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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과 사건 06.15 (1)

우표로 본 오늘과 사건  06.15 (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2007 - 국내 최초의 산악 연극 ‘안나푸르나’

1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서 개막

국내 최초의 산악 연극 '안나푸르나'가 1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다.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고(故) 지현옥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감독 이미례가 쓴 시나리오를 무대로 옮긴 작품.

네팔 쪽 히말라야 산맥의 한 자락 '안나푸르나'(8천91m)를 배경으로 산에 미친 여성 산악인들의 열정과 우정을 담았다.

국내 산악 영화는 이성재, 김하늘 주연으로 작년 개봉한 '빙우' 등이 있었지만 산악 연극이 선보이는 것은 처음.

에이넷코리아와 코엑스아트홀을 운영하며 연극 '두 여자', '손숙의 어머니' 등에 참여했던 공연제작자 김주섭씨가

7년간 제작자를 찾지 못했던 시나리오의 먼지를 털고 직접 연출한다.

의대를 다니다 산이 좋아 학업을 중단한 강현정과 경제적으로 힘겨운 삶을 살지만 산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큰 윤희서, 베테랑 산악인 공선주 등 3명의 여성 산악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을 지닌 안나푸르나 등반을 준비하며 겪는 갈등과 화해,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얇은 11㎜

자일에 의지해 깎아지른 듯한 산벽을 오르며 벌이는 사투, 자기 자신과의 싸움,

동료를 잃은 상실감 등이 무대에서 긴박하게 펼쳐진다.

배우들은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도달)을 달성한 세계적인 산악인 박영석씨 등 전문

산악인들의 지도로 2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 산이 좋아 산에 모든 것을 거는 여성 산악인의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한다.

또한 실제 산을 연상케하는 세트와 안나푸르나 풍광을 담은 영상을 동원해 안나푸르나의 모습을 재현, 사실감을 높일 예정이다.

연출을 맡은 김씨는 "산악인들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이 거기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에

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면서 "목숨을 걸고 산에 도전하는 이들의 치열한 정신과 순수한 영혼을 그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에게 이번 작품은 28년 동안 미뤄뒀던 연극 연출가 데뷔를 가져다주는 셈이라서 감회가 새롭다.

약관 나이였던 1979년 고려시대 무신의 난을 다룬 연극 '망망대해'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개막

첫 날 10.26 사건이 터지며 공연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던 것.

그는 "그 때 데뷔가 무산된 뒤 어쩌다보니 계속 제작 일만 하게 됐다"면서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연출가 꿈을 이루게 돼 마치 청년시절 처럼 떨린다"고 말했다.

김씨는 2-3년 후에는 이미례 감독에게 제작비를 지원해 '안나푸르나'를 영화로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출연 김보영 정유미 윤현길 조한철 김형주 신철진.

30일까지. 평일 8시(월 쉼), 토 4시ㆍ7시, 일 3시ㆍ6시. 1만5천-3만5천원. ☎02-6000-6790∼1.

현윤경 기자 ykhyun14@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6-01 오전 10:39:56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213237.html

 

연극<안나푸르나>

기    간 : 2007 / 6 / 15 (금) - 2007 / 6 / 30 (토)

시    간 : 평일 8시, 토 4시/7시, 일 3시/6시 (*월요일 공연없음)

장    소 : 자유소극장

가    격 : 1F 35,000원 / 2F 25,000원 / 3F 15,000원

할    인 : 예술의전당 회원 골드/블루 20% 할인 

프로그램

연극 <안나푸르나>는 영화감독 이미례의 원작 시나리오를 연극화한 작품이다. 원작 시나리오의 모티브는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 길에 실종된 故지현옥의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연극 <안나푸르나>의 배우들은

산악인의 열정을 무대에 고스란히 옮기기 위해 실제 전문 산악인의 지도로 암벽트레이닝 과정을 거치며 산악인의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연극 <안나푸르나>는 산을 사랑하고 산에 미친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름 11mm자일에 의지해 산을 오르는

세 여자의 의리와 뜨거운 열정은 남성 산악인 못지않게 뜨겁고 치열하다. 연극 ‘안나푸르나’는

여성 산악인을 통해 산을 향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작품이다.  

