Valmore, Marceline) 출생
데보르드 발모르 [Desbordes-Valmore, Marceline, 1786.6.30~1859.7.23]
낭만주의 시대의 프랑스의 여류 시인.
프랑스 혁명으로 집안이 몰락한 뒤 프랑스 식민지인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로 이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파리로 돌아와, 오페라코미크 극장과 오데옹 극장에 출연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발모르라고 불리는 배우 프로스페르 랑샹탱과 결혼했다.
병으로 무대에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작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가련한 꽃들 Pauvres Fleurs〉(1839)·〈눈물 Les Pleurs〉(1833)·〈꽃다발과 기도 Bouquets et prières〉(1843)와 같은 시들은 가슴에 사무칠 만큼 애절한 비가로 종교와 슬픔, 죽음, 그리고 딸들과 고향 두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산문 〈화가의 작업실 L'Atelier d'un peintre〉은 자서전적인 작품이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그녀의 글을 높이 평가했고, 폴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 Poètes maudits〉(1884)에 그녀의 자리를 마련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인정했다. /브리태니커
- 'Stucco column, detail'
1685 - 독일의 건축가 치머만(Zimmermann, Dominikus) 출생
치머만 [Zimmermann, Dominikus, 1685.6.30~1766.11.16]
바이에른의 바로크 건축가, 회반죽 장식가.
그가 비스에 지은 교회는 바로크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요한 슈무처에게 회반죽 작업을 배워 처음에는 회반죽 장식가로 일했다. 그가 단독으로 설계한 최초의 건물은 뫼딩겐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원 교회(1716~21)로서 바이에른 궁정의 유명한 회반죽 장식가이며 프레스코 화가인 형 요한 밥티스트 치머만(1680~1758)의 도움을 받아 작업한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활동을 2채의 '종합 예술작품'(Gesamtkunstwerke) 건물을 짓는 데 바쳤고 형과 함께 구조 및 장식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했다. 이 두 건물은 모두 순례자 교회인데, 슈타인하우젠에 있는 첫번째 교회는 1727년에 착공되었다. 교회 평면은 타원형이며, 독립적으로 서 있는 10개의 기둥이 치머만 형제의 전형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볼트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이 구조물은 가볍고 경쾌한 구조, 우아한 채색으로 물이 흐르는 듯 물결치는 회반죽 장식과 프레스코 때문에 로코코 양식의 참모습을 띤 첫번째 교회로 여겨지고 있다.
비스에 있는 2번째 교회(1746~54)의 외부는 이보다는 단조롭고 생기 없지만 내부는 훨씬 풍부한 느낌을 준다. 이 교회의 평면 역시 타원이며, 8개의 기둥이 화려한 엔태블러처와 요한 밥티스트의 섬세한 그림과 뚜렷한 로코코 모티프로 장식된 볼트 천장을 받치고 있다. 내부의 특징은 색채를 풍부하게 조화시키고 장식요소를 소용돌이처럼 배치해 종전에 뚜렷이 구별되던 기둥·기둥머리·엔태블러처·볼트의 공간구분을 두루뭉실하게 만든 점이다. 그는 1752년 은퇴한 뒤 비스에 정착했다. /브리태니커
- 'Venus in the Clouds' - 'La Richesse(풍요)'
1649 - 프랑스의 화가 시몽 부에(Vouet, Simon) 사망
부에 [Vouet, Simon, 1590.1.9~1649.6.30]
프랑스의 화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회화를 들여왔다. 1612~27년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자신의 양식을 형성했다. 〈연인〉(로마 팔라초 팔라비치니로스필리오시)과 같은 초기 작품들에서 명암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그가 로마에서 카라바조의 제자로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 브루노〉(1620, 나폴리 체르토사 디 산마르티노)나 〈큐피드와 프시케〉(1637, 리옹 미술관)와 같이 1620년 이후에 그린 작품들에서는 인물을 좀더 이상적으로 표현했으며, 볼로냐파의 고전적인 바로크 양식에 따라 그림을 그린 구이도 레니, 구에르치노, 도메니키노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부에의 〈정복한 시간 Time Vanquished〉(162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카라바조의 명암대조법을 버리고 그의 후기 양식으로 특징지워지는 좀더 고르게 퍼진 흰빛을 사용하고 있다.
1627년 루이 13세의 요청대로 파리에 되돌아와 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뒤 거의 모든 중요한 그림을 의뢰받았으며 15년 동안 파리의 미술계를 지배했다. 생제르메낭레 성(城)의 장식품으로 계획된 〈풍요 Riches〉(1630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와 같은 작품들로 큰 영향을 미쳤다. 구에르치노의 〈오로라 Aurora〉에서 따온 실리 성의 작품과 베로네세에서 따온 세기에 저택의 작품(1640경 완성) 등 남아있는 판화 및 패널화를 보면 그가 이탈리아의 환상적인 천장화를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뷜리옹 저택과 뤼에유의 있는 리슐리외 추기경궁에서도 중요한 작품을 맡았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1640경, 브뤼셀 미술관)와 같은 1630년대초의 종교화들은 한층 발전된 양상과 더불어 절제된 바로크 양식을 보여준다. 〈성모〉(1640경, 잉글랜드 옥스퍼드 애시몰린 미술관)와 〈디아나〉(1637, 런던 햄프턴 코트)는 그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이상적인 모델링과 감각적인 형태 묘사, 밝은 색채의 사용 및 뛰어난 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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