출연 및 작가 소개

원작 : 이미례

연출 : 김주섭
각색: 신철진, 김정용, 이유림, 김주섭
출연: 김보영, 정유미, 윤현길, 조한철, 김형주. 신철진(특별출연)

예술의 전당 프로그램 정보

http://www.sac.or.kr/program/view.jsp?prog_id=11062

 

2) 1996 - 미국의 재즈가수 피츠제럴드(Fitzgerald, Ella) 사망   

피츠제럴드 [Fitzgerald, Ella, 1917.4.25~1996.6.15]




미국의 가수.

넓은 음역과 보기 드문 감미로운 음색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녀가 개발한 창법은 1950∼60년대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1935년부터 칙 웨브 악단의 가수로 일하면서 첫 음반인 〈사랑과 입맞춤 Love and Kisses〉을 냈으며, 1940년대에는 솔로 카바레 쇼를 만들었다. 1950년대에는 당시 뛰어난 재즈 흥행가인 노먼 그란츠가 매니저가 되어

더 좋은 노래와 재즈 악기 반주로 뒷받침해주었으며 그녀의 지위는 극적으로 높아졌다. 여러 해 동안 그녀는 필하모닉에서 그란츠 재즈 팀의 최고 인기가수였으며 역사상 성악음반이 가장 많이 팔린 예술가의 한 사람이었다. 1956∼67년 19권으로 된 〈노래책 song books〉을 바탕으로 음반을 제작했는데 그 안에는 후세대를 위해서 리처드 로저스,

콜 포터, 조지 거슈윈, 듀크 엘링턴, 제롬 킨, 어빙 베를린, 조니 머서 등이 작곡한 노래가 250여 곡이나 담겨 있다.

그녀의 발성법은 탁월했으며 가사에 대한 해석은 연구에 의하기 보다는 직관적이었다.

피츠제럴드는 트럼펫이나 색소폰 연주자처럼 가수가 뜻 없는 소절들을 가사로 이용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스캣' 창법을 완벽하게 구사했는데, 이 창법이 남녀 가수 사이에 널리 퍼졌다.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같은 녹음 연주에서

그녀는 현대 호른 연주자의 상상력과 솜씨를 스캣 창법으로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그래미상을 수차례 받았고,

1979년에는 평생의 업적으로 케네디센터 표창장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미국 예술훈장을 받았다.

 

3) 1946 - 조선해안경비대 발족

대한민국 해군 연혁

1945.11.11 - 해군의 모태인 해방병단 결단(해군 창설일)

1946.06.15 - 조선해안경비대 발족

1948.08.15 - 정부수립과 함께 해군으로 정식 출범

1949.04.15 -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 창설

1950.09.15 - 인천상륙작전

1950.10.25 - 제1소해정대 창설

1965.03.15 - 파월 비둘기부대 해군수송분대(별칭: 백구부대) 창설

1965.09.20 - 청룡부대 창설

1965.10.03 - 청룡부대 부산항 출발

1965.10.09 - 월남 캄란만에 상륙

1967.04.03 - 해군수송분대가 해군수송전대로 개칭




                    1)                                         2)                                      3)

  

1) 1994 -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북한 방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6월 15~18일까지 나흘간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강조하면서, 북한이 현 시점에서 핵 시설를 동결하고

추방 예정인 IAEA 사찰관 2명의 잔류를 허용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카터는 귀국길에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일성이 요청한 '남북 정삼회담' 제의를 전달했다. 김 대통령은 불과 1시간만에

조건없는 정상회담의 수락을 발표했지만,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됐다.

The DailyNK 자료실 2005-06-22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300&num=7432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핵 1차 위기 당시인 1994년 6월에 북핵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해서 김 전주석을 만났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방송에서, 당시 주한 미군의 게리 럭 (Gary Luck) 사령관은 만일 “북한이 미국의 공격에 대응하게

되면 거의 하룻밤 사이에 남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숨질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은 북한행을 결정했던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은 클린턴 행정부 관리들을 만나 한반도 상황에 대한 평가와 충고를 듣고

평양으로 향했었다고 말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시 김일성 전주석과 만나 북한의 원자로 활동 중단과 핵확산 방지조약 재가입을 대가로 경수로를 건설해주는 내용의 합의를 이끌어냈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합의 도출과 관련해서,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그렇게 훌륭한 합의가 도출될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었다고 말하고, 이때문에 자신이 김일성 주석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고

김 주석은 자신의 발언내용을 조목조목 모두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 voanews.com 2006-09-15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6-09/2006-09-15-voa3.cfm?moddate=2006-09-15 

 

2) 1977 - 월성원자력 1호기(67만8,700kW) 기공식

시설용량 67만 8700 kW. 1976년 1월에 착공, 87개월 만인 1983년 4월에 예정대로 준공한 이 발전소는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에 이어 두번째 한국에 등장한 것으로, 캐나다에서 개발한 가압관식 중수형 원자로()를 설치했다.
(월성 원자력 1호기 상업운전일 - 1983. 04. 22)

 

3) 1944 - 미국군, 사이판섬 상륙작전 개시

마리아나해전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 북마리아나 제도 해역에서 미국 함대와 일본 함대 사이에 벌어졌던 해전.
사이판섬 상륙작전 지원을 위한 미국 기동부대와 마리아나 수비를 위해 파견된 일본의 제1기동함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2월 이래 트럭(Truk) ·사이판 ·팔라우(Palau) 방면의 일본군 기지를 항공기로 급습하였으며, 6월 11일 마리아나 해역에 출동하여 공습을 반복한 끝에 15일에는 3개사단의 병력을 투입하여

사이판섬에 상륙을 개시하였다. 일본은 항공모함 9척, 전함 5척을 기간으로 한 제1기동대가 필리핀으로부터 출동하여

19일 스프루안스 대장 지휘하의 항공모함 15척을 기간으로 한 4군(群)의 미국 기동부대와 사이판섬 앞바다에서 2일간의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됨으로써 일본의 연합함대는 큰 타격을 받았고

사이판 ·티니안 ·괌 등의 섬들이 미군 점령하에 들어가 B29에 의한 일본 본토 폭격의 기지가 되었다.

 

2002 -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崔泓熙) 사망

최홍희 [崔泓熙, 1918.11.9~2002.6.15]

최홍희(1918년 11월 9일 ~ 2002년 6월 15일)는 함경북도 명천출신으로 태권도의 창시자이다.

항일 투쟁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1955년청도관에서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으로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1961년부터 6 군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59년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다.

1961년, 논산 육군훈련소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박정희와 쿠데타를 논의하였으나, 쿠데타 성공 후 소외되어

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였다.1966년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한 후 총재로 취임하였으며,

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한 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고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하였다.

2002년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 위키백과

 

최홍희 약력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국 허가면 화대리에서 출생했다.
1929년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퇴학을 당하고 귀국했다가
1937년 다시 일본으로 가서 가라데를 배우게 된다.
1941년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군에 징집당해 평양 제 30보병사단에서 근무하던 중 ‘평양학병의거’로 일본군에 저항한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 8·15 광복으로 출감한 후 이듬해 1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육군창설활동을 한다.
1953년 육군 제29사단 창설하고 사단장이 되어 교관양성에 태권도(당시 명칭은 당수도)를 최초로 군대에서 교육하게 된다.
1955년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해 ‘태권도’라는 명칭을 최초로 인가받아 사용하게 된다.
1959년 19명의 사범으로 구성한 시범단을 이끌고 아시아 국가를 순회시범 한다.
1959년 9월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이 된다.
1965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고
1966년 3월 22일 지금의 ITF를 창립한다. 이후 1972년까지 당시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와 ‘당수도’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해 대한태권도협회가 대한태수도협회로 변경하는 등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낸다.
1972년 사범 몇 명을 이끌고 캐나다로 망명한다. 이렇게 해서 ITF 본부가 캐나다 토론토에 있게 된 것이다.
1974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연다. 최홍희 총재는 해외에서 태권도 보급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한다.

그의 생각은 ‘태권도는 한국에서 생겼으므로 무도정신을 잘 이해하고 교육할 사범은 한국 사람으로 한다’는 신념 때문에 교포들을

대상으로 사범양성을 하지만 인적자원의 한계를 느낀다. 이때 뜻밖에도 북한 당국에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1980년 최홍희씨는 최중화(현 ITF 총재)씨를 포함한 사범 15명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태권도

보급과 지원을 하기로 약속한다. 이때부터 ITF는 친북단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1985년 IOC위원총회 개막행사에 참석하여 WTF와 별도의 ITF 승인을 요구했다.
1986년 북한 시범단을 구성해 중국을 방문했다.
1987년 그리스에서 제5회 세계선수권대회 개최
199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원본에 태권도 창시자로 ‘최홍희’를 명기했다(Vol 11. 491p.)
2001년 ITF 기술체계 완성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타계(향년 84세)
2002년 11월 최중화를 ITF 총재로 선출(아르헨티나 정기총회)

(자료- ITF 대한태권도연맹).

http://www.dragon5.com/news/news2004092315.htm

 

2000 - '6. 15 남북공동선언' 발표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 사흘째를 맞은 2000년 오늘, 남과 북의 최고 지도자가 6.15공동선언문을 공식발표한다.
남·북한의 두 정상이 전날 오후 백화원 영빈관에서 3시간 50분에 걸친 마라톤 회담에 합의한 5개항을 담은 선언문이다.
두 정상은 이 선언문에서 남과 북이 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협력,

그리고 사회·문화·체육 등 여러 분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다짐했다. -YTN

남북 공동선언문 (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김대중대통령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국방위원장2000년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2000년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통일 방향

합의안 두 번째 안에서 보듯 남측의 연합 단계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공통점이 있다며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했다. 남한 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 중 1단계인 ‘남북연합’은 남과 북이 독립국가로서

협력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골자다. 남북연합 정상회의, 남북연합회의(국회), 남북연합 각료회의 등을 통해 교류를 넓혀

가는 단계를 말하며, 국방 및 외교권은 남북이 각각 소유하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창하며 ‘완전한 고려연방제’달성 앞서서 잠정적으로 지역 정부에 국방과

외교권 등까지 부여하는 것으로 북한의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는 같으나 ‘1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 안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일정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위키백과  

 

1995 - 불가리아 출신 미국의 물리학자 아타나소프(Atanasoff, John) 사망  

1세대 컴퓨터 (진공관의 시대)

미국 아이오와주 에임스市에 위치한 아이오와 주립대학(Iowa State College)의 수학 및 물리학교수인 아타나소프(Dr. John Vincent Atanasoff)는 20명의 석사 및 박사 과정 학생들의 수학계산을 도와줄 계산장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당시 구할 수 있던 각종 기계식 계산기를 살펴본 아타나소프는 자기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대신 그의 문제를 풀어줄 것은 전자공학에 기초한 디지털 계산기의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타나소프는 자신이 직접 기계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4년 IBM의 천공카드를 개조하여 계산을 기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었다. 그는 기계의 논리회로를 설계하면서 많은 난관에 만났지만 몇 가지 아이디어는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생각했던 기계를 완성하지 못한 채 좌절에 빠지게 된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의 겨울, 설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좌절에 빠진 채 미시시피 강을 건너 일리노이 주로 차를 몰던 그는 잠시 음료수를 마시려고 노변의 자그마한 술집에 차를 세웠다. 나중에 그는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 실험실 속에서는 전혀 생각나지 않던 컴퓨터 메모리와 부수 논리들의 아이디어들을 이 조그만 술집에서

 떠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아타나소프는 그 날 밤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에 대한 기본개념을 정리하게 된다.


1939년 실험실로 돌아온 아타나소프는 대학원생이었던 그의 조수 클리포드 베리(Clifford Berry)와 함께 원시 컴퓨터인 ABC의 설계를 끝내고 내부소자로 진공관을 사용하여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기계를 '아타나소프-베리-컴퓨터'의 약칭으로 ABC라 불렀으며, ABC는 범용컴퓨터가 아닌 선형대수방정식을 푸는

특수목적의 컴퓨터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ABC 는 약 300 개의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논리회로와 입력장치인 천공카드 판독기, 이진 비트를 저장하기 위한 자기드럼 메모리로 구성되었다. 또한, ABC는 전자공학, 재생식 메모리, 논리작용에 의한 계산, 이진수 체계 등 오늘날의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기본 개념을 구현한 최초의 컴퓨터로 기록된다.
실제 ABC의 존재는 1973년에 있었던 ENIAC 특허와 관련된 소송에서 처음으로 일반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아타나소프의 디지털 컴퓨터 이론은 에커트와 모클리에게도 영향을 끼쳐, 이들이 ENIAC을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아타나소프는 최근에 와서 "디지탈 컴퓨터의 아버지"로 추앙될 만큼 컴퓨터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HardWare Specialist Group-HARDWARE Lab [2002-08-17 18:13:18]
http://www.hwlab.com/computer_history.php?code=9447

 

컴퓨터의 아버지는 누구?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계산하는 기계를 처음 생각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인 배비지(1792-1871)였다.

그는 1822년 표계산하는 소형 미분기를 발명한 바 있다. 그해 6월 왕립천문학회에 참석한 그는 최초의 자동계산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장담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했다.
배비지의 생각을 처음 실현한 것으로 흔히 1944년 하버드대학 교수인 에이킨(1900-1973)이 만든 ‘마크 1호’를 꼽는다.

평소 배비지의 정신적인 후계자임을 자임했던 그는 IBM과 더불어 대형계산기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마크 1호는 비록 전기기계 방식의 컴퓨터였지만, 프로그램에 의해 훌륭하게 계산을 해냈다. 마크 1호의 성능은 4명의 전문가가 3주 걸려야 풀 문제를 19시간 만에 해결하는 정도.
최초의 진공관 컴퓨터는 1946년 2월에 공개된 에니악(ENIAC). 1만7천여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30t의 괴물인 에니악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모클리(1907-1980)와 에커트(1919-)가 미육군의 포탄과 미사일의 탄도계산을 하기 위해 발명했다.

에니악은 훗날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다. 에니악의 결점은 기억장치가 없다는 것. 이러한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역사는 그동안 일급비밀로 감춰졌던 영국의 콜로서스가 공개됨에 따라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아타나소프(1903-) 교수가 자신이 최초의 컴퓨터 발명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1937년 컴퓨터에 관한 몇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 중에는 컴퓨터의 부품으로 진공관같은 전자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메모리와 2진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담겨 있다. 그는 전기기계식방식이 1초에 수백번밖에 점멸할 수 없지만, 진공관은 1초에 수천번을 깜빡거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처음으로 메모리라는 말을 사용했고, 전기회로의 점멸을 1과 0으로 나타냈다.
아타나소프는 1939년 11월 제자인 베리와 함께 ABC(아타나소프와 베리의 컴퓨터)라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컴퓨터는 3백개의 진공관과 메모리 충전장치까지 갖췄지만, 옆에서 카드천공기를 돌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약점을 지녔다.

여하튼 아타나소프는 1950년대 초반부터 ‘누가 최초인가’를 놓고 에니악의 특허권자에 시비를 걸었다.

결국 이것은 법정소송으로 번졌으며 1973년 10월에야 결말이 났다. 승리자는 아타나소프였다.
한편 지금까지의 얘기를 뒤집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독일의 콘라트 쥬제(1910-)이다. 그는 1938년 2진법 연산장치, 메모리 숫자 명령 등의 흐름을 관리하는 제어장치, 천공테이프에서 명령을 읽을 입력장치, 결과를 보여주는 출력장치를 갖춘 ‘Z1’이라는 컴퓨터를 완성했다.

한편 그는 1945년 ‘플란칼쿨’이라는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홍대길 기자 heart@donga.com -동아사이언스 정보마당 1999년 05월 01일

http://www.dongascience.com/info/contents.asp?mode=view&article_no=20070911100012  

 

1973 - <직지> 보다 앞선 금속활자본(?) 발견
1973년 6월 15일자 인쇄문화시보는 세계 금속활자 역사를 다시 쓸만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얼마전 작고한 전 충남대 윤병태 교수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발견한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이 그것이다. 당시 인쇄문화시보에 실린 윤병태 교수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이 책에 나와있는 ‘중봉대부 숭복사 별불하’라는 문구를 통해 ‘중봉대부’는 고려 충렬왕 때만 나오는 벼슬이며 ‘별불하’는 원나라의 신하로 1297년에서 1298년에 고려를 다녀간 신하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책의 간행년도가 1297년에서

1298년 사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쇄문화시보에는 당시 천혜봉 교수와 손보기 교수 등도

이 문서를 확인하고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간주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학계에서는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의 금속활자로 간행된 페이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 ‘직지’의 경우처럼 정확한 간행년도가 없기 때문에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는 윤병태 교수가 발견한 한 권의 책과 ‘1531년 송광사’라고 간기가 적혀 있는 또 다른 한 권 등 총 두 권의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이 보관되어 있으며, 윤병태 교수가 발견한 문제의 책에 대해 ‘판 차 木板本, 壬辰(1592)前 刊本이며, 跋 1面은 活字版 같음’이라고 적고 있다.

2004년 6월호 (24호)

 

1970 -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 시속 2,443km 기록

소련의 초음속여객기(SST)는 TU-144로서 투폴레프개발그룹이 기체를, N.G. 쿠즈네초프그룹이 엔진을 담당하여

1호기는 콩코드보다 앞선 1968년 12월 31일 처녀비행을 하게 되었고, 1969년 6월 5일 음속을 넘었으며,

1970년 5월 26일에 마하 2.0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3년 6월 3일 파리에어쇼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기술적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 기술진의 지도를 받았는데, 약 100편의 정기운항을 마친 뒤 운항을 중지하고 결국 계획이 포기된 것으로 보고 있다.

http://dic.paran.com/wing_frame.html?url=http%3A%2F%2Fdic.paran.com%2Fenc_view.php%3Fkid%3D18685900

 

초음속 여객기 TU-144 연혁

1968-12-31 - 첫번째 시험비행 성공

1969-06-05 - 음속 돌파

1970-05-26 - 시속 2,150km(마하 2) 기록

1970-06-15 - 시속 2,443km 기록

1971-07-01 - 양산형 TU-144S 첫 비행

1973-07-03 - TU-144S 파리 에어쇼에서 공중분해 사고

1975-12-26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화물과 우편물 수송)

1977-11-01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1978-06-01 - 추락사고 발생하여 여객기로 운항을 금지

 

1969 - 프랑스 대통령에 퐁피두 선출

조르주 장 레이몽 퐁피두(프랑스어: Georges Jean Raymond Pompidou) 1911년 7월 5일 - 1974년 4월 2일)는

캉탈 주 몽부디프 태생으로 196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74년까지 재임한 프랑스 국민연합(우파)소속의 프랑스 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 대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샤를 드골 정부하에서는 총리를 역임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드골의 후계자로서 등장하였으나, 드골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보다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외교적으로는 영국유럽공동체 가입을 이끌었으며, 산업화 계획과 유럽공동의 로켓발사계획을 주도할 프랑스 기업

아리안스페이스등에 출자하였다. 그가 임명한 총리 자크 샤방델마가 추진한 68혁명후의 정치슬로건인 새로운 사회계획에 회의적이었으며, 정부의 언론통제완화등의 정책은 드골주의를 표방하는 우파로부터 비판을 당하는등 갈등을 빚게 되었다. 퐁피두는 결국 후에 그를 경질하였다. 그러던 중 퐁피두는 예기치 못하게 희귀질환인 매크로글로브린혈증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궐위된 대통령직은 상원의장인 알랭 포에르가 임시로 대행하다가, 대통령 선거에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당선되어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기간 : 1969년 6월 15일1974년 4월 2일)

 

1966 - 아이젠하워, 레이건 지지 선언
1966년 오늘,

미국 34대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가 미국 영화배우협회장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한다.

레이건은 얼마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때였다.

아이젠하워는 레이건의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높이 평가하고 그야말로 차세대 미국의 지도자 감이라고 추켜세웠다.
아이젠하워의 지지선언으로 큰 힘을 얻은 레이건은 실제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계 진출에 확고한 발판을 구축한다.

레이건은 1980년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을 물리치고 제40대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1962 - 한국-파라과이 국교수립

한국과 파라과이 양국은 1962년 6월 15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76년 3월 21일 주()파라과이 대한민국대사관을 개설하였다.

파라과이는 친서방 국가로, 전통적으로 한국에 대해 우호정책을 취해왔으며 각종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북한과는 외교관계는 물론 일체의 공식적 관계가 없다가 1989년 안드레스 로드리게스(Andres Rodriguez)가

집권한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북한과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파라과이는 1965년 최초로 한국인의 농업이민을 수용하였으며 2000년 1월 현재 교민수는 약 10,000명이다.

이들 교민은 주로 아순시온에 거주하며 교민단체로는 4개의 한인회를 비롯해 재()파라과이 한인교육문화재단,

예연회, 한인상공인연합회, 파라과이 한인무역인협회 등이 있고 여러 개의 한글학교가 있다.

 

1954 - 제네바회담에서 한국참전 16국 공동성명

휴전협정 제60항에 의거하여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대한민국과 유엔군측의 16개 참전국,

그리고 공산군측의 북한 ·중공 및 소련 등 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과 유엔군측 참전 16개국은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그 결과에 의하여 통일독립된 민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주한 유엔군은 이러한 목포가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오로지 주한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고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시켰으며, 회담은 같은 해 6월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3WSGL 

 

1954 -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창립

한국자유총연맹은 1954년 6월 15일 아시아민족반공연맹으로 출범하여 2005년 창립 51주년을 맞는

우리나라 유일의 이념운동단체다.
연맹은 창립이래 자유민주주의를 옹호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 및 홍보, 대국민 캠페인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열린마음 열린사회’, 사랑의 연결고리 잇기‘ 등 각종 봉사활동을 통해 국민과 함께 더불어사는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국민안보의식 고취활동에 진력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 참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필수적인 민주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과 탈북자를 초청해 매년 안보 강연회도 실시하여

화해와 공존이라는 세기사적 흐름에 동참하여 대북 지원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박은심 기자 2005-02-24 - 대구인터넷방송

http://inews.org/Snews/NewsWide/ArticleShow.php?DomainNo=452&NewsNo=10943&Code=1120 

 

1946 - 조선올림픽위원회 발족, 초대 위원장에 여운형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1946년 6월 15일 조선올림픽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어, 1947년 6월 20일 제40차 IOC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에서 IOC의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48년 1월 30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고, 1948년 런던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1952년 핀란드 헬싱키하계올림픽에는

6·25전쟁중임에도 참가하였다. 1964년 자체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한체육회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사단법인체로 재출발하였으나, 1968년 체육단체의 일원화시책에 따라 대한체육회의 산하기구로 편입되었다. - naver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연혁

1946.06.15 - 조선올림픽위원회 창설(위원장 여운형) 

1947.06.20 - 제40차 IOC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 IOC 정식회원 가입

1948.01.30 - 제5회 동계올림픽 출전(스위스)

1948.07.29 - 하계올림픽(영국) 처음 선수단 파견

1952.07.19 - 하계올림픽(핀란드) 참가

1964.09.08 - 대한체육회 분리 독립된 사단법인으로 재출발

1968.03.01 - 대한체육회 산하기구로 편입(위원장 민관식) 


 

1942 -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 출판

1934 - 히틀러-무솔리니 첫 회담, 오스트리아 처리 논의

 

1919 - 최초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 성공

1907 - 제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헤이그)

 

1889 - 루마니아의 시인 에미네스쿠(Eminescu, Mihail) 사망
1888 - 멕시코의 시인 로페스 벨라르데(Lopez Velarde, Ramon) 출생    

1849 -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Polk, James K.) 사망


1843 -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Grieg, Edvard) 출생
1792 - 오스트레일리아의 측량감독관 미첼(Mitchell, Thomas L.) 출

1752 - 프랭클린, 번개가 전기현상임을 실험 


 

1542 - 영국의 해군 사령관 그렌빌(Grenville, Richard) 출생
1389 - 세르비아-오스만 제국 간의 코소보 전투
1215 - 영국 존 왕, 귀족들의 압력을 받고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